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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채플린

last modified: 2015-12-04 19:43:20 by Contributors


(ɔ) Strauss-Peyton Studio from

동일인물 맞습니다. 이 미칠듯한 괴리감

"인생이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그러므로 나는 멀리 보려고 노력한다"


영국 태생의 배우, 감독, 영화음악, 편집, 작가를 겸한 먼치킨 천재 영화인.[1] 본명은 찰스 스펜서 채플린 경(Sir Charles Spencer Chaplin KBE). 20세기 전반의 영화예술을 상징하는 아이콘.

목차

1. 생애
1.1. 유년기와 연극 무대
1.2. 키스턴~뮤추얼 시기
1.3. 퍼스트 내셔널~유나이티드 아티스츠 시기
1.4. 활동 후기
2. 작품 목록
3. 수상 경력
4. 여자 관계
5. 가족과 자녀들
6. 정치/사회적 논쟁거리
7. 대인 관계
8. 음악
9. 트리비아
10. 어록

1. 생애

1.1. 유년기와 연극 무대

정확한 출생지는 호적 기록이 없어서 불확실하지만, 채플린 자신이 자서전[2] 에서 회고하기로는 사우스 런던의 빈민촌인 왈워스(Walworth)라고 한다. 부모가 모두 무대 연예인이었는데, 아버지인 찰스 채플린은 런던 뮤직홀[3]에서 약간 이름난 가수였고, 어머니 한나 힐은 이런저런 연극에서 하녀나 잡역 등 단역을 도맡아하는 직급 낮은 배우였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내 뮤직홀 배우들의 고질병인 알코올 중독에 빠지게 되었고[4], 어머니는 남편이 미국에 순회공연간 사이 드라이든 휠러라는 다른 배우와 불륜을 저지르는 바람에 결국 별거하게 되었다.

별거 후 한나는 목을 상해 몇번씩 극단을 옮겨다녀야 했고,[5] 연극 일을 포기한 뒤에는 재봉사로 근근이 생계를 잇는 지경이 되었다. 채플린은 이 시절 겪은 배고픔을 평생 잊지 못했고, 이 때의 경험이 훗날 영화들에 반어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게다가 1895년에 한나가 정신분열 증세의 악화와 호전을 반복하며 수시로 정신병원에 들락거리는 바람에, 보육원에 맡겨지거나 아버지와 잠시 지내는 등 상당히 불안정한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들의 재능을 간파해 1898년에 한 아동극단에 입단하도록 주선했고, 여기서 처음으로 코믹 연기를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이 극단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고, 배우의 길을 걷는 것을 반대한 어머니 때문에 1901년에 퇴단했다. 한편 형인 시드니는 여객선의 나팔수 겸 급사로 취직했고(이로 인해 집안의 사정이 조금이나마 나아지게 된다), 이후 동생과 마찬가지로 연기에 재능을 보이면서 먼저 연예계에 뛰어들었다.

어머니가 다시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한 1903년에는 형의 권유로 '블랙모어 극단'에서 나이를 14세로 속여 오디션을 보았고, 여기서 '셜록 홈즈' 연극에 꼬마 급사 빌리(Billy)로 출연해 호평을 받았다. 이후 형 시드니와 이런저런 촌극에 출연하기도 했고, 시드니는 1906년 당대 거물급 희극단 중 하나였던 프레드 카노(Fred Karno) 희극단에 입단했다. 채플린도 2년 뒤인 1908년에 같은 극단에 들어갔는데, 처음에 카노는 채플린을 '연기하기에는 너무 소심해 보이는 청년'이라고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채플린은 카노 극단에서 주정뱅이나 건달 등 뒷골목 인물들을 실감나고 코믹하게 묘사하면서 단시간에 큰 호응을 얻기 시작했고, 1910년에 극단이 미국 순회공연을 할 때도 주역으로 발탁되었다. 이 때의 성공으로 영국보다는 미국의 활동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1912년에 2번째로 미국 공연을 갔을 때 맥 세넷이 속한 키스턴 영화사의 전속 계약 제의를 받고 희극 영화배우로 진로를 바꾸게 되었다.[6]

1.2. 키스턴~뮤추얼 시기

그러나 고액의 봉급에 끌려서 들어간 키스턴의 촬영과 연출 방식은 대단히 원시적이고 조잡했다. 너무 웃기는 것에만 집착해 줄거리가 미칠듯이 허접한건 예삿일이었고,[7] 심지어 어떤 행사에 가서 몇 가지 웃긴 동작을 한 걸로 영화를 하나 만드는 등의 작업까지 했다. 당시 키스턴 사의 최대 인기 배우는 포드 스털링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기껏해야 와당탕 넘어지거나 파이 몇 번 맞는게 전부였다. 어쨌든 채플린은 1914년에 여기서 헨리 레만 감독으로 '생활비 벌기'라는 영화에 콧수염+외알 안경+중절모+프록코트라는 고전적인 사기꾼 분장을 하고 공식 데뷔했다.[8]

항상 아이디어가 넘쳐나던 채플린은 이내 불만을 나타냈고, 몇 주 뒤 통 크고 지나치게 헐렁한 바지, 짧고 꽉 끼는 웃도리, 대나무 지팡이, 너무 작은 모자, 칫솔 모양 콧수염이라는 괴상한 조합[9]으로 분장하고 출연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탄생한 캐릭터는 '떠돌이(The Tramp)'라고 불리며 채플린만의 전매 특허로 수십년간 자리잡게 되었고 현재도 채플린은 이 이미지로 기억된다.[10]

연극 무대에서처럼 영화계에서도 채플린은 쉽게 명성을 얻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영화사 측의 조잡한 제작 방식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영화사 사장이었던 맥 세넷이 간판 여배우로 자랑하던 메이블 노먼드를 상대역으로 출연시키면서 회유하려고 하기도 했지만, 이것도 영 좋지않은 결과만 가져왔다. 세넷은 '그럼 네가 다 해 먹어 봐라'라는 심보였는지 아예 채플린에게 감독까지 맡겨보기로 했고, 1914년 6월부터 딱 한 편[11]만 빼놓고 일생동안 자신이 주연으로 출연한 모든 영화의 감독을 다 맡게 되었다.

채플린이 감독한 키스턴의 코믹 단편들은 여타 조잡한 희극물과는 상당히 차별화되고 참신한 아이디어로 굉장한 인기를 끌었는데,[12] 이는 에사네이 영화사와 뮤추얼 영화사로 차례로 이적하면서 만든 단편영화들에도 계속 이어졌다. 특히 에사네이 시절부터는 무조건 웃기기 보다는 간간이 실망이나 좌절 등을 보여주는 비극 연기를 곁들이면서 진지하고 섬세한 연출을 선보이기 시작했다.[13] 뮤추얼 시절에는 당시 그리 보편적이지 않았던 재촬영을 적극적으로 실시해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계속 작업에 몰두하는 근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때 채플린의 인기는 그야말로 대단해서 채플린 인형, 담배, 보드게임, 만화 등이 만들어졌고, 채플린 흉내내기 대회[14] 등이 수시로 열렸다. 심지어 다른 배우들이 채플린의 연기를 무단 카피하거나 짝퉁 채플린 영화를 만드는 등의 문제까지 생겨서 골치를 썩이기도 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채플린은 법률 고문을 고용했고, 형 시드니도 동생인 찰스의 매니저로 일하면서 복잡한 계약이나 법률 문제 해결에 관여했다.

1.3. 퍼스트 내셔널~유나이티드 아티스츠 시기

1917년에 뮤추얼과 우호적으로 계약을 끝낸 뒤에는 퍼스트 내셔널 영화사로 이적했는데, 감독과 각본을 담당한 것도 모자라 아예 자기가 마음대로 돌릴 수 있는 스튜디오를 지어놓고 작업하기 시작했다.[15] 이 때부터 그 당시로서는 꽤 참신한 특수 효과 등을 동원해 더 짜임새 있는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어깨총'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현시창 참호전을 소재로 쓰기도 했다.

그러나 첫 번째 부인인 밀드레드 해리스와 애정이 식어 늘상 다투는 등 불안정한 사생활 때문에 잠시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고, 그 때문인지 '어깨총' 이후 1921년까지는 다소 매너리즘에 빠진 범작들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혼 뒤 아역배우 재키 쿠건을 공동 주연[16][17]으로 발탁해 선보인 '키드'에서 대박을 쳤고, 이 성공으로 그 동안의 부진을 싹 만회했다. 1922년에 개봉된 '순례자'에서는 개신교의 맹목적인 전도 행위를 풍자해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기도 했다.

한편, 아직 퍼스트 내셔널 전속 시기였던 1919년에 기존 거대 영화사들의 꼬장대병합에 대항하기 위해 메리 픽퍼드,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 등 동료 영화인들과 함께 '유나이티드 아티스츠'라는 신흥 영화사를 창립해 화제가 되었다. 채플린은 퍼스트 내셔널과의 계약이 끝난 뒤 곧바로 이 영화사에 들어갔고, 여기서 최초의 비극 영화 '파리의 여인(1923)'을 제작했다. 이 영화는 비평가들로부터는 대단한 호응을 얻었지만, '비극 영화인 채플린'이라는 기믹을 받아들이지 못한 관객들로부터 듣보잡 취급당하면서 그때까지의 채플린 영화 중 최악의 흥행 성적을 냈다. 후에 다시 발성 영화로 재개봉했으나 역시 망했어요.

결국 채플린은 다시 희극 영화인으로 돌아갔고, '황금광 시대(1925)'[18]와 '서커스(1928)' [19], '시티 라이트(1931)', '모던 타임즈(1936)' 등의 걸작들을 차례로 선보였다. '황금광 시대'에서는 골드러시 시대의 탐광꾼들이 겪었던 고난[20] 을 개그 소재로 쓰는 대담함을 다시한번 보여주었고, '시티라이트'에서는 영화음악까지 몽땅 작곡하는 충공깽을 선보였다.[21][22] 찰리 채플린은 '시티 라이트'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 받았다. '모던 타임즈'에서는 기계화/자동화와 실업 문제라는 사회 현실을 풍자하면서 진지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23][24]

무성영화 시대의 다소 과장됐지만[25] 그만큼 풍부하고 감수성 있는 몸짓연기를 몹시 사랑했던 채플린은 1920년대 후반부터 도입된 유성영화(토키)에 대해 연극은 끝났다. 더 이상 사람들은 상상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회의적이었지만, 그의 마지막 무성영화였던 '시티 라이트'를 걸작으로 만들어 무성영화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시티 라이트 초반부의 조각상 씬에서 등장인물들의 목소리를 지직거리는 백색소음으로 처리함으로서 무성영화에 대한 마지막 경의를 표했다. 이는 "무성영화는 유성영화와는 달리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뜻을 전달할수 있으며, 그렇기에 무성영화는 굉장하고 멋지다"는 뜻이라고 한다.

'모던 타임즈'에서부터 조금씩 발성영화의 가능성을 시험하기 시작했고 '위대한 독재자(1940)'를 첫 완전 발성영화(토키)로 선보였다. 이 영화에서 채플린은 자신과 히틀러의 외모가 비슷하다는 것을 이용하여 히틀러를 패러디한 '아데노이드 힝켈'이라는 독재자와 유대인 이발사라는 1인 2역을 선보였는데, 당시 제2차 세계대전에 관여하지 않으려고 하던 미국 정부로부터 찍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26]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을 위한 원조를 부탁하는 연설회에서 후두염에 걸린 소련 대사 대신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이 때 "동지[27] 여러분!"이라는 명대사와 함께 소련을 도와주자는 발언(당시 높으신 분들은 물론이고 일부 여론들은 소련? 빨갱이니까 냅둬요라 생각하여 원조하잔 얘기를 하지 않았다.)을 하여 지지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로 인하여 빨갱이라는 오명이 더욱 커진다.

전쟁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가면서 냉전이 새로운 떡밥으로 등장했는데, 소련 등 공산권에 대항하는 자유진영의 대빵이라는 기믹이 형성되면서 매카시즘을 비롯한 빨갱이 사냥의 열풍이 미국을 휩쓸기 시작했다. 사회 문제를 적극 영화에 거론한 채플린도 이들의 먹잇감이 되기 시작했는데, 특히 FBI의 집중 감시를 받았다. 50년 가까이 FBI를 장악했던 존 에드거 후버(J. Edgar Hoover)국장은 유력 인사들을 조종하기 위해 부하들을 시켜 불법적으로 그들의 사생활을 캤는데, FBI의 채플린 파일(Charlie's FBI file)은 무려 1,900페이지에 달했다. 이때 그를 공산주의자와 연관시킨답시고 사회주의자 계열의 유대계 부모님 밑에서 났다는 자료도 있었다.[28]

2012년에 비밀해제된 MI5 자료에 의하면, FBI는 MI5에 뒷조사를 의뢰했지만, MI-5는 그가 런던 출신인지 그의 본명이 무엇인지를 판명하는 데 실패했다. 그의 본명이 이스라엘 쏜스테인(Israle Thronestein[29])이라거나 프랑스 퐁텐블로에서 태어났다는[30] FBI 자료도 있었으나 MI5 조사에서 확인되지 않았다. MI5는 '그는 영국에서 태어나지 않았거나, 태어날 당시의 이름이 제시된 것 중에 없다.'라고 결론내리고 조사를 종결했다. 결국 그의 출신은 오늘날까지도 미스테리인 셈이다.# 사실 그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빈민가 출신의 소년에 대한 출생 기록등이 부실해도 딱히 이상할 것도 없다.

비밀 사찰을 통해 채플린의 목을 죄어오던 FBI 외에 채플린이 자신을 강간해 임신했다는 조안 배리라는 여자도 소송드립(처음엔 그냥 차비만 받고 돌아갔지만 이후 소송을 걸었다.)을 펼치는 등 사방팔방에서 공격이 가해졌고, 이 와중에 오손 웰스프랑스의 연쇄 살인범 앙리 데지레 랑드뤼의 범행을 소재로 집필한 블랙코미디 각본을 사들여 제작한 블랙 코미디 살인광시대(1946)[31]도 재향군인회 등 보수반공 성향 단체들의 맹렬한 비난[32]을 받았다. 게다가 채플린이 과거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행동거지(모던 타임즈위대한 독재자의 마지막 연설, 동지 발언 등 다 끄집어냈다.)를 물고 늘어졌다. 하지만 이 때 그의 말년을 같이 보내게 될 동반자 우나 오닐을 만나게 되는 등 나쁜 일만 당하진 않았다.

결국 채플린은 미국 활동에 염증을 느끼게 되었고, 일종의 회고 영화인 '라임라이트(1952)'를 완성한 뒤 가족들과 영국을 방문했다. 하지만 여객선이 아직 대서양을 항해하고 있을 때 미국 정부가 채플린의 시민권을 박탈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채플린은 주저하지 않고 유럽으로 활동 거점을 옮겼다.

1.4. 활동 후기

이후 주로 스위스에서 거주하면서 영국에서 영화를 촬영하는 식으로 생활했는데, '뉴욕의 왕(1957)'에서는 매카시즘 다굴을 당한 경험을 살려 미국까의 기질을 대놓고 보여주었다.[33] 그러나 특유의 개그 센스는 다소 위축되었다는 비판도 있었고, 미국에서처럼 자신이 영화 제작에 관한 거의 모든 사항을 전권 위임받는 시스템도 아니어서 제작상의 난점도 많았다고 한다.

1959년부터 1964년까지는 방대한 분량의 자서전을 집필했고, 마지막 영화이자 유일한 컬러 작품인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1967)'을 제작했다. 그러나 말론 브란도피아 로렌이라는 ㅎㄷㄷ한 주연에 유니버설 픽쳐스라는 거대 영화사의 제작이라는 잇점을 살리지 못하고 구식 로맨틱 코미디 취급을 받으며 망했어요 신세가 되었다. 특히 메소드 연기로 각광받았던 브란도의 경우 채플린이 시범을 보이고 배우가 그것을 따라하도록 하는 구식 연기 지도 방식을 매우 못마땅해했고, 촬영 후반에 가서는 제작자였던 제롬 엡스타인이 채플린과 브란도 사이의 중개 역할을 해서 겨우 제작을 마쳤을 정도로 막장이 되었다.

1970년대에는 다리 부상 등으로 인해 점차 건강이 쇠약해지기 시작했고, 영화 작업도 계속 했지만 신작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 동안 쌓았던 영화계의 업적에 대한 각종 상과 직위를 수여받았고, 1972년에는 영화 예술 아카데미가 바치는 명예상 시상식을 위하여 약 20년 만에 미국을 다시 방문하여 아카데미 시상식 참석자 전원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명예상을 수상하였다.[34] 이 때 미국으로 갔던 게 채플린이 마지막으로 미국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 1977년 크리스마스에 스위스브베에 있는 자택에서 잠을 자던 중 숙환으로 타계했고, 유해는 자택 근처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장례 후 약 두 달 뒤 돈을 노린 두 명의 엔지니어가 무덤을 도굴했고, 채플린의 가족들에게 유해를 되찾고 싶으면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 전화를 걸어왔다. 하지만 이 어설픈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났고, 채플린의 유해는 주네브 호숫가에 있던 한 농부의 옥수수밭에서 발견되었다. 이후 같은 묘지에 재매장되었는데, 도굴 시도를 막기 위해 관 위에 방공호 수준의 두꺼운 콘크리트가 씌워졌다.

2. 작품 목록

아래 작품들 중 재개봉 기록이 있는 것들은 채플린이 개봉 후 영상을 일부 재편집하고 자신이 작곡한 OST를 덧붙여 개정한 것이다.

키스턴 시절 작품들

01. 생활비 벌기 (Making a Living, 1914)
02. 베니스의 어린이 자동차 경주 (Kid Auto Races at Venice, 1914) - 채플린이 '떠돌이 기믹'을 관객들에게 처음 선보인 영화.
03. 메이블의 이상한 곤경 (Mabel's Strange Predicament, 1914) - 채플린이 '떠돌이 기믹' 을 처음 만든 영화.
04. 도둑잡기 (A Thief Catcher, 1914) - 오랫동안 필름이 분실되었다고 여겨졌지만, 2010년에 미시건 주의 한 골동품 상점에서 발견되어 공개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포드 스털링의 주연작이고, 6분 남짓한 영화 동안 채플린의 출연 시간은 15초 정도다.
05. 소나기 사이에서 (Between Showers, 1914)
06. 필름 자니 (A Film Johnnie, 1914)
07. 탱고 탱글스 (Tango-Tangles, 1914)
08. 그의 기분전환 (His Favorite Pastime, 1914)
09. 잔인한 사랑 (Cruel Cruel Love, 1914)
10. 스타 보더 (The Star Boarder, 1914)
11. 메이블의 운전 (Mabel at the Wheel, 1914)
12. 사랑의 20분 (Twenty Minutes of Love, 1914) - 채플린이 처음으로 감독/연출을 시도한 영화.
13. 카바레에서 (Caught in a Cabaret, 1914)
14. 빗속에 갇혀 (Caught in a Rain, 1914)
15. 바쁜 날 (A Busy Day, 1914)
16. 운명의 폴로 방망이 (The Fatal Mallet, 1914)
17. 그녀의 강도 친구 (Her Friend the Bandit, 1914) - 개봉 기록과 비평이 있어서 분명히 존재한 작품이지만, 네거티브 필름과 카피본 모두 존재하지 않아 소실 작품으로 분류된다.
18. 넉아웃 (The Knockout, 1914)
19. 메이블의 바쁜 날 (Mabel's Busy Day, 1914)
20. 메이블의 결혼 생활 (Mabel's Married Life, 1914)
21. 웃음 가스 (Laughing gas, 1914)
22. 소도구 담당자 (The Propetty Man, 1914)
23. 바 플로어 위의 얼굴 (The Face on the Bar Room Floor, 1914)
24. 레크리에이션 (Recreation, 1914)
25. 가장 무도회 참석자 (The Masquerader, 1914) - 채플린이 처음 여장 연기를 선보인 영화. 그런데 굉장히 어울린다.
26. 그의 새 직업 (His New Profession, 1914)
27. 라운더스 (The Rounders, 1914)
28. 새 관리인 (The New Janitor, 1914)
29. 사랑의 고통 (Those Love Pangs, 1914)
30. 반죽과 다어너마이트 (Dough and Dynamite, 1914)
31. 담대한 신사들 (The Gentlemen of Nerve, 1914)
32. 그의 음악 경력 (His Musical Career, 1914)
33. 그의 회합 약속 장소 (His Trysting Place, 1914)
34. 틸리의 무너진 사랑 (Tillie's Punctured Romance, 1914)
35. 첫 만남 (Getting Acquainted, 1914)
36. 그의 선사시대 (His Prehistoric Past, 1914)

에사네이 시절 작품들

37. 그의 새 직장 (His New Job, 1915)
38. 밤 외출 (A Night Out, 1915)
39. 챔피언 (The Champion, 1915)
40. 공원에서 (In The Park, 1915)
41. 값싼 도주 (A Jitney Elopement, 1915)
42. 떠돌이 (The Tramp, 1915)
43. 해변에서 (By the Sea, 1915)
44. 작업 (Work, 1915)
45. 여자 (A Woman, 1915) - 채플린이 여장 연기를 선보인 영화. 이것 또한 전편과 같은정도의 미모가 있다.
46. 은행 (The Bank, 1915)
47. 납치된 선원 (Shanghaied, 1915)
48. 쇼의 하룻밤 (A Night In The Show, 1915)
49. 찰리 채플린의 희화한 카르멘 (Charlie Chaplin's Burlesque on Carmen, 1916) - 에사네이가 채플린과의 계약이 해지된 뒤, 미완성으로 남아 있던 필름을 멋대로 짜깁기해 만든 영화. 채플린은 이에 빡쳐서 소송을 걸었지만 패소하고 말았다.
50. 경찰 (Police, 1916)
51. 3중 트러블 (Triple Trouble, 1916)

뮤추얼 시절 작품들

52. 매장 감독 (The Floorwalker, 1916)
53. 소방수 (The Fireman, 1916)
54. 방랑자 (The Vagabond, 1916)
55. 새벽 1시 (One A.M., 1916) - 초반에 등장하는 택시 운전수 빼면 오로지 채플린만 혼자 연기하는 ㅎㄷㄷ한 영화.
56. 백작 (The Count, 1916)
57. 전당포 (The Pawnshop, 1916)
58. 스크린 뒤에서 (Behind The Screen, 1916)
59. 링크 (The Rink, 1916) - 채플린의 달인급 롤러스케이팅 실력을 볼 수 있는 영화. 달인은 여기서 피겨 스케이트를 배운 건가?
60. 이지 스트리트 (Easy Street, 1917)
61. 요양 (The Cure, 1917)
62. 이민 (The Immigrant, 1917)
63. 모험가 (The Adventurer, 1917) - 초반부에서 아시아계로 보이는 운전수가 엑스트라로 출연하는데, 채플린의 개인 비서이자 집사, 운전사였던 일본인 코노 토라이치다.

퍼스트 내셔널 시절 작품들

아래 작품들 중 '개의 일생'과 '어깨총', '순례자' 세 편은 1958년에 채플린 자신의 재편집과 해설, 음악을 곁들여 '채플린 레뷰(Chaplin Revue)'라는 제목으로 재개봉되었다.

64. 개의 일생 (A Dog's Life, 1918)
65. 채권 (The Bond, 1918) - 1차대전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채권 매입 홍보 영화. 형 시드니가 후속작인 빌헬름 2세로 분장하고 나오는데, 이 배역은 '어깨 총' 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66. 어깨 총 (Shoulder Arms, 1918)
67. 서니사이드 (Sunnyside, 1919) - 1974년 재개봉.
68. 즐거운 하루 (A Day's Pleasure, 1919) - 1973년 재개봉.
69. 키드 (The Kid, 1921) - 어떤 여자가 가난 때문에 내다버린 아이를 떠돌이 채플린이 발견하여 키우게 된다는 이야기. 여기에 나오는 그 '아이'는 채플린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을 투영했다는 얘기가 있다. 상영 시간이 약 1시간 10분에 달해 중편영화로도 분류된다. 1971년 재개봉.
70. 유한 계급 (The Idle Class, 1921) - 1971년 재개봉.
71. 봉급날 (Pay Day, 1922) - 1971년 재개봉.
72. 순례자 (The Pilgrim, 1922)

유나이티드 아티스츠 시절 작품들

73. 파리의 여인 (A Woman of Paris, 1923) - 채플린의 첫 비극 영화. 하지만 채플린은 감독과 각본, 제작만 맡았고 영화에는 아주 잠깐 짐꾼으로 나온다. 1976년 재개봉.
74. 황금광 시대 (The Gold Rush, 1925) - 본격 금광 찾으러 갔다가 온갖 수난 당하는 영화. 위에서 말한 대로 굶주림을 못 이겨 구두끈을 스파게티처럼 먹기도 했다.[35] 친구인 더글러스 페어뱅크스가 개척자들에 대한 슬라이드를 보여줬는데, 거기에 자신이 읽은 서부 개척사를 덧붙여 구상했다고 한다. 1942년 재개봉.
75. 서커스 (The Circus, 1928) - 채플린의 장편 희극 영화 중 가장 쓸쓸하고 처연한 분위기의 결말을 보여주는데, 당시 채플린의 멘탈도 영 좋지 않았거니와 유성영화의 시대가 다가오면서 자신의 몰락이 머지 않음을 예상하고 표현했다는 식의 해석이 많다. 그런데 본작 개봉 이후 10여년간이 진정한 채플린의 리즈 시절이었다는 게 함정.[36] 1970년 재개봉.
76. 티 라이트 (City Lights, 1931) - 처음으로 채플린이 직접 OST를 작곡한 영화. 알버트 아인슈타인도 첫 개봉 때 왔다. 평화와 번영의 기념비 위에서 떠돌이 채플린이 자는 등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들어가 있다.
77. 모던 타임즈 (Modern Times, 1936) - 기계 문명에 망가져 가는 채플린의 이야기를 그렸다. 거대한 톱니바퀴 위에 누워 너트를 조이는 대목은 명장면.
78. 위대한 독재자 (The Great Dictator, 1940) - 채플린이 토키(유성영화)로 전환한 첫 작품. 파시즘나치즘 비판으로 유명하다. 이 영화에서 채플린은 유대인 이발사와 아돌프 히틀러의 패러디 캐릭터 아데노이드 힌켈이라는 1인 다역을 맏았다.
79. 살인광시대(베르두 씨가 맞지만 한국어판은 이렇게 번역되었다.) (Monsieur Verdoux, 1946)
80. 라임라이트 (Limelight, 1952)

영국에서 제작한 후기 작품들

81. 뉴욕의 왕 (A King in New York, 1957 아티카-아치웨이 필름 컴퍼니) - 혁명으로 인해 쫒겨난 왕으로 등장하는데 나중에 공산주의자(...)로 몰려서 고역을 당한다는 작품.[37] 채플린 본인이 이런식으로 미국에서 고역을 당했다.
82.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 (A Countess From Hong Kong, 1967 유니버설 픽쳐스) - 마지막으로 완성한 영화. '파리의 여인'에서처럼 채플린은 연기자로서는 단역으로만 등장한다. 여객선 승무원임에도 배멀미를 하는 노인(...)이라는 기믹.

그리고 그의 장편 모두와 디지털 리마스터링된 단편 7편이 2015년 엣나인필름을 통해 극장 개봉된다고 한다. 야 신난다!

3. 수상 경력

제1회 아카데미 시상식 특별상 (1929)
네덜란드 에라스무스상 (1965. 그마르 베르히만과 공동 수상)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헌액 (1970)
프랑스 레종 도뇌르 훈장 코망되르 (3급. 1971)
칸 국제 영화제 특별상 (1971. 모든 영화 작품)
베네치아(베니스) 국제 영화제 황금사자상 특별상 (1972)
미국 링컨센터 영화협회 평생공로상 (1972)
제44회 아카데미 시상식 명예상 (1972)
제44회 아카데미 시상식 최우수 영화음악상 (1972. 라임라이트가 20년 만에 미국에 정식 개봉된 뒤 받음)
대영제국 훈장 2등급 (KBE. 1975. 2등급 이상의 훈장이기 때문에 동시에 '경(Sir)' 호칭도 부여받음) 등

4. 여자 관계

영화인 채플린의 눈부신 업적에 비해, 사생활 면에서는 상당한 스캔들을 낸 것으로 유명하다. 검열삭제의 사이즈가 눈부시게 굉장히 컸다는 루머가 있다. 특히나 여자 관계가 호사가들의 떡밥으로 자주 등장했는데, 그가 결혼을 했건 아니면 연애만으로 끝났던 간에 대부분 관계를 맺은 여자들이 10대들이라는 점에서 '병아리 잡는 매(Chicken Hawk)'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지금 관점으로 보면 진성 로리콘.[38] 당연히 채플린은 자신의 아들들, 딸들과 안드로메다급의 나이차를 보이고 있다. 채플린과 70살이나 차이나는 딸도 있다. 이렇게 애를 많이 낳는데는 무분별한 성생활도 문제지만 본인이 고무를 극히 싫어해서 평생 고무로 된 카메라지지대를 사용하기 거부했다. 당연히 콘돔도 사용 거부를 했다.[39]

채플린의 생애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여자들을 보면

  • 헤티 켈리
    채플린이 카노 극단의 스타 코미디언으로 활동하던 1910년에 만난 첫사랑. 당시 런던의 한 연극단에서 무용수로 일하던 15세 소녀였지만, 헤티의 부모가 채플린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불과 다섯 번의 데이트만 하고 헤어졌다. 켈리와의 비극적인 첫사랑이 훗날 채플린의 여자 관계에 많은 영향을 미친걸로 알려져있다. (10대의 젊은 소녀들만을 사귀던 그의 로리콘적 취향, 어떤 여성과 사귈때 헤어질 때를 대비한 보험책으로 항상 다른 여자와 양다리를 걸쳤다는 점.)

    1917년 스타가 된 채플린은 어느 날 켈리의 편지를 받게 되었고, 바로 다음날 그녀를 만나기 위해 영국행을 준비하지만 스케줄이 너무 바빠서 내년으로 미루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1918년 켈리가 당시 유럽에서 대유행하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사망하면서 이들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 에드나 퍼비언스
    1916년부터 사귀기 시작해 1918년 밀드레드 해리스가 난입하기(???) 전까지 애인 관계를 유지했다. 원래 에사네이 영화사의 비서였고, 채플린이 자신의 영화에 기용할 여배우를 물색하다가 발탁했다. 에사네이~퍼스트 내셔널 시기의 거의 모든 채플린 영화에서 상대역으로 출연했고,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에서 만든 첫 영화인 '파리의 여인'에서는 여주인공을 맡았다.

    그러나 이후 유성영화의 발달 등으로 영화계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사실상 은퇴했다. 채플린은 그 후에도 꾸준히 에드나에게 연금을 보내주었고, 비록 미개봉된 채 파기되었지만 '바다의 여인'이라는 영화의 주연으로도 추천해주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 밀드레드 해리스
    채플린이 29세이던 1918년에 처음 아내로 맞은 아역배우(당시 16세). 해리스가 임신했다고 거짓 고백을 하는 바람에 서둘러 결혼했다는 소문이 있다. 채플린의 첫 아이였던 노먼을 낳았지만 3일 후에 사망했고, 그 뒤로 지겹게 계속된 불화 끝에 1920년에 이혼했다. 채플린이 사귄 여자들중 필두 막장녀. 이후 싸구려 나이트 클럽을 전전하다가 알콜중독으로 43세에 사망했다.

  • 리타 그레이
    1924년에 두 번째로 결혼한 상대. 밀드레드 해리스와 마찬가지로 결혼 당시 16세였고, '키드'에서는 천사로 잠깐 단역 출연한 바 있다. '황금광 시대'에서도 여주인공으로 출연할 예정이었지만, 채플린의 아이를 임신하면서 조지아 헤일로 교체되었다. 리타가 임신 사실을 빌미로 채플린에게 '결혼하지 않으면 낙태하고 언론에 소문내겠다'고 협박해 결혼해야 했다는 소문도 있다.

    1925년과 1926년에 각각 시드니와 찰스 두 아들을 낳았지만, 1927년에 이혼했다. 채플린은 소송 결과 리타에게 60만 달러, 아들들인 시드니와 찰스에게 각각 10만 달러 씩 총 80만 달러의 위자료를 지불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이 이혼 소송과 함께 미국 연방 정부에서 탈세 혐의로 제기한 소송도 병행되었고, 덕분에 당시 작업하던 '서커스'의 개봉이 늦춰지는 원인이 되었다.

  • 폴레트 고다드(1910년 ~ 1990년)
    뉴욕 출신의 배우. 1932년부터 사귀기 시작했고, 모던 타임즈위대한 독재자에 여주인공으로 출연했다. 모던 타임즈에서 바나나를 훔치는 "집 없는 소녀"로 나오는 배우다. 모던 타임즈가 개봉한 연도인 1936년에 비밀리에 결혼했는데, 채플린이 결혼한 상대 중 유일하게 10대가 아닌 여성이었다. 결혼 생활은 밀드레드나 리타보다 길었지만 그래도 짧게 끝나 1940년에 이혼했는데, 다만 위의 두 여인들과 달리 매우 평화롭고 우호적으로 관계를 정리했다고 한다. 찰스에게는 폴레트가 3번째 부인이자, 폴레트에게는 찰스가 2번째 남편이었다.

    1958년 영화계 은퇴를 선언한 후 서부전선 이상없다로 유명한 독일 출신의 소설가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와 재혼했으며, 파라마운트 영화사 등에서 계속 영화배우로 활동했다. 영화계 은퇴 후에는 스위스로 거처를 옮겼고, 채플린 부부와 가까운 곳에서 살며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찰스와 폴레트 사이에 낳은 자식은 없다.

  • 조안 배리
    1942년에 잠시 사귄 여성. 채플린은 이 여성을 배우로 키우려고 했는데, 배리가 정신병 증세를 보여 얼마 못가 결별했다. 배리는 이후 채플린의 아이를 낳았다며 소송을 제기했는데, 혈액형 검사 결과 친자식이 아닌 것으로 판명(유전법칙에 따라 혈액형부터 성립이 불가능한 상태[40])되었다. 하지만 법원은 배심제의 폐해인 비논리적 판단에 따라 채플린을 아이의 아버지로 인정했고, 채플린은 판결에 따라 그 아이가 21세가 될 때까지 부양해야 했다.

    채플린은 이 재판에서 완전히 이미지를 구겨버렸고, 이후 비미활동위원회 조사 등과 더불어 미국에 급짜식하게되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배리도 소송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결국 정신병 증세의 악화로 1953년에 강제 격리되었고, 1996년에 완전히 잊혀진 채로 사망했다.

  • 우나 오닐
    유명 극작가 유진 오닐의 딸이었지만, 채플린과 결혼하면서 아버지에게 의절당했다. 채플린의 마지막 아내이자 평생의 동반자였고, 결혼 당시 18세였다. 채플린과는 무려 36살 차이. 참고로 유진 오닐은 채플린보다 겨우 1살 많다(...) 장녀 제럴딘(1944)[41], 장남 마이클(1946)57, 차녀 조세핀(1949)60, 삼녀 빅토리아(1951)62, 차남 유진(1953)64, 사녀 제인(1957)68, 오녀 아넷(1959)70(...), 삼남 크리스토퍼(1962)73까지 채플린의 부인들 중 가장 많은 여덟 명의 아이를 낳았고, 채플린이 미국에서 추방당하자 우나도 찰스와 함께 미국 시민권을 포기했다. 채플린보다 14년 더 살았고, 1991년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남편의 죽음을 슬퍼했다.

...이 외에 중요성이 별로 없어서 생략했을 뿐이지, 채플린과 연인 관계였던 여성은 5명(!) 정도 더 있다. 아래에 나올 마리온 데이비스도 이 숨겨진 다섯 명 중 한 사람이다.

5. 가족과 자녀들

아내들은 제외했다. 위의 여자관계를 볼 것.

  • (ɔ) Photographer is named as H. T. Reed of London from

    아버지: 찰스 채플린 시니어(Charles Chaplin, Sr., 1863-1901). 직홀에서 배우 겸 코미디언으로 일했다. 1885년에 해너 힐과 결혼했다. 당시 해너에겐 시드니 존(시드니 채플린으로 바뀌어 불린다.)이라는 다른 아들이 있었다. 1889년에 부부는 찰스 스펜서 채플린을 낳았는데 바로 찰리 채플린이다. 1891년부터 별거에 들어가 찰리 채플린은 어머니가 키웠다. 그 후 다른 여자를 만나 살았지만 자식을 더 두지는 않았고 1901년에 간경변으로 사망했다.

  • (ɔ)

    Unknown photographer

    from

    어머니: 해너 채플린(결혼 전 이름은 Hannah Harriet Pedlingham Hil, 1865-1928). 1885년에 첫아들 시드니를 낳았는데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1889년에는 찰리를 낳았으며 1891년에 찰스 채플린과 헤어진 뒤 뮤직홀 배우인 리오 드라이든을 만나 셋째 아들 조지 휠러 드라이든(George Wheeler Dryden)을 낳았다. 1898년부터 정신병 증세가 나타났다. 그때문에 시드니와 찰리는 어머니의 전 남편이었던 찰스 채플린을 찾아가야 했다. 그 후 해너는 요양 등을 하다가 1921년에 찰리와 시드니가 캘리포니아로 모셨고 거기에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 (ɔ) Unknown from

    이부형[42]: 시드니 채플린(Sydney Chaplin, 1885-1965). 채플린과 어머니가 같지만 아버지가 다른 형으로 찰리와 함께 자랐다. 같이 미국으로 건너갔고 채플린의 매니저 역할을 했다. 찰리는 자신의 아들 중 하나를 그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본인도 영화배우로 활약했다. 시드니는 두 번 결혼했지만 자식을 두지 않았다.

  • (ɔ) from

    이부동생: 휠러 드라이든(George Wheeler Dryden, 1892-1957). 영국의 배우이다. 리오 드라이든과 해너 채플린의 아들로 시드니나 찰리와는 달리 리오 드라이든이 키웠다. 1915년이 돼서야 찰리와 시드니가 자신의 형이란 걸 알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두 이부형들에게 편지를 썼지만 무시당했고 1917년에 채플린의 애인이었던 에드나 퍼비언스를 만났다. 에드나는 그를 채플린의 친척으로 생각했다고. 1918년에는 두 형들과 만나고 어머니를 만났다. 1936년에 미국으로 귀화했다. 아들인 스펜서 드라이든(Spencer Dryden, 1938-2005)은 미국의 유명 뮤지션이었다. 미국으로 건너온 뒤에 형의 일을 도왔고 임라이트 후 채플린이 미국을 떠나자 미국에 남아 그의 사업 등을 정리했다. 말년에 FBI가 그의 형을 두고 그에게 정신적 압박을 가하는 바람에 꽤 고생하다 세상을 떠났다고. 휠러의 아들인 스펜서 드라이든은 3명의 아들을 두었고 휠러 역시 스펜서 외에 제프리 드라이든, 제시 드라이든, 잭슨 드라이든의 세 자식을 더 두었다.

  • 장남: 노먼 스펜서 채플린(Norman Spencer Chaplin, 1919-1919). 밀드레드 해리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출생 후 3일만에 사망했다.


  • 차남: 찰스 스펜서 채플린 주니어(Charles Spencer Chaplin Jr., 1925-1968). 찰리가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따서 지은 아들. 리타 그레이에게서 낳은 아들로 사실상 장남이었다. 미국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배우로 활동했다. 1958년에 배우 수잔 매그너스와 결혼하여 1959년 딸 수전 매리 채플린(Susan Maree Chaplin, 1959-)을 낳았으나 이혼했다. 1968년 폐색전증으로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미국 국적인지라 아버지와 달리 스위스에 가지 않고 미국에서 지냈다.


  • 삼남: 시드니 얼 채플린(Sydney Earl Chaplin, 1926-2009). 형인 찰스 채플린과 마찬가지로 리타 그레이가 어머니이다. 삼촌인 시드니의 이름을 땄다. 영화와 드라마 등에서 활동했다. 라임라이트에서 클레어 블룸에게 관심을 보이는 젊은 군인이 바로 시드니이다.

    아버지를 보고 있는 시드니. 소파에 앉은 군인이 시드니 채플린이다. 프랑스의 배우 노엘 아담과 결혼하여 아들 스테판 채플린(Stephan Chaplin)을 낳았고 손녀인 타마라 채플린(Tamara Chaplin)이 있다.


  • 장녀: 제럴딘 채플린(Geraldine Chaplin, 1944-). 채플린이 우나 오닐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로 오빠들과 상당히 터울이 있다. 거의 오빠들한테 조카나 딸뻘. 스페인 남자들과 결혼해서 딸들은 스페인 국적이다. 첫째딸인 셰인 사우라(Shane Saura)는 스페인의 영화감독인 카를로스 사우라(Carlos Saura Atarés, 1943-) 사이에서 낳았다. 제럴딘은 배우로 안나 카레니나 등에 출연했으며 스페인의 영화제작자인 파트리시오 카스티야(Patricio Castilla) 사이에서 낳은 둘째딸인 우나 채플린(Oona Castilla Chaplin, 1986-)도 스페인의 배우이다. 임라이트에 동생 마이클과 거리의 아이들로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찰리 채플린을 분한 영화 채플린에서는 찰리 채플린의 어머니, 즉 자신의 할머니 역할을 맡기도 했다.

    제럴딘 채플린의 딸 우나 채플린. 스페인의 배우이다. 왕좌의 게임에 출연했다.


  • 사남: 마이클 채플린(Michael John Chaplin, 1946-). 마찬가지로 우나 오닐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1960년대까지 아역배우로 활동했고 그 이후엔 배우로는 은퇴했다. 그 후엔 작가로 활동하는 듯. 딸인 카르멘 채플린(Carmen Chaplin, 1977-)과 돌로레스 채플린(Dolores Chaplin, 1979-)은 영국의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2013년 현재 마이클은 채플린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고 있다. 페이스북을 하기도 한다. 그의 페이지
    © Georges Biard (cc-by-sa-3.0) from

    왼쪽부터 돌로레스 채플린과 카르멘 채플린. 마이클은 두 번 결혼했는데 첫 아내인 패트리스와 크리스천 채플린(Christian Chaplin, 1964-), 팀 채플린(Tim Chaplin, 1966-)을 낳았고 둘째 아내인 패트리샤 베타우디에(Patricia Betaudier)[43] 사이에 캐슬린 채플린(Kathleen Chaplin, 1975-)과 돌로레스, 카르멘, 조지 채플린(George Chaplin), 트레이시 채플린(Tracy Chaplin, 1980-)을 낳았다. 아버지의 왕성한 번식욕을 빼닮았다


  • 차녀: 조세핀 채플린(Josephine Hannah Chaplin, 1949-). 미국에서 배우로 일하다가 1980년에 프랑스의 영화 제작자인 모리스 로네(Maurice Ronet, 1927-1983)를 만나 아들 쥘리앙 로네(Julien Ronet, 1980-)를 낳았다. 그 외에도 첫 아들 찰리 시스토바리스(Charlie Sistovaris, 1971-)가 있는데 그리스 모피상인 니콜라스 시스토바리우스(Nicholas Sistovaris)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며 막내아들 아서 가딘(Arthur Gardin)이 있다. 할머니가 이부삼촌들을 낳은 것처럼 본인도 이부형제를 낳았다


  • 삼녀: 빅토리아 채플린(Victoria Chaplin, 1951-). 초기에는 영화 배우로 활동하다가 서커스에 들어갔다고 한다. 위의 사진의 남자는 남편인 장바티스트 티에르(Jean-Baptiste Thiérrée)이다. 티에르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제임스 티에르(James Spencer Henry Edmond Marcel Thiérrée, 1974-)도 서커스 연출자이다. 첫딸인 오렐리아 티에르(Aurélia Thiérrée, 1971-)는 영화 배우이다.

    보그 이탈리아 판에 나왔던 딸 오렐리아.
    © Georges Biard (cc-by-sa-3.0) from

    아들 제임스 티에르.


  • 오남: 유진 채플린(Eugene Anthony Chaplin, 1953-). 스위스에서 레코딩 엔지니어와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레코딩 엔지니어로 롤링스톤즈데이비드 보위, 등과 협업했다. 스위스의 국제코메디영화페스티벌 기획자이기도 하다. 자식을 여럿 뒀는데 딸인 키에라 채플린(Kiera Chaplin, 1982-)은 영국의 배우이다.

    딸 키에라 채플린. 그 외에도 로라 채플린(Laura Chaplin, 1987-), 케빈 채플린(Kevin Chaplin), 섀넌 채플린(Shannon Chaplin), 스카이 채플린(Skye Chaplin), 우나 채플린(Oona Chaplin)을 낳았다.


  • 사녀: 제인 채플린(Jane Cecil Chaplin, 1957-). 멕시코의 영화 제작자인 일리야 살킨드(Ilya Juan Salkind Dominguez, 1947-)와 결혼하여 오손 살킨드(Orson Salkind, 1986-)와 오세올라 살킨드(Osceola Salkind, 1994-)를 낳았다.

  • 오녀: 애닛 채플린(Annette Emily Chaplin). 행적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 육남: 크리스토퍼 채플린(Christopher James Chaplin, 1962-). 막내아들로 작곡가배우이다.

자녀들 사진을 모아놓은 곳

찰리 채플린은 영화계에도 많은 후계자를 남겼지만 생물학적으로도 굉장히 많은 후계자를 남겼다.

6. 정치/사회적 논쟁거리

여자 관계와 함께 채플린과 관련해 가장 격한 논쟁이 오간 부분이 '치적 성향'이었다. '모던 타임즈'를 비롯한 여러 영화들에서 보여준 좌파적인 측면 때문에 종종 '공산주의자' 의혹을 받았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 개발살났던 독일을 되살려낸 훌륭한 정치인(으로 그 당시에는 여겨진)인 히총통을 까는 위대한 독재자가 결정적인 떡밥이 되었다.

이 때문에 미국의 우익(혹은 극우) 세력들은 채플린을 탐탁치 않게 여기기 시작했고, 모던 타임즈에서 트럭에서 떨어뜨린 붉은 깃발을 들고 휘두르며 가져가라고 소리치다가 (엉뚱하게) 파업 시위를 주도하는 장면이나[44] '순례자'를 소련 대표 신문인 라브다에서 칭찬한 기사같은 별의별 잡다한 사례를 마구 끌어다가 빨갱이라는 증거로 만들기 위해 기를 썼다.

2차대전 종전 후에는 매카시즘으로 촉발된 '비미활동위원회'라는 병크성 심사에도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는데,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실형을 선고받던 다른 '피고'들과 달리 끝까지 개기는 용자 기질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같이 기소되었던 독일 망명 작곡가 한스 아이슬러를 지원해주고, 프랑스에 체류 중이었던 파블로 피카소에게 미국의 광신적 반공주의에 대한 비판과 우려를 담은 편지를 보내는 등 무고 주장 이상의 대담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순례자'나 '살인광 시대'에서 보이는 종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미국과 영국의 종교 관련 단체들을 자극했고, 1차대전에 참전하지 않아 '복무 기피자'로 영국 언론에서 까이기도 했다. 사실 채플린은 1차대전이 발발하자 현역을 자원했지만, 신장과 체중 미달로 탈락했다. 그리고 전쟁 자금을 대기 위한 채권 구입을 호소하는 집회에서도 자주 연설했고, 작품 목록에 나온 것처럼 아예 '채권'이라는 선전 영화를 형 시드니와 같이 만들기도 했다. 거기다 2차대전 당시에는 아들들이 현역으로 복무하기도 했다고 한다(정확한 사항은 추가바람).

정치적인 문젯거리 외에 키스턴의 맥 세넷과 동료였던 트라이앵글 영화사의 토머스 인스의 죽음과 관련된 음모론에도 얽힌 적이 있었다. 1924년 11월에 미국 신문왕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자신의 거대한 요트에서 주최한 선상 파티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는데, 언론에서는 인스가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보도했지만 몇몇 사람들이 '인스의 머리에 총알 구멍이 나 있었고 혈흔도 있었다'고 증언해 파문이 일었다.

요트에 승선한 이들로는 인스 외에 허스트와 그의 정부 마리온 데이비스, 채플린, 그 외 여러 저명 칼럼니스트들과 시나리오 작가, 배우들이 있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인스가 요트의 허스트에 의해 사고로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이러한 주장을 부인했다. 사건을 맡은 샌디에이고 경찰서도 인스의 사인을 심장마비로 결론짓고 수사를 종결했지만, 사건 뒤에도 허스트가 보여준 미심쩍은 행동 등이 겹쳐 잠시 떡밥이 되기도 했다.

헐리우드의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채플린이 허스트의 정부 마리온 데이비스와 불륜 관계였고, 한창 검열삭제(혹은 키스)중에 허스트와 사람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들켰다고 한다. 격분한 허스트가 두 사람에게 총을 쐈는데, 그만 총알이 빗나가서(!) 엄하게 옆에 있던 토머스 인스가 맞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왜 그런 명백한 살인을 과실치사나 자살이 아닌 심장마비에 의한 돌연사로 은폐하려 했냐는 데 있다.

아무리 천하의 허스트라 할지라도 이런 은폐 전략을 실행하기는 대단히 어려웠고, 실제로 그 소문 때문에 여러 차례 조사가 진행되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인스의 심장마비사라는 결론을 뒤집을 만한 단서는 어디에도 없었고, 허스트나 기타 요트에 있던 사람들 중 누군가가 인스를 죽였다는 설은 거의 도시전설 수준의 이야기로 남아있다.

(허스트는 자신의 가문을 노골적으로 조롱했다고 생각한 오손 웰스의 영화 '시민 케인'의 상영도 막으려고 했지만, 무위로 돌아갔다. 영화 한 편의 상영도 막지 못했는데 소문대로 살인을 은폐할 수 있었을까? 그것도 심장마비로 위장해서? 단, 허스트의 방해공작으로 인해 시민 케인이 망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사건이었으므로 그걸 저렇게 묻어버리기는 힘들었을 듯.)

어쨌든 대한민국에서는 빨갱이로 몰려서 그의 영화는 전면 상영이 금지되었다가 금지가 풀린, 공교롭게도 그의 탄생 100주년에 딱 맞춘 1989년이 되어서야 한꺼번에 여러 편이 개봉하게 된다. 당시 채플린 영화들을 단독으로 수입, 개봉하던 곳이 우진필름과 그 계열이던 씨네하우스 극장. VHS 비디오판조차도 계열인 우진비디오에서 냈는데 수입사 대표가 영화감독이자 제작자이던 정진우였다.

7. 대인 관계

원체 각광받던 영화 스타였던 만큼, 주변인들도 ㅎㄷㄷ한 인물들이 많았다. '시티라이트'의 개봉 때도 초청받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스튜디오에 찾아와 촬영을 참관하기도 했던 윈스턴 처칠, 세계 여행 중 만난 마하트마 간디, 유럽 여행과 정주 시절 사귄 장 폴 사르트르파블로 피카소 등 몇 사람만 언급해도 장난아니다. 심지어 훗날 중국의 총리가 되는 저우언라이도 주네브에 회담하러 왔을 때 한 차례 만났다고 하니 흠좀무.하지만 최고는 바로 어떤 정치인을 소재로한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희화한 영화를 2번이나 본 남자다. 그남자는 바로 아돌프 히틀러였다. 후에 채플린은 히틀러의 감상평을 들으려고 애썼고, 히틀러로부터 대단하다.라는 말을 듣게 됐다고 한다. 흠좀무.

이외에도 위의 항목에서 '인스 사건'에 언급된 신문왕 허스트도 채플린과 막역한 관계였고, 영화인들로는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던 버스터 키튼이나 스 랭데르 등과도 교우 관계를 가졌다. 특히 버스터 키튼의 경우 '라임라이트' 후반부에서 채플린과 함께 공연을 하는 피아니스트로 특별 출연하기도 했다.[45] 그리고 밑에 쓸 '음악' 항목과 관련해서 음악과 관련된 친분 관계도 있었고,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 등이 자서전에 언급되고 있다.

8. 음악

배우 활동 초기에는 음악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하는데, 노래 외에도 바이올린첼로, 피아노를 독학 혹은 몇 차례의 레슨 등으로 익혔다고 한다. 단, 바이올린과 첼로의 경우 왼손잡이였던 관계로 줄을 역순으로 감고 왼손으로 활을 켰다. 이외에도 몇몇 자선 음악회나 가수들의 녹음 때 지휘자로 등장하기도 했고, '뉴욕의 왕'이나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의 OST 녹음을 위한 리허설이나 시연회에서도 관현악단을 지휘하는 모습을 보여준 바 있다.

자신의 영화에 음악을 직접 붙인 만큼 작곡에도 관심이 있었던 것도 분명한데, 특히 모던 타임즈에 나오는 '스마일(Smile)'은 원래 그냥 OST의 일부로 삽입된 연주곡이었지만, 상당한 인기를 얻어 존 터너와 조프리 파슨스가 가사를 붙여 대중가요로 만들었다. 이 가요판은 냇 킹 콜같은 재즈 음악인들부터 팝 스타 마이클 잭슨, 클래식 테너 가수 플라시도 도밍고까지 불렀고, 지금도 계속 리메이크되고 있다. 이외에도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의 '이것이 나의 노래(This is My Song)'도 나름대로 히트한 주제가다.

노쇠해지면서 만년에 자신의 구작 무성영화들을 재편집해 내놓을 때도 OST를 직접 작곡해 삽입했는데, 가장 마지막으로 한 작업도 '파리의 여인'에 음악을 붙이는 것이었다. 다만 채플린의 영화음악 작업은 엄밀히 말하면 초보적인 작곡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었다. 실제로 OST 작업의 기초는 채플린 자신이 어떤 곡조를 흥얼거리거나 악기로 연주해 보이는 것이었고, 이 때문에 실제로 OST를 관현악용으로 정서하기 위해서는 전문 편곡자를 필요로 했다. 가령 첫 OST인 시티 라이트의 경우 아서 존스턴이, 나머지 영화들의 OST도 막스 테르(황금광시대), 알프레드 뉴먼과 데이비드 랙신(모던 타임즈), 메레디스 윌슨(위대한 독재자), 루디 슈래거(살인광시대), 레이 래시(라임라이트), 보리스 사르벡(뉴욕의 왕), 램버트 윌리엄슨(홍콩에서 온 백작부인) 등의 영화음악 전문 편곡자들이 따라붙어 완성시켰다.

물론 채플린 자신은 자서전에서 이런 작업을 하면서 지휘자용 총보를 보는 법이라든가 하는 전문 지식을 익혔다고 쓰고 있지만, 아무래도 작곡과 지휘, 영상과 음악의 싱크 작업 등을 혼자 할 만한 수준은 되지 못했기 때문에 늘 편곡자를 필요로 했다. 이 작업 방식은 대개 전문 작곡가들과 함께 작업하는 데 익숙했던 편곡자들에게는 상당히 고역이었는데, 모던 타임즈의 음악 편곡을 맡았던 뉴먼이 이 때문에 채플린과 대판 싸우고 때려치면서 뉴비였던 랙신이 대신 작업을 맡아 마무리지어야 했다. 하지만 랙신도 채플린이 언제고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악기를 연주하면서 받아적으라고 할 지 몰라 며칠 밤을 새우며 수면 부족 상태로 대기타고 있어야 했다고 회고했다(...).

어쨌든 OST에 들어간 음악 자체는 채플린 자신의 착상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작곡자는 채플린으로 등록되어 있고, 채플린이 아직 생존 중이던 1972년에는 영국의 팝스 오케스트라 지휘자인 스탠리 블랙이 여러 영화의 OST에서 가려뽑은 곡들을 편곡해 녹음한 헌정 앨범을 데카에서 제작하기도 했다. 채플린 사후에도 OST의 히트 넘버들이 계속 여러 형태로 편곡되어 음반으로 발매되고 있고, 영국의 작곡가 겸 지휘자인 칼 데이비스는 영화 상영과 동시에 그의 OST를 현장에서 생음악으로 연주하는 라이브 오케스트라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9. 트리비아

  • 뮤추얼 전속 시절, 요양 겸 휴가차 한 시골에 내려갔다가 거기서 '찰리 채플린 따라하기 대회'를 하길래 신분을 감추고 참가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는 2등[46]. 1등은 누구였을까나.

  • '위대한 독재자'를 찍기 전에 채플린은 나폴레옹에 대단히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심지어 영화로 만들기 위해 시나리오를 쓰고 나폴레옹 코스프레(…) 사진을 남기기도 했지만(근데 잘생겼다!), 훨씬 파괴력이 강한 히틀러라는 소재 때문에 버로우.

    • 참고로 채플린과 히틀러는 정말 우연의 일치가 아닐 수 없는 공통점이 있다. 동갑에 생일은 채플린이 4일 일찍 태어났으며 얼굴도 비슷하게 생겼다. 이 때문에 위대한 독재자에서 채플린이 열연한 독재자의 모습은 히틀러를 빼다 박았다.

  • 그렇게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지만, 1938년에는 스페인 내전을 소재로 한 심각한 소설 '리듬'을 발표하기도 했다. 영화도 모자라 소설까지 평정하려고 한건가... 국내 시공사에서 출판한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시리즈의 80번째 권 리 채플린, 희극이라는 이름의 애수 라는 책 후반부에 번역본이 실려있다. 꽤나 재미있다(!).

  • 자서전을 보면 젊은시절 싸움이야기가 종종나오는데, 싸움을 잘한듯 하다. 신참이라지만 프로복서랑 연습을 하는데 가지고 놀았다거나, 복싱선수하고 여자문제로 텔방에서 싸웠는데 비겼다거나, 여하튼(자서전 내용이라 완전히 믿는데는 무리가 있지만) 먹질에도 일가견이 있었는 듯...권투 관련 코미디 영화도 만들었으니.

  • 워낙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업청난 업적을 쌓아 채플린에게 열폭한 영화인들이 한둘이 아니다. 심지어 스탠리 큐브릭"채플린 그 양반은 엄청 간단한 세트에서 간단한 카메라웍 만으로 영화를 찍어댔는데 결과물이 ㅎㄷㄷ하단 말이지. 그건 마술이여"라고 은근히 열폭했을 정도(...) 물론 이 말 한 큐브릭도 다른 영화인들을 무진장 열폭시켰다 그런데 실제로 채플린의 영화 작업은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히 정교하고 치밀하게 이루어 진 것이었다. 사실 채플린이 영화를 막 찍었다기 보다는 큐브릭이 인간적으로 너무너무 정교하고 치밀하게 찍은 것이다.

  • 채플린에 대한 전기영화로 1992년작인 '채플린'이 있다. 채플린 역으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맡았는데, 당시 그는 예술적으로 유명한 대표작도 없었고, 채플린의 19~83세라는 장대한 기간을 연기하기에는 너무도 경험도 없고, 나이도 어린 20대 중반의 청년이었다. 하지만 로버트는 채플린을 완벽하게 재현하기 위한 혹독한 노력으로 열연을 펼쳐,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으며, 그 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

  • 어린 시절 찢어지는 가난을 겪은 탓인지 돈 문제에 대단히 인색한 면모를 보였다고 한다. 친구이자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사의 공동 창립자였던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47]가 잇단 흥행 실패로 빚더미에 올랐을 때 채플린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단칼에 거절했다고. 현장의 스탭들과도 격의 없이 잘 어울리는 성격이었지만 일단 동업자로서의 관계가 끝나고 나면 냉정하게 인연을 끊는 차가운 면이 있었다고도 한다.[48]

  • 1932년 일본을 방문했다가 암살당할뻔 했다.(!) 5월 14일 고베항에 도착했고, 다음날 도쿄에서 이누카이 츠요시 수상의 초청을 받았는데, 덴뿌라를 먹고 스모 구경을 해야한다고 약속을 미뤘다고 한다. 드디어 마중나온 아들 이누카이 다케루와 함께 스모 구경을 마치고 덴푸라를 먹으러 가는데...그 사이 5.15 사건으로 이누카이 츠요시 총리가 암살당해 버렸다! 찰리 채플린이 운이 나빴던 게 아니라 쿠데타 작당자들이 찰리 채플린의 방일을 노렸다고. 그들의 계획대로라면 츠요시는 물론이고 채플린도 문답무용으로 끔살당할 뻔했다.(...)# 하지만 채플린은 당일 저녁 영문도 모른채 새우 덴푸라 튀김을 매우 즐겼다고 한다. 자서전에 따르면 범인들은 채플린이 미국인인 줄 알고 그랬다고 한다. 상기한대로 채플린은 미국에서 활동한 건 맞으나, 엄연한 영국인이다(...).

  • 무신론자였다. 그런데 일설에 의하면 예수를 연기하고 싶어 했다고 한다. #[49] 물론 어느 영화에서도 예수 역을 맡지는 못했다. 사실21세기에서도 스스로 무신론자라고 공언한 유명 배우가 예수를 연기하면 그야말로 난리가 날 것인데, 하물며 20세기 초에는...

10. 어록

하늘을 올려다보세요. 내려다보고만 있다면 절대 무지개를 찾지 못할 겁니다.
- 1928년작 "서커스"를 1969년에 다시 재상영할 때, 채플린이 작사/노래한 오프닝 곡인 "꼬마 아가씨를 높이 그네태우다(Swing High Little Girl)"[50]에서.

전쟁, 분쟁, 모조리 사업이다. "살인을 한 번 하면 악당이 되지만, 수백만번을 하면 영웅이 된다." 숫자가 정당화한다.
- 1947년작 "므시외 베르두(베르두 씨)"에서. 하지만 쌍따옴표 안의 말은 아주 예전에 베일비 포투스(Beilby Porteus) 주교에게 한 바 있다고.

난 정치인이 아니요, 정치적 신념도 없습니다. 난 자유를 믿는 사람입니다. 그게 제 유일한 정치적 이념입니다. 한편 전 최고의 애국자도 아닙니다. 초애국주의는 히틀러주의로 빠질 뿐이며 우리는 거기서 교훈을 배운 바 있습니다. 전 혁명을 일으키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영화를 더 만들고 싶을 뿐입니다.
- 1952년 12월 23일, 가디언지에 실린 "채플린 씨의 답변(Mr. Chaplin's Defense)"에서 채플린이 자신의 재입국 허가가 무효화되었다는 선언을 듣고 저널리스트에게 한 답변. 당시 매카시즘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볼 수 있었다. 이 재입국 허가의 무효화는 말 그대로 국외를 다르게 표현한 것이었다.

해파리[51]에게도 삶은 아름답고 멋진 것이란다. (중략) 문제는 네가 싸우지 않는다는 거야. 포기해 버렸지. 하지만 죽음과 마찬가지로 피할 수 없는 게 있단다. 그게 삶이야. 지구가 돌게 하고 나무가 자라게 하는 우주의 힘을 생각해 보렴. 네가 용기와 그것을 사용할 의지만 있다면, 같은 힘이 너에게 깃들일 거야.
- 1952년작 "라임라이트"에서, 테리(클레어 블룸 분)의 "무엇을 위해 싸우란 거죠?"란 질문에 칼베로(채플린)가 한 대답.

나에겐 딱 하나, 그것만이 남아 있는데 바로 '광대'이다. 덕분에 어느 정치인보다 더 높은 비행기를 타게 된다.
- 1960년 6월 17일, 런던의 "옵저버(The Observer)"지에서 인용된 말.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 1977년 12월 28일, 가디언(The Guardian) 지에서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할 때 인용한 말.

과거? 지나고 나면 결국 전부 웃어서 넘길 수 있는 것들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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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물론 코메디언으로 잘 알려져 있다.
  • [2] 채플린 자사전의 경우 채플린 자신의 기억에 근거해 쓴 것이 대부분임에도 불구하고 후에 검증한 결과 상당수가 맞아떨어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엄청난 기억력의 소유자.
  • [3] 지금으로 따지면 인기 TV 프로그램과 비슷한 정도의 인기가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거의 유일했던 오락이었기도 하고.
  • [4] 당시 뮤직홀에서 일하는 배우들은 매상을 올리기 위해 공연 도중 술을 마셔야 했다
  • [5] 일설에 의하면 어린 찰리 채플린은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극단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았는데, 어머니가 상한 목으로 노래하다 삑사리가 나서 욕을 먹자 어머니를 대신하여 희극 배우들의 연기를 보여줘 큰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이때 희극연기는 어머니의 쉰 목소리를 흉내내어 익살맞게 연기한 것으로, 그의 자서전에 나온다. 주점의 군인들한테 돈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다만 본인은 어머니에 대해 죄송스러웠던 듯, 자서전에 그런 언급이 있다. 자세한건 확인바람.
  • [6] 이 때 채플린은 세넷의 태도가 실망한 듯 보여서 소심한 성격에 " 안 될거야 아마"라며 가기를 주저했는데, 3일째 되는 날에 "왜 안 와!"라는 전화가 걸려와서 당장 갔다는 루머(확인바람)가 있다.
  • [7] 즉 슬랩 스틱, 몸개그에만 치중했다. 어째 모 감독과 묘하게 비슷해 보인다.
  • [8] 이 전까지 채플린은 너무 잘 생겨서 계약을 파기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 몸개그 전문인 키스턴 영화사는 웃기게 생기든지 해야 인기가 생긴다고 생각했던 것. 물론 채플린의 떠돌이 캐릭터가 성공한 이후로는 그런 이야긴 쏙 들어갔다.
  • [9] 주목할 점은, 채플린은 저 도구들을 전부 자기 주변 및 동료들에게서 빌렸다. 바지는 스승이었던 뚱보 희극배우 스코 아버클 에게서 빌려 입었고, 초기에는 골판지를 이용했다가, 후에 가발을 다듬어 콧수염을 만드는 등의 노력을 했다. 그의 도구들 중 채플린 자신의 것은 대나무 지팡이. 대나무 우산살을 이용했다고 한다.
  • [10] 사실 이 전설의 떠돌이 기믹은 원래 당대 인기 여배우였던 메이블 노먼과 함께 한 '메이블의 이상한 곤경' 에서 첫 등장해야 했으나, 키스턴 사의 관례로 '베네치아에서의 어린이 자동차 경주' 라는, 정말 경주장에서 민폐만 끼치는 7분 남짓한 작품에서 먼저 공개되었다.
  • [11] 맥 세넷 감독의 장편 희극영화 '틸리의 무너진 로맨스'. 채플린은 주연이었지만 '떠돌이 분장'을 하지 않고 고전적인 사기꾼 기믹으로 출연했다.
  • [12] 당시 영화의 관객들이 가난한 사람들(영화표 값이 싸지면서 노동자들도 자주 극장에 갈 수 있게 되었다.)이었다는 점을 노려서, 코믹 영화에서 당하는 사람들을 부잣집 마님, 차별적인 경찰관 등으로 설정했다. 이를 본 가난한 사람들이 "쌤통이다!"라며 외쳤을 것은 당연지사.
  • [13] 그래서 때때로 그의 코믹 영화를 본 사람들이 감동을 느끼는 훈훈한 상황도 나왔다고 한다.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는다는 말이 딱 맞다.
  • [14] 이 대회에 본인이 출연해서 1등을 못 했다는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심심하면 나오는 이야기. 히든싱어2에서 신승훈이 우승을 못할때도 이 이야기가 잠깐 나왔다.
  • [15] 나중에 채플린은 유나이티드 아티스츠로 이적한 뒤 또 새로운 스튜디오를 만들었고, 퍼스트 내셔널 시절 건립한 스튜디오는 무성영화 코미디계의 또 다른 전설 중 한명인 버스터 키튼의 전용 스튜디오로 쓰였다.
  • [16] 채플린은 친구 더글러스 페어뱅크스의 제안으로 다른 극장에 연극을 보러 갔는데, 어른과 아이(재키 쿠건 부자(父子))가 나와서 연극을 하는 걸 보고 감명을 받아 '키드'를 구상했다. 그런데 '재키 쿠건'은 이미 다른 극장과 계약을 한 상태. 그 때 좌절하는 채플린에게 그걸 알려준 사람이 덧붙였다. "그 재키 쿠건, 아버지 쪽이랍니다." 그래서 당장 아들 재키 쿠건과 계약에 들어갔다고. 즉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이름을 쓰는 경우 때문에 생긴 해프닝(그러나 쿠건 부자는 시니어-주니어 관계가 아니었다고 한다.).
  • [17] 이 재키 쿠건이 '쿠건 법'의 주인공으로, 키드의 유명세로 얻은 막대한 돈을 쿠건의 부모가 싹 날려 버려서 사회적 이슈가 되고 이로 인해 쿠건 법이 제정되어 아역 배우의 수입을 부모가 전부 낭비하지 못하게 되었다.
  • [18] 채플린이 구두끈을 스파게티 마냥 집어먹는 게걸스러운(…) 코믹영화. 자세한 것은 본문 참조.
  • [19] 이 영화를 찍을 때 채플린의 멘탈은 파탄 지경에 이르렀는데, 느닷없이 세트장이 파괴되고, 현상실의 실수로 몇 주간의 촬영물을 전부 날렸으며, 촬영 9개월 후에는 화재로 스튜디오가 대부분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정부는 100만 달러 이상의 탈세 혐의로 채플린을 기소했고, 리타 그레이와의 이혼 소송도 겹쳐 최악의 상황이었다. 훗날 채플린은 사자 우리에 들어간 장면에서 자신의 얼굴에 나타난 공포감은 연기가 아닌 진짜였다고 회고했다
  • [20] 약 400명이 광산을 찾으러 갔다가 혹한 및 식량 부족 때문에 약 40명만이 살아남은 비극적인 실제 사건이 배경이다
  • [21] 이 영화의 첫 개봉 때 E=MC2 박사님까지 오셨다!
  • [22] 찰리 채플린의 영화는 1928년의 '서커스'까지 모두 무성영화였다. 그러나 '시티 라이트'부터 음악과 효과음을 넣은 사운드트랙과 함께 제작되었고, 이후 많은 그의 옛 작품들은 음악을 삽입한 새로운 버전으로 재발매되었다. 물론 이것도 대부분 채플린 본인이 작곡한 곡들로 채워졌다(!!)
  • [23] 그러나 모던 타임즈나치스로 인한 제2차 세계대전의 징조, 소련의 대두 등의 외부적 문제 때문에 채플린이 공산주의자라는 오명을 쓰게 되는 발판이 되었다.
  • [24] 카이저라이히:대전의 유산에서는 모던 타임즈좌빨 냄새 난다고 상영 금지를 당하고, 동방의 빛에서는 국가 보안법에 걸려 코렁탕을 먹는다! 거기다 카이저라이히 경우에는 (이벤트로는 안나오기는 하지만) 미국 내전(공산당VS극우파VS캘리포니아VS미합중국)이 터져서...납북(?)되거나 빨갱이로 몰려 죽었을 가능성이...안습.
  • [25] 목소리로 말을 할수 없었기 때문에 행동을 과장되게 연기해서라도 관객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해야 했던 것
  • [26] 이 영화 역시 마지막의 연설 장면 때문에 국민을 선동하는 공산주의자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위대한 독재자 항목 참고.
  • [27] Comrade. 공산주의자들끼리 하는 호칭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동무'에 해당한다.
  • [28]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상당히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사회주의 활동을 했다. 그들 대다수는 나름대로 교육도 잘 받은 재원이었으며, 사회주의를 이상적인 이념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많았다.
  • [29] 전형적인 유태인식 이름이다
  • [30] 이는 채플린의 가짜 전기에서 나온 내용이다. 채플린의 전성기 시절 '채플린의 전기'라는 수많은 가짜 전기들이 나돌았다. 오죽하면 한 언론사에서 '우리는 막 채플린의 전기를 입수했다. 그런데 다른 언론사에서도 자신들이 구한 전기가 진짜라고 우긴다. 확인 바람'이라고 전보를 보냈을 지경.
  • [31] 원제는 그냥 '베르두 씨 Monsieur Verdoux' 였으나 국내 번역 당시 금광 시대의 영향을 받은 듯 싶다.
  • [32] 주인공 베르두의 살인 유희(돈 많은 여성들과 결혼, 살해하여 재산을 빼앗는다는 막장 전개)가 문제였고, 이 때문에 영화 검열 위원회와 가톨릭 풍기 위원회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마녀재판?
  • [33] 자신의 부모님을 위해 동료들의 이름을 밀고하는 소년을 보여주는 등 매카시즘에 대한 비판이 영화 후반의 주를 이룬다. 다만 초반에 미국 대중문화의 방종과 퇴폐를 비판하기 위해 로큰롤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장면은 편협한 연출이었다는 신진 비평가들의 비판도 있었다.
  • [34] 이때 너무나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이 나온다.
  • [35] 물론 실제로 구두끈을 먹은건 아니고, 영화에서 나온 구두는 감초로 만든 가짜 구두와 구두끈이다. 이걸 먹고 찰리 채플린과 동료 배우 맥 스웨인이 3일간 복통에 시달렸고 한다.(...)
  • [36] 채플린 최고 걸작 하면 보통 꼽히는 작품이 시티라이트, 모던타임즈, 위대한 독재자다. 채플린 최고의 흥행을 거둔 작품도 1940년작인 유성영화 위대한 독재자. 게다가 비평으로는 살인광시대와 라임라이트까지도 걸작 소리를 듣는다. 뉴욕의 왕과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은 다소 평가가 낮은 편.
  • [37] 작중에서도 공산주의자 왕이라니! 하면서 어이없어 한다.
  • [38] 농담이 아니라 진짜 로리콘이 맞는게 소설 롤리타도 채플린이 19살 연하의 리타 그레이와 결혼한 것을 바탕으로 쓰여졌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 [39] 위대한 영화감독들의 기상천외한 인생이야기 중 발췌
  • [40] 추정父인 채플린은 O형, 베리는 A형...애는 B형. 친자라면 A형과 O형만 나올 수 있다.
  • [41]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영화배우의 길을 걸었다. 닥터 지바고의 영화판에서 주인공인 유리 지바고(오마 샤리프)의 아내 역할을 맡았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주연으로 출연한 아버지의 전기 영화에서는 채플린의 어머니 한나 역을 맡았다. 딸인 우나 채플린도 배우로 활동하면서 왕좌의 게임 등에 출연하고 있다.
  • [42] 아버지가 다르단 뜻의 異父이다.
  • [43] 프랑스인으로 보인다. 카르멘과 돌로레스는 프랑스 영화에 나오기도 한다.
  • [44] 덧붙이자면 모던 타임즈의 공장 장면이 영화 "우리에게 자유를"의 장면을 도용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 [45] 키튼은 채플린이 영화를 만들 때 시계공 마냥 정교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 [46] 3등이었단 얘기도 있다. 매채마다 결과가 다르다.
  • [47] <국가의 탄생>, <인톨러런스> 등을 감독한 미국영화 초창기의 거장.
  • [48] 위대한 독재자까지 25년을 함께 일했던 촬영감독 롤리 토더로의 증언. 독재자 이후 딱히 사이가 나빠질 일도 없었는데 다른 촬영감독과 계약을 맺으면서 토더로와 연락을 끊었다고 한다.
  • [49] 그런데 본 출처의 내용은 상당히 의심스럽다. 일단 채플린은 유대인이 아니다.
  • [50] 구글링 결과 High는 들어가기도 하고 안 들어가기도 한다.
  • [51] "의지가 약한 사람"이라는 뜻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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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12-04 19:4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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