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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티스 르메이

Curtis Emerson LeMay

I'll tell you what war is about. You've got to kill people and when you kill enough of them, they stop fighting.
"전쟁이란 게 뭔가 하는것에 설명을 드리도록 하지. 사람을 죽여야 하는 일이오. 죽이고 죽이다 충분히 죽이고 나면 그만 하겠다고 하는 거지."[1]
-중성자탄 W70 탄두의 개발자 새뮤얼 코헨에게.

But who was it who'd go far beyond the enemy lines and attempt to destroy not only enemies in the field, not only supplies and fuel dumps and tank concentrations up near the front; but would go deep into the enemy's homeland, and thus try to eliminate his basic potential to wage war?
Bombers, nothing but bombers.
"최전선에 있는 적을 섬멸하는 것, 전선에 걸쳐있는 물자와 유류의 보급선을 차단하는 것, 모여있는 전차 대열을 파괴하는 것을 넘어서, 과연 어떤 병기가 적의 본토 깊숙히 침투하여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 자체를 꺾어버릴 수 있겠는가?
폭격기다. 오직 폭격기 뿐이다.[2]

We should bomb Vietnam back into the stone age.
"베트남을 폭격해서 석기시대로 돌려놔야 합니다."[3]

석기시대 마니아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명언.
폭격밖에 모르는 바보 사실 본업은 고고학자카더라
(ɔ) from
공군참모총장 시절의 커티스 르메이

Contents

1. 개요
2. 초창기 커리어
3. 제2차 세계대전
3.1. 일본 본토 공습
4. 제2차 세계대전 이후
5. 석기시대가 좋은 시대다! 마니아
6. 사람다운 의외의 면모

1. 개요


미국 육군 항공대 장군이었고 후에 미합중국 공군 장성으로서 냉전 시대 미 공군의 기틀을 세운 명장이자, 미 공군의 역사상 보기드문 맹장. 별명은 Iron-ass, Big Cigar[4]. 도쿄핫 매니아 가난한 이민자 집안 아들로 태어나서 아무런 연줄 없이 능력만으로 장군까지 올라갔고 비행기가 처음 하늘을 난 시대에 태어나 신기술 중의 신기술이었던 항공기 기술이 미국 전력의 한 축으로 자리잡는데 큰 공적을 세웠을 정도로 기술적 안목이 뛰어나기도 했다.

을 잘 키워서 유명한 폭격덕후. 그의 선배 격인 쑥 전문 재배업자 윌리엄 테쿰세 셔먼도 오하이오 출신이다. 그리고 미국은 이들의 업적을 기려 미 해군 궁극의 파괴병기 삼지창을 탑재한 SSBN 최신형의 이름을 오하이오급이라 짓는다 카더라

2. 초창기 커리어

1906년 11월 5일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했던 어릴 적에는 아버지의 이직에 따라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지냈는데, 아버지가 영 가장 구실을 못한 탓에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돈을 벌면서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강박관념 수준으로 자리잡고 말투도 이후처럼 직설적으로 변했다. 여가를 즐길 시간이 없어 (역시 당시에 최신 기술이었던) 게르마늄 결정 라디오를 손수 조립하고 듣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네살 때 처음 비행기를 목격했을 때부터 비행에 대한 환상을 가진 그는 이후 중학교때 친구와 돈을 모아 5분간 하늘을 나는 기분을 만끽한 뒤 개인 비행기를 사서 마음껏 날겠다는 꿈을 가진다. 하지만 전역하기 전까지 그에게 순수하게 즐거움을 위해 비행할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5]

고교와 대학은 고향 오하이오주에서 나왔다.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육군 ROTC를 거쳤는데, 좀 골룸한 것이 소위 임관사령장만 세번을 받은 희대의 경력이 있다. 처음엔 육군 포병 병과 예비군 소위로 임관했다가 주방위군 군적이 있으면 조종사 선발 과정에서 사관생도에 준하는 취급을 받는다는 정보를 얻자마자 곧바로 주방위군으로 달려가 예비군 그만두고 주방위군 소위가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1928년에 정규 육군의 항공단 조종병과를 지원한다. 그렇게 1930년 소위로 리셋하며 조종장교로 임관했다(...). 전간기의 미군은 전시가 아니었기 때문에 승진이 연공 서열에 묶여있었던지라 중위는 대학 졸업하고 군생활 시작한지 7년 후에야 달았고, 1940년에 대위, 1941년에 소령을 달았다.

하지만 그의 진급복은 그때부터 시작이었으니...

3. 제2차 세계대전

1945년 8월 13일 타임지
육군항공대 중령으로써 B-17로 구성된 제8공군의 지휘관 중 한 명.

진주만 공습으로 폭격을 맞은 미국은 즉시 일본과 추축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당연히 폭격기를 비롯한 항공 전력이 엄청나게 필요하게 되는데, 이 당시 제 305 폭격항공대(305th Bombardment Group)에 배속된 르메이는 말 그대로 맨 땅에서부터 폭격기 조종사와 승무원을 훈련시키고 장비를 마련하는 생고생을 시작해야 했다. 이 때 과로로 구안괘사가 일어나 오른쪽 얼굴이 굳어진 탓에 훗날 괴팍하고 무식한 장군 이미지가 더욱 강해지게 된다.

영국에 도착한 뒤 제8공군이 먼저 수행한 폭격에 대한 자료를 분석한 르메이는 폭격의 피해가 폭격기 추락으로 인한 피해보다 못할 정도로 명중률이 나쁘다는 사실을 알아냈는데, 그 이유가 목표 상공에서 대공포 사격이 시작된 뒤 폭격기들이 10초 안에 폭탄을 떨구고 단체로 회피 기동에 들어갔기 때문임을 깨달았다. 첫번째 출격에서 르메이는 목표에 도달했을 때 폭격이 끝나기 전까지 회피 기동을 포기하고 대형에 맞춰 직선으로 비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병사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 B-17을 상대로 한 88mm 대공포의 예상 격추율은 자신이 계산해본 결과 372발당 1대로 비행단이 충분히 견뎌낼 수 있는 수준이라고 설명하고[6], 그 말을 증명하기 위해 앞장서서 선두 기체에 탑승하여 출격했다! 결국 탄착률이 종전의 2배로 늘어나고 목표 상공에서 7분간 직선 비행을 하면서도 대공 사격에 폭격기 한 대도 잃지 않는 대성공을 거뒀다. 이 폭격 전술은 제8공군 전체에 도입되게 된다. 그리고 르메이는 고속 승진을 이어가게 된다. 1943년 말에는 준장, 44년 3월에는 37세의 나이로 당시 최연소 소장이 되었다.

이때 훗날 미국의 국방장관이 되는 로버트 맥나마라[7]가 르메이의 부하로 있었다. 이때 르메이는 휘하 폭격기들의 높은 임무포기율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맥나마라는 특유의 분석력으로 임무포기의 원인 대부분이 공포에 있음을 알아챘다. 이러한 보고를 들은 석기시대 매니아는 "돌아가는 놈들은 군사재판에 회부하겠다!"라고 외치며 또 앞장서서 선두 기체에 탑승하여 출격했다! 그 즉시 임무포기율은 절반 이하로 뚝. 그러나 이 광분으로 폭격기들은 호위기들이 따라가 보호해줄 수 없는 초장거리 임무에 나서야 했고, 그 덕에 폭격기 손실과 전사자는 미친듯이 뛰어올랐다. 결국 폭격기의 임무 범위는 호위기의 한계거리로 제한되기에 이른다.

정리하자면

  1. 폭격기는 근본적으로 '공중전'용이 아니기 때문에, '공중전'을 위해 태어난 전투기와 싸우면 그저 데꿀멍.
  2. 미군은 호위기가 따라가지 못할 장거리 폭격도 했음.
  3. 호위기 없이 나가니 가다가 죽기도 부지기수, 폭격 성공해도 돌아오는 길에 빡쳐서 뛰쳐나온 독일 공군에게 걸려 줄줄이 죽어나감.
  4. 3처럼 줄줄이 죽어 나가니 폭격기 임무에 대한 공포가 퍼져나가고 죽기 싫어 중도 포기가 속출.
  5. 겁먹어서 그렇다는 보고를 받고 빡친 르메이가 현장에서 깽판치고 승무원들은 어쩔수 없이 무모한 깽판에 동행.
  6. 3을 계속 반복. 무모한 공격에 더 반복. 물론 주변 비행기가 터져가는 와중에 본인만 멀쩡했다. 뭔 40k야?
  7. 폭격기와 승무원 손실을 못 견디고 호위기의 활동 범위로 폭격임무 제한. 우리의 주적은 간부

제임스 캐럴은 자신의 저서 '전쟁의 집 - House of War'에서 2차대전 당시 르메이가 지휘한 폭격기 편대는 영국군이나 다른 미군 편대보다 낮게 날았기 때문에 타부대의 2배에 해당하는 탄착을 보여준 한편, 피해도 컸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B-17의 방어대형인 컴뱃 박스(combat box)를 창안하기도 했다. 슈바인푸르트 폭격작전에도 참가하여 비행대대를 직접 지휘하기도 하였으며, 1944년에는 중국 전선으로 전속된다.

3.1. 일본 본토 공습

중국 전선에서는 중국에서 출발하여 일본 본토를 폭격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이러한 임무는 B-29로서도 너무 멀었기 때문에 별로 효과적이지 못했다. 다만 이번에도 일부러 만주에서 방공망이 가장 밀집된 곳으로 앞장서서 선두 기체에 탑승하여 출격하고[8], 대공포에 적중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체가 멀쩡하고 요격기는 고고도로 못 쫓아오는 것을 파악하여 일본의 대공 능력이 B-29를 상대로 사실상 유명무실함을 입증하였다. 그리고 적인 일본군이 중국 도시들에 소이탄으로 효과적인 공격을 하는 것을 보고 이것을 반대로 적용해 일본 도시에 써먹을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생각을 구상하던 1945년 2월 대일 폭격을 책임지는 제21 폭격기 사령관에 취임. 전임 사령관은 다름아닌 제임스 둘리틀 중장. 둘리틀 특공대 대장인 그 사람이다.

사령부에 취임하여 대일 폭격을 총괄한다. 부임 직후 효율이 떨어지는 고공 폭격에서 좀더 위험하지만 효과적인 저고도 소이탄 폭격으로 전환하였으며, 목제 가옥과 건물이 많은 일본 도시를 대상으로 한 그의 작전은 엄청난 성공과 무자비한 파괴를 가져왔다.

이때 남긴 말이 상당히 유명한 "무고한 민간인 따위는 없다(There are no innocent civilians)." 흠좀무.[9] 하지만 전후에는 항공자위대 설립과 발전에 공을 세운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았다.

1945년 3월 10일 거행된 도쿄 대공습에서는 26만 7천 채의 건물이 파괴되고, 도쿄 거주자 8만 9천명이 사망했으며 6만 6천 명이 부상당하는 등 일본에 엄청난 손해를 입혔다. 이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이 만들어낸 인명피해를 상회하는 기록이다. 또한 대량의 기뢰를 폭격기로 투하하여 일본의 주요 항구를 봉쇄, 일본 전역에 기아를 몰고 오기도 했다. 그의 지휘 하에 종전 직전인 1945년 7월 시점에서 일본 주요 도시의 60%가 잿더미로 변했으며, 일본의 공업생산량은 폭격 전 대비 40% 이하로 떨어졌다.

(ɔ) Rekishi-JAPAN from
폭격 전과 폭격 후의 도쿄.

이 폭격직전 민간인 공습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 부하들을 본 르메이는 "사실 저 밑에 곤도 네는 군용 볼트를, 옆집 스즈키 네는 군용 너트를 만들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며 비웃었다. 그런데 관동대지진 이후 일본 정부의 주먹구구식 복구 계획 때문에 그의 말은 사실에 가까웠다.

중간에 일본의 대규모 카미카제 공격을 예측한 체스터 니미츠 제독의 요청으로 3월 중순부터 일본군 비행장 폭격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물론 석기시대로 시간여행을 좋아하시던 르메이는 이럴 시간에 차라리 공장이 숨어 있는 시가지를 불바다로 만드는게 더 효과적이라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물론 육군과 해군의 협의에 따라 니미츠 제독에게 르메이의 항공대 병력을 동원할 권한이 있었으므로 별 수 없이 임무를 계속 수행했지만 틈만 나면 이 임무에서 빠져나가려 발버둥을 쳤다.

약 2주정도 폭격을 마친 1945년 4월 1일, 르메이는 "이쯤 폭격했으면 일본군 비행장은 충분히 무력화됐다."란 보고와 함께 작전제외를 요청했다. 하지만 태평양 함대 사령부는 1주일 내에 대규모 카미카제 공격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기에 "우리가 봤을 때는 아직 멀었음이거 뭐야 더 무서워"이란 반응을 보이며 요청을 씹어버렸다. 이렇게 4월 중순까지 계속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아빠소환 헨리 아놀드 미 육군항공대 원수에게 쪼르르 달려가 "쟤들이 안 빼줘요."라고 징징거렸고, 이에 아놀드 원수가 해군참모총장 어니스트 킹 제독에게 비행장 폭격에만 치중된 폭격기 부대의 임무에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킹 제독은 "그럼 우리 해군은 철수할테니깐 육군이 알아서 잘들 해봐."라고 답변하여 아놀드 원수를 버로우시켰다.

결국 기대와는 달리 "21폭격기 사령부의 임무는 해군에게 협조하여 일본군 비행장을 폭격하는 것."이란 명령서가 다시 한 번 내려오면서 더 이상 빠져나갈 구석이 없어졌다. 결국 이 임무는 5월 11일까지 계속되었다. 임무가 끝난 직후 니미츠 제독은 르메이에게 서신을 보내 진심어린 감사를 표했다.

실제 전후 연구에 따르면 미군 폭격기가 허구헌날 비행장을 두드려대는 바람에 실제 일본군이 확보했던 항공기에 비해 출격한 항공기의 수가 급감하여 카미카제 작전의 효율까지 덩달아 떨어드린 효과를 낸 것으로 분석됐다. 한마디로 석기시대 매니아님의 불평과는 달리 굉장히 효율적인 작전이었던 셈.

비행장을 폭격하는 와중인 4월에는 기아 작전(Operation Starvation)의 일환으로 폭격기의 일부를 떼서 항만지역에 기뢰를 살포하라는 명령도 떨어졌다. 이 역시 직접 폭격이 아니어서 르메이의 입맛에는 안 맞았지만 위에서 시키는 데 별 수 있나. 그 결과 한달간 기뢰 만 2천여개가 살포되었는데, 약 100만톤에 달하는 일본 수송선단을 격침시키고 본토로 들어가는 원자재 수송량을 80%나 잘라버릴 수 있었다. 또한 현대까지도 연안 해운에 대한 의존이 큰 일본의 국내 교통망도 동시에 마비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전후 분석 보고서는 이 기뢰 살포가 일본 본토 공격 도중 가장 가성비가 뛰어난 작전이었다고 적고 있다.[10]

이 작전으로 일본 전역에서 민간인 30만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여태까지 미군 장성들 중에서 민간인을 죽인 숫자로는 가장 높은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일본 전역의 공업 기반을 쑥 재배지로 만들어버린 덕분에 몰락 작전을 굳이 벌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일제의 공업 생산량이 급락해서, 원자폭탄과 함께 수십만명을 죽였지만 결국 수백만명의 목숨을 살린 비정하지만 현실주의적인 결정이었다는 평가가 있다.[11] 전후 분석 결과로는 해상 수송을 차단한 상태에서 일본의 철도망을 끊어 내부에서부터 굶기는 것이 효율적이었을 것이라 평가하지만[12], 이 때는 본토에 대한 지리 정보가 제한적이었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도쿄 대공습 항목에서 르메이의 전임이었던 핸셀 소장의 정밀 폭격에 대한 집착이 설명되어 있는데, 만약 핸셀 소장이 일본의 철도망의 지리와 역할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있었다면 실행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철교를 끊는 것이야말로 정밀 폭격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임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4.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은근히 역사적인데 덜 알려진 기록을 세우기도 한다. B-29를 몰고 일본열도→북미 논스톱 비행을 시도하여 성공한 것. 이때 B-29의 역사적인 기록이 이어지는데, 첫째로는 역사상 최대 중량 이륙, 둘째는 역대 최장거리 논스톱 비행, 셋째로는 최초의 일본-시카고 논스톱 비행이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워싱턴 D.C.까지 들어갈 수 있었는데 못갔다는거. 이 당시 폭격기 세대가 기록에 도전하여 각각 바니 자일스 중장, 르메이 소장, 에멧 오도넬 준장이 조종을 맡았는데 이 중 르메이의 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연료부족으로 당초 목표인 DC를 못가고 시카고에 착륙하여 급유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르메이는 끝끝내 워싱턴까지 가려고 들었고, 전쟁부에서는 그런 르메이를 뜯어말리며 날씨가 좋지 않다는 핑계로 시카고로 보냈다고...는 하는데 실은 쓰리스타가 못한걸 투스타가 해내면 꼴이 우스우니까 그랬을 뿐이라는게 정설. 어쨌든 셋 다 비행훈장도 받았고 결국은 모두 해피엔딩.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육군항공대가 공군으로 재편되면서 중장으로 진급했다. 그리고 1949년 전략공군사령관이 되며, 강철의 대원수베를린 봉쇄로 자본주의 진영한테 빅엿을 먹이려고 하자 "전세계의 C-54 조종사들한테 전한다. 지금 즉시 독일로 날아오도록!"을 시전, 그 유명한 베를린 공수를 시행하여 소련에게 "네들만 쪽수로 밀어붙이는 거 아님" 하면서 역관광을 선사했다. 그리고 1957년에 물러날 때까지 세계대전 이후 당나라 군대가 다 되어있던 전략공군사령부를 죽어라 갈궈서 다시금 최정예로 육성해놨다. 신형 폭격기의 개발과 배치, 공중급유기 개발[13], 각종 전술과 전략연구, 그리고 대륙간 탄도탄순항 유도탄 개발에도 많은 공을 세웠다.

1951년 전략공군사령관 재임기에 대장으로 진급했는데 44세의 나이에 세운 이 기록은 율리시스 S. 그랜트 이래 최연소 기록이었다. 57년에 공군참모차장, 61년에는 공군참모총장이 되었으나, 케네디 정권하에서는 '효율'을 내세우는 국방장관이자 자신의 옛 부하였던 로버트 맥나마라, 그리고 밴드 오브 브라더스제101공수사단장 출신으로 유명한 당시 합참의장 맥스웰 테일러와 여러 면에서 충돌한다.[14] 케네디 정부 때 피델 카스트로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만들자 쿠바에 선제 핵공격을 주장하면서 초강경파로 이름을 날렸다. 케네디와 맥나마라는 의견이 극단적으로 벌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서도 르메이를 공군참모총장에 임명했는데, 이는 만에 하나 핵전쟁이 정말로 벌어질 경우 핵전쟁을 감정에 휘말리지 않고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지휘관은 르메이밖에 없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둘 다 르메이를 일종의 필요악으로 간주한 것이었다.

(ɔ) from
쿠바 미사일 위기 때 르메이 공군참모총장(오른쪽 2번째)과 케네디 대통령

존슨 대통령과 맥나마라 장관과의 의견 차이로 인해[15] 1965년 공군참모총장 자리에서 사임하고, 1968년 한때 부하였던 조지 월레스의 제안으로 부통령 후보로 나서지만, 미국 민주당 보수파였던 조지 웰레스의 "미국독립당(딕시크랫)"은 13% 정도의 지지만을 받는 데 그쳐 정계진출은 실패로 돌아간다.[16] 하지만 전통적으로 양당제가 굳건한 미국에서 저 정도라면 제3정당 후보로서는 매우 높은 지지율이다. 남부지역에서는 5개 주에서 선거인단을 가져갔을 정도. 덕분에 리처드 닉슨이 당선되고 험프리가 떨어지기에 톡톡한 역할을 했다.

여담이지만 커티스 르메이는 M16 시리즈의 미군 채용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기도 하다. M16, 그러니까 AR-15가 처음 나왔을 때 개발사인 아말라이트사는 이 총의 미군 제식 채용을 노렸지만, 미군은 기존에 쓰던 M1 소총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M14를 고집한 탓에 판매실적이 영 빌빌대던 상황[17]이었는데, 르메이만은 이 총에 주목하여 AR-15가 공군 경비대용으로 채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 평소 폭격을 좋아했던걸 보면, 폭탄이건 총알이건 시원하게 끼얹는 것을 참으로 좋아하는 타입인 듯하다(…). 이후 터진 베트남 전쟁에서 M14의 '제식 소총에 요구되는 다양한 상황에서 적절한 대처능력'의 부재가 만천하에 공개되자 미군은 제식총기를 바꿀 필요성을 느꼈으나 그게 금방 결과물이 뚝딱 나올리 없는 관계로 차세대 소총인 SPIW 계획을 발진시켰는데, 그 계획이 완료될 때까지 땜빵으로 공군 경비대가 쓰던 AR-15에 주목하여 잠시 채용했는데 막상 보니 땜빵이 제법 쓸만하여 결국 M16이 되어 50년이 다 되어가도록 미군 부동의 제식 소총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지금 미군을 보면 1세기 채울 기세 석기시대 운운하는 무식한 이미지로 알려져있지만 어디까지나 석기시대 얘기는 드립성이 짙을 뿐 석기시대를 다시 불러올 군사 병기의 진가를 알아보는 안목은 2차 대전때나 베트남전 때나 변함없이 탁월했음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믿기 힘들겠지만 일본에서도 항공자위대 창설에 기여한 공로로 욱일대수장[18]을 받았다! 커티스의 목에 훈장을 걸어주는 일본정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전시상황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되긴 했지만 원수로 추대하자는 의견도 나왔을 정도임을 생각하면 여럿에게 고루 인정받는 명장이었다 할 수 있다. 그저 영원히 회자될 석기시대 드립 때문에 명장이라기보다는 무식한 맹장으로만 비춰지는게 문제일 뿐.

5. 석기시대가 좋은 시대다! 마니아

제2차 세계대전, 6.25 전쟁, 베트남 전쟁 등에서 적을 "폭격기로 (적국을) 석기시대로 만들겠다"는 발언을 자주 하였다. 오죽하면 이런 패러디가 나돌정도...특히나 베트남전 당시에 많이 하였고 이 때가 가장 유명하다. 위의 부통령 후보 출마 때 베트남전을 어떻게 끝낼 것이냐는 질문을 받자 대답이 "베트남을 폭격으로 석기시대로 돌려놓겠습니다!!"였다.공약 이 석기시대 드립은 르메이의 사후에도 이어져서 9.11 테러 이후 눈이 뒤집힌 미국이 파키스탄 대통령에게 영공 열라고 협박할 때 정말로 쓰이기도 했다(...).

또한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전면적인 선제 핵공격을 주장, 보다 강경하게 밀어붙이기를 원했고, 지구 전체를 석기 시대로 되돌리고 싶었던 것 같다.[19] 존슨 정부하에서도 베트남에 대해 전투기/전폭기/공격기에 의한 소규모 전술 폭격이 아닌, 대대적인 전략 폭격을 요구했다. 극단적으로 호전적인 성향의 주전론자로, 자신의 전쟁관을 요약해서 말하기를 "충분히 많이 죽이면 더 이상 못 덤빈다. 그게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이라고.[20] 다만 그의 전략은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이미 세계대전=핵전쟁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상황이 나빠진 이후이기 때문에 극단적인 매파의 전략은 인류 멸망을 불러올 수도 있는 관계로 결국 채택되지 못했다. 누구도 날 막을 수 없어. 카스트로건, 흐루쇼프건, 케네디건, 그 누구도! 쿠바 핵을 없앨 수 없다면 차라리 석기시대로 만들어 버릴테다!

죽을 때까지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아서, 자신이 죽기 전까지 미국과 소련 사이에 제3차 세계대전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하였다. 인류에게는 너무나도 다행스럽게도 냉전은 그가 1990년에 사망한 뒤인 1991년에 소련이 해체되면서 핵전쟁 없이 조용하게 종식되었다.(1989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C-54 소환을 시전했던 기억이 떠올라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이러한 행보로 인한 건지 여러 영화에서 꼴통스러운 인물로 패러디 되기도 했다. 예컨대 스탠리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 터짓슨 장군은 르메이의 패러디다. 1983년작 영화 워게임에서는 NORAD 사령관 베린저 대장의 행동거지나 생김새가 워낙에 석기시대스러워서 이 영화 처음 보는 밀덕을 뿜게 만든다(...).

리그베다 위키에서는 석기시대가 연상되거나 도시 등이 개발살난 경우에 이 분을 빌어 표현하는 암묵의 룰이 있다.

스티븐 킹타임슬립 대체역사물 11/22/63에서는 케네디 암살 미수 사건(…)이 끝난 후 월러스 행정부의 당시 부통령으로 하노이 핵폭격을 직접 지시한다. 부통령 주제에(?)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있던 게 더 대단해보인다? 결국 하노이가 석기시대로 한줌의 먼지로 사라지는 비극이 벌어진다.

영화 The Rock에서는 전직 해병대 테러범 중 하나가 독가스 로켓을 이용한 인질극이 뜻대로 되지 않자 "놈들이 여길 석기시대로 되돌려버릴 거야.(They're going to bomb our ass back to the Stone Age.)" 라고 하기도 한다. 일부러 맞춘 것은 아니었겠지만, 영화 막판에 마지막 남은 독가스 로켓을 처리한 것 역시 네이팜탄이었다.[21]

그 외에도, 텍사스 주 상원의원인 테드 크루즈(Ted Cruz)는 2014년 8월경 한 집회에서 "ISIS가 현대를 버리고 과거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한다면, 저희도 도와줄 의향이 있습니다. 폭격해서 석기시대로 되돌려줘야 합니다."("They want to go back and reject modernity. Well, I think we should help them. We ought to bomb them back to the Stone Age.")라고 발언하였다. 다만 여기는 공격할만한 인프라가 딱히 없고 조직원들이 금방 산개해서 크게 효과는 없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은 무슨 생각인지 이 양반마저 모에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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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나라 석기시대로 만들뻔한 사람을 모에화하는 열도의 기상(...)

6. 사람다운 의외의 면모

위의 내용만 놓고 보면 좋게 말하면 불호령으로 부하를 부려 먹고, 나쁘게는 폭격하자고 소리나 질러대는 무식한 전형적인 미군 장성으로 자주 그려지지만,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조용하고 과묵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아직 미국 본토에 있던 중령 시절 르메이를 처음 본 신병들이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는 모습에 오히려 더 겁을 먹었다거나, 목소리가 너무 조용해서(...) 가까이 귀를 기울여야 했고 곁의 부하들은 말을 듣느라 알아서 조용해졌다는 일화가 많다. 명령 역시 두 문장을 넘어가는 일이 없었고 문장 길이도 짧았다. 이렇게 말을 아낀 덕분에 일단 말이 나왔을 때는 그만큼 더 설득력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무식해 보이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부하들의 정신 상태는 패튼보다는 잘 챙겨줬다고 한다. 폭격기가 대공포에 격추당하는 것은 승무원의 기량과 전혀 상관 없이 순전히 운에 달려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차피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모두 평등하게 죽은 목숨이니까(...) 죽기 전에 임무는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사기 관리를 해준 것이다. 승무원을 모두 잃고 간신히 살아남은 폭격기 조종사가 승무원이 죽는 건 너무 무섭지만 비행기는 계속 몰고 싶다고 하자 썬더볼트 조종사로 보직 변경을 시켜줬다거나, 종교 차별을 하고 삥뜯는 병사를 직접 지상군 부대로 쫓아냈다거나, 휘하 승무원들이 영국 아가씨들과 사귀는 걸 눈감아준 등의 일화가 있다. 보직 변경을 시켜준 조종사의 예에서 보듯 부하들의 고충이나 공포에 대한 고백도 마다하지 않고 잘 들어주었다. 위로를 잘 해줬다는 말은 안 했다 그래도 소원수리보단 훨씬 낫잖아?

폭격기 조종사: "이게 뭔 꼬라집니까. 7키로 상공에서 폭격하라고 만들어준 새 폭격기를 2키로 저공으로 내려보낸 개새끼가 누굽니까? 그 새끼 때문에 부조종사가 죽었단 말입니다!"("God damn it, I'd like to know who the son-of-a-bitch was that took this magnificent airplane, designed to bomb from 23,000 feet, and he took it down to 5,000 feet and I lost my wingman. He was shot and killed.")
르메이: "우리가 왜 여기 있나? 여기 온 이유가 뭔가? 자네의 부조종사가 죽은 일은 나도 그만큼 슬프고 가슴아픈 일이야. 내가 내려보냈어. 나도 똑같은 자리에 앉아봤어.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나도 잘 알아. 부조종사 일은 유감일세. 하지만 그 대신 도쿄를 파괴하지 않았나."("Why are we here? Why are we? You lost your wingman, and it hurts me as much as it does you. I sent him there. And I've been there. I know what it is. But you lost one wingman, and we destroyed Tokyo.")
-도쿄 대공습 이후, 로버트 맥나마라의 회상, CNN 인터뷰에서.

결정적으로, 폭격 임무가 끝난 후 디브리프를 할 때는 조종사를 비롯한 승무원들이 자신에게 개새끼라고 욕을 하고 작전 과정에서 벌어진 오류를 비판하는 것을 오히려 권장했다고 한다. 그렇게 욕하면서 하는 비판이야말로 장병들의 입장에서 작전을 진솔하게 바라볼 수 있는 귀중한 간접 경험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전략공군사령부 사령관이었을 때도 휘하 장교들이 민간 항공사로 이직하면 일 할 사람이 없다[22]는 이유를 들어 비슷하게 장병과 직원 복지에 신경을 많이 써줬다. 이 복지 정책중에서 르메이가 가장 자랑스러워한 것은 스트레스 해소 및 취미 생활 덕질 목적으로 쓰도록 기지마다 설치한 공용 작업장이었다고 한다. 본인도 HAM 라디오와 자동차 조립이 취미여서 장병들과 같이 자동차 조립도 했다고. 덕업일치 끝판왕 대한민국 공군 군덕후 문화의 시조는 이 양반일지도 그 외에도 50년대 당시에 차별받던 흑인도 백인과 똑같이 훈련을 받으면 똑같이 잘할 수 있다고 (그리고 안 그래도 사람이 모자라는데 일하겠다는 사람을 차버릴 이유가 없다고) 역설하면서 흑인 조종사/기술자의 육성 및 현장에서의 인종간 통합을 적극 추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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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M 라디오에 열중하고 있는 소년과 함께 찍은 사진. 자상함의 화신 (...)

위에서 북베트남 월맹군이 항복하지 않으면 석기시대로 되돌아가도록 폭격하겠다는 말은 원래 자신의 부관이자 전기 작가였던 칸토어(MacKinlay Kantor)가 약간 과장을 섞어서 넣은 문장이었고, 본인은 그저 미 공군이 그럴 능력이 있다는 취지로만 말했다고 이후 인터뷰에서 직접 부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칸토어가 르메이에게 원고를 주고 최종 확인을 해달라고 했을 때 본인이 귀찮아서 대충대충 읽다가(...) 이 부분을 놓친 것이라 할 말은 없다. 60년대 후반에는 포기하면 편해 대세를 되돌릴 수 없음을 체감하고 자기 변호를 그만두었다.


믿기 힘들겠지만 그 역시 딸바보였다. 부인이 유산을 수차례 겪다가 겨우 낳은 딸이어서 비행장 구경을 시켜주거나 몸개그(...)까지 부리는 등 매우 각별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 딸 제이니는 2015년 현재도 살아있는데, 워렌 코작이 저술한 아버지의 평전(LeMay: The Life and Wars of General Curtis LeMay)을 읽고 아마존닷컴에다 서평을 남기기도 했다.# 부인과의 금슬도 매우 좋아서, 무뚝뚝한 게 지나쳐 웃거나 스트레스를 풀 줄 모르는 르메이가 그나마 사람답게 즐거움이란 걸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부인의 덕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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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상호확증파괴가 보편화된 현대에는 미친 소리로 들리겠지만, 사람을 죽이러 휘하 병사에게 죽으러 가라고 명령하는 자리에 앉은 입장에서 느끼는 책임감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의 말은 이렇게 하나하나가 돌직구였다고 한다.
  • [2] 르메이 본인은 전투기 조종사 출신이었음에도 폭격 훈련을 받아본 뒤 폭격이란 개념에 완전히 뿅갔다 당시 프롭 전투기가 지니는 근본적인 역할의 한계를 절감하고 폭격기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그에게는 너무나도 다행스럽게도, 이 당시 미군이 발주한 폭격기가 바로 B-17이었다.
  • [3] 원문: "My solution to the problem would be to tell them frankly that they've got to draw in their horns and stop their aggression or we're going to bomb them into the Stone Age. And we would shove them back into the Stone Age with Air power or Naval power—not with ground forces. (그 문제에 대한 나의 해결책을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놈들에게 나팔따위 집어넣고 그만 공격적으로 나오든가 아예 폭격으로 석기시대로 되돌리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린 그놈들을 우리의 지상군이 아닌 우리의 항공력과 해군력으로 석기시대로 몰아넣어버리겠다 이겁니다.)" (LeMay, C. E., Kantor, M., Mission With LeMay: My Story, 1965, p. 565.)
  • [4] 굳어버린 오른쪽 얼굴을 가리려고 시가나 파이프 담배를 물어서 붙었다. 아래 타임지 표지와 같은 이미지로 굳어졌다.
  • [5] Kozak, W., LeMay: The Life and Wars of General Curtis LeMay, 2009
  • [6] 이는 불완전한 정보에 바탕한 분석이라 독일군 측이 분석한 3,000발당 1대보다 과대 평가된 수치이지만, 대략적인 피해를 숫자로 말해주는 것 자체로 어느정도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다.
  • [7] 아래의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르메이의 상관이었다. 이 아이러니는 그가 나중에 찍은 회고록 형식의 다큐멘터리 <포그 오브 워>에서도 잠깐 언급된다.
  • [8] 직속 상관인 헨리 아놀드 대장이 미친 짓이라고 당연히 반대했지만, 르메이의 부탁(?!)에 딱 한번만 허용해주었다.
  • [9] 전문을 옮기자면 There are no innocent civilians. It is their government and you are fighting a people, you are not trying to fight an armed force anymore. So it doesn't bother me so much to be killing the so-called innocent bystanders.(무고한 민간인이란 없다. 그것은 그쪽 정부와함께 우리와 싸우는 민중들이고 우리는 무장한 적군하고만 싸우는것이 아니다. 그래서 소위 죄없는 방관자를 죽이는 것을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총력전 항목에도 있듯 현대적 총력전에서는 전쟁 수행에 참여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어린아이나 중증 장애인, 또는 죽을 날만 기다릴 만큼 고령화된 노인들을 빼면 무고한 민간인이 없어지고 오로지 전쟁 수행원만 있다고 간주하는데 그걸 이야기한 것이다.
  • [10] United States Strategic Bombing Survey, 1946, p. 73
  • [11] Kozak, 2009
  • [12] United States Strategic Bombing Survey, 1946, p.90~92
  • [13] 유달리 대형기체를 많이 쓰는 미 공군은 미 해군과 달리 빠른 시간에 한 기체를 몰빵으로 급유할 수 있는 붐 방식의 급유기를 쓰는데 이것이 르메이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편대 단위로 여러대가 급유를 받아야 하는 전투기들에게는 짜증날법도 하지만 르메이의 목적은 크고 아름다운 전략폭격기 급유의 신속화였기에 전투기들의 투정 따위는 씹혔다(...). 그래도 전투기들 입장에서도 붐 방식 급유가 살떨리는 조종이 필요한 프로브 방식 급유(해군이 쓰는 방식)보다 편하긴 하다고.
  • [14] 특히 맥나마라가 기용한 민간인 계열 인사에 대해서는 매우 신경질적으로 불만을 표했다. 아래 쿠바 미사일 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피그만 침공 당시 (원래부터 변수가 너무 많아 성공할만한 작전은 절대 아니라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만약 성공을 원한다면 폭격을 비롯한 공중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묵살당했는데, 자신의 예상대로 피그만 침공 자체 실패한 것을 넘어 흑역사가 되자 불신은 더더욱 깊어졌다.
  • [15] 가장 입장 차이가 컸던 분야는 미 공군의 차기 주력 병기가 무엇이 되겠냐는 것이었는데, 르메이는 XB-70 발키리의 도입을, 맥나마라는 XB-70을 취소하고 유도 미사일에 대한 연구투자를 주장하여 서로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다만 소련의 SAM 기술이 초음속 항공기 기술보다 더 빨리 발달하여 XB-70은 실패작이 되고 비슷한 기체 컨셉의 B-1 랜서 역시 장거리 폭격은 물건너가고 CAS만 하는 신세가 되면서 결국 르메이의 판정패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B-52는 영원한 장수만세, 아니 노인학대...
  • [16] 부통령 후보 자리를 승낙하는 연설에서부터 전쟁 이야기와 "필요하다면 핵무기를 써야 한다"고 말했다. 덕분에 월레스의 지지율은 피크 때의 1/3 수준으로 줄어버렸다고 한다. 월레스가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걸 생각하면 결과적으로 잘 된 것일지도?
  • [17] 때문에 라이센스가 콜트사로 넘어간다...
  • [18] 욱일장은 훈팔등부터 훈일등까지 있는데, 르메이가 받은 욱일대수장은 훈일등 욱일장이다.
  • [19] 이 때 존 케네디 대통령의 온건책을 뮌헨 협정과 빗대어 비판하기도 했다. 문제는, 뮌헨 협정은 케네디 본인의 역린이기도 했다는 것. 케네디의 아버지인 조셉 케네디는 뮌헨 협정 당시 영국 주재 대사로 활동하면서 독일에 대한 유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었다.
  • [20] 본인은 전쟁 초장에 압도적인 무력을 행사하여 적의 전쟁 수행 능력을 꺾어버리면 결과적으로 전쟁이 일찍 끝나니 아군도 덜 죽고 적군과 적측 민간인도 덜 죽는다는 사고 방식으로 전쟁에 임한다고 여러차례 밝힌 바 있다.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을 포함한 전쟁 수행원들이 죽음을 포함한 약간의 불행을 감수함으로써 모두의 불행이 덜해진다는 일종의 공리주의(...)적 사고를 통해 자신의 명령과 행동을 정당화하였다. 그러니까 석기시대에 직접 사는 것보다는 관광객의 입장에서 관람하는 것이 낫다는 입장이다 재래식 전쟁의 끝판왕이었던 2차대전 때는 이런 사고방식이 너무나도 잘 먹혀들어서 그렇게 고속 승진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 [21] 정확히는 터마이트 플라즈마(Thermite Plasma)라는 폭발물이다. 사유는 영화 초반에도 나오지만 험멜 장군 일파가 훔친 VX 가스 로켓이 네이팜을 이긴다는 이유로 이걸 사용한 것이다. 이 VX 가스 로켓이 네이팜을 이기는 것인지와 실제로 터마이트 플라즈마라는 폭발물이 있는 건지는 잘 아시는 전문가 분들이 추가 바람
  • [22] 별 3개짜리 중장이었을 때 받는 월급이 당시 민간 조종사의 월급과 똑같았다. 나머지 부하 장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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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0 23:4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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