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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장

명의 역대 황제
초대 태조 홍무제 주원장 2대 혜종 건문제 주윤문

묘호 태조(太祖)
시호 개천행도조기입극대성지신인문의무준덕성공고황제
(開天行道肇紀立極大聖至神仁文義武俊德成功高皇帝)
연호 홍무(洪武)
주(朱)
원장(元璋)[1]
국서(國瑞)
생몰기간 음력 1328년 9월 18일 ~ 1398년 5월 10일
양력 1328년 10월 21일 ~ 1398년 6월 24일 (71세)
재위기간 음력 1368년 ~ 1398년 5월 10일
양력 1368년 ~ 1398년 6월 24일 (30년)

의 건국자. 묘호는 태조 고황제. 연호를 붙여서 홍무제라고도 불린다.
중국 역사속 대표적인 의심의 아이콘이자 토사구팽의 끝판왕
중국 역사, 아니 전 세계 역사를 찾아봐도 비할 인물을 찾아 볼 수 없는 자수성가계의 레전설
혹은 간나 새끼

Contents

1. 명 건국 이전
2. 명 건국 이후
3. 사후 후계자 다툼
4. 외모
5. 그 외 뒷 이야기들

1. 명 건국 이전

중국 난징 지방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명은 중팔(重八)[2]이었다. 태어난 시기가 나라 말기로 국가 사회 자체는 막장일로를 걷고 있고, 심한 기근에 각지에서 도적들이 들끓으면서 어릴 때 꽤나 고생하였다. 결국 계속되는 기근에 부모님을 잃고 어떻게든 먹고 살기 위해서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탁발승 노릇을 한 적도 있다.

탁발승을 하면서 중국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비참한 실상을 직접 보고 체험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곽자흥 휘하의 홍건적에 가담[3]하였는데 그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여튼 1352년 전후로 추정하고 있다. 처음에는 일개병졸에 불과했지만, 공훈을 세우면서 승승장구하여 실력으로 곽자흥 군단의 2인자의 위치까지 오른다. 이 과정에서 곽자흥의 양녀(마씨)와 결혼을 하여 사위가 되었는데, 곽자흥이 주원장에게 상서로운 기운이 있어서 사위로 삼았다는 설과 주원장의 능력을 질시하고 두려워하여 사위로 삼았다는 설이 있다.

1355년 곽자흥이 죽자 반란군의 지도자로 추대되었으며, 1356년에 난징을 점령하면서 사실상 남부지방에 할거하던 군웅의 한 세력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특히 여러 지역을 공격하면서 만난 지식인과 사대부들과 교류를 하면서 그들의 조언에 따라 세력을 운영하였으며, 이들을 기용하여 효과적인 행정정책을 수립하며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에게서 중국어와 중국역사, 각종 지식, 유교경전을 배우면서 사실상의 제왕수업을 받는다. 이 시기까지 주원장은 상당한 세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스스로를 오국공(吳國公)이라 칭했을 뿐이며, 홍건적의 우두머리이자 의 후계자를 자칭하고 있던 한림아의 신하에 머물러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주원장은 원나라와는 별로 많이 싸우지도 않았다. 오히려 주원장은 다른 한족 세력들과 다퉜을 뿐, 원나라와의 다툼은 다른 한족세력들에게 내버려뒀는데 이게 득이 되었다. 원나라를 뒤엎을 정도로 강력한 세를 가졌던 홍건군의 유복통이 차칸테무르에게 캐발린 뒤에 주원장의 세력이 원나라의 사정거리 안에 들게되었지만 운좋게도 차칸테무르가 원 내부의 내분에 휘말려 남하를 못하게 된 덕에 주원장은 안심하고 진우량과의 결전을 준비할수 있게 되었다.

파양호 대전에서 승리한 후, 1364년 최대의 적이었던 진우량의 세력을 격파하고 그 영역을 흡수한 후에는 스스로 오왕임을 선포하였고 1367년 몽골족의 위험에서 한림아를 보호하기 위해 난징으로 모시고 오던 중에 주원장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것으로 추정되는 침몰사고로 한림아가 익사하고, 또다른 적수였던 장사성이 생포되면서 사실상 남부 지방의 패권을 휘어잡게 되었다.

이후 서달상우춘에게 25만 대군을 주어 북벌을 단행하고, 1368년 초 신하들의 권유를 받아 스스로 의 황제가 되었음을 선포하였다.

2. 명 건국 이후

1368년 여름에 원나라의 수도 대도(현재의 베이징)를 점령하고 정부를 완전히 중국에서 밀어내면서 중국 북부의 주요지역을 장악하였지만, 그 뒤로도 계속해서 중국 각지에 남아 있는 몽골족의 잔여세력과 끊임없이 전쟁을 해온 까닭에 실질적으로 중국 전지역을 완전히 통일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1382년이 되고 나서였다. 수도도 지금의 북경이 아니라 남경에 있었는데, 명나라는 중국 역사에서 최초로 강남에서 들고 일어나 전국을 장악한 최초의 왕조였다. 중국 대부분을 장악한 것은 훨씬 전이지만 1382년을 기점으로 잡는 이유는 이때부터 확장을 멈추고 수비로 돌아섰기 때문이다.[4]

여튼 명나라 초기에는 몽골족과 싸우면서 착실하게 원나라 말기 막장이 되었던 사회기강을 바로잡고, 행정체제를 정비하면서 명나라의 기틀을 닦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원나라 시기에 있었던 과거제도를 철저하게 시행 및 감독하여, 유능한 인재들을 관료로 등용하려 하였다.[5] 특히 어렸을 적 고생의 영향으로 탐관오리의 부정부패를 끔찍하게 싫어했기 때문에 관료들의 기강을 철저하게 단속하였으며, 오랜 혼란으로 황폐화된 토지개간을 장려하여 농업생산력을 끌어올리며 사회를 안정시켰다.

이러한 치적으로 백성들 사이에서는 명군이란 평가를 받기도 하였지만 신하들 사이에서는 폭군이란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이는 한의 고조 유방과 자웅을 겨룰 정도로 개국공신들을 족쳤기 때문이다. 개국 3대공신으로 추앙받는 서달, 유기, 이선장 등이 비참한 말로를 겪었으며 그나마 살아남은 공신이 거의 없을 정도로 족쳤다.[6] 게다가 신하들의 사소한 잘못에도 노발대발하면서 두들겨 패는 일이 잦아서[7] 더더욱 심했다.

다만 백성들에겐 명군인데 신하들에겐 폭군이라고 엇갈린 평가를 받는 이유는 아무래도 역사를 쓰는 사람들이 신하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도자의 권력 한계상 백성과 신하 둘 중 하나만을 챙길 수밖에 없는데, 신하들은 자기들이 잘 살아야 태평성대라고 봤기 때문이다.[8]

특히 군주의 전제권을 최우선으로 삼았기 때문에 걸핏하면 공신들이 죽어나갔다. 숙청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인데 명나라 건국 이후 죽어나간 공신과 그 가족들의 수는 수만명에 이른다. 주로 초창기에는 공신들 중에서도 무장들이 많이 숙청되었으며, 말기로 갈수록 행정체제가 점점 정상궤도에 접어들자 권신들을 숙청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어느 숙청때는 10,000명이 넘게 죽어나가서 황태손이 직접 제발 사람 좀 죽이지 말아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그러자 주원장은 황위는 가시 나무 몽둥이 같은 것이니, 자기 생전에 가시들을 다 제거해주려고 이런 짓을 한다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다.[9]

가장 유명한 것으로 좌승상 호유용을 비롯한 3만여명의 권신들과 그 일가족이 처형당한 사건인데, 이를 계기로 재상제도를 폐지하고 중서성을 황제의 직속으로 두는 황제 친정체제를 구축하였다. 여기에다가 황자들을 번왕으로 책봉하여 각 지역에 보내서 모든 것을 황제의 밑에 두었다. 다만 번왕들은 백성을 직접적으로 통치하진 않았고, 그냥 국경관리만 맡았다. 당연히 자기들끼리 군사를 키워서 쳐들어오지 않을까 하여 장수들을 버리고 친족들에게 맡긴 것. 그랬는데도 불구하고...[10]

역사적으로 번왕제도가 사후에 제위 계승권을 놓고 다툼이 벌어진다면서 일부 신하들이 거두어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주원장은 주청한 신하들을 족치고 그대로 강행하였다.[11] 대신에 아들들을 모아놓고 "늬들을 임명하는 것은 그만큼 신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하들의 이야기 역시 사실이니깐, 마음깊이 잘 새겨두고 나중에 형의 핏줄이 계승한 중앙정부와 협력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라"라면서 은근한 협박 기술을 시전하였지만...

주원장의 방침이 관료들은 황제의 통치를 위해 쓰다가 버리는 도구 정도로 봤기 때문에 사대부나 권신들이 크게 반발을 하였다. 하지만 반발했던 권신들은 죄다 찍어눌렀고, 그럴만한 가능성이 있는 권신들도 죄다 죽어나갔기 때문에 나머지는 그냥 버로우해버렸다.

이러한 숙청은 그의 후대 황제들이 신하들에 좌지우지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고, 아예 황후를 중심으로 한 외척세력이나 환관들이 정치에는 얼씬도 못하게 만드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정도가 너무 심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 이 영향으로 홍무제의 황실 공식 어진은 위에 나온 것처럼 상당히 선하고 어진 임금의 인상이지만, 사대부 쪽에서 그린 어진은 아래에 나오는 것처럼 흉악한 폭군(…)이나 다름없다. 이렇게까지 한 것에는 어렸을때 그런 막장테크를 직접 체험한지라 벼슬아치(혹은 높은신 분들)에 대한 혐오감일 수도 있다... 고 카더라. 그의 숙청으로 수많은 개국공신들이 죽었는데 숙청 이전에 전사하거나 병사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목영, , 병문, , 장룡, 고성만이 숙청을 피했고 이들 중에 경병문, 곽영, 고성은 정난의 변에도 관련된 인물[12]이다. 여기에 지나치게 만연하게 늘어지던 문장을 탄압하고 실용적이고 간소한 문장을 지향하며 관리들을 처벌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문자의 옥 마냥 여러 꼬투리를 잡아 문사들을 죽이거나 탄압하고, 죄 없는 사람들까지 여럿 희생시킨 점은 비난받는다.[13]

이러한 점은 외교관계에도 적용되어 주원장 시절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는 험악해져 갔다. 조선의 왕 이성계는 상당한 무공을 세운 명장이였고 명 건국 이후 철령위 설치 등의 문제로 인해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 여기에 정도전이 사병 혁파를 위해 군제 개혁을 벌이는 것이 주원장을 자극해 매우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었고 정도전 파 사신들이 명에서 모욕을 받거나 사사당하면서[14] 급기야 양 국간 무력충돌로 발전될 기미까지 보이기 시작한다. 물론 주원장과 정도전이 죽으면서 명과 조선의 관계는 우호적으로 변한다.

지나친 숙청으로 명대부터 황제의 권한을 견제할 수 있는 신권(臣權)의 위력이 송대에 비해 줄어들었고 이는 암군과 환관들의 발호, 등의 악영향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비판받는다.[15]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했는데 난 그 사실을 몰랐어 다만 환관이 날뛰는 것은 아들 영락제의 중용 때문이고, 홍무제는 환관들도 찍어누르며 관직 임용에 제한을 가했으며, 후대에는 자신과 같은 가혹한 형벌을 관리들에게 가하지 않게끔 조치하기도 하였다.[16] [17]

3. 사후 후계자 다툼

원래 장남인 주표가 태자로 책봉되어 후계자로 공인되어 있었으나, 주원장은 넷째 아들인 주체에 대한 호감을 은근히 비추고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주원장은 "공신들은 닥치고 버로우!"로 일관하고 있었고, 그에 대한 반발 심리였는지 태자는 공신들을 옹호하는 입장이었으며, 상당히 유약한 성격이었다고 언급되고 있다. 그래도 후계자를 갈아버리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장자계승 원칙을 지키기 위함으로 추정된다.

결국 의문태자는 아버지보다 일찍 죽었는데, 아버지의 막나가는 숙청으로 인해 마음고생이 심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이에 따라 4남 주체가 태자로 책봉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대두되었지만 장자계승 원칙을 지켜 장손인 주윤문을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이로 인해 연왕으로 책봉되어 베이징에 머무르고 있던 주체가 상당히 격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1398년 주원장이 숨을 거두면서 손자 주윤문이 건문제에 올랐지만, 1402년 연왕 주체가 조카를 쫓아내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이 사람이 바로영락제로, 정화의 해외원정과 몽골원정, 북경 천도 등을 단행한 황제이다.

4. 외모

조춘?

어진이 서로 다른 두가지 얼굴로 그려졌다는 특징이 있는데, 못생긴 초상화 말고도 조작된 혹은 황제에게 아부하려고 후덕하게 잘생긴 초상화도 있다. 그러나 기록[18]을 볼 때는 이쪽이 더 사실이 가깝다고 한다. 반면에, 요즘 기준으로 못생기게 보이는 초상화가 오히려 당시 기준에는 귀와 코가 크고 턱이 튀어나온 것은 오악과 같고, 얼굴의 곰보자국은 하늘의 72 별자리와 같아 천하영웅의 상에 부합하는 것이라 하여 잘생긴 초상화가 사실에 가깝고 못생긴 초상화가 프로파간다용이라는 주장도 있다.[19]

여담으로 이 두 초상화는 언듯 보면 굉장히 달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목구비와 수염의 형태는 거의 똑같다. 정형화된 형식이 다를 뿐, 같은 얼굴을 묘사한 것이 맞는 듯 하다.

5. 그 외 뒷 이야기들

  • 명이 원의 뒤를 이어 중원의 패자가 되었고, 철령 이북 지방은 원나라의 땅이었으니 당연히 명나라의 땅이 되어야 된다고 외교질했다가 고려하고 관계가 악화되어 요동 정벌 직전까지 가서 고려가 정벌군을 보내 전쟁이 날 뻔 했다. 결국 이로 인해 벌어진 일이 바로 위화도 회군.

  • 명실록에 따르면 조선이 20만 강병을 동원해서 요동 정벌을 시작하면 답이 안나온다는 보고를 듣고 우려했다는 기록이 있다. 허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주원장이 저 발언을 하는 당시에 한반도는 왜구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으며, 북부에는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참고로 고려는 과거 여요전쟁귀주대첩에서 실제로 20만명의 군대를 동원해 당시 동북아 최강의 요나라의 10만 정예를 회전으로 깨부순 전력이 있고 당시 명나라는 원나라 시절 막장정치로 인해 남송 시절보다 인구가 적었고 신생 국가라 정보력이 부족해 과거 역사를 참고해 이런 평을 내렸을 가능성이 크다.

  • 조선의 정도전은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명과의 관계가 잘 되어가지만, 잘 되지 않으면 군대 끌고 와서 한판 벌여야지"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정도전을 상당히 경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조선에 트집을 잡았을 때에는 정도전을 명나라에 보내라고 자주 강짜를 부렸다. 현피신청[20]

  • 이성계의 선조가 황해도 모처에 자손이 황제가 될 묏자리와 왕이 될 묏자리를 두고는 선친을 묻으려고 했더니, 주가 되는 노비가 몰래 묫자리를 바꾸어서 후손들이 각각 명 태조, 조선 태조로 뒤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21] 우연히 만난 스님과 장수가 훗날 각각 명 황제, 조선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록강은 흐른다에도 나올만큼 유명한 이야기다. 그것도 한두 군데가 아니라 여러 군데에서 이성계와 주원장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실제 명확한 역사적 근거는 없으나, 그 만큼 원명, 여선 교체기의 군주들이 모두 한미한 집안 출신[22]이었다는게 흥미로운 일이었다는 것.

  • 서민 출신으로서 한 군세의 대장이 되었다가 제국을 개창했다는 점, 말년의 토사구팽 때문에 태조 고황제 유방과 이미지가 묘하게 겹친다. 비교도 자주 되는 편.

  • 아내는 효자고황후(孝慈高皇后) 마씨였다. 이름은 마수영(馬秀英). 회서 숙주 신풍리 출신이라고 하며 위에서 언급된 곽자흥의 양녀다. 주원장과 금슬이 매우 좋았던 듯, 주원장이 곽자흥의 미움을 받아 감금당했을 때 가슴에 화상을 입으면서까지 먹을 것을 품에 숨겨 남편에게 가져다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그런데 발이 매우 컸기 때문에[23] 민간에서는 '큰 발 마황후'라고도 불리었다고 한다. 한번은 민간에서 마황후를 큰발이라며 비웃는 그림이 나붙었는데 마침 암행 중이던 주원장이 이를 보고 그림 앞에서 낄낄거리던 백성들을 처형하려 하자 황후가 "제가 발이 큰 건 사실이니 그런 일로 처형하지마시라."고 간언하여 주원장도 그들을 살려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이런 일화에서 보듯 마황후는 매우 어질고 현숙하며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큰 여장부였다. 평생 주원장의 옆을 지키며 주원장에게 정확하고도 옳은 헌책을 거듭하였고, 주원장은 그런 마황후의 이야기를 잘 따랐다고 한다. 신하들에게 가혹한 주원장이 신하들을 족치면 신하들은 마황후에게 달려가 하소연을 했고, 마황후는 이들을 슬기롭게 두둔하고 마황후가 두둔하면 주원장도 마음을 바꾸어 신하들을 용서했다. 또한 마황후는 백성들의 어려운 삶을 생각하여 매우 검소하게 황궁의 살림을 꾸려나간 것으로도 유명했다. 이런 훌륭한 마황후는 주원장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임종에 즈음하여 그녀는 주원장이 보낸 어의도 만나지 않고 그들이 처방하는 약도 거부하고 죽었다.이유는 점점 의심이 많아지던 주원장이 자신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어 어의들을 처형할까봐 걱정해서였다고 전해진다.실제로 주원장은 마황후의 죽음을 매우 비통해 하였으며 마황후의 죽음 이후 폭주하여 온갖 공신을 때려잡는 황제가 되어버린다.

  • 탁발승과 반란군 시절은 주원장의 대표적인 역린이었다. 주원장은 그 시절을 수치로 여겨 그 앞에서 일체 옛날 일을 꺼내지 못하게 하고, 승려생활 때 머리를 깎은 것 때문에 '빛날 광(光)', '대머리 독(禿)'자를 쓰거나 '승려 승(僧)'자와, 그것과 발음이 같은 '생(生)'자를 쓰는 행위, 반란군 출신이란 의미의 '적(賊)'과 발음이 비슷한 '칙(則)'자를 쓰는 행위를 무조건 처벌했다. 피휘의 확장판이네 아Q정전마프리카의 선조

  • 영화로도 나온 비천무 원작 만화책에서도 나온다. 그에 대한 설명으로 이렇게 나온다. '가난한 농민 태생이라는 점 때문에 황제가 되어 공신들을 무척 괴롭혔지만 중국 역사에서 그만큼 백성들을 위한 군주도 좀처럼 없었다.' 만화에서 그다지 비중은 없으나 새로운 왕조를 건국하면 백성들을 위할 것이라는 뜻을 보였다.

  • 징기스칸 4에서 시나리오 2, 시나리오 4에서 등장. 정치는 90대에 전투, 지모은 70 ~ 80이상의 무장. 시나리오 2는 미등장이지만, 시나리오 4는 명나라 군주이다.

  • 신하들을 견제하기 위해 무지막지하게 숙청해대고, 또 권력강화를 위해 어지간한 일은 직접 처리한지라 업무량이 엄청났다고 한다. 하루에 1천건은 가뿐히 넘겼다고 한다. 물론 이건 홍무제가 황제권을 강화하느라 재상을 폐지하면서 생긴 현상이니 어떻게 보면 자업자득. 숙청으로 인해 도와줄 사람이 없는 것도 자업자득.
    결국 일감이 너무 많아지자 황제를 보좌하는 기구가 생겼으니 바로 내각이다. 신권이 강해지는 걸 막기 위해 정5품짜리의 낮은 관리들을 채용했으며, 이들은 모든 상소문에 각자의 의견을 덧붙여서 황제의 업무를 도왔다. 허나 낮은 직급 출신이다 보니까 고위관료들의 미움꼬장을 받게 되었고, 결국 원활한 업무처리를 위해서 내각의 직품은 점점 높아져 나중엔 고위관료들이 내각의 일을 겸하게 된다. 장거정은 명나라에 본래 없었던 재상 자리나 다름없는 내각대학사 수보에서 국정을 담당했을 정도. 그러나 어쨌든 직급이 낮았기에 황제가 태정을 하면 답이 없었다. 정말로.

  • KBS2 사극 드라마정도전에서 등장. 2화부터 이름이 자주 언급이 되었지만. 안나오다가 43화에서 등장. 여기선 실제역사처럼 행동한다. 주원장이 간나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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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초명은 중팔(重八), 흥종(興宗), 덕유(德裕). 이름도 많다.
  • [2] 추측컨대 "여덟째 아들"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다. 주원장의 알려진 형제들 중에서는 넷째 아들.
  • [3] 이 때 생긴 게 첩자같이 생겼다고 가담은 커녕 처음부터 생포되었다. 하지만 곽자흥이 그의 담력과 성품을 알아본 덕택에 무사히 합류했다.
  • [4] 일단 그 곳을 점령했다고 치면 군사와 관리들을 보내야 될 것인데 그들이 나중에 반란을 일으키기 쉽고, 바깥지역은 교역할 것도 없고(어떻게 보면 중화사상), 지금 있는 땅으로도 농사 지어먹기 충분하니까 그랬다고.
  • [5] 제일 많이 신경을 쓴것중 하나가 지역별 과거합격자 안배였다.(이 문제는 북송때부터 주된 정치현안 이였다.) 남송 멸망후에도 반쯤 자치를 누리며 학맥을 이어온 강남인들이 몽골의 지배하에 신음하던 화북인들을 제치고 합격자를 독식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다만 방법이 상당히 과격해서 부정이라며 급제한 강남 출신 유생들을 죄다 죽여버리는 것도 불사했다.
  • [6] 탕화등 살아남은 공신들도 있었지만 드물었다.
  • [7] 이러한 태형을 정장(廷杖)이라고 부른다. 이전 왕조에도 있었지만 홍무제 대에 이르러 유래없이 자주, 혹독하게 시행되었다.
  • [8] 고려승로성종에게 시무28조를 바치면서 선왕들을 두고 자기중심적인 평가를 내린 것을 보자.
  • [9] 다른 버전으로 황태손에게 가시 막대기를 들어보라고 했는데 당연히 못 들자, "내가 그 가시들을 전부 없애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도 한다.
  • [10] 대비를 안한건 아니라서 나이도 많고 비교적 황위에 가장 가까운 둘째부터 넷째 아들의 봉지는 모두 붙어있어서 한쪽이 딴 생각을 하면 다른 둘이 견제할 수 있게 했다. 문제는 둘째와 셋째 아들이 먼저 죽어버렸다.
  • [11] 결국 영락제에 의해 이 문제가 현실화 되면서 나중에는 가까운 황족들에게는 봉토를 적게 주거나 아예 주지 않는 친왕제도로 바뀐다.
  • [12] 이들 중에 경병문은 정난의 변으로 처형되고 곽영은 쫓겨나서 귀향했으며, 고성은 도중 붙잡힌 이후에 영락제를 도왔기 때문에 즉위 후에도 쫓겨나지 않았다.
  • [13] 문자옥만이 아니라 유학 경전 탄압해서 절대 왕권에 방해가 될 만한 요소들을 모두 제거했다. 그리하여 나온것이 진심편 등을 대거 덜어낸 맹자절문.
  • [14] 이와는 반대로 정도전의 반대파인 이방원과 그의 측근들은 우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종의 '견제'를 벌인 것.
  • [15] 특히 명의 4대 암군을 보면 주원장이 만든 절대권력의 폐단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알수 있다.
  • [16] 명 왕조에서 공식적으로 규정된 형벌은 태장도유사의 5형이었지만 홍무제는 자주 임의적인 형벌을 가하곤 했는데 대표적으로 능지처사가 있다. 이러한 정식형벌(5형)과 임의처벌(능지처사)가 공존하는 형태는 명대의 특징적인 모습으로 한-당-송으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5형과 요-금-원으로 이어지는 이민족 왕조의 유산이 결합된 결과이다.
  • [17] 명 초기의 고문과 혹형은 전대의 왕조들보다 잔혹함이 높기로 악명이 높았지만 그것은 홍무제의 말에 따르면 왕조 초기에는 법이 엄해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었다. 초기를 제외하면 명대의 혹형이 잔혹했다는 평가의 근거는 없다. 다만 황제 직속의 특무기관인 동창과 서창, 금의위의 고문이 가장 악명 높았는데 이들은 황제의 명령만 있으면 정식 사법기관의 절차를 거치지 않고 집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18] 귀와 코가 크고 턱이 이마보다 튀어 나왔다든지. 참고로 얼굴의 곰보는 전염병에 걸렸다가 살아남은 흔적이라고 한다.
  • [19] 조선미 저, '왕의 얼굴'에서 참조
  • [20] 실제로 정도전은 사병 혁파를 위해 요동 정벌을 명분으로 군사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이 점도 주원장이 그를 경계한 이유가 되었다.
  • [21] 비슷한 전설을 가진 곳이 전국에 꽤 있다. 경상남도 진해시의 천자봉이라든지.
  • [22] 다만 이성계는 한미한 집안이라고 하기는 좀 애매하다. 무신정권 이의방의 방계 후손이며 조상때 부터 고려나 원나라 벼슬을 하기는 했다. 고려 개경의 중심 귀족은 아니고 잘해봐야 요즘 시골 군수정도 지만 그래도 이성계가 날때 부터 수천 정도의 사병을 부리는 수준은 됐다.
  • [23] 실제로 발이 컸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전족을 하지 않아서 큰 발로 여겨진 것으로 추측된다. 전족이란 성장기에 발을 천으로 강하게 매서 성장하지 못하게 하여 억지로 작은 발로 만드는 것이었는데 상류층 여성들은 거의 반드시 이렇게 했다.이런 작은 발은 미의 기준으로도 여겨졌기 때문에 딸들이 고통스러워해도 부모들이 억지로 시켰다고.그러나 하류층 출신으로 추측되는 마황후는 전족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범한 발이었고 그래서 상류층 여성에 비교해 큰 발로 여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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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3-10 02:0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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