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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

last modified: 2015-04-11 00:06:30 by Contributors

이 항목은 차붐으로 검색해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


전설이 되어 버린 현역 시절[1] 눈여겨봐야 할 곳은 대퇴 사두가 아니라 대퇴 이두 부분이다. 보통은 운동선수라도 저렇게 대퇴사두처럼 튀어나올 정도로 단련하기 힘든 부분. 오늘도 고기반찬 내일도 고기반찬 그 다음날도.


키커지 표지모델의 위엄



성명 차범근 (車範根 / Cha Bum-Kun)
생년월일 1953년 5월 22일
국적 대한민국
출생지 경기도 화성시
본관 연안차씨
가족

3남 중 막내, 배우자 오은미,
딸 차하나, 아들 차두리, 차세찌

포지션 스트라이커
신체조건 178cm, 80kg[2]
유스팀 고려대학교 (1972~1975)
선수시절 소속팀 서울 신탁은행 (1976)
공군 (군복무) (1976~1978)
SV 다름슈타트 98 (1978~1979)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1979~1983)
TSV 바이어 04 레버쿠젠 (1983~1989)
국가대표 132경기 / 59골[3]
감독 커리어 울산 현대 (1991~1994)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1997~1998)
선전 핑안 (1998~1999)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04~2010)

대한민국을 대표하던 축구 선수이자 감독. 현 축구 해설가.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전 감독.

Contents

1. 소개
2. 선수 생활
2.1. 독일로 진출하기 까지
3. 전설의 시작
3.1.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3.2. TSV 바이어 04 레버쿠젠
3.3. 그의 위상
4. 감독 생활
4.1. K리그 울산 현대
4.2. 1998년 프랑스 월드컵 국가대표팀
4.3. K리그 수원 삼성 블루윙즈
4.3.1. 2010년 이전
4.3.2. 그리고 2010 시즌
4.3.3. 사임
5. 해설가 차범근
6. 근황
7. 한국 축구에 미친 영향
8. 그 외


1. 소개

갈색 폭격기
역대 최고의 아시아 축구 선수이자 아시아를 넘어선 월드클래스 공격수[4]
현재의 대한민국 축구가 있게 한 살아 있는 전설[5]

'국제 축구 역사&통계 연맹'이 선정한 "20세기 아시아의 선수". 일본도 이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다만 감안해야 할 것은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 줄여서 IFFHS가 그렇게 권위가 있는 기관이 아니라는 점이다.

국가대표 132경기 출장, 59골 기록, 한국인 선수 최초의 센추리 클럽 가입, 한국인 선수 중 역대 최다 A매치 골 기록, 세계 최연소 센추리 클럽 가입(24년 139일), 독일 1 분데스리가에서 12년 간 총 308경기 출장(외국인 선수 중 역대 3위), 98골(외국인 선수 중 역대 5위) 기록. 참고로 분데스리가 98골 중 페널티킥 득점은 0골이다.[6] DFB 포칼이나 UEFA 컵 기록까지 포함하면 372경기 121골. 차범근은 인터뷰에서 "멀티 골은 20번이나 해 봤지만, 해트트릭은 한 번도 못해봤다."고 말했었다. 대신 후배가 그의 한을 풀어줬다!

1976년, 아시아에서 큰 국제대회이던 박스 컵에서 말레이시아[7]를 상대로 7분 남기고 4:1로 뒤진 상황에 차범근이 혼자 세 골을 몰아쳐 무승부를 만드는 기적을 연출하기도 했다. 아쉽지만 방송국도 그 경기의 테이프가 없다고 했고 차범근도 두 골은 기억이 나지만, 나머지 한 골은 어떻게 넣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박스 컵도 그렇지만, 이시기의 국대축구는 영상이나 문자 매체 등의 상당수가 유실된 일종의 흑역사라 차범근의 육체적 전성기인 20대 초반의 활약상은 직접 본 사람 외엔 아무도 모른다.

모두가 다 아시겠지만, 아들이 로봇이다 차두리이다.

2. 선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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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시절 한줄 요약.jpg 이게 어딜 봐서 한 줄이야[8]

독일 현지에서의 차범근의 위상을 느낄 수 있는 2014 브라질 월드컵을 앞두고 SBS에서 기획한 차범근 다큐멘터리.

국내 환경이 열악했던 시절에 이미 독일에 진출하여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인종차별을 극복하고 낸 성적인 만큼 정말 대단한 것.[9]

국내에선 '갈색폭격기', 독일에선 '차붐'이라 불리며 유명세를 탔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당시 독일인들은 이 조그만[10] 동양인 축구선수에게 세 번이나 놀랐는데, 하나는 축구를 너무 잘해서, 또 하나는 명문대인 고려대학교 출신이라서[11] 마지막으로 명문대학교 출신인데 영어를 전혀 못해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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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독일로 진출하기 까지

농부의 아들로 경기도 화성군 안룡면 송산리 [12]에서 태어난 차범근은 보리밥에 고추장을 비벼먹고 참기름을 살 돈조차 없어 비빔밥에 참기름 넣어 먹는 것조차 사치로 느낄 정도로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낸다. 학교가 끝나면 농부의 아들로서 소여물을 주거나 논 밭일을 도와주는 것이 그의 어린 시절이었고 맛있는 것을 배불리 먹는 것이 소원이었던 소년이었다. 하지만 타고난 신체와 운동신경이 탁월했는지 축구에 재능을 보인 차범근은 축구부가 있던 서울 경신중, 고등학교에[13] 입학을 하고 축구명문인 고려대학교에 순조롭게 입학하게 된다. 대학재학 중 당시 최연소로 국가대표로 발탁이 되며 이후 신탁은행과 공군에 입단하여 뛰어난 활약을 펼친다.

무엇보다 그의 이름을 알리게 한건 국대에서의 뛰어난 활약 때문. 이 때 스탯이 엄청난데 국대 데뷔 때부터 한국에 있던 때인 72년부터 78년까지 무려 118경기 55골이다.[14] 당시에는 한국을 비롯해 태국, 말레이시아 등 국가 주최로 많은 컵 대회들을 개최했었고 종종 해외 클럽들을 초청하여 친선경기를 치렀는데, 박스 컵에서 열린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의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게 되고 슐테 프랑크푸르트 코치 측이 박동희 축구협회 국제부장을 통해 분데스리가 진출을 타진하게 되며 결국 78년 12월 다름슈타트에 입단한다. 독일에선 관심도 없었는데 박동희 교수의 노력으로 겨우 테스트를 통해 입단했다는 식으로 서술되어있으나 사실과 다르다. 앞서 적었듯이 슐테 코치가 직접 차범근의 플레이를 보고 박 교수에게 제의를 한 것이고 링크참고, 박스컵 이전 5월 재팬 컵에서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와의 경기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 우도 라텍 감독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3. 전설의 시작

당시에는 군인 신분이었으므로, 제대 후 분데스리가 진출 계획을 세우게 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는데, 타군과 복무기간을 같게 해준다는 조건으로 공군에 자원입대 하였고 12월 말에 독일로 넘어가 다름슈타트와 계약을 체결한다. 그러나 몇 가지 이유로 복무기간 단축이 무산되어 만기 제대를 위해 공군으로 복귀하게 된다.[15]

3.1.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만기 제대 후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한다. 여기서 첫 시즌에 프랑크푸르트를 UEFA컵(現 UEFA 유로파 리그)[16] 정상으로 이끌었다. 리그 12골, UEFA컵 11경기 3골로 첫 시즌에 46경기 15골을 기록. 상기한 팀의 유일한 UEFA컵 우승은 물론 키커 에서 리그 공격수 부분 3위를 기록하는 등 첫 시즌에 엄청난 활약을 한다.[17] [18]
첫 시즌이 최전성기라고도 볼 수 있는 셈이다.
80-81 시즌에는 부상 등으로 리그 27 경기 8골로 비교적 부진하였으나 UEFA컵 5경기 2골, DFB-포칼 6경기 6골을 기록하며 팀의 3번째 포칼 우승을 이끌었다. 포칼 최다 득점이 6-7골 선에서 나오는걸 생각해보면 대단한 기록이다. 이후 81-82 시즌 리그 31경기 11골/시즌 38경기 12골, 82-83 시즌 리그 33경기 15골을 기록하며 좋은 모습을 이어간 , 프랑크푸르트의 재정악화로, 당시 고 연봉자였던 차범근은, 레버쿠젠으로 이적하게 된다.

3.2. TSV 바이어 04 레버쿠젠


1983년 TSV 바이어 04 레버쿠젠으로 이적한다.[19] 차범근의 말대로 레버쿠젠은 중위권 팀이었는데, 당장 차범근이 프랑크푸르트에서 활동하던 4시즌의 레버쿠젠 성적을 보면 12-11-16-11위로 분데스리가가 18개 팀으로 이루어졌다는 걸 생각하면 명문이라고 불리기는 힘들던 팀이었다.[20] 2시즌 동안 35경기 12골, 32경기 14골을 기록하며 꾸준히 활약했으며 결국 85-86시즌 38경기 19골(리그 34경기 17골)로 커리어 하이를 찍으며 레버쿠젠을 리그 6위로 올려 UEFA컵 진출을 성공시킨다. 다음 시즌부터는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변경하여 골수가 상당히 줄었지만, UEFA컵 결승전에서 결정적인 골을 기록하는 등 좋은 활약을 이어간다.[21][22] 지금이야 레버쿠젠이 분데스리가에서 우승 경쟁도 하는 강호이지만 그 당시에는 차범근이 기틀을 닦아줬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하위권 팀이었다. 차범근은 1953년생이면서 1989년 만 36살 나이까지 뛰었으니 독일에서만 12년을 뛴 셈이다. 그리고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98골은 은퇴 당시 분데스리가 외국인 최다 골 기록이었다.[23] 케이리그로 치면 데얀도 아니고 윙으로 뛰는 에닝요가 12년간 뛰면서 최다 골 기록까지 세운 격이니 독일에서 레전드 그 이상의 평가는 합당한 셈이다. 그리고 UEFA컵을 두 번이나 우승을 해 본 커리어를 이뤄낸 선수는 현재에도 전 세계를 통틀어서 9명밖에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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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프루트 시절, 알렉스 퍼거슨 감독아니, 그때도 감독을 하고 있었어?[24]이 차붐을 평가하면서.

당시 독일에 진출했던 일본 선수 쿠데라 야스히코는 차범근의 포스에 눌려서 많이 가려졌다. 분데스리가에서 윙 포워드 겸 윙백으로 뛰면서 10시즌 동안 259 경기에 출전해 34골을 넣었다. 흔히들 차범근에 견주면서 오쿠데라는 별 볼일 없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는데, 이래봬도 분데스리가에서 아시아 선수로 처음으로 리그 우승을 경험했으며, FC 쾰른 소속으로 78-79 러피언컵에서 골을 넣은 적도 있는 상당한 실력의 선수이다. 비록, 차범근과 격돌하면 영 맥을 못 추는 통에 별 볼 일없는 이미지가 굳게 남게 되었지만... 여담이지만, 오쿠데라는 현재 요코하마 FC의 구단주를 역임하고 있다.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에 한국 대표로 출장했다. 하지만, "예선전에도 참가하지 않은 선수를 대표 팀에 넣는 게 말이 되느냐?"는 반대여론도 있었지만, 해외에서는 "차범근을 대표선수로 뽑지 않아도 될 정도라면 한국은 우승후보가 분명하다."는 평가였다. 본 경기에서는 타 팀 선수들의 집중견제로 큰 활약은 못했다. 상대팀의 마인드가 '무조건 차붐만 막으면 된다.'였기 때문에 공을 갖고 있든 안 갖고 있든 무조건 수비수 2명이 기본적으로 달라붙어 있었으니... 당시 레버쿠젠 구단에서도 차범근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쓰고 있어서인지 몰라도, 부상을 대비한 전담 의료팀을 따로 파견을 했을 정도였다. 흠좀무..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일본 vs 파라과이 경기를 해설(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16강, 또는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일본을 참고)할 때, 분데스리가에서 페널티 킥을 하나도 안 찬 사실을 본인 입으로 인증했다. 이유는 실축할까봐 무서워서... 즉 분데스리가 골 기록 중에 페널티 킥은 한 골도 없다는 소리가 된다. 몰라 뭐야 이거 무서워... 본인 입으로 말하고 쑥스러운 듯 웃었다. 참고로 당시 경기는 너무 재미없어서 오히려 이런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다.

덧붙여서, 나중에 '차범근 위원에게 물어보세요!'에서 한 말에 의하면 승부차기를 못해서 승부차기로 넣은 골이 없는 것이며,[25] 골 많이 넣는 공격수라도 배짱이 좋지 않으면 페널티킥을 잘 차지 못한다고 말했다. 아무리 세계적인 슈퍼스타들도 페널티 킥을 실축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3.3. 그의 위상


sportbild지에서 선정한 79/80 시즌 분데스리가 베스트 일레븐. 3톱에 같이 선정된 다른 두명은 해당년도 발롱도르 수상자인 빈 키건과 해당년도 발롱도르 2위이자 그 이듬해 발롱도르 수상자인 칼 하인츠 루메니게. 그리고 이 둘은 각각 2회의 발롱도르 수상자들이다.

차붐이 1979/80 부터 1985/86 7시즌동안 분데스리가 선수 평점 순위는 다음과 같다

79-80 시즌 3위
80-81 6위
81-82 7위
82-83 3위
83-84 6위
84-85 15위
85-86 7위

1979/80
1. 칼 하인츠 루메니게(2.32). 1980 발롱도르
2. 케빈 키건(2.42) (전년도 발롱)
3. 차범근(2.45)
4. 지그프리트 헬트(2.52)
5. 라이너 게예(2.67)

1980/81
1. 칼 하인츠 루메니게(2.24). 1981 발롱도르
2. 프리드헬름 푼켈(2.74)
3. 만프레드 벅스뮬러(2.79)
4. 베른트 홀첸바인(2.81)
5. 게오르그 볼케르트(2.83)
6. 차범근(2.85)

1981/82
1. 칼 하인츠 루메니게(2.34)
2. 뤼디거 벤첼(2.53)
3. 라스 바스트룹(2.59)
4. 로날드 보르허스(2.64)
5. 만프레드 벅스뮬러, 우베 라인데르스(2.82)
7. 차범근(2.87)

1982/83
1. 루디 펠러(2.32)
2. 칼 하인츠 루메니게(2.32)
3. 차범근(2.52)
4. 위르겐 밀렙스키(2.63)
5. 라이너 게예(2.84)

1983/84
1. 칼 하인츠 루메니게(2.31)
2. 루디 펠러(2.55)
3. 클라우스 알로프스(2.58)
4. 크리스티안 슈라이어(2.79)
5. 프랑크 밀(2.84)
6. 차범근(2.91)

1984/85
1. 프리드헬름 푼켈(2.81)
2. 클라우스 알로프스(2.81)
3. 클라우스 피셔(2.82) (분데스리가 최다득점)
4. 루드비히 쾨글(2.96)
5. 칼 알고어(2.97)
5. 차범근(3.31) (루메니게 인테르 이적)

1985/86
1. 칼 알고어(2.73)
2. 만프레드 벅스뮬러(2.85)
3. 허버트 바스(2.85)
4. 크리스티안 슈라이어(3.00)
5. 토마스 알로프스(3.13)
7. 차범근(3.18). 리그 득점 4위

80년대 초반 79-80부터 83-84까지 5시즌의 키커지 공격수 부문 평균 평점.
1. 칼 하인츠 루메니게 2.306
2. 차범근 2.72
3. 루디 푈러 2.727 - 3시즌 평균
4. 만프레드 벅스뮐러 2.865- 4시즌 평균
5. 라이너 게예 2.886
6. 클라우스 알로프스 2.966
7. 칼 알고베르 - 2.9925 - 4시즌 평균
8. 프라이드헬름 푼켈 - 3.012
9. 위르겐 밀렙스키 - 3.012

말 그대로 80년대 분데스리가 탑급 공격수로써 그때부터 축구전문가들에게 확실히 각인되어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포인트. 특히 분데스리가 주간 베스트 11에 무려 40회나 선정되었는데 이는 역대 아시아 선수 중 독보적인 1위 기록이다.

독일에서의 현재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는데, 08/09 시즌 분데스리가에서 바이엘 레버쿠젠과 에네르기 코트부스와의 경기를 차범근이 독일에 가서 관람한 적이 있었다.(관련기사 동영상)
차범근은 모자를 푹 쓰고 부인과 같이 경기를 관람했기에 들어갈 때는 사람들이 못 알아봤었으나 전광판의 카메라가 딱 비추자(찾아낸 카메라 감독도 대단) 관중들이 모두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쳤고, 경기를 진행하던 레버쿠젠과 코트부스의 선수들도 무슨 일인지 의아해하다가 상당히 놀랐다고 한다. 심지어 트릭 헬메스슈테판 키슬링, 어스텐 라멜로프 선수들은 직접 차범근에게 찾아가서 사인을 요청하고 사진 찍기를 요청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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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차범근이 첼시를 수원 감독 자격으로 방문했을 때, 레버쿠젠 출신인 미하엘 발락[26] 이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얘기한 것도 유명한 얘기. 한때 귀화 요청도 있었는데 거절했다는 루머까지 있었을 정도.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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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선전이 끝난 이후 차범근무리뉴. 무리뉴 자네 왔는 가

81시즌에 프랑크푸르트에서 뛰던 시절 레버쿠젠과의 경기에서 상대팀의 겔스도프에게 고의성이 짙은 육탄공격을 받아 선수생명이 끝날 수도 있는 심한 부상을 입은 적이 있다. 이 때, 프랑크푸르트 팬들은 난리가 나서 레버쿠젠까지 가서 겔스도프에게 살해 위협 소동까지 벌였다. 프랑크푸르트팀은 겔스도프를 고소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차범근의 동의를 구했으나 차범근은 고소를 취하했다고 한다. 오오 대인배. 그리고 레버쿠젠으로 이적했을 때 겔스도프와 재회하는데, 그 이후 겔스도프는 타 팀 선수의 거친 수비로부터 차범근을 지켜주게 된다. 이후 겔스도프와는 절친한 사이로 지내는 모양이다. 이 사건 이후 분데스리가는 엄격하게 파울을 제재하는 분위기로 변하게 된다.#

여담으로 현 독일 대표 팀의 감독인 요아힘 뢰프 감독은 선수시절 차범근과 같이 선수생활을 했었고, 주전에서 밀려 항상 서브멤버였다. 차범근이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 독일 경기를 중계하고 있었는데, 당시 수석코치[28]였던 요아힘 뢰프가 카메라 화면에 잡혔다. 그러자 차범근이, "아, 저 코치가 예전에 저랑 팀 동료였는데... 이름이..." 그러자 옆에 있던 김성주 캐스터가 "요아힘 뢰프 코치입니다." 라고 했다. 그러자 차범근이 "아, 맞습니다. 선수 시절 제 동료였었죠. 좋은 선수에서 이제는 좋은 지도자가 되었군요." 라고 말했다. 그러자 캐스터가 다시 물었다. "선수시절 요아힘 뢰프는 어땠나요?" 라고 묻자, 차범근은 시크하게 "제 교체 선수였습니다." 라고 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조 추첨에서, 차범근이 추첨자가 되지 못하자 여기저기서 말이 많았다. 특히 독일에서는 "차붐이 죽은 게 아닌가?"라고 의심했을 정도. 외국에서도 이 정도였으니 축협에 대한 국내 비판 여론은 어마어마했다.[29] 더군다나 세계최고의 스포츠 축제의 위상도 모르는 듣보잡 여배우에게 추첨자 자격을 줬으니...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해설을 하던 차범근이 독일과 파라과이 전을 중계하던 중 '오늘 독일은 지금까지의 경기 중 가장 나쁘고 준비도 덜 된 경기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30]

당시, 독일 국대 감독이었던 루디 푈러가 이 말을 듣고 '레버쿠젠에 있을 때 아스피린을 너무 먹은 게 아니냐?'[31], 농담을 섞어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는데[32] 이 이야기를 들은 독일 시민들은 '어떻게 감히 차붐에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냐?'라고 오히려 자국 대표 팀 감독인 루디 푈러를 깠는데 진짜로 너 따위가 차범근님에게 실례되는 말을 하다니라는 뉘앙스보다, 농담이어도 정도껏 해야지 라는 인신공격에 가까운 말을 했기 때문에 까인 측면+독일 국민들도 예선전 경기력의 실망에 대한 결과인 것이다. 결국 루디 푈러 감독이 차붐에게 개인적으로 사과를 전했다고 하며 차붐도 훈련장에 찾아가 화해했다고 한다.당시 뉴스 소개영상. 참고로 루디 푈러는 로타어 마테우스, 위르겐 클린스만과 함께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서독을 우승시킨 최고의 스타로 칭송받던 인물이었다. 차두리에게는 푈러 아저씨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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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월드컵 당시 아르센 벵거가 차범근에게 따봉엄지를 지켜드는 장면이 찍히기도 했다. 그리고 2014년 브라질 월드컵 결승전 중계가 끝난 후 나오는 길에 또다시 아르센 벵거가 축하인사(?)를 했다고 한다. 아마 독일이 우승하자 독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차붐에게 축하인사를 한 듯싶다.

이분과 같이 따봉을 선보였다. 같은 따봉 다른 느낌 이게 바로 진정한 월드클래스 따봉

은퇴 직전 레버쿠젠 감독을 하던 리누스 미헬스 감독 밑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리누스 미헬스는 바로 네덜란드 토탈풋볼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세계적인 명장이었다. 차두리에게는 리누스 할아버지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2010년 골 닷컴 인터내셔널이 선정한 '분데스리가 용병 TOP10'에서 3위에 선정되었다.[33]

2013년 아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레전드 베스트 11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11인의 사진이 프랑크푸르트 역내에 전시 되었는데, 전시 당일 자리에 참석해 이름을 빛내주었다. 유럽은 차범근을 최고라고 인정했다는 쾌거. ##

2014년 1월 대한민국미국과의 친선 A매치 전에 미국 대표팀 감독인 위르겐 클린스만이 SBS해설위원으로 참가한 차범근을 알아보고 다가와 포옹과 환담을 나누는 장면이 찍히기도 하였다. #

그리고 SBS 브라질 2014 특집다큐에서 프랑크푸르트를 방문했는데 아직도 그의 인기는 식지 않았다는걸 보여줬다. 이 항목 상단에 링크된 동영상이 그것.

브라질 레스토랑에서 독일의 내무부 장관이 먼저 차붐을 알아보고 사진 찍자고 요청할 정도.
#

독일 축구계의 전설인 로타어 마테우스도 차붐을 알아보고 먼저 찾아와 인사를 했다.

현역으로 뛸 당시 독일의 시인인 에크하르트 헨샤인이 차범근에게 헌정하는 시가 있을정도니 그의 독일에서의 평가는 말하면 입이 아픈 수준이다.

“Hymne auf Bum Kun Cha”
Schön ist, Mutter Natur, deiner Erfindung Pracht,
Die den großen Gedanken vermochte, den Knaben zu träumen,
zu denken – und dann auch zu Bilden mit den schnellen, beseelten, jauchzenden
Füßen des Jünglings: Flink, flitzend,
Flirrend und flackernd – nicht lange fackelnd,
Doch feuernd und feiernd; den fühlenden Herzen Frankfurts zur Freude.
Bum Kun Cha! Freund aus dem Osten! Fremdling bist
Du nicht länger – nicht bitt’res Los ist Exil
Dir! Heimat, die zweite, du fandst sie.

독일어로 번역을 해보면 알겠지만 신이 차범근을 우리에게 보낸 건 축복이다. 뛰어난 재능과 발재간은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다. 대충 이런 내용이다. 차붐의 위엄.

4. 감독 생활

4.1. K리그 울산 현대

1989년 레버쿠젠에서 은퇴하고 귀국하여[34] 차범근 축구교실을 여는 한편 1991년 현대 호랑이 축구단(現 울산 현대)의 감독으로 부임한다. 흥미로운 것은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 마찬가지로 차범근 감독의 전임 감독이 김호였다는 것. 감독 부임 첫 해인 1991년 K리그 준우승에 기여하였다. 하지만 그가 감독으로 있던 중 그의 지도 방식과 크게 마찰을 일으킨 최강희가 결국 은퇴하였다.

1994년까지 울산 현대의 감독을 맡으면서 통산 55승 50무 46패. 하지만 1994년 시즌 후 성적 부진으로 울산의 감독직에서 경질되었다. 감독직에서 물러난 후 다시 야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4.2. 1998년 프랑스 월드컵 국가대표팀

역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박종환호 차범근호 히딩크호

당시 대표팀은 빠따 박종환 감독이 이끌던 대표팀이 1996년 아시안컵에서 대실패[35]한 뒤 '누구를 감독으로 선임해야 할 것인지'로 여러 말들이 많았다. 이러한 가운데 차범근은 감독으로 취임했다.

대표팀 시절 차범근이 강조했던 것은 '템포 축구'였다. 선수 개개인이 공을 가진 시간을 최소화하면서 상대의 빈틈을 공략, 발 빠른 윙어-서정원, 고정운, 이상윤 등-를 활용하여 측면을 무너뜨리고 결정력을 가진 스트라이커-최용수-가 골 망을 흔든다. 당시 차범근이 사용한 3-5-2 전술은 현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실상 5-3-2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것도 '4 윙어 전술'로 미드의 3 중 2가 윙어(...). 즉 중앙은 유상철 혼자 버티는 전술[36] 전적으로 측면 돌파를 중시하는 그의 전술-타겟 놓고 양사이드 윙어 무한 크로스-은 아시아권에서는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또한 그 때는 왼편의 하석주와 오른쪽의 최성용이 최전성기이기도 하여 이들의 활동량으로 중앙에서의 빈 공간을 커버하였다.

이러한 전술을 바탕으로 선수들 개개인의 정보를 컴퓨터 분석을 통한 데이터 축구를 앞세워 주목받았다. 1997년 월드컵 최종예선에 일본,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UAE와 한조에 속해 6승 1무 1패. 특히 97년 9월 27일의 도쿄 대첩은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축구 한일전 역사상 최고의 명경기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사실상 악몽의 시작이나 다름없다. 월드컵 본선에서의 허황된 기대치는 바로 이 도쿄 대첩에서 시작됐으니...

최종예선에서의 호성적에 따라 한국 팬들은 '이번 월드컵은 되겠다.'는 긍정적 인식이 퍼져 있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참패가 거듭되며 조기 경질되고 말았다. 멕시코에게 1:0으로 앞서고 있다가 내리 세 골을 내주며 1:3 역전패, 결정적으로 네덜란드에게 0:5 라는 굴욕적인 스코어로 패배한 게 컸다. 그로인해 한국 축구 역사상 초유의 월드컵 기간 도중 감독 경질을 당하면서 쓸쓸히 혼자 고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참고로 당시 네덜란드의 감독은 4년 후에 한국을 4강으로 이끈 거스 히딩크 감독.

상당히 운이 없던 월드컵이기도 했다. 주전 스트라이커 황선홍은 괜히 중국하고 평가전했다가 부상당해 못 뛰었지[37], 에이스인 최용수와 서정원은 제 컨디션이 아니었지, 본선 첫 경기에서 한국의 월드컵 본선 사상 처음으로 선취골을 넣었던 하석주가 바로 가린샤 클럽 가입해버렸지……
서정원은 아이가 수두를 걸렸는데 가여워서 안아주었다가 수두가 옮았다

프랑스 월드컵은 백태클에 대한 규정이 상당히 강화된 첫 대회였는데, 실제로 보면 태클이 들어갈 때 멕시코 선수가 뒤로 돌았기 때문에 고의성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다만 태클 자체는 거칠었기 때문에 충분히 카드는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고, 실제로 차범근은 이를 두고 "옐로카드로 끝날 정도라 생각했는데 퇴장을 당해서 당황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게다가 애초에 조 편성부터가 어려움을 넘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당장 팀 각각의 면모만 보아도, 먼저 네덜란드는 이전부터 월드컵 준우승만 2회에 일단 월드컵에 나오면 조별리그 통과를 밥 먹듯이 이뤄내는 나라였고,[38] 당시 스쿼드 조차 과거, 미래를 통틀어도 나오기가 어려울 정도로 역대 최고 수준의 레전드급 선수들이 즐비한 최강팀 중 하나였고,[39] 벨기에 역시 랭킹 20위권을 넘나들고 오랜 월드컵 참여경력과 더불어 16강 진출도 여러 번 이뤄낸 무시 못할 다크호스였으며, 이 두 팀에게 프랑스는 홈그라운드나 마찬가지였다.[40] 게다가 멕시코는 당시 피파 랭킹 10위권을 다투는 북중미의 강호로 월드컵만 나오면 일단 16강은 가는 국가였다.[41] 이런 살인적인 수준의 강호들 사이에서 대한민국은 그저 아시아에서 월드컵 흥행에 구색이나 맞추러 나오는 최약체 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고, 따라서 대부분의 외신들 평에서 한국은 16강 진출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그런 와중에 조추첨 당시 국내 언론들은 "멕시코는 우리와 대등하게 경기해 본 경험이 있었고, 네덜란드는 다인종 팀 구성 때문에 팀 케미스트리가 약하다는 평을 했으며,[42] 벨기에는 80년대의 강팀일 뿐 지금은 약세라는 평을 내리며 셋 중에 한 경기 이기고 두 경기 정도 비기면 괜찮겠다"는 실로 무식한 수준의 평을 쏟아냈다. 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생각이니? 사실 외국 언론과 항시 접하는 한국 언론들이 정말로 경쟁국들을 저렇게 판단하고 그런 평가를 했을리는 없고, 가망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해외 축구에 무지했던 당시 대중을 기만해댔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우리나라 기자들과 전문가들이 직접 여러 경기를 보고 평하는 것보다는 외국 언론의 평을 보고 정리하는 수준이었고, 당연히 출처가 되는 언론이 속한 국가들이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축구 강국이니 이들 언론의 분석만 보고 분석을 한다면 해볼 만 하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기도 했다.[43] 그 결과 정보랄 것이 부족한 당시 대중들은 저런 희망에 가득한 거짓부렁들에 어울려 춤추며 정말 말도 안 되는 기대를 대표 팀에 거는 촌극이 벌어졌다[44].

뭐 사실 월드컵 조 편성이야 어떻게 되든 어렵지만…… 당시 차범근 감독은 이런 조 편성을 두고 언론들이 "16강 할 수 있다!"고 다들 설레발치는 것[45]에 대단히 서운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결국 그는 그렇게 경질되었다. 경질원인은 대한축구협회와의 불협화음과 감독으로서의 역량 부족 등이 거론되었는데 이런저런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축구협회와의 불협화음이 문제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가 경질된 이후 감독 없이 뛴 벨기에전은 비겼다. 그리고 차범근은 대한민국 월드컵 역사상 대회 도중 경질된 유일한 감독으로 흑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대부분 아무리 졸전을 해도 월드컵이 다 끝난 이후 감독을 경질하기 때문에 이런 사례는 국제적으로도 드문 편. 차범근 이외의 경우로는 2002년 월드컵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의 감독이었던 카를로스 파헤이라, 2010년 월드컵 당시의 프랑스 감독인 레옹 도메네크 정도 밖에 없다.

차범근이 감독으로 있었던 당시 선수들은 차범근은 터무니없는 작전을 짜서 강요한다고 그의 지휘를 평가절하였는데, 간간히 연습시합에 참여하여 선수들이 이야기한 '터무니없는 작전'을 자기가 직접 제대로 성공시킨 것과 아들인 차두리가 방송에서 "국가대표가 되고 나서도 아버지(차범근)랑 신체능력 경쟁을 벌여 이긴 일이 없다."란 말로 미루어 볼 때[46] 당시 차범근의 구상과는 달리 선수들의 기술과 신체능력, 전술 이해도 등이 차범근 감독이 원했던 수준에는 미달된 것으로 보인다.[47] 엽기적인 것은 모 선수에게 작전 지시를 하는데, 그 선수가 그 지시를 이행하지 못하자 왜 이걸 못하냐면서이걸 왜 못해~ 왜 시범을 보였는데 그 기술이 크루이프 턴에 논스톱 크로스. 이건 해내는 게 천재지 아무나 시도할 평범한 작전이 아니다. 한마디로 천재가 지도자로서 성공 못하는 전형적인 사례였다.[48] 오죽하면 이 일화를 반영한 듯 KDB 대우증권 CF에서 선수들을 모아놓고 플립플랩과 마르세유 턴, 제치고 라보나 킥으로 마무리하며 참 쉽죠라며 웃는 연출을 보여줬다. 물론 이 광고는 합성이었지만.#

차범근 본인에게도 이 당시 월드컵은 가장 뼈아프게 남아있는 모양이다. 이제 그렇게 아플 일도 없을 텐데... 그래도 최근 거스 히딩크를 만나 "너님 때문임" 하며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세월이 지나 좀 상처는 아문 모양.

그리고 16년이 지나 —1998년 조 편성과는 비교도 안 되는 꿀 조에서--비슷한 성적을 거두고도 도중 경질은커녕 유임되는 어떤 분의 처사를 보고 차두리가 분노하기도 했다.

4.3.1. 2010년 이전

국가대표감독 중도 사임이라는 다소 불명예스러운 이력을 남긴 후,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프로축구 경기에서 선수들이 승부 조작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가 대한축구협회의 분노를 사 '한국 축구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5년간의 자격 정지 중징계를 받았다. 그러나 결국...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49][50] 하지만 AFC에서 아시아 축구영웅을 너무 막 대한다는 반응을 보이자 자격정지를 3년으로 낮춘다.

이후 국 슈퍼리그 등을 전전하다가 수원 감독으로 K리그로 복귀하여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다. 다만 이후 행보를 보면

2004 시즌 우승
2005 시즌 10위
2006 시즌 준우승
2007 시즌 3위
2008 시즌 우승
2009 시즌 10위

2004년 첫 부임한 그는 그 동안 김호 감독 때 구축하던 스타일을 뒤엎고 피지컬을 활용한 축구로 수원을 개조하면서 많은 비난을 받게 된다. 물론 선수층에 큰 변화를 주기 보다는 기존의 선수+애제자 김대의와 공격수 마르셀을 추가하였는데 시즌 초 불안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후반기 수비적인 부분을 보강해내면서 후기리그 우승, 수원의 3번째 트로피를 안기게 되었다.

2005년엔 조병국, 권집, 이종민, 조성환, 고창현 등 전략적으로 키우고 있던 어린 선수를 대신해 김남일, 전재운, 송종국, 마토 등을 영입하면서 경험 있고 즉시 성적을 뽑아낼 수 있고 자신의 축구 색을 완성시킬 수 있는 선수들로 꾸며내면서 컵 대회 우승을 얻어내지만 이후 첼시와의 경기를 비롯한 부상자들이 속출하였고 특히나 선전원정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이후 내리막 길을 걸으며 2000년 5위 이후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게 되었다. 특히 당시 전재운과 손정탁의 트레이드 건은 지금에서도 논란거리.

2006년 전반기 역시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퇴진 압박을 받게 되었고 특히 송종국의 무리한 투입과 더불어 연이어 부진한 경기력을 보여주는 것도 모자라 독일 월드컵 해설까지 가버리겠다고 해 팬들의 강한 비난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당시 기회를 잡지 못하던 선수들을 중심으로 컵 대회에 내보내면서 성적은 더 바닥을 기었고 초유의 서포터 보이콧 사태까지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후반기 들어서는 이관우와 백지훈의 영입을 통해 반전을 보여줬고 FA컵과 리그 준우승을 이끌어 냈다. 물론 당시 우승을 못하면서 이미 그에 대한 믿음이 없던 팬들은 퇴진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2007년은 에두와 안정환의 영입과 나드손의 리턴으로 시즌 중반으로 향할수록 강한 수원을 만들어냈다. 했다하면 3대0 4대0이 나와 팬들 사이에서는 수원 사점 블루윙즈라 불릴 정도였는데 당시 사용하던 전술이 워낙 볼위닝에 집착하는 전술이다 보니 체력의 손실이 강했고 결국 플레이오프에서 포항에게 패퇴하며 3위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이로서 2년 연속 무관에 이르며 팬들은 다음 시즌에 대한 의구심을 가졌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남일과 안정환 등이 팀을 떠나며 다음 시즌을 불안케 했다.

아마 차범근 그에게 최고의 한해라면 역시 2008년 시즌을 꼽을 것이다. 당시 수원은 김호 감독 시절 가지고 있던 8연승 기록을 갈아치웠고 99년과 2006년에 경신한 13경기 팀 무패최다기록을 18경기로 갈아버렸을 정도로 승승장구 하였다. 물론 시즌 중반 힘이 꺾이며 나락으로 떨어지는 가 했지만 당시 차범근 감독은 그 동안 기회를 얻지 못하던 선수들의 근성을 일으키며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티켓과 리그 1위를 쟁취, 그리고 챔피언 결정전에서 환상적인 경기력을 보이며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리그 컵까지 해서 두개의 트로피를 얻어내는 성과를 보여준다.

아마 그의 감독 커리어에 있어서 이때가 가장 최고조의 순간이 아닌가 싶은데 그 이후 그의 행보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2009년 가시마 앤틀러스를 상대로 특유의 선 굵은 축구로 4-1로 발라 버리자 까방권을 획득하나 싶었으나 얼마안가 원정에서 3-0으로 캐박살났고 K리그 올스타와 J리그 올스타 팀이 맞붙은 조모 컵에서 세 번째로 만난 가시마 감독에게 그야말로 볼 점유율, 패스웍, 전술 등 모든 부분에서 완패하며 4-1로 깨지자 K리그 팬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었다.

2007년 K리그 신인왕에 오른 하태균은 잦은 부상에 시달리며 활약이 없다. 그토록 공을 들였던 서동현은 2008년 대활약을 펼치며 각성 하는 듯 했으나 2009년 완전히 버로우해 단 한 골도 넣지 못했다. 잔뜩 기대를 하고 울산에서 데려온 이상호는 2009 시즌 자신의 기량을 보여주지 못하는 감이 있었으며, 그나마 2008년 시즌이 끝나고 신영록은 해외로 떠났다. 그런데 매년 드래프트 때면 선수는 참 괜찮게 잘 뽑으니 실로 미스테리.

혹자는 감독 하지 말고 유소년 축구단 단장을 하면 훨씬 많은 업적을 남길 거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가 주최하는 차범근 축구 상에 선정된 유망주들의 면면을 보자면 박지성, 이동국, 기성용, 김두현 등.

성실하게 자기일 열심히 하는 선수들과는 궁합이 잘 맞았지만 에고(EGO)가 강하거나 (누가 좋아하겠느냐 만은)불성실한 선수들과는 마찰을 빚는 일이 자주 있었다. 최강희, 서정원, 홍명보, 영일, 나드손등이 그 예. 다만 단순히 수원과 안 좋게 헤어졌다고 끼워 넣는 경우가 있는데 조재진조성환은 두터운 스쿼드에 밀려 기회를 많이 부여받지 못한 상황 속에 팬들의 노골적인 야유까지 곁들여져 수원 구단 자체를 싫어하게 된 케이스[51]고 리그에선 한골도 못 넣으며 부진했던 안정환이나 항명파동 일으켰던 이천수는 순전히 본인 탓이다.

아무튼 그럼에도 매년 1개 이상의 우승컵은 가져오고 있어서 마냥 비난할 수는 없게 만들기도 한다. 심지어 최악의 경기력을 보였던 2009년에도 FA컵의 우승으로 AFC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획득하였다.

4.3.2. 그리고 2010 시즌

2009 시즌의 불명예를 만회하겠다며 야심차게 선수 영입을 했지만 결과는 그야말로... 야심차게 뽑은 브라질 용병은 3명 다 시망급이고(시망 항목의 2번이 아니라 4번!), 제주 유나이티드에다가 배기종과 박현범을 조공하고 강민수와 이동식을 받아왔다. 국가대표 팀에서는 유독 부진해서 욕을 엄청 쳐 먹지만 강민수는 리그에서는 저니맨 생활을 하면서도 꾸준히 주전을 먹는 선수이고, 그럭저럭 활약을 하였지만 이동식은 아름다운 2군행. 문제는 박현범은 제주에서 포텐셜이 터졌다. 그나마 제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되는 염기훈유리몸. 거기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운재의 부진까지 겹치면서 결국 10 라운드에 리그 15위, 즉 꼴찌를 기록한다.

혹자는 차범근이 잘못한 게 아니라 허정무 아들 강민수 탓이다! 라고 주장하기도 한다.[52]

또, 2010년 5월엔 차범근 감독의 경기 후 기자회견의 발언도 곧잘 까임 대상에 오르고 있다. 관련 내용은 수원 삼성 블루윙즈 항목을 참조.
사람이 낙천적인건지 어떤 건지, 졸전을 펼치고도 지나치게 낙관적인 발언을 하거나 선수들의 플레이가 좋지 못했다는 등의 발언도 자주해서 '자신의 전술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다고 말하면서 항상 선수 탓만 한다.'고 까이기도 한다.
물론 감독의 특이한 언행이나 언플이 리그 흥행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문제는 성적이 나쁘고 경기내용마저 신통치 않으니 긍정적으로 생각해주기 힘들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2010년의 차범근의 상황은 선수 시절 명성을 감독하면서 다 깎아먹을 기세. 차범근이 감독을 못하는 이유는 자기 스펙에 맞춰 작전을 짜기 때문이란 설도 있다.

4.3.3. 사임

2010년 5월 20일,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감독직에서 물러나겠다는 공식 발표가 나왔다. 후임 감독 선정을 위해 6월 6일 전북 전까지만 감독직을 수행한 후 사임할 예정이라고 한다. 결국 6월 6일에 수원의 패배를 지켜보며 쓸쓸히 사임하고 윤성효에게 감독직을 넘겼다.

5. 해설가 차범근

1998년의 실패 이후 K리그 감독으로 복귀하기까지 온갖 우여곡절을 겪었는데, 중국 프로축구 선전 핑안 감독으로 부임했다가 1년 6개월만인 1999년 12월 재계약이 불발되었고 이후로 국내외를 오가며 눈에 띄지 않는 야인 생활을 거듭했다. 하지만 차범근 축구교실만큼은 직접 챙기면서 유소년 육성에 대한 의지만큼은 뜨거웠는데, 2001년 초에 한 어린이 선수가 "우리들이 다치는 걸 걱정해 직접 얼음을 깨고 있는 저 분이 바로 전설적인 축구선수 차범근 감독님이다."라는 글을 다음의 차범근 팬 카페에 올리면서 일부 축구팬들의 심금을 울린 적도 있었다.[53]

그러다가 정몽준 당시 대한축구협회장이 1998년 내려졌던 자격정지 5년에 대해 사면조치를 취하면서 차범근의 국내 활동이 자유로워졌고 MBC가 2000년 12월부터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54] 2001년 2월 2년 2억원에 MBC 해설위원으로 계약하게 된다. 왠지 특정 숫자가 보인다 그리하여 그 해 5월 개막된 컨페더레이션스컵부터 본격적으로 해설을 맡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축구 해설은 여러 분석을 내놓는 신문선과 이를 재치 있는 입담으로 포장하는 재익 콤비를 내세운 SBS가 대세였고 차범근 본인이 딱히 말을 잘하는 타입이 아니다보니 허정무를 해설위원으로 내세운 KBS에 오히려 시청률이 뒤지는 상황까지 있었다.

하지만 1년 후 월드컵 본선을 앞두고는 오히려 신문선-송재익 콤비를 누르고 시청률이 승승장구할 정도로 인기 있는 해설을 하게 되는데, 결정타가 된 것이 바로 2002년 5월 26일 프랑스와의 평가전. 이 때 김남일의 태클로 지네딘 지단이 부상을 당해 교체된 후 벤치에서 얼음찜질을 받고 진통제를 먹는 등의 응급조치를 할 때 신문선-송재익은 "영양제인가요?"는 둥의 헛 다리만 짚었으나 차범근은 "지금 진통제를 먹고 있네요."라는 언급을 했고 실제로 지단은 이 부상으로 인해 본선에서 제대로 뛰지 못했다. 이후로 시청률은 MBC가 일방적인 1위를 지속했고 왕년의 시청률 제조기였던 신문선-송재익 콤비를 야심차게 영입한 SBS는 2위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허정무를 내세운 KBS는 만년 꼴찌

2003년까지도 계속해서 MBC 해설을 맡았으나 계약이 만료된 것도 있고 마침 수원 삼성 감독직 제의가 들어오면서 해설위원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2006 독일월드컵 기간에 한해 MBC에서 해설을 맡기로 이면합의가 되어 있었고 여기에 엔트리에서 탈락한 차두리까지 가세하면서 또 다시 MBC가 시청률 1위를 기록. 물론 '우승 경쟁 하는 마당에' 월드컵 해설하러 가신다고 서운해 하는 목소리가 그랑블루 안에서 심심치 않게 나왔을 정도인데 다른 팀 서포터들 사이에서 무슨 소리가 나왔는지는 (....) 차범근 본인도 이를 잘 알고 있어서인지 모 스포츠 일간지에 기고한 칼럼에 '미안하다'고 답한 바 있다.

2010년과 2014년 SBS 해설위원으로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 경기와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경기를 해설했다. 남아공 월드컵에서의 그의 인기는 여전했으나 브라질 월드컵에선 나이가 들어서 인지 순발력이 좀 느려지고 말을 버벅대는 부분이 많아지고 다른 방송사의 해설위원들이 선전하면서 그에 대한 호불호가 엇갈리는 분위기다.

그가 해설 할 때의 특징으로는 차분한 보이스와 또박또박한 말투 그리고 수십 년간 쌓였던 선수시절 내공 덕에 경기를 한 수 앞 먼저 읽는 해설로 역시 해설에서도 차범근이라는 찬사를 받는다. 차범근의 해설 내공이 시청자들에게 제대로 어필했던 계기는 월드컵 직전 프랑스와의 평가전이었다. 당시 간판급 해설자였던 신문선과 같은 경기를 해설했는데, 당시 경기중 지네딘 지단이 허공으로 손을 돌렸다. 이 장면을 보고 신문선은 지단이 판정에 불만이 있어서 항의하는 거라고 했지만 차범근은 표정을 보고 지단이 부상으로 뛸 수 없다고 해설했다. 또한 조기 교체 아웃된 후 사이드라인에서 알약을 먹는 장면을 보고 신문선은 영양제를 먹으며 컨디션 관리를 한다고 해설했지만 차범근은 즉시 진통제를 먹을 정도로 부상이 심각한가봅니다라고 해설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차범근의 말은 사실이 되었다. 이때부터 차범근의 해설이 시청자들에게 제대로 먹히며 월드컵 방송을 지배했을 정도.

다만, 전문 해설가가 아니라 방송인으로써도 달변가가 아니기 때문에 해설자로써 한계는 있다. 특히 순발력이 떨어져 특히 머릿속에서 상황은 읽지만 말로 옮겨내지 못해 버퍼링이 걸리기도 한다. 이게 빠른 시간 내에 적당한 말로 옮겨지면 여지없이 명해설이 터지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도 많다. 또한, 특유의 사람 좋은 면 때문에 선수단에게 나쁜 말을 최대한 하지 않으려 하거나[55] 직접 해결책을 지시하지 않는 해설 스타일은[56]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해설까지 집중할 코어 시청자의 대부분은 공격적이며 직설적인 해설을 더 선호하나 한국에 말주변 좋고 직설적이면서 경기를 읽는 눈까지 갖춘 해설자는 없기 때문에[57] 호불호의 문제다.

축구 중계 시 카메라에 잡힌 축구계 유명 인사들을 잘 소개하지 못하기도 한다. 박문성이나 장지현, 한준희 등이 축구계 인사는 물론 때로는 정재계 인사들마저 귀신 같이 소개하는 반면 차범근은 잘 소개하지 못한다. 요아힘 뢰프의 이름을 떠올리지 못해 버벅거리거나 올리버 비어호프가 카메라에 몇 차례나 잡혔음에도 캐스터와 함께 침묵을 지켰던 사례가 있다. 물론 축구해설자의 본분은 잡학 자랑이나 선수 프로필 읊어주는 게 아니라 경기를 풀어주는 것인만큼 큰 단점은 아니나[58] 어쨌든 중계 카메라가 이들을 잡아주는 건 이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달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스포츠 중계 특성상 멘트가 중간에 끊어지는 걸 시청자들은 매우 어색해하기 때문에 이 점이 축빠들에게 약점으로 지적된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4강전 미네이랑의 비극에서 전반에만 독일이 5:0으로 브라질을 상대로 압도적으로 앞서나가자 남의 일 같지 않다면서 셀프디스를 시전 했다.

독일 대표 팀의 중계를 맡으면 중립을 지키다가도 은연중에 독일 쪽으로 편파해설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59] 하지만 프로야구의 편파중계 정도의 완전하게 치우친 모습은 당연히 아니고 잘 들어봐야 알아차릴 그런 정도다.[60] 그랬다면 공중파 해설 자체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차범근 본인의 독일에 대한 애정에 비하면 꽤 중립을 잘 지키는 편이라고 봐야 한다.[61] 단, 독일이 브라질월드컵 토너먼트에서 가장 고전한 16강전 알제리와의 경기에서는 외질이 두 번째 골을 넣자 기쁨을 감추진 못했다.

2014 브라질 월드컵을 마친 후 SBS와 계약이 만료됐고, 재계약하지 않았다.

6. 근황

2014 브라질 월드컵이 한 해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대한축구협회의 협회장이 바뀌고 내부 임원이 대대적으로 갈리면서 그동안 대한축구협회와 갈등을 빚었던 차범근이 한 자리 맡는 것이 아니냐는 소리가 나왔다. 어떤 구체적인 자리에 선임된 것은 없었지만, 브라질 월드컵 예선 바레인 전에 신임 축협회장 정몽규와 나란히 경기를 관전하는 것이 TV에 잡혔다. 축구협회 임원진을 태운 전용기에 같이 동석하여 관람을 하고 왔다고 한다. 이로서 소문은 사실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월드컵을 앞두고 축구협회에서 그에게 어떤 직책을 내릴지 주목된다. 하지만 2014년 10월이 지나도록 차범근에게 어떤 직책이 주어질 기미는 보이지 않아서 그냥 축구협회가 그간 껄끄러웠던 차범근과 화해만 한 게 아니냐는 말도 나오는 중.
최근 런닝맨 촬영을 마쳤다.

그리고 박지성 자선경기에 교체 출전하여 25년만의 경기 출전을 했다!

그의 라이브 경기를 본 올드팬들도, 라이브 경기를 보지 못한 현 세대 팬들이 한 마음이 되어서 수많은 축빠들이 차붐의 활약을 기대하며 동점골을 넣기를 바랐으나 눈치 없는(...) 인도네시아 올스타 선수들이 이를 악물고 뛰어서 그다지 많은 기회를 받지는 못했다. 애당초 뛴 시간이 10여분 남짓이었고.

기대한 슈팅은 나오지 못했지만, 좌우 사이드를 가리지 않고 뛰고 중앙에서 킬 패스도 뿌리는 등 현역 시절 말기의 공격형 미드필더에 가깝게 뛰며 클래스는 영원한 걸 보여주었다.

중간에 백 힐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해서, 웃음을 주기도 하였다.

7. 한국 축구에 미친 영향

선수로서 유럽에서 성공했다는 점을 제쳐두고, 축구인으로서 한국 축구에 기여한 바는 실로 엄청나다.

차범근은 독일에서 은퇴한 후 체계적인 지도자 수업을 받고 코치 자격증을 따 왔는데, 이는 당시 한국 축구계에서 몹시 희귀한 케이스였다.

라이센스 제도를 놓고 오해하는 사람이 많아 첨언하자면, 차범근이 단지 자격증이 있어서 대단한 게 아니다. 외국에서도 얼렁뚱땅 자격증만 따서 감독하는 야매들은 얼마든지 있다. 핵심은 제도권 스쿨을 거쳤느냐 하는 점이다. 차범근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라이센스를 따오면서 지도자가 되기 위한 선진적인 모델을 보여줬고, 차범근 이후 코치방법을 몰라 외국 감독이 하는 걸 어깨 너머로 훔쳐 배우고, 그저 가오잡기만 하던 기존의 지도 관행은 개선되기 시작했다.[62]

거기에 차범근이 남긴 가장 큰 업적은 바로 차범근 유소년 축구 교실로 대표되는 한국의 축구 유소년 인재 발굴, 육성의 토대를 잡은 것이다. 1990년 독일 생활을 마무리 하고 나서 국내에서 시작한 이 차범근 축구 교실은 우리나라 축구 역사에서, 아니 대한민국 스포츠 전 종목을 통틀어 학원스포츠 밖에서 유소년 양성을 시도한 최초의 사례이다.

오래전부터 학원축구의 폐해를 지적하고 유소년 축구의 중요성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많았으나, 정작 사재를 털어가며 이를 실천에 옮긴 이는 차범근이 처음이었다. 2002년 월드컵을 성공리에 마치고 토토 수익금으로 자금력을 확보한 대한축구협회가 비로소 유소년 육성 정책을 시작했고, 이들 2002 키즈가 바로 훗날 2012년 런던 올림픽 동메달의 주역임을 감안한다면 차범근의 선구자적 면모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차범근축구상을 제정해 이동국, '박지성', 기성용 등 축구 꿈나무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처럼 유소년 육성과 지도자 교육이라는 해당 국가의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부분에 한발 앞서 유럽축구를 경험한 차범근이 이른바 "선진적인 모델"을 보여준 것은 한국 축구계의 크나큰 자산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차범근 개인이 감독으로서 업적은 공과가 크게 갈린다.

가장 먼저 지적할 부분은 세계 축구의 유행과 발전상에 뒤쳐졌다는 점이다. 차범근의 축구철학이 1970년대 분데스리가 스타일을 숭상하기 때문에, 감독을 맡았던 수원도 이 영향을 크게 받았다. 재임기간 동안 꼬박꼬박 트로피는 따줬기 때문에 간과하기 쉽지만, 사실 이 시기 수원 팀 자체는 내부적으로 곪아가고 있었다.

차범근 해임 이후 K리그의 빅5 추세를 본다면 귀네슈-빙가다-최용수로 이어지는 FC 서울, 김정남-김호곤으로 이어지는 철퇴 울산, 최강희가 구축한 닥공 전북, 파리아스-황선홍으로 이어지는 스틸타카 포항은 모두 고유한 팀 컬러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유독 수원만 라고 조롱을 받는 형국이다. 과거 김호 감독 시절의 수원발레리 니폼니시부천과 더불어 리그 최고의 미드필더 을 운용하며 포백 시스템과 존 디펜스 도입 등 선진축구로 팬들의 찬사를 샀던 시절을 떠올린다면 명백한 퇴보다.

또한 프런트에서 우수한 선수들을 사주면 그만큼 성적을 내줬기 때문에 정작 팀의 근간이 되는 유스가 황폐화하는 부작용을 낳고 말았다. 서울과 포항 두 팀에서 유스 출신들이 하나 둘 주전을 꿰차며 가시적인 성과를 올리고 있고, 2012~13년 포항의 유스 출신 영건들이 패스축구로 수원을 털어버리며 '승점자판기'라 조롱하는 광경을 거듭 목격한 수원 팬들 입장에선 결코 좋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다.

때문에 'K리그 수원 감독 맡지 말고 유소년 축구만 몰입하셨더라면 두고두고 존경받으며 욕 먹을 일이 없으실 텐데' 하고 탄식하는 축구팬들이 많다.

  • 국가대표에서 처음으로 4백 수비진을 도입했다.[63]
  • 일찌감치 체력집중 트레이닝을 강조했다.[64]
  • 선후배관계는 중요하지만 경기장에서는 형 선배 호칭을 빼라 했고, 기자회견 시간을 정해놓고 언론의 무차별 인터뷰를 차단하는 등 여러모로 서구 형에 가까운 팀 운영을 보였다.

잘 살펴보면 위의 3가지 모두 차범근 이전부터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 감독들이 일치감치 지적한 문제들이다. 다만 국내 축구 인들이 한국 실정을 모르는 외국인의 헛소리 정도로 치부해 버린 것이 문제였다. 사실 비디오 감독관, 피지컬 트레이닝, 평등한 선후배관계 등 히딩크의 성공요인으로 꼽히던 요소들 대부분이 차범근이 먼저 이야기한 것이다. 다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뿐. 2002년 이전까지 한국 축구계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이야기도 된다.

8. 그 외


62세 어르신의 위엄
2014년 현재 허벅지 상태를 보면 차두리의 말이 진담인 것을 알 수 있다. ㄷㄷ 다만 '이제는 차두리가 나보다 더 허벅지 굵음' 갑빠도 라고 2010년 월드컵 때 '차범근에게 물어 보세요' 에 대한 대답으로 하신 바 있다.

  • 여타 운동선수와는 달리 일찌감치 광고 출연이 많았다. 이미 독일 진출 전이었던 1970년대 후반 남양유업의 요구르트 광고에 나왔던 것을 비롯해, 1980년대에는 레버쿠젠의 모기업인 바이엘 제약의 광고에도 자주 나왔다. 2000년대 들어 SK텔링크 00700 CF에 고정 출연하며 김선아와 함께 포스를 뿜어내었다. 원래 파트너였던 싸이병역비리에 걸려서 하차. 명언은 "국제전화 비싼 줄 알았지? 아니야!!"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이 한창일 땐 신문선과 나란히 해설계의 거성으로 활동했다.[65][66] 2006 FIFA 월드컵 독일 때는 차두리도 같이 해설을 하면서 부자가 같이 해설을 하기도 했다. 이 때 대한민국과 스위스의 조별 예선에서 스위스가 2번째 골을 넣자 차두리가 "이건 사기입니다."라고 말하자 차범근이 차두리를 노려보면서 입단속을 시킨 것이 밝혀져 잔잔한 웃음을 주기도. 2002년 월드컵 이전 거스 히딩크 감독이 오대영 감독이라고 비난받을 무렵, 그를 지지한 몇 안 되는 축구 인이기도 하다. 다만, 수원의 성적이 부진할 땐 감독 때려치우고 해설이나 하라고 욕을 먹었다.

  • 슬하에 2남 1녀를 두고 있다. 장녀 차하나. 그리고...
    70년대 후반 찍었던 공익광고. 그 때는 삼천리금수강산 초만원 하던 시절이니...
    그리고 아들 둘을 더 낳았다.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 장남 차두리, 차남 차세찌. 장녀는 현재 번역가로 활동 중이며, 막내아들은 해병대를 전역 후(2009년 입대) 형과 아버지와 함께 간때문이야 광고에 출연 중. 딸은 결혼해 아들을 두었는데, 이 아이[67]가 축구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차범근으로선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차두리가 결혼할 때 기자회견에서 손자가 태어나면 자신의 노하우를 총동원해 축구선수로 키워보고 싶다고 밝혔다. 자신이 바빠서 아들 두리를 제대로 봐주지 못한 게 너무나 아쉬웠다고. 2010년 11월 29일 차범근의 소셜 네트워크에 내년 5월에 태어날 차두리의 둘째가 아들이라는 소식이 올라왔다. 링크참고 네티즌들이 예상하는 아이 이름은 차바인, 차쯔바(독일어로 2는 zwei쯔바이) 등등이었는데, 정작 한달 늦은 6월말에 태어난 둘째 아이의 실제 이름은 '차아일'(Ail). 독일어가 아닌 웨일즈어로 '2'라는 뜻의 이름으로, 많은 네티즌들의 허를 찔렀다.[68] 어쨌거나 많은 이들은 벌써부터 "2030년 월드컵 국대 원톱"으로 단정 짓는 중.

  • 기자 기레기 들과 악연이 많다. 80년대 초반에는 기레기들이 독일까지 가서 "양주를 내놓으라, 대접 잘해라." 이딴 무 개념 쓰레기 짓거리를 해서 정나미가 떨어진 차범근은 문전박대를 해버렸다고 한다. 그러자 한국에서 신문으로 "차범근 독일에서 무 개념으로 군다." 이렇게 왜곡을 하는 기사를 써재꼈다. 이런 일로 아버지가 속상해하던 걸 보던 아들 차두리도 커서 기자들을 꺼려하며 기레기들과 갈등이 많았다. 덕분에 김병현을 옹호하다가 그런 기레기에게 욕설을 듣기도 했다.

  • 2010 남아공 월드컵에 주전 수비수로 출전중인 아들 차두리에 대해서 해설 중에는 말을 아꼈지만 경기 종료 뒤에는 우리 두리 잘하잖아~~ 하며 눈을 초롱초롱 빛내셨다고 한다.링크참고

  • 또한 한국이 16강에 진출하자, K리그 구단들에게 열악한 환경속에서 선수들을 잘 키워져서 고맙다는 감사 코멘트를 했다고 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고, 여러 번 자신의 신앙에 대해 간증을 했는데 종교문제 때문에 구설이 오른 적이 있다. 1997년의 월드컵 예선 때 한국 국가대표팀이 골을 넣으면 기도를 드려 자주 카메라에 잡혔다. 도올 김용옥이 신문기고로 이를 비판했고, 이후에 차범근도 반박 기고를 하여 키배가 벌어진 적이 있다. 그리고 부적을 사용하는 고정운을 잘 기용하지 않는 것도 이런 종교문제 때문이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원수라 할 수 있는 통일교 계열의 K리그 구단 천안 일화 천마성남으로 연고를 옮기려 할때 성남 기독교계가 항의를 하자 차범근은 신문기고로 "축구와 종교는 상관없다."고 신문기고를 한 적이 있다.

  • 2010년에 나온 차두리 로봇설과 관련하여, 차두리 로봇 설계도를 알려달라는 팬들의 장난스런 요청에 로보트...그거 일급비밀이야. 많이 알면 다친다고!!! 로보트 아빠는 상관없지만 로보트 엄마는 비밀로 부치고 싶어해. 이해해줘. 로보트 가족 중에는 엄마 힘이 젤 세다고!!!라고 답하며 축구 실력뿐 아니라 유머감각도 레전드급임을 과시했다. 그 보다 며칠 전, 차두리가 로봇 설에 대해 한 말을 보면 부자가 다 유머감각이 뛰어난 듯하다.

  • 감독직 사임 이후 SBS에서 국가대표 경기 해설자로 활동 중이며 평가는 굉장히 좋은 편. 선수 출신답게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경기 내적인 내용들을 잘 짚어주고 감정적인 애국해설을 자제하고 경기의 흐름과 풀어나갈 방향을 거론하는 방식. 보다보면 후배이며 제자들인 선수 한명 한명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게 보인다. 2011년 2월 1일, 박지성이 은퇴한 것에 대해, 축구 유망주들이 유년기에 훈련을 너무 많이 하는 관행을 고치려 자신이 노력하지 않은 것이 부끄럽다며 인터넷 상에 글을 올린 게 화제가 되었다(관련 기사).

  • 소중한 날의 꿈에 캐스팅 되신 듯하다. 직접 보면 안다.

  • 일본 만화 캡틴 츠바사의 한국 팀 선수로 나오는 차인천모티브이기도 하다. 설정이 상당히 흡사하다.

  • 피파 시리즈[69]에서 전설의 팀(팀명은 '클래식 XI') 멤버 중 한명인데, 유일한 아시아인이기도 하다. 흠좀무#
    스탯은 전설의 선수 아니랄까봐 메시와 거의 동급인 90.

  • 2013년 10월 17일부터 다음에서 '차범근의 따뜻한 축구'라는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독자들의 평도 상당히 좋은 칼럼으로 유명해지고 있다. 링크

  • 한때 딸 차하나의 독일인 친구 아버지를 마중하러 김포공항에 나갔다가 당시 김포공항 경찰대(전경)의 불심검문을 받게 되었는데, 주민등록증을 안 가져와서 곤혹을 치렀다고 한다. (차범근이 1997년~1998년 중 날짜미상의 '전경'지에 기고한 글 중에서)당시 국민적 스타인 차범근을 그 전경대원이 몰랐을 리는 없고 일부러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 한국 선수로서 세계무대에서 활약한 레전드라는 점에서 현시대의 레전드인 박지성과 같이 언급되거나 비교되는 일이 잦은 편이다. 물론 둘 다 월드 클래스의 실력을 지닌 선수였지만 현역 시절 남긴 실적과 역량을 비교하자면 아무래도 차범근이 우위. 유럽 정상급 리그에서 중위권 팀의 에이스 스트라이커로 통산 98골을 넣으며 UEFA컵 우승을 이끈 차범근과, 세계 정상권 명문 팀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긴 했지만 에이스라기에는 다소 모자란 주전급 선수 박지성은 약간의 클래스 차이가 있다. 굳이 말하면 팀을 이끄는 에이스와 팀에 기여하는 좋은 선수의 차이.[70] 또한 박지성은 '차범근 유소년 교실'세대의 첫 주자이자 '차범근 축구 상'의 수상자이기도 하다.

  • 자기 주관이 뚜렷한 성격이라 그런지 스타플레이어와 자주 충돌했다. 차범근과 최강희의 불화는 유명하고 98년 국가대표 감독일 때는 서정원의 벤피카 진출에 대해서도 불화가 있었다고 하는데 경향신문에는 "입단을 구걸하러 가서 무엇 하겠습니까?"고 서정원이 속고 있다고 인터뷰했다고 신문은 보도했다. 그래서 축구협회에 이적동의서를 발급하지 않아서 벤피카로 가서 연습경기까지 뛰던 서정원은 해외 진출이 무산되었다. 이외 수원 시절 국내로 유턴했던 안정환, 이천수와 불화가 있었는데 이 둘은 본인들 탓이 더 컸던지라 차범근에 대해선 별 말이 없었다. 선수시절 얽힌 일 때문에 최강희 감독은 그를 독단적이라고 비난하기도 했고 지금도 사이가 별로 안 좋다.[71] 서정원 감독과는 지금은 감정이 다 풀렸는지 잘 지낸다.

  • 이임생은 김호 감독시절 대표 팀에 소집 되서 훈련 중에 연고전/고연전이 열려서 무단이탈 한 이유로 그 후 국가대표에 소집되지 않았는데 차범근이 국가대표 감독일 때 다시 재발탁했다. 이 때 같은 고려대 선, 후배라서 다시 기용 한게 아니냐는 루머가 있었다. 이 후 이임생은 차범근 축구교실과 차범근이 수원 삼성 감독일 때 수석코치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이임생은 벨기에 전 붕대 투혼과 수원 삼성에서의 수석코치로 우승까지 함께한 엄연히 공적이 큰 사람이다. 말 그대로 쓸 만해서 썼다. 그리고 차범근은 국가대표 감독일 때 장대일도 발탁해 홍명보 대타라는 중임까지 맡겼는데 장대일은 고려대 출신이 아니다.

  • 당대를 같이 보낸 선수들 중에서 차붐이 존경을 표했던 선수는 칼 하인츠 루메니게와 파울 브라이트너. 2013년 스포탈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소회를 밝혔다.

- 선수 생활을 결산하면서 남는 아쉬움이 있다면?

분데스리가 베스트11까지 오를 수 있었지만 그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높은 한 단계, 즉 루메니게, 브라이트너 등이 서있던 경지에 오르지 못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더욱이 처음 분데스리가에서 뛰던 정열과 패기였다면 충분히 오를 수 있었던 곳에 나는 적지 않은 사람들과의 오해와 갈등으로 혼란에 빠져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는 아쉬움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내가 꼬이지만 않았으면, 발롱도르 1,2위하는 사람들 경지까지 오를 수 있었어. 라고 말하시는 차붐의 위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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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사진은 TSV 바이어 04 레버쿠젠 시절이다.
  • [2] 아들 차두리와 신체조건이 거의 같다 http://sports.media.daum.net/sports/soccer/newsview?newsId=20150101070211435
  • [3] 121경기 55골로 알려져 있었으나, 2014년 11월 6일 축협이 데이터베이스 조사를 통해 누락된 기록들을 포함하면서 현재는 이 기록으로 수정되었다.
  • [4] 이건 국내의 설레발이 아니라 유럽리그와 같은 월드클래스 리그에서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독일에서는 지금도 회자되는 선수였다.
  • [5] 특이하게도 대한민국에서는 신격화와 평가절하가 공존하는 기이한 선수이기도 하다. 특히 박지성 이후 해외축구를 접한 해축빠들 사이에서 유독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이것은 차붐이 해외에서 뛸 당시 열악한 중계사정과 아래 언급되는 박스 컵 같은 86년 이전의 한국 축구 사 자료들이 유실되었기 때문에 그의 위상이 후대 한국 축구팬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 20년 가까이 해외진출 선수 계보가 끊어지면서 인터넷이 없던 그 당시 40~50대 축구팬들과 현 시대의 축구팬들이 완전히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당시 분데스리가의 위상이나 축구 환경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현재 메날두같은 신 급 선수들이 경기당 1골은 기본으로 넣다보니 경기당 0.3골의 차붐이 우습게 보이기도 하는 것. 26세가 넘어서 진출해 30대 시절이 더 많았다는 점과 말년에 공격형 미드필더로 전향한 점 등 여러 가지 불리한 점이 있음에도 시대 보정을 했을 때 충분히 70년대 후반~80년대 중반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공격수 계보에 내세울 수 있는 선수인건 그를 지켜본 독일과 유럽축구계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 [6] 페널티킥을 모두 실축했다는 것이 아니라, 페널티킥을 아예 차지 않았다는 의미다. 고교 시절 페널티킥을 실축한 이후 트라우마가 생겨서 프로선수가 된 이후론 한 번도 페널티킥 키커로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
  • [7] 과거 농구의 필리핀이 그러했듯이 이때의 말레이시아는 아시아의 축구 강호였다. 모든 과거의 강호가 그러하듯, 높으신 분들이 망쳐놔서 지금은 아시아에서도 하위권이다.
  • [8] 참고로 레버쿠젠은 리가내 강팀이면서도 유독 우승을 못해 네버쿠젠이라는 멸칭이 있는데 몇 안되는 우승이 차붐시절 우승이다
  • [9] 어떤 경기에선 골을 넣었더니 상대방 수비수가 인종차별적 말과 함께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기도 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다만 이건 독일에서의 일이 아니라 스코틀랜드 클럽 에버딘과의 UEFA컵(유로파 리그 전신) 경기에서 일어난 일이다. 독일에선 역사적 사건 때문에 차별이 매우 민감한 부분. 그리고 차범근은 퍼거슨이 이끄는 에버딘을 영혼까지 털어줬다.
  • [10] 사실 서양 축구선수 기준으로도 딱히 작은 키가 아니었지만, 독일에 왔을 당시 말랐던 탓에 키가 작은 걸로 느껴진 듯. 그는 진출한 뒤에 서양인들의 피지컬에 대항하기 위해 징그러울 정도로 육류를 먹으며 몸을 불렸다고 한다. 피 뚝뚝 떨어지는 레어 스테이크를 울면서 먹었다고...
  • [11] 사실 이는 뒤의 영어를 전혀 못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로 여겨진다....고 하는데, 사실 축구선수가 대학교 나온 것 자체가 당시 독일에도 그리 흔한 이야기가 아니다. 거기다 한국이 지금도 지명도 높은 국가는 아니지만, 당시에는 좋게 봐도 '이제 겨우 입에 풀칠은 해가는 나라' 이상의 이미지를 가지기 어려웠다는 것도 생각하자. '명문'이라는 인식까지는 없더라도, 위에서 말한 수준의 국가에서 대학까지 나온 축구선수라는 건 당시로서도 놀랄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고려대학교의 영문명은 Korea University라 더 놀랐을지도...
  • [12]경기도 화성시 송산동.
  • [13]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같이 있다.
  • [14] 세계 최연소 센추리 클럽 가입자이다(24세 139일)
  • [15] 당시 해외진출은 국가재산 유출이라는 인식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차범근이 독일 가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고, 북한과의 아시안 게임 경기를 위해 체육회 측에서 독일 진출에 제동을 거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 [16] 지금이야 강팀들이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상황이지만, 당시만 해도 현재의 챔스와도 같은 위상을 가진 컵이었다. 당시 유러피언 컵(챔피언스리그)는 챔피언만 나가는 진정한 의미의 토너먼트였다. 나머지 2위부터는 UEFA컵에 나가는 것이다. 이해가 안 된다면 예를 들어보자. 챔피언스리그에 (2013-14시즌으로 치자면) 각 리그 1위 팀. 맨시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바이에른 뮌헨, 유벤투스가 나간다면, UEFA컵에는 아스날, 첼시, 인테르,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리버풀, 도르트문트같은 팀들이 참가했다! 참고로 이때는 리그컵이나 FA컵 우승팀은 위너스 컵이라고 따로 나가는 대회가 있었다. 현재는 유러피언 컵과 UEFA컵이 합쳐져서 챔피언스리그가 된 셈이고 위너스 컵과 인터토토 컵을 비롯한 여러 대회가 섞여지며 현재 유로파 리그가 된 셈.
  • [17] 공격수 평점 1위는 뮌헨의 칼 하인츠 루메니게, 2위는 함부르크의 케빈 키건. 누군지 잘 모르겠다면 키건은 77,78년, 루메니게는 80,81년 발롱도르 수상자 ㅎㄷㄷ
  • [18] Sportsbild 에서 차범근을 79-80시즌 베스트 11에 선정하기도 했다. 링크참고
  • [19] 레버쿠젠 이적 비화
  • [20] 16위를 기록한 81-82 시즌은 강등 플레이오프까지 치뤄 겨우 잔류했다.
  • [21] 1차전에서 3:0으로 지고, 2차전에서 3:0으로 이겨서 승부차기 끝에 우승한다. 이때 마지막 세 번째 골을 넣은 선수가 다름 아닌 차범근이다!
  • [22] 여담으로 이 대회에서 레버쿠젠의 8강 상대는 FC 바르셀로나였다. 1차전에서 비기고 2차전 캄프 누에서 바르셀로나를 1:0으로 이겼다.
  • [23] 이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레전드 스트라이커인 스위스 출신의 스테판 샤퓌자가 99년에서야 기록을 갈아치우게 된다. 참고로 샤퓌자를 처음 스위스 국가대표팀에 발탁한 감독이 바로 울리 슈틸리케다. 상당히 묘한 인연. 추후 바이에른 뮌헨의 브라질 출신 선수 지오반니 에우베르가 기록을 깼지만 몇 년 뒤 또다시 바이에른의 페루 출신의 클라우디오 피사로가(당시에는 베르더 브레멘) 기록을 경신했다. 그래도 차붐은 여전히 외국인최다득점 5위에 랭크되어있다.
  • [24] 퍼거슨은 선수생활을 일찌감치 때려치우고 1974년부터 감독을 맡고 있었다. 에버딘 감독은 1978년부터
  • [25] 1997년 쯤 나온 '내 꿈을 펼쳐라'라는 자서전에서 보면 처음 국가대표로 발탁된 뒤 동남아의 모 대회에서 승부차기 1번 키커로 나왔는데 홈런 킥으로 대표 팀이 패하자 페널티 킥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다고 회고한다.
  • [26] 1999년부터 2002년까지 레버쿠젠에서 뛰었다. 발락의 출생지는 동독의 골릿츠라는 도시이다
  • [27] 차범근의 답변에 따르면, 1984년 당시 대표 팀 감독이 윱 데어발이었는데, "차붐 같은 공격수만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는 얘기가 바다를 건너면서 왜곡되었다고 한다.
  • [28] 감독은 위르겐 클린스만. 1994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했었고 지금은 미국 대표 팀의 감독을 맡고 있다.
  • [29] 대한축구협회와 차범근은 현재에도 사이가 매우 좋지 않은 것으로 축구팬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하다.
  • [30] 당시 중계 멘트를 그대로 옮겨 적자면 "이런 경기는 한강 고수부지 가면 볼 수 있죠?"라고 말했다.
  • [31] 레버쿠젠의 구단 소유사가 약제 아스피린의 제조사 바이엘이기 때문이다. 팀 엠블럼에도 사자 두 마리가 좌우에서 아스피린을 붙들고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 [32] 대놓고 험한 말을 했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루디 푈러 본인도 또한 바이어 레버쿠젠 출신이다. 욕으로 써먹으려면 바로 적용 되는게 자기 자신이 되겠지...
  • [33] 2위는 아트사커의 일원이자 세계최고의 윙백 중 한명이었던 비셴테 리사라수, 1위는 1977년 덴마크 인으론 유일하게 발롱도르를 받은 작은 거인 알란 시몬센. 알란 시몬센의 경우 축구선수들이 역사상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로 뽑는 라우드럽을 제치고 덴마크 최고의 선수로 뽑힌 선수다. 그리고 1977년 발롱도르 수상자.
  • [34] 여담으로, 차범근과 그의 가족이 귀국한 날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날(1989년 10월 3일)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그 날에 독일은 완전히 통일된다.
  • [35] 지금도 회자되는 이란 쇼크. 전반에 2:1로 앞서다가 후반에 다섯 골 먹고 참패했다.
  • [36] 당시 유행에 가까웠던 사령탑 축구 덕에 한국 언론은 계속 '플레이메이커'를 찾았고 그냥 중앙에 선다는 이유로 유상철을 '플레이메이커'나 '게임메이커'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게임이 안 풀리면 유상철에게 욕 몰빵
  • [37] 이 부분이 상당히 컸다고 한다. 2006 독일 월드컵 직전 전성기를 달리던 이동국이 부상당해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이 2010년으로 미뤄진 것과 같은 맥락.
  • [38] 94월드컵까지는 16, 24개 팀으로 진행되다 보니 독일과 이탈리아를 제외하면 우승 후보 급이라도 꾸준히 월드컵에 출전하기 어려웠다.
  • [39] 사실 어디까지나 네덜란드 기준이고(그래도 충분히 월드컵 4강급은 되며, 실제로 4강까지 갔다.), 보통 유로 88 우승을 이루어낸 오렌지 삼총사 시절 다음으로 역대 최강 급 네덜란드 대표 팀으로 꼽힌다.
  • [40] 실제 당시 선수들의 인터뷰를 보면 네덜란드 전 때 관중석이 오렌지색으로 도배되어 있는 것을 보고 시작하기도 전에 완벽히 기가 죽었다고 한다.
  • [41] 당시 북중미 축구에서는 멕시코가 최강이고, 미국이 멕시코를 추격하는 추세였다. 당시 한국에서는 멕시코가 유독 저평가되어서 1승의 제물이라고 보도되곤 했는데, 그 이유는 이 당시 멕시코 선수들이 해외진출을 거의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비유럽 리그에 관한 정보도 부족하니 멕시코 리그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고. 이렇게 유독 멕시코 국대가 우리나라에서 저평가당하는 현상은 멕시코 선수들의 해외진출 증가와 인터넷의 발달로 멕시코 리그를 포함, 멕시코의 전력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게 되면서 사라졌다. 게다가 당시 멕시코 국대는 캄포스, 블랑코, 에르난데스 등 전성기를 구가하던 스쿼드였다.
  • [42] 이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당시 네덜란드 대표 팀에 인종갈등이 있기는 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팀 내부 문제가 약점으로 작용하는 것은 네덜란드가 브라질, 프랑스 등과 경기를 할 때이지 당시 몇 수 아래인 대한민국과 경기를 할 때는 아니었다. 더불어 당시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은 스타플레이어들의 기강을 잡는데 능숙한 거스 히딩크였다.
  • [43] 언론이 무턱대고 악의적으로 국민들을 기만하는 기사를 쏟아냈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 당시 월드컵 직전 최종 평가전을 어느 나라와 했는지 생각해보자. 이때만 해도 '자꾸 이겨서 자신감을 갖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으며, 그로 인해 약팀과 평가전을 많이 했고, 설령 강팀과 평가전을 한다 해도 제대로 1군과 하는 게 아니라 1.5~2.5군과 경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진짜 제대로 된 세계급 강팀과 제대로 붙어보는 경우는 월드컵 정도가 전부였다. 히딩크 감독 부임 후 체코와 프랑스에게 5:0으로 처발리기 전까지,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대한민국 축구 대표 팀의 수준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 [44] 실제로 당시 우리나라 국민들 중 대다수가 네덜란드의 전력이 우승후보감이라는 부분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각종 언론 설레발에 속아 투혼만 발휘하면 이길 수 있는 '우리나라보다 조금 강한 상대'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실로 해외축구에 대한 무지의 극치로, 네덜란드 전 대패 이후 국민들 인터뷰를 지금 다시 돌려보면 눈도 못 뜨게 창피한 수준. 물론 이 부분은 언론에서 해외축구에 대한 정보 자체를 제대로 알리지 않았던 것이나 축구협회에서 제대로 된 대책도 세우지 않고 압도적인 예선 성적을 자축하기만 했던 탓이 크다. 가장 익숙한 국뽕의 폐해라고 들 수 있겠다. 근데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당장 2006년 스위스전이나 2014년 브라질 월드컵 8강 드립(...)만 봐도.
  • [45] 당시 대다수 언론이 이랬다. 그나마 딱 하나 시사저널만이 놀랍게도 웃기지 말라며 죽어라 해봐야 1무 2패가 한국 축구 현실이라는 경악스런 예상 결과를 내놓았다. 그것도 네덜란드에겐 한 4점차 정도 대패를 당하고 벨기에에겐 1~2점차 패배, 멕시코와 죽어라 해야지 비긴다는 예상을 내놓았는데, 결국 벨기에와 멕시코가 바뀐 거 빼고 대부분을 맞췄다. 만약 하석주가 퇴장당하지 않았다면 이 예상이 맞았을 확률이 높다. 참고로 이렇게 보도한 시사저널은 당시 온갖 비난과 항의전화를 받았으나 이후 많은 독자들이 공포스러울 정도로 잘 예측했다고 놀라움에 빠진 반응을 보였다. 사실 시사저널을 제외한 모든 언론들이 알면서도 개소리한 거지...
  • [46] 차두리는 저 말을 할 당시에 현역 선수들 중에선 한국 최강의 피지컬을 갖고 있었다.
  • [47] 다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선수들이 이행할 수 없는 지시는 그게 성공했을 때 얼마나 효과적이건 간에 옳은 지시라고 할 수 없다. 자기가 지도하는 선수들의 기량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에 맞는 지시를 내리는 것 역시 감독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 [48] 선수시절 천재로 불리고 훗날 지도자가 되어서도 성공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선수들을 바라보는 눈높이와 기대치의 괴리가 심하다는 점이다. 다만, 한국에서 이런 속설이 당연한 듯 취급받는 것은, '''첫째, 애초에 슈퍼스타 아니면 감독을 하지 못할 정도로 지도자 인재풀과 선별, 양성 시스템이 취약하며, 둘째, 한국 스포츠 팀 특유의 상명하복 구조와 슈퍼스타 의존성으로 인해 선수들 개개인의 창의성과 자율성이 심각할 정도로 죽어있기 때문에 유독 스타 감독과 선수들 간 정서적 갈등이 심해지는 것 때문. 차범근의 울산 현대 감독 성적을 보면 알겠지만, 차범근이 K리그 감독으로서 국내 원탑을 찍고 국대 감독이 된 게 아니다.
  • [49] 하지만 당시 차범근의 발언과 2011년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문제의 일이다. 차범근 감독이 발언한 내용은 어뷰징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K리그 승부조작 사건#s-2 참조
  • [50] 승부조작에 관한 부분은 상당히 오래 전부터 얘기가 이어져오고 있었는데, 차범근의 발언으로 수위에 오른 것뿐이다. 목적은 판이하지만 이 승부조작의 경우 유소년 수준부터 프로까지 이어지고 있기에 더더욱 위험한 부분
  • [51] 사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는데, 이 선수들이 수원을 나간 뒤 포텐이 터져서 수원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에 언급되는 것이다. 반면 수원은 하단에도 언급하다시피 세대교체에 큰 문제를 드러냈고.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차범근이 이들을 안고 갈 수 있었다면....
  • [52] 이는 편견에 가까운 농담으로 하는 소리고, 현재 수원 수비진에 강민수 마저 없었다면 더 대책이 없을 것이라는 게 중론. 곽희주와 리웨이펑을 위시한 기존 수원 수비진들의 기량 하락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 [53] 허정무 감독이 이끌던 대표팀이 2000 시드니 올림픽2000년 AFC 아시안컵에서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하면서 차범근 감독에 대한 동정 여론이 많아지던 시기기도 했다.
  • [54] 여담으로 이때 고려대 동기(72학번. 나이는 허구연이 2살 형이다.)인 허구연이 차범근을 적극 추천했다고 한다. 해설가는 선수출신이 잘 보는 거라고.
  • [55] 옳던 그르건 자기 맘에 안 들면 히딩크부터 시작해 죄다 깠던 조광래와는 성격이 정반대다. 수원 감독시절 굉장히 사이 나쁜 서울에서 뛴, 아스날에서의 부진과 명백히 자신의 잘못인 군문제로 한창 여론의 질타를 받았으며 런던 올림픽에서도 일본전 이전까지 계속 부진한 박주영 조차 최대한 감싸고 기운을 북돋아주려 했고, 월드컵 전부터 졸전을 거듭하던 대표 팀에 대해서도 해설이나 칼럼에서 비난하는 것은 자제했다.
  • [56] 허정무와 정반대다. 물론 허정무의 해설은 술 취한 아저씨 해설이라 불리며 컬트적인 인기를 제외하면 별 호응이 없다.
  • [57] 비선수 출신들은 잡다한 상식이 많고 말을 잘하나 경기 보는 눈이 떨어져서 해설이 안 되는 경우가 많고 선수 출신들은 아는 건 많은데 말로 표현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허정무나 이상윤처럼 아예 둘 다 안 되는 경우도 있고.
  • [58] 이런류에 있어 최악의 해설이 이상윤. 선수 프로필 읽고 잡스러운 얘기는 많이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경기 해설을 못한다.
  • [59] 2006년 독일 월드컵 8강전 독일vs아르헨티나 경기 해설 중 연장전에 접어들자, 우스갯소리로 본인스스로가 해설자로서 그러면 안 되는데 마음이 자꾸 독일 쪽으로 기운다고 인증한 적도 있다. 당시 옆에 있던 캐스터는 김성주.
  • [60] 독일이 골을 넣으면 목소리 톤이 미묘하게 다르다거나 상대방이 완벽한 찬스를 맞이했을 때 '위험해요!'라고 외친다던가
  • [61] 고국 축구협회로부터 공공의 적 취급을 받는 차붐이 독일에서는 유명 인사로부터 인정 받고 있다. 베켄바워라든가 마테우스, 클린스만, 뢰브 등... 또 차붐은 한국 프로축구에서 뛴 적이 없어서 어느 클럽의 전설로 남진 못했지만 독일 프랑크푸르트와 레버쿠젠에서는 레전드로 대우해 준다. 거기다가 차붐은 독일어를 거의 대부분 알아들을 정도로 (말하기가 차두리만큼은 유창하게는 아니어도) 독일어 회화가 상당한 편이다.
  • [62] 다만 안타깝게도 차범근이 축구 인이 아닌 "감독"으로 남긴 족적은 그다지 크지 않다.
  • [63] 포백 시스템은 이미 K리그에서 김호와 니폼니시 감독이 성공적으로 도입하면서 차츰 퍼지는 단계였다. 다만 대표 팀에서 줄곳 3백을 썼던 이유는 '홍명보' 때문이다. 홍명보는 3백에 최적화된 선수로, 4백에서 센터 백으론 대단히 수준 이하의 모습을 보여줬다. 히딩크도 부임 초기 4백을 실험하다가 결국 3백으로 돌아갔으며, 결국 한국 국대에 4백이 정착된 건 홍명보가 은퇴한 이후이다. 이는 과거 독일도 마찬가지였는데, '마테우스'라는 걸출한 수비수 때문에 4백 전환이 굉장히 늦었다.
  • [64] 다만 피지컬 문제는 진작부터 외국인 감독들이 지적한 바 있다. K리그 대우의 비츠케이나 올림픽 팀 쇼베츠 감독이 대표적인 예.
  • [65] 2002 월드컵 직전에 열린 프랑스와의 평가전에서 지네딘 지단이 교체되는 것을 보고 그가 부상당했다고 해설했는데, 그 말이 정확했다.
  • [66] 또한 독일과의 준결승전에서 미하엘 발락이 결승골을 넣기 불과 몇 분전에 "지금 상황은 절대로 조심해야 합니다. 단 한 방으로 경기가 끝날 수도 있거든요."라고 말했을 정도.
  • [67] 태어났을 때, 뉴스 제목은 '차붐 할아버지 되다'였는데, 제목만 보고 상당수가 '차두리(당시 미혼)가 사고친 줄 알았다.'고 댓글을 남겼다.
  • [68] 여자아이인 첫째의 이름은 '아인'이다. 독일어(Ein)로 1
  • [69] 한국 피파 온라인 시리즈 제외
  • [70] 물론 후자가 꼭 전자보다 못한 것은 아니며 박지성도 월드 클래스의 선수들이 우글거리는 맨유가 아니라 국대에서처럼 자기가 팀을 이끌어야 하는 상황에서는 충분히 팀의 주역이자 에이스다운 면모를 보였다.
  • [71] 이건에 대해선 둘 다 잘못이 있다. 차범근은 소통하기보단 강압적이었고 최강희 감독도 프로답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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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1 00: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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