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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논란

last modified: 2015-03-20 11:04:16 by Contributors

Contents

1. 당시 선원들의 행동에 대해
1.1. 직업의식 부족
1.2. 미심쩍은 초동 대처
1.3. 구명보트 관련 논란
1.4. 선장의 1차 탈출 논란
1.5. 선장 등의 처벌 수위
1.5.1. 관련 처벌규정 분석
1.5.2. 수사기관의 구속영장 청구
1.6. 탈출 수단 무시
2. 카 페리선(로로선)의 허점
2.1. 해럴드 오브 프리 엔터프라이즈호 참사
2.2. MS 에스토니아호 참사
2.3. 아리아케마루 전복사고
2.4. 슈퍼페리 9호 전복사고
3. 학교와 교육청의 미흡한 대응
4. 청해진해운 홈페이지 다운 논란
5. 등대 관련
6. 정부의 미흡한 대응
6.1. 초동대처 문제
6.2. 사고 처리 과정



1. 당시 선원들의 행동에 대해

1.1. 직업의식 부족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대중교통의 운행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승무원은 탑승자들을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는 직업이다. 특히 이번 사고처럼 구조가 복잡한 대형 선박의 경우 선장부터 말단 직원들까지 체계적인 위급상황 관리능력을 보여줘야 할 필요가 크고, 그에 따라 문서화된 비상상황 대처 매뉴얼이 존재하고 정기적인 비상시 대처훈련을 하는 이유다.

특히 세월호에 탑승한 대다수의 승객이었던 고등학생들은 아직 판단력이 부족한 미성년자들이며 초기에 선체에 이상이 발생하고, 구명조끼를 착용하라고 지시한 이후 지속적으로 방송을 통해 선실 내부에 머물러 있으라는 지시를 반복해놓고 추가적인 지시를 내리지 않은 점이 이번 사고의 피해를 키운 가장 큰 이유라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선생님말을 고분고분 잘 듣는편인 학생 특성상 방송만 믿고 계속 선실 내부에만 대기하고 있다가 탈출할 기회를 놓쳤다는 것 오히려 갑판에 나와있던 사람들은 바다로 뛰어 내리거나 난간을 잡고 끈질기게 버티다가 구조된 경우가 상당하다.

오히려 선박의 구조와는 별 연관이 없는 일반직 승무원이 최후까지 남아 구조활동을 하다가 숨진 채로 발견되는 등, 자신들의 의무와 책임을 망각한 일부 중요 승무원들의 직업의식 결여가 피해를 키운 원인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세월호에서 먼저 탈출한 선박직 선원 중 12명은 무전기로 연락을 주고 받은데다(#) 선원들만 이용할 수 있는 통로를 이용해 빨리 탈출할 수 있었던 걸로 밝혀졌다#). 게다가 선장이 승객인 척 몰래 빠져나왔다는 증거 영상이 발견되었다!

이는 2년 반 전에 일어났던 설봉호 화재 사고에서의 선장 및 승무원들과 대비된다. 한밤중인 새벽 1시에 배에 화재가 났으나 선장 및 승무원들은 객실을 돌아다니며 승객을 깨워 대피시켰고, 전원 무사히 구조되었다.

세월호비상상황시승무원임무.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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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문제점으로 떠오르는 것이 해당 사고 선박에 승선한 선장이 임시였던데다 계약직 직원이라는 거였다. 사실 선사 계열에서 비정규직은 흔한 일이었지만[1], 계약직 선장은 정규직 선장과는 달리 선박 통제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 통설이다. 거기다 선장뿐만 아니라 전체 승무원의 절반이상, 갑판·기관부 선원의 70%가 비정규직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당일 근로계약서도 없이 불려와서 일단 출항 후 귀항하면 계약서 쓰자고 해서 배를 탄 계약직도 있었으며, 아르바이트 인력도 3명이나 채용했다고...# 이 정도면 선사가 비용절감에 정신팔려 안전은 신경쓰지도 않았다고 할 판이다.

세월호의 진짜 선장인 신 모씨는 이 날 휴가를 갔고[2] 그 대타로 들어온 게 사고 당시의 선장이었는데, 이 때문에 사고가 나도 대처가 미흡해질 수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추가로 사고 당시의 선장은 선장경력은 30년이지만, 세월호 선장으로서의 경력은 1년 미만이였다고 한다. 즉, 세월호에 아직 적응조차 못했다는 것이다. 4월 23일에 밝혀지기를, 세월호의 실세는 선장이 아니라 기관장이었고 선원들에게 퇴선 명령을 내린 것도 기관장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4월 26일에 밝혀진 바로는 사고 당시 선장은 청해진해운과 통화를 했다고 한다. 단순히 사고 상황만 보고했는지 청해진해운이 뭔가 지시를 했는지에 대해선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보험금 때문에 청해진해운이 퇴선 명령을 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을 수도 있다는 추측이 나왔다.#

한편 선장 및 3급 항해사, 조타수는 구속된 이후에도 딱히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유치장에도 세월호 관련 뉴스를 틀어주고 있는데, 가끔 그걸 보면서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세끼 밥도 꼬박꼬박 잘 먹고 낮잠도 잘 잔다고 한다. # 다만 3급 항해사만은 여자인 데다가 나이도 비교적 젊어서 구조 초반에는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졌다가 최근에 회복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체포 당시에는 정신적 충격이 심해서 말을 걸 수 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1.2. 미심쩍은 초동 대처

세월호는 사고 발생시 가장 가까운 진도 통제소가 아닌 목적지 제주 통제소에 사고 보고를 했다. 제주 통제소는 해경에게 알렸고, 그 후 연락을 받은 진도 해상관제센터가 세월호와 교신을 했다(#). 그런데 저 당시 세월호에서 교신을 맡은 건 수습 항해사였음이 밝혀졌다(출처).

왜 제주 통제소에 먼저 연락을 했는지와 비상 주파수를 사용해 주변 30km 이내의 모든 선박에게 구조 신호를 보내지 않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세월호 전직 항해사와 손석희 아나운서와의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공용채널이자 비상 주파수인 16번 채널은 켜놓기만 하고 사용하지 않는 관행이 있었다고 한다. 16번 채널을 사용하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해경을 포함, 근처의 모든 배에 알려지기 때문에 평소에는 뒷수습이 복잡해지기 때문. 그래서 사고 당시 16번 채널은 켜져 있긴 했지만 평소 사용하는, 제주 통제소와 연결이 되는 12번 채널만으로 통신을 했을 거라고 주장했다(#해당 인터뷰 전문). 진도 통제소는 제주 통제소와 달리 해경 직속이라 조치를 더 빨리 취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관행대로 한 탓에 시간을 낭비한 셈이 되었다. 사고접수를 한 제주 통제소에서 다시 진도 통제소에 상황을 전파하고, 진도 통제소에서 주변 해경, 해군 등에 상황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십여분이 지나가 소중한 초기 대응시간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세월호가 사고 접수 약 한시간 전부터 인근해역에서 멈춰있었다는 현지 어민의 증언도 있다.[3] 만약 이때 이미 사고가 발생했다고 가정할 경우, 원인 미상의 이유로 선박에 침수 피해가 발생하였으나 이러한 상황에 취약한 설계를 가진 카 페리가 한시간 가량 부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당시 상황으로 미루어 볼때, 최초 누수 발생시 선박 측에서는 즉각적인 퇴선과 피난조치가 필요할 정도의 손상이 아니라 판단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배가 많이 기울어진 상태였을 때야 신고를 한 건 그제야 즉시 구조가 필요한 상황이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라는 것. 선박 측에서는 침수 구역의 격벽 폐쇄, 누수부에 대한 보강, 침수 구역의 유입 해수 배출 등의 자체적인 조치를 통해 상황을 해결, 사건을 수습 또는 무마, 축소[4]하려고 발생 즉시 조난 신고를 하지 않았으리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그런데 신고를 한 뒤에 관제센터가 구조하러 주위의 배들과 경비정이 가고 있으니 여러 차례 구호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했는데도 당장 구조가 가능하냐는 식의 질문만 했을 뿐 정작 대처는 제대로 하지 않아(#) 피해가 커졌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정작 배를 지휘하던 선장조차 침몰 원인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답변을 내놨다는 것이다. 선장 인터뷰 기사. 이 경우 폭발음 또는 충돌음으로 여겨지는 굉음이 있었다는 증언과 원인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선장의 증언, 사고해역에 멈춰있었다는 현지 어민의 증언을 모두 고려할 경우 선박 파손으로 추정되는 굉음이 발생하자 상황파악을 위해 배를 멈추기는 하였으나 선박 내의 침수 상황을 인지하지 못해 조난 신고도 하지 않고 있던 상태에서 그대로 침수가 진행-순식간에 침몰했다는 가정을 해 볼 수도 있다.

신고를 했을 때 이미 배는 많이 기울어진 상태였고, 구조를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침몰했다. 구조자의 증언과 위의 선장 인터뷰 기사 참조. 위와 같은 상황이었다고 가정할 경우, 손상이 대처 가능한 수준이라고 판단하였거나 아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승객들의 혼란을 막기위해 선실에 모여 있으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이후 침수가 급격히 확산되어 순식간에 침몰했기 때문에 구명정으로 대피할 여유도 없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해 볼 수 있다.

참고로 해경 측에선 사고 접수 직후부터 신속히 구조 조치를 취하라고 했고, 9시 23분 이후로는 아예 경비정이 15분 정도 뒤에 도착하니까 라이프링이라도 착용시키라고 했다. (진도 VTS의 당시 교신 녹취록) 심지어 가장 먼저 세월호가 있는 곳에 도착한 두라에이스가 우리가 앞에 와 있으니 탈출하라고 교신을 보냈는데도 실제로 조타실에선 별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안내 방송을 담당한 승무원 강모 씨는 9시 즈음에 선내에서 자리를 지키라는 방송을 하라는 지시를 들은 뒤에는 별 다른 지시를 못 들었다고 했고, 선사 승무원 故 박OO 씨가 계속해서 조타실에게 탈출하냐고 문의했지만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으며, 구조 헬기를 본 뒤에 탈출하라고 외쳤다고 한다.[5]

일각에서는 7시 경(세월호가 최초 사고해역에 진입한 시각)에 진도VTS와 교신기록이 없는 것을 근거로 해경이 모니터링 의무를 소홀히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이에 해경은 세월호가 관제구역에 진입한 때부터 모니터링을 지속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이 진도통제소와의 연락 관련은 대단히 골 때리는 부분으로, 정상적이라면 이렇게 진행되어야 한다. 세월호가 진도VTS 관할지역에 들어가면 진도VTS에 먼저 연락을 한다[6]. 그러면 진도VTS는 이를 확인한다. 만일 세월호에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면 이번에는 진도VTS가 세월호 측에 수차례 연락을 시도한다. 그리고 진입이 확인된 이후에도 선박이 항로를 벗어난다거나 다른 선박과 근접하게 된다거나 하면 경고 연락을 하게 된다[7]. 때문에 세월호가 VTS에 연락을 했느냐 안 했느냐는 또 다른 문제이다. 진도VTS도 연락을 할 수 있기 때문. 그리고 실제로 사고 5일전의 항해에서는 멀쩡히 진도VTS와 교신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정작 사고 당일만 진도 VTS와 교신이 이뤄지지 않은 것.

16번 채널이 사용되지 않은 것이 관례라고 한 부분에 대해서도 세월호는 도중에 완전히 표류를 하는 등 통제 불능 시점에 접어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16번 채널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의견이 나왔다. 애초에 선박은 GPS가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그 행적이 모조리 잡히는데 16번 채널을 사용하느냐 마느냐는 처벌을 받는데 아무런 상관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신 내용도 문제인 것이, 일단 공식 발표된 교신 내용에 대해서도 논란이 발생했다. 공개된 내용에 대해서 SBS, YTN 등의 언론사가 연이어서 조작 의혹을 발표한 것이다. 이 보도 내용에 대해서는 해경이 반박하면서 해당 기사는 줄줄이 삭제되었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한겨레TV의 김어준과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보도 되었으며, 해경은 이에 대해 반박을 하는 한편으로 SBS를 언론중재위에 제소했다.

그러나 조사 결과 세월호는 16번 채널로 진도 VTS와 두 차례나 교신을 시도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진도 VTS를 조사한 결과 이들은 오랜 근무태만으로 규정에 정해져 있는 2인 1조로 근무하지 않고 1명의 인원으로 관제해왔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들은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CCTV를 없애버리거나# 2명이 근무한 것처럼 문서를 조작했다. 이건 빼도박도 못하는 공문서 위조다.# 심지어 진도 VTS는 사고 보름 전에 이미 근무태만으로 경고를 받은 전적까지 잇었다는 게 드러났다.# 이런 상황였으니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가 목포해양경찰서가 전달을 하고 나서야 상황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검찰에 조사를 받게 되자 조직적으로 대응해 진술에서도 입을 맞추는 등의 준비도 했다는 것도 밝혀졌다. 관련자들은 구속 수사를 받고 있다.

일단 선장은 구조함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여서 승객들을 선실에 머무르게 했다고 말했는데, 이 때는 관제센터에서 말한 것처럼 승객들이 배 밖으로 바로 나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애초에 구명보트는 구조함이 오지 않은 상황에서 배를 탈출할 때 쓰라고 있는 것이다.

1.3. 구명보트 관련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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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사진은 기울어진 여객선에서 구조 활동을 하고 있는 사진인데, 오른쪽 위쪽에 흰색 물체가 보인다. 저 물체의 정체는 팽창식 구명 뗏목(Life Raft)으로서, 갑판에 설치되어 있는 비상용 구명보트로 바다에 던지면 펼쳐져서 구명보트가 되는 물건이다. 펼치는게 어려운 물건도 아니라서, 승무원이 핀 하나 뽑고 발로 바다에 걷어차기만 하면 되는 물건이다. 해당 구명 뗏목 1개에는 10명의 인원이 탑승 가능하고, 내부에는 10명이 3일을 버틸 수 있는 비상식량이나 나이프, 신호탄 등 생존물품이 들어있는 물품이다. 사진상에 보이는 뗏목만 전부 펼쳐도 이론상 140명이 탈 수 있다는 소리.

사고 직후, 사고 현장에서 승객의 안전을 위해 설치한 물건이 왜 정작 사고 발생 직후에 쓰이지 않았는지가 의문이었다. 처음에는 펼 시간조차 없었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침몰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봤었다. 화상입은 구조자도 있던 것을 감안해볼 때 기관실 폭발 등으로 빠르게 침몰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다만 화상의 경우는 식당에서 취식하던 중에 입었을 가능성도 있어서 폭발이 있었다고 단정하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사를 받던 1등 항해사가 경사가 너무 가파르기에 구명보트를 펼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4월 23일 KBS가 구명보트를 푸는 영상을 입수해 하나하나 챕처해서 뉴스에 방영(위에 있는 사진은 그 중 하나)하면서 사실은 선박직 선원들은 구명 뗏목 근처에 있었으면서도 건드리지 않았고, 일찌감치 탈출해서 펼 시간이 아니라 펼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바다로 떨어진 구명보트는 2개였고 그 중 펼쳐진 건 1개뿐이었는데, 이건 선원이 아니라 구조하러 온 해경 중 한 명이 여러 차례 구명 뗏목들을 떨어뜨리려고 시도한 끝에 발로 차서 떨어뜨린 거였다. 사진을 보면 구명보트 난간 위에 있는 사람은 해경이고, 아래의 배에 탄 사람 중 무전기 같은 걸 든 선원복을 입은 사람은 선원, 그 오른쪽의 목장갑을 낀 사람은 기관실 쪽 선원이다. 구명보트를 푸는 해경 바로 뒤에 보이는 열린 문이 이 선원들이 나왔었던 5층 선교. 게다가 당시 시간은 9시 37분쯤, 가장 먼저 배에 도착한 해경들이 선교에 나와 있는 사람들을 구출했을 때였다.

당시 구명 뗏목들을 떨어뜨린 해경은 인터뷰에서 안전핀이 뽑히지 않아 떨어뜨리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선원들은 구명 뗏목에 문제가 있는 걸 알고 있었기에 사용할 생각을 안 한 게 아니냐는 추측이 나왔다(#). 물론 실제로 펴진 구명보트 하나도 제대로 사용되지 못한 만큼 저 구명보트들을 다 풀었다고 해서 그만큼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8]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저 구명보트들을 띄우는 것은 선원들(정확하게는 1,2 조타수)의 책임이었으며,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데다가 너무 배가 기울어서 못 떨어뜨렸다는 거짓말을 했다는 게 논란의 중점이라 할 수 있겠다.

1.4. 선장의 1차 탈출 논란


세월호의 내부 구조를 잘 알고 승객들의 대피에 가장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선장, 항해사, 기관사가 1차 탈출 의혹을 받았다. # 항해사는 왜 먼저 탈출했냐는 질문에 말을 잇지 못했고#, 기관사는 승객들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다만 기관사의 경우 사고가 난 직후 계속 기관실에 대기하고 있었다가, 배에서 탈출하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그대로 했다고 증언했다. 기관실의 경우 배 가장 밑바닥이라 바깥 상황을 알 턱이 없었고 그저 명령을 따른 것일 뿐이라는 것. 암초에 좌초하거나 했다면 곧바로 기관실에 물이 들어와 기관사가 가장 상황을 빨리 파악했겠지만 급선회에 의한 전복설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지금 전복설이 사실이라면 기관실부터 잠기지 않았을 것이므로 기관사의 증언이 뒷받침된다. 즉 기관사에 한해서는 1차 탈출에 대한 책임이 없을 수도 있으며 이 때문인지 타 선원들과 달리 얼굴을 당당히 공개하고 기자의 인터뷰에 응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실제로 배 침몰시 선장과 항해사 등 항해 부서 인원들은 승객들을 감독 및 통제하며 승객들의 안전을 우선시할 의무가 있으나, 기관장 이하 기관부는 기관이 기능을 못 하게 될 경우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승객들에 대한 법적인 안전 책임은 없다.

그리고 4월 28일, 최초 구조 영상이 공개되었는데 여기서 선장과 선박직들이 제일 먼저 구조되었음이 확실히 밝혀졌다. 기관직의 8명은 선실이 있는 뒤쪽을 통해서, 항해직 7명은 선수인 조타실을 거쳐서 해경 구조정으로 탈출했다.# 당시 해경은 이들이 선원인지 승무원인지 몰랐다고 한다[9].

세월호의 긴급상황 메뉴얼에 따르면, 선장은 긴급상황시 모든 책임을 지고 대피를 감독, 지휘해야하며, 1, 2항해사는 좌,우현으로 나뉘어 인원을 통솔하고, 1, 2조타수는 좌, 우의 구명보트를 바다에 빠뜨리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이 중 하나라도 지켜진 게 없다. 선원들 대부분은 선실 내부에 머무르고 있었을 대다수 승객들을 방치한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4월 17일에 해경이 선장을 체포해 침몰 원인 등에 수사하고 있으나 선박 내부 구조를 잘 알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구조 작업에 투입된 뒤 조사를 실시하였다고 한다. #

1.5. 선장 등의 처벌 수위

우선, 17일 수사본부에서 처음 선장 일동에 대해 조사를 개시한 혐의는 다음과 같다. 선장은 만약 배가 급회전으로 넘어진게 사고 원인일 경우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가 있고, 안전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선박법 위반 혐의도 추가된다. 다른 승선원들은 선장 지시 없이 선박을 떠났거나 인명 구조 조치를 하지 않았다면 선원법 위반 혐의가 있다.# 이후 검찰의 기소내용에는 유기치사상죄업무상과실선박매몰죄, 수난구호법 위반죄도 범죄 혐의에 추가되었다.
물론 법적인 책임과는 별개로 만약 구조에 앞장서야 할 선장 일동이 구조는 안하고 자기들의 안전을 우선시해 승객의 안전을 확보할 방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섣불리 탈출했다면 이 행위는 도덕적으로도 큰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할 것이다. 이에 경찰은 선장 및 미리 탈출한 일부 승무원들의 신변을 확보한 상황.# 그러나, 선원들이 조치를 취할 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추후 조사에 따라 밝혀져야 할 일. 참고로 19일 보도에 따르면 전체 승무원 29명 중 구조가 확인된 사람은 23명이다. 그 중에서도 배의 안전운행과 승객대피를 책임지는 선박 담당 승무원들은 전원 생존했다.# 고객 서비스나 사무를 담당하는 비선박직 승무원들이 승객을 대피시키다가 사망하거나 실종된 것과 대비되어 더욱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이다. 일단 해경은 위급 상황에서 마지막까지 승객의 안전을 지켜야 하는 법적 의무를 규정한 선원법을 위반한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한편, 세월호 화물 적재과정에서 화물이 제대로 묶이지 않아 침몰의 원인이 되었다는 논란이 있는데, 이에 따라 출선시 화물과 승객의 안전을 관리해야 할 운항관리자의 책임도 문제되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법 개정시 실수로 개정으로 조문이 한항씩 밀려났는데 처벌규정을 그에 맞게 반영하지 않아, 처벌규정이 없어져서 운항관리자를 처벌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기사 또한 설령 법이 제대로 개정되어 처벌규정이 적용되었다 하더라도 운항관리사에는 300만원 미만의 벌금형에만 처할 수 있어 처벌규정이 지나치게 가벼운 점도 문제로 지적되었다.

10월 27일, 검찰은 선장에게 사형을, 나머지 승무원들에게는 무기징역으로부터 15년형까지를 구형했다.

1.5.1. 관련 처벌규정 분석

선원법 - 제2장 선장의 직무와 권한
제10조(재선의무)

선장은 화물을 싣거나 여객이 타기 시작할 때부터 화물을 모두 부리거나 여객이 다 내릴 때까지 선박을 떠나서는 아니 된다. 다만, 기상 이상 등 특히 선박을 떠나서는 아니 되는 사유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선장이 자신의 직무를 대행할 사람을 직원 중에서 지정한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제11조(선박 위험 시의 조치)

선장은 선박에 급박한 위험이 있을 때에는 인명, 선박 및 화물을 구조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다하여야 한다.

제161조(벌칙)

선장이 제11조를 위반하여 인명을 구조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다하지 아니하였을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고, 선박 및 화물을 구조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다하지 아니하였을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출처

형법

제187조(기차 등의 전복 등) 사람의 현존하는 기차, 전차, 자동차, 선박 또는 항공기를 전복, 매몰, 추락 또는 파괴한 자는 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제189조(과실, 업무상과실, 중과실) ① 과실로 인하여 제185조 내지 제187조의 죄를 범한 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②업무상과실 또는 중대한 과실로 인하여 제185조 내지 제187조의 죄를 범한 자는 3년 이하의 금고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제268조(업무상과실·중과실 치사상) 업무상과실 또는 중대한 과실로 인하여 사람을 사상에 이르게 한 자는 5년 이하의 금고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제271조(유기, 존속유기) ① 노유, 질병 기타 사정으로 인하여 부조를 요하는 자를 보호할 법률상 또는 계약상의무 있는 자가 유기한 때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제275조(유기등 치사상) ① 제271조 내지 제273조의 죄를 범하여 사람을 상해에 이르게 한 때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사망에 이르게 한 때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5조의12(도주선박의 선장 또는 승무원에 대한 가중처벌) 「해사안전법」 제2조에 따른 선박의 교통으로 인하여 「형법」 제268조의 죄를 범한 해당 선박의 선장 또는 승무원이 피해자를 구호하는 등 「수난구호법」 제18조제1항 단서에 따른 조치를 하지 아니하고 도주한 경우에는 다음 각 호의 구분에 따라 가중 처벌한다.

1. 피해자를 사망에 이르게 하고 도주하거나, 도주 후에 피해자가 사망한 경우에는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2. 피해자를 상해에 이르게 한 경우에는 1년 이상의 유기징역 또는 1천만원 이상 1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해운법

제22조(여객선 안전운항관리) ① 해양수산부장관은 내항여객선의 안전운항에 관한 시책을 수립하고 시행하여야 한다.

② 내항여객운송사업자는 「한국해운조합법」에 따라 설립된 한국해운조합(이하 "한국해운조합"이라 한다)이 선임한 선박운항관리자(이하 "운항관리자"라 한다)로부터 안전운항에 관한 지도·감독을 받아야 한다.

[10] 운항관리자의 자격요건, 임면 방법·절차, 직무범위와 운항관리자에 대한 지도·감독 등에 필요한 사항은 해양수산부령으로 정한다.

[10] 운항관리자는 해양수산부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제21조에 따른 운항관리규정의 준수와 이행의 상태를 확인하고, 항만에 드나드는 여객선등을 확인하며, 선원을 교육하는 등 안전운항을 위한 직무와 지도에 충실하여야 한다.

(…)

제57조(벌칙)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자는 3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1. 제21조제1항, 제22조제2항·제3항[10] 또는 제31조를 위반한 자


해외의 유사한 사례로 자주 코스타 콩코르디아 호 좌초사고가 거론되는데, 항목에도 있다시피 선장이 배를 버려두고 혼자만 도망쳐 나왔기 때문이다. 저 선장은 피해자당 징역형 8년을 적용, 총 징역 2697년 형을 구형받고 현재 재판이 진행중이다.
우리나라법에 의한 선장의 처벌 정도를 보자면, 가장 먼저 고려되었던 선원법 위반을 이유로 한 최고 형량은 징역 5년. 업무상 과실치사로 처벌해도 최대 5년형이다. 법리적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11], 양 죄에 경합범 가중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최대 선고 가능한 징역은 7년 6개월이다. 판사가 아무리 엄벌하고 싶어도 어쩔 수 없다. 우리나라는 징역의 병합은 인정되지 않고, 같은 징역형 간에는 최대 1.5배 가중만 가능하고 그나마도 모든 징역형을 합산한 형량을 초과하지 못한다는 제한까지 있기 때문이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에서도 이준 회장에 대해 법률상 최대한으로 엄벌했음에도 7년 6개월 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자세한 설명은 징역항목 참조.

승객이 사망할 결과발생을 능히 알면서 방치한 것에 대해 선장 등에게 미필적 고의에 의한,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를 적용할 수 있지 않느냐 하는 법리적 논쟁이 있기는 하지만,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에서도 미필적 고의를 인정하지 않은 판례의 태도로 미루어 고의범인 살인죄가 검찰에 의해 입증되기도, 법원에 의해 인정되기도 요원해 보인다. 실제로 검찰도 입증의 곤란을 예상했는지 구속영장 청구시 형법 제250조의 살인죄는 선장 등의 범죄 혐의에서 제외했다. 이에 대하여 박근혜 대통령은 21일, 이례적으로 "선장의 행위는 살인과 같은 행위이다."라고 공식석상에서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기사 이에 대하여 영국 가디언지,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 등 외신은 박대통령의 이 발언에 대하여 선장의 행위가 비극적인 참사를 불러오기는 했지만 살인과 동일시하기는 무리이고, 또한 아직 재판이 있기도 전에 행정부의 수반이 범죄혐의에 대해 미리 논평하는 것은 사법권 독립을 해칠 수 있다는 점에서 다소 부적절한 발언이었다고 비판적인 논평을 내기도 했다. 기사1, 기사2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 이후, 검찰에서도 선장 등에게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가 인정될 수 있는지에 대한 법리 검토에 들어갔다. 아직 공소가 제기되기 전 구속수사단계이고, 추후 공판절차에서라도 공소장 변경으로 살인 혐의를 추가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살인죄 성립여부가 법정에서 주된 쟁점으로 다뤄질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황이다.

형법 제275조의 유기치사죄는 3년 이상의 유기 징역이 가능하여 경합범 가중 인정시 30년 이상의 유기 징역이 가능해[12] 위의 죄명보다는 중하게 처벌되나, 유기치사죄가 인정되려도 적어도 유기에 대한 선장 등의 미필적 고의가 인정되어야 하는 점은 같아서, 역시 입증에 어려움이 있는 편이다.

그런데 18일, 백재현 의원 등은 선장에게 특가법 5조의 12로 가중처벌되는 선박사고 후 도주 행위 처벌조항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기사 2013년 7월 개정으로 도입된 이 조항을 적용하면 일단은 '무기징역'까지 선고가 가능하기는 하다. 그러나 해당 조항의 입법취지 자체가 선박충돌사고 발생 후 인명과 선박에 대한 즉각적인 구호조치를 하지 않고 도주할 경우를 이 조항이 적용되는 경우라고 규정하고 있어서, 이 사건에 적용되기는 법리상 무리가 있다. 즉, 특가법 규정은 선박 버전 뺑소니 가중처벌에 적용될 규정이어서, 선박충돌이 아닌 침몰 사건에 적용되기는 무리라고 볼 수도 있다.

다만 입법 당시 회의록, 입법예고 및 개정문에 따른 개정 취지는 그러하나, 위에서 보듯 법 조문은 해당 경우를 한정하고 있지 않으므로, 법 해석에 기초가 되는 문리해석으로는 처벌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법원의 해석에 따라 적용이 가능할 수도 있다. 결국, 검찰 및 법원의 법리적 검토 및 판단이 필요하다. 만약 이 조항이 적용된다면 여태까지의 정상관계에 비추어 선장은 최고형인 무기징역을 선고받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검찰은 영장실질심사 과정에서 피의자들의 집단적 책임회피의 모습이 보이는 등 죄질이 무거워, 선장 등 3인에게는 무기징역을 구형할 방침이라고 미리 밝혔다. 기사

한편 해운법 조항에 따르면, 운항관리자는 안전을 위해 승선정원 및 적재한도 여부를 확인하는 것과 구명기구, 소화설비 등을 완비했는지 여부를 점검해야 한다고 되어 있고(해운법 시행규칙 15조9), 본 꼭지 위에 옮겨 놓은 바와 같이 22조 4항에서도 이를 확인하고 있으며, 이를 어길 경우에 대한 처벌 조항은 57조에 명시되어 있다. 그런데 22조 4항은 이전에 3항이었던 내용이다. 2012년 5월 2일에 해당 법률이 일부 개정되어 22조 2항 자리에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었고, 2항은 3항으로, 3항은 4항으로 밀려난 것. 문제는 처벌 조항인 57조 내용은 그대로라는 점이다! 즉 '22조 4항을 위반한 자'로 함께 바뀌어야 할 내용이 여전히 '22조 3항을 위반한 자'로 적혀 있다. 개정 후의 3항(개정 전의 2항)은 '이러이러한 사항은 해양수산부령으로 정한다'는 실무 규정적 성격인데 이를 어길 시 처벌하겠다는 황당한 조항이 되어 버린 것이다. 법률 개정시 해당 부분까지 제대로 체크를 못 했기에 발생한 허점. 결국 현행 해운법대로라면 세월호 운항관리자는 해운법에서 명시한 처벌을 받지 못하게 될 상황이다. 관련 기사

11월 11일 1심 판결에서는 선장에게 살인죄 및 도주선박죄 부분에 대해서는 무죄가 선고되었다. 윤일병 사건에 이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를 인정하지 않은 것. 다만 예비적 죄명인 유기치사상죄와 선박법 위반 부분에 대해서는 유죄를 인정하여 징역 36년 형을 선고했다. 세월호 1등 항해사와 2등 항해사에게는 각각 징역 20년형, 징역 15년형을 선고했다.

1.5.2. 수사기관의 구속영장 청구

검경합동수사본부는 4월 18일 오후 7시 10분경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고 한다. 이는 검찰의 판단은 해당 법을 적용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신설된 특가법 제5조의 12가 형사사건에 적용된 사례는 이번이 최초이다.
4월 19일, 관할법원인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은 선장과 조타수 등 3명에 대해 우선 영장실질심사를 마치고 사안이 중대하고 도주의 우려가 크다는 이유로 구속영장을 발부하였다. 기사
4월 21일, 수사본부는 승객 구호의무를 게을리하고 가장 먼저 대피한 4명의 승무원을 추가로 체포하였다. 이들에게는 유기치사죄와 수난구호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여 구속영장을 신청하였고, 기사 목포지원은 이들에 대하여도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또한 세월호의 선주를 비롯한 40여명을 출국금지시켰다. 22일에는 30여명을 더 추가했다. 검찰은 출국금지 대상자들이 무리한 운항과 위법, 탈법적인 선박개조, 선장 및 선원에 대한 안전교육 미비등에 관여했다 판단 중이며 검경 합동수사본수는 운항상 과실, 선정 및 선원의 의무 불이행과 실소유자로 알려진 사람들의 경영 및 관리소홀에 대해 수사할 예정이라고 한다. 또한 인천지방검찰은 선사와 선주에 대한 별도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기사

1.6. 탈출 수단 무시

세월호 침몰 당시 탑승객들에게 탈출을 안내할 수단이 최소한 4가지나 됐으나 선장과 선원 누구도 활용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첫 구조정이 오고 있는 것을 조타실에서 목격후 아무런 구호조치도 없이 그저 자신들의 목숨 만 챙긴 정황도 포착됐다. 5일 검경 합동수사본부에 따르면 세월호에는 비상시 승객들이나 승무원들에게 승객들에게 탈출을 안내할 최소 4가지 설비가 갖춰져 있다. 우선 조타실에는 배 전체에 안내방송을 할수있는 설비가 있다. 방송설비를 작동(ON)으로 맞추고 4 개 버튼(승조원 구역, 기사실 구역, 식당·매점 구역, 전 구역) 중 방송을 원하는 구역에 해당하는 버튼을 누르고 방송하면 되는 방식이다. 세월호 침몰 당시 조타실의 안내방송 설비는 정상적으로 작동 중이었다. 그러나 당시 조타실에 있었던 선장 이준석(69)씨 등 8명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방송설비를 활용하지 않았다. 조타실에는 방송설비 말고도 총 4대의 무전기도 있었다. 이 무전기로 사무 승무원들에게 탈출 안내 무전을 했다면 승객들에게 전달될 수 있었다는 게 합수부의 판단이다. 그러나 2등 항해사는 승무원에게 "구명조끼를 입고 대기하라"고 했을 뿐이다. 조타실에는 또 만약의 상황에 대비한 비상벨도 있다. 이 비상벨을 짧게 7회 누른 뒤 길게 1회 누르면 '퇴선지시'를 의미한다. 방송설비가 작동하지 않았더라도 이 비상벨을 눌렀다면 승무원들이 듣고 단 원고 학생 등 탑승객들에게 탈출을 안내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기관실과 선원실 내에 설치된 전화기가 있다. 이 전화기의 숫자 0번을 누르면 선내 방송 이 가능하다. 하지만 당시 기관실에 모였던 기관부 7명 중 누구도 이 전화기를 쓰지 않았다.

합수부는 기관부원들이 사고 당시인 지난달 16일 오전 9시5분께 집결한 뒤 구조될 때까지 약 35분간 아무런 구호조치도 하지 않은 사실을 확인했다. 또 조타실에 있던 선장 이씨 등 8명 역시 48분간 구조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했다. 검경 합수부 한 관계자는 "일부 선원은 '구명벌을 투하하려는 시도라도 했는가'라는 물음에 '구명벌 쪽으로 발을 한 번 뗐더니 미끄러워서 중단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며 "승객들을 구하기 위한 다른 조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선장과 선원들은 조타실에 모여 대기 하며 멀리에서 구조정과 민간선박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며 "승객 구호조치는 내팽개치고 자신들만 구조를 기다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2. 카 페리선(로로선)의 허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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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리선은 승객칸에는 수밀격벽이 있으나, 그 아래 1~2층은 전부 주차공간이므로 수밀격벽이 없다.
참고 선박은 스웨덴의 크론프린세잔 빅토리아호.(Kronprinsessan Victoria)
이 선박은 아래 사례들과는 달리 아직도 현역이다.그림참고
6천 톤에 달하는 대형 선박이 단 1분 사이에 옆으로 기울어져 침몰했다는 사실이 의아할 수 있는데, 일반적인 선박의 선내가 촘촘한 방수격벽으로 구분되어있어 침수 구역에 대한 격벽 폐쇄 조치가 이루어질 경우 손상되지 않은 타 구역으로의 물이 새는 것을 저지 할 수 있어서 선체가 쉽게 부력을 잃지 않아 침몰을 막거나 침몰하는 속도를 늦출 수 있는 반면, 카 페리 선박(로로선)[13]은 구조상 선체 하부에 한 층이나 두 층 정도가 거의 격벽으로 분리되지 않은 거대한 차량 주차용 단일공간이기 때문에 이곳에 한번 침수가 시작 될 경우 해수 유입으로 인한 부력저하를 막을 방도가 없다. 게다가 선미부(배 뒷부분)와 선수부(뱃머리)에 차량출입용 램프도어가 달려 있으니 거친 파도나 암초충돌 등의 원인으로 이 차량출입용 도어가 하나라도 열리는 날에는 주차공간에 바로 물이 차버린다. 이때문에 순식간에 전복되거나 침몰하는 문제를 안고 태어날수밖에 없던 선박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카 페리선이 원체부터 위험하고 쓸모가 없다거나 문제투성이 선박이라는 것은 아니다. 카페리선은 크루즈선과는 달리 승객들과 자동차를 같이 싣고 다녀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부의 1~2층을 수밀격벽 없는 커다란 공간으로 만들어야 했던 것 뿐이지, 허술하게 제작된 것이 아니다. 다만 카 페리는 다른 배들보다 안전 관리를 좀 더 개념 있게 신경써야 하는 건 사실이다. 조금이라도 안전 관리에 소홀하거나 램프도어가 망가지는 날에는 자동차도 잃고 승객들도 항해중에 생을 마감하게 되는 대참사가 생기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관리를 잘 해서 안전하게 운항하는 카페리들도 상당히 많다!

여하튼 이런 태생상의 취약점으로 인해 침몰한 카 페리 선박들은 세월호 뿐만이 아니었는데, 아래 서술한 해외 사고 사례들을 참고해 보도록 하자. (물론 아래 사례에는 침몰이 아닌 좌초만 된 사고도 있다.)

2.2. MS 에스토니아호 참사

해럴드 오브 프리 엔터프라이즈호 외에도 세월호 사건과 비슷한 선례로 에스토니아호 참사를 들수 있다. 이 사고는 1994년 9월28일, 총 989명의 승선자 중 852명의 인명이 취침 중에 사망한 안타까운 해상 사고로, 세월호 사고와 어느 정도 흡사하다. 발트해의 겨울폭풍이라 부르는 거친 바다에서 선수문의 잠금장치가 망가지며 떨어져 나가 바닷물이 차량갑판으로 유입되면서 배가 전복되고 말았다. 한밤중에 차가운 바다에서 800명이 넘는 승객이 불귀의 객이 되고 만 이 사고로 인해 국제사회는 카 페리선의 안전 증진을 위해 복원성 규정을 개정하고 공공방송시스템을 설치하는 등 국제협약 내용을 대폭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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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토니아호 (위키페디아 참고) 입을 벌리듯 열리는 선수부 램프도어 참고
1979년, 노르웨이의 팰레이 어거스튼슨(Parley Augustsen)은 자신이 이끄는 해운사에서 노르웨이-독일 구간에서 굴리기 위해 독일 마이어 조선(Meyer Werft)[14]에 15,566톤의 대형 카 페리선을 주문했다. 허나 정작 조선소 측에서 전부 만들어 놨더니, 어거스튼슨 측은 무슨 사정이 생겼는지 돌연 인도를 취소하고 말았고, 그로 인해 다른 해운업체인 핀란드의 레데리 운수(Rederi Ab Sally)측에서 얼떨결에 이 배를 첫번째로 매입하게 되었다. 맨 처음 배를 인도받게 된 레데리 운수는 당시 계열사였던 바이킹 해운(Viking Line)[15]에서 이 배를 바이킹샐리(Viking Sally)라는 이름으로 1990년까지 핀란드-스웨덴 구간에서 굴렸다. 그 후엔 핀란드 기선 운수(Finland Steamship Company. 현재는 Effoa 해운으로 개칭)라는 해운업체에서 이 배를 매입하여 핀란드-스웨덴 구간에서 굴리게 되는데, 자회사인 실랴 해운(Silja Line)[16]에서 1991년까지 실랴스타(Silja Star)라는 이름으로 굴렸고, 1991년부터 1993년까진 또다른 자회사인 바사 해운(Wasa Line)[17]에서 바사킹(Wasa King)이라는 이름으로 굴렸다. 그후 동년(1993년) 에스토니아와 스웨덴 합작 해운사인 에스트 해운(Estline)에서 이 배를 매입하여 에스토니아(Estonia)라는 이름으로 에스토니아-스웨덴 구간에서 굴리게 된다. 에스토니아호는 운영 해운사가 여러번 바뀌었어도 15년 넘게 잘 운항하던 배였는데, 1994년 9월에 결국 비극이 일어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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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랑에 가라앉는 모습 상상도 원본 침몰후 해저에 가라앉은 잔해 상상도
(선수부 램프도어가 떨어져나감) 원본
1994년 9월 27일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을 출발해 다음날 스웨덴 스톡홀름에 도착할 예정이던 에스토니아호에는 승객과 승무원 등 1,178명이 타고 있었다. 출항 당시 항해 조건은 나쁘지 않았지만 외해로 나서자 풍랑이 갑자기 거세졌는데, 28일 새벽 1시께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뱃머리의 차량 출입용 램프도어의 잠금장치가 부서지며 떨어져 나가[18] 찬 바닷물이 들어차기 시작했고, 15분 뒤 배는 갑자기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파도에 쓸려 배가 오른쪽으로 30~40도 기울어지면서 선내 이동이 불가능해졌고 채 한 시간도 안돼 수많은 승객들이 객실에 갇힌 채로 침몰하고 말았다. 선장이 여객선의 침몰이 확실해진 후에야 비로소 경고방송을 보냈는데 하필이면 한밤중이어서 많은 승객이 잠들어 있었고, 그나마 깨어 있던 사람도 에스토니아어로 나오는 방송 내용을 알아듣지 못했다고 한다(...)[19] 당시 갑판 위 승객들만 생존할 수 있었으며, 생존자의 3분의 1이 승무원이었고 대부분 젊은 남자였으며 55세 이상 생존자는 7명뿐이었고 12세 미만의 어린이 중 살아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든 승객이 단잠을 자고 있던 한밤중에 생긴 참극이었다.

이후 스웨덴 정부는 선박 인양과 시신 수습에 나섰지만 추위와 어둠, 악천후로 바다에선 시신 94구밖에 인양하지 못하고 물러났다.[20] 스웨덴 정부는 3개월간의 수색과 인양 작업을 벌였지만 결국 모두 실패한 나머지 침몰 선박을 수중무덤으로 보존하겠다고 발표했고, 침몰 지점은 인양하지 못한 영령들을 엄숙히 추모하는 추도 해역으로 지정되었다.[21] 결국 1994년 9월 스웨덴으로 가려던 818명의 여행객들은, 아직도 차가운 바닷속에서 에스토니아호라는 거대한 관 안에 안치되어 있다. 참조1 참조2 참조3



2.3. 아리아케마루 전복사고

2009년 11월 13일, 화물과 7명의 승객을 태우고 운항중이던 마루에이 훼리 사의 카페리선인 Ferry Ariake(フェリーありあけ. 페리 아리아케 또는 아리아케마루) 가 일본 미에현 앞바다에서 전복된 사고. 승객도 적고 화물도 적은 상태에서 좌현에 강한 파도를 맞고 적재칸의 화물이 오른쪽으로 쏠려 균형을 잃은 상태에서 선장과 승무원들이 물이 얕은 뻘밭으로 배를 몰아 좌초시켜 침몰은 면했다. 승객 7명과 승무원 21명은 전원 구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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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으로 쓰러지는 아리아케마루 사진참고
이 사고에서는 배가 쓰러진 해안이 얕은 개펄이었는지라 승무원과 승객 전부 구조되었다고 한다. (세월호 사건도 저랬으면 좋았겠지만...)

세월호 특보를 방영하면서, SBS 뉴스에서는 여기 서술하는 아리아케마루 사고 사건을 보도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사고가 일어난 마루에이 훼리사가 세월호의 전신인 나미노우에마루를 운행하던 회사였다는 점이다. 제조된 곳도 하야시카네선거이고, 배수량도 7천톤 안팎에, 건조시기도 1년차이며, 이밖에도 전체적인 사고 과정이 놀랍도록 유사하다는 보도를 내보냈다. 해당 기사 1 해당 기사 2 그러나 SBS 보도와는 달리 전복 후 좌초된 아리아케마루가 건조된 곳은 미쓰비시중공업 시모노세키조선소이다. 그리고 뉴스대로 무게나 크기, 생김새 등의 주요 제원이 흡사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정작 나미노우에마루와는 승객정원도 2배 가까이 차이가 나는 선박이라 내부설계는 다를 수 밖에 없다. (승객정원이 다를 경우 선박 내부 구조가 상당히 달라진다). 관련자료

더욱이 이 사고에서의 선장과 승무원들의 행동은 세월호 사고와 비교될 정도로 정반대였다. 아침 5시 14분에 이상을 느낀 선장은 승무원들을 소집했고, 바로 구조를 요청했다. 선장은 곧바로 승무원들을 통해 승객들에게 구명조끼를 입혔고 갑판에 나와 대기하도록 했으며, 7시 넘어 헬기가 도착하자 승객 7명을 먼저 보냈고 그 뒤에야 승무원 14명을 헬기를 통해 내보냈다. 선장과 항해사, 기관사 등 핵심 선원 6명은 헬기를 타지 않고, 끝까지 남아 있다가 배를 포기해야 할 마지막 순간, 비상구명정으로 탈출했다. 물론 세월호보다는 승객 수가 훨씬 적었던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이른 새벽에 갑자기 일어난 사건임에도 당황하지 않고 원칙대로 행동한 결과였다. 이 사고를 조사한 일본 정부 보고서는 화물 관리가 느슨했다는 점만 지적했고 선원들의 대처에는 문제가 없었다고 결론냈다. 비록 일본의 사례이기는 하지만, 선장이 승객과 승무원들을 먼저 내보낼 정도로 배려한 점에선 정말 모범적인 자세라고 하겠다.MBC 분석

2.4. 슈퍼페리 9호 전복사고

2009년 9월 5일에 971명의 승객을 태우고 필리핀 제너럴 산토스를 출발해 일로일로 시티로 가던 '슈퍼페리 9호'가 잠봉가 반도 남서쪽 해역에서 전복되어 침몰한 사고. 5시간에 걸쳐서 서서히 침몰했기 때문에 10명만이 사망하고 나머지는 다행히 구조되어 대형 참사는 막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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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체가 45도 정도 기운 슈퍼페리 9호.
971명의 승객은 대부분 구조되었다.원본
이 사고와 상기한 아리아케호마루사고는 배 안의 차량과 화물이 한 쪽으로 쏠리면서 균형을 회복하지 못해 침몰했다는 점에서 세월호 사고와 유사하다. 슈퍼페리 호 역시 일본의 해운회사에서 10년 남짓 사용하던 것을 중고로 구입해 운영하던 것인데... 이 배를 1995년까지 운영하던 회사가 또 마루에이 훼리이며 현역 운항 당시 '아리아케마루'라는 이름으로 운영되었다.[22] 물론 상기 항목의 아리아케마루와는 다른 구형 아리아케마루이며 1986년 오이타 현 사이키 시에 있는 우스키철강에서 제작해 마루에이 훼리에서 1995년까지 굴린 후 필리핀에"슈퍼페리 9호"라는 이름으로 매각한것이다. 그리고 동년(1995년) 미쓰비시조선소에 새로 주문한 신형 아리아케마루가 상기 서술한 아리아케마루 전복사고의 주인공이다.

슈퍼페리 9호와 아리아케마루는 구조가 많이 다르지만, 원체 슈퍼페리의 운영사인 아보이티츠 운수(Aboitiz Transport System Corp. 약자로 ATSC)가 원래 중고 선박의 마개조를 일삼는데다 [23] 구형 나미노우에인 세월호와 2012년 진수된 신형 나미노우에의 구조가 거의 같은 점으로 미루어 보아 원래는 비슷한 구조의 선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구형 아리아케마루신형 아리아케마루슈퍼페리 9호 사고 위키정보(영어)

3. 학교와 교육청의 미흡한 대응

사고 당일 오전 8시 10분경 단원고 학생들이 탑승한 세월호와 연락이 두절되었다는 내용이 경기 안산 단원고 측에 전달되었다. 그러나 단원고측은 9시 50분경에야 학부모들에게 사고 발생 사실을 알렸고, 경기도교육청은 오전 11시에 학생들이 전원 구출되었다는 문자를 출입기자와 학부모들에게 돌려 사고는 무사히 수습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경기도 교육청의 문자 내용은 모두 거짓이었다. 두번에 걸친 학생들이 무사하다는 공지는 확인사실이 전혀 없는 허위였다. 교육청과 단원고 측의 공지가 거짓임이 밝혀지자 안도했던 학부모와 관계자들은 모두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공지의 출처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해경이 나왔다. 해경측에서는 집계를 재촉하니 추측성 집계를 해서 넘겨준거에 불과한데 섣불리 발표한 중앙대책본부에 책임을 넘기고 있는입장

이 와중에 교육청 관계자는 기도해야 된다는 뜬금없는 소릴 했다가 대판 욕을 먹었다.#[24]

4. 청해진해운 홈페이지 다운 논란

청해진해운 홈페이지는 사고 후 접속이 되지 않았는데 사실은 처음에 보이는 index 페이지만 막아놓은 상태였다.
소치 쇼크빙상연맹이 같은 일을 벌인 것을 기억하고 있던 네티즌들이 구글링을 통해 사이트의 나머지 부분주소를 발굴했으며 이를 브라우저 주소창에 입력시, 멀쩡히 돌아가는 홈페이지로 접속이 가능했다.

이 사실을 발견한 네티즌들이 질문과 답변란에 글을 쓰기 시작하자 2012년 1월 18일 이전 회원가입 회원만 글을 쓰게 막아놨었다. 사이트 말로는 프로그램 전환작업이라고 했지만...

4월 18일 즈음에 다시 열렸지만, 4월 19일 이후로는 대문에 사죄의 글을 걸어둔 채 막아뒀다. 열려 있었을 당시 고객센터 매뉴의 질문과 답변 게시판에 네티즌들의 글이 올라오고 있었다. 일부 네티즌들은 지역 드립과 고인 드립, 패드립, 정치성이 강한 게시글들을 올렸다.# 그 중에는 세월호 사건의 총체적 문제점을 담은 글도 있다.# 홈페이지 특성상[25]크롬은 약간 어색하게 작동할 수 있지만 글 보는덴 문제가 없다.

5. 등대 관련

사고지역에서 2km이내에 무인등대가 있다. 진도군 주민들은 여러 차례나 그 무인등대를 유인화해달라고 해양수산부에 건의를 올렸으나 그때마다 묵살되었다. 만약 그 등대가 유인등대였더라면 사고징후를 미리 포착해서 세월호의 항로 이탈을 미연에 방지했거나 세월호가 침몰되더라도 빠르게 조치하여 이와같은 대형사고를 막을 수 있었다.#

어민들의 말에 의하면 등대에서 사고지점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가깝고 때문에 애초에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해양수산부에 이 무인등대를 계속 유인화해달라고 청원서를 냈으나 계속 기각당했다. 더욱이 그 등대는 원래는 유인등대였다가 모종의 사유로 인해 2009년에 무인등대로 전환된 등대였다. 유인등대 시절에는 등대장 1명과 일반상주직원 3명 등 총 4명이 등대에서 근무했었다.

6. 정부의 미흡한 대응

6.1. 초동대처 문제

해경의 초기 상황 보고서가 공개되면서 초기 대응이 심각했던 것으로 속속 드러나고 있다. JTBC 보도내용.
  • 사건발생 40분 뒤 최초 보고서. 세월호가 절반 이상 기울었던 시점에서 해경이 보낸 보고서는 '침몰할 가능성이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정도이다
  • 세월호가 완전히 전복된 이후인 10시 23분의 2번째 보고서. 10시에 '해경과 해군 함선 33척과 항공기 6대가 10시부로 동원됐다'고 보고. 실제 현장에 있던 것은 구조정 한 척과 헬기 2대.
  • 11시 25분 세번쨰 보고서. '162명 구조'라고 강조 언급하면서 정작 나머지 300명도 넘는 사람들이 여전히 완전히 침몰한 함선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누락. 초기에 모두 구조했다는 언급이 나온 배경으로 추정됨.
이런 보고서들을 받은 행안부 장관은 공식 일정을 그대로 진행했다. 이런 보고서만 들어왔다면 도대체 이게 심각한 사건이란 인식을 할 수가 없다. 전원구조 보도가 나올 때, 교육청 등도 이런 글을 돌렸는데 이게 자기들도 몰랐기 때문이었다는거다.

또한 해경의 구조 과정도 골치아픈데, 당시 학생들은 해경 구조 헬기 도착을 알았다. 그래서 구명조끼를 입는 등의 준비는 했다. 그리고 익히 알려진 것처럼 방송에서 그대로 대기하라는 방송이 나왔다. 그리고 해경 구조정의 구조장면을 보면 해경이 도착한 것은 구조선 한 척에 헬기 1대가 40분을 보냈다. 이 시간동안 해경은 대부분의 시간동안에 구명보트 한척만을 왕복시키면서 인명을 구조했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구조된 사람은 극소수. 그리고 단 한번 직접 선체에 접근했을 때에는 선실이 있는 선미가 아니라 조타실이 있는 선수로 접근해서 오직 승무원 7명만 구조했다. 이후 민간어선이나 어업지도선들이 선미로 붙기 시작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서 배는 침몰했다. 가장 중요한 침몰 직전 시간 동안 극 소수의 인원이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한 것이 해경 구조의 전부인 것.

이런 부분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전에는 모든 책임이 선원들에게 갔지만, 이런 점을 고려하면 당연히 책임의 상당수는 선원들이라도 해경도 책임논란을 피할길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책임 논란이 선원들에게만 극딜 되엇던 것이 해경의 책임 문제와 안이했던 초기 대응을 가리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느냐는 비판도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검찰은 해경이 선체 진입해서 문제를 해결할 기회가 충분했는데도 사고를 키웠다라고 판단 해경을 수사한다는 방침이 세워졌다. 이 기막힌 구조과정 때문에 해경에 과실치사 혐의를 적용하는 것도 검토하기로 한 듯.

6.2. 사고 처리 과정

현장과 지휘부의 대응이 제각각으로 흘러가 온갖 오보를 쏟아낸 끝에, 지휘본부인 서해지방해양경찰청 외엔 언론보도 제공이 중지 되었다!

본래 안전행정부로 바뀌면서 소방방재청이 꾸리던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격상시켰는데, 이게 제대로 돌아갔으면 안행부 장관이 모든 것을 총괄하고 중앙긴급구조통제단장인 소방방재청장의 지휘아래 민관군이 일사분란하게 신속하게 구조하고 정확하게 수습을 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의 높으신 분들이 방재라고는 눈꼽만큼도 모르시는 분들이라는 것. 본부장인 안행부 장관, 부본부장인 안행부 2차관 모두 방재와는 관계 없는 행정가. 그렇다면 기존의 소방방재청이 가지고 있었으면 그나마 낫느냐, 그것도 아닌 것이 해상구조는 해양경찰청의 소관이다. 게다가 격이 낮아 민관군을 지휘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었다. 당장 구조에 동원된 해군의 수장이 장관급이니...

그렇다고 해경은 낫느냐하면 그것도 아닌게, 이쪽도 바다가 전문이 아닌 것은 마찬가지다. 최상위 지도부 중에서 구조선이나 해경선에 타 본 경력이 있는 사람은 손 꼽을 지경이고, 나머지는 모두 수사와 행정이 주업무이니 육상 경찰과 하나도 차이가 없다. 더구나 그나마 배를 탄 인력도 경찰 업무가 주력이지 해양업무는 여기서 다시 마이너라서, 2014년에 지방해양경찰청의 구조계가 해경청장 지시로 폐지되었다. 국가에서 수상사고를 담당할 곳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

게다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제대로 돌아간 것도 아니다. 당장 진도군청에 총리가 본부장인 "범부처 사고대책본부"가 세워져 현장을 통제하고 있는 상황인데다 해경과 해군도 따로 본부를 차리고 일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현장지휘도 개판인 것은 매한가지. 재난대비법상 긴급구조통제단장은 소방관서장만이 될 수 있다. 즉 중앙긴급구조통제단장은 소방방재청장이, 시도긴급구조통제단장은 시도소방본부장이, 시군구긴급구조통제단장은 소방서장이 맡는다. 이게 육상재난이면 소방관서장이 군경을 지휘해 재난을 수습하겠지만... 문제는 이게 해난사고라는 거다. 해난사고는 해양경찰청의 관할이다. 따라서 해난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는 소방방재청장이 중앙긴급구조통제단장이 되어 해양경찰과 해군, 기타 공무원, 민간 잠수부를 원칙상 지휘해야 하는 상황[26]. 결국 답이 없다. 서해지방해양경찰청이 따로 지휘본부를 차릴 정도면 말은 다했다.

해경과 중앙 행정의 비전문성과 무능력함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 뭐냐하면, 해경이 보낸 초기 보고서이다. 관련보도. 우선 해경은 해경정 4척과 해군 함정 7척, 헬기 3대를 출동시켰다고 1차 보고서를 올렸다. 관할청인 해양수산부의 보고서에도 해경의 보고내용이 그대로 들어갔다. 문제는? 실제로 현장에 등장한 해경 소속은 구조정 1 척, 헬기 1 대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 와중에 올라간 해경 2차 보고서에서는 (해경과 해군 합쳐) 함선 33척, 헬기 6대가 나가있다고 보고서가 올라갔다. 전형적인 과장보고이다. 그런데 해수부는 해경의 2차보고서 내용을 반영하지 않고 그대로 1차보고 내용을 계속 보도한다. 해경의 과장보고란 것을 알아서? 그게 아니라 2차 보고서를 안 봤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는 해수부의 늑장 행동이 그나마 나은 결과를 불렀다. 해경 보고서를 곧이 곧대로 믿었다면 주변 인력을 급하게 동원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라면 이유야 여하튼 사고 처리 과정이 더더욱 꼬였을 것이다.

일부 기자들이 자신이 속한 언론사의 성향에 부합하는 행동의 기사를 싣기 위해 특정 발언을 유도하는 행위를 반복, 온갖 문제기사를 쏟아내었으며 이를 보다 못한 지휘본부가 정식문서이외의 언론보도제공을 중지하는 강수를 두었다.[27] 이 때 언론들이 한 행동에 대해서는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사건사고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항목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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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사무직 외엔 대부분 1년 단위로 계약하는 비정규직이 흔하다고 한다. 문제가 없진 않으나, 수요보다 공급이 많아 지금까지 문제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이 기사에서도 언급하듯 아예 문제가 없다고 하긴 그렇지만 일반적으로는 문제가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비정규직이란 이유만으로 이번 참사가 일어났다고 문제 삼는 것은 선사업계 직원들을 모욕하는 일이다. 따라서 비판해야할 대상은 비정규직이 아니라, 비정규직을 위주로 구성하게 된 사회적 구조에 대해 비판해야할 것이다.
  • [2] 나중에 알려지기를, 그가 휴가를 낸 건 개조에 문제가 있다고 계속 이야기했는데 회사가 이를 무시해 계속 배를 타기엔 불안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 [3] 이 현지 어민은 나중에 구조 활동에도 참가하였다고 한다.
  • [4] 유관 기관에 신고가 들어가게 되면 회사 입장에서는 사후처리로 귀찮게 되기 때문이다.
  • [5] 정작 선장은....링크 참조.
  • [6] 이 때 연락을 하지 않으면 벌금이 부과된다는 이야기와 벌금이 부과되는 사항은 아니라는 이야기가 혼재한다.
  • [7] 실제로 공개된 녹취록에 따르면 진도 VTS는 당시 통행하던 다른 선박들과는 정상적으로 교신이 이뤄지고 있었다. 그래서 진도 VTS에 사람이 없다거나 근무태만일 가능성은 비교적 낮다.
  • [8] 4월 17일자 YTN TV기사에 따르면, 지난해 세월호를 탔던 승객들이 구명보트는 체인으로 묶여 있었음을 증언했다고 한다. 이번 사고 당시에도 체인으로 묶여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심지어 유일하게 쳘쳐진 구명보트를 선장이 타고 왔을 가능성까지 제시되고 있는 중. 다만 이 체인이 비상상황시 자동/수동으로 풀리도록 만들어진 정상적인 체인인지, 임의로 묶어 놓은 규정에 위반되는 체인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 [9] 이에 대한 비판도 연이어졌다. 해경 구조선이 배의 선수로 접근하여 선장과 승무원을 구조했는데, 승객들의 객실은 선미에 있고 선수에는 일반 승객은 접근할 수 없는 조타실이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해경은 조타실과 직통으로 전화 연결이 가능하고, 구조정 도착에서 승무원 구조까지 40분은 걸렸는데 해경구조정과 선장 및 승무원은 긴급 전화를 사용하지 않았단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혹시 선장 및 승무원들이 자신들을 승객으로 위장했다면 해경은 승객으로 알았다고 발언했을 것이니, 이 승무원과 승객을 구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들만 구조했다는 것은 상식 밖의 발언이다.
  • [10] 볼드체 처리한 이유는 후술
  • [11] 죄수관계에서 양 죄의 관계가 상상적 경합인지, 실체적 경합인지가 문제될 수 있기 때문이다.
  • [12] 형법 제42조(징역 또는 금고의 기간) - 징역 또는 금고는 무기 또는 유기로 하고 유기는 1개월 이상 30년 이하로 한다. 단, 유기징역 또는 유기금고에 대하여 형을 가중하는 때에는 50년까지로 한다.
  • [13] RORO(Roll-On Roll-Off). 자동차타고 배에 타고 내렸다 할 수 있게 만든 배로. 카페리를 가리킨다.
  • [14] 한국 언론에서 보도할때 이름 그대로 읽어서 마이어 베르프트라고 표기하기도 한다.현재는 페리선보단 크루즈선을 전문적으로 제작한다고. 세계 5대 크루즈 조선사이다.
  • [15] 현재는 레데리 운수가 부도가 남에 따라 바이킹 해운은 레데리 운수 소속이 아닌 독립적 회사가 되었다고 한다. 자세한 사정 아시는 분은 추가바람.
  • [16] 지금은 에스토니아의 탈링크 해운(Tallink)에 인수되었으며, 아직도 유럽 고급 카페리 서비스로는 굴지의 회사이다. 자사 선박 중 몇몇 큰 선박들은 크루즈페리라고 하는데, 크루즈페리라는 것은 카페리이면서도 객실을 좀더 고급스럽고 깔끔하게 꾸미면서, 크루즈선에 준하는 시설들을 약간씩 갖추어 고급 서비스를 더한 선박이다. 예를 들자면 스파(작은 수영장 또는 목욕탕)라던가, 뷔페와 고급 음식점 또는 고급면세점 등의 기존 카페리선에선 보기 힘든 서비스들을 조금씩 추가한것이다. 한국에서도 북유럽 떠나는 해외여행객들이 이 해운사의 배를 은근 타는 모양이라고 한다.
  • [17] 현재는 실쟈 해운과 통합되어 사라진 모양.
  • [18] 카페리선 중에서는 차량 출입용 램프도어가 선수(뱃머리)부분이에 위치해서 뱃머리가 입처럼 열리면서 자동차가 들어가는 형태의 선박들이 많다고 한다. 만일 운항중에 이러한 램프도어가 결함으로 열리거나 떨어져 나가면 자동차를 주차하는 1층의 넓은 공간으로 물이 들어차게 되어 단번에 전복되기 쉽다.
  • [19] 하필 당시 승객의 대부분은 에스토니아가 아니라 스칸디나비아인들이었다.(...) 특히 승객들 중에는 스웨덴인들이 많았는데 사망자 중 500명 이상이 스웨덴인들이었다. 지금도 스웨덴에는 에스토니아호 사고 희생자 추모비가 있다.
  • [20] 구조와 수색작업을 주도한 스웨덴 정부는 각계 원로들로 ‘윤리위원회’를 구성해 수습 방안을 검토했다. 이 위원회는 선체 내부 수색과 인양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을 정부에 냈다. 수심이 깊어 잠수부의 수색작업이 매우 위험하고 인양은 기술적으로 어렵다는 판단이었다. 스웨덴 정부는 이를 근거로 다른 두 핵심 당사국인 에스토니아와 핀란드(사고 현장이 핀란드의 대륙붕에 포함)의 동의를 얻어 수색과 인양을 포기했다. 이 결정 때문에 처음에는 유족들이 반대했었다고 하나 정부측에서 유족들에게 심도있게 논의한 후 겨우겨우 동의를 얻어내어 결국 3개월만에 수색과 인양을 실패한 채로 마무리했다. 사실상 유족들에게 부패한 시신을 그대로 보여줄 경우 유족들 심경에 더욱 상처를 줄 수도 있었고 기술상 문제나 인양작업 경비 증가 등을 생각해 보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 [21] 스웨덴 정부는 잠수부들이 무단으로 유해나 유물의 인양을 시도할지 모른다며 시신 유실을 막기 위해 자갈과 콘크리트를 배 위에 부어 현장을 완벽히 봉인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하지만 봉인 작업은 기술적 문제로 초기에 실패했는데다가, 봉인을 할 경우 진실 규명이 완전히 불가능해진다는 것 때문에 유족들이 유럽인권위원회에 봉인을 중지시켜 달라고 요청까지 했었는지라 (물론 유족들의 요청은 위원회에서 기각하고 말았다.), 기술상 문제도 있고 유족들을 차마 무시하지 못했던 스웨덴 정부는 결국 선체 주변에만 자갈과 콘크리트를 붓는 선에서 작업을 중단했다. 그리고 희생자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사고지역 접근금지' 국제조약을 마련했다. 현재도 에스토니아호 사고 지점은 특별한 경우가 아닐 경우 어느 선박도 지나다닐 수 없고, 인양작업도 할 수 없다.
  • [22] 전전 나미노우에마루 역시 슈퍼페리의 운영사인 아보이티츠 운수(Aboitiz Transport System Corp)에 팔렸었는데 이 녀석은 1997년에 정박중 화재로 소실되었다(...)
  • [23] 기존 선수부 도어를 용접해서 없애고 측면을 도려내 새로 만든다던가... 참고
  • [24] 물론 본인은 학부모를 달래느라 한 발언일 수도 있지만, 정말 너무 상황에 맞지 않는 소리라 인터넷에서는 특정 종교인으로 몰려 싸잡아 욕먹고 있다.
  • [25] 웹표준에 신경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국내 웹 환경상, 아직도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아니면 홈페이지 사용에 애로사항이 꽃피는 게 많다.
  • [26] 소방기관의 수장이 해양경찰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 [27] 문서로 제공시 상위자에게 전문을 보낸 후 편집부를 통해 기사가 나오기에,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현장에서 바로바로 기사를 올릴수가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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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3-20 11: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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