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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선

last modified: 2015-03-02 11:45:14 by Contributors

이름 최무선(崔茂宣)
생몰년 1325년 ~ 1395년

한국의 화력덕후 기질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

공의 지략이 때맞춰 일어나니 明公才略應時生
삼십 년 왜란이 하루 만에 평정되었네 三十年倭一日平
바람 실은 전함은 나는 새가 못 따르고 水艦信風過鳥翼
진(陣) 무찌른 화차는 우레 소리가 무색하네 火車催陣震雷聲
주유갈대에 불지른 게 가소롭고 周郞可笑徒焚葦
한신이 배다리 만들어 건넌 것은 자랑도 못 된다네 韓信寧誇暫渡甖
이제부터 큰 공이 만세를 전하고 말고 豐烈自今傳萬世
능연각에 초상 걸려 여러 공경 중 으뜸이리 凌煙圖畫冠諸卿

화포 만든 공의 지혜 하늘이 열어 주어 天誘公衷作火砲
한번 뱃싸움에 흉한 무리 쓸어냈네 樓船一戰掃兇徒
허공에 뻗친 적의 기세 연기 따라 흩어지고 漫空賊氣隨烟散
세상 덮은 공명은 해와 함께 빛나도다 蓋世功名與日鋪
긴 맹세 어찌 긴 세월 후를 기약하리 永誓豈惟期帶礪
응당 정벌 맡아 군사의 대권을 맡으리라 專征應亦賜弓鈇
종묘사직 안정되고 나라도 안정되어 宗祧慶賴邦家定
억조 창생의 목숨이 다시금 소생하리 億萬蒼生命再蘇
- 권근, <하최원수파진포왜선賀崔元帥破鎭浦倭船>(진포에서 왜선을 깨뜨린 최 원수(최무선)를 축하하며)

Contents

1. 소개
2. 화약을 개발하다
3. 진포 해전
4. 그가 남긴 업적들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1. 소개


Wireless Choi고려조선 초의 장수. 화약개발이 너무 유명해서 과학자 같지만 사실 최무선은 엄연히 무관이다.

한민족이 화포테크를 탈 수 있도록 한 인물. 한민족 공밀레의 시조격.

출신지는 경상북도 영천시.[1] 동시대 인물인 포은 정몽주도 출신지가 이곳이다. 영천 출신으로 위인전에 실릴 만한 인물이 이 둘뿐이므로 최무선을 모르는 영천 사람은 없다.

2. 화약을 개발하다

최무선이 화약, 더 나아가서는 화포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대체로 비단장수 왕서방 중국 상인이나 지나가는 외국인의 이야기였다는 점과 나라의 지원이 없이 자체 연구를 통하여 개발하였다는 점(개발의사를 타진했다가 거부당했다 한다), 어렸을때 불꽃놀이를 보고 자기도 폭죽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던 것을 감안하면 아마 최무선의 일가는 상당히 큰, 정부에도 입김을 넣을 수 있는 거대한 상인 가문이었던 것 같다.

여튼 최무선은 당시 대왜구시대에 고려 백성들이 고통받는 현실을 보고 화약, 나아가서 화포를 개발하기로 마음을 먹게 된다.

당시 흑색화약의 주요 재료는 질산칼륨, , 목탄인데 이중 황은 예로부터 사용해 왔고[2] 을 의미한다. 질산칼륨은 예나 지금이나 바로 얻기도 불가능하고 정제방법이 필요하다. 따라서 중국의 화약계통 기술서에는 재료만 소개할 뿐 방법은 모든 재료를 적절한 양으로 적절하게 섞은 다음에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당연하지만 당시 최신 병기인 화약은 지도와 함께 국가 기밀로 다뤄질 정도로 중요했다. 이는 당연한 이야기로 기밀이 아니었던 문익점의 목화드립에 비하면 훨씬 엄중한 기밀. 그래서 문익점의 이야기가 최무선의 일화를 원작으로 윤색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항목 참조.

최무선은 이러한 여러 중국의 화약, 화포 기술서를 모아 분석한 후 직접 만들어 보기 시작하는데 그 방법이 매우 위험했다. 예를 들면 가마솥에다 재료를 넣고 가열한다거나 했는데, 중간에 사고사 당하지 않은 건 정말 하늘이 고려에 화포테크를 주려고 한 건지.[3]

여튼 그 후엔 자신과 평소 친분이 있던 강남에 살던 중국 상인이 최무선의 국가를 위한 목숨 건 개발 행위에 감복하여 그냥 가르쳐줬다고 한다. 더 황당한 건 최무선 왈, 이미 그 전에 대충 거의 다 완성했다고 한다. 요즘으로 치면 K-9 자주곡사포 독자개발급 사건…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그냥 가르쳐 준건 아니고 최무선이 그에게 의복과 음식을 주어 구슬렸다고 한다. 어쨌거나 최무선은 도당을 찾아 "나 화약 만들었소!"라고 주장했으나 그냥 미친놈 취급을 받고 문전박대당했다고 한다. 당시 화약은 중국의 최첨단 비밀무기로 취급받고 있었는데 최무선이 독자적으로 개발했다고 하니 당연히 믿기지 않을 수 밖에 없기는 했다. 최무선이 몇년에 걸쳐 제발 시험해볼 기회나 달라고 헌의하자 그 정성에 질린감동한 도당에서 화약국을 설치하고 최무선을 제조로 삼아서 시험해본 결과 화약을 생산할 수 있었다 한다.

3. 진포 해전

이후 진포(지금의 전북 군산)에 쳐들어 온 왜구들을 상대로 부원수로 출진하여 자기가 개발한 화포를 가지고 왜구들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으며,[4] 조선 건국에 협력하여 공신이 되었다...는 페이크 태조 이성계는 남아있는 온건파를 견제하기 위해 몇가지 수를 쓰는데 그중 하나가 최무선의 화통도감폐지였다. 결국 최무선은 몸져누워 세상을 떠났다.

사실 진포해전을 지휘한 사람은 고려 수군의 숙장 상원수 나세 장군이고, 최무선 장군은 심덕부 장군과 더불어 부원수를 맡았으며, 역시 숙장이자 새로운 수군 창설을 주도한 정지 장군이 작전 계획을 입안하였다. 이 중 정지 장군은 왕조 교체기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말년에 큰 고초를 겪었으며, 최무선 공도 막대한 경비 소요를 줄인다는 명분 하에 화통도감이 폐지되는 등 수난을 겪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여진족과의 갈등으로 북방이 어지러워지자 화기전담 부서가 다시 설치되었으며, 이때 최 공의 아들 최해산[5]이 관여해 개발한 화기의 위력을 절감한입덕 조선 조정의 영향으로, 후대로 갈수록 최 장군의 명성이 커졌던 것. 아래 업적 항목에 링크된 려말 왜구의 침입 관련 내용에 위 숙장들의 활약이 어느 정도 기재 되어 있으니 궁금한 독자 제현들은 검색해보시기 바란다.

4. 그가 남긴 업적들

그후 여러 화포테크와 주화신기전 테크까지 타는 등 최무선 이후 약 100년간 고려와 조선의 군사력은 차원을 달리 하게 된다.

사실 이 사람이 조선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조선 건국에 대해서는 이 항목을 읽어보면 알 수 있으며, 조선 건국 이후 국방에 대한 개념이 병력의 수 중심에서 화력중심으로 바뀌었다(물론 완전히 병력의 수를 고려하지 않게 된 것은 아니다). 이후 병력에 대한 인적 투자가 줄어들 수 있어서 산업에 대한 인력투자가 더 많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군사력에 투입된 인력은 전혀 생산성이 없다. 물론 둔전 개념 등이 있지만, 이것도 군 유지에 따른 생산성 손실을 메우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 즉, 화약병기를 통해 인력을 절감하고 생산에 더 전념할 수 있었다. 이는 당장 고려와 조선의 인구수와 상비군 숫자를 비교하면 금방 알 수 있다. 물론 그 부작용으로 임진왜란 쯤에는 오히려 국방력이 더 약해졌지만서도.

여담으로 그의 아들인 최해산과 손자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화포개발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최해산은 아버지와 다르게 평이 좋지 않은데 이유는 세종4군 정벌 때 직무유기(정확하게는 최윤덕의 명령보다 늦게 진군을 했다)로 파면될 뻔 했으나 화포 제작의 공과 운빨(세종이 사면령을 내림)로 넘어가고, 이후 강계부사로 있는 도중 직무유기, 공금횡령 등으로 '4군'중 하나인 여연[6]으로 귀양갔다는 사실이다. 웃기는 건 저 행동들이 "고의"였다는 것이다. "변방에 있는 거 싫은데, 뻘짓해서 파직되면 고향에 갈 수 있겠지?" 이딴 생각을 한 것. 하지만 오히려 더 변방으로 귀양 크리. 다만 화포 및 화약 개발에는 꽤 공을 세운 인재다. 재능은 아버지의 뒤를 이을 만 하지만 공직자로서의 자세 등은 호부견자에 가까운 인물.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코에이칭기즈 칸/원조비사 한국판에도 시나리오 3의 재야 인재로 등장하지만 전투가 B라는 걸 제외하면 특출난 점은 보이지 않는다. 징기스칸 4에서는 이성계와 함께 시나리오 4의 고려 장수로 등장하는데 화공 특기를 소유하고 있고 딱히 좋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무난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 이 사람을 감안했는지 이 시나리오에서는 고려에 '화포법'이라는 아이템이 있는데 문화치를 올려주는 것 말고는 딱히 메리트가 없다. 차라리 고려가 대포를 탑재한 군선을 사용하게 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화약 개발과 진포 해전에 대한 공로를 기리는 의미로 대한민국 해군에서는 209급 잠수함 중 하나에 최무선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참고로 진포 해전의 계획을 입안한 정지 장군도[7] 배수량 1,800톤급인 손원일급 AIP 잠수함의 2번함에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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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그러나 글로리아 위인전 등에서는 개경에서 태어났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이는 명백한 고증오류. 모 백과사전에 따르면, 최무선은 1328년 경상북도 영천시 오계동 마단에서 광흥창사(廣興倉使)를 지낸 최동순(崔東洵)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영주(永州)로, 시조는 최한(崔漢)이며 아마도 증조부인 최익겸 때에 이르러 영천에서 과거를 통해 개경으로 진입해 들어간 것으로 추측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2] 다만 조선에서 채굴되지 않으므로 전량 (일본에서) 수입해야 한다. 이 때문에 화약은 최고 귀중품중 하나였고, 재정부담도 무시 못할 수준이었다.
  • [3] 어린이 드라마에 에서는 가열하던 가마솥의 재료가 터지는 바람에 몸만 건지고 살아남는 이야기가 나온적 있었다. 집을 날려먹었는데도 화약을 만드는것에 성공했다고 최무선과 가족들은 다들 기뻐한다.
  • [4] 이 전투가 세계 최초의 해상에서의 화약 무기 사용이라는 얘기가 있으나… 아쉽게도 사실이 아니다. 세계 최초의 해상 화약 무기 사용은 백년전쟁 당시 1338년 Arnemuiden 전투에서 영국 함대가 대포핸드캐논을 쓴 것이 최초이다.
  • [5] 선친이 저술한 약수련법을 공부했으며 당대에 화기 연구로 명성이 있있다
  • [6] 오늘날의 중강군이다. 뉴스에서 겨울철마다 영하 20도 어쩌구 하는 그 압록강변의 그 중강진이다.
  • [7] 이 분은 다음 싸움인 관음포 해전에서 공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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