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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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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史稿

Contents

1. 개요
2. 편찬과정


1. 개요

청사고는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건국되고 나서 편찬된 기전체 역사서이다. 자오얼쉰(趙爾巽)이 주동이 되어 100여 명의 학자가 참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사기》를 포함한 24사에는 들지 못하지만, 《청사고》를 포함한 25사, 또는 26사에는 든다.[1]

《청사고》에 붙어 있는 고(稿)는 이 책이 아직 완전하지 않은 초고라는 뜻이다. 대체로 이런 사서의 초고에는 이렇게 고가 붙고, 이는 전 왕조의 사서였던 《명사》도 마찬가지였다.

국공내전 패배로 중화민국이 대만으로 쫓겨난 이후 1961년에 《청사》를 편찬했으나 중국사의 정통을 자임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마르크스 역사관을 도입하여 청사(淸史)를 편찬하였다. 후임 왕조가 전임 왕조의 사서를 편찬하는 것은 중국의 전통이므로, 청사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후세에는 원사와 신원사의 예를 따라서 각각 '청사'와 '신청사'라고 부를지도...

2. 편찬과정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수립된 중화민국정부는 공화제였기 때문에 후임왕조가 전임왕조의 사서를 편찬하는 중국의 전통을 이어야 할지 말지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1914년 총통 위안스카이는 황제를 참칭하였고, 사서편찬의 전통을 잇기 위해 '청사관'을 설립해 이 작업을 시작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청나라의 유신인 자오얼쉰(趙爾巽, 조이손)을 청사관장에 임명하여 《청사》를 집필하게 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 사후 중화민국은 곧 혼란에 접어들었고, 1920년대 초에 청사의 초고가 완성되었으나 편찬이 중단되었다. 1926년 다시 편찬이 시작되었고, 1928년에 군벌 장쭤린(장쉐량의 아버지)의 재정지원으로 출판하려고 했으나, 출판 직전에 자오얼쉰이 사망하는 바람에 무산된다. 이후 청사관에는 내분이 일어났고, 이어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 북벌군이 베이징을 점령했는데, 청사고에 국민당을 역적(賊)으로 표기되었으며 신해혁명 후의 연호도 중화민국연호가 아니라 청나라 연호인 선통을 그대로 쓴 것을 알고 출판을 금지하고 개정작업에 착수했다. 국민당의 검열을 받아 수정된 판본을 '관내본'이라고 하고, 이후 국민당의 지배를 받지 않는 일본의 괴뢰국 만주국에서 출판된 원본을 '관외본'이라고 한다. 이때까지는 초고라는 뜻의 '고(稿)'가 붙어서 청사고라고 한다.

본래의 《청사고》는 전권 536권이고, 기전체의 전통을 따라 본기 25권, 지142권, 표 53권, 열전 316권으로 되어 있다. 이후 어느 정도 마이너한 체인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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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26사는 24사서에 《청사고》와 《신원사》를 포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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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10-30 15: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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