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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로코솝스키

last modified: 2014-07-15 07:03:27 by Contributors


폴란드어: Konstanty Ksawerowicz Rokossowski
러시아어: Константи́н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Ксаве́рьевич)[1] Рокоссо́вский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로코솝스키(1896. 12. 21 - 1968. 08. 03).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폴란드 출신 소련군 원수. 독소전쟁의 중요한 전투마다 선봉을 맡아온 소련맹장이지만 정작 고향인 폴란드에서는 소련의 앞잡이로 욕을 먹는 비운의 장군이다. 그리고 소련에서도 처음에 폴란드 출신이라고 무시 + 편견 + 차별 등을 받았었다.[2] 후일 크렘린 벽무덤에 안장된 것을 보면 공적까지 씹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뭔가 안습한건 사실.

Contents

1. 출생과 성장
2. 대숙청
3. 독소전쟁에서의 활약
4. 소련의 대리인
5. 평가
6. 서훈 목록

1. 출생과 성장

로코솝스키는 폴란드 귀족의 후손이지만 몰락하여 철도 노동자를 하고 있던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아들로 태어났다. 로코솝스키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아직 제대로 알려진 기록이 없다. 바르샤바에서 출생했다는 말도 있고 후일 로코솝스키 가가 이주한 러시아 벨리키예루키에서 출생했다는 말도 있다.

그의 양친은 차례차례 세상을 떠나 로코솝스키는 14살이란 어린 나이부터 여동생과 노동을 해야 했다. 채석장과 직물 공장 등에서 힘들게 일하던 로코솝스키는 16살에 반정부 시위에 휘말려 투옥 생활도 경험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로코솝스키는 군에 입대, 부사관으로 훈련받은 후 제5 기병연대에 입대하여 용맹을 발휘, 4개의 게오르기 십자 훈장을 획득했다. (주코프의 경력와 비슷하다)
1917년에 공산 혁명이 발발하자 로코솝스키는 공산당과 신생 소련군에 입대하였고 폴란드인 출신 지원병들을 모집해 소련군에 입대시켰다.

적백내전이 발발하자 제30기병사단 소속 연대를 이끌고 백군과 싸웠다. 나무랄 데 없는 활약을 한 로코솝스키는 프룬제 군사대학에 입학해 엘리트 장교가 되는 교육을 받았지만 소련군 내에서 암암리에 벌어진 폴란드 출신에 대한 차별 때문에 승진이 더딘 편이었다.

그런데 1922년에 소련-폴란드 전쟁이 터지자 제27기병연대장인 로코솝스키는 자신의 연대를 이끌고 앞장서서 참전, 동족인 폴란드인과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 전쟁에서의 활약으로 그의 충성심이 인정되어 로코솝스키는 군부 내에서 입지를 크게 할 수 있었다.

1926년, 로코솝스키는 몽골군의 기병대 고문관으로 가게 되는데 여기서 게오르기 주코프를 만나고 주코프의 신뢰를 얻게 된다.

1929년에는 소련 정부와 중화민국 정부의 협약에 따라 1931년에서 1936년 동안 중국 동부 철도를 군벌들로부터 지키는 일을 수행하며 제7, 제15기병사단장이 되고 제5기병군단장으로 승진하는 등 군인으로서의 로코솝스키의 미래는 탄탄대로인 것처럼 보였다.

2차 세계대전 중 라이벌 격이었던 게오르기 주코프와의 첫 만남은 1930년대 초반 이루어졌다. 이 당시 로코솝스키는 제7 사마라(쿠이비셰프) 기병사단장을 맡고 있었고, 주코프는 그 휘하의 여단장이었다. 그는 공식적으로 주코프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했다:

"엄격함. 자신의 욕구에 쉽게 만족하지 않고 집요함. 다소 불손하고 충분히 호감이 가지는 않음. 다소 고집스러움. 자부심에 가득 차있음. 전문적인 면에서 잘 훈련되어 있음. 지휘관으로서 폭넓은 경험을 갖고 있음."

훗날 주코프가 그의 석방에 앞장서고, 개선식에서도 그의 옆에 서게 배려해준 것을 보면 한때 옛 상관에 대한 호감이 상당했던 모양이다.

로코솝스키는 미하일 투하쳅스키가 주창한 종심전투교리의 강력한 지지자가 되어 붉은 군대 내의 보수적인 지휘관들을 비판하는데 앞장섰다.

2. 대숙청

1937년에 이오시프 스탈린은 군부 내에도 대숙청의 피바람을 몰고 왔고 로코솝스키는 그 피바람에 휘말리고 말았다. 로코솝스키는 주요 숙청 대상인 투하쳅스키의 지지자로 분류됐고, 매사에 간섭하는 정치장교들과 자주 갈등을 일으켜 당성에 의심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군단장으로 근무하던 로코솝스키에게 난데없이 NKVD요원들이 나타나 로코솝스키가 폴란드 스파이이며 일본과 폴란드에 기밀 정보를 팔았다는 황당한 명목으로 체포했다.
끌려간 로코솝스키는 NKVD가 내세운 말도 안되는 증거 자료들에 항변했지만 돌아온 것은 끔찍한 고문이었다.

로코솝스키는 9개의 이와 3개의 늑골이 부러지고 시도 때도 없이 손가락과 발가락이 망치질 당해 후유증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게 될 지경에까지 이르는 고문을 받았다. 로코솝스키는 이후 맞춤형 구두를 신고서야 절뚝거리며 걸을 수 있었다. 여기에 로코솝스키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레닌그라드에 있는 크레스티 형무소에 갇혔다.

3. 독소전쟁에서의 활약

겨울전쟁에서 대숙청으로 인한 유능한 장교의 부족이 붉은 군대에게 얼마나 큰 해악을 끼쳤는지 드러나자 1940년에 총참모장으로 임명된 게오르기 주코프는 스탈린에게 숙청되어 수용소에 갇힌 지휘관들을 전선에 복귀시키자고 강력히 주장했고 스탈린은 마지못해 승인했다. 시베리아에서 끔찍한 나날을 보내던 로코솝스키는 이에 자신이 왜 체포되었는지를 포함해서 일체의 해명 없이 석방되었고, 크림 반도에서 잠시 요양한 후 제9기계화군단장으로 현역에 복귀하였다.

이때 석방 통지서에 유무죄 여부의 언급이 전혀 없었던 탓에, 한때 로코솝스키가 사형수 신분으로 석방되었다는 루머가 꾸준히 돌았으나 사실은 다르다. 비슷한 방식으로 석방/복직된 지휘관이 꽤 많았으며, 이는 겨울전쟁의 패배와 함께 독일과의 개전 가능성이 조금씩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경험 있는 지휘관의 숫자가 부족하다는 점이 부각된 결과였다. 로코솝스키만 특혜를 받은 것도 아니었고, 단지 장성급 숙청 대상자로서 복직된 사람들 중 가장 큰 활약을 했기 때문에 주목을 끌었을 뿐이다.

1941년, 마침내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로코솝스키는 주코프가 지휘하던 서부 선군의 우익인 제16소총군의 사령관이 되어 스몰렌스크를 방어하게 됐다. 이때 스몰렌스크는 독일의 두 명장인 하인츠 구데리안헤르만 호트가 각각 지휘하는 제2기갑집단과 제3 기갑집단의 우회포위기동으로 포위되어 4개 야전군이 사라졌지만 로코솝스키의 16군은 간신히 외곽으로 탈출하여 독일군의 후속진격을 차단하는데 성공했다. 이것은 독소전쟁 초기에 소련이 보여준 몇 안 되는 성공적인 기동이였다.

모스크바 공방전이 시작되자 로코솝스키는 제16소총군을 이끌고 모스크바 외곽의 클린을 방어해 내는데 성공해 소련군은 전투를 한결 수월하게 이끌 수 있었다. 모스크바의 승리에 고무된 스탈린은 무리한 계획인 동계 공세를 시작했는데 로코솝스키는 르제프 돌출부를 공격, 제1차 르제프 전투로 알려진 대규모 전투에서 르제프 돌출부의 독일 9군과 제4기갑군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지만 1월 중순에 9군 사령관 아돌프 슈트라우스가 해임되고 후임으로 임명된 발터 모델의 공세적 방어에 패배하고 만다.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벌어지자 로코솝스키는 돈 전선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독일군에게 패배한 여러 야전군들을 추스르고 볼가 강을 통해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된 제62소총군에게 보급물자를 전달했다. 그때 '천왕성 작전'이 시작되자 주코프는 남서전선군과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이 역포위망을 완성하면 돈 전선군이 포위망을 이어받을 것을 로코솝스키에게 명령했고 로코솝스키는 완벽히 역할을 수행하는데 성공했다. 완벽한 포위망을 구사한 로코솝스키는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 들어갔고 결국 독일 제6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의 항복을 직접 받아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중부전선군 사령관이 된 로코솝스키는 하르코프에 대한 무리한 공격 계획과 동시에 실행되는 독일 중부집단군에 대한 공격 계획인 '별 작전'에 참여하게 됐다. 로코솝스키는 너무 공격 일정이 빡빡하다고 불만을 터트렸지만 결국 공격을 진행했고 에리히 폰 만슈타인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을 승리로 이끔에 따라 별 활약도 못하고 후퇴하고 말았다. 다행이 포포프 기갑군같은 괴멸은 면했고 작전이 무리했다는 사실을 스탈린이 인정해 책임은 받지 않게 됐다. 사실 이 작전은 후에 소련군 교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이 후 소련군은 공세종말점을 벗어난 무리한 공격은 자제하고 일단 정지했다가 재편성 후 다시 진격하는 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후 쿠르스크 전투에서 로코솝스키의 중부전선군은 쿠르스크 돌출부 북쪽을 맏아 독일 중부집단군과 그 선봉인 발터 모델의 9군과 맞서게 되었다. 상황은 1차 르제프 전투와는 달리 로코솝스키와 모델의 입장은 뒤바뀐 상태였다. 로코솝스키는 결국 모델의 돌파를 막아 내고 9군은 결국 포니리 마을에서 진격을 멈춤으로써 쿠르스크 전투 승리에 일익을 담당했고 쿠르스크 북쪽에서 진행된 쿠투조프 작전을 주도하였으나 7월 12일부터 8월 18일까지 38일 동안, 독일군 49만 2천명을 섬멸하기 위해 소련군 128만 2천명이 투입된 상황에서 독일군은 사상자 86064명, 전차 손실 250대를 기록한 반면 소련군은 사상자 429890명, 전차 손실 2586대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만 했고 결과적으로 오룔은 소련군의 손에 재탈환되었으나 9군과 2기갑군은 무사히 퇴각하였고 여기서 소련군의 전략예비대가 워낙 큰 피해를 입었기에 실리 소콜롭스키의 서부전선군과 함께 진행한 중부집단군에 대한 공세 작전인 수보로프 작전에서 다시금 모델의 방어에 막혀 고배를 맛보아야 했다.

로코솝스키는 이후 중부전선군과 브랸스크 전선군을 통합한 벨라루스 전선군의 사령관에 취임해 바그라티온 작전의 최선봉에 서서 민스크를 포위해 9군을 섬멸하고 독일 제4군과 제1기갑군을 괴멸시켜 우크라이나를 해방시키고 폴란드 바르샤바 목전인 비수아 강까지 진격했으나 이번에도 도중에 중부집단군 사령관에 임명된 발터 모델의 파쇄공격에 진격한계점을 넘어버린 선두부대가 궤멸당하면서 바르샤바를 눈앞에 두고 소련군은 진격을 멈추어야만 했다.

바그라티온 작전에서의 공로로 로코솝스키는 원수로 승진했다. 이 작전에서 스탈린은 늪지대가 많은 벨라루스에 기갑부대가 들어갔다가 모두 빠져버릴까봐 걱정해서 빠른 진격을 말렸으나, 로코솝스키는 나무로 가교를 만들고 탱크를 움직이는 방법으로 이를 해결하여 전광석화같은 공격을 감행했다. 이때 로코솝스키는 소련군 계획에 맞춰 독일군 전선을 한 개의 돌파구로 뚫으라는 스탈린의 명령에 이의를 제기했다. 로코솝스키는 두 개의 돌파구가 있어야 한다는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스탈린은 "가서 다시 생각해보라"고 세 번이나 얘기했지만, 그는 언제나 돌아와서 "스탈린 동지, 두 개의 돌파구가 필요합니다"라는 자신의 의견만 반복했다. 세 번째에 스탈린은 침묵을 지켰지만, 로코솝스키에게 걸어가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긴장된 순간 작전실에서는 스탈린이 로코솝스키의 견장을 뜯어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대신 스탈린은 "타당한 판단이 자네의 자신감을 받쳐주는 거겠지" 라고 말했고, 로코솝스키의 의견을 따랐다. 작전은 성공적이었고 로코솝스키의 명성은 확고해졌다.

그런데 여기서 로코솝스키를 두고두고 구설수에 오르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소련군이 바르샤바 근처까지 진격하자 바르샤바 시민들은 영국에 망명한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시에 따라 바르샤바 봉기로 알려진 대봉기를 일으켜 독일군과 맞섰다. 그러나 폴란드를 공산화해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들 생각을 하고 있던 스탈린은 영국과 미국의 지지를 받는 폴란드 망명정부를 도와줄 생각이 없어 로코솝스키에게 바르샤바로의 진격을 멈추고 폴란드 시민군을 도와주지 말것을 명령했다.[3]

로코솝스키가 아마 심한 갈등에 시달렸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는 있지만 결국 로코솝스키는 폴란드 시민들을 도와주지 않았고[4] 2달만에 바르샤바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 이후 강건너편에서 머물고 있든 소련군은 재정비를 완료했고 그제서야 로코솝스키는 진격하여 바르샤바를 점령했다.

바그라티온 작전 이후 벨라루스 전선군은 주코프가 지휘하는 제1벨라루스 전선군과 로코솝스키가 지휘하는 제2벨라루스 전선군으로 갈라졌다. 여기에 이반 코네프가 지휘하는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이 합류해 유럽 전선의 마지막 대규모 전투였던 베를린 전투가 시작되었고, 공격 축선의 북익을 맡은 로코솝스키는 페르디난트 쇠르너의 중부집단군과 르하르트 하인리치의 비수아 집단군을 상대해 다소 지지부진한 진격을 보였다.

그러자 스탈린은 제1벨라루스 전선군과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이 베를린으로 진격하도록 했고 제2벨라루스 전선군에게는 동프로이센과 단치히를 제압하고 독일 중부집단군을 붕괴시켜 북부 폴란드와 오데르 강 유역을 점령하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이런 명령의 이면에는 폴란드인인 로코솝스키에게 베를린 함락의 영광을 줄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고 한다.

어찌됐건 로코솝스키는 명령을 수행해 베를린 함락에 도움을 주었고, 엘베 강으로 진격해 버나드 로 몽고메리 원수의 영국군과 조우했다.

주코프는 로코솝스키를 배려해 모스크바에서 열린 승전 기념식에서 자신의 옆자리에서 말을 타고 사열식을 지휘하게 해 주었다.

4. 소련의 대리인

독일이 멸망하고 폴란드에는 소련의 공산 괴뢰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는데, 로코솝스키는 스탈린의 명령으로 신생 폴란드 정부의 국방장관이자 폴란드군 원수에 취임했고 뒤이어 내각 수반인 각료의회 부의장 자리까지 차지했다. 로코솝스키는 말이 국방장관이지 사실상 소련의 대리인이며 폴란드의 감시자가 된 것이다.

그래도 나름 폴란드군을 모양새 있게 갖추는데는 기여한 모양이다. 로코솝스키뿐만 아니라 소련군에 있던 여러 폴란드계 소련인들이 폴란드군에 들어와서 지휘관이나 부사관을 역임하였다.

로코솝스키는 오랫동안 러시아에서 살아 폴란드 말이 무척 어눌한데다가[5] 폴란드 국민들은 러시아-폴란드 전쟁과 바르샤바 봉기에서 로코솝스키가 한 역할 때문에 로코솝스키를 소련의 하수인이자 러시아에서 온 이방인으로 생각하여 싫어하고 불신했다. 이에 로코솝스키는 "러시아에서는 나를 폴란드인이라고 했는데, 폴란드에서는 나를 러시아인이라고 한다"며 나름 씁쓸한 감정을 나타냈다.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가 집권하자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에서는 반소 자유화 운동이 일어났는데 로코솝스키는 이를 잔인하게 탄압하는데 앞장섰고 비밀경찰, 고문과 강제 수용소를 동원해 소련에 반대하는 수많은 인사들을 잡아들였는데 로코솝스키 자신이 소련에서 당했던 것과 똑같은 방법이었다.

1956년 포즈난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에는 1만명의 병력과 300대의 전차를 동원해 군중에게 발포까지 하며 시위대를 해산시켜 74명의 사상자를 냈다. 로코솝스키의 잔혹한 방법은 큰 비난을 받았고 폴란드 내에서의 로코솝스키의 입지는 크게 좁아졌다.

갈은 년도에 민족주의적이고 진보적인 고무우카[6]가 집권하자 로코솝스키는 해임되어 소련으로 쫓겨났다. 로코솝스키는 흐루쇼프에게 폴란드를 무력으로 응징할 것을 주장했다. 이쯤 되면 폴란드에 대한 애정은 다 사라진거다...

흐루쇼프는 로코솝스키의 청을 들어주지 않고 대신 고무우카와 협상하여 로코솝스키를 다시 폴란드로 돌려보내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로코솝스키에게는 폴란드 귀화 이전 소련 직위를 다시 내리며 달랬다.

로코솝스키는 이후 소련에서 전쟁 영웅으로 숭상받으며 국방차관 서리 및 카프카스 군관구 사령관을 지내다 국방차관으로 기용되어 소련 군부의 핵심에 있다가 1968년에 죽어 우리나라의 현충원이라 할 수 있는 크렘린 벽 묘지에 묻혔다.

자서전으로 '군인의 의무'가 있다.

5. 평가

학자들은 로코솝스키가 독소전쟁의 분수령에서 항상 선봉을 자처하여 날카롭고 뚝심 있게 승리를 이끌어 낸 전형적인 맹장이자 소련 승리의 큰 공신으로 평가한다. 롬멜이나 패튼에 비교되는 인물. 아마도 독소전쟁에 활약한 일선 야전사령관으로는 소련군내에서도 최고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군인으로서의 로코솝스키는 흠 잡을 데 없는 인물로 부하들은 그를 정직하며 겸손하다고 높이 평가했다. 로코솝스키의 제2벨라루스 전선군은 동유럽 점령지에서 최대한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 했다고 평가받는다. 현재도 러시아에서는 로코솝스키를 영웅으로 숭배하며 모스크바에는 로코솝스키 거리가 있다.

반면 로코솝스키의 고향인 폴란드에서는 소련의 앞잡이이자 역적으로 지금도 온갖 욕을 듣고 있으며 그의 개입 기간을 흑역사 취급하고 있다. 사실 이것은 전혀 스스로 폴란드인이라는 생각이 없던 그를 억지로 폴란드에 앉힌 스탈린의 잘못이긴 하지만... 민주정부가 세워진 현재도 그렇지만, 이미 1950년대 후반 민족주의적 공산주의자가 집권했을때부터 이미 흑역사 취급을 받았다. 이것이 바로 아이러니가 아닐까 한다.

6. 서훈 목록

  • 소비에트연방영웅 2회
  • 전승훈장
  • 레닌훈장 7회
  • 적기훈장 6회
  • 수보로프훈장 1급
  • 쿠투조브(Kutuzov) 1급
  • 폴란드 비르투티 밀리타리 훈장
  • 폴란드 그룬발트 훈장
  • 영국 배스훈장 명예기사십자장
  • 프랑스 Légion d'honneur
  • Cross of St. George 4th class, Medal of St. George 4th, 3rd and 2nd cl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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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본명은 폴란드어 이름인 크사베로비치(Ksawerowicz)에서 따온 크사베리예비치(Ксаве́рьевич)였지만 1917년에 콘스탄티노비치(Константи́нович)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 [2] 2차대전 전에 폴란드와 소련은 적국이었고, 폴란드는 소련-폴란드 전쟁으로 소련 영토를 많이 빼앗았다. 그래서 폴란드계 소련인들은 엄청난 차별을 받게 된다. 유명한 투하체프스키 원수도 나치 독일 및 폴란드 간첩이라는 조작된 혐의로 처형되었다. 그러나 폴란드가 소련의 위성국이 되는 2차대전후에는 폴란드계에 대한 차별은 없어진듯 하다.
  • [3] 이와 관련해서, 실제로 소련군 스스로도 바르샤바까지 진격할 여력이 소진되었고, 독일군의 방어 역시 맹렬해졌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로코솝스키가 돕고 싶었고 스탈린 역시 돕고 싶어 했다 해도 도울 수 없었을 것이라는 이야기. 하지만 고립된 국민군에 대한 공수보급 및 항공지원 문제에 있어서는 소련의 비협조가 두드러졌으므로 그다지 돕고 싶지 않았던 것까지 부정하기는 어렵다.
  • [4] 아주 돕지 않은 것은 아니어서 자기 휘하에 있던 공산당계 폴란드인민군 4개 사단을 바르샤바 포위망 돌파에 투입했다. 처절하게 독일군에게 털리고 쫓겨나서 그렇지만. 참고로 폴란드 공산당에서는 포위망 돌파에 실패했다고 사단장들을 해임시켰다고...
  • [5] 폴란드어와 러시아어는 외국어치고는 가까운편이라서 서로 60-70%는 통한다. 그런데도 로코소프스키는 폴란드를 떠날때까지 공개석상에서도 폴란드어로 연설하기 힘들어서 러시아어를 썼다고 한다. 이렇게 이사람은 폴란드인이라는 생각을 스스로도 전혀 안했으니...
  • [6] 정작 이 사람도 나중에 어영부영한 정책집행으로 인민들에게 실망감을 주어 1970년 노동자 투쟁때 책임을 지고 사실상 지도자 자리에서 쫓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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