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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last modified: 2013-09-30 10:00:36 by Contributors

독소전쟁1944년 1월 24일부터 2월 16일까지 우크라이나의 체르카시와 코르순에서 벌어진 전투. 러시아에서는 '코르순-세브첸코프스키 공세'라 부른다. 일반적으로 '체르카시 포위전'으로 부르기도 한다.[1] 쿠르스크 전투바그라티온 작전 사이의 독소전쟁사가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인지도는 별로 크지 않지만 독소전쟁의 중요하고 치열한 전투 중 하나였다.

Contents

1. 1944년 1월의 상황
2. 포위
3. 만슈타인의 역습
4. 항복 요구와 끓어오르는 가마솥
5. 우리는 이 지옥에서 탈출한다!
6. 결과


1. 1944년 1월의 상황

1944년 1월,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의 남부 집단군은 드네프르 강 서안으로 밀려나 판터-보탄 방어선을 유지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 히틀러는 기갑총감 하인츠 구데리안의 끝없는 요구에도 불구하고 동부방벽(Ostwall) 건설은 '병사들이 후퇴할 빌미를 제공한다.' 하여 반대 해 왔다. 그 결과, 드네프르 방어선상의 판터-보탄 방어선은 대부분 콘크리트도 없는 유개호로 만들어진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 결과 드네프르 강 방어선은 1943년 말 소련군의 계속된 공세로 대부분 붕괴되었다.
(ɔ) The original uploader was Ghirlandajo at English Wikipedia from

대충 만든 이런 엉성한 방어선은 그대로 붕괴되었다.

소련군이 1943년 12월에 키예프를 탈환하고 키예프 서쪽으로 돌출부를 확대하는 데 성공하자 만슈타인은 전선을 후퇴시키고 남부의 니코폴 광산을 포기하고 집단군 중점을 중부 집단군과 연결할 수 있는 북부, 4기갑군 지역에 둘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니코폴 광산은 독일 전시경제에 필수적이며 단 한치의 땅도 내주지 말라며 요지부동 이었다.[2] 히틀러의 결정에 니코폴 북쪽으로는 늘어날 대로 늘어난 전선을 지친 보병사단들과 기갑사단들이 지켜야 하게 되었다.

남부 집단군 소속 빌헬름 슈팀머만 대장의 제42 군단과 테오발트 리에브 중장의 제11 군단은 B 분견군을 형성하고 체르카시 서쪽 코르순에 주둔하며 독일 오토 뵐러 상급대장의 제8군 전방에 서서 소련군의 드네프르 강 도하를 막고 있었다. 두 군단은 마지막 남은 드네프르 강 방어선이라는 이유로 위치를 절대 사수하여야 했다. 히틀러는 이 지역은 훗날 반격에 즁요한 곳이라고 했지만 대부분 망상이라고 생각했다.

그 무렵 스타프카 대리로 파견되어 우크라이나 전선군들을 통합 지휘하고 있던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는 제8군과 B 분견군 사이의 틈으로 공세를 가한다면 B 분견군을 코르순과 체르카시에 포위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주코프는 자신의 작전 계획을 스타프카에 보내며 승인을 요청했다.

주코프의 작전안에 따르면 니콜라이 바투틴 대장의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과 이반 코네프의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 소속 전차군들이 체르카시와 코르순에 대한 2중 포위망을 형성한다. 내부 포위망은 B 분견군을 직접적으로 포위망 안에 가두며 외부 포위망은 갇힌 독일군의 탈출 기도를 차단할 것이었다. 만슈타인은 2개 군단이 포위당하기 알맞다며 히틀러에게 후퇴 요청을 했지만 히틀러는 늘 그랬듯이 만슈타인의 요청을 거절했다.

주공은 코네프의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맡았으며 코네프는 제53군, 제4 근위군, 제5 근위 전차군을 체르카시 남서쪽에 투입시키고 후속으로 제52군, 제5 근위 기병 군단, 제2 전차군을 투입시킬 것이었다. 바투틴의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제27군과 제40군, 새롭게 편제된 제6 전차군을 북서쪽에서 투입시킬 것이었다. 당시 소련군은 독일군이 포위 기도를 눈치채지 못했다고 판단했지만 독일 제8군 참모들은 어느 정도 소련군의 기도를 눈치 챈 상태였다.

2. 포위


소련군은 1943년 말부터 B 분견군에 대해 전 전선에서 심각한 압박을 가해 오고 있었다. 42군단은 키예프 돌출부에서 일부 남하한 소련 전차들에게 공격당하기 시작했고, 우익에 있던 11군단 역시 12월 20일부터 대규모 교전에 휘말린 상태였다. 한편 42군단 남쪽에 있던 제7 군단은 압력을 해소하기 위해 서쪽을 향해 소련군 측면을 연신 두드렸지만,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44년 1월 7일에는 제5 근위 전차군의 공세가 제47 기갑 군단의 방어 구역인 키로보그라드에 떨어졌다. 히틀러는 키로보그라드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려 제10 기갑척탄병 사단, 제14 기갑 사단, 제3 기갑 사단, 제376 보병 사단이 포위될 위기에 처했으나 제3 기갑 사단장 리츠 바이에를라인의 단독 결정으로 제3 기갑 사단은 포위망을 돌파해 구원을 위해 달려온 그로스도이칠란드 기갑척탄병 사단과 제3SS 기갑 사단 '토텐코프'와 합류했다. 이 반격으로 독일 제8군 전체를 위협하는 포위 작전은 저지당했지만 남부 집단군 예하 기갑사단 중 8개 기갑 사단의 전력이 소모당하는 타격을 받아 42, 11군단이 포위되는 여건을 조정했다.

1월 18일, 2개 전선군의 협격 공세가 시작되었다. 독일 정보기관이 알지 못했던 새로운 전차군인 제6 전차군이 눈 속을 뚫고 튀어나오자 독일군은 혼비백산했다. 제6 전차군은 제7 군단과 제42 군단의 전투 지경선을 파고드는 데 성공하여 두 군단을 쪼개 버리고 포위망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 공세로 제7 군단은 남서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제6 전차군 소속 제20 근위 전차 여단이 28일에 즈베니호로드카 마을에서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 소속 병력들과 합세하는 데 성공했고 2월 3일에는 두 전차군이 완전히 조우하여 코르순-체르카시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스탈린은 포위망에 갇힌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 전투 때의 제6군 꼴이 될 것이라고 흡족해 했다. 코네프는 스탈린에게 이렇게 장담했다.

"걱정 하실 것 없습니다, 스탈린 동지. 갇힌 적들은 그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포위망 속에 갇힌 2개 군단은 55퍼센트 정도밖에 편제되지 않은 6개 사단과 완전 편제된 정예 SS 사단인 제5SS 기갑 사단 '비킹'과 벨기에 인으로 구성된 SS 강습여단 '발로니엔', 에스토니아인으로 구성된 SS 대대 '나르바' 등 60,000여명의 병력이었다. 포위망에 갇힌 2개 군단은 '슈팀머만 집단'(Gruppe Stemmerman)으로 새롭게 편제되었다.

3. 만슈타인의 역습

만슈타인은 재빨리 포위망을 뚫을 기동 집단을 제3 기갑 군단과 제47 기갑 군단을 근간으로 하는 기동 집단을 조직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포위망에 갇힌 슈팀머만 집단이 지원 없이 스스로 포위망을 빠져나와야 한다고 못밖았다. 포위망 돌파를 위한 기동 부대 투입이 판터-보탄 방어선을 무너트릴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제3 기갑 군단장인 헤르만 브라이트 기갑대장은 2개 기갑 군단의 공세를 통해 슈팀머만 집단을 구출해 낼 수 있는 회랑을 여는 것이 가능하다고 만슈타인에게 보고했다. 만슈타인은 브라이트의 보고를 근거로 들며 히틀러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제47 기갑 군단이 제11 기갑 사단을 앞세운 1차 공세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만슈타인은 제3 기갑 군단에 제11 기갑 사단이 열지 못한 돌파구를 열으라고 명령했다. 브라이트는 제16, 17 기갑사단을 그닐로이 티키취 강을 넘게 했고 제1 기갑 사단과 제1SS 기갑사단 'LSSAH'로 2개 기갑사단을 북익에서 엄호하게 했다. 이 진격은 괜찮은 효과를 거두며 어느 정도 소련군의 포위망에 돌파구를 내었다.

한편 독일군의 공격을 보고받은 주코프는 바투틴에게 4개 전차 군단을 동원해 독일군의 기도를 좌절시키라고 명령했다. 그 무렵 기온이 올라가며 라스푸티차가 시작되자 독일군의 진격은 진흙 때문에 느려지는 반면 라스푸티차에 익숙한 소련군은 독일군에 비해서는 문제 없이 전장으로 진격할 수 있었다.

2월 5일에서 6일 밤 사이 코네프는 제4 근위군과 제5 근위 기병 군단에게 포위망 안으로 공세를 가해 슈팀머만 집단이 포위망 바깥의 독일군과 협격하지 못하도록 붙잡아 놓으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라스푸티챠 때문에 소련군의 공세에도 차질이 생겼고 슈팀머만은 비킹 사단과 제72 사단을 재빨리 후퇴시켜 재앙을 피할 수 있었다. 소련군은 2월 7일과 10일 사이에 재정비 후 다시 공세를 할 계획을 세웠지만 포위망을 형성한 부대들의 보급 난항과 제3 기갑 군단이 그닐로이 티키취 강을 도하하며 무리하게 진격한 제6 전차군의 보급선을 타격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포위망이 안전해지기 힘들게 되었다.

4. 항복 요구와 끓어오르는 가마솥

2월 11일, 제3 기갑 군단은 다시 동쪽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제3 기갑 군단의 병력과 전차도 많이 소진되었지만 슈팀머만 집단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한편 소련군은 포위망 안으로 삐라를 뿌리는 등 선전 공작을 시작했고 몇몇 독일 병사들은 밤중에 자리를 이탈해 소련군에게 항복했다. 주코프, 코네프, 바투틴은 포위망 안으로 전령을 보내 자신과 그들의 이름으로 슈팀머만에게 항복을 요구했지만 슈팀머만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주코프는 스탈린그라드에서 항복한 전 제6군 참모장 폰 자이들리츠 대장[3]에게 항복을 권유하게 했지만 역시 슈팀머만은 묵묵부답 이었다.

슈팀머만 집단이 계속 저항을 할 수 있는 요인은 원할한 공중 보급이었다. Ju-52 수송기들은 82,948갤런의 연료와 868톤의 탄약, 4톤의 의료 물자를 포위망 안으로 수송하고 4,161명의 부상병을 후방으로 수송했다.

그럼에도 포위망 안의 독일군은 나날히 사기가 떨어져가고 있었으며 특히 비킹 사단의 사기 저하가 심해 사단 내에서는 절대로 포위망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론이 크게 퍼져 있었다.

슈팀머만은 포위망 북쪽으로 탈출로를 열 것을 결정하고 포위망 남쪽인 그닐로이 티키취 북안에서 공세를 펼치며 소련군을 속이려 했다. 이 기동은 소련군에게 혼란을 일으켰는데 소련군은 슈팀머만 집단이 다른 방향으로 활로를 뚫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독일군은 치열한 공세를 펼치며 노보-부다, 코마로브카, 힐키, 산데로브카 등 포위망 남서쪽 마을들에서 소련군과 처절한 공방전을 벌였다.

2월 11일, 로베르트 카츠너 소령의 제105 척탄병 연대가 노보-부다 마을을 야간 기습으로 점령했다. 다음 날 코마로브카도 독일군 손에 들어왔다. 2월 15일 저녁에 제105 연대는 다시 공세를 시작해 힐키를 점령하고 소련군의 역습을 격퇴시켰다. 아직 모든 사단은 포위망 안에 있었지만 독일군의 계속된 저항은 소련군의 포위망 유지를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2월 16일, 제3 기갑 군단의 선봉 부대는 슈팀머만 집단 에서 7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5. 우리는 이 지옥에서 탈출한다!


제3 기갑 군단은 포위망 북쪽으로 소련군의 완강한 방어와 보급 부족에 고생하며 진격하고 있었다. 제3 기갑 군단은 산데로브카로 진격하는 길목인 239 고지를 점령하려 애를 쓰고 있었지만 매번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소련 제5 근위 전차군이 제3 기갑 군단을 몰아내려고 달려오고 있었다. 이때 제8군 사령부는 슈팀머만 집단에게 북쪽 239 고지로 진격해 제3 기갑 군단과 연결하라고 명령했다.

마침내 슈팀머만 집단은 포위망을 빠져나가기 위한 공세를 시작했다. 그러나 슈팀머만 집단과 제3 기갑 군단이 고작 7킬로미터 떨어져 있을 때 코네프가 2월 17일에 포위망 안의 모든 독일군을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4 근위군, 제27군, 제52군, 제5 근위 기병 군단이 제5 근위 전차군 소속 전차들을 지원받아 포위망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후퇴하는 독일군 후방으로 코사크 기병들이 돌입해 독일군을 닥치는 데로 베어나갔다. 슈팀머만은 철수를 후방에서 엄호하기 위해 제57 사단과 제88 사단에서 병력을 차출해 탈출로 후방에 남았다. 슈팀머만 집단과 제3 기갑 군단은 필사적인 전투 끝에 5킬로미터 까지 가까워지는 데 성공했고 마침내 산데로브카에서 서로 연결하는 데 성공했다. 포위망이 뚫린 것이다.

그러나 탈출로는 순식간에 지옥의 문으로 변했다.
© Menzendorf (cc-by-sa-3.0-de) from

진흙밭에 빠져버린 독일군 차량

소련 포병들은 포화와 로켓을 아낌 없이 탈출로로 날렸으며 Il-2 급강하폭격기들이 한꺼번에 탈출로 상공에 나타났다. 좁은 탈출로에는 버려진 차량, 전차들과 독일군 부상병들이 무자비한 포화와 항공 공격 속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있었다. 밤중에도 소련 야간 폭격기들이 몰려와 폭탄을 퍼부었다.

좁은 탈출로도 위험에 몰리자 만슈타인은 더 이상 히틀러의 후퇴 허가를 기다릴 수가 없었다. 만슈타인은 슈팀머만 집단에 포위망을 뚫고 나오라는 뜻으로 이렇게 명령했다.

"암호명 자유(Freiheit), 작전 목표 리즈안카, 2300시."

짧은 명령이 전달되자 슈팀머만은 행동을 개시했다. 슈팀머만 집단은 3개의 진격로를 통해 포위망을 뚫을 공세를 가할 것을 결정하고 북쪽에서 제112 사단 집단, 비킹 사단은 남쪽에서 제72 사단은 중앙에서 공격하며 제105 척탄병 연대가 지원할 것이었다. 야습을 위해 실탄 사용은 최대한 자제되었고 전원 소총에 했다. 마침내 작전 개시 1시간 30분 후 슈팀머만 집단은 소련군의 방어선을 뚫는 데 성공했다.

0410시에 몇몇 독일군 연대와 대대들이 슈팀머만 집단 소속 병력이 포위망을 뚫고 나가 옥치아브르의 독일군 방어선 에서 제3 기갑 군단과 제1 기갑 사단과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공세가 계속되는 동안 슈팀머만은 직할 부대를 이끌고 최후방에서 몰려오는 소련군을 막아내며 탈출을 돕고 있었다.

그러나 진격로 좌익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소련 제5 근위 전차군 병력들이 239 고지로 몰려들어 방어를 확고히 함에 따라 산데로브카에 뚫어 놓은 돌파구가 다시 닫혀 버렸다. 그러자 슈팀머만 집단은 산데로브카 탈출로를 포기하고 남쪽으로 향해 그닐로이 티키취 강을 도하할 것을 결정했다. 이 결정은 소련군의 공세를 받아 내면서 수많은 사상자를 남겼지만 결국 새로운 탈출로를 여는 데는 성공했다. 물론 대부분의 중장비를 포기해야 했다.

독일군이 포위망에서 탈출하고 있다는 것을 안 코네프는 자신이 스탈린에게 한 호언장담이 깨지고 있음을 알고 무척 열을 받았다. 바투틴은 포위망이 뚫렸다는 보고를 듣고 크게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한편 스타프카에서는 독일 제3 기갑 군단의 전투력을 과대평가하여 더 이상의 공세는 무리라고 판단하고 있었지만 코네프는 IS-2 중전차 여단이 증강된 제20 전차 군단을 동원하여 다시 포위망을 닫아버리려 했다. 그 무렵 소련 제206 소총병 사단과 제5 공수 사단이 패퇴함으로서 탈출로는 더 넓어지게 되었다.

그날 정오, 슈팀머만 집단의 사단들이 그닐로이 티키취 강에 도착했다. 강의 급류는 거셌고 전날 내린 눈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슈팀머만 집단 사단에게는 이 문제를 해결한 도하장비들이 전무했다. LSSAH 사단이 다리들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중장비에 우선 순위가 할당되었다. 후방에서 소련군 전차들과 기병들이 몰려오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독일 병사들은 앞다투어 강에 뛰어들었다. 적지 않은 병사들이 급류에 휘말리거나 심장 마비에 걸려 사망했다. 그러자 비킹 사단장 오토 길레 SS 소장이 손에 손을 잡아 인간 사슬을 만들어 강을 건너라는 명령을 내렸다. 손이 미끄러지거나 소련군의 포화에 사슬이 끊김으로써 최후를 맞은 병사들도 있었지만 무질서하게 맨몸으로 도하하는 것보다는 한결 나았다.

이 동안 독일 공병들이 강 위에 부교를 여러 개 가설하는 데 성공해 제57 사단과 제88 사단은 무사히 도하할 수 있었다. 탈출한 병력들은 리시안카의 독일군 방어선으로 향해 후퇴하던 제3 기갑 군단과 합류했다. 후퇴 대열의 후방으로 베케 중전차 연대가 접근해 소련군의 추격을 저지했다.

6. 결과

소련군은 포위망에 갇힌 독일군 2개 군단의 완전 섬멸이라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비킹 사단을 포함해 6개 독일군 사단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포위망에서 풀려난 독일군 사단들은 전면적 개편이 필요할 정도였다.

소련에서는 체르카시-코르순 포위전에서 52,000명의 독일군을 사살하고 11,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주장했으며 다른 주장에는 57,000명을 사살하고 18,000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독일 제8군 문서에 따르면 포위망에 갇힌 독일군은 60,000명이 되지 않았고 19,000여명이 전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슈팀머만 대장은 마지막까지 철수를 후방에서 엄호하다 전사했다.

코네프는 포위망이 뚫린 것을 무척 아쉬워 했지만 스탈린은 코네프를 치하하며 원수 계급장을 달아 주었다. 반면 바투틴에게는 포위망이 뚫린 책임을 물어 심하게 견책했다. 이후 바투틴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게릴라에게 피습당해 중상을 입고 시름시름 앓다가 원수 계급장도 못달고 사망했다.

한편 포위망을 뚫기 위한 2개 전차 군단의 배치는 소련군이 다른 방향에서 남부 집단군을 향한 공세를 펼쳤을 때 필요한 '소방수'의 부재를 낳았고 결국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이후의 소련군 공세를 막아내는 것을 더 힘겹게 만들더니 끝내는 남부 집단군이 우크라이나에서 완전히 축출당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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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엄밀히 따지면 틀린 말이다. 1월 24일 당시 체르카시는 소련군이 수복한 상태였다.
  • [2] 구데리안은 예전에 드네프르 상류 석탄광과 철광에 대해서도 똑같은 소리를 했었다며 빈정거렸다.
  • [3] 슈팀머만의 옛 상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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