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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길

last modified: 2015-11-28 21:31:11 by Contributors

Contents

1. 조선시대의 문신 최명길
2. 대한민국배우 최명길
2.1. 출연작
2.1.1. 드라마
2.1.2. 영화
2.2. 수상
2.3. CF

1. 조선시대의 문신 최명길

崔鳴吉 (1586~1647)

인조 시대, 정묘호란병자호란으로 대변되는 혼란의 시기에 화파[1]를 대표했던 인물. 호는 지천(遲川)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항복[2] 밑에서 배웠으며, 조선시대 유일하게 한 해에 생원시, 진사시를 모두 통과한 것으로 모자라 문과에 급제한 유일한 인물. 지금으로치면 고3이 수능 치룬 해에 공무원시험과 사법고시까지 붙은 격이다. 이후 광해군 때에 병조 좌랑을 맡고 있었다가 1614년 명나라 차관으로 인한 사건이 발생하여 파직당하고 만다. 당시 서학 유생 홍임이란 사람이 술에 취한 상태에서 "중국인이 어디서 왔는가?"라고 하였다.중국에서 왔겠지 그러자 포도청 군사들이 홍임을 체포하여 무고를 해 상을 타고자 했다. 최명길이 이 일을 조사해 홍임의 죄가 없음을 알고 석방하였는데, 당시 집권당 대북의 실권자 이이첨이 이것을 꼬투리로 최명길을 잡아오게 한 것이다. 이 일로 이후 10년 가까이 야인으로 지내야 했다.

그러다 자신의 스승 이항복이 폐모론에 반대하다 귀양살이를 하던 중 죽고, 이후 반정을 꿈꾸는 서인 강경파인 이귀와 접촉하여 그의 거사를 도운다.[3] 이 반정(쿠데타)이 바로 인조반정이다. 사실상 반정의 대다수 계획은 비상한 두뇌를 가진 그의 머리에서 나왔고, 인조를 옹립한 이후 최명길은 이귀,김류,김자점과 함께 반정 4대장 중 한 명으로써 출세 가도를 달렸다. 반정 이후에는 이조 좌랑부터 시작해 1년 만에 이조 참판까지 올라갔으며, 반정 4대장 중 가장 똑똑하다는 평을 받는 인물이었기에 인조 정권 전반에 걸쳐 큰 영향력을 행사한 대신이었다.

참고로 자기 능력에 대한 자부심도 높았다고 한다. "이귀는 큰 의논 내기를 좋아하지만 작은 일에는 엉성하고, 김류는 신중하지만 큰 식견은 없다. 밖의 사람들의 말로는 ‘성덕은 지극한데 신하들이 제대로 받들어 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대체로 전하께서 보좌할 신하를 얻지 못한 까닭에 치도가 확립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라고 한 기록이 실록에 나와 있다. 즉, 자신이야말로 큰 일과 작은 일 둘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말이다.

재밌는 건 광해군의 중립외교, 양면화친을 비판하는 인조반정을 성공으로 이끈 실질적 인물임에도 정묘호란, 병자호란 당시에는 주화파의 선두주자였다.[4] 당시 척화파인 김상헌과 대립하였다.[5] 특히 병자호란(인조 14년) 때에는 남한산성이 청군에 포위된 상태에서 항복을 하느냐? 계속 주전을 하느냐? 를 놓고 김상헌과 극렬히 대립했다. 뭇 사대부의 욕을 얻어먹으면서도 굴욕적인 항복문서를 직접 작성했고 죽음을 무릅쓰고 청군의 진영에 찾아가 협상을 주도했다. 그전에 청군의 빠른 기동작전으로 불광동까지 몰려온 청군에게 인조가 잡힐 지경에 이르자 시간을 벌겠다고 청군 진영에 목이 달아날지도 모르는데도 제발로 걸어간 것도 최명길이다. 상황이 급박해지면서 대간들이 이게 다 최명길 때문이다!를 외치면서 딴지를 걸때마다 "잘났으면 니들이 청군 물리쳐보던가."라면서 상당히 까칠하게 나오기 시작한다. 최명길이 항서를 작성하자 내용이 굴욕적이니 지금 보내지 말자고 주장하자 "일이 이지경에 이른 건 네놈들이 자그마한 곡절을 두고 맨날 지랄했기 때문이다! 네놈들은 신이란 글자의 가부만 논하면 된다. 글을 언제 보낼진 내 책임이지 네놈들 알바가 아니란 말이다!"라고 일갈하여 데꿀멍시키기도 했다.

정묘호란(인조 5년) 때에 조정이 강화도에 고립되었을 때, 후금군에 포로로 있던 장수 강홍립[6]과 함께 화의를 이끌어[7] 그나마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이때부터 이귀와 함께 몇 안되는 주화파였으며 칭신도 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오오 선견지명

또한 병자호란 직전에는 척화파의 후금(청)에 대한 결전의지 표방과 이에 준동하는 왕에게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강력히 제동을 걸기도 했다.[8] 이 때문에 윤집, 오달제 등에게 오랑캐와 내통하는 간신이라는 갖은 욕을 먹었는데 최명길이 압록강 얼면 우린 다 좆됍니다. 란 상소를 올린 후라서 뒤늦게 정신차린 인조는 조금전까지만 해도 아싸! 청하고 붙어보자! 라고 전쟁 분위기 조장하다가 "최명길은 자신의 명예를 생각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몸을 돌보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젖비린내나는 자들이 그를 모욕하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라고 매우 강력히 최명길을 옹호한다. 그런데 그땐 이미 떄가 늦은 후라서...
병자호란 때 청군이 코 앞으로 다가오자 청의 진영으로 가서 그나마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갈 시간을 벌기도 했고, 그 이후에는 쭉 화친을 주도하면서 온갖 욕을 다 들어먹었다.

특히 삼사의 어린 나이 대간들이 그를 탓 했고, 최명길의 고기를 씹으려 한다는 기록도 있다. 잘근잘근 하지만 의외로 김상헌, 정온 등 알려진 척화파들은 화친이 이루어지는 상황에서도 아무것도 못 하다가 인조의 출성과 국서에 스스로를 이라 일컫는 부분에서만 죽어라 열을 올렸다나.

호란 이후 사대부들은 척화파들을 크게 세워줬지만 결국 그들이 한 건 딴지 수준. 최명길도 김상헌이 한 자살 시도를 가족들이 다 보는 데서 하면 죽을 수 있겠냐면서 의심하기도 했다.[9] 이쪽도 씹을땐 가차없다 다만 김상헌이나 삼학사의 이후 모습을 보면 충성된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던 듯. 북경의 감옥에서 김상헌과 나눈 시[10]는 유명하다.[11] 항복 당시 김상헌이 항복 문서를 찢어버리자 최명길이 이를 이어붙였는데, 이를 보고 '찢는 사람도 충신이고 붙이는 사람도 충신이다'라는 평이 나왔다고 한다.

한편 병자호란의 치욕적 패배 이후, 청군이 물러나고 명을 치기 위한 병력을 요구하자 최명길은 영의정으로 극렬히 반대한다. 명에 대한 의리를 버릴 수 없고 나라가 피폐헤졌다는 것이 명분. 중요한 건 이걸 끌려간 홍타이지 면상에 대고 했다는 것이다. 홍타이지는 정승이 의리가 있다면서 풀어주었다. 최명길이 관직에서 물러나자 그제야 원군을 파병했는데 그걸 듣고 한탄했다고 한다.[12]

한선(명나라 배)과 접촉해 외교문서를 주고받은 이른바 '횡의' 사건으로 심양에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 때 강력하게 따지자

간첩은 필요한 거 아니냐. 근데 우리 임금은 그런 거 싫어해서 내가 혼자 한 거고 신하들도 모른다. 임경업도 내 말만 들은 거다. 모두 내 책임이다.고 했다.

이것을 보면 그는 진정한 현실주의자였던 듯.[13]

이후 1645년에 풀려나 조선으로 돌아왔다. 강빈이 사사될 때에도 그는 폐출만 하라고 하는 등 강빈을 구하기 위해 애썼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그는 동시대의 인물들보다 시대의 병폐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고, 이것을 치유하려 애썼다."라고 표현하고 있다.[14]

사관은 그의 졸기에서 "역시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이라 하겠다."라고 적고 있다. 척화파가 칭송받으며 그가 까이는 면이 있지만 그래도 김상헌이 (굴복하지 않고) 남문으로 나왔지만 그것도 최명길이 열어 준 문으로 나온 거다는 등 칭찬하는 부분도 많다.

실록에서는 상당히 똑똑하고 실리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생원시, 진사시, 문과를 단 한번에 모두 통과한 괴수지만 정작 최명길의 문집인 지천유사를 보면 의외로 엉뚱한 면모를 볼 수 있다. 조카가 당나귀를 타고 온 것을 보고 "네 의 귀는 왜 그리 기냐?"라고 물었는데 조카가 어이가 없었는지 웃으면서 "이거 당나귀라능. 말이 아닌데요?"라고 했다는 일화도 있고, 호조판서 시절에는 관청에서 기와 5백장을 주문했는데, "5백장은 너무 많으니까 한 우리를 줄 것"이라고 결재를 냈다. 근데 문제는 여기서 '한 우리'는 기와 2천 장을 뜻하는 말이라는 것. 최명길은 한 우리가 기와 백 장인 줄 알고 착각하고 결재를 잘못해서 망신을 당했다고.(…) 오늘날로 말하면 장관이 도량형도 제대로 알지 못해서 결재를 엉뚱하게 하고 개쪽을 당한 격이다.

참고로 명나라에서 송의 성리학을 비판하며 유행했던 양명명학을 독학했던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추상적인 명분에 사로잡힌 사대부들이 많았던 시대에 현실주의적인 행보를 보였는지도. 이후 그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양명학을 연구하는 학통이 있었다고는 하는데, 조선중후기가 서인이든 남인이든 성리학을 더 강화하고[15] 양명학을 비판하는 기조였기에 표면화 되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의 후손들은 서인이 노론, 소론으로 나뉠 때 온건파인 소론 계열의 입장을 취했다. 그의 손자가 숙종 때 영의정을 아홉 번 했던 최석정경종 때 좌의정을 지낸 최석항이다. 이들 역시 현실주의적 입장을 많이 취했던 인물이며, 특히 최석정은 마방진을 연구한 수학자로도 유명하다.

더불어 환향녀 문제에 대하여 그녀들을 박대하는 것을 매우 부정적으로 여겼다. 차별하는 것을 성토하고 그녀들을 망친 게 바로 조정의 탓이라고 비난하며 구제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다. 때문에 당시 양반 유생들에게 자결도 못하고 돌아온 더러워진 환향계집을 옹호한다는 비난까지 받았다고 한다. 임금이 오랑캐한테 굴욕을 당했으니 니네가 먼저 자결로서 모범을 좀 보여주시지 환향녀 항목 참조.

하지만 인조를 위해서 이렇게 목숨을 아끼지 않고 뛰어다녔건만 인조는 최명길을 별로 믿지 않은 모양이다. 횡의 사건으로 최명길이 청나라로 압송되었는데 최명길이 "난 죄없어요."로 일관하면서 인조와 다른 신하들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려 한다는 잘못된 정보가 올라왔는데 인조는 병자호란, 정묘호란 때 자신을 걸고 목숨걸고 뛰어다닌 신하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삭탈관직해버렸다.(...) 그리고 나중에 최명길이 모든 책임을 다 져서 자신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의 지켜냈다는 사실을 알고 더럽게 쪽팔려했다고 한다. 그래도 쪽팔리다고 모살하거나 하진 않은 게 용하다...

2. 대한민국배우 최명길

choimynggl.jpg
[JPG image (295.15 KB)]
이름 최명길(崔明吉)
출생 1962년 10월 15일, 서울특별시
신체 165cm, 48kg, AB형
학력 서울예술전문대학
데뷔 1981년 MBC 13기 공채 탤런트
가족 남편 김한길, 아들 김어진, 아들 김무진
팬카페트위터페이스북
SBS 연기대상
이미숙
(1993)
최명길
(1994)
최민수
(1995)

대한민국배우.

용의 눈물대왕 세종에서 태종의 비인 원경왕후 역할을 맡은 적이 있다. 1995년 3월 22일 당시 연예정보 프로그램 진행자였던 김한길[16]과 결혼식을 올렸다. 정치인인 남편 때문에 각종 정당 및 정치 행사에 자주 참석하고 이 때문에 정계 진출에 대한 소문도 가끔 나돌고 있다. 이에 대해 최명길 본인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편.

냉철하고 고급스런 이미지가 강하며 이 때문에 작품에선 주로 상류 계층의 배역을 맡는 경우가 매우 많다. 사극의 경우에도 왕비 역을 맡는 경우가 대다수. 이미연명성황후 횟수 연장에 반대하면서 원래 끝까지 이미연이 맡는 것을 말년은 최명길이 맡게 되었다. 이로서 여흥 민씨 두 왕후를 달성하게 되었다. 이제 여흥 민씨인 순종비(이 경우는 시대가 겹치니까...)나 인현왕후 까지하면 그랜드슬램 고급스런 이미지 덕분에 1992년 삼풍백화점, 그것도 다이아몬드 편 광고에도 출연한 경력이 있다. 물론 그 광고 찍을 당시엔 그런 사고가 날지 어떻게 알았겠느냐마는... 아마 당사자 입장에서도, 삼풍백화점 사고가 나고 나서 꽤 곤혹스러워했을 것은 뻔하다.

근초고왕(드라마)에서는 비류왕의 비였다가 어느새 남편을 죽이고 계왕의 비가 되는 백제햄릿엄마가 되어버렸다. 정작 실제 역사에서 해비해소술이 여장부로 일식도 자연현상이라도 까고, 비류왕과 금슬도 좋았으며, 근초고왕의 즉위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 건 어디로 가버린건지.. 심지어 친엄마도 아니게 만들어버렸다;; 네토라레보다 더하다.. 족보를 조작하여 막장 드라마 만드는 작가를 깝시다. 작가는 나의 원수

남편은 국회의원 김한길이다. 그리고 최명길은 김한길과의 나이가 9년차이다.

라디오 DJ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1992년부터 아침 9시부터 11시까지 MBC FM '최명길의 음악살롱'을 진행했다.특유의 고급스러운 분위기와 따뜻한 음색이 시간대와 매우 잘 어울린다는 평을 받으며 상당한 고정팬을 확보하며 롱런했다.이후 MBC FM의 동시간대 방송의 컨셉(음악 위주,듣기엔 좋지만 덜 알려진 음악들 많이 나옴,DJ멘트도 차분하고 진지한 편)은 이 때 만들어졌다고 해도 무방하다.남편 김한길과의 만남도 라디오를 통해 이루어졌다.당시 남편 김한길이 MBC 표준FM의 '김한길 초대석'을 진행중이었고,최명길이 초대손님으로 나오게 된 것.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0200&g_serial=607499&rrf=nv결혼과 함께 DJ직도 그만두었지만,이후 2000년대로 넘어와 MBC FM 4시~6시 가요응접실 진행을 맡는 등,꾸준히 DJ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2011년 12월 25일 개그콘서트생활의 발견에서 게스트로 출연했는데, 송준근의 회사 이사이자 회장딸이자 여자친구 역을 맡았다. 그런데 그걸 남편 김한길이 방청객석에서 보고 있었다. 충공깽. 네토라레?

2013년 드라마 미래의 선택에서 나미래의 미래모습으로 출연했는데 그동안의 고상한 이미지와는 달리 질질짜는 연기를 보여줬다.

2014년 12월 펀치에서 윤지숙 역을 맡아 위선적인 법무부장관 연기를 하였다. 드라마 방영기간 내내 악플이 엄청나게 달렸을 정도로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2.1. 출연작

2.1.1. 드라마

2.1.2. 영화

  • 연인들의 이야기 (1983)
  • 푸른 하늘 은하수 (1984)
  • 안개기둥 (1986) - 나 [21]
  • 눈짓에서 몸짓까지 (1986)
  • 밤의 요정 (1986)
  • 밀월 (1989) - 서유진
  • 우묵배미의 사랑 (1990) - 공례
  • 장미빛 인생 (1994) - 마담

2.2. 수상

  • 1986 대종상 여우주연상
  • 1994 프랑스 낭트영화제 최우수 여우주연상
  • 1994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
  • 1994 백상예술대상 연기상
  • 1994 SBS 연기대상 대상
  • 1995 한국방송대상
  • 1998 KBS 연기대상 최우수상
  • 2002 KBS 연기대상 최우수연기상
  • 2003 SBS 연기대상 연속극 연기상, 10대 스타상
  • 2007 MBC 연기대상 연속극 황금연기상

2.3. C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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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당시 청(후금)과 화친을 해야한다는 파벌. 이와 반대되는 건 나라가 망해도 결사항전해야 한다는 척화파.
  • [2] 선조 후반기와 광해군 초기 재상과 정승으로 활약했던 인물로 서인 계열의 인물. 이덕형과 함께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하다.
  • [3] 최명길은 이귀의 아들 이시백과 친구였다.
  • [4] 반정을 일으킨 서인들을 서인 중 공서(훈서)라고 일컫었는데, 이들은 반정(쿠데타)을 일으켰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다분히 현실적이고 권력지향적이었다. 공서 중 최명길과 이귀가 주화파의 의견을 취했었다.
  • [5] 당시 최명길이 공서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면, 김상헌은 반정을 주도한 공서 세력이 지지세력을 늘리기 위해 끌어들인 재야의 서인 '청서' 세력의 핵심 인물이었다. 현실주의적인 면이 강하던 공서와 달리 이들은 명분중심적이었으며, 그랬기에 비현실적인 척화의 의견을 강하게 견지했다. 참고로 이 분의 후손이 안동 김씨 세도 정치를 연 김조순.
  • [6] 광해군이 명이 만주에서 후금을 진압하려 할 때 파병 요청으로 조선 군사와 함께 딸려 보냈던 장수. 조명 연합군이 후금에 괴멸한 이후, 조선 잔여 병력과 함께 항복하여 후금에 억류되었으며, 광해군이 쫓겨나기 전까지 그와 조정을 위해 꾸준히 서신 교환과 정보 전달의 역할을 했었다.
  • [7] 형제국이 되게 된다. 형은 후금, 동생은 조선. 뭐 그나마 이건 양반이지 군신국이 된 병자호란 이후로는...
  • [8] 문제는 이게 받아들여졌을 때는 이미 배가 떠난 상태. 청나라 군대는 이미 군사출동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 [9] 다만 여기서는 최명길이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김상헌은 대들보에 목매면서 가족들에게 밖에서 기다리다 숨이 끊어지면 시신을 수습하라고 했다. 관리 하나가 김상헌한테 오다가 방 안에서 김상헌이 목을 매달고 밖에서 가족들이 곡만 하고 있는 꼴을 보고 문을 박차고 들어가 살려냈다. 이를 볼때 자살시도는 진짜였던 것 같다.
  • [10] 그동안 서로간에 갖고 있던 불충이라는 오해를 풀고 서로를 이해하는 내용이다.
  • [11] 다만 이는 야사다.
  • [12]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의 강요로 총 네차례에 걸친 출병을 해야만 했으며 규모도 적지 않았고(최소가 3천. 많게는 6,7천씩 보내야 했던 적도 있다.) 싸우다가 항복한 명 장수들 중에는 조선군에 의한 저격 피해가 컸다면서 이를 간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건 청이 매우 강하게 요구했기 때문에 별 수가 없었다. 소현세자도 이때에 조선측이 병력과 물자를 보내는 게 늦다며 화내는 청태종으로 인해 상당한 고초를 치뤘다.
  • [13] 최명길의 현실주의적 모습은 대동법 시행과정에서도 엿보인다. 최명길은 대동법에 반대했는데, 당시 실정에서는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사실 닥치고 대동법 찬성은 후대의 이야기다.
  • [14] 작가가 작 내에서 인조와 인조정권 내 실세들, 그리고 사대부 전체 집단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하는데 반해, 유일하게 비판을 안 하고 옹호한 인물이기도 하다.
  • [15] 되려 이황리론이 더 적극적인 강경성을 보였다.
  • [16] 당시 기자 출신으로 소설 "여자의 남자"를 발표하여 유명해진 소설가였는데, 최명길과 결혼할 당시 대단한 화제를 모았었다. 참고로 김한길은 최명길과의 결혼이 재혼이었다. 전부인은 어령 교수의 딸인 고 이민아 교수(1960~2012)이며 나중에 목사가 되었다. 결혼 이후 소설가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열린우리당, 민주통합당에서 활동하였다. 대표작인 여자의 남자의 경우 이후 정보석. 김혜수 주연의 드라마로 각색되기도 했다. 현재는 안철수 의원과 함께 새정치민주연합의 공동대표를 역임 중이다.
  • [17] 남편인 사도세자 역을 최수종이 연기했는데, 그 무렵 KBS에서는 혜경궁 홍씨를 주인공으로 하는 '하늘아 하늘아'가 먼저 방영되고 있었다. '하늘아 하늘아'의 혜경궁 홍씨역은 훗날 최수종의 부인이 되는 하희라가 연기했다.
  • [18] 최명길 본인도 다시 원경왕후 역을 맡은 것이 특이한 경험이라고 말한 바 있다.
  • [19] 1990년 '우묵배미의 사랑' 이후 21년만에 맡은 서민 배역이라고 한다.
  • [20] 다시 간만에 맡으신 높으신 분 배역이다. 하지만 왕비나 재벌가/정치가 사모님 역할이 주였던 이전과 달리 이번 역할은 무려 법무부 장관(...)
  • [21] 대종상 여우주연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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