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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

last modified: 2015-10-21 19:53:57 by Contributors

역대 진나라 왕
30대 진 장양왕(秦 莊襄王) 31대 진 시황제(秦 始皇帝) 통일 진 시대

역대 황제
초대 황제 진 시황제(秦 始皇帝) 2대 황제 진 이세황제(秦 二世皇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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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始皇帝
(시황제)
영(嬴)
조(趙)[2] / 여(呂)[3]
정(政)
출생지 나라 영자초 사저(私邸)
사망장소 진나라 사구
아버지 자초(嬴子楚)[4]
생몰기간 음력 B.C. 259년 1월 ~ B.C. 210년 9월 10일(50세)
재위기간 음력 B.C 246년 ~ B.C. 210년 9월 10일

Contents

1. 개요
2. 일생
2.1. 출생과 어린 시절
2.1.1. 출생 문제
2.2. 왕위에 오르다
2.3. 왕권을 되찾다
2.4. 천하 통일
2.5. 제국의 통치
2.5.1. 업적
2.6. 말년
3. 평가
4. 그 외에
4.1. 몰락의 징후
4.2. 분서갱유
4.3. 용모
4.4. 암살 위협
5. 그 외
6. 대중문화 속의 진시황 영정
6.1. 미이라 3
6.2. Fate/strange fake
6.3. 킹덤
6.4. 어새신 크리드
6.5. 삼국지 시리즈
6.6. 시드 마이어의 문명
6.7. 창제기
6.8. 영웅전희
6.9.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6.10. 초한전기


1. 개요

세계 최초의 황제이자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인물[5]

진(秦) 나라 시황제(始皇帝). 본명은 영정(嬴政).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였고 황제라는 직위명을 세계 최초로 사용한 인물이다.

고대 중국의 연, 조, 위, 제, 한, 초 6국을 멸망시켜 춘추전국시대를 종식시키고 이후 나라 멸망까지 약 2000년에 걸친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한 인물이며, 따라서 중국 역사에 결코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아마도 진시황이 없었으면 가뜩이나 이질적인 중국의 여러 지방이 지금처럼 거대한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어있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이 점에서는 상당히 인정받는 편이나 유학자들을 탄압했기 때문에 대대로 중국의 학자들에게는 그리 좋지 못한 평을 들었다. 애초에 선대왕인 소양왕이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으나, 소진이 실시한 합종책으로 실패하고, 소양왕이 이루던 통일을 진시황이 마침점을 찍었을 뿐이다.

또한, 기껏 중국을 통일해놓고 가혹한 정치로 백성들을 괴롭힌 것과 후계자를 잘못 세워 통일 진나라를 2대 만에 망하게 한 것으로도 꽤 혹독한 평을 듣기도 하였다. 크고 아름다운 토목공사를 좋아해서 아방궁, 만리장성, 병마용갱 등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마오쩌둥이 좋아한 인물인 것으로도 유명하다.아.... 그래서 그랬었나.....

서구에 가장 잘 알려진 중국인이기도 하다. 사실 서양에서 중국 역사 얘기 보면 대부분은 진시황->이외 생략->몽골침략->이외 생략->아편전쟁 이후 정도이며 사기의 경우는 오로지 진시황 본기만 번역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중국 최초의 평민 황제이자 사실상 중국의 정치 패러다임을 설립한 유방과 한나라는 오히려 무시당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2. 일생

2.1. 출생과 어린 시절

진시황은 본래 조나라 수도 한단에 볼모로 가 있었던 진나라 왕족인 훗날의 장양왕(莊襄王)이 될 영이인과 그 부인 조씨(조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씨는 본래 영이인의 후원자였던 여불위의 첩이었으나 영이에게 바친 여자였다.

진시황의 아버지였던 영이인은 비록 당시 진나라의 왕이었던 소양왕의 손자이며, 진나라 태자 안국군의 아들이었으나, 장남도 아닌데다가 서자였기 때문에 보잘 것 없는 대접을 받았다. 그 때문에 조나라로 보내져 언제 죽을지도 모를 꿈도 희망도 없는 볼모 생활을 하고 있었다.[6][7]

그러나 여불위는 영이인을 만나본 뒤 그를 비범한 인물이라 판단하여 자신의 사재를 털면서까지 후원과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영이는 여불위에게 받은 재물을 자식이 없었던 아버지 안국군의 본처에게 보내 환심을 샀으며, 갖은 편지를 보내어 부모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덕분에 영이인은 안국군 본처의 양자가 되었으며, 영자초(嬴子楚)[8]라는 이름을 하사받을 정도로 총애를 얻었다.

이로 인하여 영이인은 곧 진나라로 귀국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재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손에 쥐었고, 안국군이 효문왕으로 왕위에 오르자 진나라 왕과 왕후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면서 신뢰를 얻음으로써 마침내 유력한 왕위 계승자로 떠올랐다. 이 공로 덕분에 여불위는 효문왕이 곧 병사하고 영자초가 장양왕으로 왕위에 오른 이후로 승상 벼슬을 얻어 진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손에 넣게 된다.

한편 아직 나이가 어렸던 진시황은 아버지가 진나라로 귀국한 이후로도 어머니인 조희와 함께 조나라에서 볼모 생활을 하였으나, 아버지가 곧 유력한 왕위 계승자로 떠오르면서 그 힘을 두려워한 조나라 조정에 의하여 진나라로 들어오게 되었다.

2.1.1. 출생 문제

진시황의 어머니인 조씨는 원래 조나라의 거상 여불위가 데리고 있었던 기생인데, 이후 여불위가 진나라 승상까지 된 것을 보고 원래 진시황은 조씨가 임신했던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이를 두고 진시황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그를 여정(여불위의 성씨를 따랐을 경우 그의 이름)이라고 낮춰 불렀다.

사실 사마천사기에선 진시황은 여불위의 아들이라고 적고 있는데 확실한 근거가 발견되진 않았으므로, 현대에는 진나라의 멸망 이후, 진왕조의 정통성을 깎아내리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로 보아 부정하는 견해가 주류이다. 사기 안에서 공식 역사라고 할 수 있는 본기 중 한 편인 시황제본기에서는 시황제는 장양왕의 아들이라고 분명히 적고 있다.

여불위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사기 열전 중 한 편인 여불위열전. 저자인 사마천 자신은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자료를 위주로 역사서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고 따라서 본기부분에서는 시황제를 장양왕의 아들이라고 기록했다. 하지만 '시황제의 진짜 아버지는 여불위'라는 소문이나 주장이 워낙 거센 터여서 이를 여불위 전기부분에 삽입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9] 더구나 열전에서도 사마천은 조씨가 장양왕과 혼인한 뒤 12개월 뒤에 자식을 낳았다고도 함께 기록하고 있다. 다들 알겠지만 임신기간은 10개월로 만약 그 이전에 여불위의 자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12개월 후에 그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혼인 후에 사통한 것이라면 몰라도...

사실 사기 안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널리 읽힌 부분은 딱딱한 본기가 아니라 인간적인 분위기가 짙고 스토리의 성격이 강한 열전인 것도 자연히 시황제의 아버지는 여불위라는 주장이 정설처럼 된 것이다. 김팔봉 선생이 동아일보에 1954-55년 연재한 <통일천하>[10]의 도입부에서 이 내용을 극적으로 잘 다루었다.

단행본 기준으로는 1권 도입부로부터 약 1/4가량을 할애했다. 소설이기에 진위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떡밥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드라마틱하게 전개 및 묘사한 탁월한 필치는 가히 일품이라 할 만 하다. 다만 연재시기에서 보듯이 워낙 옛 글이라 요즈음의 감각으로는 읽기에 약간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 아니 그걸 떠나서 초판본을 구하는 것 자체가 문제 특히 어문각의 1984년 판본이 추천할 만 하다.

2.2. 왕위에 오르다

영자초가 귀국한 이후, 당시 진나라 왕이자 진시황의 증조부였던 소양왕이 사망하였다. 진시황의 할아버지인 효문왕이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나 사흘만에 사망하고 말았다.[11] 이를 이어 영자초가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장양왕이었다. 그러나 장양왕이 3년 만에 사망하는 바람에 훗날의 진시황인 영정이 13살에 진나라의 왕이 된다.

아직 왕의 나이가 어렸던 탓에 당시 장양왕의 후원자로써 막대한 권력을 누렸던 승상 여불위가 어린 왕을 보필한다는 명분으로 상국(相國)[12]의 직위에 올랐으며, 왕으로부터는 아버지와 같다는 '상보'(尙父)[13]의 칭호까지 얻었다. 이토록 강력한 권세를 얻은 여불위는 아직 나이가 어린 진시황 대신 나라를 다스리는 섭정이 되었다. 때문에 진나라의 실권은 사실상 여불위의 손 안에 들어갔다.

사기에 따르면 여불위는 상국의 지위를 얻은 이후부터 과거에 자신의 첩이었던 진시황의 어머니 조태후와 간통을 하였다고 한다. 여불위는 이 사실이 들통날까 두려워했으나 조태후가 여불위를 사랑하여 늘 불러 정을 나누려 했으므로 결국 가짜 환관 노애(노대)를 조태후 옆에 붙여 시중들게 하였다.

노애는 정력이 출중해서 조태후의 총애를 받았으며 이후로 조태후는 여불위를 찾지 않았다. 그러나 간통이 길어지면서 조태후는 노애의 아이를 두 명이나 낳고 말았다. 노애와 조태후는 아이들을 감추어놓코 키우면서 진시황을 몰아내고 그들의 아들을 왕으로 삼고자 하는 모략을 꾸몄다.

2.3. 왕권을 되찾다

그러나 진시황이 성인이 되었을 쯤에 이들의 행각은 곧 발각이 되었다. 당시 노애는 하인을 1천여명을 거느릴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움켜지고 있었다. 이러한 귄력덕택에 그의 성격은 점점 더 거만해졌고 하루는 어느 신하가 그의 거만한 태도에 꾸짖다 도리어 노애에게 모욕을 당했고 모욕을 당한 그 신하는 속터지며 분개하며 그곳을 나가다 지나가던 진시황이 그의 표정을 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초지종을 물었고 이 이야기를 들은 진시황은 노애를 몰래 조사하게 했는데 이 과정에서 노애가 아이를 숨겨 왕위에 옹립하려는 음모를 알아차리게 된다.

노애는 진시황이 알게되자 최후의 발악을 하여 진나라 수도인 함양에서 난을 일으켰으나, 진시황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이를 진압하도록 명하였다. 진시황이 곧 창문군창평군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일으켜 반격에 나서게 되니, 수도 내에서 교전까지 벌인 끝에 노애는 패하여 달아났다.

노애의 반란군을 무찌른 진시황은 조태후가 노애와 간통하여 낳은 아이들을 자루에 넣고 때려서 죽였으며, 달아난 노애를 붙잡아서 사지를 찢는 거열형에 처한 뒤 그 삼족을 멸하였다.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인 조태후마저 유폐하였으나, 신하들의 간청으로 조태후를 다시 함양의 왕궁으로 불러와 모셨다.

노애와 조태후의 스캔들에 깊이 연루된 여불위 또한 처벌하려 하였으나 여불위를 따르는 신하들과 선비들이 많았기 때문에 벼슬을 빼앗고 낙양으로 유배보내는 정도로 그쳤다. 그러나 한때 왕과 견줄만한 세력을 지녔던 여불위의 권세는 무참히 꺾여버렸고 실의에 빠진 여불위는 곧 자살하였다.

노애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왕권을 위협하던 모든 세력을 짓눌러 버린 진시황은 나이 22세에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비로소 친정 체제를 굳히게 된다.

2.4. 천하 통일

상국의 벼슬에 올라 왕을 능가하는 권세를 누리던 여불위마저 제거한 진시황은 마침내 진나라 최고의 실세로 떠올랐으며 잠시나마 실추되었던 왕권을 회복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평생토록 보좌할 이사를 만났고, 그와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소양왕이 쌓은 기반으로 나머지 6국을 통일할 계획을 세운다.

이를 위해 진시황은 모사인 울료를 등용하고 울료의 주장대로 6국의 대신들을 미리 매수하고, 6국 사이를이간질을 시키도록 조언하였는데, 이는 실제로도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였다. 매수당한 간신들은 나라의 유능한 장수들의 활동을 저지하여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싸울 수 있었고, 6국이 서로를 믿지 않아서 도우려 하지 않아 진나라의 군사력 앞에 하나씩 각개격파당하였다.

일단 진나라와 인접했던 한나라, 조나라, 위나라, 초나라부터 공격했는데 기원전 230년 부터 장군 등으로 하여금 동진하여 을 멸망시켰고, 그 다음에는 장군 왕전으로 하여금 나라를 공격해 역시 수도를 함락시켜 멸망시켰다. 그리고 뒤이어서 기원전 225년에는 나라를 쳐서 멸망시켰다. 초나라는 이신의 주장대로 15만의 군사를 주어 첫 공격을 하였으나 초나라의 명장 항연이 이를 격파하고, 이후 노장 왕전의 주장을 받아들여 60만 대군으로 다시 공격 향연을 패퇴시키고 기원전 223년에 초나라를 멸망시킨다.

연나라는 진나라의 이런 행보에 연나라 태자 형가를 보내어 진시황을 암살을 시도하고, 이를 빌미로 연나라를 공격했다. 연나라왕은 태자의 목을 잘라서 바치면서까지 용서를 빌었으나, 진시황은 도망친 연나라 왕을 요동까지 집요하게 추격해서 사로잡고 연나라는 기원전 222년에 완전히 멸망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221년에 제나라를 쳐서 제나라 왕의 항복을 받아내 멸망시켰다. 이리하여 제위 17년인 39살에 약 10년만에 만에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하는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게 되었다.

  • 사실, 엄밀히 말하면 진시황은 모든 중국을 통일하진 못했다. 왜냐하면 전국시대가 끝난 후에도 엄연히 위나라(衛, 1번 항목)가 남아있었기 때문. 진시황은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스스로 위(衛)를 야왕(野王)이 분말고으로 옮겨놓고도 끝까지 멸망시키지 않았고 2대 황제인 호해가 위의 마지막 군주 각을 서민으로 만들면서 멸망시켜 버린다.

2.5. 제국의 통치

통일 후 진시황은 기존의 전국시절 군주의 호칭인 진왕(秦王)을 대체할 호칭을 찾았고 신하들은 태황이라는 호칭을 주장했지만, 진시황은 그 주장을 물리고 중국 전설의 군주인 3황(皇)과 5제(帝)의 한글자를 딴 황제란 칭호를 만들고 자신이 진나라의 첫 황제 진시황제가 되었다.

황제의 칭호를 도입하면서 천자의 명령을 교(敎)가 아니라 조(詔)라고 바꾸고,[14] 천자의 자칭을 종전의 고(孤)나 과인(寡人) 대신 짐(朕)으로 바꾼다. 이전까지 '짐'은 고대 중국어의 1인칭 대명사 중 하나였는데[15] 진시황은 '짐'을 천자의 전유물로 바꾼 것이다나 혼자 짐이라고 할테니 너네는 다른 대명사를 써라!.[16] 이때 진시황이 확립한 조와 짐의 용법은 후대 왕조에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또 진시황은 황제의 칭호를 도입하면서 천자에게 시호를 올리는 것을 폐지했다. 그래서 진나라의 황제는 다른 왕조와 달리 시황제("첫 번째 황제"), 이세황제("제2대 황제") 이런 식으로 불리는 것이다. 진시황이 천자에게 시호를 올리는 것을 폐지한 이유가 있었다. 시호라는 게 사망 후에 생전의 공과 과를 평가하여 정하는 것이라서, 천자에게 시호를 올릴 경우 '감히' 아들(새로 즉위한 군주)이 아버지(죽은 군주)에 대해 논하고, '감히' (살아 있는) 신하가 (죽은) 군주에 대해 논하게 된다. 진시황은 이것이 굉장히 무엄하다고 생각해서 폐지했던 것이다.[17][18]

진나라는 상앙부터 법가사상이 근본사상이였고, 이사가 승상이 된 후 더욱 철두철미한 법치국가가 되었고, 이 여세를 몰아 그는 10년도 안돼 전국을 통일한다.

2.5.1. 업적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진시황은 본격적인 제국 통치 사업에 몰두하면서 갖가지 개혁 정책을 내놓는다.

우선적으로 군현제를 실시하였는데, 이전에 주왕조가 중국 대륙을 통치했을 때 사용한 봉건 제도와는 그 근본이 달랐다. 기존에 실시되던 봉건제도는 국가의 수장인 왕이 중앙을 통치하되, 그 외의 부분은 쪼개어서 왕족이나 공신들을 제후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는 형식으로써 중앙 권력에 비해 지방 정권이 더욱 비대해 질 수 있는 구조를 띄고 있었다. 그러나 진시황은 이러한 봉건제도를 폐지하고, 나라를 군과 현의 행정 지역으로 나누어 쪼갠 후에 중앙 정부 소속의 관리들을 파견하여 다스리는 군현제를 실시함으로써 중앙 집권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19]

이러한 중앙 집권 체제 강화를 위해서 진나라의 통치 이념이 되었던 법가 사상을 중국 전역의 통치 이념으로 내세우는 등 사상 개혁도 시도하였다. 이 때에 서적에 대한 탄압을 실시하여 진나라 역사책이나 농사, 천문, 점술, 의학 등 실용 지식에 관련된 서적을 제외한 대부분의 서적들을 없앨 것을 명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학자들과의 충돌이 일어났고, 이로 말미암아 분서갱유와 같은 참혹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20] 게다가, 이러한 사상 개혁은 부작용이 컸다. 법가의 지나치게 업격한 법률이 중국 전국의 통치에 쓰이게 되자 엄격한 법률과 형벌에 익숙하지 못했던 6국의 백성들은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온 나라가 들썩일 정도의 대규모 토목 공사를 수차례 벌이기도 하였다.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아방궁과 진시황릉을 건설하여 황제의 권위를 강화하는 한편, 운하를 파서 수로를 통한 교역과 물품의 운송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언제나 중국에 위협이 되어온 북방 민족들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서 기존 7국의 성벽을 보수해서 길다란 성벽을 건설했고, 진나라 멸망이후에도 여러나라들이 성벽을 보수, 증축, 신축했고 그리하여 만리장성이 만들어 졌다.

중국 통일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중국 각지의 나라마다 화폐와 문자가 달라 서로간에 교류하는데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여겼는지 중국 전역의 화폐와 문자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통일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후로 물건의 치수나 길이를 재는 도량형 등도 하나로 통일되도록 하였다. 이는 모두가 통일된 넓은 중국 전국의 통치를 원활히 하고 그 효율성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2.6. 말년

이렇게 통일을 이룬 후, 진시황은 급격한 개혁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개혁은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문제는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이루어지는 바람에 백성들의 불만이 대단하였다. 게다가 진나라의 통치 이념이었던 법가 사상이 중국 전역의 통치에 이용되면서, 각지에서 가혹하고 무거운 통치가 이어지게 되었다. 백성들은 이러한 까다로운 법률과 무거운 형벌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민심은 피폐해져만 갔다. 또한 잦은 대토목 공사로 재정이 바닥나기 시작했고 이를 메우려고 백성들한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해 완벽하게 증오를 받고 말았다. 이는 곧 진시황 사후에 진나라를 멸망케 한 농민반란의 씨앗이 되기도 하였다.

또 진나라에는 군공수작제에 따라 20여 단계의 작위가 있었는데, 바로 수급 하나당 하나씩 올려주는 그 계급이다. 이 계급에 따라, 혹은 계급 강등으로 형벌을 대신하거나 완화받을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진나라 사람들이야 지난 정복 전쟁에서 쌓은 군공과 계급이 있지만, 정복당한 육국의 백성들은 당연히 군공수작제의 작위가 낮으니(천하통일 기념으로 1단계씩 주기는 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육국의 백성들은 진나라 백성들과 달리 가혹한 형벌에 그대로 노출되면서 차별받게 되었다.

진시황 개인적으로도 여러가지 문제가 생겼다. 점차 나이가 들어가면서 죽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불로불사에 집착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문에 갖은 사기를 당하며 재정을 낭비하였다. 특히 서복이라는 사기꾼이 동해바다에 살고 있는 신선에게 불로초를 구해오겠다며 뻔히 보이는 구라를 치자 진시황이 이에 넘아가 서복에게 엄청난 양의 재물를 딸려보내 주었던 일화는 무척 유명하다. 제주도서귀포시의 이름도 진시황의 불로초를 찾아 온 서불의 전설에서 나온 지명. 이외에도 수많은 사기꾼들이 불로불사의 약을 구해오겠다면서 진시황에게 돈을 뜯어 달아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했지만 그때마다 진시황은 늘 속아넘어갔다. 또한 민중은 너무나 빈곤하여 겨우 먹고사는데도 진시황 본인은 파렴치하게도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그래서 보다못해 민중을 구제하라고 간언한 태자 부소조차 화를 내며 변방으로 추방해버리니 완벽한 암군이 되고 말았다.

말년에 접어든 진시황은 제위초에 전쟁 수행 과정과 정책 수행 과정 등에서 보여주었던 냉혹하면서도 총명했던 기질은 거의 잃어버린채 갖은 삽질만을 계속하였고, 결국 전국을 순행하던 여행을 하다가 BC 210년 7월 사구(沙丘;河北省 平鄕縣 부근)에서 병사하면서 그는 약 50년 간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했다. 잠시만, 그때 그 시절에 50대면 오래 산 편 아니야? 수은 퍼 먹었다매[21]

그가 죽은 이후에 아들 호해가 뒤를 위어 2세 황제로 즉위했다.

3. 평가

비록 진시황이 말년에 폭정하여 기껏 통일해놓은 진나라를 약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했으나(...), 최초로 중국 전국을 통일하여 하나의 나라로 만들어 놓은 진시황의 업적은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때 건설된 운하는 이후에도 역대 왕조를 거치며 점차 확장되어 오늘날까지도 수로 교통에 이용되고 있을 정도이며, 문자와 도량형, 화폐 등을 통일함으로써 수백 년간 여러 나라로 쪼개져 있으면서 문화가 이질적으로 발전한 각지의 백성들을 하나로 묶어 놓는 역할도 하였다.

또한 최초로 중국 대륙을 통일함으로써 수백 년간 갈라져있던 중국이 하나의 정부 아래에 통합되어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기도 하였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지 못했다면 오늘날의 중국은 존재하지 못했고 오히려 유럽처럼 많은 나라들이 들어서게 되어 역사가 완전히 변했을 것이라고도 한다. 물론 진시황 말고도 중국 대륙을 통일한 위인이 나올 수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어찌되었든 현재 중국에서는 굉장히 띄워 주고 있는데 특히 최근에 들어 중국 내의 소수민족들과 중국 한족 간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분위기에도 잘 어울려 거의 국가 차원으로 띄워주고 있는 듯 하다. 물론 말년으로 갈수록 벌연 갖은 폭정, 병크와 숱한 실책들은 그냥 까이는 듯(...). 애초에 진시황이 그렇게 밀어 붙였던 법가 사상 자체의 단점 중 하나인 "법은 함부로 바뀌어선 안된다"는 사상으로 인해 전쟁시대에나 맞았던 법률을 계속 이어간 문제점도 있었으며, 실제로 이 정책이 진시황 사후 대규모 반란을 조장, 진이 순식간에 패망하는 결정적 원인이 된다. 그러니 폭군이라 해도 마땅하다.인권의 사각지대라 해도 할 말이 없는 현대 중국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왠지 미묘하다.

4. 그 외에

4.1. 몰락의 징후

게다가 말년에 들어 심신이 쇠약해진 진시황은 기이할 정도로 미신에 집착하게 되었고 위에 보듯이 '망진자호야'라는 점괘를 철썩같이 믿어 '만리장성'을 쌓는다든가, 불로초에 미쳐서 사기를 당하다가 최후에는 홍의동자 꿈을 꾸고 꿈속의 홍의동자가 자신의 나라를 빼앗을 거라는 해몽을 믿고 순행길에 올랐다가 병사하는 등 미신에 푹 빠져 버린다.

그리고 죽고나서도 진시황의 유서에 의해 멀쩡한 장남 몽염과 같이 사형시키고, 호해란 별 병신 껍쩍데기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바람에 나라가 작살나 버렸다. 이 때문인지 호해가 이사와 조고 등과 짜고 유서를 위조했다는 소문이 호해 제위 직후부터 돌아서, 진승 · 오광의 난등 부소를 사칭한 반란이 일어났고, 한나라 이후 공식화 되어서 사마천이 사기에 기록해서 정설이 되었다. 문제는 그 측근들이 설사 정말로 유서를 위조했다 하더라도 대체 그들이 유서를 위조했는지 여부를 사마천이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냥 흔히 떠돌던 낭설을 2세 황제의 바보짓 때문에 시황제같은 사람이 정말 2세황제를 후계로 삼았을 리가 없다고 여긴 사마천이 믿어 버렸다고 보기도 한다. 사마천이 이 기사의 출처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 아들 호해와 관련되어 한 가지 민간 설화가 있는데 '진나라는 호에게 멸망할 것이다(망진자호야, 亡秦者胡也)'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떠돌아 진시황이 흉노를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죽어라 쌓았으나 이민족(胡)이 아니라 호해에게 망하고 말았다는 얘기이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오랑캐에 의해 멸망할 줄 알았는데, 되려 나라는 돌보지 않고 놀기만 하는 무능한 아들인 호해에게 멸망당했다는 것이다.

진시황의 비정상적인 외모와 말년에 보인 정신착란 증세가 사실 심각한 뇌 손상이 가져온 결과라고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수은은 소량 섭취시 일시적으로 피부가 팽팽해지는 효과가 있어 진시황은 이를 불로장생 약으로 믿게 되고 진시황은 매일 같이 수은을 먹고, 발라서 결국 수은 중독에 이르렀고, 거기에 수은은 금단증상까지 있어서 결국 진시황은 수은을 더 많이 더 자주 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근데 이런 수은중독에 과로까지 겹쳤는데도 50대까지 살았다(...). 수은 안 퍼 마셨으면 100살까지 살았을 기세[22] 결국 죽어서도 진시황릉에도 수은으로 만든 강을 만들어 넣었다고 한다(출처:사기 진시황 본기). 실제로 시황릉의 토지 수은농도가 다른 곳보다 월등하게 높아서 실제로 다량의 수은이 묻혔을 것으로 보고있다.

참고로 중국에 병마용이라는 거대한 세계문화유산을 남겨줬다. 아방궁과 만리장성도 축조했지만, 만리장성은 진시황 이전 전국 7국의 장성을 이어 붙인 것이고 오늘날에 볼 수 있는 것은 대부분 명나라 대에 완성된 것이다. 아방궁은 아방궁터로 알려졌던 유적을 조사 결과 건축물이 존재했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나오지 않았고, 완성된 적이 없는 것으로 추정되어 존재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4.2. 분서갱유

분서갱유라는 초유의 사건을 벌인 것으로도 유명하여, 전근대의 유학자들에게는 가히 만세의 적 취급을 당해왔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분서갱유라는 사건 자체가 유학자들에 의해 다분히 부풀려졌으며, 한편으로 굳이 진시황 개인의 폭정 문제를 꼽지 않더라도 일어났을 가능성이 충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항목 참고.

4.3. 용모

사마천은 『사기』에서 시황제 용모를 '코가 높고 눈은 길게 찢어졌으며 가슴은 매처럼 생기고 목소리는 들개같으며 은혜를 베풀 줄 모르는 사람으로 폭압적 정치를 했으며 극악무도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덤으로 "겉으로는 겸손한 척하나 속으로는 인덕이 부족하고 음험해 승냥이나 이리같은 자"라고 혹평한다.

때문에 중국의 한 논문은 진시황은 초상화와 달리 선천적인 병으로 인해 어렸을 때의 외모가 추했고, 이 때문에 사람들이 꺼려했고, 특히 화려함을 좋아했던 어머니에게 거부당한 것이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받은 전형적인 소질 있는 아이가 타고난 외모랑 안 좋은 환경 때문에 비뚤어진 케이스라고 주장한다. 더불어 어린 나이에 갑자기 왕이 된 탓에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배우지 못했을 텐데, 이게 그의 정신적인 성장에 큰 영향을 줘서 다른 사람들을 잘 믿지 못한 게 아닌가 그래서 뭔가 이루는 것에 집착하게 되어 중국 통일을 이루거나, 만리장성 축조 등 큰 규모의 건축을 계획하게 된 거라는 것이 이 논문의 주장이다.

4.4. 암살 위협

10년 만에 전국의 여섯국가를 멸망시킨 탓에 과거 6국 백성들의 원망을 한몸에 받았고 수많은 암살시도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연나라 형가의 암살미수와. 형가의 친구 고점리, 훗날 한나라 개국공신이 되는 젊은시절 장량등이 있다. 이렇듯 중국 역사를 통틀어서도 진시황은 유난히 암살 위협을 많이 받은 황제였고 이 때문에 불로불사에 더 집착했다는 주장도 있다.

5. 그 외

이상하게도 진시황의 황후나 후궁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사기에 호해가 17명의 형을 폐하고 황제가 되었으니 부소와 호해 이외에도 상당수의 자녀가 있었고 당연히 황후와 흥부 마누라가 아닌 이상 상당수의 후궁을 거느렸을 것이다. 그러나 진시황의 황후나 후궁에 대한 믿을 만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며 진시황릉이나 그 인근에서도 황후의 묘는 발견되지 않았다.

진시황은 절대권력 확립에 집착해 현대 독재자처럼 모든 사무를 직접 처리했는데, 하루에 처리한 공문이 죽간으로 120근 가량이였다고 한다. 여불위의 섭정과 어머니의 쿠데타까지 겪은 경험탓으로 추정된다

쵸소카베 모토치카로 유명한 센고쿠시대 시코쿠에 기반을 둔 쵸소카베 가문이 진시황의 후손을 자처했다. 정확히는 일본 고대 씨족인 하타씨(秦氏)의 자손을 일컬은 것인데, 이 하타씨의 시조가 진시황의 후손이라고 일컫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 족보가 다 그렇듯이 믿기는 어려운 이야기. 근데 도사모노가타리라는 책에 따르면 모토치카 자신은 신라인의 자손임을 자랑했다고 한다. 물론 진실은 알 수 없다.

6. 대중문화 속의 진시황 영정

6.2. Fate/strange fake

쿠루오카 츠바키의 부모가 촉매를 이용해서 소환할 계획이었는데...(이하생략)

6.4. 어새신 크리드

에덴의 조각을 지녔던 인물로 나온다. 물론 암살당한다.

6.5. 삼국지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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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 일러스트
코에이삼국지 시리즈에서는 고대무장으로 등장하는데 정치가 100이다. 그런데 암살자 형가를 맞았을 때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었음에도 형가의 급습을 피했고 칼을 맞대어 형가를 직접 제압한 전력이 있는데도 어쩐 일인지 무력이 50대 후반. 아무래도 '형가가 서툴렀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린 것일지도. 아니면 무력 - 정치 반비례 법칙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삼국지 11에서 무력과 정치력이 둘다 80을 넘는 장수는 등애가 유일하며 둘 중 하나가 90을 넘으면 나머지 하나는 79 미만이 된다.
삼국지 11에서 보유한 특기는 징세. 지력까지 90대라서 내정뿐만 아니라 전쟁시 책략용으로도 제법 괜찮지만, 상성이 조조와 같은데도 매력이 78밖에 안되어서 군주로 사용한다면 매 계절마다 충성도 관리에 애좀 먹을 것이다. 더구나 역사 시나리오에선 수명이 얼마 안남았기에 활약할 기회도 거의 영웅집결같은 가상 시나리오밖에 없다. 분서갱유와 혹독한 법치에 의존한 사실 때문인지 공자공융이 혐오무장.
삼국지 12에서 통솔력이 81로 책정되어 전작보다 31이나 올랐다. 매력치가 없어진 걸 감안해도 엄청난 버프. 게다가 전법마저 전공격강화 전국칠웅 시나리오에서 진나라 군주로 등장한다.

6.6. 시드 마이어의 문명

문명 4까지 중국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23]하다가 문명 5에서는 측천무후에게 밀리는 굴욕을 당했다. 사실 업적으로 보나 역사적 의미로 보나 중국문명을 대표하는 지도자로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인데 이렇게 된 것은 문명 지도자의 성별 평등을 맞추기 위해 희생양이 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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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문명 온라인에서 1차 공개 지도자 4명 중의 1명으로 등장하며 다시 중국의 지도자가 되었다. 전체적으로 달걀 모양으로 데포르메된 뚱뚱한 스타일의 이미지로 나왔는데, 머리 위의 관이 거의 자기 키만하게 되었다.

6.7. 창제기

손위군홍콩 만화 <창제기>는 미소년 영정이 진시황으로 흑화해가는 이야기이다.(...)

6.8. 영웅전희

모에화 되었다. 병약 속성으로 한 약장수에게 비싼 돈을 주고 산 약을 먹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수은...

6.9.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판다리아의 안개에 등장하는 초대 모구 황제인 천둥왕 레이 션의 모티브가 되었다.

6.10. 초한전기

배우는 우화위[24] 한국 더빙판 성우는 김준.

묘사되는 모습은 전형적인 절대 권력자 그 자체지만 어떤 부분에선 다르다. 가령, 궁중연회에서 이사 같은 친한 신료를 자기 자리 근처에 오게 해서 이야기를 나누며 음식을 손으로 막 집어먹는다던지, 이사에게 좋아하는 음식을 손수 잘라 챙겨준다던지,[25] 분서에 항의하는 유학자, 대신들에게 이야기는 들어보겠다던지 하는 소탈하면서도 제멋대로의 모습이 그려진다.

또한 장성 축조도 북방 흉노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아니라 그에 대한 대비를 위함이며 법치주의적인 엄격한 통치도 그런 일환으로 제국 통치에 확고한 비전을 가지고 있는 통치자로 묘사된다.

하지만 그런 비전은 맏아들 부소를 비롯해 많은 이들에게 이해되지 못하고 그에 대해 고독감이나 소외감을 느끼는 것으로 묘사된다. 순행을 자주 다니는 것도 궁중 보단 마차 안의 흔들거림이 마음을 편하게 한다고 하며 부소에게 백성들은 이해하지 못한다고 일갈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강압적이고 포악한 모습도 그대로라 분서갱유는 물론 운석에 떨어진 문구를 보고 사방 백 리의 거주민을 모조리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한다. 불로장생의 약을 찾겠다는 의지는 여기서도 그려지며 선계에 관한 내용을 듣고 바다의 신을 사냥하겠다며 군사를 끌고 나가는 등 불사에 관한 집착도 보여주는 편. 이처럼 초한전기의 진시황은 제정신과 광기가 동시에 나타나는 인물이다.

결국 9화에서 피를 토하며 죽고 마는데 죽기 전 조고에게 장자인 부소를 함양으로 불러와 제위를 이으라고 유서를 작성한다. 유서 작성 후 갑작스레 자기 목을 조른다. 이를 보고 놀란 조고가 다가오자 갑자기 그 목을 조르다 숨을 거둔다. 아무래도 유서를 작성한 조고를 죽이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유서는 조작되고 시체로 썩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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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재위 B.C. 210년 ~ B.C. 207년. 이름은 영호해(嬴胡亥) 환관 조고의 섭정을 받아 진나라를 파탄내게한 주범이다. 매우 잔인하고 색을 좋아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결국 조고에 의해 살해된다.
  • [2] 사기에 진나라의 선조가 영(嬴)성 조(趙)씨라는 기록이 있어서 조씨라는 설이 있다. 어디까지나 설이다.
  • [3] 여씨는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주장에서 나온다.
  • [4] 다만 사마천사기에는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설을 기록해놨다.
  • [5] 동양에서 '황제'라고 흔히 번역되는 칭호 emperor의 어원이 된 imperator(최고사령관)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 출생으로, 시황제와는 1세기 이상 차이난다. 물론 카이사르도, 이후의 로마 황제들도 킹왕짱 칭호 하나 만들어서 붙인 진시황과는 반대로 전제군주 냄새가 나는 칭호가 로마의 정체성인 공화정을 부정한다는 느낌이 들어 이리저리 돌려 말하긴 했지만. 물론 진시황 이전 시대에 아케메네스 왕조에서는 왕을 황제나 천자와 비교해서도 결코 격이 떨어지지 않는 칭호인 왕중왕(Shahanshah)도 있었고, 그 이전에는 전세계의 어느 곳도 원시사회를 벗어나지 못한 시절 혼자 문명을 꽃피웠던 이집트파라오도 있었지만 동양에서는 이들을 황제라고 안 부르고 원 명칭을 써준다.
  • [6] 당시에 진나라는 법가 사상을 통한 개혁을 거치며 이미 중국의 여러 나라 중에서도 가장 강력해져 있었다. 때문에 진나라에 가는 타국의 볼모는 대개 유력한 왕족이었으나 진나라에서 타국으로 보내졌던 볼모는 언제 죽어도 별 상관없는 왕족떨거지이었다.
  • [7] 얼마나 떨거지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게 장평에서 조나라가 대패를 한 뒤에도 조나라는 저런 떨거지 하나 죽여봤자 뭐하겠냐라며 영이인에게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았다.
  • [8] 안국군의 본처가 초나라 사람이었기 때문에, 초나라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자초라는 이름을 받았다.
  • [9] 또한 사마천의 조국이었던 한나라가 진나라를 무너뜨리고 세운 나라였으므로 그만큼 진나라를 깎아 내려야 했던 점도 있었을 것이다.
  • [10] 후에 3권 분량의 초한지로 출판
  • [11] 진소왕이 죽은지 사흘 뒤에 사망한 건 아니고, 정식으로 즉위하기 전에 추모기간이 몇 달 있었다.
  • [12] 병마용갱에서 출토된 무기에는 상방(相邦)으로 표기되어 있다. 상국(相國)이라는 표현은 상방(相邦)에서 방(邦)이 한고제 유방의 이름이기 때문에 피휘를 해서 나온 표현이다.
  • [13] 여기서 父를 '보'라고 읽는다.
  • [14] 황제의 명령을 가리키는 또 다른 글자 중 하나인 칙(勅 또는 敕)은 이때 도입되지 않았고 후대에 추가된 것이다.
  • [15] 그래서 진시황 이전 시대의 글을 인용한 것을 보면 보통 사람이 스스로를 '짐'이라고 부르는 예들을 자주 찾아 볼 수 있다.
  • [16] 유사한 예로 대한민국박정희 대통령 이후 각하를 대통령한테만 쓰는 경칭으로 바꾼 것을 들 수 있다. 본래 각하는 고위 공직자한테 쓰는 말이라서 장관한테도 쓰던 말이었으며, 군에선 사단장 이상 장성급에게 사용하였다. 실제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증언을 보면 '그때 사단장 각하께서 어쩌구 저쩌구' 식의 표현을 볼 수 있다.
  • [17]사기 진시황본기에 나오는 얘기이다.
  • [18] 알다시피 천자에게 시호를 올리는 관습은 한나라 때에 바로 부활했다.
  • [19] 아무래도 주나라가 봉건제도로 나라를 다스리던 중에 지나치게 성장한 제후국에게 온갖 못볼꼴 다보였던 것을 보고 배운 듯 하다.
  • [20] 그러나 굳이 진나라 뿐만 아니라 이후의 중국에서도 정권이 교체될때마다 사상과 서적에 대한 탄압은 자주 있었던 일이다. 또한 분서갱유 자체가 지나치게 과장되어 기록되었다는 설도 있다.
  • [21] 현대에 들어 인간의 평균 수명이 늘어나긴 했지만, 그건 일찍 죽는 아이들의 비율과 질병으로 죽는 빈도가 낮아졌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최대 수명은 과거와 큰 차이는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쳐도 과로에 시달리면서 수은 퍼먹은걸 생각하면 진짜 오래산건 맞다
  • [22] 증조할아버지 소양왕이 70살 넘게 산걸 보아 수은 안 마셨으면 장수했을 가능성도 높다
  • [23] 4에서는 근현대 지도자로 마오쩌둥이 함께 나왔으나, 여전히 고대 문명의 대표 지도자로서 나왔다.
  • [24]삼국유비를 맡았다. 조조역의 진건빈의 스케쥴 문제로 대신 맡았다. 헌데 시황제의 주변인들인 이사, 조고, 호해의 배우가 삼국에서 각각 순욱, 원소, 조비를 맡았다는 점을 보면...
  • [25] 이 모습을 유학자가 참다못해 그 자리에 분노에 찬 간언을 하기에 이른다. 또 고기도 직접 칼로 잘라 칼로 찍어먹는데, 시녀를 시키지 않는것은 남들이 자기 앞에서 칼을 드는 일이 없도록 하는 연출로 진시황의 암살에 대한 경계심을 표현한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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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10-21 19:5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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