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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전투

Contents

1. 개요
2. 상세
2.1. 일본의 만주 탄압과 독립군의 결집
2.2. 청산리에서 맞붙다
2.3. 전투 결과
2.4. 전투 이후
2.5. 한일 인터넷상에서의 청산리 전투 논쟁


1. 개요

1920년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까지 만주 간도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 홍범도가 지휘하는 한독립군 등이 연합하여 청산리 백운평, 천수평, 완루구 등지에서 10여 차례에 걸쳐 구 일본군을 대파했다는 일련의 날조된 전투를 말한다.

2. 상세

2.1. 일본의 만주 탄압과 독립군의 결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이후 만주에서의 독립 투쟁은 더욱 활발해졌고 이에 일제의 대만주 탄압도 점차 강경해져 갔다. 이 과정에서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패배한 일제는 10월에 훈춘 사건을 일으켜 이것을 병력 진입 구실로 삼고서 만주에 사는 조선인들을 무차별로 학살하기도 한 일변, 1920년 2월, 마침 블라디보스토크에 잠시 머무르던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군대는 소비에트 적백내전의 휴전협정이 성립된 이후 서무기를 서둘러 팔고자 한 때 독립군은 독립선언 후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여 무기가 절실하게 필요해서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군대는 보관하던 무기를 북로군정서에 판매하게 되었다. 무기 거래는 깊은 숲에서 한밤중에 이뤄졌고 동년 7월 독립군은 체코슬로바키아군에게서 매입한 무기인 권총, 기관총, 200정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간도로 수송했다.

1920년 8월 하순, 왕칭현 서대파에 주둔하던 북로군정서의 주력부대는 훈춘에 있는 일본 영사관을 습격해서 얻은 정보로써 일본군 제14사단과, 제13사단의 일부가 장고봉을 거쳐 남하하고 나남의 제21사단이 도문강을 건너 북상하며 만철의 수비대가 송화강을 건너 서진해 3북로군정서군을 3면에서 토벌하려는 작전이 진행 중임을 알게 되었다. 마침 독립군 탓에 대일 관계에 난처한 처지에 있던 중국 당국의 권고도 있었으므로, 북로군정서는 일단 안도현으로 이동해 서로군정서와 합류하고서 백두산 지역에 기지를 새로이 건설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9월 17일 이동을 시작한 일변, 대한독립군도 봉천성의 경계 지역인 화룡현의 이도구, 삼도구 방면으로 이동했다.

연길현을 거쳐 화룡현 서부 지역으로 이동한 북로군정서 부대는 10월 10일경 안도현 경계 지역인 삼도구 청산리에 도착하고서 부근에 있는 이도구로 이동해 있던 홍범도부대와 일본군의 간도 출병 대책을 협의했다. 10월 19일의 회의에서는 일본군과 싸워야 한다는 주장과 피전론이 맞섰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피전론이 채택된 때 일본군이 부근까지 이미 진출하고 있었으므로 독립군 부대는 일본군을 피하고자 병력을 급히 후방으로 철수하게 했다. 김좌진 부대는 계속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면서 전투를 자제하였으나 결국 추적을 따돌릴 수 없다고 판단해 일본군과 일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2.2. 청산리에서 맞붙다

10월 21일 비전투원들로 편성된 제1제대와 전투요원으로 편성된 제2제대는 각각 김좌진과 이범석의 지휘하에 청산리 백운평 바로 위쪽의 고개마루와 계곡 양쪽에 매복, 전투준비에 돌입하였다. 청산리계곡은 동서로 약 25km에 다하는 긴 계곡으로서, 계곡의 좌우는 인마의 통행이 곤란할 정도로 울창한 삼림지대였다. 오전 9시경 야스가와가 이끄는 추격대가 계곡의 좁은 길을 따라 매복중이던 이범석 부대와 교전을 벌였다. 뒤이어 야마타가 지휘하는 본대가 그곳에 도착하여 이들과 독립군 사이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김좌진은 이범석에게 명령을 내려 부대원을 이끌고 갑산촌으로 철수를 지시했다. 독립군은 이 전투에서 유리한 지형을 이용해 일본군에 큰 피해를 줬다고 기록했다.

김좌진 부대가 철수하던 시각에 그곳에서 얼마 안 떨어진 이도구 완루구에서는 홍범도 부대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이 때 독립군과 일본군의 군복 색깔이 거의 비슷하여 일본군이 자기들끼리 서로를 오인하는 상황이 벌어져 독립군이 전과를 올렸다고 기록했다.

한편, 22일 새벽 갑산촌에서 합류한 김좌진부대의 제1·2지대는 그곳 주민들로부터 부근의 천수동에 일본군 기병대가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곧 그곳으로 이동하여 일본군 기병중대와 교전을 벌였다. 곧 일본군 대부대의 반격이 있으리라 생각한 김좌진은 부대원을 어랑촌 부근의 고지로 이동시켜, 오전 9시부터 포위공격해 오는 일본군을 막아내었다. 이때 부근에 있던 홍범도 부대도 포위되어 있던 김좌진 부대를 도와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가했다. 그리고 날이 저물자 김좌진과 홍범도의 부대는 어랑촌 부근 고지에서 철수했다.

다음날 23일부터 이들은 추적하는 일본군수색대와 산발적인 접전을 벌이면서 고동하(古洞河)를 따라 상류로 이동하였다. 독립군의 행방을 추적하던 일본군은 25일 밤 고동하계 곡의 독립군 야영지를 포착하여 급습했으며 이로 인해 난전이 벌어졌다. 독립군은 반격을 가해 이 습격을 저지했다고 기록했으며, 이후 새벽 무렵 방어태세에 들어간 일본군을 피해 안도현 지역으로 부대를 옮겼다.

2.3. 전투 결과

한국에서는 독립군 측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제출한 보고서를 근거로 하여 1000여명을 사살한 대전과를 올린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이 정도의 성과를 올렸는지에 대한 여부는 불분명하다. 한국과 일본에서 제시하는 자료를 교차시키면 내용 자체가 상이한 부분이 다수이며 부정확한 요소가 많아 독립군의 전과가 과장됐다는 주장 역시 존재한다.

어쨌든 독립군이 추격하는 일본군과 교전을 벌여서 발목을 잡은다음 이들을 피해 다른 지역으로 계속 이동하는 형태로 전투를 수행했고, 그 과정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어느정도 전술적인 성과를 올렸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4. 전투 이후

그러나 이후 독립군은 일본군의 포위망이 좁아져 오자 동북쪽의 으로 대거 후퇴하였고, 소련의 제안에 따라 적백내전에 참여했다가 자유시 참변에 휘말리면서 큰 피해를 입어 전면전을 벌일 수 있는 역량을 상실했다. 이후 만주사변으로 중국군과 함께 대일전에 참여한 1930년대 이후에도 외국군에 크게 의존하면서 전투를 벌이는 상황이었다. 말하자면 한국인 독립군이 단독으로 일본군과 전면전을 벌인 마지막 전투인 셈이다.

2.5. 한일 인터넷상에서의 청산리 전투 논쟁


당시 기사회된 한일 네티즌간의 항쟁 '#'

과거 인조이재팬시절, 인조이재팬을 배틀 아레나로 순식간 만든 분기점이 있었으니 '청산리 전투 논란'이다.
당시 일본의 네이버 총독부를 위시한 네티즌들은 일본 대본영의 대외비 문서를 근거로 한국의 기존 사관을 공격했는데, 해당 대외비 문서에는 '일본군 3명 사상 독립군 60명 사살. 다수한 총포를 노획'이라 되어 있고 그만한 인원이 전사했는데도 모든 전사자를 안치하는 야스쿠니 신사의 기록이 없으며 독립군이 사살했다는 연대장 카토우가 멀쩡하게 살았었음을 들어 한국 측을 공격했으며 3000여 명이나 전사했는데도 병력 충원이 없었고 오히려 일본군 연대들이 증원도 받지 않고 추격을 지속했던 점, 그만한 인원이 사상당한, 특기할만한 결과인데도 어느 곳에도 기록이 없는 점, 결과가 과장됐다는 언급이 독립군의 자서전에서 나왔다는 점, 공세인 상황에서 후퇴했다고 하는 점, 일본군 활동이 전혀 위축되지 않고 되려 독립군 활동이 위축됐다는 점을 들었다.

거기에 편승해 기존 한국의 민족주의 사관에 반감을 품고 있던 한국인까지 합세했는데 그 사람들은 독립군의 전과가 신문이나 사료마다 중구난방인 점[1], 청산리 전투 관련 연구 사료에서 일본군 사상자가 계속해서 감소하는 점, 청산리 전투의 전과라고 되어 있는 일본군이 들것에 실려 나가는 사진이 실은 청산리 전투 당시 사진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들어 한국인을 공격하면서 독립전쟁의 사기를 고취하고자 과장됐다고 주장했다.

당시 디시인사이드 역사갤러리의 네임드 유저였던 '고람거사'도 기존 사관으로 일본인과 맞섰다가 패퇴했으며, 이 시기 서울대학교 교수 이태진이 인조이재팬에서 활동하다가 대패했다는 소문까지 전파하면서 인조이재팬의 한국인과 국내사 사이트의 분위기는 초토화했다. 네이버 총독부의 활동이 더 활발해짐은 물론이요 국내의 일빠국까도 이에 물타기에 돌입했으나 '고람거사'는 기존에 네이버 총독부에서 자료로 들었던 일본 후생성의 문서가 날조된 자료라는 사실을 파악했다면서 이 점을 들어 반격에 나섰다. 네이버 총독부에서는 이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말 돌리기에 들어가 싸움은 한국 측 승리로 간주될 뻔했으나 익일 일본 측에서 후생성에 직접 전화해 문서가 사실임을 확인했다. 고람거사는 일본측이 논거로 드는 후생성 사망자 명단보다 실제 사망자가 많다는 일본 측 자료를 보고 반격에 나선 것인데 실상은 고람거사가 '사상자'를 '사망자'로 혼동한 탓에 나온 오해였다. 이 부분은 당시 활동하던 역사 사이트 회원 일부의 기록으로만 전해질 뿐 인터넷 상에는 이전 패배만큼 주지하지 않았으나 해프닝에 가까운 이유로 어이없게 패배한 사례라서 역사 사이트에서 인조이재팬을 언급하면 이것을 금기로 다루거나 분노에 휩싸이는 때가 잦은 일변, 이 싸움은 한국사 사이트에 단순한 회의가 아닌 쇄신 필요성을 환기하기도 했다. 이전 교과서를 기본으로 하는 사관과 엄격한 사료 비판을 이용한 논쟁을 대상으로 한 경험 부재가 인조이재팬에서 벌어지는 연패를 낳았다는 분석이 나왔고 10대에서 20대가 절대 비중을 차지하던 이용자와 달리 일본 측은 30대에서 50대로 추정되는 인물까지 참여했다는 점도 반성할 점으로 꼽혀 고연령 층에서도 인터넷을 활용한 논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비판이 대두됐으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역사 갤러리가 붕괴하고 이후 역사 사이트는 분화하고 군소화하면서 이런 논쟁하는 장은 좁혀졌으면 좁혀졌지 넓어지지는 않아서 쇄신 분위기는 이어지지 못했고 논점이 된 청산리 대첩을 두고서는 한국 측과 일본 측의 사료가 상이한 방향으로 과장됐다고 간주가 일반이라서 정확한 추산은 곤란한 상태이다.[2][3]

당시 일본인들이 제시했던 자료는 '#','#' 여기서 볼수 있으며, 당시 인조이 재팬에서 논쟁했던 부분 중 일부는 '#' 여기서 볼수있다. 논쟁이 발생한지 10년이 지났지만 한국측 역사학계는 일본인들이 제시한 대외비를 비롯한 실제 자료들과 지표에 대해 반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신용하 교수는 카토우 연대장의 사망 주장도 허위로 판명난 마당에, 패전사실을 숨겼다는 음모론을 제시할 자격이 없는듯하다. 오히려 반대로 청산리전투를 조작시킨 장본인이 아닌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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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상기된 박은식의 3300명 설이 근거도 출처도 없다고 깠지만, 이것은 일본 측의 사료도 마찬가지였고 이것은 아직도 논쟁이 계속되는 원인이다.
  • [2] 양측 피해 상황을 따지기 전에 일단 감안. 독립군이 피해가 크지 않았다면 왜 퇴각했겠느냐는 주장이 있지만, 일본군이 대규모로 만주를 대상으로 한 토벌 작전을 진행하는 상황에서 한 번 이겼다고 계속 싸우는 건 말이 안 되는 처사인 데다가 일본에서 타국 영토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토벌 작전을 수행하는 무리수까지 둔 것은 당시 독립군이 일본에게 그렇게 해서라도 근절해야 할 존재였다는 사실을 짐작케 한다. 3.1 운동이 벌어지고 한국인의 민족 의식이 높아진 시기였고 자유시 참변 이후 독립군이 반토막 이하로 와해된 실정을 감안할 때, 일제강점기 중 독립군의 분위기가 가장 좋았던 때가 이 시기였던 것도 확실하다.
  • [3] 교수 신용하는 논문에서 패전한 사실을 숨기고자 청산리 전투가 부풀려졌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양측 모두 수치가 들쑥날쑥한 상태라 어느 쪽을 신뢰하기가 곤란한 상황이나 일본군 자료에서도 사상자가 어느 정도 확인되고 독립군에서도 수천 명까지 수치를 발표하면서 홍보한 것을 볼 때 일본군도 소규모든 대규모든 크게 피해했으리라 추정 가능하고 당초 비정규군과 정규군의 전면 전투에서 비정규군이 전과를 내는 것 자체가 곤란하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청산리 전투가 무가치한 전투라고 단언 불능한 데다가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후퇴하는 상황이었고 어느 정도 체계를 유지한 채 러시아 근처까지 퇴각에 성공을 볼 때 일본군 처지에서 실패한 전투로 간주 가능하다.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이 아예 토막나면서 별 소용이 없어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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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5 13: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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