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D R , A S I H C RSS

클레오파트라

last modified: 2015-06-22 17:50:07 by Contributors

Contents

1. 그리스에서 사용되는 이름
2. 이집트 여왕
2.1. 설명
2.2. 기타
3. 감자칩

Κλεοπάτρα (그리스어)
Cleopatra (영어)

1. 그리스에서 사용되는 이름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딸)"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의 여성 인명.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네우스의 첫번째 아내[1]리돈의 영웅 멜레아그로스의 아내로서의 인명이 첫 시작이며[2], 신화 시대부터 레니즘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클레오파트라들이 있었으며,[3] 마케도니아 왕조들, 그 가운데서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 자주 사용되었다. 하지만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7세)"일 것이다.

2. 이집트 여왕

(ɔ) PHGCOM from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재위 51 - 30 BC)

그녀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지구의 모든 표면은 변했을 것이다. - 파스칼

이집트의 마케도니아 혈통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의 딸.

2.1. 설명

BC 51년 부왕이 죽자 18세 나이에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여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이미 국가 막장 테크가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으며, 어린 남동생을 배제하고 전권을 차지하려는 클레오파트라 7세의 정치적 움직임은 큰 반발을 샀다. 그 결과 권력 투쟁에서 패하여 쫓겨났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전권을 차지했다.

하지만 BC 47년 이집트를 방문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만남으로 클레오파트라 7세는 재기의 발판을 얻었다. 마침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알렉산드리아에 피난 왔던 자신의 정적 폼페이우스를 암살한 것이 "비겁한 행동"이라며 분노하여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였는데, 클레오파트라 7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만나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때 카이사르의 나이는 50대 초반, 클레오파트라 7세는 20대 초반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카이사르가 융단을 선물 받았는데 그 융단을 풀어보니 안에 클레오파트라가 있었다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측의 눈을 속이기 위해 클레오파트라가 잠입한 것이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실의 분쟁에서 클레오파트라 7세를 지원했다.

하지만 이것이 단순히 카이사르가 클레오파트라에게 빠졌기 때문에, 즉 사적 감정의 발로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부왕인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죽기 전에 '남매의 공동 통치'를 유언으로 남기고, 로마인들에게 유언의 집행을 맡겼다. 그리고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의 현직 집정관으로써 부왕의 유언대로(공동 통치) 되돌아갈 것을 결정한 것이다. 이게 결과적으로 정쟁에서 패배했던 클레오파트라를 지원한 것은 사실이지만. 게다가 폼페이우스는 패장이었다고는 하나 로마의 전직 집정관이었고, 전직 집정관(프로콘술)은 공화정 로마에서 최고의 존경을 받는 지도층 인사였다. 이런 사람을 살해한 왕을 동맹국(사실상 속국)의 단독 국왕에 앉혀놓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문제가 되기도 했다.

어찌되었건 카이사르의 집행에 앙심을 품은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측은 카이사르가 소수 병력만 이끌고 있는 것을 노려 그를 공격했으나, 원군의 도착으로 패배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살해당했고, 클레오파트라 7세는 막내 남동생과 재혼하여 그를 명목상의 공동 통치자 프톨레마이오스 14세로 세운 뒤 실권을 장악하였다.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카이사리온(작은 카이사르라는 뜻. 풀네임은 프톨레마이오스 카이사르였다고.)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이후 카이사르를 따라 귀빈으로써 로마에 가기도 했으나, BC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이집트로 돌아왔다. 이집트에서 남편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가 젊은 나이에 죽자 자기 아들 카이사리온을 공동 통치자 프톨레마이오스 15세로 세웠다. 카이사르 파와 반 카이사르 파의 내전에도 관여하여 카이사르 파를 지원하려 했지만 폭풍으로 실패하였다.

BC 41년에는 킬리키아의 타르소스에서 제2차 삼두정의 선두였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만났으며, 그 역시 클레오파트라 7세와 사랑에 빠졌다. 둘 사이에서 아들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와 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가 태어났다. 옥타비아누스와 관계가 틀어진 안토니우스는 BC 37년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동방을 다시 방문했고, 아예 클레오파트라 7세와 결혼하여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를 낳았다. BC 34년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동방 원정을 지원한 공으로 "알렉산드리아의 기증"을 통해 클레오파트라 7세와 그 자녀들에게 로마 제국의 동방 속주들을 전부 나눠주었는데, 클레오파트라를 왕 중의 여왕으로 선언하고 카이사리온과 함께 이집트를 공동통치하도록 하였으며, 쌍둥이 중 남자인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에게 아르메니아, 메디아, 파르티아를 주었고 쌍둥이 중 여자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에게 크레타와 키레나이카, 막내아들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푸스에게는 시리아와 실리시아를 주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달렸고, 결국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 침공을 선포한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안토니우스와 함께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맞섰으나 패배하여 도주한 뒤 알렉산드리아에서 자살했다. 클레오파트라의 사망은 코브라가 자신을 물게 하여 자살했다는 설이 가장 유명한데, 이집트 코브라를 과일 바구니에 숨겨 가져왔다 한다. 그러나 이는 후대에 붙인 이야기라는 말이 있는데, 이집트 코브라가 2m나 되어 숨기기 쉽지 않을뿐만 아니라 물린다고 해서 다 죽는 것도 아니고, 죽는다고 해도 2시간 뒤에나 죽기에 말이 되지 않는다고. 그외에 음독자살이라는 설, 안토니우스와 동반자살했다는 설,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설 등 다양한 설이 난무하는 대표적인 떡밥거리이다. 사실 옥타비아누스가 개선식 때 꼭 클레오파트라를 내세워야만 했느냐면, 실제로 선전 때 로마를 멸망시키려 한 요부로 포장했으니 엄청난 효과를 낳을 수도 있겠지만 그 이복 여동생이 끌려왔을 때는 동정받은 바가 있다. 즉 로마에서는 여자를 이겼다거나 여자를 앞세워서 영광을 얻으려 한다고 여론이 좋지 않게 조성될 수도 있었기에 죽는 것도 나름대로 유리했다는 것이다.

흔히 엄청난 미인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으며, 실제로 빼어난 미모와 매혹적인 목소리, 재치와 지성을 갖추어 남자를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다는 기록들이 있다. 그 요사스러울 정도의 미모로 로마를 좌지우지하다가 아우구스투스에게 패하여 독사로 자살했다는 이미지, 그리고 오리엔탈리즘이 어우러져 마녀, 색기 넘치는 요부, 팜 파탈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다. 사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연애는 했지만 공식적으로는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유언장에서도 클레오파트라나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을 전혀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로마에서 단지 구설수에 오르는 정도 이상의 문제는 겪지 않았다. 클레오파트라 쪽은 이집트에서의 정치적 입지가 카이사르와는 달라서 아들 이름을 대놓고 카이사르라고 짓고 카이사르와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열심히 이용했지만, 카이사르 입장에서도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에서의 지위를 안정시키는 것이 유리했으므로 이 관계는 양쪽 모두 정치적으로 이익이 되는 것이었으며, 카이사르는 언제나 그랬듯이 바람둥이 노릇과 정치가로서의 입장을 잘 조화시킨 것에 불과했지 클레오파트라에 홀렸다고 볼 이유는 전혀 없다.

반면 안토니우스의 경우는 정말로 홀렸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사실 안토니우스도 여색에 빠져 모든 것을 맡기는 한량은 아니었다. 안토니우스가 추진했던 파르티아 정벌을 위해 군자금이 필요했고,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풍부한 경제력을 지원하는 대신 안토니우스의 군사력을 원했던 것이다. 즉, 서로 정치적인 계산 하에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런 정치적인 계산만으로 보기에는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 때문에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로마에서만 하게 되어 있는 개선식을 알렉산드리아에서 열었고, 클레오파트라의 세 아들(한 명은 카이사르의, 두 명은 안토니우스의 아들이었다)이 로마를 분할하여 공동 통치하게 하려는 계획까지 세워서 로마에서 정치적으로 강한 비난을 받게 된다. 게다가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기 위해 아내였던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와도 이혼했고, 유언장에서는 로마가 아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묻어달라고 하는 등의 행동으로 인해 개인적 인망 역시 크게 잃었다. 더구나 사실상의 마지막 전투가 된 악티움 해전에서의 전개를 보더라도 자신이 전투를 주도하지 못하고 사실상 전쟁 지휘 경험이 없는 클레오파트라에게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였다. 따라서 안토니우스가 처음에는 정치적인 이유에서 클레오파트라에게 접근했을지 몰라도 정말로 클레오파트라에게 홀렸다고 할 만하다. 반론으로는 안토니우스가 정치적으로 너무 무능해서 단지 자신의 행동의 결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카이사르 생전에 군사적으로만 훌륭했을 뿐 정치적인 면에서는 낮은 평가를 받았으므로 가능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설마 클레오파트라에게 홀딱 빠지지 않고서도 그럴 정도로까지 무능했을까라는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미녀가 아니었다는 것이 정설. #. 클레오파트라 7세는 큰 야심을 가진 정치가였다. 위에도 나오다시피 권력을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하기도 했지만, 그녀 자신의 능력도 출중했다. 이전까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파라오들이 이집트어 배우기를 거부하고 그리스어만 사용했던 반면, 토착 이집트어를 배운 최초이자 최후의 마케도니아인 파라오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여러 외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여 통역이 필요없을 정도였으며, 정치 수완도 뛰어나 로마의 최고 권력자들을 휘어잡는 한편 이시스의 현신을 자처하며 토착 이집트 백성들로부터도 인기를 모은 엄친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다 망해 가는 막장 나라를 구할 수는 없었다. 고립된 소수 그리스-마케도니아인 지배층의 인적자원이 완전히 고갈되고 부정부패와 권력 암투에 빠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는 나라를 건사하기 위한 기본적인 군사력조차 없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외세를 이용해 생명연장의 꿈을 노릴 수밖에 없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가장 중요한 악티움 해전에서 군사적 무능을 드러내기도 했고, 막대한 돈을 쟁여놓고 돈과 정치적 술수를 주 무기로 삼으며 혈육도 가차없이 제거하는 냉정한 모습은 전형적인 고대 서아시아 전제 군주들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당시 그녀가 처한 상황에선 어쩔 수 없는 모습이라 하겠다.

사치스러움을 과시하기 위해 진주식초에 녹여먹음으로 주위를 놀라게한 일화가 있다.식초를 원샷해서 놀란 걸지도 안토니우스와 하루에 20만 파운드 상당의 돈을 다 써버릴 수 있느냐 없느냐는 내기를 걸어서 진주를 식초에 녹인 다음 원샷!으로 승리했다는 일화다.(이집트판 왕개석숭?) 단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식초는 진주를 빠른 시간 안에 녹일 수 없기 때문에[4]...황산이나 염산을 쌩으로 들이켰다고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사람들은 거짓말이라고 치부하기도 한다. 역사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고상한 표현으로 클레오파트라는 사실 진주를 식초에 녹인 척 하고 그냥 삼켜버렸을 것이며 그 진주는 나중에 자연스러운 배출 과정을 통해 회수되었을 것이라 한다. 근데 그렇게 회수된 진주를 장신구로 쓸 수 있었을까(...) 하기야 그 시대에도 변태는 있었을지 모른다. 그전에 위산에 진주가 다 녹지 않나

양귀비여지를 좋아한만큼 클레오파트라무화과를 좋아했는데 굉장한 대식가여서 하루에 먹어 치우는 무화과나 식사량이 엄청났었다. 실은 클레오파트라갑상선기능항진증 환자여서 살이 찌지 않았다. 그녀의 시원 시원하게 먹는 모습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반했다한다.

2.2. 기타

상기한 이미지와 이집트 벽화, 혹은 서구인들의 "동양 미인"에 대한 환상 때문인지 근현대 창작물에 등장하는 클레오파트라들은 대개 "이국적인 동방 섹시녀"라는 컨셉을 가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특징으로 까무잡잡한 피부에 샤프한 이목구비, 짙은 눈화장이 깔린 길고 째진 눈, 윤기흐르는 직모 흑발, 늘씬한 몸매에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노출도 높은 패션 등이 있다. 하지만 누차 언급했다시피 그녀는 마케도니아인이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철저한 근친혼을 유지했으므로 토착 이집트인의 피가 섞였을 확률은 거의 없다. 그외에도 일부 꼴통 흑인 우월주의자들은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의 여왕이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흑인이라는 주장을 하지만 그 논리대로라면 아프리카의 보어인들 역시 흑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 George Shuklin (cc-by-sa-3.0) from


상단에 링크되어 있는 주화 사진이나 당대의 두상 따위에서 묘사된 모습을 보면 뽀글뽀글 곱슬머리에 우뚝 솟은 우람한 매부리코, 푹 들어간 눈두덩이 등 유감없는 그리스적 외모를 뽐내고 있다. 물론 그런 물건들에서 군주를 묘사할 때는 어느정도 정형화된 기법이 사용되거나, 당대 미의식에 입각한 보정이 들어가게 마련이니 그걸 또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이집트 방식으로 묘사된 클레오파트라 유물을 보면 생김새가 또 딴판이지만, 고대 이집트의 인물 묘사는 정형화의 극치를 보여주기로 유명하니 별 의미는 없다. 어쨌든 현대 대중문화에서 그려지는 클레오파트라의 모습들은 실물과는 완전히 딴판인 다른 종족(...)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런 점을 감안해도 실제로는 금발벽안에 더 가까웠을거란 생각 역시 잘못된 것일수도 있다. 원래 그리스인들을 비롯한 남방계 유럽인들도 이목구비만 백인이지 실제로는 눈색깔이나 머리색깔이 꽤 짙다.

18.png
[PNG image (197.71 KB)]

한편 왜국에 가면 이렇게 된다. 정확히 말하면 퍼즐 게임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파트라코".

시드 마이어의 문명에서는 문명 3까지 이집트 문명 여군주였으나 문명 4에서 하트셉수트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리고 문명 온라인에서도 하트셉수트가 이집트 지도자로 등장하면서 계속해서 밀려나는 중.

3. 감자칩

농심에서 국내 최초로 생산했던 감자칩. 현 칩포테토의 전신이며 1980년대 후반에 단종됐다.
----
  • [1] 북풍의 신 레아스레이티아의 딸이다. 어머니 오레이티아는 아테네레크테우스의 딸로서 보레아스에게 납치되어 강제로 결혼하였다. 날개 달린 쌍둥이 형제 칼라이스테스가 오빠이고, 포세이돈과의 사이에서 에우몰포스를 낳은 오네가 자매이다.
  • [2] 메세네 왕 아파레우스 또는 포세이돈의 아들인 이다스와 에베노스의 딸 마르페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멧돼지 잡다가 외삼촌들을 죽여서 어머니의 저주를 받았다는 그 사람 맞다.
  • [3] 심지어는 유대인이 세운 이스라엘 하스몬 왕조에도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있었을 정도다.
  • [4] 참고로 저가 진주를 가지고 현대 미국에서 실제로 실험한 사람은 있기는 한데, 진주를 빻아서 강한 식초에 장시간 끓이면 녹을수는 있다고 한다 근데 이게 더 무서운데
Valid XHTML 1.0! Valid CSS! powered by MoniWiki
last modified 2015-06-22 17:50:07
Processing time 0.1204 s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