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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나라

last modified: 2015-04-11 20:57:38 by Contributors

중국 역사상의 나라 이름.

Contents

1.
1.1. 춘추전국시대의 나라
1.2. 진(秦)나라 말기 진승·오광의 난 때 세워진 정권
1.3. 진한(秦漢) 교체기에 등장한 나라
1.4. 동진시대 환온의 아들 이 세운 정권 환초
1.5. · 교체기 정권 주초
1.6. · 교체기 정권 임초
1.7. 당나라 이희열(李希烈)이 세웠던 정권 이초
1.8. 오대십국시대의 초나라(마초)
1.9. 금나라의 괴뢰 정권(위초 또는 장초)
1.10. 남송(鍾相)이 세운 정권 종초
2.

1.

양쯔강(강수, 장강) 중류와 수이강(한수) 일대에 있었던 나라들.
황하문명에 뿌리를 둔 은,주에 대비되어 장강문명을 계승해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하는 지역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춘추시대에 주나라의 제후국을 자처하지 않고 왕을 자칭하며, 스스로도 오랑캐로 자처하고 다른 주의 제후국으로부터도 그렇게 취급됐다는 등의 기록이 남아 있어 황하 유역과의 문화적 차이와 민족적 구별 의식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통일왕조 이 등장하고서야 중화문명에 확고하게 동화된 것으로 보인다.
춘추전국시대에 있었고, 진나라가 혼란스러워진 뒤 다시 등장했다. 이 시기에는 초나라가 중화 문명권이 아닌 '오랑캐 나라' 취급을 당한 경우가 많아서 비하적 표현들이 많이 전한다. 《맹자》에서 위(魏)나라 혜왕(惠王)[1]맹자에게 주변국에 털린 것을 거론하며 하소연을 할 때 "남쪽으로는 초나라에게 욕을 당했다(南辱於楚)"[2]고 했다든지, 항우원숭이에 비유 했다든지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1.1. 춘추전국시대의 나라

춘추시대에 남방에 위치하는 양쯔강 중류와 수이강 일대 지방인 형주를 다스리던 나라로 초창기의 수도는 단양.(현재의 베이성을 중심으로 일어섰다.)

주나라 성왕 때 웅역이 자작의 지위로서 봉토를 하사받은 제후국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 시작은 남방의 이민족 국가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창강(양쯔강) 이남은 밀림으로 뒤덮힌 이민족의 영역이었으며, 고고학적 발굴로도 초기 초나라의 유적이나 유물은 묘족의 나라였음이 강하게 암시되고 있다.

중원에 위치하는 국가들로부터 남방의 오랑캐로 불려 무시를 당하여 형만(荊蠻)이라 하였으며 각종 사서의 기록을 보면 이들을 멸시하는 의미로 형(荊)나라, 형초(荊楚) 등으로 쓰인다. 사실 초나라의 경우 지리적 위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원래부터 중원 국가가 아니라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한 중화문명이 전파됨에 따라 중화문명권에 편입된 국가이다.

따라서 제후직을 하사받았다는 말도 중원에서의 권위와 명분을 얻기 위해 후대에서 끼워맞췄을 가능성이 있으며, 실제로 주나라 소왕때는 초를 정벌하러 나갔다가 배가 침몰해서 물에 빠져죽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초창기에는 형주의 서부 즉 삼국지에서 이릉으로 칭해지는 곳이 중심지였다. 이릉이라는 이름의 유래 자체가 이족의 능묘라는 뜻으로, 초나라 왕실의 사직이 있던 곳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왕을 칭하여[3] 주변 나라들을 복속시키며 세력이 강성해졌고 서서히 북으로 진출하며 수도를 영으로 옮긴다.

성왕 때에 이르러 세력이 크게 성장하여 (晉)과 같은 강대국과 겨룰 정도였지만 끝내 진(晉)을 이기지는 못하였고 그 대가 흘러 장왕 때에 이르러 크게 강성하여 패권을 잡게된다.

그러나 춘추시대 후기에 이르러 (吳)나라의 공격으로 수도를 약으로 옮기기까지 할 정도로 쇠퇴하였으며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越)을 멸망시키고 세력을 회복하지만 (秦), (齊)의 국력을 따라가지 못하고 진(秦)의 압박을 받아 수도를 진으로 옮겼다가 이후에는 거양으로 천도하고 또다시 수춘으로 천도하였다가 기원전 223년에 진(秦)나라의 공격으로 초왕 부추가 생포당하면서 멸망한다. 이후에 항전 등이 난릉성에서 항전하지만 이 또한 진(秦)에게 격파된다.

이렇게 끈질기게 저항했음에도 불구하고 멸망한 것은 이 시대쯤에 이르면 초나라도 역사가 오래돼서 현실에 맞지 않는 각종 구습이 존재하여 효율적으로 군대를 운용하는데 엄청난 걸림돌이 된데다가 진나라와의 장기간의 소모전에서 진의 심장부로 원정을 갔다가 군대를 말아먹는 등 정예병력의 손실이 커서 이걸 단기간에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진에게 멸망하긴 했으나 춘추전국시대를 통털어서 강력한 국가 순위를 따지면 반드시 3위 이내에 드는 국력을 자랑했으며, 영토의 너비로만 본다면 1위다. 물론 양쯔 강 이남의 개발이 미진하여 영토에 비해 국력이 낮았다. 덕분에 진나라에게 밀리기 시작할 때도 타국과 달리 수도를 계속 이전하면서 상당기간 버틸 수 있었으며, 진나라는 국운을 걸고 주력군을 모아서 초나라와 결전을 한 것도 모자라서 장기간의 토벌전 끝에 초나라를 멸하고서야 사실상 전국시대를 마감지을 수 있었다.

역사에 만약이란게 있을 수는 없지만, 초나라가 진나라의 낚시질에 넘어가지 않고 합종책에 보다 치중했더라면 진나라가 통일하지 못했을거라는 주장도 있을만큼 초나라의 입지가 막강했다. 그러나 정치가 국력에 비해 심히 막장이라 진나라의 간계에 번번히 넘어가 다른 제후국으로부터 신의없는 나라로 낙인찍혀버렸고, 그것이 진나라의 통일을 불러들였다.

이들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4] 알 수 있는 일화가 장의의 상어육백리라는 성어에서 드러나는데, 초회왕이 600리의 땅과 진나라 공주를 바칠테니 제나라와 연을 끊으라는 장의의 말에 줄지 안줄지도 확인 안하고 일방적으로 제나라와의 연을 끊고 장의가 차일피일 약속을 미루면서 정말 제나라와 연을 끊었는지 의심쩍다는 모습을 보이자 사람까지 보내 제나라를 모욕하기까지 해서 제나라가 진나라와 손을 잡게 만들었고, 나중에 장의에게 땅을 줄지 안줄지 추궁하자 '그거 내 땅 6리 주겠다는 얘기였음 ㅋ' 라며 입을 싹 씻어버렸다. 이 회왕이란 작자가 얼마나 호구인지, 나중에 진나라가 땅을 줄테니 화친하자는 말에 땅은 필요없으니 장의를 내놓으라 했고, 장의는 주저없이 적지로 들어가서는 언변으로 주변을 설득해서 피 한방울 안흘리고 돌아왔다. 후에 진나라가 혼인으로 연을 맺자면서 회왕에게 진나라로 방문할 것을 요구했는데,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갔다가 인질만 되고 초나라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죽고만다. 굴원이 애통해 할 만도 하다.

단 영토만 놓고 보면 안되는 것이, 장강 유역은 당시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개발이 덜 된 지역이었고, 코뿔소, 코끼리 등이 공존하던 시절이었음을 유의해야 한다. 제나라, 한나라(韓)과 같은 국가들은 영토는 작았지만 대부분이 농토로 개발되고 인구가 거주할 수 있는 지역이었던 반면에, 초는 (陳), 영(郢), 오월의 옛 땅 등 넓은 영토에 몇몇 대도시 위주의 거점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백만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국력을 가졌음에도 힘을 밀집시키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면모를 따지고 보면 초나라의 저력이 상당함을 알 수 있는데, 이런 힘을 바탕으로 해서 독자적으로 주변 이민족들에 대한 정벌을 단행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지역과 그 밑의 운남지역이 중국의 문화권에 최초로 들어갔다. 특히 운남지역의 경우 정벌을 위해 쳐들어간 초의 병력과 장군 '장교'(莊蹻)가 진나라가 촉 지역을 점령함에 따라 돌아갈 길이 막히자 현지에서 자립해서 전나라(滇)를 수립하여 사실상 운남지역에서 최초로 국가를 수립한 역사를 만들기도 했다. 전나라는 한나라(전한) 무제 때까지 독립 왕국으로 존속했다.

이 때문에 진나라(秦)를 반대하는 세력들이 내건 대의명분중 하나가 초나라를 재건하자랄 정도로 통일왕조인 진나라에 저항하는 세력의 사상적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진시황의 폭압이 절정에 달하던 시대 단 세가구[5]만 남더라도 진을 멸망시키는 사람은 반드시 초나라 사람이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결국 진을 멸망시킨 항우도, 그 뒤를 이은 한고조 유방도, 항우를 물리친 일등 공신인 한신도 결국 초나라 출신이다. 유방의 출신지는 강소성 패국(沛國) 풍읍인데, 이 곳은 전국시대 초나라의 영토이다. 다만 위나라 출신인데 초나라로 옮겨온 것이라는 이야기는 있다.

1.2. 진(秦)나라 말기 진승·오광의 난 때 세워진 정권

진승오광진나라에 반란을 일으키면서 선포한 나라를 초나라라고 하였다. 장초(張楚)라고도 하는데, '장대한 초나라(張大楚國)'라는 뜻이다.

1.3. 진한(秦漢) 교체기에 등장한 나라

진나라 말기에 세워진 나라로 춘추전국시대의 초나라 명장이었던 항연의 후손인 항량과 항우가 초나라의 부흥 기치를 내걸고 세운 나라로 범증의 진언에 따라 초나라 왕의 후손을 찾아내 황제로 옹립해 세운 나라이다. 이 황제가 바로 초나라 의제이다. 의제를 모실 동안에 한하여 후초(後楚)라고도 한다.

일단 진(秦)나라에 저항해서 일어난 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실제로 이를 바탕으로 진나라를 무너뜨리는 데까지는 성공하였지만, 애초에 항우가 세운 허수아비 정권에 불과했으므로 유방을 상대적으로 옹호했다는 이유만으로 항우가 자신이 올려놓은 의제를 살해[6]함으로써 붕괴되었다.

의제를 추대한 항씨 세력을 이끄는 항우는 명목상 황제인 의제를 모시면서 자신은 '서초'(西楚)라는 제후국의 패왕을 맡는 형식을 취했다. 서울은 원래 우이(盱眙)에 있었으나, 항우의 18제후왕 분봉에서 의제를 소외시킨 항우가 침(郴)으로 몰아냈다. 의제가 항우에게 살해당한 뒤에는 항우의 서초가 명실상부한 유일한 초나라로 행세한다. 서초의 서울은 팽성(彭城)이다.

1.4. 동진시대 환온의 아들 이 세운 정권 환초

환초(桓楚)라고도 한다. 실제 존립 기간은 403~404년이지만 405년까지 그 일족이 황제를 칭하진 않으면서 반란을 일으키곤 했다.

역대 군주·지도자는 다음과 같다.

  • 태조(太祖) 선무황제(宣武皇帝) 환온(桓溫: 추존 황제). 생몰년 312~373.
  • 무도황제(武悼皇帝) (桓玄). 연호 영시(永始), 생몰년 369~404, 재위 403~404.
  • 신안군왕(新安郡王) (桓謙). 연호 천강(天康). 생몰년 ?~410, 재위 404~405
  • (桓振). 생몰년 ?~405. 반란군을 이끈 해 405.
  • 석수(桓石綏). 생몰년 ?~405. 반란군을 이끈 해 405.

환진과 환석수는 기간이 겹친다.

1.5. · 교체기 정권 주초

주찬(朱粲, ?~621)이 세운 단명 정권(615~619)으로 다른 초나라와 구분하여 주초(朱楚)라고 한다. 사용했던 연호는 창달(昌達)이다.

1.6. · 교체기 정권 임초

임사홍[7](林士弘, ?~622)이 세운 단명 정권(616~622)으로 다른 초나라와 구분하여 임초(林楚)라고 한다. 사용했던 연호는 태평(太平)이다.

1.7. 당나라 이희열(李希烈)이 세웠던 정권 이초

당나라의 회서절도사(淮西節度使)였던 유희열 이희열이 황제를 칭하고 세운 단명 정권(784~786)으로 성을 따서 이초(李楚)라고도 한다.

1.8. 오대십국시대의 초나라(마초)

마초#s-3 참고.

1.9. 금나라의 괴뢰 정권(위초 또는 장초)

북송이 망할 때 금나라가 현재의 (邯鄲)인 대명부(大名府)를 수도로 하여 세운 단명 괴뢰 정권이다(1127년). 가짜 초나라라는 뜻으로 위초(僞楚), 또는 성씨를 따서 장초(張楚)라고도 하는데, 진승·오광이 세운 초나라를 부르는 명칭과 똑같다. 뜻은 다르지만...

금나라는 한족이 사는 지역을 그대로 통치할 자신이 없어서 한족 괴뢰 정권을 둘 세웠는데, 하나는 이 초나라이고, 다른 하나는 제나라이다. 금나라는 북송의 신하인 방창(張邦昌)을 협박하여 강제로 초나라 황제로 책봉했다. 당시 금나라는 황제가 되기를 거부하는 장방창한테 "변경(북송 옛 수도)이 피바다가 돼도 상관 없다 이거지?"라고 협박했다. 장방창은 할 수 없이 억지로 제나라 황제가 됐다가 금나라 사신이 돌아가자 남송으로 도망쳐서 이 나라의 건국은 취소되었다(...). 제나라의 황제였던 유예(劉豫)가 어쨌든 끝까지 괴뢰 역할을 한 것과 비교된다.

1.10. 남송(鍾相)이 세운 정권 종초

다른 초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성씨를 따서 종초(鍾楚)라고도 한다. 북송이 망하고 남송이 들어서던 혼란기에 생겼던 단명 정권이었다(1130년).

2.


춘추시대의 나라. 삼황오제의 하나인 신농씨의 후손으로 주나라 무왕이 봉한 나라라고 하나 삼황오제는 진위여부가 확실치 않기에 어떻게 세워졌는지는 불분명하다. 성은 이기(伊耆), 작위는 후작이었으나, 주나라 유왕 때 나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참고로 주나라 무왕은 요(堯)의 후손을 계(薊)에 봉했는데 마찬가지로 삼황오제는 진위여부가 확실치 않기에 어떻게 세워졌는지는 불분명하다. 이 계나라는 춘추 중기에 나라에게 멸망했는데 계나라의 도성은 이 후 연나라의 수도 계성이 됐으며 삼국지 시리즈에도 나오는 계가 바로 계나라의 도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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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맹자》에서는 양혜왕(梁惠王)이라고 표기돼 있다. 당시 위나라의 수도가 대량(大梁)이었기 때문.
  • [2] 초나라에 비하적 태도가 자리잡고 있으니까 이렇게 '욕을 당했다'고 표현한 것이다. "고작 '오랑캐' 따위한테 지다니 정말 치욕스러워 미치겠다!" 이 정도의 뉘앙스인 셈.
  • [3] 춘추시대 중원의 나라들은 주나라를 업신여기더라도 감히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지는 않았는데 남방의 '오랑캐' 나라인 초나라, 오나라, 월나라는 그에 구애 받지 않아서 당당하게 왕을 칭했다. 이때 문정(問鼎)의 고사가 나오기도 했다.
  • [4]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은 주의해서 들어야 하는 게, 춘추전국~진·한 교체기에는 특정 국가에 대한 당대인들의 비하적 인식들이 녹아 있는 기록들이 굉장히 많다. 요즘으로 따지면 인종차별이나 지역드립급이다. 참고로 당시 초나라 외에 자주 비하됐던 망국 하나라의 후예 기(杞)나라, 역시 망국인 상(은)나라의 후예 송나라가 있다. 기우(杞憂) 같은 기나라의 고사나, 송양지인(宋襄之仁)이나 수주대토(守株待兎) 같은 송나라의 고사들은 하나같이 덤 앤 더머급 고사인데 이것은 당시 중원에서 '바보 동네' 취급을 당해 유독 저런 이야기들이 오늘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다(...).
  • [5] 이 세 가구는 수사적으로 초나라의 유력한 왕족 가문인 굴씨, 경씨, 소씨 세 집안을 나타낸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 [6] 이 것을 가져다 세조를 비판했다고 문제가 된 것이 바로 김종직의 '조의제문'으로, 무오사화의 배경이 된다.
  • [7] 문서 없음. 조선시대의 임사홍(任士洪)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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