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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last modified: 2015-04-13 10:52:13 by Contributors

(ɔ) Alberto Korda from
[1]

Ernesto "Che" Guevara
1928년 6월 14일(아르헨티나) - 1967년 10월 9일(볼리비아)

Contents

1. 개요
2. 일생
3. 대중 작품 등의 모습
4. 평가
4.1. 상품화 된 혁명가 우상
4.2. 긍정적 평가
5. 비판
5.1. 반대파 학살과 정치범 수용소
5.2. 볼리비아에서의 혁명 활동에 대한 비판
6. 명언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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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자본주의가 만든 공산권 최고의 스타라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더 열렬한 빠순이, 빠돌이를 볼고 다니던 슈퍼스타가 있었다. 물론 사후에 인기가 폭락함

흔히 체 게바라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본명이 아닌 애칭으로, 훗날 그를 상징하는 본명이 되었다. 체(Che')의 원래 뜻은 바로 이탈리아어 "케 코사 체(Che cosa c'è, 무슨 일이야?)"를 뜻하는 말이였는데, 아르헨티나로 대거 유입해 온 알프스 산맥 지방의 이탈리아 사람들이 언제부터인가 이 'c'è'를 '체(Che)'로 바꿔 썼다. 아르헨티나 북동부와 파라과이에서 통용되는 과라니어에서 '체'는 '나' 또는 '나로서는'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가 쿠바 혁명의 주도자라는 이유로 쿠바 출신이라고 아는 사람들도 많은데, 사실은 아르헨티나인이다.[2] 아르헨티나의 또 다른 유명인인 에바 페론의 일대기를 다룬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 『에비타』에 등장하기도 한다.[3] 극 중간중간 등장하는 해설역으로, 극 내내 페론을 따라다니며 그녀의 행동에 딴죽을 걸거나 비아냥거리는 역할.

2.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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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 아버지와 어머니의 가계명이 죄다 붙는 외우기도 힘든 긴 이름으로 알 수 있듯이 실은 귀족가 혈통을 이어받은 부르주아 집안 출신. 아버지는 제법 큰 병원 원장이었으며 따라서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이 잘 자랐다. 하지만 부모가 둘 다 중립적 자유주의자라 어릴적부터 스페인 내전 패배로 망명한 국민정부 인물들과 만나 진보적인 사고를 배우게 된다.

체 게바라 평전에 의하면 어린 시절 에밀리오 살가리(1862~1911)[4]의 소설들에 빠져 살았는데 이 소설들에서 반제국주의적 사고관을 배우게 되었다고 적혀있다.

만능 포츠맨이었으나 미숙아로 태어났고 두 살 때부터 천식을 앓아 평생 흡입기를 지참하고 다녔다. 그런데 시가를 즐겨 피우는 골초였으니 충공그깽. 그래도 대단한 독서가였다.

본디 의사를 꿈꿔 부에노스아이레스 의대를 졸업했으나(알레르기 연구로 의사면허을 취득), 우연히 친구인 베르토 그라나도모터사이클로 남미 대륙을 여행하면서 피폐한 남미의 현실(빈부격차로 인해 좌절하여 하루하루 살아가는 무수한 사탕수수, 커피, 바나나 농장의 노예들)을 보며 충격에 빠졌다. 또한 CIA 사주를 받은 군부가 좌파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을 보고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 체는 이 당시 현실에 좌절하여, 의사 가운을 던지고 혁명에 종사하게 된다.[5]


과테말라 혁명에 참여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쿠데타 정권의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되자 멕시코로 탈출, 1955년 7월 10일 평생 동지인 변호사 출신의 한 살 많은 피델 카스트로와 만나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가 집권하는 쿠바에 혁명의 불길을 일으키기로 결심, 혁명군에 투신하게 된다. 그리고 스페인 내전을 겪은 베테랑 군인 알베르트 바요 아래에서 혹독한 훈련을 거쳐(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거나 불손한 움직임을 보이면 바로 총을 들어 사살했다고 한다.) 강건한 병사로 단련되었다.

1956년 11월 25일, 멕시코의 툭스판에서 요트 그란마 호를 타고 쿠바로 향한 82명의 전사들은 12월 2일 쿠바에 도착했으나 상륙 직후 바티스타 정부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대부분이 죽거나 체포되어 17명(12명 설도 있다.)으로 짜부라든다.


겨우 시에라 마에스트라로 탈출한 혁명군은 그 곳을 기점으로 바티스타 정권의 폭정에 지친 민중들의 지지를 받아가며 성장, 결국 2년 뒤인 59년 1월 수도 아바나에 입성하며 독재자 바티스타를 쿠바에서 몰아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포코 이론의 성공.


혁명 직후 쿠바의 일반 대사로 해외에 파견되어 이집트나세르, 인도네루, 유고슬라비아, 인도네시아카르노 등 '동맹 국가'들의 지도자들과 만나 반제국주의, 반민주의 외교활동으로 우호를 다지게 된다. 심지어 UN 총회에서도 쿠바 대표로 참여했으며 북한에서 김일성을 만나기도 했다. 이때부터 검은 베레모와 구겨진 군복은 그의 레이드 마크가 됐다.

사실 혁명 초기까지만 해도 피델 카스트로에 맞먹는 영향력이나 지위, 명성을 가진 이는 없었다. 그는 그린마 호에 처음 탈 때까지만 해도 간부 같은 게 아니라 그냥 게릴라들 중 유일한 의사이자 군의관이였고, 후일 대민 의료지원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며 영향력과 지위가 올라간 것이다.[6]

쿠바의 특산품이라 할 수 있는 시가를 지킨 사람이라고도 한다. 카스트로가 시가가 미국 부자들의 상징이라고 없애려 하자 지독한 골초이기도 한 체 게바라가 '시가는 쿠바의 상징'이라고 하며 말렸다고. 결국 마르크스 레닌의 시가가 등장했다

이후 쿠바 립은행 총재[7], 산업부 장관에 발탁되어 농업국 쿠바를 업국화 하려는 계획의 책임자가 된다.[8]

하지만 그의 대중적인 매력이나 혁명가로서의 투지와는 달리 산업화나 경제 살리기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상가로서의 성격이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그는 지극히도 돈을 혐오해 지폐에다가 대충 '체'라고 휘갈겨 쓰거나 항상 구멍난 양말을 신고 작업을 했으며 직접 사탕수수 농장, 벽돌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게다가 너무 서두른 산업 국유화는 자본 이탈과 함께 미국의 경제 봉쇄라는 더블 펀치를 쿠바에 안겼다. 게다가 마침 불거진 중소 간의 충돌은 공산주의 진영에서 편 가르기를 촉발시켰고 그 와중에 귀중한 시간까지 낭비되었다. 결국 체 게바라는 자아비판까지 해야만 했으며, 이 커다란 실책으로 인해 라울 카스트로의 친소파가 쿠바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의사 출신인 게바라는 무엇보다 의료 개혁만큼은 자신있게 주도했다. 옛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를 쿠바로 초청하여 임상학 연구소를 설립하게 하고, 산티아고하바나 대학 등의 의대에 전폭적인 지원을 했다. 그 결과인지 현재 , 신경통, 기 이식 수술은 물론 안과성형수술에 이르기까지 쿠바의 의료수준은 미국이나 유럽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여기에 치료 비용이 값싼 것도 외국인에게는 매력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료 관광으로도 많은 외화를 버는 곳이 쿠바다. (다만 90년대 이후 소련의 지원이 끊기면서 의료체계가 상당히 막장화 되긴 했다.)


카스트로는 결국 친소련정책을 취하여 자국 내에 소련 핵미사일 기지 설치를 허용하고 군사, 경제원조를 얻어냈으나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계기로 게바라는 소련의 진의에 대해 회의감을 품게 되었고 이는 소련의 점수 따기에 몰두하던 카스트로와의 사이에 균열을 만드는 계기가 된다. 특히 1965년 1월, 알제리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소련을 향해 "제국주의적 착취의 공범자"라는 원색적 비난을 퍼부었고, 이에 격노한 새 집권자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서기장이 그가 공직에서 사퇴하지 않으면 모든 경제 원조를 중단하겠다는 엄포를 놓게 되자 카스트로의 지시로 모든 공직에서도 사임하게 된다. 경제정책 실패에 이어 터진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혁명 정권 내에서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다. 결국 그 해 5월, 가족과 카스트로에게 보내는 편지를 남기고 소수의 지지자들과 함께 쿠바를 등지게 된다.

체 게바라와 소련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된 원인은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다.

1. 체 게바라는 마오쩌둥의 혁명전략에 큰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 혁명 당시 제정 러시아가 농업 국가라 해도 그 안에는 공장과 노동자들이 다수 존재했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 대부분 나라에서 공장의 노동자들을 통한 사회주의 혁명 전술은 적용하기 매우 어려웠다. 체 게바라가 활동할 당시 라틴아메리카의 공장 노동자들은 그 수가 정말 한 줌에 불과했다. 더욱이 극단적인 빈곤층과 빈농의 수가 너무 많아 공장 노동자들의 위치가 절대적으로는 빈곤층이나 상대적으로는 중류층~중하류층에 속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소련식 사회주의 혁명 모델은 쿠바 상황에 적합하지 않았고, 더 나아가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들에게 있어 소련식 사회주의 혁명 모델은 맞지 않았다. 오히려 쿠바를 비롯한 제3세계 지역에서는 중국식 혁명 모델이 적합했다.

2. 소련의 사회주의 국제분업 계획에서 쿠바는 당연히 농산물 생산 - 특히 사탕수수 보급 기지에 불과했다. 그러나 사탕수수 생산에만 의존하는 경제는 결국 경제적 예속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었고, 단일작물 경작에 의존하는 경제가 가지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쿠바 혁명정부의 지도부 모두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더욱이 사회주의 혁명 완수를 위해서는 반드시 산업화(공업화)를 달성해야만 했다.[9] 그러나 쿠바 혁명정부의 태도에 확신이 없었던 소련[10]은 쿠바 혁명정부가 만족할만한 지원을 해주지도 않았고, 지원 약속을 성실하게 이행하지도 않았다. 더욱이 빠른 산업화를 통한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꿈꾸던 쿠바에게 사탕수수 생산에 의존하는 경제의 유지를 강요하다시피 제안하는 소련은 새로운 경제적 종속 관계를 요구하는 것으로 비추어졌다.

그가 향한 곳은 독립국 탄생이 한창이던 아프리카였고 그 곳에서 내전이 한창인 콩고에서 자기 자리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스페인어가톨릭으로 공통점이 많은 남미와는 달리 생소한 환경의 아프리카는 그가 생각한 세상이 아니었다. 자칭 공산주의자들은 약탈밖에는 관심이 없는데다 총소리만 들어도 앞다투어 달아나는 오합지졸들뿐이었다. 게다가 중국과 소련 간의 갈등은 이곳에서도 그의 발목을 잡아 친소 국가인 쿠바 출신의 그를 중국의 지원을 받는 콩고 공산세력은 다짜고짜 적대시했다. 연이은 좌절에 피폐해진 그는 일단 남미혁명이라도 완수하겠다고 생각, 1966년 11월 변장한 채로 볼리비아로 입국하게 된다.


게바라는 볼리비아 공산당과 연계해 혁명을 일으키려 했으나 소련에게서 낙인찍힌 그를 볼리비아 공산당은 대놓고 군 식구 취급했고 여기 지휘권 문제까지 불거지자 거의 빈손이나 다름없이 정글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보수적인 볼리비아 농민들[11] 또한 이 외지인들을 반기기는커녕 적대시하여 신고를 하는 지경이었고, 현지 원주민들은 백인인 그의 말을 들으려조차 하지 않았다. 사실 볼리비아에서 공산당 지지 세력은 농민들이 아니라 광부나 도시 노동자였으나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심지어 오랜 동지인 카스트로조차 침묵했다.

거기에다 미국의 추적이 더해졌다. 너무 유명해진 그는 미국에게도 카스트로 다음 가는 눈엣가시로 여겨졌고, 그의 입국이 확인되자 CIA가 나서서 네이비 씰에 의해 양성된 정예 레인저 부대를 인간 사냥에 투입했다. 그의 목에는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비롯한 거액의 현상금이 걸렸다.

영양실조와 이질에 시달리며 11개월 동안 추격을 피해 도망쳤으나 결국 1967년 10월 8일, 추로 협곡 전투에서 본대와 떨어진 상태로 몇 안되는 부하들과 함께 정부군 특무대대의 매복에 걸려 그 자신도 총상을 입고 생포된다. 생포시 게바라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쏘지 마라! 나는 체 게바라다. 죽이는 것보다 살려두는 것이 더 가치있다."[12]
그 당시까지만 해도 게바라는 고국 쿠바와 세계의 좌파 지식인들이 자신을 살리기 위한 구명운동을 펼칠 거라고 믿었던 듯하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미국이 불법적으로 처형한 것에는 이유가 있던 것.

여하튼 게바라가 생포될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몸에 소총과 권총 한 자루, , 롤렉스[13] 시계와 담배 파이프 각각 두 개, 1만5천 달러가 나왔으며[14] 이발과 면도를 하지 않아 매우 지저분한 모습에 모카신이라는 인디언들의 전통 신발을 신고 있었다.

그를 한 학교에 감금한 상태에서 다음 날인 9일, 볼리비아 정부는 미국과 CIA의 지령을 받고 그를 살려두면 훗날 큰 화가 생길거라고 판단, 그를 비밀리에 죽이기로 낙찰을 본다. 하지만 당시 볼리비아에는 사형제도가 없어 대외적으로는 게바라가 전투 중 부상으로 숨졌다고 발표하게 된다. 그를 사형시킬 때 몇몇 병사들이 거부해 병사들을 억지로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뒤 총으로 쏘았다는 설이 있다. 그는 처형 직전 빈사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주저하는 집행자에게
"당신이 날 죽이려고 온 것을 알고 있소. 떨지 말고 방아쇠를 당겨라! 당신은 단지 한 사람을 죽이는 것 뿐이다!"[15] [16][17] 라고 일갈했다고 전한다.

체게바라 자체도 그렇지만 최후에 대한 부분은 루머와 정치적 왜곡이 개입될 수 있는 부분이므로 학술적으로나 토론에서 근거로 사용하고 싶은 분은 확실한 출처가 있는 서적과 자료를 통해서 확인한 뒤 판단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프레디 알보르타가 체 사후에 찍은 마지막 사진.

사후, 그의 죽음을 입증하기 위해 볼리비아 정부는 그의 손을 잘라 고향 아르헨티나 또는 카스트로에게 보냈다[18]. 그의 데드마스크는 날림으로 제작되어 불확실했고 얼굴 또한 이미 훼손되었기에 그나마 지문이 남은 손을 보낸 것이다.

그의 사체는 비밀리에 매장되었다가 1997년, 유족을 포함한 볼리비아/쿠바 합동 조사단에 의해 바예그란데의 어느 폐쇄된 활주로에서 발굴되었다. 이에 쿠바 정부는 추모 주간을 선포했고 대규모 국장 행사를 진행한다. 심지어 타클라라에 게바라를 추모하는 사원까지 생겨났다.

여담이지만 체가 체포되기 전 몇 명의 동지가 생포 당했는데, 프랑스의 철학자 출신 레지 드브레와 화가 출신의 시로 부스토스의 체포 후 행적은 논란이 되었다. 그간 알려진 바로는 드브레는 끝까지 불지 않았고 대신 화가 출신인 부스토스가 겁에 질려 상세한 게릴라들의 초상화를 그려줬고, 그 때문에 체가 죽었다는 평가가 있었으나, 그러나 부스토스의 자서전과 체의 전기 작가들에 의하면 반대로 드브레가 CIA에 핵심적인 정보를 제공한 배신자였고 부스토스는 일부러 3주 동안 거짓된 신분을 내세워 조사에 혼선을 가져다줬을 뿐 아니라 그려준 초상은 일부러 사실대로(...) 수염투성이 얼굴로 그려 알아볼 수가 없게 만들었다고 한다.[19]

후일 부스토스는 복잡한 남미의 정치 환경 때문에 30년형 수감 -> 좌파 정권 집권으로 석방 -> 우파 테러단체의 살해위협에 스웨덴에 망명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경향신문, 2013.07.10)

체 게바라는 공식적으로 두 번을 결혼했으며 총 6명의 자녀를 낳았다. 현재 그의 유가족들은 부친이 상품화되는 것에 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3. 대중 작품 등의 모습

뮤지컬 에비타에서 나오는 건 유명하다. 다만 본인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체'라는 인물로, 한국 연출을 제외하고는 직접 게바라로 그려지지 않으니 유의할 것.


그의 일생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의 예고편. 주연은 베니치오 델 토로.
체 게바라의 일생을 담은 영화이기에(정확히는 혁명 전/후 몇 년 동안만) 시간은 4시간 이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국내 개봉이 안되고 있다. 옆나라 일본에선 1, 2부가 DVD까지 나온 판인데...(이념 논란을 얘기하는 사람도 있으나, 체 게바라 평전도 나온 마당에 그럴 가능성은 없다. 실제 원인은 살 사람만 사는 한국 시장의 시궁창스런 환경이 제일 큰 문제.)

체 1부 DVD가 국내 출시예정이다. 다만 1DISC(...).

팬텀 하록의 수토수노툰에서도 등장. 마지막 장면에서 체로로(체 게바라+케로로)로 패러디 되었다.*

한편 체 게바라조차 모에화는 피해갈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변형(?)되기도 한다. 오, 미인이다... 자꾸 어딘가로 눈이 가는 건 좀 다잡고
다름아닌 체 게바라의 손녀 리디아 게바라(Lydia Guevara)이다. 위 사진은 채식주의 캠페인 홍보 일환으로 찍은 것이다.

러시아의 베스트셀러 작가 드미트리 글루코프스키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SF 소설인 <메트로 2033>과 <메트로 2034>에서는 체 게바라의 이름을 딴 붉은 여단이라는 이름의 세력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정식 명칭은 '제1차 인터내셔널 모스크바 메트로의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붉은 전투 여단'이다(길다, 길어.). 이들은 핵전쟁 이후 피란민들이 모여들어 생활하고 있는 모스크바 지하철에 공산 혁명을 일으키려고 한다. 이들은 레프 트로츠키와 게바라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는 세력들이라고 볼 수 있다.

메탈기어 솔리드 피스 워커에서 네이키드 스네이크의 모티프가 되었다. 작중에 체 게바라에 대한 언급이 다수등장하는데다 찬양 일색이며 이야기가 진행되어 갈수록 스네이크가 게바라와 동일시되어간다.


대략 이런식으로.

4. 평가

4.1. 상품화 된 혁명가 우상

결과론적으로만 보자면 그는 실패하고 단명한 비운의 혁명가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기는 사후에도 식을 줄 모르고 계속되었고 결국은 그를 불멸의 영웅으로 만들었으며 공산권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할리우드에서 세 번 씩이나 영화화가 되었으며[20] 다방면에서 상품화가 된 유일한 인물이었다. 논란은 있겠지만 프랑스의 철학자인 장폴 사르트르는 그를 '금세기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는 아직도 제국주의와 싸우는 제3세계 민족해방 투쟁의 상징이 되어 아직도 21세기를 살아가는 불멸의 투쟁가로 기억되고 있다.

최소한 엘리트 지식인(의사)이었던 사람이 모든 것을 버리고 총을 잡고 혁명에 나선 일이나, 혁명이 성공한 뒤에는 권력다툼이나 하고 부정부패로 재산 모아서 잘먹고 잘 살 궁리나 했던 동료들에 비해, 쿠바 혁명 성공 뒤에도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마지막까지 혁명의 최일선에서 싸우다 죽어간 고결함 만으로도 인기의 비결은 충분히 설명될 듯(쿠바에서 떠난 것을 권력다툼에서 밀려서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이었다면 쿠바에서 재산 잔뜩 챙긴 뒤에 중립국으로 튀어서 평생 편하게 호의호식하며 살았을 게 분명하다. 아니면 미국 같은 데로 망명해서 미국 정부의 보호를 받으며 카스트로 뒷담화나 까면서 회고록 팔아먹으면서 편히 살거나(...).

반자본주의를 주창하던 그였으나 훗날 자본주의자들에게 의해 상품이 되어버렸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실은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첫 번째는 그가 젊어서 죽은 데다 대단한 미남이었다는 것이다. 항상 군복에 수염도 깎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눈에 뜨일 정도였으니. 청년 시절 사진을 보면 어지간한 배우는 저리 가라 할 정도의 꽃미남이다. 또 다른 이유는 위의 별 붙은 베레모를 쓴 유명한 사진을 찍은 코르다가 그 사진에 한해 저작권료를 받지 않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아무나 그 사진을 써도 상관 없게 되었으니, 저항의 상징이자 젊은 순교자 이미지를 팔아먹으려는 전 세계 회사들이 앞다투어 그의 얼굴을 광고에 사용한 것이다. 체와 전혀 상관 없는 오스트리아스키 회사 Fischer에서는 "스키의 혁명"이란 문구로 체의 얼굴을 써먹었고, 은 입에 대지 않았던 체의 이름이 붙은 술도 나와 있다.[21] 스노보드 바닥에도 있고...국내에서도 게바라를 검색 엔진에서 치면 티셔츠 등 꽤 많은 상품이 올라온다. 심지어 축구공이나 속옷에까지 쓰이는 등 상업적으로 마구 쓰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얼마 전에 저작권자가 저작권 등록을 했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에, 그를 상업적인 아이콘으로서 써먹은 서구 기업가들에 의해 그의 이미지가 과대포장되었다."라며 인물에 대해 근본적인 부분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주장마저도 나오는 실정. 후일 체와 함께한 최후의 게릴라였던 부스토스가 체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젊은이에게 "그걸 왜 입나"라고 물어보자 대답을 못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체는 이미지가 되어 버렸다"는 게 전 게릴라의 씁쓸한 회상.

4.2. 긍정적 평가

옛날 한국에서도 군사/독재정권시대에 운동가를 비롯한 대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일대기를 가지고 다니다 걸리면 큰일나므로, 노트에 옮겨써서 신입생들이게 읽게 했었다. 지금도 체게바라 평론은 유독 잘 팔린다.

근래에 남미에서는 체 게바라가 신성시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특히 볼리비아에서 이런 현상이 강하며 남미 신문들은 아예 대놓고 게바라의 사진에 "성 체 게바라"라는 설명을 달아놓기까지 한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이런 추세면 수백 년 뒤에 게바라가 가톨릭의 성인의 반열에 오를 것이라는 예측을 하기도 하는데 과연? 하지만 정작 체 게바라의 측근들은 게바라가 성인 대접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좋지 않게 보고 있다고 한다. 거기다가 게바라는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에게 기독교를 믿으라 하자 거절할 정도였다. 공산주의자가 종교를 믿을 리가 있나.[22] 사실 엘살바도르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도 성인 시성을 추진하고 있지만 정치 참여 때문에 논란이 많다. 하물며 가톨릭 교회와 별 관련도 없었던 게바라가 성인으로 시성될 지는… 아무래도 성인에 오르는 일은 여러 모로 없을 듯 싶다. 다만 알포다에 따르면 체의 시체를 본 사람들은 모두 그가 예수를 닮았다고 하니 종교적 추앙은 지속 가능성이 있다.

5. 비판

체 게바라는 이상론에 급급한 이상론자였으며 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쿠바 중앙은행장으로 재직할 당시 무리한 국유화와 국고의 낭비로 쿠바 페소는 휴지조각이 되었으며 산업부 장관 시절 인프라 부족을 지적하는 학자들의 충고를 듣지않고 공업화 정책을 강행하다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다.

5.1. 반대파 학살과 정치범 수용소

그는 혁명 직후 반대파 숙청과 처형을 지휘했으며, 노동 수용소 건립을 책임지기도 했다. 또한 쿠바와 볼리비아, 콩고에서 혁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처형하기도 하였다.

한편, 그는 카스트로의 지휘로 라 카바나에서 치범 수용소를 건립했는데,[23] 거기에서 체는 소녀임산부권총으로 사살하기까지 했다는 주장도 있다.[24]# 사살했는지는 불명.

5.2. 볼리비아에서의 혁명 활동에 대한 비판

체 게바라를 생포한 유일한 생존자인 가리 쁘라도 장군은 게바라의 전술이 유치했다고 말했다. 왜냐면 그는 볼리비아를 쿠바와 동일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게릴라 전술이 실패했다고 했다.# 관련칼럼 기사

그가 말한 것에 따르면, 게바라의 게릴라 전술은 유치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게릴라 부대의 병력을 분산하여 양 부대 사이의 연락을 힘들게 했다. 그리하여 부대의 보급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결국 두 부대는 괴멸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군사 작전상 실패 이전에, 많은 사람이 - 심지어는 게바라 지지자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바로 게바라가 대체 왜 볼리비아에서 릴라전을 시작했는가이다. 게바라가 볼리비아 사정에 정통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에게 볼리비아란 여행 다니는 과정에서 거쳐간 곳에 불과했다. 게릴라전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현지화 전략이다. 정부군보다 지형과 지리적, 사회문화적 특색을 잘 알아야만 주민들의 지지를 획득하고 정부군보다 열등한 장비와 보급 속에서 효과적인 게릴라전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당시 볼리비아 정부는 미약하나마 토지 개혁을 추진중이어서 농민들은 정부를 뒤엎는 것보다 토지 개혁을 위해 정부를 지지하는 쪽이었다. 게바라는 카스트로의 포코 이론과 마오쩌둥의 혁명 전술에 따라 게릴라전을 지휘했으나 어느 전략으로 비추어 보든 볼리비아에서의 게바라의 작전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답이 나온다. 이 때문에 게바라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게바라의 볼리비아 혁명 활동에 대해 '자살 여행'이라고 비하하기까지 한다. 또한 게바라 지지자들조차 '남아메리카 한가운데에 위치한 볼리비아를 혁명기지로 만들어 남아메리카 각국에 혁명을 수출하려는 계획이었다'는 지극히 이상주의적 옹호 이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좌익의 입장에서는 게바라의 노선은 극좌모험주의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비판되고 있다. 게바라가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서두른 무장봉기 때문에 그 지역의 혁명조직은 깡그리 씨가 말랐으며, 자신도 목숨을 잃었다는점에서,이는 대표적인 좌편향 사례라고 좌파는 비판하고 있다. 이는 1930년대 중국 공산당의 리싼이 벌인 모험주의적 봉기와 비슷한 사례이다.

6. 명언


"네 자유와 권리는, 딱 네가 저항한 만큼 찾는다."

"나는 삶을 떨쳐버릴 수 없는 습관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불가능을 요구하자."[25]

"난 해방자가 아니다. 해방자는 없다. 민중이 스스로 해방하는 것이다."[26]

"시간은 어느 누구의 사정도 봐주지 않는다.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전사로서 내 미래에 대해 깊이 성찰한다. 그러나 당장은 타협하지 않겠다라고 결심한다."

"수단이 비열하다면, 결코 목적은 정당화 될 수 없다."

"나는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유 의지에 따른 신념의 소산이었다. 나는 68년 혁명을 함께 한 내 또래를 '메시아를 기대한 마지막 세태'로 본다."

"우리는 이론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해야할 것은 오직 행동이다."

"무릎을 꿇느니, 서서 죽는 것을 택하겠다."

"피델 카스트로에게 아메리카에서 영광스러운 혁명 성공의 그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전해주게. 내 아내에게는 재혼해서 행복하게 살라고 전해주게나."[27]

"폭군은, 폭군으로 변할 새 지도자로 대체될 뿐이다."

"죽음을 각오한 이 투쟁에는 전방이 따로 없다.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그 어떤 나라의 승리도 우리의 승리인 것처럼, 패배도 우리 모두의 패배다."

"침묵은 다른 방식으로 펼친 주장이다."

"혁명은 다 익어 저절로 떨어지는 사과가 아니다. 떨어뜨려야 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나를 모험가라고 부르겠지만, 나는 다른 류의 모험가다. 자기 의견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모험가다."

"무언가를 위해서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지 않는 한, 그것이 삶의 목표라는 어떤 확신도 가질 수 없다."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진정한 혁명가를 이끄는 것은 위대한 사랑의 감정이다. 이런 자질이 없는 혁명가는 생각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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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체 게바라 하면 딱 떠오르는 이 사진은 쿠바의 사진작가 알베르토 코르다가 1960년 3월 5 아바나 혁명광장에서 우연히 찍은 사진이다. 당시 라 쿠브르호 폭발 사건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모인 집회에서 찍었던 이 사진은 훗날 게바라를 상징하는 절대적인 아이콘으로 부상한다.
  • [2] 쿠바인이라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카스트로에 의해 특별히 법적으로도 쿠바 국민으로 되었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였고.
  • [3] 다만 이것은 오리지널 프로덕션의 경우로, 이후의 프로덕션에서는 게바라 대신 익명의 해설역이 등장하기도 한다.
  • [4]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대다수 지역에서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으나 이탈리아 및 스페인어권, 포르투갈어권 지역에서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이탈리아의 쥘 베른이라는 호칭까지 듣고 있는 이탈리아 출신의 모험 소설가. 여러 작품을 남겼지만 말레이시아를 배경으로 한 산도칸 시리즈와 앤틸러스제도 해적 시리즈가 가장 유명하다. 19세기 제국주의의 광풍이 휩쓸던 시대답지 않게 앤틸러스제도 해적 시리즈를 제외한 대다수 소설들의 주인공은 비백인종이고 백인은 악당이거나 취급이 좋아도 주인공의 조력자 정도였다. 비단 체 게바라뿐만 아니라 아옌데, 푸치니, 움베르토 에코 등등이 그의 애독자였고 특히 움베르토 에코는 그의 소설에서 여러 번 살가리를 언급했다. 참고로 살가리의 소설들은 그의 생전에 이미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나 비평가들에게는 받았고, 거기에 가난까지 겹치면서 살가리는 1911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 [5] 이것을 소재로 만든 영화가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다. 2011년 88살에 세상을 떠난 그라나도는 이 영화를 매우 호평했다.
  • [6] 포코 이론에 따라 쿠바 혁명 전쟁 당시 혁명군의 주요 임무는 전투가 아니라 주민에 대한 봉사와 이를 통한 지지였다. 쿠바 혁명 전쟁 중 게바라가 매우 뛰어나고 중요한 존재였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쿠바 빈농들에게 절실히 필요하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의료 봉사'를 제공할 수 있는 '의사'였다는 점이었다.
  • [7] 이 시절 새로운 은행 건물을 건설하고자 직원들이 새 건물의 청사진을 들고 왔을 때, 체 게바라는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있다며 매우 화를 냈다는 일화가 있다. 자신은 천식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안데스 산맥을 돌아다녔다고... 독종 눈에는 독종들만 보이나 보다.
  • [8] 카스트로가 회의 중 "여기서 경제전문가(economista)가 있나?"라고 묻자 게바라가 바로 자신이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카스트로는 "그럼 자네가 국립은행 총재일세."라고 말했는데, 사실 게바라는 공산주의자(comunista)를 찾는 줄 알았다고 한 일화가 있다. 이 일화는 사실이 아니고 당시 파격적이었던 경제 인사를 두고 나온 얘기다.
  • [9] 카를 마르크스는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발달 후 공산사회가 등장할 것이다'라고만 말했고, 블라디미르 레닌은 '자본주의 발달 후 노동자들이 폭력적인 방법을 통해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을 뿐이고, 이오시프 스탈린은 '있는 것 다 쥐어짜서 공업에 투입해 공산주의 사회를 만들면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심지어는 마오쩌둥조차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위해 '대약진운동'이라는 인류 역사상 초유의 병크를 터트린다. 이렇게 공산주의 국가들이 공업화에 목숨을 건 이유는 이론상 공산사회는 산업자본주의 사회 이후에 등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10] 라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혁명 전쟁이 시작될 때부터 사회주의자였으나, 카스트로의 정치 성향은 애매했다. 그래서 쿠바 혁명군은 공산주의 혁명군보다 반 바티스타 연합군에 가까웠다. 실제로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 지지자 중에는 극우부터 극좌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었고, 이로 인해 초기 혁명 정부 주요 인사가 타국으로 망명하는 사태가 심심찮게 발생했다. 미국은 바티스타 정권에 반대하고 사탕수수 농장 및 각종 산업시설의 국유화를 주장하는 카스트로에 대해 섣불리 공산주의자라고 규정내렸지만, 쿠바의 상황에서 누가 혁명을 일으키든 - 심지어 우파가 혁명을 일으켰더라도 국유화는 피할 수 없었던 것이었던 것이다.
  • [11] 볼리비아는 당시 남미국가로는 이례적으로 작농 비율이 높았다. 또한 하필 이 시기에 볼리비아는 자발적으로 지개혁이 진행 중이어서 당시 정권에 대한 농민의 지지가 매우 높은 편이었다.
  • [12] 생포직전에 옆에 있던 동료가 "그는 게바라 사령관이다. 예의를 갖춰라." 라고 말했다는 설도 있다. 확인바람
  • [13] 체 게바라 같은 이들이 롤렉스를 선택한 이유는 당시 시계 중 독보적인 견고함과 실용성 때문이었다. 쿼츠 시계가 실용화되고 널리 이용되기 시작한 것이 1970년대의 일이고, 이전에는 악조건에서 쓸만한 시계라고는 기계식 시계밖에 없었다. 그 중에서도 롤렉스는 튼튼함과 방수로 명성이 높은 시계였기 때문에 게바라가 롤렉스를 선택한 건 당연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는 인터뷰에서 롤렉스를 극찬했다. 달라이라마의 시계도 롤렉스. 항목을 참조할 것. 체게바라 알고보니 자본주의의 돼지였네라고 오해하지 말것
  • [14] 활동자금을 현금으로 소지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 시대 그 상황에서 계좌의 자금을 유용할 수는 없었을 테니...지폐의 위대함
  • [15] 그러나 아래 나오는 비판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체는 목숨을 구걸했다고 한다. "체 게바라의 진실을 알린다"라는 책을 따르면, 그는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이 가치가 있을 것이라 주장했고" 자신이 "재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말대로라도 전혀 목숨을 구걸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고 오히려 당당히 권리를 주장하고 협상을 하는 모습으로 보일 뿐이므로 다소 편향된 주장이라고 보인다. 안중근이 재판에서 스스로에게 포로지위를 인정해서 범죄자로 처벌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변론하였지만 누구도 이것을 목숨을 구걸했다고 하지는 않는다.
  • [16] 체의 부대원이였던 '다니엘 알라콘'의 진술에 따르면 살아 돌아온 자신을 두고 카스트로는 미심쩍어 했으며, 체게바라가 죽어서 소련과의 관계가 개선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 [17] 체 게바라를 쏜 병사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못 이겨서 끝내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얼마나 체 게바라가 지지를 받고 있었는지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부분.
  • [18] 체의 시체 사진을 찍은 사진사 알보르타의 증언에 따르면 손은 미국 CIA로 보내졌다고 한다.
  • [19] 이후 에우세비오와 칭골로라는 게릴라 대원이 체를 배신하고 체의 은신처로 CIA를 인도했으며, 이것이 직접적인 사망원인이 되었다.
  • [20] 처음엔 오마 샤리프가 게바라 역을 맡았으며, 스티븐 소더버그가 감독한 두 번째 영화(2부로 나눠져 있다.)에서는 베니치오 델 토로가 맡았다. 델 토로는 이 역으로 2008년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 [21] 코르다는 다른 상품에 그의 사진이 붙는 것은 반대하지 않았지만 이 술에 붙은 것만큼은 술을 절대 마시지 않은 게바라를 모욕하는 것이라면서 소송을 걸었다고 한다.
  • [22] 기본적으로 게바라는 무신론자였다. 적들에게 십자가에 처박히는 것보다는 십자가에 박으려고 하는 적을 처단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 [23] 그런데 쿠바 정부와 체 게바라에 옹호적인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자료들을 교차해보면 체 게바라가 공직자들의 태업을 체벌하기 위해 건립한 노동 수용소가 반대파들의 주장에 의해 정치범 수용소로 왜곡되어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 노동 수용소의 경우 본인이 공직자 자격을 사퇴하면 수용소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방식
  • [24] 라 카바나의 노동 수용소 성격이 위의 주석처럼 공직자 교화 용도였다면 애초에 소녀와 임산부를 살해했다는 주장 자체가 유효성을 잃게 된다.
  • [25] 이 말은 가장 유명하지만, 체 게바라가 말한 것인지, 최초의 문구가 누구의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이 문구가 알려진 계기는 프랑스 68 혁명 당시 하나의 구호로서 활용되면서 부터이며, 이를 장 코르미에가 평전 앞머리에 실으면서 더 유명해졌다. 프랑스어로 번역된 문장은 보통 Soyez réalistes, demandez l'impossible."이며, 영어로 직역하면 "Be realistic, demand the impossible."이다. 한국에선 "우리 모두 현실주의자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엔 불가능한 꿈을 품자."라는 버전이 돌아다니지만 원문을 상당히 의역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장 코르미에의 텍스트와 68혁명 기간의 기록들 뿐이며, 체가 한 말이라는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혹자는 'Médecin et homme politique argentin'라는 책에서 체가 썼다고도 하지만, 책 소개란에 체를 소개하면서 해당 문구가 실려있을 뿐 본문에 실려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해당 서적을 구할 수 있는 이는 확인바람. 채승병님이 페리스코프에서 해당 발언의 신뢰성을 지적한 적이 있는데, 지금 페리스코프가 먹통이라 링크를 걸 수가 없다...
  • [26] 비록 업적과 함께 만만찮은 비판받을 행동을 한 인물이긴 하지만, 이 어록들은 비정상적이리만치 순응하고 저항하는자를 린치하는 우리 주위의 현실과 비교해보면 씁쓸하다.
  • [27] 체 게바라가 죽기전에 남긴 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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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3 10:5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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