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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개명

last modified: 2015-04-06 15:27:06 by Contributors

創氏改名
한국의 성명(名)을 일본식 시메이(名)로 바꾼 것이므로 창씨(創氏), 즉 '씨'를 창제하는 일이 된다. 물론 개명(改名)이란 말에서 보듯, 이름(名) 역시 함께 개조했다.

Contents

1. 일제강점기 말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던 일
1.1. 배경
1.2. 진행
1.3. 목적
1.3.1. 대외적인 목적
1.3.2. 진짜 목적
1.4. 조선인들의 반응
1.5. 창씨개명의 대응
1.6. 유명 인물의 창씨개명 목록
1.7. 창씨개명 거부자에 대한 조선총독부 불이익 조치들
1.8. 해외의 유사사례
1.9. 참고 문헌
2. 만화, 애니메이션 관련 용어
2.1. 역사

1. 일제강점기 말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던 일

조선 총독부에서 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조상님들의 성과 이름을 강제로 일본식으로 바꾸게 했던 것을 말한다. 일본식 성명강요(日本式 姓名强要)라고도 한다.

1.1. 배경

그 기원은 1890년대 일본에서 메이지 민법의 제정을 통해 폐성창씨를 이뤄낸 이토 히로부미와 우메 겐지로 교수가 새로운 식민지가 될 조선의 새로운 민법을 구상하면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둘은 조선의 서구 문명화를 구실로 조선의 성 제도를 없애고 일본처럼 씨 제도로 바꿀 계획을 구상했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되고 우메 겐지로 교수도 급사하면서 이 계획은 흐지부지해졌다. 조선 총독부는 조선의 정서상, 일본식 성명을 강제하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고 여겼고 이를 시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계획이 아주 포기되진 않아 1919년에 창씨정책 시안을 수립했다. 얼마 후 3.1운동이 일어남으로 이 계획은 유보되었지만 일본은 1923년 조선민사령을 통해 조선의 호적을 일본식 家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식 호적제도로 개편했고 1929년에 다시 창씨개명 2안을 수립했지만 본국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한편 일본 내부에선 동경제국대학 교수인 니토베 이나조우 교수를 필두로 조선을 점진적으로 동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고 있었다. 이들은 기존의 무단통치의 가혹함이 오히려 조선 지배에 해가 됨을 지적하면서 조선에 유화적인 통치를 펼쳐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일본의 통치를 우러러보게 한 다음에 아예 일본인의 일부로 동화시켜 조선을 내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미즈노 렌타로우 2대 정무총감 등에 의해 채택되었으니 이게 바로 문화통치다. 하지만 동시에 일본에선 식민지에게 자치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분화 운동 역시 격렬히 제기되었고 이에 따라 동화와 자치를 동시에 추진하는 '자주협동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배 방식인 연합주의의 벤치마킹이었다. 프랑스는 식민지에 강제적인 프랑스 동화를 강요했는데 오히려 격렬한 반발로 식민통치가 어려워지자 동화엔 관심이 없는 영국식 통치와 기존의 방식을 절충하여 내놓은 자치와 동화의 병행 정책이었다. 1930년대에 이르러선 이런 점진적 동화가 급진적 동화로 전환되었는데 1935년 일본의 국정교과서들은 조선인과 대만인을 일본인이라고 표기하는 등 동화의 의지를 표명하고 있었다.

1.2. 진행

1936년 8월 전 육군대신이자 관동군 사령관인 미나미 지로가 7대 조선 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천황이 조선에 방문해도 좋을 정도로 조선의 치안을 안정시키며 조선인들에게 천황 숭배 사상을 가지도록 정신을 개조하여 '우량한 황국신민'으로 만드는 것과 조선에 징병제를 실시하고 조선 청년들에게 일본의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세뇌시키기 위한 교육의 확보를 목표로 삼았다. 그는 부임 직후 일본어의 생활화와 천황 숭배를 방해하는 다른 종교들을 탄압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미나미 지로는 가혹한 탄압으로 조선 내부의 독립 운동을 완전 독립과 자치, 좌와 우를 가리지 않고 때려잡아 조선의 표면적인 안정화를 가져왔다. 이에 고무된 미나미 지로는 황민화와 징병을 기반으로 한 동화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1937년 10월 황국신민의 서사가 발표되었고 조선인들에게 신사참배를 하는 것이 의무화되었다. 1938년 2월에 지원병제가 실시되었고 4월에 조선어의 상용 및 교육 금지 정책과 더불어 일본어 보급 정책이 실시되었다. 5월에는 일본의 국가총동원령을 조선에까지 확대시켰다. 그리고 조선인의 충성심 고취와 완전한 내지화를 통한 사법 행정의 일원화와 징병 및 국가 자원의 동원을 완성하기 위해 조선과 대만에 조선, 중국식 성을 폐지하고 일본식 씨를 새로 만드는 폐성창씨를 강요하게 되었다. 총독부는 이 정책이 조선인과 대만인의 차별을 완전히 철폐하고 그 증거로 그들에게 일본식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했으며 폐성창씨의 대체어로 개성명이란 용어도 적극 사용했다.

우선 일본은 조선의 지식인층을 단속하기 위해 수양동우회 사건과 흥업구락부 사건을 일으켜 좌우익을 망라한 조선의 수많은 지식인들을 체포했고 이들에게 극심한 고문을 가하며 천황과 국가에 충성하는 황국신민이 되겠다는 전향서를 쓸 것을 강요했다. 결국 이광수를 비롯한 수백명의 지식인이 사상 전향서를 쓰고 나서 겨우 풀려났다. 하지만 구속된 지식인들은 조상을 욕되게 하는 폐성창씨 정책에는 차라리 자신들을 죽이라고 거의 미친듯이 반발했다. 이들 대다수가 프라이드가 높은 지식인들이었으니 일본식 성명을 강요하는 것은 더욱 치욕이었을 것이다. 이들의 반발에 놀란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미나미 지로에게 일본식 성명을 강요하면 3.1운동을 뛰어넘는 대규모 '폭동'이 일어날 것이니 일본식 성명을 강요하는 것을 불가능하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결국 일본은 조선식 성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일본식의 새로운 씨를 부여하는 것에 그치는 창씨개명으로 후퇴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만에선 기존의 폐성창씨를 그대로 추진했다. 그렇게 1939년 11월 10일 제령 19호와 20호를 통해 창씨개명의 방침을 발표했다. 이는 1940년 2월 11일 기하여 효력을 발휘했다. 조선총독부는 기존의 '관습적 성명'과 더불어 일본식 씨명을 등재하고 일상생활에서 씨명을 쓸 것을 명령했다. 이렇게 호주의 아내와 어머니에게 집안의 성과 다른 성이 허용된 것과 달리 여성들에게도 같은 씨가 강요되었다. 조선총독부는 6개월 안에 호주가 의무적으로 창씨를 해야 한다고 위협했다. 만약 호주가 응하지 않아도 직권창씨라 하여 이름을 강제로 바꿀 계획이었다. 자발적으로 창씨한 사람은 신고(또는 설정) 창씨였다. 과거에는 자발적으로 바꾼 설정창씨와 강제로 이름을 바꾼 법정창씨로 구분되었으나 조사결과 설정창씨와 직권창씨를 따지지 않고 모든 조선인들은 제령 19호에 따른 법정창씨에 해당됐다.

1.3. 목적

1.3.1. 대외적인 목적

미나미 지로는 창씨개명을 선포하면서 조선은 이제 식민지가 아니라 내지다! 라고 호기롭게 선언하면서 창씨개명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 1. 중국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내고 조선 고유의 문화를 확립하기 위해서. 그래서 일본식 성씨를 강제합니까?
  • 2. 조선인들이 원해서. 뭐요?!
  • 3. 조선의 성은 250종 밖에 안되는데 이는 10만 종에 달하는 씨를 가진 일본과 대조적이다. 일본처럼 다양한 종류의 씨를 가지면 선진화와 문명화를 이룩할 수 있다. 논리가 없어보인다면 그건 착각이 아니다. 그냥 황국신민화의 밝은 내일이라고 실토해라

그리고 기존의 성이 없어지는게 아니라 기존의 성은 그대로 남고 새로운 씨를 부여할 뿐이니 착각하거나 흥분하지 말라는 뻔뻔한 설명서까지 전국에 배포했다. 그리고 이광수를 비롯한 지식인들을 대거 내세워서 창씨 개명 홍보에 들어갔다.

1.3.2. 진짜 목적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당연히 민족 고유의 정체성을 말살해 독립의지를 꺾기 위한 계획이었다. 궁극적으로는 한반도를 식민지가 아닌 일본의 일부로 완전히 합병[1]하려던 계획이었지만, 직접적인 이유는 당시 전쟁에 어떻게든 조선인을 좀 써먹어보려고.[2]

조선인과 일본인의 외관은 매우 닮았기 때문에[3], 성명까지 일본식으로 바꾸고 호적을 교체한다면 외견으론 물론, 법적으로도 조선인과 내지인 즉, 일본인을 분간하기 어려워진다.[4] 조선인이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면[5] 식민지 국민으로서의 조선인보다는 분명 낫겠지만,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이 사라지게 되는데 이게 마냥 좋아할 일이겠는가. 그래서 이 정책이 민족 말살 정책의 핵심적인 위치로 지목받는 것이다. 오히려 식민지 초기에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외형상으로 구분하기 어렵다는 사실 자체를 일본인들은 매우 두려워했다.

1.4. 조선인들의 반응

나름대로 총독부에서는 미나미 지로 총독의 부임 이래로 오랫동안 준비해서 건국기원절[6]인 1940년 2월 11일에 맞춰 대만과 동시에 6개월의 시한을 주고 자발적으로 창씨하셈이라고 집중적으로 광고를 때렸다. 미나미 지로는 열화와 같은 호응이 있을 것이라고 매우 느긋한 태도로 김치국부터 들이마셨는데 그날 하루 전국에서 고작 48명만 창씨를 했고 총독부가 발칵 뒤집혔다. 총독부는 전국의 유지, 지식인들에게 모범을 보이라고 독촉하면서 기존의 느긋한 태도를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2월말까지 호응은 겨우 0.26%였고 두달이 지나도 1.07%였다. 총독부는 창씨개명의 수속을 매우 편리하게 해주었고 비용도 깎아주었다. 하지만 전국의 유림과 문중이 반발이 강력하여 끝내 실효를 못 봤고 총독부는 강제적인 집행에 들어가게 되었다.

폭발적인 신청 접수를 예견한 총독부에서 현장 격려 공문까지 발송했을 정도인데, 정작 시한의 절반인 5월 20일까지 창씨개명을 한 가구 수는 조선 전체 428만 2754가구 중 고작 32만 6105호에 불과했다. 7.6%라는 경이적인 무반응에 열이 뻗친 총독부는 강제로 창씨개명을 밀어붙이게 되어 결국 나머지 3개월 동안 300만 가구(!)를 창씨개명시키게 되었다. 이에 따라 창씨개명 업무가 종료된 1940년 8월 10일에 집계된 통계로는 전체의 80.3%인 320만 116가구가 창씨개명이 완료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도 창씨개명 신청을 받아 1941년 81.5%로 늘게 된다. 당시 신문들은 xx군 xx% 달성! 이란 식으로 창씨개명을 독려하는 내용을 연일 선전하는 등 총독부의 강제력에 대해서 매우 절실히 입증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분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면 당시의 평범한 조선사람들에 있어서 창씨개명이란 건 교과서만 보면 온 민족이 목숨을 걸고 저항했을 것 같은 이미지와는 달리 일부를 제외하면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던 듯하다.[7] 그냥 이장이 나와서 이름을 쭉 부르면 그대로 나가서 서류에 쓰라는 거 쓰고 끝나는 정도였다고 한다. 나랏님들이 하라고 하니 일반 사람들은 그저 서류만 작성하고 이름을 바꾸긴 했지만 정작 개명된 뒤에도 마을사람들은 자기 일본이름이 뭔지도 모르고 그저 예전에 부르던대로 부르고 살았을 정도라고 하니 말이다.(이 이야기는 일제강점기를 직접 겪으신 할머니, 할아버지들께 직접 들은 이야기) 즉, 다시 말하면 일본식 이름은 관공서나 이런 데서 공적으로 필요한 경우에만 쓰였고 일상생활에서 한국사람들끼리는 한국식 이름으로 쓰는 게 대세였다는 소리.[8] 관공서 갈 일 없으면 자기 일본이름 몰라도 상관 없었을 듯하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 논란이 있겠지만 창씨개명 당하는 입장으로서는 본명 외에 그냥 일본이름 하나 더 생기는 거 정도로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다는 거겠다. 물론 당시 직업 특성상 필연적으로 개명된 이름을 부르며 살아야 했던 분들은 현재 와서도 이따끔씩 서로를 일본식 이름으로 부르는 분들도 간혹 계신다.[9]

통감부 시기에는 일본에 아부하거나 이득 좀 보겠다는 이유로 자발적인 창씨개명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애초에 창씨개명 1호라는 이동인 같은 경우 누가 강요했을 리 없고, 송병준 역시 경술국치 시기 정도 되면 이미 일본식 이름을 갖추고 있었다. 심지어 데라우치 총독은 조선인의 일본식 이름 사용을 금지했을 정도였다.

이런 떡밥 때문에 간혹 일본 극우들이 "창씨개명은 조선인을 위한 정책"이라는 둥 "조선인에게 일본인과 같은 권리를 주기 위한 관대한 조치"라고 주장하며 망언을 지껄이는데, 대꾸할 가치도 없는 병크. 애시당초 조선을 일본 내로 영구 편입하려던 계획의 일부일 뿐이며, 설령 조선에 도움이 된다 할지라도 그걸 강제할 권리가 그들에게 있는가? 덧붙이자면 창씨개명은 조선 이름을 공식적으로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새로운 이름을 만드는 것이었다. 창씨개명을 해도 원래 이름과 창씨개명한 이름이 나란히 호적에 오르게 된다. 게다가 성을 만들때도 일본 무사계급의 유명한 성들로 창씨개명하는 것은 애당초 거부했고, 조선인들은 조선인들인 것을 알 수 있는 성씨로 창씨개명을 하게 시켰다.

또 현재 일본에서 재일교포들이 신상을 숨기고 활동하는 것이나, 부락지명총람사건을 통해 부락민의 출신지를 죽어라 캐내는 현대 일본인들의 모습을 보면, 실제로 창씨개명이 전면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조선인 차별이 없어졌을 가능성은 희박하다.[10] 실제로 현재도 2ch 등지의 혐한초딩들 사이에서는 "~라는 성씨는 재일" "~는 이런 점을 볼때 재일"이라는 식의 발언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일본인들의 '차별의식' 자체가 사라지지 않는데, 이런 정책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창씨개명의 결과는 한민족을 문화적 정체성조차 상실하였지만 여전히 차별을 받는 열등 일본인으로 만들 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 자주 거론되는 것이 당시 유명인사 중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발견된다는 이유로 자발적인 정책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그건 창씨개명이 자발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선전용. 참고로 해방 직후 친일파 한 명이 자기는 창씨개명도 안 했다고 반박했지만 반민특위의 이 말에 버로우 탔다.

진짜로 일제측이 창씨개명을 강요했는 데도 꿋꿋이 개명 안 하고 버틴 사람 중 한 분으로 만해 한용운 선생이 있다. 훌륭하신 분이다. 그러나 창씨개명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친일파로 몰아가는 것은 부당하다. 그 당시 일제가 넣은 압박은 범인(凡人)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기 때문. 버틴 사람이 대단하신 것이지, 못 버틴 사람이 약한 건 아니다. 또한 위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일반 백성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해야 한다. 독립 의지와 민족 정체성이 뚜렷했던 독립 운동가들과는 달리 그들은 말그대로 평범한 민중이었을 뿐이기에 민족성도 없는 무지한 민중이었다고 비판해서는 안된다.

더불어 창씨개명을 거부한 이들에서도 친일파도 있었다. 한 친일파는 거액을 일본에게 바치고 악랄하게 사업을 하여 악명이 높았던 이도 있었는데 창씨개명에 죽어라 반발했고 억지로 하라고 하면 차라리 죽겠다 대들었다. 되려 창씨개명을 관리하는 일본 공무원들이 그를 설득해야 했는데 그동안 친일파로 잘 활동하던 사람이라 이랬으니 그들도 당황해했다. 하지만 이런 설득에도 그는 이름만은 절대로 버릴 수 없다고 버티다가 결국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스스로 목을 메어 죽은 이도 있다. 그러니 창씨개명 거부했다고 죄다 저항하던 항일은 아니라는 것[11]

그리고, 홍사익 같이 일본군에서 장성급에 오르면서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던 인물도 있다. 근데 이 경우는 일제가 정치적/정책 선전 이유로 안해도 터치 안한듯 싶다. 사실 조선인과 천황의 신민, 두가지 정체성을 내세운 사람에게 굳이 창씨개명을 시킬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한편 세벌식으로 유명한 공병우 박사는 창씨개명하라고 하니까 본인이 사망했다는 사망신고서를 내기도 했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할 경우 대체로 그 집안의 문중이 모두 모여서 회의를 통해 정했는데, 안동 권씨의 경우 안동의 안(安)과 (權)을 따서 안켄(安權)으로 창씨했으며, 더러는 안도(安東)로 창씨한 경우도 있었다. 故 노무현 대통령의 성씨인 (盧)씨의 경우, 시조가 평안남도 용강군 쌍제촌에 살았기 때문에 오카무라(岡村)로, 유력 정치인인 정몽준 후보의 집안은 하동 정씨는 고향인 하동(河東)을 일본식으로 훈독한 가와히가시(河東)로 창씨했다. 안도, 오카무라, 가와히가시는 일본에도 존재하는 성씨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창씨인 다카키(高木)의 경우에는 박(朴)의 목(木)자와 고령 박씨의 고(高)자를 따서 만든 것이다.

  • (南)씨나 (柳)씨, (林)씨, (桂)씨, (吳)씨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미나미(南)나 야나기(柳), 하야시(林), 카츠라(桂), 쿠레(吳) 같은 성씨는 이미 일본에도 있었기 때문에 안 해도 알아보지는 못했다는 듯.[12] 반대로 진짜 일본인인 미나미나 야나기 성을 가진 사람들이 조선인으로 오해받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13] 이것만 봐도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을 없애고 동등하게 대우하려 창씨개명을 했다'는 주장이 얼마나 웃기는 소리인지 알 수 있을 듯. 다른 의미로 웃기는 사례로, 8대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郎)가 부임하자 종씨가 보위에 오르셨다면서, 인사를 드려야 한다고 남원에서 일가족을 이끌고 상경한 어떤 남씨가 있었다고 한다.[14]

    이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가지는 성씨에 대한 인식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메이지 유신 때 일괄적으로 성씨를 부여한 일본에서는 성이 같은 것은 그저 '우연'이지만, 오래 전부터 성씨를 사용해 온 한국에서는 성씨가 같다는 것은 분명 몇 대 조상의 위에서엔가는 혈연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조선 말기의 족보매매로 구매한 성씨와 그렇지 않은 성씨의 분간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실제로 대대로 내려오는 성씨가 갈려버린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에 대한 관념 자체가 일본과 달랐기 때문에 그 심리적 반감이 만만치 않았던 것.[15]

  • 남궁(南宮)씨의 경우에는 성이 두 글자인데다 그럭저럭 일본식 성씨하고 비슷하기도 하게 보이는지라 그대로 놔뒀는데도 이미 창씨개명을 한 줄 알고미나미노미야 아무 불이익도 받지 않고 그냥 넘어가기도 했다. 사공(司空)씨의 경우도 마찬가지.츠카사소라 독고(獨孤), 선우(鮮于), 제갈(諸葛), 황보(皇甫)씨의 경우에는 일본식으로 넘어가기에는 티가 났는지 본관 등을 따서 창씨를 하긴 했다.

    원래의 한국식 성에 다른 글자를 붙여 일본식 성으로 바꾼 것 말고도, 원래 한국식 성의 글자를 파자한 것도 있다. 張이 유미나가(弓長)로 된 것이 그 예로, 유미나가의 한자를 줄여서 보면 張과 같다. 朴씨도 키노시타(木下)로 바꾸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전주 이씨의 경우 대체로 아사모토(朝本), 미야모토(宮本), 쿠니모토(國本)[16]로 바꾸었는데, 이유는 조선왕실.

  • 고대 일본 귀족 성씨인 원평등귤(源平藤橘, 미나모토, 다이라, 후지와라, 타치바나)은 쓰지 못하게 했다.

  • 한국 국적이나 조선적을 가진 재일동포나, 중화인민공화국 또는 중화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재일 화교들은 일본 국적으로 귀화를 신청할 때 당신과 같은 성씨는 일본에 없다는 이유로 여전히 일본식의 창씨를 강요받고 있다.[17] 기존 국적이나 조선적을 계속 유지하면 되지 않느냐고? 내국인이 아니어서 생기는 불이익이 적지 않으니 귀화를 결심하는 것이다. 특히 조선적을 가진 사람의 경우에 대해서는 조선적 항목 참조.
    다만 손정의의 경우에는 일본 국적으로 귀화하면서 같은 이유로 거부당하자 '역창씨개명'을 시도했는데, 일본인인 자기 부인을 손씨로 창씨개명시켜서, 일본인 중에 손씨가 있음을 증명하여, 성명 한자를 그대로 두되 이름의 독음만 훈독으로 읽어서 '손 마사요시'가 되었다. 역관광

  • 한국에서도 귀화인들에게 한국식 이름을 만들도록 시키긴 한다. 한국 민법에서는 1993년 이후 호적에서의 성명 글자를 성을 제외하고 다섯 글자로 제한시켰기 때문이다(...). 한자, 한글 불문.[18] 없는 성을 만들어도 된다는 게 다르고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이 귀화를 할 경우 일본인으로써의 성씨를 그대로 써도 되기는 하다. 대신 한자를 한국 한자음이 아닌 방식으로 읽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된다.[19] 예를 들어 사토(佐藤)라는 사람이 한국으로 귀화를 할 경우, 원칙적으로는 성을 한글 '사토'라고 써야 하며[20] 마치 인명용 한자 이외의 한자를 이름에 썼을 때처럼 한글로만 이름을 표기해야 한다. 佐藤을 성으로 등록시켜 사용할 수 있지만 이 경우에는 무조건 좌등으로 읽어야 한다. 이런 예가 양산 망절씨.

네이버 지식iN에 '창씨~'등으로 검색하면 제 이름은 ○○○인데, 제 창씨명이 궁금해요라는 질문글이 다수 검색된다. '창씨'라는 것은 (성)씨를 '만드는'것이라는 뜻이기에 창씨명이 '일본식 이름'이란 뜻이 아니라는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애초에 이름이란 건 고유명사이기 때문에 이름이 홍길동이면 일본에서도 홍길동(에 가까운 발음)이지 무슨 귀화를 한 것도 아니고 일본식으로 음독/훈독할 이유가 전혀 없다. 차라리 일본에서만 쓸 통명 내지 별명이라도 만들면 모를까.

1.5. 창씨개명의 대응

한편, 억지로 이름을 바꾸는 것에 반감을 느낀 조상님들은 얌전히 창씨개명을 당하는 대신, 각종 개드립이 섞인 개명으로 역관광을 꾀했고, 그 결과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있는 창씨개명된 이름 중에서는 조상님들의 파격적인 선구자의 개드립 재치가 번뜩이는 이름도 많다.

  • 이누쿠소 구라에(犬糞食衛, 견분식위). 개똥이나 처먹어라라는 의미. 물론 당연히 퇴짜를 맞았다.
  • 비슷한 이름으로 '이누코 구마소(犬子熊孫, 견자웅손)'. 단군의 자손이 개자식이 되었다는 의미. 역시 퇴짜를 맞았다. 다만 일본에도 비슷한 뜻인 이누카이(犬養) 씨는 있다. 저 집안에선 수상도 나왔는데 왜 이 성씨는 퇴짜요?
  • '전병하(田炳夏)'라는 이름을 가진 한 농부는 자신의 이름에 농(農)을 붙여 '전농병하(田農炳夏)'라고 신고하였다. 저걸 일본어식으로 읽으면 덴노헤이카(天皇陛下). 덕분에 경찰서로 끌려갔다.[21]
  • 어떤 고등학생은 창씨개명강요에 반항하는 의미에서 쇼와의 황태자 책봉 이전 칭호와 이름을 합친 '미치노미야 히로히토'(迪宮裕仁)미친놈이야 히로히토라고 개명을 하려 해서 역시 경찰서에 끌려갔다.
  • 조선총독부로 '덴노조쿠 미나고로시로(天皇族 皆殺郞, 천황족개살랑)', '쇼와 보타로(昭和 亡太郞, 소화망태랑)'라는 이름으로 창씨해도 되냐는 엽서가 날아온 적도 있다고 한다. 앞의 이름은 천황족 다 죽이자는 뜻인 天皇族 皆殺에 사람 이름에 붙이는 (로)를 붙인 것이고, 뒤의 이름은 쇼와 망해라라는 뜻인 昭和亡에다가 맏이의 이름에 쓰이는 太郞(타로)를 붙인 것.
  • 비슷한 경우로, 어떤 사람은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총독이 되었을 때 '내가 미나미 지로보다 형이다'라는 의미로 '미나미 타로'(南太郞)로 창씨개명했다. 물론 퇴짜. 천황과의 연관은 없어 코렁탕은 안 먹은듯 참고로 次郞(지로)는 차남에게 붙이는 이름이다.
  • '구로다 규이치(玄田牛一)'라는 이름은 畜生파자한 것으로 세로로 써서 읽으면[22] 딱 畜生이 된다(...). 역시 퇴짜.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신불출이란 만담가(개그맨)의 개그 네타로 언급된다. 호옹이.

1.6. 유명 인물의 창씨개명 목록

이 항목을 자세히 읽어보았다면 당연히 알 수 있겠지만 '창씨개명을 한 사람=친일파'인 것은 절대 아니다. 당시 사회현실상 어쩔 수 없이(학교 진학 등) 했던 사람도 있고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너무 어려서 부모님이 창씨개명을 해주신 경우도 있다. 물론 아래에 나열된 사람 중에 친일파도 있지만 유명인물의 창씨개명 사례를 가지고 '너 친일파'라고 공격하는건 신중해야 한다. 항목에서 계속 강조되고 있는 것이지만, 친일파여부와 창씨개명의 여부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인물 성씨 기준으로 가나다순 정렬 부탁한다. 창씨개명 원리는 옆에 쌍점을 붙이고 적으며, 창씨원리와 상관없는 내용은 주석처리바람.

  • 강만길 - 쿄다 만키치(姜田萬吉) : 강/만길로 분리한 다음 성씨에 田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동인 - 콘도 후미히토(金東文仁) : 김동/인으로 분리하여 '김동'으로 창씨한 다음, '인' 앞에는 문학을 뜻하는 文을 넣었다.
  • 김동환 - 시로야마 세이주(白山靑樹)
  • 김영삼 - 카네무라 코유(金村康右) : 성씨인 金을 따서 창씨했다.
  • 김대중 - 토요타 다이추(豊田大中) : 풍전은 농사가 잘 된다는 의미로 전라도를 뜻한다고도 한다. 이름 부분은 '대중'을 그대로 썼다.
  • 매국노 김활란 - 아마기 카츠란(天城活蘭) : '활란'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노덕술 - 마츠우라 히로(松浦鴻) 어? '기러기 홍'인데 왜 '히로'로 읽지...
  • 리덩후이(이등휘) - 이와사토 마사오(岩里政男)
  • 박정희 -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 : 본관인 고령(高靈)에서 高를 따고, 朴에서 木을 따 창씨하였다.
  • 배정자 - 타야마 사다코(田山貞子) : '정자'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미당 서정주 - 타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 : 본관인 달성으로 창씨했다.
  • 매국노 송병준 - 노다 헤이지로(野田平治郞)[23][24]
  • 심영 - 고자아오키 진에이(青木沈影) : '심영'을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쑨원 - 나카야마 쇼(中山樵) : 쑨원이 일본에 망명해 있을 때 도쿄의 히비야 공원 근처에 살았는데, 그 근처에 나카야마(中山)라는 저택이 있었고 이 글자를 마음에 들어하여 자신의 호와 창씨명으로 썼다. 에서는 쑨원이란 본명보다는 창씨에서 유래한 호를 붙인 '쑨중산 선생'으로 더 많이 부른다.
  • 윤동주[25] - 히라누마 도주(平沼東柱) : '동주'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윤치호 - 이토 치코(伊東致昊)[26] : 尹에 人변을 붙이고 뒤에 東 자를 붙여 창씨하였다. 이름 부분은 '치호'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 춘원 이광수 - 카야마 미츠로(香山光郞)
  • 이동인 - 아사노 도진(朝野東仁)[27] : '동인'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朝野라는 창씨명은 '전주 이씨 → 조선'에서 온 듯.
  • 이명박 - 츠키야마 아키히로(月山明博) : '명박'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봉창[28] - 키노시타 쇼조(木下昌藏)
  • 매국노 이완용 - 리노이에 간요(李家完用) : 해석하면 이씨네 집의 완용이(...). 친일파 치고는 상당히 조선틱한 창씨명이다
  • 오리 택부 - 젠케 타쿠후(全家澤鳧) : 창씨개명 당시에 전씨 집안이라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 성을 '전가(全家)'로 했다고 생존 당시 KBS 프로그램인 《사랑방중계》에서 밝힌 바 있다. 이름 부분은 '택부'를 그대로 사용.[29]
  • 장면 - 타마오카 츠토무(玉岡勉) : '면'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장준하 - 조안 슌가(張安俊河) : 장/준하로 분리한 다음 성씨에 安을 넣어 창씨하였다.
  • 장훈 - 하리모토 이사오(張本勳) : 장/훈으로 분리한 다음 성씨에 本을 넣어 창씨하였다.
  • 정지용 - 오오유미 오사무(大弓修) : 이족을 나타내는 한자 夷를 파자하여 大弓으로 창씨하고, 활 쏘는 자세를 뜻하는 修를 이름으로 삼음.
  • 요한 - 마츠무라 코이치(松村宏一)
  • 최규하 - 우메하라 케이이치(梅原圭一) : '규하'에서 圭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 최린 - 카야마 린(佳山麟) : 崔를 파자하여 佳山엄밀히 따지자면 隹山이겠지만으로 창씨하고, '린'을 그대로 이름으로 썼다.
  • 최영의 - 오오야마 마스타츠(大山倍達) : 崔에서 山을 따고 앞에 大를 붙여 창씨하였으며, 한민족을 뜻하는 배달을 이름으로 썼다.
  • 하판락 - 카와모토 한라쿠(河本判洛), 카와모토 마사오(河本正夫) : 하/판락으로 분리한 다음 성씨에 本을 넣어 창씨했다.

1.7. 창씨개명 거부자에 대한 조선총독부 불이익 조치들

1940년 창씨개명 제정 이후부터 조선총독부에서는 창씨개명 거부자에 대한 불이익 조치를 내렸다.

  • 직장/노무
    • 조선인 중 일본 성명을 개명하지 않은 경우 또는 창씨개명을 거부할 경우 해당자를 즉시 해고한다. 다만 일본 성명으로 개명 또는 창씨개명에 참여하였던 자는 복직을 할 수 있다.
    • 각 직장 및 노무사(社)들은 창씨개명을 거부한 조선인이나 일본 성명으로 개명하지 않은 조선인의 고용 및 입사 등을 절대 금하며 이를 어길 경우 총독부령에 따라 엄벌에 처한다.
    • 창씨개명 거부자 또는 일본 성명을 개명하지 않은 자에게는 봉급 급여를 불허하거나 삭감해야하며 이를 어길 경우 총독부령에 따라 엄벌에 처함과 동시에 해당 직장을 강제 폐쇄 조치한다.

  • 학교/교육
    • 조선인 학생 중 일본 성명을 개명하지 않았거나 창씨개명을 거부한 학생의 경우 해당 학교 교장 및 교사는 해당 학생들에게 창씨개명 및 일본 성명으로 개명할 것을 권고해야하며 마찬가지로 교직원들도 창씨개명을 의무적으로 해야한다. 이를 어긴 학교나 교장 및 교직원 등은 즉시 학교에서 제명 및 해고처리를 당하며 학생의 경우 즉시 정학 및 퇴학 조치를 한다. 학교 집단에서 거부할 경우 해당 학교를 폐교 조치한다.
    • 창씨개명 거부자 또는 일본 성명으로 개명하지 않은 학생은 입학을 불허하며 교육대상에서도 전면 제외한다. 학교 중 조선 성명을 쓰는 학생의 입학을 무단으로 허가했을 경우 해당자는 엄벌에 처하며 해당학교도 폐교 조치한다.
    • 학생들은 물론 해당 학생들의 부모나 직계가족 등도 모두 창씨개명을 해야하며 이를 어기거나 따르지 않을 경우 가족 전원을 처벌대상으로 올린다.

  • 교통/수송
    • 신분사항에서 일본 성명이 아니거나 창씨개명을 거부한 조선인 승객은 모든 교통편 이용을 불허한다. 또한 1등석 등 객차 이용도 절대 불허한다.
    • 철도 수송화물에 조선인 성명이 표기된 화물 역시 수송 이용을 불허하며 해당 화물은 즉시 반송처리한다.

  • 기타
    • 창씨개명을 거부한 조선인은 총독부에서 지원하는 물자 및 배급대상에서 제외한다.
    • 조선인 성명을 사용하는 자는 행정기관 민원사무에서도 불허대상이며 민원상담의 일체를 금한다.
    • 창씨개명을 거부하거나 일본 성명으로 개명하지 않은 조선인은 불령선인, 비국민 및 무국적자로 처리간주하며 군헌병과 경찰 등을 통해서 요주의 사찰대상으로 선행한다.
    • 창씨개명 제정 이후 출생한 조선인 신생아는 무조건 일본 성명으로 먼저 짓거나 단독으로 지어야하며 조선 성명 단독으로 짓거나 일본 성명과 병행해서 짓게 될 경우 비국민 및 무국적자로 처리하고 해당 부모는 엄벌에 처한다.

1.8. 해외의 유사사례

  • 위에도 적혀 있지만 대만이 일본 식민지였을 때 비슷하게 폐성창씨가 이뤄졌다. 예를 들면 위의 창씨개명한 사람 목록에 나와 있듯이 리덩후이(李登輝)는 일제시대에 이와사토 마사오(岩里政男)라는 성명을 썼었다. 한국성씨를 남긴 조선과는 대조적으로 대만은 호적에서 중국성씨를 아주 없앴다. 하지만 애초에 대만에선 그다지 열심히 개성명을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허가제란 것을 두어 일본 이름으로 바꾸는 것을 엄격히 했다. 결과적으로 1944년까지도 대만의 폐성창씨 비율은 전 대만인의 2%에 해당하는 7만명에 지나지 않았다.

  • 인도네시아하르토 집권 후 신질서(Orde Baru)시기에 화교들에게 중국식 성씨를 마개조해서고쳐서 인도네시아식으로 만들 것을 요구하는 법령을 발포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현재 인니의 중국계 대다수는 성씨가 다음절로 되어있다.

  • 태국화교들은 태국식 성명을 따로 쓰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전직 총리인 신 친나왓락 친나왓가족 출신의 화교인데, 두 이름은 태국식으로 고친 성명이며 각각 丘達新(관화: 추다신, 한국 한자음: 구달신)과 丘英樂(관화: 추잉러, 한국 한자음: 구영락)이라는 중국 이름이 있다.

  • 서양에서 다른 국가로 이민하는 사람이 본래 자신의 성과 이름을 해당국 언어에서 대응되는 이름으로 변경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예를 들어 만약 'Friedrich Johansen'(프리드리히 요한젠)이라는 이름을 가진 독일인이 있는데, 이 사람이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면서 'Frederick Johnson'(프레더릭 존슨)이라고 개명하는 식. 대개는 본래 가지고 있던 철자를 유지하지만 종종 이런 식으로 바꾸는 경우도 있다. 이것도 창씨개명의 유사사례로 볼 수 있다. 참고로 전근대의 인물은 언어마다 이름을 다르게 표기하는 경우가 많고[30] 지금도 교황의 이름을 적을 때는 언어마다 다르게 표기하는데[31] 이 경우는 창씨개명처럼 취급하기 곤란할 듯하다. 호적 상의 사람 이름을 고치는 게 아니라 그냥 과거 유럽의 관례를 따라 이름을 해당국 국어로 '번역'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마리 앙투아네트는 원래 마리아 안토니아였다.

  • 프랑스는 알제리에 프랑스식 이름을 강요한 적이 있었다. 프랑스식 적극적 동화정책의 일환이었는데 반발이 너무 심해서 손해가 크자 1900년대부터 방침을 바꿔 연합주의로 전환했다.
  • 과거 캐나다에선 과거 퀘벡 출신 사람들에게 프랑스식 이름을 버리고 영국식 이름을 우회적으로 강요한 바가 있다. 프랑스식 이름을 쓰면 취직에 차별을 한다거나... 퀘벡 출신 만화가 기 들릴의 회고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인 프랑수아 들릴이 프랑수아 들릴이란 이름으로 직업을 구하러 가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으나 프랭크 드릴로 이름을 바꾸자 그제야 직업을 얻었다고 한다.

  • 제1차 세계대전 때 영국에서 반독일 정서가 퍼지자 왕족들이 독일계 성씨인 섹스 색스-코버그 앤드 고사(Sex Saxe-Coburg and Gotha, 독일어로 적을 때는 Saxe-Coburg und Gotha(작세-코부르크 운트 고타))를 버리고 왕실이 보유한 성(castle)의 이름을 따서 윈저(Windsor)로 바꿔야 했다. 그리고 역시 독일계 귀족인 배튼버그(Battenberg, 독일식으로는 바텐베르크) 가문이 성씨를 마운트배튼(Mountbatten)으로 고쳤다. 이 둘은 현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부군인 에든버러 공작 필립의 성씨이기도 하다.

1.9. 참고 문헌

  • 창씨개명정책과 조선인의 대응(구광모, 중앙대학교)[32]
  • 동화정책 사례연구 -창씨개명을 중심으로- (구광모, 중앙대학교)[33]
  • '족보'와 '창씨개명' -김달수의 <族譜>와 가지야마 도시유키의 <族譜>를 중심으로.(박제홍, 김순전, 전남대학교)
  • 식민지 조선과 대만의 창씨개명, 개성명 비교 연구.(이승일, 한국외국어대학교)
  • 굿모닝 예루살렘(기 들릴)[34]

2. 만화, 애니메이션 관련 용어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들여오는 과정에서 작중 인물들을 현지화에 따라 수출하는 국가에 맞춰 개명하는 것을 실제 일제강점기의 사건에 빗대어 표현하는 말이다.

2.1. 역사

일각에선 1970년대 말엽부터 들어온 100원짜리나 500원짜리 4판형 미니북[35]판본의 해적판들때부터 창씨개명이 시작 된 것이라 주장하지만 이 경우엔 해적판의 불법번역판의 한계, 그러니까 오역으로 보아야 한다.

한국 서브컬처계에 창씨개명이란 영 좋지 않은 이름이 정착한 것은 김영삼에 의한 반강제적인 문화시장 제어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영삼대통령에 오른 후 고유의 전통 문화산업 복원 육성이라는 것을 주장하며 게임계에 공식적인 최초 지원(금을 가장한 대출 강요)을 하였고, 출판계에도 지원을 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정부 돈을 먹었으니 검열을 정부의 규격에 맞춰 받아라라는 미친 짓거리를 시작했고, 한국 고유의 전통문화사업 복원육성을 위해 돈을 주었으니, 등장인물은 한국인이어야 한다는 것을 시작으로 온갖 미친짓오역을 강요했다.

  • 라이선스판이라해도 한국인의 정서와 맞지 않는 경우 개명할 것
  • 한국인의 정서에 대한 기준은 심의관들이 임의로 지정할 수 있음[36]
  • 심의관의 업무량은 한계가 있음으로 '무작위로 작품을 선정함'[37]
  • 주인공의 경우 무조건적인 개명, 지역명칭은 지방도시 특색에 맞는 한국의 지명으로 교체

한국고유의 전통문화산업을 육성하네 뭐네라면서, 정작 토종 한국만화인 명랑만화시장은 쫄딱 망하게 놔두고, 짭짤하게 돈을 가져다 주는 수입서적의 검열에만 매진한 김영삼 정부의 병크는 잡지연재본과 단행본의 명칭이 달라지게 검열하는 병크[38]를 내보이며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가 되었다.

일부 개념있는 출판사들이 이에 대해 반발하자, 정부는 상큼하게 반발하는 출판사가 내는 서적에 심의를 빌미로 온갖 유해서적 지정으로 맞대응, 국가단위의 갑의 횡포를 제대로 보여주어 출판사를 데꿀멍 시켰다.

덕분에 김영삼 정부가 진행한 국가레벨단위의 개명강요는 서브컬쳐계에서 창씨개명이란 안좋은 단어로 정착해버렸다.

사실 만화쪽에 대한 김영삼 정부의 본격적인 병크는 온갖 유해서적 지정을 남발, 출판사가 심의를 통과하기 위해 그림을 알아 볼수 없는 지경까지 효과음을 씌우거나 수정액으로 지우게 만든 부분인데 이건 해적판도 이런 경우가 많아서 의외로 당시를 살던 오덕들은 그냥저냥 넘어가 주었다. 평소 보던(해적판)이랑 새로 보는(정식발매판)게 차이가 없어!

김영삼 정부의 개명강요는 이명박 정권 말기, 아청법을 토대로 게임시장과 정발시장에 자체적인 검열을 강요하게 된것과 굉장히 유사한 형태로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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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당시 일본이 조선을 완전한 일본으로 병합하고 용인으로 천도할 계획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출처가 1980년대 한국이고 그 원 문건은 공개가 되지 않은, 사실상 일방적인 주장이라 신빙성이 매우 떨어진다. 식민지 시기 최후반까지 조선은 일본에게 있어 이질적인 '외지'였던 것은 분명하다.
  • [2] 징병이나 징용도 비슷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사실 중일전쟁으로 한창 군사력이 필요하던 시절에도 일제는 조선인을 군인으로 써먹는다는 선택지를 애써 피하려고 했다. 왜냐고? 안그래도 차별받으며 사느라 감정이 좋지 않은 조선인을 군대에 억지로 집어넣고 무기까지 쥐어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래서 일제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는 울며 겨자 먹기로 조선인을 배제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사정이 급해지니까 '이제 차별하지 않는다'는 떡밥을 교묘하게 끼워서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했던 것. 내선일체 항목을 보면 딱 나온다. 징병과 징용이 시행되었을 때 일부 친일파들이 "드디어 우리도 황국신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할 수 있게 됐다"고 지껄인 데는 이런 배경도 있었다.
  • [3] 이 때문에 관동대지진 당시 "15원 50전(じゅうごいん ごじゅうせん)"을 말해보게 해서 특정 단어의 발음(つ, ご) 을 이용해 조선인을 구별해서 학살했다는 말도 있을 정도이다(그리고 여기에 중국인이나 타이완 인은 물론, 도호쿠오키나와 등 다른 지방 출신 일본인들까지도 애매하게 걸려 소수 참살당했다).
  • [4] 웃기게도 이 때문에 일본에서도 조선인을 구별하기 힘들어진다는 이유로 창씨개명을 반대하는 의견이 있었다. 1910년대에도 몇몇 친일파들이 일본에 충성한답시고 일본식으로 개명신청을 하고, 일부는 자식이 태어나자 일본식 이름을 지어 호적에 올리려 하기도 했는데, 같은 이유로 거부당했다. 식민지배 당시 일본인이 조선인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했고 적용되는 법률이나 가해지는 형벌 등도 달랐기 때문이다.
  • [5] 계속 읽다 보면 알겠지만, 실제로 이렇게 되었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그냥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
  • [6] 초대 덴노인 진무가 일본을 건국한 것을 기념하는 날
  • [7] 일제강점기가 30년 넘게 지속되면서 민족말살정책까지 지속되는 바람에, 민족 정체성이 상당부분 희석된 점도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어린 세대(지금의 70세 전후)들은 심지어 자기 조국이 일본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다. 해방이 되자 국민학교 저학년인 동생이 고등학생 큰형에게 "우리 나라가 일본이 아니야?"라고 묻는 경우도 있었다고.
  • [8] 어차피 안 쓸 이름인데 굳이 안 고치네 마네 할거 없이 그냥 몇 자 슥슥 갈겨주고 나 알아서 잘 살면 되지~ 하는 입장도 많았고, 정말 유명한 사람들, 사회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사람들은 체면상 바꾸지 않으려 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 [9] 창씨개명에 대한 반응이 '그런갑다'고 받아들이는 경우와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못한다'는 부류로 극단적으로 갈린것은 이런 인식의 차이로 볼 수 있다. 예를들어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는 이강토라는 평범한 농사꾼이 사토 히로시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해야할 상황에 왔다고 치자. 이때 생각하기에 따라서 공식적으로 이강토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사토 히로시가 되어 살아간다가 될 수도 있고, 그냥 일본이름 생기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전자로 생각하면 가문을 팔아먹는 파렴치한 짓이고, 후자로 생각하면 그냥 높으신 분들의 정책일 뿐이다.
  • [10] 일본 극우들이 일제가 한국의 신분제를 철폐했니 어쩌니 하며 지겹게 들고 나오는 백정의 예만 봐도, 알고 보면 겉으로는 신분제 철폐를 내세우면서 실제 주민등록부에는 "도부"라 적고 붉은 점을 찍어 백정 출신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여전히 차별했다!
  • [11] '저 친일파 녀석이 뭘 잘못 먹었나?'라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창씨개명은 '국가 정체성'의 문제임과 동시에 '가문의 정체성'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즉 충(忠)의 문제임과 동시에 효(孝)의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내가 나라를 팔아먹을지언정 가문을 팔아먹진 않는다'는 생각을 하는 친일파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당장 친일파계의 끝판왕인 이완용만 하더라도 자기 부모님한테는 극진히 대했다고 한다. 나라는 팔아 효는 지킨다. 군사부일체이던 과거를 생각하면 통탄할 일이다 하지만 이완용은 창씨개명 정도는 당연히 했다.
  • [12] 단 국민총력부락연맹의 이사장이었던 유대흥(柳大興)이라는 사람의 경우, 창씨를 안 해도 되지만 사람들에게 강제하는 입장이어서 어쩔 수 없이 야나모토(柳本)로 창씨했는데, '나는 어쩔 수 없이 창씨한 것이다. 나도 창씨개명에 반대한다'라는 발언을 하였다가 경찰에게 적발되어 검거당한 일이 있었다. 이분은 검찰단계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으셨다는 듯.
  • [13] 대표적인 경우가 나기 무네요시(柳 宗悅). 가뜩이나 조선과 조선인을 옹호하는 글을 많이 썼는데 이 사람의 이름을 조선식으로 읽으면 류종열이라 조선인이라고 생각하기에 전혀 위화감이 없는 바람에 조선인으로 인신공격을 당한 일도 있다.
  • [14] 한편으로는 당시 민중들에게 조선 총독이 임금이나 다름없이 보였음을 방증하는 사례. 뭐 지금도 종종 '대통령=왕' 드립이 보이긴 하지만(...)
  • [15] 조선 후기에 우후죽순으로 생긴 성씨의 경우, 어떤 형태로건 자신의 연고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 [16] 현대 일본에서는 國 대신 国을 쓰지만 당시에는 國이 표준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일본에서 인명에서는 国을 안 쓰고 國을 쓰는 경우가 있다.
  • [17] 그래서 성을 갈기 싫은 사람들은 자신의 성과 같은 한자가 들어간 성을 쓰기도 한다. 예를들면 가네다(金田)라든가 아키야마(秋山)라든가.
  • [18] 예외 규정이 둘 있는데, 1993년 이전 호적에 등록한 자, 그리고 한국 국적자와 외국 국적자의 혼인으로 출생한 자의 경우 외국 국적자 측의 성을 따르기로 결정하여 외국식 이름으로 한국 호적에 등록시킬 때는 5글자 초과가 가능하다.
  • [19] 대한민국에서는 법률로 인명용 한자가 지정되어 있는데, 인명용 한자의 음까지 같이 규정하고 있다. 단, 이런 한자 제한은 위헌 아니냐는 지적이 있긴 하다. 그래서 인명에 쓰는 한자를 제한하지 않게 하는 법안이 국회에 제출되긴 했다.
  • [20] 귀화하는 외국인의 경우 순한글 성씨도 가능하다.
  • [21] 정확하게는 天皇陛下는 텐노헤이카(てんのうへいか)이고, 田農炳夏는 덴노헤이카(でんのうへいか)이다. 청음과 탁음의 차이가 있다.
  • [22] 당시 한자문화권 국가에서는 세로쓰기가 일반적이었다. 일본이나 중국어 번체를 사용하는 대만 등지에서는 아직도 세로쓰기를 많이 쓰지만 그땐 더 많이 쓰였다. 세로쓰기에 맞춘 고품격 개드립(...).
  • [23] 조선인 최초로 창씨개명을 하게 된 인물이라고 알려졌으나 이동인이 훨씬 빠르다. 다만 이 이름을 경술국치 이전에 이미 사용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
  • [24]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그를 '노다 대감', '야전 대감'이라고도 부르기도 했다.
  • [25] 다만 유학에 필요한 도항증명서를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개명했기 때문에 이를 두고 함부로 윤동주를 폄훼해서는 안 된다. 자세한 사항은 윤동주 항목의 각주 참고.
  • [26] 이를 두고 한국어로 발음이 비슷한 '이 똥 치워'라고 윤치호를 욕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몬더그린
  • [27] 개화승으로 유명한 그 이동인이다. 임종국의 연구에 의하면 창씨개명 1호. 승려라는 것도 일본식 불교인 진종대곡파(眞宗大谷派)에서 법계를 받았다. 이전에 범어사와 통도사에서 정식승적에 올랐는지는 이론이 있으나, 본격적인 활동시기에 일본에서 법계를 받은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 [28] 독립운동가. 다만 이 때는 그가 독립운동을 하기 이전. 오히려 이 창씨개명으로 인해 친일파로 위장하기 쉬웠다. 다만 김구마저도 처음엔 일본인처럼 생기고 창씨개명까지 한 사람이 불쑥 임정에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당신들 너무 한심한 거 아니오? 나같았으면 그때 수류탄만 있었으면 콱(...)" 이 따위 말이라 일단은 받아주고 감시를 붙이는 등 안 믿었다는데, 거사를 맡기고 나서는 평생지기 친구가 죽으러 가는 것처럼 슬퍼했다고.
  • [29] 덤으로 호인 '오리'는 이름자에 있는 鳧(물오리 부)에서 따온 듯.
  • [30] 예를 들어 프랑스의 잔 다르크(Jeanne d'Arc)는 영어로 Joan of Arc로 적는 경우가 많다. 잔 다르크가 현대인이었으면 프랑스어 표기 그대로 적었을텐데 옛날 사람은 전통적인 방법대로 이름을 '번역'한다(...).
  • [31] 예를 들어 요한 바오로 2세는 영어로 쓸 땐 John Paul II, 이탈리아어로 쓸 땐 Giovanni Paolo II라고 쓴다.
  • [32] 배경, 전개, 목적 부분.
  • [33] 배경 부분.
  • [34] 퀘벡 사례 관련.
  • [35] 표 2~3장 크기의 작은 만화책
  • [36] 심의쪽이 원래 고무줄 기준이지만, 이때 임의기준을 정하는걸 허용해줘서 심의기준이 지멋대로 돌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 [37] 덕분에 일부 작품은 원어명 그대로 발매 되었다
  • [38] 유유백서의 경우 초기에 왜색이 짙다고 다 갈아 엎다가, 암흑무투편이 시작되면서 왜색이 사라져 잡지판에선 이름이 제대로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단행본을 낼때 심의에 걸려서 단행본판에선 또 이름을 변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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