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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

last modified: 2015-11-01 01:14:33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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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비의 묘, 악왕묘에 있는 진회 부부. 왼쪽이 진회의 부인 왕씨,[1] 오른쪽이 진회이다.)

"莫須有"(막수유, 아마 있을 지도 모르오)[2]

Contents

1. 개요
2. 생애
3. 자손
4. 평가
4.1. 비판론
4.2. 옹호론
5. 진회는 착했습니다(?)
6. 대중문화 속의 진회

1. 개요

秦檜
1090년 ~ 1155년


남송의 재상이자 중국인들이 가장 미워했던 간신 가운데 하나로 당시 주전파의 대표자 악비와 정반대인 화평파의 대표자. 그리고 가사도의 선배격인 사람이다.

2. 생애

1115년 과거에 합격해서 출세가도를 달리다가 1127년 정강의 변이 나자 에 포로로 끌려갔으나 1130년 탈출해 남송 고종을 섬겼다. 고종은 아주 좋아하며 돌아온 다음 해 진회를 재상으로 임명한다. 1142년, 결국 금과의 화평교섭을 성공적으로 마친다. 그 뒤 금과의 화평교섭에 나가 노력했으며 죽을 때까지 공포정치를 펼쳤다.

앞서서 "막수유"에서 보듯 주전파의 대표자 악비를 매우 싫어해서 그를 죽음으로까지 몰았다. 악비가 북벌에 성공해서 공을 세우면 자신의 기득권이 사라져서다.

고종의 무능으로 19년이나 재상에 있었고 성대한 장례식도 치뤘다. 한번은 구문룡사진구문룡과 다르다, 구문룡와는이라는 사람이 입궐하는 진회를 암살하려고 칼을 휘둘렀으나 빗맞았고 진회는 놀란 말에서 떨어져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 뒤로 진회는 50여 명의 경비병들과 같이 다녔다. 진회 일가의 권력은 고종의 양자 송효종이 강력하게 권력승계를 막으면서 사라졌다. 그런데 최근 진회의 묘를 발견했는데 도굴 흔적이 있는 듯하다.

3. 자손

진회와 왕씨 사이에서는 자손이 없어 조카 진희를 양자로 들여야 했다. 인과응보라면 인과응보인 셈이다. 진희는 양아버지의 강력한 힘과 뇌물로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했다. 진희의 아들이자 진회의 양손자가 진훈으로 진회는 이 수양손자를 꽤나 총애하였는지, 시험출제 관리를 포섭하여 진훈을 장원으로 조작시켰다. 이 때문에 억울하게 차석으로 밀린 사람이 방옹(放翁:방자한 늙은이란 뜻)이란 호로 많은 명시를 남긴 시인 육유였다.

진회는 육유를 차석으로 내리고도 모자라 육유의 얼마되지 않은 수도에서의 관료생활 내내 괴롭혔으며, 육유는 관료생활 대부분을 한직으로서 지방을 떠돌고 은퇴 뒤에는 야인으로 초야에 묻혀 살아야 했다. 불행중 다행으로 육유는 그만큼 창작에 전념할 수 있었고, 무려 1만 수에 달하는 시를 지어 중국사 최고의 다작왕 타이틀을 얻었다.

4. 평가

4.1. 비판론

오랑캐와 대항해 싸운 유능한 장수를 죽음으로 몰았고 공포정치를 펼쳐 반대파를 숙청하며 한족의 자존심을 망가뜨린 죄로 진회는 큰 비판을 받고 있다. 항목 맨 위의 사진처럼 악왕묘 앞에 진회가 부인 왕씨와 함께 무릎을 꿇은 모습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아직도 악비를 참배하는 사람들은 진회의 동상에 신나게(?) 침을 뱉는다고 한다. (...) 지금은 침을 뱉지 말라는 표지판이 있지만 아직도 그렇다.

당시 진회에 건 증오심에 임안(지금의 항주)의 한 간식가게에서 진회 부부를 밀가루로 빚어 매우 패 반죽한 뒤 그것을 하반신이 뱀처럼 보이게 등을 붙여 1쌍으로 꼬아서 기름에 넣고 튀겨 팔았다는데서 온 유타오(油條)[4] 라는 도넛 비슷한 쫄깃한 식감을 가졌지만 단맛이 아닌 소금기 있는 반찬급의 음식이 있고,[5] 이 음식에서 간식으로 발전한 매실호두를 넣어 반죽한 뒤 튀겨 복숭아씨를 뿌려 먹는 꽈배기 모양의 단맛이 도는 빵인 텐진(天津)과 마화(麻花}도 있다.

너무나 진회의 악행이 부끄러워서 600여년 뒤 청 건륭제 때 진회의 후손 진간천은 과거에 급제하고 금의환향하다가 악비 무덤 앞의 먼 조상이었던 진회 부부상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들은 송 왕조 이후로 "회"라는 이름을 부끄러워했고 나는 지금 악비의 무덤 앞에서 "진"이라는 성 때문에 참담해 하는구나!

이 때문에 아직도 중국인들은 이름에 회(檜)자를 쓰지 않는다. 참고로 진회에 건 중국인의 증오감을 나타내는 몇몇 속담을 소개한다.

진회도 몇몇 친한 사람이 있다.
칼을 천 번 맞을지언정 진회와 사귀지 않는다.

4.2. 옹호론

진회를 무조건 폄하할 필요가 없는데, 당시의 송은 경제력에 비해서 군사력이 형편없어 대책없는 주전론을 내세워[6] 금에게 발리느니 차라리 돈을 내주며 화평을 유지하는 게 단기적으로는 옳을 수도 있다. 장기적인 군사력 강화를 생각한다는 전제 아래서 말이다. 게다가 진회 본인이 포로였으니 주전론의 위험성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그 사이에도 진회는 담판을 벌여 북송 영토에 "초(楚)"라는 괴뢰국을 세우려는 금태종의 계획도 막았다.

이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때 금나라가 송나라 황성(皇姓)인 조씨 대신 다른 성씨로 허수아비 한족 왕조를 세우려고 하는 것을 포로로 잡혀있던 진회가 금나라 황제의 면상 앞에서 크게 따져서 저지한 것으로 진회도 목숨을 건 것이었고, 금태종이 노해 진회를 죽일려고 하였는데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를 좋게 본 금나라는 진회를 풀어주었다. 그러니 간신이나 그냥 잔인하거나 어리석은 정치가면 모를까 매국노라 하기는 그렇다. 적어도 송을 들어다가 금에 바쳐서 부귀를 누리지는 않았으니까...

더구나 남송 황실조차 악비의 활약은 인정했으나 한편으로 견제하였는데 그 이유는 악비가 이끄는 악가군은 송나라 정규군이 아닌 악비의 사병들이었고 금나라를 물리칠 정도로 강한 군사력과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있는 악비가 만약 딴마음을 먹거나 악비의 부하들과 백성들이 악비를 새로운 왕조의 황제로 추대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진회는 방패막이고 송 고종이 주범으로 악비는 고의적으로 죽였다는 말이 있다. 왜냐하면 악비가 금나라에 있는 송휘종과 흠종의 구출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왕좌를 잃고 싶지 않았던 고종과의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다.[7]

즉 악비를 직접 죽인 것은 진회이지만 계획을 구상하고 진회에게 명령을 내린 사람은 고종이다. 또한 진회의 공포정치도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정강의 변과 전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던[8] 남송이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는 많은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게 역사가들의 주장이다.

5. 진회는 착했습니다(?)

동북공정이나 "소수민족 융화"를 내세우는 중국 학계에서는 진회를 재평가한다.[9] 그에 따라 학계에서는 추앙하던 악비를 깎아내리고 진회를 띄우는 상황이다.(…) 역시 모두 자국의 것으로 넣으려는 대륙의 기상답다. 심지어 꼿꼿히 일어서 있는 진회의 동상도 나왔다고. 더구나 당시 기록중에 악비의 지속적인 군량과 전비 요구는 남송재정과 백성들 삶에 많은 부담을 주었다고 되어있으며 악비의 공적도 정사가 아닌 그 후손들인 악비가 죽은지 몇십년뒤에 기록한 행장으로써 보병 수백으로 금나라군 수만명을 괴멸시켰다는 등의 과장되었거나 미화된 내용이 많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일반 시민들의 평가는 예전과 비슷하며 악왕묘는 그대로이다. 또한 '이 녀석도 사실은 좋은 녀석이었어' 범주에 넣기도 어려운데, 엄연히 재상으로서 공포정치를 펼치고 문자옥까지 일으키며 숱한 사람들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자는 이보단 더하다.[10]

6. 대중문화 속의 진회

만화 소녀침경(화타위전)에서 악역으로 등장하고 악비, 한세충과는 동문으로 악비, 한세충과는 달리 메이의 조부, 메이의 숙조부에게 의술을 배웠다고 하며, 어머니가 임신 중독으로 사망하면서 그 두 사람의 스승에게 거두어졌다.

그 두 명의 스승에게 총애를 받던 애제자였지만 성정이 포악해서 파문되었기에 악비, 한세충이 그 때는 진회를 몰랐다고 하며, 3년 만에 모든 의학서를 통달한 수재였지만 생명의 비밀을 알기 위해 사제들의 몸을 해부하는 등 각종 위험한 연구를 하면서 파문되었다. 메이의 조부는 그를 죽이려 했지만 진회를 거두어들인 메이의 숙조부가 차마 그를 죽이지는 못하고 침을 통해 혈을 파괴해 의학의 길을 걷지 못하게 하는 수로 끝냈으며, 스승이 가지고 있던 소문의 침이 생명의 비밀을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금황구침에 눈독들이게 되었다.

금나라와의 화친을 주장하면서 북벌을 주장하는 악비와 대립하는데, 궁궐에서 퇴청하자 악비와 신경전을 벌여 금을 자극하지 말라면서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하라고 명령하는 것이라면서 금황구침의 힘을 이용해서 악비의 목을 졸랐다.

다음날에 악비를 9족과 함께 처형하도록 만들고 죽은 사람을 3일간 살릴 수 있는 구황지침 9개를 모두 손에 넣기 위해 각종 악행을 벌이는데, 스승 중 한 사람인 메이의 조부, 스승의 아들이자 사형인 장원경 등을 찾아가 자신에게 협력하도록 했다가 거절당하자 구침지희[11]를 하도록 한 후에 성공하지 못하자 죽였다.

메이, 메이린을 자신의 아래에 거둔 후에 메이린에게 구황지침을 찔러 구황지침에서 나오는 병기를 사용하도록 이용하면서 구황지침을 주고 자신의 허락없이 사용하지 못하게 했으며, 메이, 메이린 등이 자신의 허락없이 구황지침을 사용한 것을 알고 부하들을 시켜 메이의 아버지 시체를 태우게 했다.

송고종도 시체로 만들어놓고 구황지침을 통해 일부러 살려놓아 실질적으로 송나라를 장악했으며, 구황지침을 통해 여러 사람들을 병기로 만들어놓는 등 실험을 행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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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진회의 마누라는 악비를 죽이기를 망설이는 진회의 마음을 돌렸다는 까닭 때문에 있다. 덕분에 남편과 동급으로 취급받아 저런 꼴이다.
  • [2] 진회를 대표하는 명언(?)으로 악비가 반역을 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무엇이냐고 묻는 장군 한세충에게 이 말을 했다고. 이 말을 듣자 한세충은 "그 세 글자로 천하가 납득하겠소이까!"라고 격하게 항변했지만 악비의 죽음을 못 막았다.
  • [3] 나중에도 말하겠지만 간신으로서 유혈통치를 하긴 했지만 나라를 팔아먹진 않았으므로 이런 평가는 부당하다. 주화파라는 점만 빼면 차라리 이이첨과 비길만 하다.
  • [4] 당시엔 문자 그대로 진회를 튀긴다고 유작회(油作熺)라 불렀지만 서슬퍼런 병사들의 눈을 피하러 유작귀(油作鬼)라 돌려 불렀고, 도리어 진희가 이 별명으로 불린다.
  • [5] 아침식사로 간장에 찍어먹거나 두유, '떠우장'이라고 하는 설탕을 넣은 콩국이나 기타 죽과 같이 먹거나 다른 음식을 싸서 먹는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안산이나 구로동에서 맛볼 수 있다. 중국인들, 특히 강남 사람들은 유조를 그야말로 매일 먹는다.
  • [6] 정강의 변이 일어난 근본적인 원인도 송의 약한 군사력을 생각하지 않고 금나라와 전쟁을 벌인 것이 컸다. 더구나 당시 악비와 한세충을 포함한 몇군데를 제외하고는 송나라는 금나라에 전체적인 전선이 밀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 [7] 남송의 고종은 적자인 흠종에 비해 서자였기 때문에 당시 기준으로는 정당성이 없는 황제였다. 더구나 황제의 명령없이 악비를 죽인 경우라면 진회의 목또한 무사하지 못한다.
  • [8] 정강의 변 이전에도 송나라는 전국적으로 반란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들이 갑자기 중앙정권인 송황실이 무너졌다고 해서 갑자기 애국자가 되어서 금나라와 싸울 이유는 더 없었고 말이다. 당연히 정강의 변 이후 남송 영토안에서도 많은 반란세력이 잠재해 있었다.
  • [9] 지금 중국학계에서는 이러한 민족간 투쟁을 내전으로 다루려고 중화민족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금도 엄연히 같은 중화민족으로 간주하며, '금-송 대립'시기를 '통일전쟁'으로 규정하는 막장 움직임을 보인다! 가장 압권은 조선족도 중화민족의 한 갈래라고 주장한다. (...)
  • [10] 그러고 보면 둘 다 나라를 망친 간신이자 남송 출신이며, 공포정치로 충신들을 괴롭혔고 동북공정이 재평가한다. 다만, 진회는 위에 나오듯이 정말 나라를 망쳤는지는 의문이 들며, 가사도처럼 자기 전공을 속이지는 않았다. 물론 거기까지이지만.
  • [11] 9개의 침을 동물에게 몸이나 내장 등을 피해서 찔러넣어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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