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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공습/원인

last modified: 2015-08-17 22:12:13 by Contributors

일본제국진주만 공습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석유의 부족 때문이었다.

Contents

1. 배경
2. 소련을 치지 않은 이유
3. 미국을 친 이유
4. 대미 전략
5. 후일담

1. 배경

러일전쟁 직후의 일본은 워낙 승리가 화려했던 탓에 외부적으로 열강의 대열에 합류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애초에 중공업 생산 기반이 변변찮고 농업 기반의 국가였던 당시의 일본은 스스로 해결하기 불가능한 수준의 막대한 전비와 후유증을 떠안게 된다. 그 와중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덕분에 독일령 남양 군도를 받아내어 세력 확장은 물론이고 전후 호황세에 접어들면서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시작되는 등 안정세를 되찾는 듯 보였으나, 세계 대공황 크리로 국가는 대혼란에 빠지고, 그 와중에 군대의 정치적 입김과 파워가 막강해져 결국 일본은 완전한 군국주의 국가로 변모하게 되었다.

즉, 그 당시 일본의 테크트리는 경제대공황 때에 모두 어떻게 해결해야할 지몰라서 쇄국정책으로 인해 오히려 점점 경제가 하락세에 치닫자 만연한 남의 나라의 것을 빼앗아서 살아남자라는 전략이였는데 간단히 군비강화 → 적당한 나라 털어먹기 → 털어먹은 돈으로 군비강화였는데 러일전쟁에는 오히려 엄청난 양의 손해만 보았고[1] 인구 2천만에 육박하는데 자원도 변변찮은 조선은 돈이 벌리기는커녕 엄청나게 들어가는 식민지였고 기껏 사탕수수 농장으로 돈 좀 벌리는 대만은 이미 털어먹어서 더 나올 구석이 없었다. 그리고선 어디 또 털어먹을 데가 없을까 하고 열심히 눈치를 보다가 결국 오랜 옛날의 숙원이었다카는 만주사변을 거쳐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만다. 물론 이 과정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하여간 일본의 제한된 병력으로는 아무리 날고 기어도 거대한 중국 전역을 완벽히 장악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했다. 지도상에서 점과 선으로 표시되는 주요 도시와 그 연결 철도는 점령했지만, 면으로 표시되는 중국의 한 지방 전역을 차지하는 것도 힘들어했으니...실제로 이 당시의 중일전쟁 관련 지도를 보면, 일본군 점령지역은 마치 가 파먹은 듯한 모양으로 표시된다.

사실 중국과 일본의 군사력 격차는 워낙 컸고 이건 군벌, 공산당과의 내전까지 감당해야 했던 국민당 정부가 몇 년간 노력한다고 극복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덕분에 일본군은 전투에서 자주 승리를 거뒀으나 전황은 오히려 수렁에 빠진다. 더욱이나 미국은 중국을 잠재적으로 큰 시장으로 보고 있었는데 여기에 더불어 특히 난징 대학살 등 온갖 뻘짓과 양민학살에 앞장선 결과, 중국이 국제연맹에 도움을 호소한 것에 힘입어 국제적인 압력은 물론이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를 경유해서 중국 쪽으로 지원 물자가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는데 1940년독일이 프랑스를 바르자 옳다구나 하고 힘이 없던 비시 프랑스 정부를 갈궈서 중국으로의 물자 공급을 막는 데 성공했다.

경제적으로 보자면, 소득수준은 낮지만 인구가 많은 중국은 소비재 시장으로의 가치가 컸는데, 안 그래도 경제난과 블럭화로 자유시장이 축소되는 판에 일본전쟁을 벌이면서 열강의 주요 시장 중 하나를 박살내버렸다. 당시 중국은 기술이 낙후되고 정치적으로 혼란을 겪기는 했으나, 경제적으로는 의외로 빠르게 발전하여 '당시의 일본과 크게 차이가 없는 수준'으로 평가되는 신흥 시장이었다. 그것도 일찍 개발이 되었던 양쯔강 삼각지대와 상하이 등 일부 해안지대 만으로(…). 무기를 팔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군수시장과 일반적인 시장의 크기를 비교해봤을 때, 이는 확실한 손해다.

그런데 비시 프랑스가 고분고분 말을 잘 들으니 일본은 아예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병력을 주둔시켜 완전히 삼킬 야욕까지 내비치기 시작했고, 미국이 일본에 압력과 경고를 줘도 일본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마냥 설쳐대서 골머리를 썩자, 기어이 1941년엔 미국, 영국, 중국, 네덜란드에 의한 대일 전략물자의 수출 금지[2]가 시작되었고, 당연히 석유도 수출금지 품목이 된다. 여기에서 중대한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당시 일본의 대미 석유 의존도가 무려 80%였다는 것.[3]

당시 일본 석유재고량은 평시 3년분, 전시 1년 반이었다. 그때까진 어떻게든 버티지만, 그 이후는 그야말로 파탄!

사실 적백내전 당시 일본군이 참전하여 북사할린 유전 개발권을 얻었는데, 이 전쟁에서 일본은 3만에 달하는 사상자[4]를 내고 이거 하나 얻었다고 으스댔다. 알다시피 이 개발권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죽고 나서 흐지부지되면서 있으나마나한 것이 되었다. 한편 일본군이 점령한 만주에는 다칭유전이라는 보물단지가 땅 속에 있었지만 당시 일본의 채굴 기술로는 파낼 수가 없었다. 만약 이것만 일본군이 파낼 수 있었더라면 이 후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석유가 일본의 내수를 위한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전쟁 개전을 위한 자원이었음을 생각하면, 시기의 차이만 있을 뿐 일본이 결국엔 폭주했을 것에는 변함이 없다. 애초에 석유로 만족할 애들이었다면 전쟁을 하지도 않았겠지

또한, 이 당시 독일은 유럽을 거의 석권하고 영국만이 저항하고 있었으며, 독일군은 파죽지세로 소련을 마구 밀어붙이고 있었다. 당시 시점에서 누가 보아도 독일은 승승장구하면서 세계정복을 향한 길을 순조롭게 걷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셈. 따라서 일본이 독일의 전과에 가락 얹기를 시전하여 고물을 얻어먹겠다는 발상을 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2. 소련을 치지 않은 이유

이 와중에도 일본 육군은 독일이 독소전쟁을 개전하자 평생의 숙적 러시아를 이 기회에 완전 아작내자며 소련과도 한판 붙자는 식으로 설치기 시작했었다. 물론 그건 실행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시베리아로 진격해 소련의 유전을 점령하는 방안도 있었지만, 그 당시 일본군의 능력으로는 병참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또한 이전에 있었던 할힌골 전투에서 우월한 화력의 소련군에게 탈탈 털리는 바람에 소련군에 대한 일종의 트라우마가 생긴 것도 있었고, 일본군이 진격하면 2차대전 내내 강성한 세력을 유지하던 소련 극동군과 싸워야 했으므로 일본군에게 시베리아 진격은 헛된 꿈일 뿐이었다. 해군은 물론이고 실제 전쟁을 수행할 육군의 수뇌부마저도 소련과의 전면전만큼은 결사 반대했다. 물자부족에 동원능력 부족으로 소련을 뒷치기할 실력이 없음을 가상 동원훈련을 통해 알게 되었던 것. 게다가 전쟁기간 내내 소련은 일본의 뒷치기를 우려, 극동에 상당수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1941년 겨울 모스크바가 위기에 처했을 때도 아시아 쪽의 사단을 재배치하긴 했지만 극동 지역은 오히려 더 증강(!)되기까지 했었다.[5]

그래서 물자 부족이라도 해결하기 위해 독일과 혈전을 벌이던 영국, 이미 독일에게 본토가 다 휩쓸려나간 네덜란드의 뒷통수를 치고 그 식민지들을 털어서 물자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수출 금지의 주역인 미국을 협상까지 끌고 와서 유리한 조건으로 화의를 청한다는 복안이었다. 잠깐, 소련이랑 안 싸우는 놈들이 미국이랑 싸우기로 했다고?[6]그러니까 일본이지

3. 미국을 친 이유

사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때만 해도 미국은 '열강 중의 하나'라는 정도의 이미지로, 미국이 스스로 의도 혹은 자초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물론 공업 생산량이나 경제 규모로 보나 여러가지 측면에서 미국대영제국을 뛰어넘은 것은 훨씬 전이었으나, 대외적으로 미국이 초강대국이라는 이미지가 형성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미국은 이미 20세기 초반에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 유럽열강을 모두 합한 정도의 경제규모에 도달했지만, 스스로 세계 최강국이라는 인식이 부족했다. 17세기부터 내려온 서유럽 중심의 세계 패권 경쟁에는 도전하지 않으면서 미서전쟁으로 쿠바푸에르토 리코, 그리고 태평양 지역의 몇 개 섬을 획득하는 선에서 만족하고 있었고 앞마당인 카리브해와 중남미 지역에서만 골목대장 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먼로 독트린을 스스로 깬다는 것은 여러모로 도전(한마디로 '손해')이기도 했다. 미국은 중남미와 태평양 지역의 패권만 유지해서 본토의 안전만 확보하면 된다는 고립주의 노선이 득세하게 된 것이다. 실생활에서 실천하는 복불복 정신, "나만 아니면 돼!!!" 나치 독일의 팽창에 대해서도 불간섭 정책을 주장하는 유화론자들도 상당히 많았다.[7][8] 그래서 일본이 독일과 동맹을 맺고 미국에 도전했던 것이다. 다만 간과한 것이 있다면 태평양 지역은 바로 미국의 직할 영토이며, 이는 미국의 안전과 직결되므로 고립주의자들도 어떻게든 사수하려고 했던 지역이었다는 것. 당시 세계 최강국은 자타공인 해가 지지 않는 제국 대영제국이었는데, 이쪽은 독일과의 전쟁으로 정신이 없었다.

결국 미국은 추축국 입장에선 경제력은 부강하나 군사적으로는 영국보다 한수 아래인 열강 정도로 여겨졌던 것. 물론 당시에도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공업생산력으로 보아 이미 미국은 사실상 세계 최강이며 미국과 싸워서 이길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대미 경계론이 먹히지 않았던 것은, 추축국 독일의 기세가 워낙 강세였기 때문이다. 독일은 열강국 가운데 하나였던 프랑스를 완전히 먹어버리고, 다른 유럽 국가들을 모조리 짓밟아 유럽의 패자로 떠오르고 있었다. 남은 적은 오직 영국소련 정도였다. 그나마 영국은 섬에 틀어박혀서 독일의 공습을 겨우겨우 막아내는 처지였고, 소련은 독일에게 탈탈 털리는 시점이었다. 즉, 독일의 세계 정복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고, 일본 역시 여기에 숟가락을 얹어야 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나치독일 자체가 철저한 광신적인 인종주의가 팽배하여 지금으로서는 이해가 안되겠지만 '미국은 많은 하등민족의 피가 섞여서 약하고 의지가 부족하다'라는 괴상한 답까지 내놓을 정도였다. 물론 이게 치명적인 오판이었다는 것을 추축국들이 깨닫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순혈과 인종주의에 집착하던 '독일본'이 망하여 인종주의의 폐해만 널리 알려주었다.

어쨌든 두 초강대국(미, 영)과 동시에 전쟁을 벌여서 협상장으로 끌고 온다(...)는 말도 안되는 계획이 세워졌으며,(뭐 일본의 계획대로 갔다면 진짜 성립될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의 의지를 너무 과소평가했고 진주만에서 전략적 목표를 단하나도 파괴 못시키고 미드웨이에서 시원하게 일본의 주요 항공모함 함대의 대다수가 바다에 수장되면서 전쟁은 미국이 주도권을 전부 잡고 말았다.) 영국령 말라야의 고무 산지와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팔렘방, 보르네오 유전 등을 점령하고 이후를 버티자는 계획이 세워졌다.

4. 대미 전략

이런 상황에 직면해 해군의 실질적인 전선부대 최고 지휘관인 당시 연합함대 총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제안한 '그나마 현실적으로 미국과 싸울 방법'이라는 게 바로 진주만을 기습해 태평양 및 아시아 일대의 최강국인 미국 해군, 그중 태평양 함대를 전멸 또는 최소한 괴멸 직전 상태로 몰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면 미국이 힘을 회복하는 동안 일본에게 없는 석유를 얻을 수 있는 동남아를 점령하고 섬들을 요새화 시켜서 미국의 공세의지를 꺽고 가능하면 더 이상의 결전 없이 어떻게든 평화협상을 성사시키는 거고, 정 안 되면 태평양을 종심(縱深)[9]이 깊은 전장으로 삼아 미국의 공세전력을 소모시켜 최종 결전에서 그들을 격멸하고 어떻게든 평화협상을 성사시키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 시대상에서는 미국과 일본의 전쟁의 승패를 전혀 알 수 없었고 일본은 위의 작전이 성공하면 진짜로 성공할 수 있었다. 다만 심각한 차질이 발생했다는 것을 빼면.....-

이것은 애초에 미국과 일본이 전쟁 상태에 들어갈 경우에 상정되어 있던 방어전략을 기반으로 한 것인데, 처음부터 상대에게 완전히 이길 자신은 없으니 일단 한 방 세게 때리고 상대가 정신 좀 없는 틈을 타서 내가 이겼으니 그만 싸우자고 손 내밀 계획이었다는 뜻. 제3제국의 동맹다운 매우 참신한 국가 전략이다.[10] 훗날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다는 보고를 받은 윈스턴 처칠이 일본 대사를 불러 "국제규약은 지키라고 있는 거다. 안 지키면 나중에 곤란할 걸"이라고 타일러 보내기도 했다.

결국 "니들 태평양 함대 캐발살낸 우리 실력을 봤으면 어서 기름 내놔라. 안 주면 태평양은 우리 것"이라는 개념, 그러니까 "내가 저 새끼 귀싸대기를 존내 맛깔나게 후리면 감동 먹어서 나랑 협상하겠지?"라는 생각으로 진주만 기습을 가한다.

뭐 결국 일본군의 유일한 성공작인 진주만 기습은 성공적[11]으로 끝나나, 미국이 겁먹기는 커녕 오히려 자기의 귀싸대기를 후려친것에 감동먹어서 분노 게이지가 가득 차 쇼미더머니를 치며 무한맵 모드로 전환. 그리고 미국과 일본의 마지막 전쟁이자 미국의 전략적인 수인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의 정예 항공모함들을 수장시키는데 성공하면서 일본은 더 이상의 효율적인 방어가 불가능해졌다. 왜 미드웨이에서 일본의 손실이 불러온 결과가 '효율적인 방어 불가'냐면, 많은 섬에 아무리 많은 방어물을 깔고 우주방어를 해도 지형문제든 뭐든 방어가 약한 섬들은 언제나 있는데 이걸 저지해줄 해군의 잘 훈련된 기동부대가 없으면 피해서 그곳을 공략하고 무시하고 넘어가버리면 그만이기 때문.

그 뒤는 뭐, 다들 잘 아는 일본의 세기중(…) 막장 전설이 시작된다.

5. 후일담

대한민국만주 웨스턴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는 '일본군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빼앗으려는 보물지도'가 등장하는데, 사실은 이게 제정 러시아 시절 만들다 만 석유채굴기지의 위치가 그려진 지도였다. 실제로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원유가 솟아오른다. 만약 이런 게 실제로 있었다고 한다면 그 중요도는 정말 장난이 아닐 테니, 일본군이 정말 목숨 걸고 확보하려 드는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2차대전이 끝나고 15년이 지난 1959년, 중국이 만주에서 석유를 발견했는데, 그것이 헤이룽장성의 다칭유전(大慶油田)이었다. 어차피 당시 일본의 기술로는 채굴이 불가능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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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사실 러일전쟁은 경제학적으로 보면 완전히 실패한 전쟁이었다. 몇 년치 예산에 해당하는 전비를 쏟아부었는데, 그 돈의 대부분은 영국/미국에서 차관(빚)으로 들어왔다. 무엇보다 러일전쟁이 결과가 일본의 승리이기는 한데, 그렇다고 일본이 완전히 이긴 것도 아니어서 장기적으로 가면 불리하다는 애매한 상태로 종결되어서 러시아는 한푼의 배상금도 지불하지 않았고 일본 입장에서는 조선에 대한 지배권 확보를 제외한다면 사실상 얻은 것이 없었다. 항목을 참고하기 바란다.
  • [2] 이들 나라의 영어 알파벳 첫글자를 하나씩 따서 이 경제봉쇄 정책을 'ABCD 포위망'이라고 부른다. A는 미국(America), B는 영국(Britain), C가 중국(China), D가 네덜란드(Dutch). 네덜란드는 본토가 독일군에게 털렸지만 본토보다 훨씬 넓은 인도네시아 식민지는 영국으로 망명한 네덜란드 정통정부의 통제 하에 있었다.
  • [3] 중동의 유전이 개발되기 전이어서 2차대전 당시 미국은 세계적인 산유국이었다.
  • [4] 병사 대다수가 전투보다는 추위 속에서 얼어죽거나 동상으로 팔다리가 썩어들어가 장애인이 되면서 군인으론 다시 활동할 수가 없게 되었다.
  • [5] 실제로 일본의 동맹이었던 독일은 독소전을 개전하며 일본이 소련 극동지역을 공략해주길 집요하게 요청했지만 결국 묵살되었다. 그 결과 미국이 2차대전에 참전하자 소련은 안심하고 극동군을 유럽전선에 배치할 수 있었고 독소전쟁의 전황은 호전되었다.
  • [6] 소련과는 할힌골 전투를 통해 승리할 수 없다는 현실을 직시했지만 미국과는 붙어본 적도 없는데다가 필리핀 점령시 겪은 미군을 보고는 그것이 미국의 실체라고 오판한 것이 이유다.
  • [7] 대표적인 인물이 존 F. 케네디의 아버지로 당시 주영국대사였던 조지프 케네디와 당시 부통령 존 낸스 가너.
  • [8] 정반대의 경우가 중국으로 서구 열강은 청나라를 '잠자는 사자'라고 생각하여 건드리지 않았으나 아편전쟁으로 청의 유약함이 드러나자 앞다투어 뜯어 먹겠다고 찾아왔다. 그 결과가 오늘날의 홍콩, 마카오.
  • [9] 군대의 전방에서 후방까지의 거리.
  • [10] 훗날, 이라크독재자 사담 후세인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바보는 서로 통한다.
  • [11] 뭐, 보급용 기름 등의 자원을 부수지 않았으니 완벽한 성공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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