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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되니츠

Karl Dönitz, 1891년 9월 16일 ~ 1980년 12월 24일
독일제독, 해군 원수.

(ɔ) Sendker from


Contents

1. 개요
2. 10년전
3. 10년
3.1. 잠수함대 사령관
3.2. 해군 총사령관
4. 20일
4.1. 대통령
5. 전후
5.1. 전범 재판
5.2. 복역과 최후
6. 회고록
7. 주요 보직 내역
8. 진급 내역
9. 서훈 내역

1. 개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U-보트 함대 사령관직을 맡다가, 해군 총사령관으로 승진했다. 아돌프 히틀러자살한 뒤 뜻밖에도 2대 대통령으로 히틀러에게 지목되었다. 그후 독일의 항복과정을 마무리한 인물. 2차 대전동안 자신의 체험담 등등을 《10년 20일》이라는 책으로 써서 출판했는데, 2차대전 동안 잠수함전과 독일 해군의 실체 등에 대해서 잘 알리는 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제목인 《10년 20일》은 히틀러 밑에서의 10년, 그리고 히틀러 사후 2대 대통령(Reichspräsidenten. 총통인 Führer가 아니다.)으로서 보낸 20일.

2. 10년전


제1차 세계대전 때 U보트의 함장으로 참전, 독일 해군 사상 최초의 잠수함간 연합작전을 수행하다가 영국군의 포로가 되기도 했으며 종전후에는 순양함 함장도 역임하다가 재군비 선언 이후로 잠수함대 사령관에 임명되어 잠수함대의 재건에 힘을 썼다.

3. 10년

3.1. 잠수함대 사령관

독일이 재무장을 하고 해군을 재건하던 시기는 본격적으로 해군을 창설하기에는 촉박한 시간이었고, 더더군다나 군축조약에 의해 그나마 가장 많은 숫자를 가질수 있던게 U보트였다. 전쟁 발발후에는 그나마 대형함들을 건설하는게 더욱 힘들어지는 까닭에, 그의 예언대로 U보트가 실제로 주전력이 된다. 그는 U보트가 300척만 있으면 전쟁을 이길수 있다고 단언하고, U보트 생산에 박차를 가할것을 요구했는데, 경험과 연구에 의해 유보트가 세 척이 있다면 한 척은 실전에 투입되고, 다른 한 척은 훈련, 다른 한 척은 수리와 보급을 해야하기 때문에 300척이 있다는 이야기는 곧 100척의 유보트가 실전에 투입가능한 상황을 이야기 한다고 자신의 저서에서 밝힌다. 그 때문에 그는 U보트 함대 사령관직은 최대한 빨리 그만두고 U보트의 생산과 배치를 관리 감독하는 지위에 가기를 원했고, 실제로 그리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서구 군사학계에 퍼져있던 잠수함 무용론, 독일해군 지휘부가 생각하는 전함위주의 해군구성에 완전히 반대되는 의견인데다, 히틀러조차 영국과의 전쟁은 없을 것이라는 언질이 나온 마당에 조만간 영국과 전쟁에 돌입할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당시 독일해군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으므로 해군 총사령부는 그를 U보트 함대 지휘관에 유임시켰고 결국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때문에 U보트가 한참 공포와 엄청난 전과를 불러 일으키던 시절인 1939~41년은 실제로는 북대서양에서 가용 U보트가 평균 7척으로, 단 1척밖에 없는 날도 많았다. 하지만 그 몇척 안되는 U보트가 하마터면 영국을 거의 거덜낼 뻔했으니, 역사에 가정은 필요없지만 되니츠가 원했던대로 그 시기에 대서양을 100척의 유보트가 매일같이 들쑤시고 다녔다면 영국은 전면적인 타격을 입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심지어 U보트의 종횡무진한 활약에 세간에서는 윈스턴 처칠과 되니츠의 싸움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그가 원하던 숫자만큼의 유보트가 실제로 배치된 것은 이미 전황이 기울어 어떻게 해볼수도 없게된 1943년 근처로, 그나마도 해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뒤 히틀러와 직접 키배 담판을 벌여서 얻어낸 성과이다. 독일 해군이 얼마나 푸대접을 받았는지 알수 있는 일화 중 하나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알베르트 슈페어와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하며, 이는 슈페어의 자서전에서 엄밀히 말해 되니츠가 2대 대통령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데, 그의 자서전에서는 제3제국의 헌법상 오직 선거를 통해서만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기록했기 때문. 다만 슈페어와 되니츠가 사이가 서로 좋지 않았으므로 어쩌면 디스를 목적으로 썼을지도

문제는 이때는 이미 영국 해군은 당할 대로 당한 나머지 U보트 탐지, 격침 전술의 달인이 되어있던 상태였다. 사령부와 작전나간 유보트, 보급함을 이어주는 연락수단인 통신암호체계를 털린 시점에서 이미 맵핵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로는 미군이 참전하여 구축함만 100척이 넘게 영국에게 갖다주는 바람에(…) 그로 인해 이후 U보트는 변변찮은 전과도 별로 만들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U보트를 약화시키고 다시 부활하지 못하게 하려고 영국과 미국이 호위항공모함을 100척이나 양산해서 바다를 도배했으며, 엄청난 항공 전력이 대서양에 발이 묶인것을 생각한다면 1943년 이후에도 U보트는 밥값을 제대로 한 셈. 실제로 되니츠도 전과를 기대할 수 없지만 출격은 지속해야 한다. U보트가 출격을 안하면 대서양에 깔린 해군 전력과 항공 전력이 몽땅 독일로 몰려들 것이다란 언급을 한 바 있다.

3.2. 해군 총사령관

에리히 레더 해군 총사령관이 비스마르크 격침 등 해군 운용에 대해 히틀러와 갈등을 빚어 스스로 사임을 한후 그의 뒤를 이어서 해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레더는 총사령관 후보로 수상전 전문가인 롤프 칼스 제독[1]과 되니츠를 추천했고 히틀러의 선택은 되니츠에게 떨어진 것이다. 이로써 해군 대장(Admiral) 계급이었던 되니츠는 상급대장(Generaladmiral)을 건너뛰어 곧바로 원수(Großadmiral)로 진급하였다.

히틀러는 U보트 함대 사령관인 그의 입김으로 대양함대를 기어이 해체하려 했지만, 정작 신임 해군 총사령관이 된 되니츠는 면밀히 검토 후, 자료를 들이대며 대형함들을 전부 해체해봤자 나오는 자원도 거의 없고, 그래봤자 돈과 인력만 낭비한다. 그러느니 그냥 이대로 놔두기만 해도 연합군은 이들을 두려워 할 것이라고 설득하여 결국 대형함들을 지켜낸다. 실제로 이 말이 맞아서 대전당시 노르웨이에 배치된 비스마르크급 2번함인 티르피츠는 출항한다는 소문만으로 영국-소련간의 북극항로의 수송함대를 긴장하게 만들 정도로 골칫거리가 되었다. [2] 그렇지만 그런 판단을 내렸던 것과 별개로 되니츠가 그 이후에도 제일 관심을 쏟은 함선은 계속 그래왔듯이 그 이후에도 유보트였다. 티르피츠와 되니츠의 관계를 비유하자면 언니 잃고 맨날 아버지에게 맞고살던 히키코모리 아가씨가 자길 구해준 남자랑 결혼했더니 정작 남편은 자기보다 자기 조카들에게 더 관심과 애정을 쏟는 그런 모습이었다더라

레더를 위시한 보수적인, 나치즘과는 거리가 먼 해군에서 나치즘에 대해 이해를 하기도 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서인지 히틀러의 신임을 받았으며 히틀러는 자살하기전 정치적 유언으로 자신의 직위인 총통을 다시 나누어서 대통령과 총리로 분리시킨 후 되니츠를 차기 대통령으로 지명했다. 총리로는 파울 요제프 괴벨스를 지명했으나 괴벨스는 히틀러를 뒤따라 자살하여 사실상 되니츠의 단독정부였다.

4. 20일

4.1. 대통령

(ɔ) Malindine E G (Capt), No 5 Army Film & Photographic Unit from

플렌스부르크 정부의 업무 종결 후 영국 육군에게 체포되는 되니츠. 뒤따르는 두 사람은 알프레트 요들 육군 상급대장, 알베르트 슈페어 군수장관.

그의 자서전 《10년 20일》에 의하면 그가 히틀러의 후계자로 지목되었음을 알게 된 후, 곧바로 당시 사실상 권력 2인자였던 하인리히 힘러를 불러 히틀러의 유언장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되니츠에게는 수도 베를린에서 힘러의 무력인 SS에 대항할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힘러를 자신의 집무실로 불러들이기 전에 책상위에 권총을 꺼내두고 서류로 가려둘 정도로 담판을 앞두고 매우 긴장했으나, 유언장을 읽은 힘러는 나치식 경례와 함께 "각하 밑에서 차석이 되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라 외치며 그냥 버로우했다고 한다. 되니츠는 "그건 상관없다."며 허락했지만, 힘러는 곧바로 신분을 위장하고 도망치다 영국군에 체포당해 연행되다 자살한다.

자서전에 따르면, 되니츠 스스로가 히틀러가 그를 특출나게 평가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계자로 지목된 것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중에야 히틀러는 자신이 죽은 후 최후까지 독일군을 싸우게 할 사람으로 그를 지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영화 《몰락》에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듯 마지막에 이르러 권력의 최측근들 및 독일 국방군(특히 육군) 수뇌부에 극도의 불신을 갖고 있던 히틀러이고 보면, 상대적으로 권력의 중심에서 떨어져 임무에 충실했던 되니츠를 선택한 것은 어찌 보면 이해할 만 하다. 육군은 일단 예전부터 히틀러와 그닥 좋은 관계라고 하기 힘들었고, 공군은 헤르만 괴링의 배신에 가까운 행위로 신뢰를 잃었으나, 해군은 일단 되니츠 등 몇몇 제독들이 나치 당에 입당하기는 했으나 육공군에 비해 정치적인 힘이 미약했고 해군 수뇌부 사이에서 군이 정치에 크게 개입하는 것을 옳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 점으로 인해 전쟁 말기에 히틀러가 국방군 세력 중 가장 믿을 수 있는 조직이라고 생각했던 탓도 있다.

그러나, 천만 다행히도 기존의 수뇌부들에 비하면 상식인이었던 되니츠는 자멸적인 최후의 항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으므로, 총통의 권한을 이어받은 후 동부 전선에서 민간인과 병력을 철수시키고 소련군이 아닌 영미연합군에게 항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자신들의 행위로 인한 소련군의 잔혹한 보복행위로 더 이상의 희생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때 그는 무능한 빌헬름 카이텔 대신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를 불러들여 역할을 맡기려고 했으나 연락이 되지 않아 그렇게 하지 못했다.

협상 초기에, 그는 협상가들로 주 전장을 이끈 육군 장군들이 아닌 해군 제독들을 뽑아 연합군에 내보냈는데, 이는 일치감치 해상에서의 승패가 결론이 난 데다가 주로 지상군 및 항공 세력과 싸우느라 해군에 대해 적대감이 덜해져 있어 제독들이 찾아가면 보다 협상 분위기가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제독들 중 대표 격인 인물로 한스게오르크 폰 프리데부르크 상급대장이 있다.[3]

5. 전후

5.1. 전범 재판

나치의 전쟁범죄나 잔혹행위 등과는 별 연관이 없었지만,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독일의 침략전쟁에 적극 참여하였다는 것이 유죄로 인정된 것이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았고, 미 태평양 중부해역군 총사령관이었던 해군원수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 되니츠의 행동에 대한 검사단의 질의에 되니츠를 전폭적으로 옹호하는 답신을 보내는 등 한 때 그의 적이었던 영미 해군에선 전반적으로 그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어떤 영국 제독은 "되니츠가 10년형이면 해리스는 종신형."이라고까지 평했다.

결코 그가 무죄인 것은 아니다. 알베르트 슈페어도 되니츠식의 전쟁범죄를 지었으며, 그는 이를 확실히 인정했다. 슈페어가 20년형을 받은 것도 이의 유죄를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되니츠의 경우도 일단 확실한 죄명으로는 잠수함을 건조하기 위해서 강제노역을 허가한 것과 이 과정에서 제네바 협약이 위반된 것, 무제한 잠수함 전쟁의 실행 과정에서 중립국 선박에 대한 공격을 묵인한 것, 히틀러가 선포한 연합군 특수부대 포로에 대한 무조건 총살 명령을 실제로 이행한 것이었다.

문제는 이 죄목중에서도 중립국 함선에 대한 공격 묵인으로 인해 주로 피해를 본 선박 대부분이 1941년 12월 이전의 미국 선박이었는데, 당시 미국 선박 공격은 히틀러조차도 억제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또한 무제한 잠수함 전쟁 자체가 사실은 당시 기준으로도 국제법 위반이었는데, 되니츠는 처음부터 국제법 위반을 각오하고서라도 무제한 잠수함 전쟁을 실행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런 생각은 되니츠만이 아니라 적국인 미국과 영국도 하고 있었고 실행에 옮기기도 했다는 점에서 피장파장이었기에, 이 죄목으로 되니츠를 처벌할 경우 연합군, 특히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일본 근해에서 잠수함을 풀어 배라는 배는 지나가던 2인승 나무 보트까지 박살내며 일본 배의 씨를 말렸던[4], 되니츠가 꿈꾸었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역사상 최초로 성공시킨 미국도 여러모로 난처해질 수 밖에 없었다.

히틀러가 선포한 연합군 특수부대 포로에 대한 무조건 총살 명령을 실제로 이행한 것도 라코니아 사건[5] 이후 빡돌아서 내린 명령을 수행한 것인데다가, 라코니아 사건으로 직접 피해을 입은 부대의 사령관이었으니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 아울러 되니츠 관할의 포로수용소에 있던 영국 해군들은 제네바 협약에 의하여 정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상황도 참작되었다. 이건 재판부도 명시하고 있는 점이다.#

5.2. 복역과 최후

어쨌든 이와 같은 죄목으로 결국 10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했고, 이후 민간인으로서 자서전 《10년 20일》을 집필하며 2차 대전당시 독일 해군과 전황에 대해서 분석하였다. 이는 이후 전세계 해군 관계자들에게 찬사를 받게 된다. 1980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다. 서독 연방군의 금지 훈령에도 몇 명의 장교들은 군복을 입고 참석하였다.

그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한 명언. "저보고 그 일을 다시 하라면 할 것입니다." 실제로 죽는 날까지 그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절대 뉘우치지 않았다. 자신의 나라에 대한 충성을 저버린 군인은 적군에게도 비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만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되니츠 본인의 입장은 황제를 지지하였으나, 그가 포로 생활을 마치고 1차 대전 후의 독일에 귀환했을 떄 이미 정부는 바뀌어 있었고, U보트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나치에도 들어가고 히틀러한테 사탕발림도 꽤 했다는게 정설. 대표적으로 유보트 생산용으로 강제노역은 주장했어도 인종청소용으로 유대인 박살내는 일 같은 거엔 개입하지는 않았다고 판단되어 전범 재판 당시에는 반인륜적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로 기소당하지 않았었다.

이와 반대로, 히틀러의 전기로도 유명한 영국의 역사학자 이언 커쇼 경은 자신의 저서에서 '되니츠는 누구보다도 친 나치적인 장성이었으며, 최후까지 항전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에도 적극 동의하였다. 히틀러의 권력을 승계한 뒤에 항복한 것은 그야말로 어쩔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인 것 뿐, 결코 비정치적인 군인은 아니었다.(Kershaw, The End:Germany 1944-45, p. 400.)'고 주장했지만, 커쇼는 자신의 저서에서 일관적으로,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이후에도 현역에 남아 있던 군인들에 비판적인 경향에 치우친 것을 감안해야 한다. 즉, 되니츠를 비판하면서 정작 그가 대통령 지위에 올라 동부 독일의 주민들을 피신시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한 것은 언급하지 않았고, 그런 그를 발터 폰 라이헤나우와 같은 히틀러에 맹종하는 군인의 반열에 올린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6] 반 세기에 걸쳐 영구까방권을 획득했던 루트비히 베크를 위시한 암살자 그룹에 대해서도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시점에서, 1944년 7월 이후에 히틀러에게 해임당하지 않았거나 사임하지 않고 충성 서약을 했다는 이유로 되니츠를 히틀러 추종자의 반열에 올리는 것은 공정치 못하다. 오히려 되니츠가 남아 있었기에 살아남았던 사람들을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이다.

다만 되니츠의 죄는 오히려 전범 재판 이후의 서독 사회에서, 일부 참전 군인들에 의해 비판을 받게 된다. 종전이 가까워지자 해군 자살 특공 부대를 조직하였는데 이러한 비합리적인 임무를 거부하고 탈영한 장병들을 즉결 처형한 것과[7] 1944년의 해군 원수 연설에서 유대인에 대한 가혹한 조치를 선동하는 내용이 있었던 것이 문제가 되었으며 석방 후에도 되니츠는 자신을 정당화하는 발언만을 일관했을 뿐 자신의 죄책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유보트 승조원들과 달리 수상함 등에서 근무한 퇴역 해군 장병들이 되니츠에 비판적인 진술을 거듭하는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였다. 결국 서독 연방정부는 그의 장례식에 서독 연방군 장병들의 참석을 명시적으로 금지하게 된다.

1990년대 후반의 독일 국방군 관련 다큐멘터리에서 되니츠의 가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말년의 되니츠는 오랜 시간 자신이 이해하기 힘들고 받아들이기 어려워 했던 전후 서독 사회의 새로운 물결을 보다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전범 재판 당시 IQ 테스트 결과에 의하면, 되니츠의 IQ는 138로, 이건 재판에 회부된 전범 중 세 번째로 높은 수치이다. 후에 무죄로 풀려나게 되는 제국은행 총재 마르 샤흐트(143)와 네덜란드에서 공포정치를 펼친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141)에 이어 세 번째. 괴링도 138을 기록했다. 참고.

6. 회고록

《10년 20일》은 현재 한국에도 정식 출판되어 있다(삼신각 1995). 역자는 대한민국 해군 예비역 준장안병구 現대우조선해양 사외이사이며 국내 제1호 잠수함장보고함의 초대 함장을 역임했다. 영어판을 중역했는지 만슈타인을 맨스타인이라고 하는 등 번역의 질은 떨어진다. 한국의 현역군인들이 번역한 책이 대개 그렇지만.

이 회고록은 대서양의 잠수함전에 있어서는 귀중한 사료이지만, 만슈타인이나 구데리안 등의 나치 고위 군인들의 회고록과 비슷한 논조로, 미국이나 영국 등 서방계에선 히틀러와 나치즘에 대해 비판적이지 않다는 점을 문제시 하고 있다. 실제로 당시 독일군 출신들 (육군,친위대,공군,해군 모두 포함)의 회고록을 읽어보면 대부분 히틀러와 나치에 대해선 적어도 긍정적이지는 않지만 부정적이지도 않다. 물론 히틀러의 각종 오판으로 인한 병신짓과 홀로코스트로 대표되는 전쟁범죄에 대해선 인정하면서도 히틀러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선 서로 암묵적으로 합의라도 한듯 그리 비판하지 않는데 이러한 점에 대해선 전후 참전자들을 경멸하는 독일 사회에 대한 반발심으로 야기된 문제라는 상당히 그럴듯한 의견도 있다. 최근 국내에서 번역 출간간된 구데리안의 회고록의 15쇄 서문을 아들인 하인츠 귄터 구데리안 장군[8] 이 집필했는데 '그 시대를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국가에 대한 충성의 의무였던 군인들의 입장을 고려하길 바란다'는 논조로 마무리하고 있다.

7. 주요 보직 내역

  • 1910. 4. 1 ~ 1911. 3.31 : 해군 입대, 중순양함 헤르타 함상에서 수상함 기본훈련 이수
  • 1911. 4. 1 ~ 1912. 9.30 : 해군 군사학교 입교
  • 1912.10. 1 ~ 1916. 9.11 : 경순양함 브레슬라우[9] 항해장교
  • 1913. 9.27 : 정식 임관
  • 1916. 9.12 ~ 1916.12.20 : 산스테파노/다다넬즈 비행기지 근무
  • 1916.12.21 ~ 1917. 1.16 : 잠수함 교육 이수
  • 1917. 1.17 ~ 1918. 2.28 : 잠수함 U-39 견시장교
  • 1918. 3. 1 ~ 1918. 9. 4 : 잠수함 UC-27 함장
  • 1918. 9. 5 ~ 1918.10. 4 : 잠수함 UB-68 함장
  • 1918.10. 4 : 영국 해군 구축함 전대와 교전 후 이함, 항복 후 신병 인도
  • 1918.10. 4 ~ 1919. 7.15 : 포로수용소 수감
  • 1919. 7.15 : 포로수용소 출소, 해군본부 복귀
  • 1919. 7.16 ~ 1920. 3.13 : 발트해 해군기지 참모장교
  • 1920. 3.14 ~ 1920. 4.19 : 어뢰정 V-5 정장
  • 1920. 4.20 ~ 1923. 3.14 : 어뢰정 T-157 및 G-8 정장
  • 1923. 3.15 ~ 1923. 3.19 : 대기발령
  • 1923. 3.20 ~ 1924.11. 2 : 해군본부 어뢰 및 기뢰 관리 부관참모장교
  • 1924.11. 3 ~ 1927.10. 2 : 해군본부 해역방위국 부관장교
  • 1927.10. 3 ~ 1927.12.16 : 순양함 님페 발령, 승함 전 항로 및 정보교육 이수
  • 1927.12.17 ~ 1928. 9.23 : 순양함 님페 항법장교
  • 1928. 9.24 ~ 1930. 9.29 : 제4어뢰정 전단장
  • 1930. 9.30 ~ 1934. 9. 9 : 북해 해군기지 참모 겸 기지 사령관 수석 제독참모장교
  • 1934. 9.29 ~ 1935. 9.21 : 순양함 엠덴 함장
  • 1935. 9.22 ~ 1935. 9.26 : 해군 총사령관 직접 명령에 의한 대기발령
  • 1935. 9.27 ~ 1936.10.13 : 베디겐 전단장으로서 잠수함대 육성
  • 1936. 1. 1 ~ 1939.10.16 : 잠수함대 지휘관
  • 1939.10.17 ~ 1943. 1.30 : 잠수함대 사령관(소장 진급[10] 및 잠수함대 확대 개편에 따른 지위 격상)
  • 1943. 1.30 ~ 1945. 4.30 : 해군 총사령관
  • 1945. 4.17 ~ 1945. 4.30 : 북부 유럽 국방군 총사령관[11]
  • 1945. 5. 1 ~ 1945. 5.23 : 독일 제국 대통령 겸 국방군 최고 사령관
  • 1945. 5.23 : 영국군에 신병 인도
  • 1945. 5.24 ~ 1946.10. 1 : 영국군 형무소 수감
  • 1946.10. 1 ~ 1956.10. 1 :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피고 출석, 침략전쟁을 계획하고 실행한 죄 및 전쟁 범죄 항목에서 유죄 판결, 10년형 언도 후 복역
  • 1956.10. 1 : 만기출소
  • 1958 : 전쟁 회고록 《10년 20일》 완성, 출간

8. 진급 내역

  • 1911. 4.15 : 해군 사관후보생(Fähnrich zur See)
  • 1913. 9.27 : 소위(Leutnant zur See)
  • 1916. 3.22 : 중위(Oberleutnant zur See)
  • 1921. 1. 1 : 대위(Kapitänleutnant zur See)
  • 1928.11. 1 : 소령(Korvettenkapitan)
  • 1933.10. 1 : 중령(Fregattenkapitan)
  • 1935.10. 1 : 대령(Kapitän zur See)
  • 1939. 1.28 : 준장(Kommodore)
  • 1939.10. 1 : 소장(Konteradmiral)
  • 1940. 9. 1 : 중장(Vizeadmiral)
  • 1942. 3.14 : 대장(Admiral)
  • 1943. 1.30 : 원수(Großadmiral)

9. 서훈 내역

  • 1913. 6. 7 : 프러시아 명예 기장 은장
  • 1914. 11.7 : 1914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 1914. 11.7 : 오스만 제국 철 초승달 전공 기장
  • 1916. 5. 5 : 1914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 1917. 7.25 : 잠수함 전투 기장
  • 1935. 1.30 : 최전선 전투 명예 십자 훈장
  • 1939. 9.18 : 1939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39.12.20 : 1939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40. 4.20 : 이탈리아 사보이 왕가 무공 훈장
  • 1940. 4.21 : 기사 철십자 훈장
  • 1940. 6.10 : 스페인 전역 해상전 참전 공로 대십자 훈장
  • 1943. 4. 6 : 백엽 기사 철십자 훈장(223번째 서훈)
  • 1943. 9.11 : 일본 훈1등 욱일대수장
  • 1944. 1.30 : 민족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 명예 기장 금장
  • 1944. 4.11 : 만네르하임 대십자 훈장 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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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1885.5.29 ~ 1945.4.15. 최종 계급 상급대장. 기사 철십자 훈장 서훈자. 스페인 내전 당시 독일 증기선을 정선시킨 스페인 군함에 맞서 출격한 포켓 전함 전대의 지휘관으로, 전역 내내 강경한 지휘를 했다. 1943년 3월 1일까지 북부 해역 사령관을 맡았고, 총사령관 인선에서 탈락한 후 예비역이 되었다가 종전 전에 연합군 공습으로 사망했다.
  • [2] 항해중이던 영국 수송함대가 "티르피츠가 떴다!!"라는 이야기가 퍼지자 바로 산개했었는데 얼마 안 가 잠수함들의 먹이가 된 적 있다. 그런데 그때 티르피츠는 출항한 적 없었고 그냥 본진에 박혀있었다. 되니츠의 말대로 대형함들이 살아있는 것 만으로도 가치는 충분히 있었던 셈이다. 이후로도 티르피츠는 별다른 출항 없이 뽈뽈 이항구 저항구만을 전전했지만 영국군은 이 티르피츠 때문에 계속 긴장해야했다. 티르피츠를 포함한 대형함들이 버티고 있는 한 함부로 구축함 건조에 몰빵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고.
  • [3] 1895.7.15 ~ 1945.5.23. 최종 계급 상급대장. 수훈 기사 십자 훈장, 독일 은십자 훈장 서훈자. 잠수함 전문가로서 1941년 이래 계속해서 되니츠의 후임 직책을 맡아 상당히 돈독한 사이였으며 베를린의 항복 식전에도 해군 총사령관으로서 참석하였다. 프리데부르크는 되니츠가 회고록에서도 칭찬할 만큼 유능하고 과감한 업무 수완을 자랑했지만 극도의 친 나치 성향의 소유자였다. 따라서 그는 연합국에 대한 항복을 인정할 수 없었고, 결국 1945년 5월 23일 플렌스부르크 정부의 해산과 더불어 음독 자살하였다. 되니츠의 사진 액자 밑에 동정복 차림으로 죽어 있는 프리데부르크의 모습은 나치 독일 해군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사진 중 하나로 인터넷에 퍼져 있다.
  • [4] 심지어, 전쟁 끝나기 직전에는 이렇게라도 가라앉힐 배가 없자 야밤에 에 상륙해 지나가던 열차를 폭파시키고 도망친 잠수함도 있었다.
  • [5] U-보트가 영국 선박을 공격했는데, 알고보니 이탈리아군 포로 수송선이었다. 1천여명의 이탈리아군 포로들 중 대부분은 승조원들이 문을 잠그고 퇴선하는 바람에 대부분 사망하고 80여명 정도만 구조되었는데, U-보트는 선박 격침 직후 이들 포로 외에 선박 승조원들과 동승한 민간인들까지 구조하여 식량 등을 지급하고, 구명대를 잠수함에 묶어 육지 근처까지 호송해 주려 했다. 이를 위해 비시 프랑스 해군에 지원을 요청해 순양함을 급파받았고, 연합군 해상 및 항공 전력들에게 적십자기를 매달고 온갖 무전 경고를 해두는 등 인명 구조중임을 충분히 알렸다. 그런데, 이를 무시하고 한 대의 미군 폭격기가 이 U-보트에 공격을 가했고, 결국 U-보트는 이를 회피하기 위해 잠시 잠항했다 다시 떠올라야 했다(이 때, 잠항 중 미처 줄을 풀지 못하거나 갑판에 남아있던 조난자들 상당수가 다시는 떠오르지 못했고, 일부 잠수함에 타고 있던 인원 등만 살아남았다.). 엄연히 주변의 선박 및 항공기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한데다 그렇지 않아도 인명 구조중이란 걸 금방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 [6] 정작 독소전쟁 당시 인종범죄 명령을 적극 주장했던 장군들은 1944년 7월 이전에 해임되었을 경우 커쇼의 비난 대상이 되지 않았다.
  • [7] 당시 생존한 해군 장병들의 증언과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게 도와준 지역 주민들의 인터뷰에 따르면 되니츠의 명령을 받고 즉결 처형을 집행한 독전대는 SS보다 더 잔혹했다고 발언하였다.
  • [8] 1914.8.23~2004.9.25. 최종 계급 소장. 기사 철십자 훈장, 연방 공로 대십자 훈장 서훈자. 하인츠 구데리안 상급대장의 아들이며 1942년 장군참모학교 졸업 후 종전시까지 116기갑사단 참모장교로 종군했다. 신생 연방군에서는 제3기갑대대장, 14기갑여단장을 거쳐 기갑총감에 올라,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 [9] 이 순양함은 독일제국 황제 빌헬름 2세의 선포에 의해 오스만 제국 해군에 공여되었고, 이름도 브레슬라우에서 미딜리로 바뀌었다.
  • [10] 독일국방군 해군의 준장은 정식 제독 계급이 아니었다. 소매 띠는 현재와 같은 넓은 금테 장식으로 변경되지만, 견장은 대령과 마찬가지였다. 준장 계급은 해군과 SS에만 존재했으며, 정식 장성은 아니더라도 큰 범주에선 장성으로 분류됐다.
  • [11] 이 때 되니츠의 지휘부가 있던 플렌스부르크로 독일 정부의 일부 기능들이 이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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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3-19 22:2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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