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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정통론

last modified: 2015-04-07 11:35:43 by Contributors

蜀漢正統論

Contents

1. 개요
2. 역사가들의 견해
3. 당시의 맥락
4. 정통성 논란
5. 모범적(?) 선양
6. 선양의 한계
7. 자치통감 논쟁과 삼국지연의
8. 결론

1. 개요

촉이 한나라의 정통 계승자라는 주장.

유교가 주요한 통치이념이 되는 중국과 한국에게 있어서는 어떤 왕조가 정통성을 가지고 있고 어떤 왕조는 그렇지 않은가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보통 이 정통성은 진(통일왕조)-한나라-수나라-당나라-송나라-(원나라)-명나라-청나라로 이어지는 통일왕조를 말하게 되며 후한 멸망 후의 정통성은 당연히 삼국을 통일한 서진에게 정통성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여기에 여러가지 복잡한 사정이 개입하면서 삼국시대에 한나라의 정통을 어느 국가가 이었는지에 대하여 논쟁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즉 한나라와 서진 사이에 정통성을 이어준 나라가 인가 촉한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 것.

2. 역사가들의 견해

처음으로 삼국시대 역사를 기술한 역사서인 정사 삼국지에서 진수는 위나라 군주만을 황제로 칭하며 그들의 연호를 연도 기준으로 삼고, 촉한의 군주인 유비유선은 각각 선주와 후주로, 동오의 군주는 이름으로 부르면서 차별을 명확히 하며 위-진을 정통으로 삼았다.

그러나 서진이 창립자인 사마염부터 사치와 낭비를 일삼았고, 황제뿐 아니라 그 밑의 신하들인 석숭이나 왕개의 돈지랄 배틀같은 병크로 대표될 정도로 횡포가 심하여 민심을 잃고 있던 상태이며 결국 팔왕의 난 같은 각종 병크를 저지른 끝에 중원을 이민족들에게 빼앗기고 장강 이남으로 도망쳐 동진이 건국되는 오호십육국시대가 시작되었다. 동진은 이민족 왕조에 비해 국력에서 열세에 있었고 내정면에서도 권신인 환온-환현 부자가 국정을 전횡하면서 선양까지 노리는 상황이었다.[1]

이러한 분위기에서 환현이 한-위-진의 전례에 따라 선양받으려는 계획을 부정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촉한정통론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한나라 헌제조비한테 선양해준 건 진짜 정통성을 부여한 게 아니다. 왜냐면 유비가 파촉에서 다시 한을 건국하면서 정통성이 거기로 갔기 때문. 그러니까 서진이 정통성을 이어받은 건 사마염조환한테서 선양받아서가 아니고 사마소촉한을 항복시켰기 때문임. 그러니까 환현이 한-위 선양을 본받아서 황제가 되려는 것도 다 뻘짓'이란 얘기다.그리고 후에 동진으로부터 선양받은 유송이 성이 유씨라는 점만 내새워 촉한의 계승지라 한다.

이러한 논리를 따르는 촉한정통론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습착치가 지은 진춘추였고, 여기에서 후한의 정통성을 촉한이 이었고, 그 촉한의 항복을 받은 서진이야말로 후한의 정통성을 이었다는 것이다. '위진춘추'가 아닌 '한진춘추'를 책의 제목으로 삼은 것이 이러한 까닭이다.

한편 북조에서는 진나라를 장강 이남으로 쫓아낸 흉노 출신 유연이 한왕조의 후계자를 자칭하면서 나라 이름도 한으로 지어버리고[2] 유선에게 새로 시호를 지어올리고, 유비를 한고제 유방과 광무제 유수와 동격으로 삼아 제사를 올리는 등 북조에서도 남조의 촉한정통론과는 별개로 자연스럽게 촉한을 한의 후계로 인식하게 되었다.

물론 위와 진과 병립하던 왕조는 물론 손씨의 오나라도 존재했으나 한나라와는 연결점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고작해야 남북조시대 왕조(오-동진-송-제-양-진, 소위 육조)의 정통으로 보는 일부 견해 외에는 철저히 묻혔고, 반면 촉한은 왕조를 창립한 유비가 한나라 황실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명분을 지니고 있었다.

전제군주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현대 사학계에서는 촉보다는 위와 진을 한의 정통 계승자로 본다. 저 시기를 왜 위진남북조시대라고 부르는지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듯.

3. 당시의 맥락

역사적으로 촉한정통론은 후한말의 한실부흥이라는 명분론에 맥이 닿아 있다. 이렇게 한실부흥에 집착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은 한나라의 독특한 역사적 위상 때문이다. 전설적인 은, 주를 제외하고 매우 잠깐 존재했던 통일 진나라를 제외하면, 한나라는 역사상 중국인들이 경험한 실제적인 첫번째 통일왕조였으며, 그 건국과정도 매우 신화적이고 상징적이었다. 한실은 전한 후한 합쳐 400여년간 지속되었으며, 초한대전으로 상징되는 건국신화는 당시 중국인들에게 "유씨만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일종의 신념을 만들었다. 전한-후한이 가까스로 이어졌듯이, 촉한도 후한을 이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당장 삼국지연의에서도 오나라에 사신으로 간 진밀장온의 논쟁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이러한 생각들이 다음 시대로 너머가면서 자연스레 촉한정통론에 영향을 끼쳤다.

4. 정통성 논란

진수정사 삼국지가 나온 후로 삼국 중에서 조조의 위를 정통으로 보는 시각이 상당히 우세했다. 고려의 금석문에서도 왕건의 업적을 조조에 비유하면서 '원흉을 없앴다'라 언급하는 것을 보면 그러한 위 정통 사관은 상당히 오래된 듯하다. 다만 진수의 정사 삼국지는 위를 계승한 진 시대에 나온 서적이고, 때문에 조조를 정통으로 취급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 정도는 감안하여야 한다. 위의 행적들에서 언급되었듯이, 후한 말에 조조를 보는 시각이 딱히 좋았던 것은 아니다.

위 정통 사관이 무너지고 촉이 부각된 것은 본격적으로 대두된 건 대체로 북송의 속문학으로부터 시작된 것 같다.[3]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강담사가 말하는 것을 보고 유비가 이기면 환호성을 지르고, 유비가 패해서 도망가면 눈물을 흘리는 백성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 있음을 보아 알 수 있다.[4]

이것을 역사관으로 정립한 것은 주희의 자치통감강목으로서, 이 시기부터 비로소 촉 정통 사관이 완전히 역사의 영역에 자리 잡게 되었으며, 이후 삼국에 대한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런 정통을 중시하는 사관이 생겨난 건 무엇보다도 북송의 특별한 위치에 기인한다고 보기도 한다. 당시 북송은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를 상국[5]으로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정통성에 민감했다. 말하자면 위나라에 비해 약하지만 한실의 후예였던 촉나라와 정통 한족국가인 송나라의 처지를 투사하면서 "우리는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의식이 이러한 역사관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한편, 사마광자치통감에서 '구주를 통합해 하나로 통일한 거라 보지 않으면 천자의 이름은 유명무실하다. 어떻게 구석의 한 나라를 정통으로 삼고 나머지를 감히 가짜라 부를 수 있느냐?'라 하였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각자 아전인수로 위 정통이나 촉 정통이라고 주장하지만, 사마광이 주장한 것은 실상 삼국 중에서 정통이 따로 없다는, 즉 무통에 가깝다. 다만 편의상 연대 표기만 위진의 표기를 빌렸다고 밝히고 있다.[6]

이후 성리학이 득세하자 죽 유비나 촉을 정통으로 쳐주는 분위기가 일반적이었다. 여기에는 천신으로까지 승격된 관우 신앙도 한몫했을 것이다.

현대에 들어와서 과거의 성리학적 역사관을 벗어난 중국 사학계는 일단 조조를 쳐주는 분위기다. 현대 중국문학의 대가이자 스스로도 정치가였던 궈모러(곽말약)은 "조조를 찬탈자라고 하는데, 이는 옳지 않다. 체제의 정통성은 황제의 혈통이 아니라 체제가 백성을 위해 어떤 일을 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조조는 후한말의 혼란과 무질서를 수습하고 여러 정책을 시행하여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했다. 이것이야말로 정통성의 근거가 아니겠는가."라는 평을 했다. 그러나 조조가 백성들을 학살했고, 조조가 시행한 정책들은 어디까지나 조조 자신의 세력 확보와 유지를 위함이 목적이지 백성을 정말로 구하려고 했냐고 보기는 모호한 감이 있긴하니 이 또한 애매한 문제이긴 하다.[7]

5. 모범적(?) 선양

전근대적 전제군주제 시대의 역사관이었던 촉한정통론은 진리처럼 받들며 현재 중국 사학계에서 절대다수 의견인 조위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특히 연의의 영향으로 한-위의 선양을 천하에 다시 없을 역적질로 매도하며 유비는 한실을 수호하려던 충신으로 떠받든다. 하지만 헌제의 선양은 비교적 평화적이고 세련된 형태로 이루어진 편인데, 이는 헌제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에 근거한다. 심지어 조비보다 장수하며 자손 대대로 공작을 물려받아 생활했던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오히려 유비가 칭제했을 때 헌제는 생존한 상태였다![8]

물론 동승, 복완의 조조 암살 기도 등으로 헌제가 조위에게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조비가 왕위에 오르자마자(220년 10월 28일) 선양(같은 해인 220년)을 받은 것으로 미루어 모양새만 좋게 해놓고 실제로는 강제성을 띄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하지만 왕조의 교체과정에서 표면적인 모양새라도 좋게 유지한 경우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상대적으로는 역시 평화로운 교체였다고 볼 수 있다. 그나마 이게 어디야 또한 이후 조환에게 선양을 받은 사마염의 위 -> 진의 교체 역시 평화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두 사례를 모범적인 권력승계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조환 역시 위나라 치하에서의 헌제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265년에 양위하여 303년까지 진류왕으로서 생존하였다.)

물론 신하가 군주를 배신한 것은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위진의 건국은 구왕조로부터 정당성을 물려받는 선양을 통해 이루어진 역성혁명의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물론 구왕조라고 좋아서 군주권을 넘겨줄 리야 없겠지만 사회에 대한 통제력을 잃은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 질서를 건립하는 일을 무조건적으로 찬탈이라 비난할 수는 없다는 것이 현대의 사관이다. 전근대 시절에는 "만약 조위가 찬탈하지 않았으면 한은 더 지속될 수도 있었다"라는 논리가 통할 수 있었지만 또 또 if 놀이 현대에 이르러서는 그다지 가치가 없는 주장이다.

촉한정통론이 대세가 된 것은 주자 등이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해 조위를 비판하고, 이것이 외침이 잦았던 송대의 시대적 상황과 결부되어 국수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된 탓이 크다. 게다가 명분론에 입각해도 역시 선양이 비교적 모범적이었던 탓에... 모법적으로 볼수 있나는 의문이지만 이 주장은 오히려 '너희는 아무리 정권이 막장이어도 절대 왕조를 배신하면 안된다'라는 역성혁명을 금기시하는 전제군주적인 통치 이데올로기에 가깝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때문에 전제군주제를 타파하고 민주공화정이 들어선 현대에 와서 촉한정통론이 밀려난 것이다.

6. 선양의 한계

조조가 헌제에게 잘 대해 주었다거나, 나라가 힘을 잃어 더 이상 통치할 여력이 없어 보여 어쩔 수 없이 선양받았다는 식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한 논리이기도 하다. 권신과 선양을 통한 새 왕조의 창업자라는 두 명칭 간에는 극명한 온도차가 있고, 어느 한 쪽의 주장을 섣불리 받아들이는 대신 양쪽을 신중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조비의 선양은 5호 16국이라는 난세로 이어졌다는 면에서 낮게 평가받지만, 명분은 행위 이전에 행위를 가능하게 했던 요인들이지 선양 이후 백수십여 년간 벌어진 인들로 선양의 명분을 논하는 것은 논리적 오류이다. (그런 식의 평가라면 '선양의 의의'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비록 선양을 받아 신왕조를 수립한 위,진나라가 삼국 통일후 금방 멸망하여, 조위의 선양이 오호십육국이라는 난세가 발생하는데 크게 기여한 사건중 하나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선양 당시 조비 치하의 위는 후한 말의 혼란기보다는 적어도 더 안정되어 있었고 국가의 기틀이 다져지고 있던 단계였다.

헌제 항목에서도 지적되었듯이 후한말 황제는 평균 14살에 즉위하여 29세에 폐위 되었을 정도로 어린아이 앉혀놓고 머리 좀 굳으면 폐위할 정도로 실권이 적었다. 조조가 헌제를 이용한 것 역시 그 연장선 상에 있으며, 도덕적이라고 볼 수도 없지만 딱히 기존보다 더 비도덕적이라고 말할 것은 되지 않는다.

다만 조조가 헌제에 대해서 개인적인 호의를 가지고 행동한 것은 아니다. 그의 두 아들은 조조에게 독살당하여 죽었고, 복태후는 헌제의 아이를 밴 상태에서 죽었으며, 일가는 대부분 조조에 의해 살해되었다. 조조의 행적은 충분히 권신적인 성격의 것이며, 이 부분은 도덕적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왕조 멸망기의 황제는 무능한 경우가 많지만, 헌제는 재위기간 내내 꼭두각시에 머물렀고 제대로 된 통치를 할 기회는 단 한번도 없었으므로 애초에 유능한지 아닌지를 알 수 없었으므로 그에게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주지 않은 것, 또한 도덕적으로 비판할 수 있다. 굳이 찾아보자면 그가 산양공으로서 매우 어질게 통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는 하다.

어찌되었건 왕조의 교체기에서 선양이라는, 비록 일가 친척과 임산부[9]를 포함한 부인, 아들은 살해했지만 정작 본인은 살려 주었다는 면에서 비교적 기존보다 피를 덜 흘리는 좋은 선례를 남긴 것은 당대에 있어 충격이었고, 이는 끝내 유비가 멀쩡히 살아있는 헌제를 죽었다고 선포하며 황위에 즉위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평가는 개인의 몫이지만, 시기가 3세기라는 것을 고려하자.

7. 자치통감 논쟁과 삼국지연의

북송사마광자치통감에서 삼국 중 어느 나라도 통일왕조가 아니었기 때문에 정통으로 보지 않는다는 무통설을 내세웠다. 다만 연도기준을 삼기 위해 편의상 위의 연호를 사용한다는 것을 명시했는데, 이 때문에 촉한정통론을 지지하는 학자들로부터 소극적으로나마 위정통론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10]

하지만 송나라가 금나라에 쫓겨 강남으로 옮겨 남송이 된 후 촉한정통론은 다시 힘을 얻게 되었다. 바로 여진족이 세운 금을 북조로, 남송을 동진으로 동치시키는 경향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주자는 자치통감의 사론을 맹렬히 비판하면서 통감을 다시 춘추필법에 따라 재편집하여 자치통감강목을 지어 촉한정통론을 강력하게 주장하게 되었다. 이후에 등장한 역사서들도 주자가 창립한 성리학의 영향을 받아 대부분 촉한정통론을 따르게 되었고,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조선사대부 계층 역시 촉한정통론을 받아들여 이에 대한 반론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

한편으로 원말 나관중이 지은 삼국지연의는 촉한정통론을 학계를 넘어 민간에까지 확산시킨 결정타가 되었다. 이전까지 민중들의 지지를 받던 삼국지평화의 유관장 삼형제의 캐릭터는 나관중본과 청나라대의 모종강본 연의로 발전함으로써 유비와 촉한 세력을 완전히 한나라의 후계로 보는 인식을 확고하게 만들었다.

8. 결론

결국 촉한 정통론은 정치적인 목적에서 탄생하게 되었고, 여기에 북방 민족의 대두로 위협을 느낀 한족의 방어적 중화사상이 더해져 탄생한 것이다. 위정통론을 잘못 이해한 몇몇 사람들이 진나라까지 정통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촉한정통론이 진나라의 무능함 때문에 등장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중국사의 정통론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애초에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는가의 여부가 정통성을 판별하는 데 절대적인 고려 대상인 것은 아니었다. 정사를 편찬한 중국의 역대 역사가들은 서진과 동진을 엄연히 한나라의 뒤를 잇는 정통성 있는 왕조라고 인식해왔다.

진나라가 한족의 역사에서 매우 실망스러운 정권이긴 하지만, 촉한의 말기는 그 진나라보다는 낫다고 쳐도 실망스럽기는 똑같기 때문에[11], 진나라에 대한 실망으로 촉한정통론이 퍼졌다는 말은 말이 안된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진나라 실망론으로 인한 촉한정통론"은 한국의 삼국지 팬덤에만 잘못 알려져 있는 설이며, 정작 중국에서는 송나라시절 삼국지 설화가 만들어질 당시, 전적으로 성리학의 명분론과 결합되어 형성된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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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결국 환현이 사마덕종에게서 선양을 받아 황제가 되었다가 유유가 이를 토벌하고 나서 다시 선양을 받아 송을 건국하면서 동진은 멸망한다.
  • [2] 물론 한이라는 국호는 유연 사망 후 '조(趙)'로 갈렸다.
  • [3] 동진의 습착치의 한진춘추에서 처음 보이기는 하지만, 확실히는 대두된 것은 그 이후부터다.
  • [4] 소동파도 비슷한 이야기를 전한다.
  • [5] 군신관계는 아니지만 숙질관계 정도였다고 한다.
  • [6] 촉 연표로 따지면 살짝 빠지는 게 있다.
  • [7] 그 반론으로, 조조가 군벌시절에 학살을 저지르기는 했으나, 어쨌든 질서를 잡은 다음에는 영제시절의 후한 말기보다야 훨씬 질서가 잡혔다.
  • [8] 나본 선생(나관중)도 이게 영 찝찝했는지 유비의 칭제에 앞서 헌제를 죽여 버린다.(...) 실제로도 촉서 두미전의 기록을 보면 제갈량이 224년 두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조비가 헌제를 죽였음"이라고 하는 구절이 있다. 헌제는 234년까지 생존해 있었으므로 제갈량이 사실을 잘못 알고 있었거나, 유비의 칭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실을 곡해했다는 말이 된다.
  • [9] 다만 복황후의 경우는 복황후가 먼저 조조를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아무 죄없는 부녀자를 살해한 것이 아닌, 서로 정적이었던 관계다. 또한 동귀인 역시 아버지인 동승이 조조 암살에 연루되었기 때문에 처형된 것이다.
  • [10] 이는 해당 사론 안에 촉한에 대한 서술 중 '유비가 한을 이었다고는 하나 혈통에 의문점이 있다'는 식의 내용도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 [11] 너무 쉽게 망해서 사마소가 놀랐을 정도다. 원래 위군은 강유가 주전력을 보전하여 검각으로 간 뒤 이를 돌파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당장 종회가 검각에서 막히자 이럴 줄 알았다고 바로 장기전을 준비한 것은 이런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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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07 11:3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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