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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빌라이 칸

last modified: 2015-04-11 21:29:17 by Contributors

몽골 제국의 역대 대칸
4대 몽케 칸 5대 쿠빌라이 칸 몽골 제국 분열
6대 테무르 울제이 칸
원의 역대 황제
건국 1대 세조 쿠빌라이 2대 성종 테무르

(ɔ) Anige (also known as Araniko) of Nepal, an astronomer, engineer, painter, and confidant of Kublai Khan from
묘호 세조(世祖)
시호 성덕신공문무황제(聖德神功文武皇帝)
존호 헌천술도인문의무대광효황제(憲天述道仁文義武大光孝皇帝)
칸호[1] 쿠빌라이 칸(ᠬᠤᠪᠢᠯᠠᠢ ᠬᠠᠭᠠᠨ,)
(忽必烈汗 / 홀필렬한)
보르지긴(ᠪᠣᠷᠵᠢᠭᠢᠨ)
(孛兒只斤 / 패아지근)
쿠빌라이(ᠬᠤᠪᠢᠯᠠᠢ)
(忽必烈 / 홀필렬)
연호 중통(中統) : 1260년 ~ 1264년
지원(至元) : 1264년 ~ 1271년
생몰기간 1215년 9월 23일 ~ 1294년 2월 18일
재위기간 몽골제국 : 1260년 5월 5일 ~ 1294년 2월 18일
원 : 1271년 ~ 1294년 2월 18일


"아담에서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나타난 어떤 사람보다도 많은 지역과 재물, 영토를 소유한 사람." - 마르코 폴로

Contents

1. 개요
2. 즉위 이전
3. 즉위 이후
4. 고려와의 관계
5. 일본 원정
6. 마르코 폴로
7. 창작물에서


1. 개요

본명은 보르지긴 쿠빌라이(孛兒只斤 忽必烈, 패아지근 홀필렬, ᠪᠣᠷᠵᠢᠭᠢᠨ ᠬᠤᠪᠢᠯᠠᠢ/Боржигин Хубилай). 몽케 칸의 동생으로 툴루이의 아들. 묘호세조, 시호는 성덕신공문무황제(聖德神功文武皇帝).

생몰년 1215 9월 23일 몽골 ~ 1294 2월 18일 대도

칭기즈 칸의 손자. 칭기즈 칸의 넷째 아들인 툴루이의 넷째 아들이자 웬지 숫자 4와 관련이 많은 듯 의 제곱은 칸 전대 카간(대칸)이었던 몽케 칸의 동생. 통일 몽골 제국의 마지막 카간이자 원나라의 시조. 1260년 카간 자리에 올라 카간의 자리를 두고 동생 아리크 부카와의 내전을 벌여 1264년 이겼다. 그러나 내전 이후 친 아리크 부카 세력[2]이 떨어져 나가서 쿠빌라이의 직접적인 통치권은 중국과 몽골 초원에만 머물렀다.[3] 그래도 쿠빌라이 칸의 치세에 몽골족의 전체 판도는 역사상 최대규모에 달했다. 무려 전세계 인간이 거주 가능한 지역의 1/5. 이러한 영광이 있지만 카미카제 대삽질로도 유명하다. 몽골 제국의 대규모 원정은 쿠빌라이 칸의 시대를 마지막으로 추진력이 없어졌다. 동시대의 마르코 폴로 덕분에 칭기즈 칸 못지 않게 서구 세계가 잘 아는 몽골 제국의 카간이기도 하다.

2. 즉위 이전

몽골이 금나라를 멸망시킨 뒤 오고타이 칸툴루이계에게 화북 지역을 주었다. 쿠빌라이도 이때 한 지역을 받았는데, 통치 경험이 없어서 몇몇 관리들에게 통치를 완전히 맡기고 영지를 떠나 있었다. 부패한 관리들이 세금을 쥐어짜서 백성들이 달아나자, 쿠빌라이는 영지로 돌아가 한동안 고생하며 영지를 복구하였다. 한편 이 시기부터 쿠빌라이는 친중국적인 성향을 보여 중국 승려를 카라코룸으로 불러 아들 친김의 교육도 맡겼다.

1251년 형 몽케가 제 4대 카간의 자리에 오르자, 중국 방면 대총독에 올라 내몽고 지역에 자리 잡았다. 몽케는 오고타이 칸이 계획했던 남송과 페리시아의 정벌을 결심하고, 쿠빌라이에게는 중국 전선을 그리고 다른 형제인 훌라구에게는 페르시아 전선을 맡겼다. 쿠빌라이가 북중국을 잘 다스려 화남 지역은 농업 생산량이 늘고 서민은 삶의 질이 올라갔다. 이러한 성공으로 북중국의 장수들과 관리들에게 지지를 받았고, 이들의 지지는 이후 원 제국을 세우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1253년 쿠빌라이는 몽케 칸의 명령을 받고 운남지방의 대리국(大理國, 937 ~ 1254)을 정벌하여 남송의 측면을 돌파하고자 하였다. 쿠빌라이는 먼저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대리국의 단씨 왕조는 사자를 죽이고 항전하였다.사망 플래그 쿠빌라이는 1254년 대리국을 멸망시켰는데, 대리국에서 몽골의 사신을 죽였음에도 몽골 제국의 전통과는 달리 대량 학살을 안 했다.

쿠빌라이는 티베트 승려들의 힐러로써의 능력을 높이 사서, 티베트 종교/정치적 문제에도 개입하였다. 사실 쿠빌라이는 불교를 편애하였다. 도교의 도사들이 절을 빈번히 약탈하자 몽케 칸이 쿠빌라이에게 두 종교의 분쟁을 풀도록 시켰는데, 1258년 쿠빌라이는 승려와 도사들을 불러 입배틀을 시켰다. 도사들이 승려들에게 지자 쿠빌라이는 강제로 237개 도장을 불교 사원으로 바꾸고 도교 경전을 불태웠다.리얼 캐삭빵

1258년 몽케 칸은 쿠빌라이를 동정군 사령관에 임명하고 사천 지역을 공략하는데 소환하였다. 쿠빌라이는 통풍 증상에 고생해서 그냥 집에 있어도 좋았지만 어쨌던 형을 도우러 왔다. 하지만 1259년 쿠빌라이가 전장에 오기 전에 이미 몽케가 죽었다. 쿠빌라이는 몽케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양쯔강 변의 주요 도시 우한(武汉 무한)을 공격했다. 송의 장군 가사도는 비밀리에 쿠빌라이에게 접촉하여 양쯔강을 경계로 국경을 나누는 대신 매년 남송이 막대한 세폐를 바치는 것을 제안하였다. 쿠빌라이는 처음에는 거절하였지만 곧 가사도와 평화협정을 맺고 철군하였다.

쿠빌라이는 막내 동생 아리크 부카가 군대를 소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몽골 초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쿠빌라이가 오기 전에 아리크 부카는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소집하여 대부분의 몽골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대칸에 올라 버렸다.[4] 몽골족 중에 쿠빌라이와 그의 다른 형제 훌라구(일 칸국의 칸)만이 아리크 부카의 카간 즉위를 반대하는 형세였는데,[5] 북중국의 중국인 장군과 만주의 과거 금나라 출신의 만주족 장군들은 쿠빌라이를 지지하고 나섰다. 1260년 쿠빌라이는 자신의 본거지인 내몽골의 개평부로 돌아가 자신만의 쿠릴타이를 소집하고 카간을 칭했다.

내전이 나자 쿠빌라이는 배후를 든든히 하러 남송에 사신을 보냈다. 하지만 가사도는 협정을 안 지켰다.

아리크 부카는 제국의 수도인 카라코룸에서 카간으로 추대받았을 뿐더러 본래 몽골의 관습에서는 막내 아들이 세습했기에 정통성에서 앞섰으나, 쿠빌라이는 군사력 측면에서 앞서 있었고 화북이라는 물량빨 쩌는 배후 기지가 있었다. 1261년 시무토노르 전투에서 양 군세가 본격적으로 붙었을 때 쿠빌라이군이 승리하였으나, 아리크 부타는 저항을 계속하였다. 이후 쿠빌라이가 수도 카라코룸으로 가는 물량을 막자 아리크 부카의 진영은 스스로 무너지기 시작했고, 끝내 1264년 8월 아리크 부카는 항복했다. 쿠빌라이는 아리크 부카를 지지했던 인물들은 죽였지만 아리크 부카는 용서했다.[6] 이후 쿠빌라이는 새로 쿠릴타이를 열고 카간에 올랐다.

한편 이 내전 도중인 1262년 쿠빌라이의 한족 관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에는 쿠빌라이가 가장 신임하던 한족 관료도 끼어 있었다. 이후 쿠빌라이는 한족을 신임하지 않았다.

3. 즉위 이후

1271년 수도를 대도(大都, 지금의 베이징)으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대원大元이라고 정했다. 그 김에 할아버지 칭기즈 칸을 성조(成祖)에 추증했다. 이후 복식이나 의례도 죄다 중국식으로 바꿔 중국식 황제의 이미지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이는 칭기즈 칸이나 다른 유목 제국들이 정주민족과 엄격하게 선을 긋고 문화적으로 섞이는 것을 꺼렸던 것과는 정반대 행위이다. 당시 중국의 인구와 경제력이 워낙 킹왕짱이었기에 안정적으로 중국을 정벌하고 통치하기 위한 수단인 듯하다.그게 싫으면 싹다 밀고 초원으로 만들든지

즉위 초에는 반대파 몽골 귀족들의 반발을 무마시키느라 제대로 남송 원정을 못했다. 쿠빌라이의 남송 원정은 1268년 시작해, 1273년 오랜 포위 공격 끝에 양양성을 함락시켰다. 양양의 함락 뒤 남송의 방어 체계가 무너져 몽골군은 파죽지세로 남송 영토를 유린했다. 1276년, 마침내 남송의 수도 임안(항저우)를 함락해 멸망시키고 조씨 황족을 대도로 불러와 나름대로 후대했다. 하지만 남아있던 잔당 세력이 어린 황자(남송 소제)를 데리고 도주했다. 남송의 잔당은 홍콩 근처 애산涯山이라는 섬에 요새와 행궁을 짓고 자리를 잡았는데, 1279년의 몽골 수군의 소모전을 견디다 못한 남송 수군이 궤멸하면서 남송은 사라졌다.

이로서 원은 순수 이민족 왕조로서 역사상 최초로 중국을 통일했다. 북방민족의 피가 섞인 한족이 세운 통일왕조로는 수나라나 당나라가 있었지만, 순수 이민족 혈통의 왕조가 세운 통일왕조는 원나라가 처음이었다. 쿠빌라이는 중국에 학교, 무역항, 운하를 세우고 과학과 예술을 지원하면서 원 제국을 크게 융성시켰다.

쿠빌라이는 미얀마, 베트남, 사할린 등을 침공했지만 완전히 정벌은 못하고 속국으로 만드는데 그쳤다. 특히 인도네시아 자바 섬 침공과 2차례 일본을 공격한 것은 완전히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7] 쿠빌라이와 일 칸국십자군과 동맹을 맺어 중동의 맘루크 왕조에 대항하려 들기도 했다. 쿠빌라이 통치 아래 원 제국은 명실공히 세계의 중심에 올라, 쿠빌라이의 연회에는 전 세계에서 온 사신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몽골 제국은 끝내 나뉘었다. 오고타이 칸의 손자 카이두(하이두)가 반 쿠빌라이 세력을 규합하며 아리크 부카의 계승을 선언, 쿠빌라이 칸을 찬탈자로 비난하고 난을 일으켰다. 1276년 쿠빌라이는 넷째 아들 노무간에게 대군을 주고 원정을 보냈지만, 친 아리크 부카 장수들이 진중 반란을 일으켜 노무간을 킵자크 칸국에 넘겨버리고 카이두에게 붙었다. 1277년 카이두가 카라코룸으로 진군해 오자 쿠빌라이는 명장 바얀을 파견하여 카이두를 격파했다. 1287년 카이두가 동몽고 지역의 왕가들과 결탁하여 또 쳐들어 오자 쿠빌라이는 먼저 동몽고 왕가들을 개발살 내고 카이두를 상대하러 갔다. 쿠빌라이가 동쪽에 있는 사이 카이두는 우세한 전황을 유지했지만 쿠빌라이의 본군이 오자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에 카이두의 세력이 점차 위축했지만 동서 두 칸의 전쟁은 쿠빌라이가 죽은 뒤까지도 이었다. 킵차크 칸국, 차가타이 칸국[8] 등이 모두 반(反)쿠빌라이였기 때문에 지금의 중동지방을 지배한 일 칸국과만 친교를 이었다.

재정정책을 위한 색목인 관료를 대거 키우면서 몽골인들의 불만을 일으켰다. 쿠빌라이 치세 후반부터 원 제국은 슬슬 번영이 끝나기 시작한다. 대규모 원정으로 재정이 악화했을 뿐더러, 유목민 특유인 후계제도의 약점(장자상속제가 아니라 모든 자식에게도 권리가 있다)과 라마교에 물들어 명나라 F4 급의 양태를 보여 더 문제였다. 그리고 엄격한 한족 차별로 인구의 90%가 넘는 한족을 적으로 돌린 점도 있을 것이다.

79세에 죽었는데 장수왕처럼 어찌나 오래 살았는지, 황태자 친킴이 죽고 손자 성종 테무르가 뒤를 이었다. 루이 14세의 경우는 증손자라지만, 왕이 죽자 전성기가 막을 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성기의 무리한 원정의 폐해로 나라도 막장선을 타는 면에서 많이 닮았다.

4. 고려와의 관계

고려 원종은 내전 도중 즉위 전의 쿠빌라이에게 접근했다. 항복하러 가던 중에 몽케 칸이 죽었는데, 쿠빌라이가 즉위하리라 보고 일부러 쿠빌라이에게 접근하였다는 말도 있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마주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원종은 쿠빌라이와 여몽전쟁을 끝내고 강화조약을 체결하며 돌아와 무신정권을 끝내고 왕권을 되찾았다. 흥미롭게도 이 때 쿠빌라이는 고려를 고구려(고려) 그 자체(후신)로 생각하여, 당태종도 못 정복한 고(구)려의 후손이 제발로 항복했다며 좋아했다고. 당시만 해도 아리크 부카와 대권경쟁 중이였고, 정통성 측면에서 아리크부카 쪽이 좀 더 우위에 있던 상황에서 40년이나 저항(...거의 본토 방치 수준이었지만)하던 고려가 쿠빌라이에게 와서 항복해 정통성 측면에서 상당한 힘을 보태서였다. 대외적으로 쿠빌라이 쪽을 계승자로 봤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다만 카다안의 침공 당시에는 고려가 속절없는 모습인 듯하자 "고구려는 짱 쎘다고 들었는데 너희들은 왜 지금 이렇게 비실거림?"이라고도 말했다. 전자의 고구려 관련 발언에 비해 사람들이 이 말은 잘 모르는 듯...

이 때 쿠빌라이가 고려에 약속한 세조구제(世祖舊制)로 고려는 몽골에 40년이나 대항하고서도 직할통치를 안 받은 유일한 나라였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서양쪽 역사책의 지도에서, 고려는 원나라와 같은 빛깔이다. 아예 국경선 표시도 없이, 원나라의 영토로 취급한 지도책도 수두룩하다. 청의 조공국이라고 속국이라 표현되는 거야 전도의 변이 있다고 쳐도, 고려가 속국도 아니고 영토로 취급되는 건 너무한 셈.

그러나 이는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본 것이고 세계사적인 입장에선 볼 땐 형식적인 국가틀은 유지했지만 왕조 건국과정의 문제 때문에 로마에 예속된 거나 마찬가지였던 해롯 왕가 치하 유대 왕국19 및 조공을 바치고 신칭을 한 비잔틴 제국, 헝가리, 폴란드 등의 사례나 국체를 유지한 노브고로드 공국 등 러시아 제공국들도 있기 때문과 정도의 차이이지 원에 예속되어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왕위 계승에 몽골 제국이 직접 관여한 점, 여몽연합군에 군대를 동원당한 점 등을 고려할 때 외국에서 몽골의 속방이나 영토로 표기하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해외에서 발행된 역사관련 지도는 모두 고려를 몽골 제국의 영토, 혹은 속국으로 표기한다. 당장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경기병을 공급해 주었으며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사망시 계승 서열 1위로 고려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우대를 받았던 크림 한국도 오스만 제국의 영역 하에 포함시키는 사례도 있고.

어쩄든 이때 고려가 비록 직할통치의 위기를 벗어났지만 그 대가도 상당했다... 하지만 쿠빌라이가 원종과의 약속을 뒤집어 고려를 직할령으로 만들었다면 한국사의 식민지 역사는 무려 640년이나 앞당겨졌을 것이다. 어쩌면 명나라의 한 성(省)으로 남았을지도. 비판의 여지는 있지만 당시 원종의 입장에서 쿠빌라이에게 귀순한 일은 잘한 선택이었다. 실수로 편을 잘못 들었다면 분명 쿠빌라이 칸이 보복했을 테고, 기울대로 기운 고려가 과연 버틸 만했을까? 다른 나라들 다 망할 때 그럴 만하면 기적이었다. 그리고 '세조구제'는 그 뒤로도 원나라에 고려를 편입시키려는 시도가 있을 때마다 든든한 방패막이었다.

5. 일본 원정

이즈음에 일어난 대삽질이라면 역시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전통적으로 몽골군의 약한 수군을 뻔히 알면서도 고려군만 믿고 남송 정벌과 병행으로[9] 1274년 1차로 원정할 때, 고려군이 바다를 더 잘 아는데 바다를 생판 모르는 몽골군 지휘부가 총지휘를 맡았으니 문제였다. 이래서야 안 봐도 비디오다... 포에니 전쟁 초기에도 해운국이었던 그리스(의 일부 폴리스)를 제치고 농경국가인 로마 제국군이 연합해군 총지휘를 맡았다가 비슷하게 발린 일이 있었다.

상륙해서 막부군에게 꽤나 강력한 타격을 몇 번 주지만, 끝내 태풍에 쓸려 1/5이 침몰한다. 나머지 군사로도 그냥 지르면 끝인데, 몽골군은 장기전을 예상하고도 이를 바라지 않았다. 어이없게도 철수하다가 절반 이상이 또 태풍을 만나 침몰해 버린다.

하지만 일본원정이 그 시절판 임진왜란이란 설도 있다. 남송이 항복하자[10] 당시 50만에 달하던 항복병들은 몽땅 기병위주의 몽골군에 합류시키기도, 먹여살리기도 어렵고 써먹을 데도 없으며... 그래서 일본원정이 나왔다는 주장.

하여튼 이 때문에 고려에선 병선 제조하고 군량미 모으느라 등골 빠졌다. 1~2차를 대차게 말아먹었지만, 쿠빌라이 칸은 3차 원정을 또 준비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3차 원정은 베트남 공격을 위한 부대를 편성하면서 취소했다.베트남 공격도 말아먹지만...

참고로 1차 일본 원정 실패에 이런 얘기도 있다. 사실 규슈 상륙했을 때까진 되려 여몽연합군 측의 기세가 엄청났고, 일본인 다 죽을 뻔했다는 것. 그러나 고려군을 믿지 못한 몽골군은, 고려군이 배타고 떠날까봐 겁먹어서(...) 여러 번의 삽질(낮에 진격하고 밤이 오면 진격한 걸 다 무르며 배로 되돌아오는 등)을 하며 몇날 며칠을 보내다가 끝내 태풍 만나 다같이 저승갔다는 것.

이에 따르면 적어도 '우연히 태풍을 만나 망했다'기보단 '태풍이 올 때까지 기다린' 셈이다. 이 경우 우연한 원정 실패가 아니라 언제든 필연적으로 망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투항한 남송군 10만 명을 강남 ~ 큐슈 루트로[11] 1281년, 고려군과 함께 원정을 보냈다. 일본 또한 1차 원정처럼 정예 사무라이 일기토하러 내보냈다가 돌격에 발리지 않고 준비를 철저히 했다. 한판 크게 일어날 듯했지만...

1차 원정보다 더 안습하게 강력한 태풍의 힘에 수천척의 함대가 수장을 겪고, 가까스로 열도에 상륙한 군대는 막부군에 개털렸다. 이 때 고려산 배들은 거의 피해가 없는데 남송산 배들은 피해 작렬이었다고. 남송 사람들의 사보타지도 한몫 한 듯하다.

신이 난 일본은 자연현상에 '신푸(神風, 신풍)'라는 이름까지 붙였고, 이후 일본은 신이 수호하는 나라라서 결코 패망하지 않는다는 불패(不敗)와 신국(神國) 사상이 생겨났다. '신주불멸(神州不滅)'도 같은 표현. 태평양 전쟁미국에 지기 전까지는 '본토가 점령되어 패배한 적은 없다'는 뜻에서 불패, 신국의 떡밥이 횡행했었다.

사실 이 때의 일본은 덴노가 일본 구해달라며 기도나 했고, 가마쿠라 막부의 실권자들은 우왕좌왕했으니 막장이라고 해도 좋을 듯... 실제로 가마쿠라 막부는 이 침공의 여파로 더더욱 빨리 쇠퇴해, 50년 뒤 무너졌다. 이렇듯 무신란 직후로 혼란스럽던 고려 정부만 막장이 아니었다. 어쩌면 귀찮은 골치덩이들을 이렇게 자연의 힘을 빌려 처치했을 수도 있다. 야! 신난다~

일본의 피해도 무시할 바는 아니었다. 규슈에 상륙한 여몽연합군의 강력한 공격으로 규슈 지역은 말 그대로 초토화했고, 본토 사무라이 등도 겁에 질려 패닉상태로 죽을 날만 기다렸다. 이 때의 공포를 일본에선 '무쿠리고쿠리'(몽골, 고려)라 불렀고, 이것은 뒷날 미증유의 공포 등을 일컫는 표현이기도 했다. 이러한 용례는 일본의 모 작가가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무쿠리고쿠리의 구름'이라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3차 원정까지 계획했으니 욕심은 장난 아니었던 듯하다. 하긴 조그만 섬나라 주제에(1280년 시점에 원나라와 그 혈족 칸국들이 지배한 면적을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말할 거다.) 감히 천황 운운하면서 카간의 제국에 굴복하지 않으니 쿠빌라이 칸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그 시점에서 쿠빌라이 칸은, 거짓말 조금도 보태지 않고 (그 때까지 유라시아 세계에 알려진 영역을 기준으로)'세계의 지배자'였으니까.

쿠빌라이의 굴욕은 일본으로 그치지 않고 베트남에도 3차례의 원정을 기획했으나 1차는 질병으로 철수했다. 사실 이건 애초에 대리주둔군이 남송 뒷치기 할려고 찔러본 것에 가깝다. 그럼에도 베트남군을 개발살냈지만, 후퇴시에는 베트남의 게릴라전으로 고전했고 피해도 꽤나 입었다. 2차와 3차 원정은 베트남 영내로 상당히 깊숙이 밀고 들어갔으나 국토 사수를 결의한 베트남군 25만 군사와 그들을 지휘한 명장 쩐흥다오의 청야전술에 말려들어 막심한 타격을 입고 철수했다. 이 전쟁으로 베트남은 이집트, 일본과 함께 몽골의 침입에서 국토를 지킨 소수의 국가로 역사에 남았다. 끝내 쿠빌라이의 대외 원정 사업은 다 죽어가던 남송에게 카운터 일격을 먹인 업적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6. 마르코 폴로

남송의 부를 죄다 대도로 끌어들여 이룩한 원나라의 어마어마한 번영은 백만 떡밥의 창시자인 마르코 폴로와 그의 책 동방견문록으로 잘 드러난다. 궁전의 한 전각에 통째로 엄청난 양의 금은을 저장했다고 한다. 참고로 그 전각 크기는 아주 컸다고... 그러나 원 말기에 그 전각에 저장한 금은들은 다 날아갔다. 하지만 정작 원나라 사료에는 이 마르코 폴로의 언급이 없다니 흠좀무. 오죽하면 동방견문록이 죄다 줏어들은 떡밥 견문록이란 말이 있다. 하지만 마르코 폴로가 정말 중국에 갔다고 믿는 사람들은, 원나라에 색목인 관리가 많아 마르코 폴로를 특별히 적을 필요가 없었다고도 주장한다. 사실, 다른 방문자들의 견문기를 보아도 분명히 많은 서양인이 몽골의 궁정에 있었지만, 누구의 이름도 원나라 기록에 없었다. 하지만 마르코 폴로 스스로가 쿠빌라이 칸의 총애를 받았다고 적어 문제인데... 이에 대해선 당시 서양인들의 과장과 뻥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7. 창작물에서

코에이의 칭기즈 칸(푸른 늑대와 흰 사슴) 시리즈에도 있다. 한국에도 수입한 원조비사: 고려의 대몽항쟁에서는 시나리오 3에 등장, 준수한 능력치(정치 B, 전투 B, 지휘 B, 매력 A)지만 아들들의 능력치가 개떡이다.(...) 거기다가 시나리오 시작할 때쯤 쿠빌라이 칸이 이미 50대 중반이라 서두르지 않으면 능력치가 딸려도 한참 딸리는 아들들을 믿어야 되는데, 능력 좋은 장군을 부마로 삼으려고 해도 시작할 때 딸은 하나도 없으니...

쿠빌라이칸.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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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칸 4 일러스트

징기스칸 4에서도 능력치가 골고루 준수한 준 먼치킨. 정치 87, 전투 85, 지모 84. 형 몽케보다는 좀 딸리는 인상도 있지만 게임 속 쿠빌라이 최고의 메리트는 바로 엄청난 수명. 몽골 출신 무장들 중 가장 수명이 길어서 시나리오 2에서 원나라는 이미 세력이 크지만, 쿠빌라이의 수명까지 더해서 그 1대에 세계 제패도 가능하다. 의술을 조금 올리면 90세가 넘어서까지 장수하는 무서운 장면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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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에도 등장했는데, 정작 능력치들은 맹장에 가까운 능력치이다.(...) 몇몇 유저들은 쿠빌라이(사준사구)와 헷갈렸다라 추측한다.

미드 마르코 폴로나 60년대 영화들에선 백인 배우가 맡았다. 이렇게 비백인을 백인으로 만드는 등 인종을 바꿔버리는 것을 배역의 인종 전환(Racial Lift)이라고 부른다. 대지같은 영화도 백인 배우가 왕룽을 연기했지만 1930년대 영화임을 생각하면 지금과 다른 인식과 배경이던 시절이다. 85년 영화 레모도 한국인 스승 치운을 백인계 배우가 분장하고 맡았지만...

그러다가 2014년작 넷플릭스 드라마 마르코 폴로에서는 진짜로 동양인 배우가 맡았다.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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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몽골식 군주 칭호
  • [2] 킵차크 칸국, 차가타이 칸국 등
  • [3] 물론 카간으로써의 영향력이 몽골 제국 전체에 미치기는 했다. 하지만 서쪽 끝의 캅자크 칸국까지 가면 사실상 영향력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
  • [4] 내전이 나자 몽케 칸의 군대도 아리크 부카를 지지했다.
  • [5] 훌라구는 아리크 부카의 즉위를 반대했지만 그렇다고 쿠빌라이를 지원하지도 않은 채 사태를 관망했다. 여차하면 카간 쟁탈전에 끼어들어 자신이 카간에 오를 속셈이었다.
  • [6] 아리크 부카는 1266년 사망.
  • [7] 자바 섬 등의 동남아시아 공략은 상업루트를 개척하려는 목적이 컸고, 최종적으로는 해상루트의 안전을 확보했다.
  • [8] 차가타이 칸국은 처음에 카이두의 오고타이 칸국에게 적대적이었지만, 1282년 카이두의 도움으로 두아가 칸에 오른 뒤 카이두가 죽을 때까지만 협력하였다.
  • [9] 일본의 남송 지원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 [10] 임안 함락은 1276년이지만 1273년에 양양 함락 뒤 이미 대규모 항복크리와 함께 실질적으로는 거의 멸망 상태였다.
  • [11] 태풍철에 10만 명을 이런 루트로? 미친 짓이다. 사실 가는 사이에 태풍을 안 만났으니 정말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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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1 21:2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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