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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베트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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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개요
2. 배경
3. 전쟁의 발발
3.1. 양측의 전력
3.2. 과정
3.3. 소련의 개입
4. 종결
5. 이야깃거리
6. 대중문화
6.1. 전쟁자체를 다룬 작품
6.2. 등장 인물들의 경력으로만 언급되는 작품


1. 개요

Sino-Vietnamese War
中越戰争(중월전쟁)
Chiến tranh biên giới Việt-Trung(월중 국경전쟁)

중국에서는 대월자위반격(對越自衛反擊/对越自卫反击)라고 한다. 베트남측이 먼저 기습해서 중국군이 반격했다는 주장.

베트남 전쟁에서 우방 관계이던 중국북베트남(전쟁 이후 통일 베트남)이 전후 처리 문제를 놓고 대립한 끝에 벌인 전쟁. 1979년 2월 17일부터 3월 16일까지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벌어진 국지전이었으나 국지전 치고는 스케일이 상당히 컸고, 그 후유증은 베트남군캄보디아에서 철수하는 89년까지 계속되었다. 중국-소련 국경분쟁과 함께 공산권 내 노선 대립과 분열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2. 배경

역사상 오랫동안 중국은 베트남을 조공국으로 삼고 있었으며, 무력에 의한 병합도 여러차례 시도했다. 실제로도 여러 차례 점령하여서 중국은 베트남을 '남월'이라고 부르며 오랫동안 상전 노릇을 하기도 했다. 삼국지에 나오는 맹획의 종족 연합을 베트남이나 버마로 생각하는 떡밥이 오랫동안 돌았지만 사실 베트남 북부 지역은 손권의 영향 아래 있었다.[1]

베트남과 중국의 관계는 그런 이유로 한국과 일본의 관계와 비슷하여 베트남 전쟁 때 대만이 중국의 개입에 대항해서 남베트남에 대해 병력 및 군수지원을 천명했으나 남베트남 정부에서 강력히 막았다. 물론 대만의 참전이 중국의 개입을 불러일으킬지 모른다는 미국의 우려도 있었지만,[2] 그러한 역사적 배경과 화교들의 경제권 장악이 겹쳐서 통일된 베트남과 중국 관계는 같은 공산국가라고는 해도 결코 좋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의 지도부도 중국이 자기네들을 보호해준다는 명분으로 개입할까봐 노심초사했으며, 오히려 미국의 참전보다도 중국의 참전을 더 신경썼다고 할 정도였다. 중국이 공식적인 파병을 해서 지원해주겠다고 애걸했는데도 절대로 들어주지 않았다.[3] 이렇게 남북베트남인들은 중국인에 대한 태도에서만큼은 일치했다. 스스로 친중파인 호치민조차 2차대전 직후에 상전 노릇을 하려는 중국 공산당을 견제하고 도리어 친미 노선을 취하려 했을 정도였다. 심지어는 베트남을 식민지배했던 프랑스와도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협정을 맺으려 했을 정도였다.[4]

그래서 베트남은 남베트남 점령 후 잔류하던 화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했으며,[5] 국경 문제에 있어서도 소련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캄란에 있는 해군 기지를 소련 극동 해군에게 임대해주는 등 반중친소 노선으로 급격하게 돌아섰다.[6] 그리고 베트남과 중국 간의 관계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중국은 기껏 지원해줬더니[7] 통일 후에 자신들을 적대시하는 베트남을 배은망덕하게 여겼고, 자신의 앞마당으로 여기고 있던 동남아시아에서 반중세력이 갑툭튀한데다가 소련까지 끌어들이려고 하자 격노했다. 1978년 1월에는 이전부터 빈발하던 중국-베트남 국경분쟁을 이유로 들어 양국 간 외교관계까지 단절되었다.

한편으로 베트남 전쟁 종결 후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미국의 관심이 급격하게 식으며 캄보디아의 친미 정권도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에 의해 무너졌다. 폴 포트는 당시 극단적인 마오이즘에 경도되어 역사상 유례없는 폭력적 공산화 정책에 따른 대학살을 마구잡이로 추진, 캄보디아 전역을 말 그대로 사지(死地), 즉 킬링필드로 만들어버렸다.

게다가 크메르 정권은 극렬 자민족중심주의를 내세워서 베트남계 주민들을 모조리 제거해버렸는데 이건 베트남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었고, 이미 동남아에서 손꼽히는 패자이자 강호로서 프랑스와 미국을 물리친 베트남은 머뭇거림 없이 1979년 1월에 캄보디아 공격을 단행해서 크메르 루주를 정글로 몰아내고 친베트남 정권을 수립한다. 그런데 분명 침략이긴 침략인데 크메르 루주가 김씨왕조 뺨치는 천하의 개쌍놈들이라 캄보디아 내부에선 오히려 잘 됐다고 환영하는 분위기도 있었다.(…)[8] 그러니 이걸 침략이라고 까야 하는지 이라고 칭찬해야 하는지 참 애매모호한 상황이다. 베트남은 공식적으로는 "자국민에 대한 학살극을 벌이는 크메르 루주를 응징하고 그들의 압제에 시달리는 캄보디아 인민을 해방시키기 위해 지구방위대 베트남군이 출병한다."고 주장했다.

3. 전쟁의 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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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군의 공세. 국경 전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침공했으나 주공은 라오카이와 란손 방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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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월 국경을 넘어 도하하는 중국군 59식 전차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덩샤오핑화궈펑버르장머리 없는 베트남에 대한 징벌행위로서 무력침공을 비밀리에 모의, 대외적으로는 캄보디아 해방 등을 명분으로 삼아 1979년 2월 17일, 중국군이 국경을 넘어오며 전쟁이 발발했다. 이때 베트남의 국방장관이자 미국을 물리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보응우옌잡 대장은 친중파여서 주화론자였기 때문에 사실상 지휘에서 물러났고, 총참모장인 반티엔둥 대장이 총지휘를 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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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Sh-41를 든 베트남군 여자 민병대. 베트남군 주력이 모두 캄보디아 방면으로 나가 있었기 때문에 중월전쟁의 사진에는 베트남군 여자 민병이 자주 등장한다.

사실 중국군의 목표는 베트남을 무력으로 점령하는 게 아니라 북부에서 분쟁을 일으켜서 베트남군의 회군을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베트남군의 주력은 당시 1000km가 떨어진 캄보디아에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트남 북부는 거의 공백상태였다. 중국에서는 당장에 하노이까지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선전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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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군 의무병의 치료를 받는 베트남 여군 포로.

문제는 당시 베트남이 중국이 쉽게 털 수 있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천조국도 비록 자신들 스스로 만들어놓은 제한 및 남베트남의 황당할 정도의 자멸 탓이라고는 해도 8년 만에 GG쳤는데, 미군보다 훨씬 질이 떨어지는 중국군이 쉽게 상대할만한 적은 아니었다. 중월 전쟁 당시 베트남군의 총병력은 현역만 세계 3위권이었고, 1975년부터 캄보디아에서 철수하는 1980년대 말까지 베트남군 총병력은 100만이 넘었다. 이후 감축해서 최근에는 현역 45만, 예비군 500만으로서 현재도 대병력이다. 게다가 미군이 남기고 간 무기도 상당했고, 이래서 무기의 질이 적어도 1970년대 말 전쟁 시점에는 중국보다 나았다. 예를 들어 1980년대 말까지 베트남군은 미제 전투기 F-5A-37와 미제 헬리콥터 다수를 사용했을 지경이었다.

3.1. 양측의 전력

베트남은 대부분의 정규군이 캄보디아와의 전쟁에 동원됐었고, 북부에 주둔한 병력은 미국과의 베트남 전쟁 동안 후방지역에 머물렀던 만큼 대부분의 병력이 민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AK-47 같은 총기는 정규군이 사용하는 무기였고, 민병대는 SKS같은 2선급 무기를 장비하고 있었다. 구글 같은 데에서 Sino-Vietnamese War로 검색해도, 당시 베트남 병력이 AK-47을 들고 있는 사진은 매우 희귀하다.

중국군은 역시 대부분의 병력이 중국판 SKS인 56식 소총을 주력으로 장비하고 있었고, 분대마다 2~3명씩 AK-47이나 RPD지원화기로 사용하고 있었다. 즉, 양측의 보병무장은 거의 비슷했던 것이다. 때문에 베트남군의 소총이 더 우수해서 전투에 큰 영향을 주었다.라는 논리는 옳지 않다. 양측의 무장은 실질적으로 대등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중국군은 초기에 6만여 명의 병력으로 전쟁을 시작, 최종적으로는 약 20만명 정도의 병력을 동원하였고 100여 기의 항공기, 63식 경전차(PT-76)를 주력으로 한 400여 대의 전차를 투입하였다. 베트남군은 예비로 남겨졌던 소수의 국경수비대와 대부분의 민병을 규합, 최종적으로 18만명 정도의 병력을 동원하였으며, 40여 대 미만의 항공기와 소수의 기갑차량이 동원되었다.

3.2. 과정

중국은 베트남에 대한 중국의 힘을 과시하고, 친중 노선을 걷던 캄보디아에서 베트남군을 철군시키기 위해 1979년 2월 17일에 침공을 시작했다. 중국군은 윈난성에서 출발하였으며 베트남 산악지대와 정글을 재빠르게 돌파, 국경 너머 약 30km 정도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번 전쟁은 베트남에 대한 경고 성격이 짙은 만큼, 전략적 목표를 달성한 뒤에는 바로 철군할 생각이었으므로 전투 의지가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베트남의 지형은 산악지대 너머로 넓은 평야가 펼쳐저 있었고, 만약 산악지대가 뚫린다면 수도 하노이까지는 일사천리인 상황이었다. 그리고 적의 의도를 알 수 없고, 알더라도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에 결사항전의 태세로 싸우는 베트남군의 전투의지는 중국군보다 더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정글지대를 돌파하기 위해 중국군은 인해전술에 가까운 무식한 밀어붙이기 전략을 구사하였으나, 베트남군은 이를 간파하고 산 능선을 따라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중국군은 1950년대의 혼란과 빈곤 및 60~70년대의 문화대혁명으로 한국전쟁 이래 통신 장비나 전술이 지난 25년간 크게 발전하지 않은 상태였다. 반면, 베트남군은 베트남 전쟁을 겪으면서 베트남의 지형에 맞추어 교리를 발전시킨 상태였으며, 마오쩌둥의 국공내전 당시의 전술을 익혔기 때문에 중국군의 전술을 쉽게 간파할 수 있었다. 베트남군은 미군에게서 노획한 M113 같은 장갑차를 이용해서 보병을 빠르게 수송, 재배치하였으며 거점을 뺏기기 전에 중국군의 위협으로부터 재빠르게 빠져나가 새로운 방어선에 투입하는 기동 전술을 사용했다. 전투 병력을 최대한 보전한 것이다.

베트남군은 소련제 대전차 미사일을 활용하여 개전초 24시간 동안에 중국의 63식 경전차를 13대나 격파했다. 또한 미 항공력을 받아내본 베트남에게 중국의 항공 전력 따위는 별 것 아니었다. 오히려 초기에 15대나 되는 중국군 항공기를 격추시켰다.

중국군은 진격이 지체되는 것에 초조함을 느끼고, 10만의 병력을 추가로 동원하여 총 20만의 병력을 규합해 대공세를 펼쳤다. 결국 베트남군의 방어선은 뚫리기 시작하였고 돈단과 몽카이가 중국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러나 무리한 돌파작전으로 중국군은 2,000여 명의 병력을 손실했고, 40여 대의 기갑장비가 파괴되었다. 그에 비해 베트남군은 840여 명의 병력을 잃었을 뿐이었다.[10]

베트남군은 역공을 시작하여 2월 28일에는 돈단을 다시 탈환하였다. 중국 수뇌부는 이에 위기감을 느끼고, 3월 1일부터 한국전쟁에 투입되었던 정예사단인 325사단과 338사단을 주축으로 란손을 공략한다. 인해전술에 가까운 공격으로 많은 베트남군의 방어진지가 전멸당했고 베트남군은 중과부적으로 밀리긴 했지만 전략적인 철수로 중국군에게 최대한의 손실을 입혔다. 결국 중국군 6만명의 집중공격으로 란손은 함락당했고, 중국군은 란손을 조직적으로 파괴한 뒤 바로 철수했다. 3월 2일에는 국경 인근의 라오카이도 파괴하였다. 중국은 전략적 목표는 달성하였지만 워낙 병력 손실이 많아 더 이상의 전쟁 지속이 무리라는 판단에 이르렀다. 어차피 완벽하게 승리하여 베트남을 굴복시키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대국인 중국이 전쟁을 벌인 이유는 캄보디아를 무단점거한 베트남군의 철군이었다. 중국은 앞서 언급된 지역에 대한 순간적인 점거는 가능했지만, 베트남의 주력군이 캄보디아에 있었다는 점과 인민해방군의 상대였던 베트남군은 대다수가 민병(예비군)으로 구성되있었고 캄보디아에서 베트남군의 철수는 바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타격이 있었다.

누구도 명확한 승자는 없었지만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군사력에 대한 평가는 떨어지고 베트남에 대한 평가는 높아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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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를 외치는 중국군의 선전 사진.

3.3. 소련의 개입

거기다 당시 베트남은 친소 노선을 걸었기에, 소련은 중국에게 전쟁이 확대될 경우 소련군은 유격대를 투입할 것이다고 경고했다. 중국은 69년의 중국-소련 국경분쟁으로 소련이 제대로 개입할 경우 벌어질 사태를 잘 알고 있었던데다 군사력도 겨우 재건이 시작되었을 만큼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전쟁을 끌기 힘들었다. 병력을 좀 더 투입하고 기존에 벌어진 전투의 교훈으로 이거 저거 개선해서 다시 공격을 재개, 최종적으로 승리한다고 해도 이후 군대 및 사회가 만신창이가 될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4. 종결

중국은 전략적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에 철수한다고 대외적으로 발표하고는 일방적으로 군대를 철수시켜 버렸다. 결국 베트남 땅에서 큰 피해를 입은 중국군은 베트남의 캄보디아 공격을 중단시키기는 고사하고 국경도시를 파괴하고 베트남에 지속 팽창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경고만 보낸 뒤 물러나는 선에서 만족해야 했다.원래부터 중국군의 목표는 베트남의 점령이 아니라 국경에서 다발적 분쟁을 이끌어 베트남 주력을 북부로 유인하는 것이었다. 당시 중국은 문화대혁명 직후로 나라 사정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장기간 전쟁을 할만한 역량도 없었다.

양측 공식발표는 서로 만 단위 이상을 사살했다고 하나, 중국군 5,000여명이 사망하고 베트남군 4,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고 집계된다. 다만 공산국가의 특성상 중국측과 베트남측 모두 서로의 피해를 축소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중국군 사망자는 많게는 2만 6천명까지 추산, 베트남군은 민간인까지 합해서 3만명으로 추정치가 올라간다.

양측은 당시 모두 승리를 주장했으나, 현재로 봐서는 무승부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전략적으로 보면 중국군의 철수를 이끌어낸 베트남군의 승리지만, 전술적으로 봐서는 베트남군의 방어선을 뚫고 어느 정도 내륙까지 진입한 중국군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허나 베트남의 경우 주력이 민병(예비군)으로 구성돼 있었고 주력군은 캄보디아에 있었다는 점과 중국군은 정규군이었다는 점에서 중국에 대한 국제사회에서의 이미지는 낮아지게 되었다. 당시의 중국군이 비교적 졸전을 펼친 이유는 1960년대 이래로 정치 문제 때문에 전력 증강이 거의 멈추었고 문화대혁명 때문에 고급 지휘관 상당수가 숙청[11] 군 훈련도 전투보다는 정치 교육에 더 매진하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한국전쟁이나 중인분쟁에서 경이롭기까지 했던 인상적인 작전능력은 보여주지 못했다.

베트남은 프랑스, 미국, 중국을 몰아낸 국가로서 동남아시아의 패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전쟁 이후에도 1980년대 내내 중국-베트남 국경지역에서는 고지를 중심으로 중국과 베트남 양국의 일진일퇴의 소규모 전투가 계속 벌어졌다. 한국전쟁의 고지전을 연상케 하는 전투였기 때문에 사상자도 꽤 많았지만, 서방에는 이 전투들의 치열함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양국은 냉전 말기인 1988년 평화협정을 맺었으며, 1989년에는 캄보디아에 있던 베트남군이 철수하였다. 캄보디아는 다시 왕정으로 복귀했고[12], 친베트남+왕정세력의 연립정부가 출범하면서 크메르 루주는 배제되었다.

5. 이야깃거리

당시의 중국군은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다. 원래 홍군 시절부터 중국군에는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고, 한국전에도 계급이 없이 참전했는데, 그런대로 잘 돌아갔다. 그러나 펑더화이가 국방부장을 맡으면서 1956년 계급이 도입되었고, 1956년에 원수 10명, 대장[13] 등의 계급이 존재했다. 그러나 펑더화이가 실각한 이후인 문화대혁명 직전인 1964년 계급은 다시 폐지되었다. 원래 소련군도 계급 폐지를 했다가 답이 없다고 판단하고 계급체계를 부활시켰는데, 중국군에서는 다시 도입되는 1987년까지 제대로 돌아간 제도다. 정치장교 역시 중국에서는 잘 활용된 걸 보면 정말 희한한 일이다.

또한 이 전쟁은 중국군에게는 군의 현대화가 필요하다는 경각심을 주었다. 물론 중국이 군 현대화를 진짜 심각한 당면 과제로 받아들인 것은 1차 걸프 전쟁이 계기다. 당시 수십만명의 대 병력을 지닌 이라크군이 미군과의 기술력 격차로 제대로 대응도 못 하고 초토화가 되는 것을 보고 경악한 중국군 수뇌부는 걸프전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당장 변화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베트남은 이 전쟁으로 한동안 동남아 지역의 로컬 깡패 패자로 군림한다.[14] 민족주의적인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은 캄보디아, 라오스 뿐만 아니라 태국, 버마까지 아우르는 동남아 공산국의 맹주를 꿈꾸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당하기만 한 것처럼 알려졌지만, 베트남 자체도 엄청난 소중화 노릇을 하며 주위의 소수민족를 동화시키려고한건 마찬가지다.

그런데 베트남군의 선전 탓에 1990년대까지 전쟁에서 중국군 60만이 투입되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로 공개된 자료를 보면 실제로 투입된 병력은 40만 정도였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전선에 투입된 병력은 의외로 많지 않았다. 또한 미국 등 서방세계는 이러한 공산권의 분열양상을 보고 기존의 공산권 국가 전부를 묶어서 상대하는 정책에서 한쪽과 친해져 다른 쪽을 견제하는 방식으로 전략을 바꾸게 된다.

베트남군의 선전에 중국군이 고전하자 국경지대의 중국 마을에선 피난 준비까지 했다고...

또한, 중월전쟁 이후 베트남에 거주하던 약 30만명의 중국계 화교들은 베트남 정부에 의해 강제로 중국 남부로 추방당했다. 그들은 모국인 중국이 자신들을 따뜻하게 받아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막상 중국은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그대로 길거리에서 가난하게 떠돌도록 방치했고 중월 국경지대에 베트남인 자치구를 마련해줄 뿐이었다. 베트남에 살던 화교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안습할 뿐...

6. 대중문화

80년대 대륙에서 이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꽤 많이 만들어졌다. 하나같이 배달의 기수 수준의 작품이 많은데 당시 중국군의 장비나 배달의 기수식의 클리셰를 볼 수 있는 작품으로 마음을 비우고 보면 의외로 재밌다.(...) 친절하게도 대부분 인민해방군 영화제작소가 만들었기 때문에 저작권에서 자유로워서[15] 유쿠나 투더우같은 중국 웹뿐만 아니라 유튜브에 올라온 것도 그대로 볼 수 있다. 1979년전쟁만 아니라 1980년대 중반에 만들어진 영화들은 여러 고지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중국군과 베트남군의 전투를 다루기도 한다.

6.1. 전쟁자체를 다룬 작품


6.2. 등장 인물들의 경력으로만 언급되는 작품

이연걸과 종려시가 나온 보디가드(中南海保鑣, 1994)에 나오는 악당[16] 바로 중월전쟁에 참전한 중국군 특수부대출신으로 나온다.
그리고 2003년에 중국에서 제작된 사라진 총이라는 작품에서 주인공과 마을주민들은 중월전쟁에서 참전 경력자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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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정확하게는 교주의 사씨의 자치령이었는데…. 참고로 제갈량이 맹획을 공격하러 갔던 남만은 지금의 중국 서남부인 운남성이다. 베트남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당시 베트남인들의 조상들은 베트남 북부에서부터 창강 이남 중국 남부지역에 널리 분포하고 있었으며, 한족이 창강 이남을 개척하면서 베트남인들은 현재의 위치로 계속 밀린 것이므로 맹획은 베트남인의 조상일 수도 있다.
  • [2] 비슷한 예로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은 일본이 한국전쟁에 UN의 이름으로 개입할 가능성을 아주 싫어했다. 심지어 일본인들이 무장하고 한국에 들어올 경우 군대를 이쪽으로 돌려 막겠다고까지 했을 정도다.
  • [3] 그러나 비공식적으로 파병된 중국군 병사들은 있었으며, 전사자만 1천명에 달한다고 한다.
  • [4] 베트남과 미국이 끝내 베트남 전쟁까지 치루게 된 것에는 도미노 이론 등에 집착해 북베트남의 이러한 성격들을 무시한 채 남베트남 정권을 유지시키려 한 미국의 바보짓이 크다. 베트남 전쟁 항목의 주석에서도 언급한 것이지만 미국은 '공산주의'에 대해선 거의 결벽증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는데다, 매카시즘이나 6.25 전쟁같은 일련의 사태를 겪으면서 아예 '공산주의'는 초장부터 제거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 [5] 유명한 보트피플의 상당수는 화교계 베트남인들이다.
  • [6] 아이러니하게도 이 기지는 미국이 엄청난 돈을 들여서 만든 해군기지였는데, 미국이 떠난 후에 비어있다가 소련군이 들어와서 썼다. 당시 소련 해군의 해외기지는 거의 없었는데 그걸 미국이 공짜로 지어줬으니, 소련으로서는 정말 고마울 지경이었고 미국으로서는 죽쒀서 개준 셈이 되었다. 세상일은 모르는 일이다.
  • [7] 베트남군의 게릴라전 교리는 중국군에게 배운 것이었다. 베트남 전쟁 동안 북베트남군 주요 지휘관들은 대부분 접경인 중국 윈난의 보병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을 정도였다.
  • [8] 크메르 루주가 얼마나 미움을 받았느냐하면, 1980년대 영화를 찍으러 크메르 루주 병사로 분장한 배우들이 진짜로 오인되어 캄보디아 인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했다고 한다.
  • [9] 전쟁 끝난후 지압 장군은 실각하고 반티엔둥 장군이 국방장관이 되었다.
  • [10] 물론 중국군이 질적인 수준에서 베트남군과 대등했으며 또한 베트남군의 화력에 노출되는 공격 상황이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 [11] 단 여기서 오해가 있다면 문화대혁명 당시 중국의 숙청은 처형이 아니라 노동교화소에서 중노동을 하거나 혹은 홍위병에게 학대를 당하는 수준이었다. 그때까지 자살하거나 맞아 죽지 않았다면, 대부분 덩샤오핑 집권 이후 복권되었다.
  • [12]아누크 왕이 이전 왕정 시절 저지른 전횡으로 나라가 막장이 되었던 현실을 고려, 실권은 주지 않고 지위만 갖는 입헌군주제를 선택했다.
  • [13] 다른 나라의 상급대장에 해당.
  • [14] 베트남이 막거나 이겨낸 국가들은 프랑스, 미국, 중국. 안전보장이사회 상임 이사국 국가 다섯 중 3개 국가다.
  • [15] 저작권이 없는 건 아니지만, 홍보 영화의 특성상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유튜브에도 자유로이 올라와도 아무도 지워달라는 요청을 안한다.
  • [16] 매트릭스2와 견자단이 출연한 도화선이라는 영화에서 나온 예성이라는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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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10-11 12: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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