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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미사일 위기

last modified: 2015-06-13 02:17:27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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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개요
2. 불균형
3. 쿠바
4. ExCom
5. 치킨 게임
6. 검은 토요일
7. 철수
8. 후일담
9. 미디어믹스

1. 개요

Cuban Missile Crisis (1962. 10. 16 ~ 28.)

회의를 끝내고 백악관을 나오면서 노을이 드리운 하늘을 보았다. 참으로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다음주 토요일이 오기 전에 다 죽을 것이라는 예감에 공포에 휩싸였다.
― 당시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1]

냉전 중의 세기적 대립 사건. 그리고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험했던 순간.

2. 불균형

당시 미군소련에 투발 가능한 핵전력은 미 본토에서만 탄도탄 170여 기에 B-52 전략폭격기 555대로, 이걸로 투발 가능한 전략핵탄두만 총 1,830기였다. 여기에 서유럽에 배치된 중거리 핵전력까지 소련을 사정권 내에 두고 있었다. 반면 소련이 갖고 있던 건 고작 66기의 ICBMSLBM 뿐. 이걸로는 선제공격을 통한 미국 핵전력 제압은 택도 없었고, 미국이 먼저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아주는 수밖에 없어 요단강 익스프레스가 확정되는 상황(…). 소련 붕괴 후 밝혀진 당시의 핵전력 비율은 17:1로, 답이 안 나오는 막장 파워 밸런스였다.

게다가 미국은 터키이탈리아에도 주피터 중거리 탄도 미사일을 배치하고 있었다. 특히 터키의 경우 모스크바가 바로 미사일의 사정권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은 강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3. 쿠바

1959년 수립된 쿠바 혁명 정부는 유나이티드 후르츠로 대표되던 여러 서방계 자본을 추방하고 토지를 국유화하는 등, 미국이 중남미에 다져놓은 정책적 기반을 흔들었다. CIA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의 제거를 시도했고, 피그만 침공으로 대표되는 CIA의 압박이 이어졌다. 이에 카스트로는 자신의 정권을 떠받칠 바깥 기둥으로써 소련에 협력을 요청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남미로 영향력을 뻗을 거점을 찾던 흐루쇼프와 카스트로 사이에 비밀 서신이 오고 갔다. 그 내용은 미국의 턱 밑인 쿠바에 중거리 탄도미사일 기지를 설치해달라는 것. 이는 소련의 치명적인 핵전력 열세를 일거에 평형 상태로 바꿀 수 있는 신의 한 수였다. 이미 대량 생산된 중거리 탄도탄을 쿠바에 배치해 미국에 대한 추가적 공격수단을 갖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흐루쇼프는 카스트로의 제안에 콜을 외치며 1962년 7월 7일에 공식적으로 핵미사일 기지 건설에 합의한다. 이후 쿠바에 미국 동남부[2]까지의 R-12 미사일과 여기에 탑재할 핵탄두를 9월 8일과 16일에 나누어서 보내주고, 이후 당연히 미사일 기지를 만들 전문 인력과 장비를 배달한다. 이 미사일 기지는 총 9개의 사일로를 가졌는데, 이 중 6개는 R-12를 위한 사일로이고 나머지 3개는 이후 설치될 R-14용 사일로였다. R-14는 미국 본토의 워싱턴주를 제외한 미 본토 전역에 핵타격이 가능한 미사일이다.


9월 말, 미국 신문들은 소련 선박이 쿠바로 무기를 이송 중이라고 보도하기 시작했다. 케네디는 국민들에게 그가 아는 바에 따르면, "이 무기들은 방어용이지 공격용이 아니다"라고 발표했다. 흐루쇼프는 케네디에게 그 발표가 맞다고 절대적인 보장을 해주었다. 케네디는 "만약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거대한 사태가 발생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4. ExCom

그렇게 기지가 건설되던 중 1962년 10월 14일, 쿠바의 하늘을 감시하던 U-2기가 찍은 항공사진 몇 장이 펜타곤백악관에 전달됐다.[3][4]

어이없게도 소련군 미사일 기지들의 위장 수준은 형편없었다. 농촌 도로에 트럭들이 줄지어 지나다니고 텐트들이 군 시설처럼 열과 오를 딱딱 맞추고 있었던데다가 부대의 상징 등을 땅에 그려놓은 걸 항공사진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는 소련의 정보전달과 의사결정 체계가 막장이었기 때문인데, KGB가 처음부터 전문적 정보기관에서 출발한 CIA와는 달리 비밀경찰인 체카에서 기원한 탓에 국가지도부에 미가공된 정보만 제공하고 전략적인 정보나 견해나 경고를 주지는 못했고, 결국 제대로 된 상황판단과 지시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 #[5]

촬영된 것은 소련이 쿠바에 건설 중인 미사일 기지 및 관련 시설. 이후 반나절 안에 모든 미군 병력에 비상경계가 발령되며 소련제 중거리 탄도미사일의 사거리가 계산된 보고서가 만들어졌다. 미 의회는 북미방공사령부가 그린 가상 전황도를 보고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앤틸러스 열도 - 쿠바가 중심이 된 붉은 원은 말 그대로 미국 전역을 덮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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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지도. 중간 크기의 원은 쿠바에 이미 배치했던 R-12의 사정거리고, 가장 큰 원은 그 다음 배치하려던 R-14의 사정거리다. 보시다시피 워싱턴 주캘리포니아 일부를 제외한 미국 본토 전 지역이 사정권에 들어가 있다. 여기에 소련 극동지방의 미사일도 고려하면 사실상 태평양의 섬들을 제외한 미국 전 영토가 소련의 중거리미사일 사정거리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캐나다멕시코의 주요 도시들이 포함된 건 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즉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National Security Council)를 소집했다. NSC 멤버 중에서도 핵심 참모들이 집행위원회(ExCom; Executive Committee)에 참여했는데, 린든 B. 존슨 부통령, 로버트 F. 케네디 법무장관, 딘 러스크 국무장관,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 더글라스 딜론 재무장관, 존 맥콘 CIA 국장, 맥스웰 테일러 합참의장[6], 맥조지 번디 국가안보 특별보좌관, 시어도 소렌슨 특별보좌역, 케네시 오도넬 보좌관 등의 쟁쟁한 인물들로 구성돼 있었다. 이들은 대책을 논의하였으나 내부에서조차 의견이 엇갈렸다. 액스콤 참여자 프로필

군부는 이를 명백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폭격이나 미사일로 쿠바의 발사 시설을 날려버리는 방안이 최선이라고 외쳤다. 특히 공군의 커티스 르메이는 ExCom 구성원이 아니었음에도 여러 루트를 통해 전면적인 선제 핵공격으로 소련과 쿠바를 초토화해서 석기시대로 고고하자고 주장했다.[7]

케네디의 민간 국방 전문가들은 미국 국민들이 놀랄만큼 핵공격으로부터 취약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보호 시설은 도시들에만 존재할 뿐이고, 시골에는 약간의 혹은 거의 아무런 보호시설도 없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 시골 지역에 5천만명이 살고 있고, 도시 거주자들도 2~3백만 톤의 TNT의 파괴적인 위력에 직면해서 취약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물론 모든 인류의 생존이 걸린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 있는 문제에 케네디 대통령을 비롯한 온건파는 다른 방안이 나올 때까지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케네디는 이 때 제1차 세계대전의 시작과 그 배경을 연구한 바버라 터크먼(1912~1988)의 역사서 <8월의 포성>[8]을 읽은 터라 사소한 행위가 얼마나 쉽게 대규모 전면전으로 갈 수 있는지를 심각하게 고려했다고 한다. 바바라 터크먼이 인류를 구했다.

CIA의 보고 직후에는 ExCom 내부에서 폭격 밖에 답이 없지 않느냐는 매파가 우위인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다. CIA가 찍어온 사진이 ExCom에 전달되었을 때, 케네디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법무부 장관의 첫 반응은 이런 XX들이였고, 이후에도 공습을 강하게 주장했다. 이러한 매파의 강경책은 쿠바에 소련의 전술핵이 없다는 가정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세게 나가더라도 최소한 쿠바만 피해를 본다는 논지였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대로 쿠바에는 R-12 미사일(사정거리 - 위 지도의 중간원)과 함께 핵탄두가 충분히 배치되어 있어서[9] 쿠바는 공격받을 경우 워싱턴 D.C.을 시작으로 미국 남동부와 중부의 주요도시에 핵미사일을 날릴 능력과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소련도 보복을 충분히 준비하고 있었다. 실제로 당시 엑스콤 회의에서는 수도를 시애틀로 바꾸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이후 묵인, 전면 침공, 공습, 회유 등의 수많은 대안들이 제시되었으나 케네디는 봉쇄를 선택하게 된다. 다만 봉쇄(Blockade)라는 용어는 그야말로 전시에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공식적인 용어는 검역(Quarantine)으로 선택했다. 케네디가 쿠바를 봉쇄하기로 생각을 정한 계기는 공군에서 "90% 이상의 미사일을 제거할 수 있을지 미지수."라고 보고해 왔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10] 커티스 르메이가 이 보고서의 구체적 내용을 몰랐기에 망정이지 알았다면 분명히 100% 제거 가능하니 공습합시다로 바꿔서 올렸을 것이고 그랬다면... 여기에 문제의 미사일에 관한 CIA 등 정보당국의 분석에서 '소련의 핵미사일이 실전배치 완료되기까지는 약 10일 정도가 소요될 것'이라는 결론이 나와서 케네디는 좀 더 차분한 대응에 나설 수 있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이 때 회의 내용을 몰래 녹음했다. 녹음 파일이 담기는 장치는 백악관 지하실에 있었고, 엑스콤 회의가 열리는 탁자 밑에 녹음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케네디는 자신만이 아는 버튼을 통해 녹음을 키고 끌 수 있었다. 주로 연필꽃이 옆에 있었다고 한다. 케네디가 이렇게 비밀 녹음 장치를 둔 이유는 이전 피그만 침공 당시 자신의 결정에 영향을 끼쳤던 참모들이 막상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들 말이 바꾸는 것에 대해 열이 뻗쳤기 때문이었다.

실제로도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녹음본이 공개되기 이전까지, 참석자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발언 취지를 바꾸어 증언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로버트 케네디다.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로버트는 엑스콤 회의 당시 비둘기 파보다는 매파에 가까운 인물이었던 것이 녹음본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로버트 케네디는 처음 사진을 받아왔을때 불같이 욕을 했다. 물론 케네디 대통령도 처음 쿠바 미사일 배치 정보를 접했을 때 경악과 분노를 담아 이렇게 외쳤다. "나의 흐루쇼프는 이러지 않아흐루쇼프 그 자가 나에게 이럴 순 없어!"[11]

22일, 케네디 대통령은 TV와 라디오를 통해 소련이 미국 전역에 핵공격을 가할 수 있는 기지를 건설 중이라고 전 세계에 알렸다.# 모든 나라의 정부와 언론들은 동구, 서구를 가리지 않고 쿠바에 시선을 모았다. 미국은 소련에게 국제연합의 감시 아래 시설의 철거를 요청했지만 누구도 흐루쇼프가 순순히 물러서리라 보지 않았다.

5. 치킨 게임

10월 24일, 케네디 대통령은 전군에 데프콘3을 발령했다. 아울러 항공모함 8척을 포함, 무려 90척의 대규모 함대를 집결시켜 쿠바의 모든 영해를 봉쇄한다. 케네디 대통령은 카리브 해로 미사일기지 건설자재를 싣고 오는 모든 선박에 대한 강제 수색 명령을 내리고[12] 이를 거부할 시 격침시키라는 초강수를 둔다.

흐루쇼프는 미국의 쿠바 봉쇄를 "해적 행위"라고 강하게 비난하며, 미사일 부품과 기술자를 태운 자국 선박에게 이 조치를 무시하고 핵잠수함 6척의 호위 하에 쿠바로 강행 진입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에 미 해군은 P-3 정찰기와 순양함을 급파했고 동시에 즉시 보유한 모든 핵전력에 비상대기 명령을 하달, 주요 전략폭격기에 핵탄두 탑재 준비를 마쳤으며, 탄도미사일들은 발사준비 절차에 돌입했다. 바르샤바 조약기구NATO에 서로 비상이 걸리고, 동독서독은 물론이며 소련과 미국의 군사력이 맞닿는 모든 곳에서 위험한 분위기가 피어올랐다. 그야말로 "하루라도 더 버틸 수 있을까?" 싶은 상황. 모든 인류가 두려워했던 제3차 세계대전이 바로 눈 앞에 다가온 순간이었다.

또한 략공군사령부의 Thomas S. Power[13]대통령의 승인 없이 데프콘2를 발령했다. 준전시태세가 선포된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미군은 데프콘3을 유지했다.

교착 상황에서 10월 26일, 흐루쇼프가 먼저 해결책을 제시했다.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미사일을 철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6. 검은 토요일

10월 27일 새벽, 카스트로는 아바나의 소련 대사관에 가서 “앞으로 24시간, 늦어도 72시간 내로 미국의 공습이 임박했다”고 흐루쇼프에게 알렸다. 그리고 미국이 침공하는 즉시 소련이 미국을 향해 핵공격을 감행해줄 것을 요청했다. 또한 미국 정찰기를 격추시킬 것을 명령했다. 위기를 통제하고자 했던 흐루쇼프와 생각이 달랐다. 소련의 쿠바 지역사령관인 이사 플리예프 역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의 명령으로 핵탄두가 무기고에서 나와 트럭에 실렸다. 물론 흐루쇼프는 플리예프에게 발포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주지시켰다. 그러나 모스크바와의 통신은 원활하지 않았고, 현장의 실전 심리는 부풀어올라 있었다.

미국에는 흐루쇼프의 두 번째, 그리고 공개적인 메시지가 도착했다. 내용은 “터키의 미국 미사일 기지도 철수할 것.” 국가안보회의 참석자들은 터키의 주피터 미사일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 없지만 그것이 공개적 메시지인 이상 흐루쇼프의 제안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개적인 거래는 NATO 동맹국들의 걷잡을 수 없는 반발을 초래할 것이며, 미국의 협상력을 약화시키고, 굴복으로 비쳐 여론의 질타를 받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ExCom 구성원들은 흐루쇼프가 비밀 전문을 보내면 될 것을 공연히 공개 메시지로 보내서 일을 망치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마침내 미국의 U-2 정찰기가 소련 영공을 침범, 양측 전투기들이 비통상탄두 미사일(일반 폭약 탄두가 아닌 탄두, 즉 핵무기를 뜻한다.)을 탑재하고 날아올라 대치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다행히 U-2가 소련 영공을 벗어나는 것으로 상황은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그 직후 쿠바 영공의 다른 U-2 정찰기가 지대공 미사일에 의해 격추되었고, 같은 날 쿠바 상공을 정찰 비행하던 미군 전투기는 대공포 사격을 받았다.

이 때 양측 수뇌부는 이 상황을 거의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의 U-2 정찰비행은 위기 발생 직전에 잡은 일정대로 이루어진 것이며, 뒤늦게 이를 안 맥나마라 국방장관[14]은 노발대발하며 모든 비행 일정을 취소시켰다. 양측 전투기가 수칙에 따라 핵미사일을 탑재하고 이륙하여 대치했다는 사실은 양측 수뇌부 모두 상황 종식 이후에나 알았다. 또 다른 U-2 격추는 크레믈린이 아닌 소련군 일선 지휘관의 결정이었으며 크레믈린 역시 상황이 끝난 이후에나 이 사실을 보고받았다고 한다. 이게 바로 조치 후보고의 폐해다.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보다 막장인 상황. 농담이 아니라 영화에서는 미국 대통령하고 소련 서기장 사이에 핫라인이라도 연결되었고, 양국 정부는 핵전쟁을 막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현실은 최고지도부들조차 통제를 상실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막장의 절정.

쿠바 상공에서 U-2가 격추된 순간 미 수뇌부는 당장 쿠바를 침공해야 한다며 격노했으나 '24시간 동안은 쿠바를 침공하지 않는다'고 정하고 어찌어찌 용케 참았다. 같은 날 카리브해에서는 소련 핵잠수함이 훈련용 폭뢰를 통한 강제부상 시도를 실제 폭뢰 공격으로 오인, 부상하지 못하고 산소 고갈 상태에 빠졌다. 해당 잠수함 함장은 이를 전쟁 발발 상황으로 간주, 정치장교의 동의를 받아 탑재한 핵어뢰를 발사하려고 했다. 다행히 부함장이자 K-19호의 생존자 중 한 사람인 바실리 아르키포프가 반대하여 핵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휴...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이 날 저녁을 기억한다. “회의를 마치고 백악관을 나설 때, 아름다운 가을 저녁이었다. 그러나 곧 다음주 토요일 밤에는 아마도 살아 있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10월 28일, 소련이 선제 핵공격을 했다!는 경보가 북미방공사령부(NORAD)에 울려 퍼졌다. 그런데 알고 보니 핵공격을 대비한 자체 훈련 프로그램으로 인한 오보였다. 사태 파악이 늦었으면 정말 어처구니 없게 핵전쟁이 터질 뻔했던 것.

...이렇게 읽어보면 지금 인류가 존속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해 질 정도다.

쉽게 말해서 닥터 스트레인지러브크림슨 타이드워게임이 차례대로 일어나고 있었다.

7. 철수

결국 핵전력은 물론 봉쇄를 돌파할 만한 재래식 해상전력조차 없었던 소련의 현실로 인해 흐루쇼프가 먼저 GG를 쳤다. 흐루쇼프는 케네디에게 터키에 배치한 미국의 중거리 탄도탄의 철수를 조건으로 쿠바에 미사일을 설치하지 않겠다는 라디오 방송을 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것이 공식 루트가 아닌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달되었다는 점에서 언론플레이로 의심했고, 또 동맹국 터키의 안전보장 문제 때문에 결단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일단 그 제안을 거부한다.

그러나 미국의 의심과는 달리 제안은 진짜였다. 라디오 방송으로 제안을 한 이유 역시 경악스러운데, 이때 양국간에 핫라인이 없어서 전보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암호화하여 보내고 다시 이를 해독하고 또 통보하는 시간 등등을 합치면 거의 하루가 날아간다. 게다가 그 전보가 진짜로 상대국의 국가원수에게서 온 건지도 의심이 되는 상황이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때 흐루쇼프는 2번 전보를 보냈는데 미국은 이게 정말 흐루쇼프가 보낸 건지 고민했다. 3차대전의 위기에서 양국 수뇌간 의사교류에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려 문제가 더 악화되는 걸 막기 위한 방법이 바로 라디오였다.

흐루쇼프는 10월 28일을 기하여 선단에 회항 명령을 내리고 쿠바의 미사일을 철수시키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로서 인류는 제3차 세계대전, 그것도 핵전쟁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8. 후일담

소련은 약속대로 선단을 회항시키고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시켰다. 이는 피델 카스트로의 격렬한 항의를 받았으나 인류가 절단나느니 동맹국 하나 잃는 게 낫다는 논리에 따라 깔끔하게 씹혔다. 대신 경제지원이 늘어났지만… 이후 쿠바는 냉전 내내 하는 일도 별로 없으면서 소련의 경제지원을 마구 퍼먹는 애물단지가 된다.

쿠바는 이 때 미국이 정말 대규모 폭격을 하고 상륙을 감행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유명한 피그만 침공이나 몽구스 작전 같은 것을 보면 실제 관련 작전이 그때까지 존재했으므로 그런 생각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만약 실제로 미군이 상륙했을시, 공개된 소련 문서들에 의하면 당시 쿠바는 야전용 전술핵이 배치되어있었으며, 쿠바에 배치된 소련군은 그 야전용 전술핵 사용권을 가지고 있었다. 케네디가 역사공부를 열심히 함으로 인해서 자칫 엄청나게 복잡해질 수 있었던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쿠바에 대한 무력침공을 하지 않을 것을 소련에 약속했으며, 흐루쇼프가 10월 27일에 제안한 대로 터키에서 자국의 미사일을 철수시켰다. 터키 역시 자국의 안전 보장이 흔들린다며 항의했으나 역시 3차대전 앞에서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대신에 터키를 위해서 지중해에 SLBM 탑재 잠수함이 배치되었다.

이후 양국은 위기 동안 양측 수뇌간에 부정확한 의사소통이 있었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고 양국 정상간에 핫라인을 개설했다. 피그만 침공으로 타격을 입었던 케네디는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보여준 강인한 지도력으로 전 미국인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반면 흐루쇼프는 미국에 너무 질질 끌려다녔다고 다굴비판받아 이후 권좌에서 물러나라고 쓰고 쫓겨나로 읽는다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물론 이 사건은 미소 양국의 군비경쟁 양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소련의 경우, 핵전력 강화는 물론이고 재래식 해상전력의 필요성 또한 크게 대두되었다. 소련은 대륙 국가라는 특성상 해상전력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고, 때문에 수상함 전력은 미약한 대신 핵잠수함과 지상발진 폭격기의 장거리 대함미사일과 같은 해양거부 전력에 의존하는 경향이 컸다. 이러한 불균형적 구조로 인해 압도적인 미해군의 수상함대에 맞서 재래전으로 대응이 거의 불가능한 나머지 전면 핵전쟁 아니면 꼬리를 내리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던 것. 이를 인식하고 당장 흐루쇼프부터 "우리는 더 발이 넓은 해군이 필요하다."는 말을 천명할 정도였고, 이후 소련 해군은 세르게이 고르시코프의 지도 아래 양적으로 급속히 팽창하여 냉전 후기에 이르면 세계 최대 규모의 배수량을 자랑하는 초거대 해군으로 성장하기에 이른다.

미국 또한 '힘에 대한 의지'를 보여줬다고 해서 결국 믿을 것은 힘뿐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군사력을 강화했다. 결국 당시 미국과 소련의 지도자는 모두 매파라기 보다는 비둘기파였지만[15], 결과적으로 냉전을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냉전을 뒤흔드는 핵전쟁의 공포와 상호확증파괴, 일명 MAD 전략에 대한 믿음만 더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의 시점에서는 소련의 핵전력이 여러모로 미국에 한 수 뒤졌으나, 사실 이 사건 이후로 오히려 소련은 핵 개발에 박차를 가하여 1980년대에 이르러 오히려 미국의 핵전력을 능가하게 된다. (흐루시쵸프의 무능에 빡친 브레즈네프와 그의 트로이카의 미국에 대한 보복이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브레즈네프 또한 닉슨과 함께 핵무기제한협상을 체결한다.) 그리고 1979년에 터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으로 인해 긴장감은 높아져 가고, 핵전쟁에 대한 인류의 공포는 더해져만 갔다. 여러모로 현시창.

아울러 이 사건은 국제정치, 안보 연구에서 '위기관리'(crisis management)의 가장 고전적인 사례로 자리잡았고, 사건 발생 수년 후인 1970년대에는 하버드대 정치학 교수인 그레이엄 앨리슨이 <결정의 엣센스(Essence of Decision)>란 저서를 통해 당시 케네디 행정부의 대응 배경을 학문적, 이론적으로 분석한 바 있다. 1) 합리적 행위자, 2) 조직행태, 3) 정부정치 등 3가지의 모델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으며, 이러한 방식은 오늘날에도 즐겨 사용되는 편. 예컨대 특정 국가의 대외정책 노선을 평가할 때 '주변국 안보 위협 증대에 따른 동맹 강화' 같은 국가를 단일하고 합리적인 행위자로 가정하는 해석은 합리적 행위자 모델, '정부 내의 온건파 대 강경파 경쟁'이라는 해석은 정부정치 모델에 해당한다.

이 사건으로부터 53년후 미국과 쿠바가 국교정상화를 재개하려는 오바마 미국대통령의 발표가 2014년 12월 18일에 나왔다. 기사

9. 미디어믹스

워낙 충공깽한 사건이었고, 제3차 세계대전 발발에 가장 가까웠던 몹시 위험했던 사건인지라[16] 종식 이후 여러 편의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 등이 쓰여졌다. 그중 상당수는 양국이 결국 양보하지 못해 막장 고고씽을 달리는 가상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영국대체역사소설 <부활의 날>은 쿠바 위기가 핵전쟁으로 확전되었고 세계대전으로 대충 망한[17] 미국을 그리고 있다. 소련은 완전히 망했어요. 주요 도시가 괴멸되고 영국의 신탁통치를 받고 있는 미국에서 쿠바 전쟁에 얽힌 비밀[18]을 풀어나가는 이야기. 근데 쿠바 미사일 위기의 중간중간에 일어난, 우발적으로 핵전쟁을 일으켰을 여러 사고들을 보면 우리가 억세게 운이 좋은 평행우주 속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오직 철저하게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영화로는 로저 도널드슨 감독의 <D-13>(2001년작)이 있다. 미국측 입장에서 만든 영화지만 상당한 수작.[19] 로버트 케네디가 쓴 동명의 책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다만 나중에 기밀 해제가 된 U-2 격추나 소련과의 접촉 등이 영화에 추가되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의 끝은 해피엔딩이었으나 이 사건 이후로 양국은 더욱 더 핵 개발에 몰두하게 된다.그래서 더 좋은곳에 쓰일수 있었던 돈이 낭비되었다 이어진 80년대의 또 다른 핵전쟁 위기 속에서 쓰여졌던 앨런 무어의 그래픽 노블 왓치맨의 결말에서는 마치 이 한 번의 '해피엔딩 후에 돌아온 위기'를 비꼬는 듯한 닥터 맨하탄의 대사가 있다.

그: "제가 좋은 일을 한 것 맞죠? 결국 끝에는 모든 일이 잘 됐잖아요."
닥터 맨하탄: "'끝에는'이라고요? 끝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절대 끝나지 않아요"

패러디로 점철된 게임 레드얼럿 2에는 당연히 이 사건을 패러디한 미션도 있다.[20] 연합군 미션인데, 쿠바에 핵 사일로3기나 건설되어[21] 크로노스피어 건설에 위협이 되는 이들을 제거하는 것이 목표. 물론 흐루쇼프와는 달리 게임 속의 소련 서기장 알렉산더 로마노프는 기꺼이 핵 사용을 불사한다.

"이 메세지는, 귀여운 척 하지만 썰렁하기만 한 미군 사령관에게 보내는 메세지다. 이제 소련군이 최후의 승자가 될 시간이 왔다. 우리 핵무기의 맛을 보고 나면, 생각이 좀 달라질 게다."
-핵 사일로를 파괴하면-
"아, 이미 경고는 충분히 했다. 사령관. 이제 곧...뭐라구? (핵미사일 사일로가 사용불가합니다.) 하지만! (네!) 이런 젠장! 이제 장난은 끝이다 사령관. 끝장을 내주마, 지금 곧~!"


왠지 안습. 물론 그게 만만하진 않다.

메탈기어 솔리드 3에서는, 제로 소령네이키드 스네이크에게 버츄어스 미션 브리핑을 하면서, 소련이 쿠바에 설치한 핵미사일을 철수시키면서 터키 쪽에 배치한 IRBM을 철수한 사실은 연막이고, 사실은 단지 소코로프를 돌려받기 위해서 벌인 사건이라는 꽤 충격적인 사실을 말해준다.

2011년에 개봉된 영화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에서 가장 핵심적인 배경 소재로 등장한다. 이 작품에서 쿠바 미사일 위기는 헬파이어 클럽의 뮤턴트인 세바스찬 쇼가 양국 군 수뇌부 인사를 배후 조종해 일으킨 것으로 묘사된다.[22] 이유는 미소 양국이 핵으로 개발살난 혼란상을 틈타 뮤턴트들을 규합해 인류 지배에 나서려는 것.[23] 실제로 거의 성공 직전까지 갈 뻔했지만, 찰스 자비에가 소련 전함의 승무원을 마인드 컨트롤해서[24] 경계선을 넘어가려는 소련 화물선에 소련의 미사일을 때려박는 엄청난 일을 성공시켜 교전 상황을 방지하는 데 성공한다.[25] 결국에는 세바스찬 쇼 본인이 직접 원자로를 가동해 핵폭발을 일으키려 들지만, 때마침 갑툭튀매그니토에게 저지당하고 결국 최후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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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케네디 암살 5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에서 인용
  • [2] 워싱턴 D.C.도 사정권에 들어간다.
  • [3] 재미있게도 U-2의 쿠바 정찰은 당시 정권이 사회주의에 너무 유약하다며 공세를 펼치던 공화당원들의 압력으로 빈도가 늘어난 것이었다.
  • [4] 사실 쿠바에 핵무기가 준비되고 있다는 정보는 CIA가 첩보활동으로 이전부터 파악하고 있었다. 막상 케네디가 증거가 없다며 이를 믿지 않았을 뿐.
  • [5] 핵미사일을 숨기는 방법은 갱도 굴착 뿐이다. 그러나 지휘관이 그 사실을 보고하자 상부가 예산 문제로 무시했다고 뒷날 인터뷰로 알려졌다.
  • [6] HBO 전쟁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 등장한 제101공중강습사단의 사단장이었던 그 테일러 장군이다.
  • [7] 후술되는 케네디의 비밀 녹음에 의하면 르메이는 회의에서 뮌헨 협정을 거론하며 케네디 대통령의 온건책을 비판했다. 문제는 바로 그 뮌헨 회담의 주역 중 한 명이 케네디의 아버지인 조지프 케네디 당시 주영대사였다는 점. 즉 르메이는 "니 애비가 한 잘못을 너도 밟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면박한 거다. 군 장성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케네디 대통령은 르메이의 이런 공박에도 일단 참고 넘어가는데, 르메이는 이후 대통령이 자리를 떠난 이후에도 다른 군 장성들과 실컷 대통령 뒷담화를 한 것이 비밀 녹음에 모조리 기록되어 있다.
  • [8] 이 책은 2008년에 대한민국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 [9] 1992년 쿠바 하바나 회의에서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최고 사령관이었던 그리프코프는 1962년에 쿠바에 약 160개의 핵탄두가 있었다고 발표했다. 숫자는 블러프로 다소 의심되나 98개라는 말도 있는 등, 충분한 양이 있던 것은 거의 확실하다.
  • [10] 당시에는 레이저 유도, GPS 등을 이용한 정밀유도무기가 없던 시절이어서 공습을 한다면 정확성이 보장되지 않는 일반 폭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쿠바에 배치된 소련의 미사일 모두를 제거하는 데 기술적인 어려움이 컸고, 그 과정에서 소련 병사들까지 살상될 경우에도 미소 양국의 정면 충돌로 비화되는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했다.
  • [11] 케네디의 녹음 장치는 그의 사망이후 폐기처리 되었지만, 이 장치에 주목한 사람이 바로 닉슨 대통령이다. 닉슨은 케네디의 녹음장치를 더욱 개량해 다시 백악관 집무실에 녹음기를 설치했고, 이는 이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이어진다.
  • [12] 만약 전략 물자가 발견된다면 압수하도록 지시했다.
  • [13] 이 당시 르메이는 공군참모총장이었고 토머스 파워는 르메이의 후임 전략공군사령관이었다.
  • [14]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이 장면에서 대표적인 온건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국방장관이 온건파라는 사실은 케네디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 [15] 만일 소련 지도자에 스탈린, 미국 지도자에 레이건이나 린든 존슨 정도를 집어넣고 생각하면, 아마 이 글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리그베다 위키가 존재 자체를 하지 못했을테니까. 한편으로는 지나친 비약일 수 있다. 2005년 공개된 기밀문서에 따르면 레이건은 대통령 재임중에 소련과의 대화를 매우 중요시했으며 핵전쟁을 매우 두려워했다. 다른 리더들 또한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다른 판단을 보여줬을지 모른다. 딕 체니라면 정말로 멸망했을지도
  • [16] 이후에도 우발적 핵전쟁이 일어날 뻔한 사건은 수차례 있었지만, 이 사건만큼 위험한 경우는 없었다.
  • [17] 쿠바는 방사능 오염지대가 돼서 법적으로는 스페인의 소유권이 된다.
  • [18] 케네디는 실제 역사대로 비둘기파였는데 매파 장군들이 명령불복종을 해서 확전이 되었다. 케네디와 참모들이 핵으로 전멸하자 매파에서는 책임을 모두 케네디에게 돌리는 역사 왜곡을 벌였다.
  • [19] 참고로 주인공 역인 케빈 코스트너를 제외하고 나머지 등장인물은 실존 인물 역이라 비슷한 인상을 가진 배우들로 캐스팅되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배우 중에서 그렇다는 의미. 덕분에 르메이는 이건희랑 더 닮았다.
  • [20] 실제로 게임상의 시기적으로도 유사하다.
  • [21] 전통적으로 C&C 시리즈에서 핵 사일로 등의 슈퍼무기는 하나만 건설할 수 있다. 제너럴은 제외.
  • [22] 구식이고 점점 약빨이 다해가는 주피터 탄도미사일이 대체 왜 터키에 계속 있었는지는 실제로도 미스터리다. 케네디는 미사일 위기 이전에 주피터 미사일을 철수시키려 했으나 이 명령은 밑으로 내려가면서 어느샌가 증발해버렸다(…).
  • [23] 그런 면도 있지만 세바스찬 쇼는 핵전쟁으로 인한 방사능으로 뮤턴트가 많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 [24] 찰스가 마인드 컨트롤로 조종한 인물은 소련군 사령관을 감시하고 있던 정치장교였다. 그리고 자기가 뭔 짓을 했는지도 모르고 미사일 발사 버튼을 누른 정치장교에게 소련군 사령관이 하는 말이 백미. "축하하네, 동무. 동무는 핵전쟁을 막았네…. (부하들을 향해) 이자를 끌어내!" 그리고 얼떨결에 핵전쟁을 막은 정치장교 동무는 (이유야 어찌되었든 아군을 상대로 공격했으니)병사들에게 끌려나간다(…).
  • [25] 해당 화물선의 선원들은 이미 세바스찬 쇼의 수하 아자젤에 의해 전원 끔살당하고 아자젤의 통제로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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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6-13 02: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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