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D R , A S I H C RSS

킹 크림슨

last modified: 2015-02-16 06:01:34 by Contributors


"In The Wake of Poseidon" 시절의 초기 킹 크림슨.


70년대 초반~중엽의 킹 크림슨. 왼쪽부터 제이미 뮤어, 빌 브루포드, 로버트 프립, 데이비드 크로스, 존 웨튼.


현재의 킹 크림슨 라인업. 왼쪽부터 토니 레빈, 가빈 해리슨, 멜 콜린스, 빌 라이플린, 로버트 프립, 팻 마스텔로토, 야코 약식.

Contents

1. 소개
2. 개요
3. 경력
3.1. 데뷔부터 Islands까지
3.2. 브루포드 영입부터 1차 공백기까지
3.3. 재결성 후 2차 공백기 까지
3.4. Thrak 발표부터 현재까지
4. 여담
5. 디스코그래피
5.1. 스튜디오 앨범
5.2. 라이브 앨범
6. 죠죠의 기묘한 모험에 나오는 스탠드
6.1. 6에서 따온 랙의 별칭


1. 소개


영국프로그레시브 록밴드. 1969년 1월 결성되었다.

2. 개요


블루스 록과 사이키델릭 록이 주류였던 영국 음악계에 1960년대 새로운 록이 탄생되는데, 그것은 레드 제플린을 중심으로 한 헤비 록이고, 또다른 하나는 바로 프로그레시브 록 (Progressive Rock)이다. "진보적인"이란 뜻에 알맞게 이들은 클래식, 재즈, 블루스, 사이키델릭 록 등 모든 장르의 음악을 흡수하며, 스튜디오에서 정교하게 음악을 만들어낸다. 특히 첫 곡부터 마지막 곡까지 하나의 주제 아래 강박증적으로 일관된 음악을 구축해낸다는 점은 프로그레시브 록의 큰 특징 중 하나이다.

3. 경력


3.1. 데뷔부터 Islands까지


킹 크림슨 데뷔 이전인 1967년 8월, 마이클 자일스와 피터 자일스 형제, 그리고 로버트 프립 이렇게 세 사람은 '자일스, 자일스 앤 프립' 이라는 밴드를 결성했고, 밴드는 "The Cheerful Insanity of Giles, Giles and Fripp" 라는 한 장의 음반을 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앨범은 망했다. 라디오 세션이나 몇 번의 방송 출연을 시도했지만, 상업적인 성공은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이키델릭 록에 기반을 둔 뮤지컬 형식의 음악과 정교한 연주를 들고 왔으나 먹히지 않았는데,[1] 이런 스타일은 어느 정도 초기 킹 크림슨의 틀을 잡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후에 자일스 형제는 밴드의 음악 스타일을 더욱 확장하기 위해 색소폰과 플루트, 클라리넷을 담당하는 이언 맥도널드와 주디 디블이라는 보컬을 데리고 왔다. 주디 디블은 'I Talk to the Wind'나 'Peace - An End' 등 초기 킹 크림슨 곡의 초기 데모 버전을 녹음하는 데에도 참가했지만, 그녀가 다른 포크 락 밴드에 들어가기 위해 밴드를 탈퇴하면서 밴드와의 인연이 끝났다. [2]

이언 맥도널드는 밴드에 들어오면서 작사가이자 로드 매니저, 문화 평론가인 피터 신필드도 소개했다. 이언 맥도널드와 피터 신필드는 노래를 함께 쓰던 사이였는데, 그는 신필드에게 '너네 밴드 가망 없음, 근데 너 가사는 좀 쓴다? 같이 곡 쓸래?' 라고 말하며 함께 노래를 쓰기 시작했다. 그 둘이 가장 처음으로 쓰던 곡 중 하나가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한 편, 프립은 밴드의 음악 스타일에 참고 할 만한 몇몇 밴드들을 둘러보고, 보컬이 공석으로 남아 있던 그의 밴드에 베이시스트이자 보컬리스트인 그렉 레이크를 추천해 보컬 자리를 대체하고자 했다. 바로 이 때부터, '킹 크림슨' 이라 부를 수 있었던 1기 킹 크림슨 라인업이 완성되었다.


밴드의 공식적인 첫 결성은 68년 11월이었고, 이듬해 1월, 첫 라인업으로 리허설을 시작했다. 밴드 이름은 피터 신필드가 제안한 것이다. 바알제붑의 동의어라고. 라이브 데뷔는 1969년 4월 9일에 이루어졌다.

그 해 10월 역사적인 데뷔앨범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을 발표했고, 비틀즈의 "Abbey Road"를 꺾고, 영국 앨범차트 1위를 거머쥐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앨범에 대한 대중의 평은 피트 타운센드의 촌평인 "불쾌하리만큼 완벽한 걸작" 으로 요약될 수 있을 듯. 이들은 락앤롤이 꽃피우던 60년대에 클래식과 현대음악, 재즈, 사이키델릭, 빅토리안 스타일 음악 등을 적극 수용해서 상당히 진보적인 사운드를 보여주었고 이후 등장할 프로그레시브 록밴드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3]

공포에 질린 듯한 커버[4]를 꽉채운 얼굴은 사실 "공포"를 표현한 것이 아닌 편집증적 피해망상과 정신 분열을 포착한 것인데, 망상과 정신 분열은 킹 크림슨 음악의 저변에 깔린 일관된 주제이다. 리더인 로버트 프립 (Robert Fripp)은 이처럼 무겁고 암울한 곡을 만들어냈고, 피터 신필드가 곡에 맞는 가사를 만들어 냈다.

특히 본 앨범에 수록된 곡 중 "21st Century Schizoid Man"은 수없이 커버된 명곡으로, 이 트랙은 후대의 그런지 또는 얼터너티브 록 밴드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코러스 부분은 카녜 웨스트의 "Power"에 피처링 되기도 했다.[5][6] 국내에서 애창곡으로 불리던 "묘비명(Epitaph)"이란 곡은 9분에 육박하는 대곡인데, 라디오와 음악다방 등에 물밀듯 신청해대다 보니 DJ들이 상당히 고생하였다고 카더라. 장대하고 묵시적이며 황량한 분위기에 애수 넘치는 보컬이 일품인 곡이다. 인류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벌어질 세상의 멸망에 대한 두려움에 대해 노래하는 명곡이라 할 수 있다.

영국에서의 공연을 끝낸 후 밴드는 미국으로 투어를 떠나 많은 컨템포러리 팝 가수와 밴드들과 함께 공연을 펼쳤다. 미국 투어를 돌면서 앨범과 밴드에 대한 호평은 늘었지만, 밴드의 호평과 음악적 성과를 유지하려고 힘쓰던 마이크 자일스와 이언 맥도널드는 그게 쉽지 않음을 깨닫는다. 더군다나 프립은 킹 크림슨을 조금 더 어둡고 격렬한 음악으로 이끌고자 했고, 자일스와 맥도널드는 조금 더 로맨틱 팝 계열의 음악을 하고 싶어했으므로 노선에 대한 갈등을 겪었다. 이는 밴드의 주도권 논쟁에 있어서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고, 밴드가 생각대로 잘 돌아가지 않는 것을 깨달은 마이크 자일스와 이언 맥도널드는 결국 새 앨범 "In The Wake Of Poseidon"의 녹음을 진행한 후 탈퇴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그렉 레이크는 녹음이 끝난 1970년 중반에 키스 에머슨의 꼬드김으로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를 결성하기 위해 밴드를 탈퇴한다.

오리지널 라인업의 마지막 라이브 공연은 69년 12월 16일 이었다.


1970년 3월, 밴드의 남은 멤버들은 베이시스트로 자일스 형제들 중 한 명이었던 피터 자일스를 영입하고 "In The Wake of Poseidon" 의 녹음을 시작한다. 밴드는 처음에 당시 무명이었던 엘튼 존을 보컬로 영입하려고 했으나, 엘튼 존은 이를 거절했다. 결국 앨범의 보컬은 'Cadence And Cascade' 한 곡을 제외하고 (킹 크림슨과 금전 관계 청산이 아직 덜 됐던) 그렉 레이크가 맏기로 합의한다. 마이클 자일스는 세션 자격으로 킹 크림슨의 두 번째 음반에서 여전히 드럼을 담당하게 되었다. 남은 한 곡은 프립의 십대 시절 친구인 고든 하스켈을 세션으로 부른 뒤 진행했다.

인류를 상징하는 열두 사람을 그려 넣은 '타모 드 종(Tammo de Jongh)'의 1967년 작인 'The 12 Archetypes'을 표지에 사용한 앨범은 그 해 5월 15일에 발매되었다. 잘 들어보면 여덟 곡의 장단편적인 곡들로 구성되어 있는 앨범의 음악적 구조가 데뷔 음반과 대단히 흡사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나중에 발매된 4장 짜리 라이브 앨범인 "Epitaph" 를 같이 들어보면 이미 이 앨범이 데뷔 앨범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라이브 셋리스트에 첫 번째 앨범의 곡들과 두 번째 앨범의 곡들이 함께 놓여져 있는 것. 이런 이유인지 "In The Wake of Poseidon"은 발매 당시에는 그럭저럭 잘 나가는 것 처럼 보였지만, 데뷔 앨범과 유사한 스타일 탓에 '처음 명성에 묻어가려 한다' 는 혹평을 받았다. 연작 개념을 이해하지 못해 생긴 일종의 해프닝임을 알 수 있다.


프립과 신필드는 "In The Wake of Poseidon" 의 프로모션 투어를 준비하지만, 밴드가 완전하지 않아 투어를 도는데 애를 먹었다. 때문에 고든 하스켈과 드러머 앤디 매컬로크, 색소폰과 플루트를 연주하는 멜 콜린스를 정식 멤버로 영입하고, 투어를 도는 동시에 세 번째 앨범 "Lizard"의 세션에 들어가.... 려고 하지만 써놓은 곡이 없으니 될 턱이 있나. 결국 프립과 신필드는 앨범의 거의 모든 곡을 쓰면서 동시에 키스 티펫과 같은 재즈 뮤지션들을 세션에 초청해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앨범 중 한 곡은 예스의 보컬리스트인 존 앤더슨이 참가하기도 했다. 이건 고든 하스켈의 음역대와 스타일을 고려한 피쳐링이라고. (...) 앨범은 아방가르드 재즈와 클래식 관악에 더욱 강한 영향을 받았다. 피터 신필드가 직접 신시사이저를 연주하기도 했다는 것이 특이점이라면 특이점.

하지만 이 앨범 역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오죽하면 앨범의 평을 "어디선가 마구 얻어온 스타일" 으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 리듬 앤 블루스의 영향을 크게 받은 하스켈과 매컬로크는 이 앨범의 스타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세션을 그다지 즐기지도 못해 실망하기 까지 했다. 게다가 밴드의 창작 활동에 별로 참가할 것이 없다는 걸 깨달은 하스켈은 녹음이 끝나자 디스토션과 전자 효과를 통해 목소리를 내는 걸 거부하고 밴드를 탈퇴한다. 그 뒤에 매컬로크까지 탈퇴하자 프립과 신필드는 킹 크림슨을 새 멤버들로 한 차례 갈아 엎기로 결심한다.


이후 로버트 프립, 피터 신필드, 멜 콜린스는 새 보컬 보즈 버렐과[7] 새 드러머 이안 월리스를 영입한다. 나중에 킹 크림슨의 멤버가 되는 존 웨튼과도 어느정도 접촉을 하고 있었지만, 그냥 접촉만 한다 뿐이지 당시에는 밴드에 들어오는 것을 고사했다. 베이시스트로는 릭 켐프라는 사람을 영입했는데, 이 사람이 앨범 녹음 직전 갑작스럽게 잠적하게 되자, 로버트 프립이 보즈 버렐에게 베이스를 가르쳐줘서 베이스까지 맡게 되었다. 베이스를 연주해본 적은 없지만, 리듬 기타를 연주해본 적은 있었기에 배우는 게 별로 어렵진 않았다고. 이렇게 결성된 2기 킹 크림슨은 1971년, 오리지널 라인업이 결성된 69년 이후 2년 만에 투어를 돌았다.

71년 말, 킹 크림슨은 네 번째 앨범 "Islands"의 녹음에 들어간다. 그들은 이 세션을 진행하는 동안 그 때 까지의 밴드 역사에 있어 가장 '따뜻한' 사운드를 만들어 냈고, 이는 마일스 데이비스와 길 에반스의 오케스트라 협연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앨범의 주제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와 약간의 연관성을 보인다. 앨범은 프립과 신필드의 갈등이 표면화 된 정황을 보여주는데, 프립은 'Salior's Tale' 의 멜로트론과 기타 연주 스타일에서 알 수 있듯 더욱 거친 연주 스타일을 추구했고 신필드는 재즈-포크 어프로치의 본질적인 면모와 더 부드러운 분위기를 선호했다. 그 밖에도 'Prelude: Song of the Gulls' 에서는 밴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도했던 본격적인 관현악을, 'Ladies of The Road' 에서는 리듬 앤 블루스의 영향을 받은 음악을 들려주는 등 초기 킹 크림슨의 음악적인 행보 중에서도 단연 이색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앨범이라고 할 수 있다.

악화된 관계 때문인지 투어를 진행하면서 프립은 음악적 아이디어의 불신과 갈등으로 인해 신필드를 쫓아내 버린다. 사실 당시 프립의 의욕은 거의 최악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냥 밴드를 해체할 수도 있었고,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지만 하던 투어는 그대로 속행한 뒤에 해체하는 것이 옳지 않겠냐는 설득을 당해 72년 까지의 투어를 그대로 진행하게 되었다. 이 때 발매된 라이브 앨범이 "Earthbound" 인데, 이는 밴드의 고된 행보를 상징하기라도 하듯 극악의 레코딩 품질과, (...) 막 연주한 듯한 컨디션으로 (...) 혹평을 들었다. 이런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당시 밴드 멤버들은 나름대로의 결속력 향상을 보여주긴 했지만, 프립의 "아 시발 나 이거 맘에 안듦 해체하고 다른 거 할 거야" 음악적 혁신에 대한 갈망으로 인해 2기 킹 크림슨 역시 해체 수순을 밟았다.

3.2. 브루포드 영입부터 1차 공백기까지



새롭게 결성된 세 번째 킹 크림슨의 라인업은 색소폰이나 목관 악기들을 주로 쓰던 이전의 구성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프립은 처음엔 퍼커셔니스트 제이미 뮤어[8]를 영입하고 두 번째로 성공가도를 달리던 예스에서 나와 불안정하고 자유분방한 밴드 생활을 하고자 했던 전직 드러머 빌 브루포드를 영입했다. 세 번째로 'Family' 라는 프록 밴드에서 베이시스트로 일하고 있던 존 웨튼을 직접 영입했고, 마지막으로 음악 대학에서 아는 사이가 된 바이올리니스트 겸 멜로트론 연주자 데이빗 크로스를 영입해 세 번째 킹 크림슨 라인업을 완성했다. [9]

신필드가 밴드를 나간 이후, 밴드는 새 작사가를 찾고자 했고 그 결과 존 웨튼의 친구인 리처드 파머-제임스를 영입했다. 예술적으로 어느정도 연관이 있었던 신필드와 달리, 파머-제임스는 원래 시각 및 음향 감독으로 일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밴드의 일원이라기 보다 단독으로 행동하고자 했고, 함부르크에 있는 집에서 우편으로 가사를 부쳐 주었다.

스튜디오 리허설과 라이브 투어는 72년 말에 시작되었다. 즉흥 연주에 탁월함을 보이던 밴드의 성향 덕분에, 밴드는 나름대로 언론과 음악계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73년 초, "Larks' Tongues in Aspic"를 발표한다. 이 앨범을 녹음하면서 프립은 밴드의 전권을 휘두르다 시피 했는데 (...), 초기 킹 크림슨이 이언 맥도널드의 작곡 및 편곡 성향이나 피터 신필드의 가사 분위기에 크게 영향을 받아 프립 자신의 재량을 크게 발휘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앨범으로부터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의 그림자를 벗어났다고도 말할 수 있다. 프립은 이제서야 뭔가 하고 싶은 걸 하게 된 셈이다.

밴드의 성향이 이전과 크게 달라진 예로 주제곡인 'Larks' Tongues In Aspic' 이 A면 첫 트랙과 B면 마지막 트랙에 분할된 점을 들 수 있는데, 조용하게 흐르다 갑자기 굉음을 발하는 로버트 프립의 기타 소리나 반대로 강력한 록으로 진행되다 갑자기 찾아드는 정적 등에서 이런 느낌이 크게 나타난다. 이는 헝가리의 음악가 버르토크 벨러와 영국의 음악가 랄프 본 윌리엄스, 프리뮤직씬, 심지어 태동기 헤비 메탈까지 광범위한 장르의 음악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재즈와 클래식적인 요소를 접목한 심포닉 록을 선보였던 이전 음반 'Islands'와 'Larks' Tongues In Aspic' 음반을 비교해 보면 전작에 비해 재즈적인 연주 방식의 비중이 커져 있는 변화를 실감할 수 있는데, 이는 음반 표지에서 드러나듯 음과 양, 혹은 정과 동을 음악으로 표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10]

발라드 풍의 아름다운 소품 'Book of Saturday'에서도 실험적인 연주 방법은 왼쪽 채널을 잠식하고 있는데 마치 백워드 마스킹 기법을 사용한 것 처럼 들린다. 처음에는 이처럼 보통의 발라드 뿐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멜로트론을 골고루 쓰고자 했지만, 이 때는 연주곡에 중점을 둔 재즈 스타일의 합주를 주로 선보였다. 특히, 이 앨범에는 제이미 뮤어가 퍼커션과 "그냥 놓여있는" 잡동사니들을 통해 들려주는 자유분방한 어프로치가 깊게 스며들어 있다. 한 편 웨튼의 거칠게 두드러지는 베이스와 프립의 격렬한 기타 연주도 주목할 포인트 중 하나다.

투어를 진행하던 도중, 제이미 뮤어가 밴드를 탈퇴하게 된다. 당시에는 공연 도중 입은 부상으로 탈퇴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뒤늦게 알려진 이유에 따르면 개인적인 종교 수행을 하고자 (...) 밴드를 탈퇴했다. 브루포드는 밴드의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 뮤어 스타일의 퍼커션 몇 대를 드럼 세트에 추가했다.


이후 1974년, 밴드는 "Starless And Bible Black"을 발표하는데, 이 앨범은 독특하게도 1번 트랙 "The Great Deceiver"와 2번 트랙 "Lament"를 제외하고는 전부 라이브에서 녹음한 것을 절묘하게 편집해서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것처럼 만든 것이다. 본 앨범의 투어를 진행하던 중, 데이빗 크로스는 킹 크림슨으로부터 탈퇴하게 된다.


데이빗 크로스의 탈퇴로 인해 3인 체제가 되어버린 킹 크림슨이 맘에 들지 않은 로버트 프립은 밴드를 해체할까 고심끝에 밴드를 해체할까 고심한 끝에 해체를 결심하고, 이후 밴드의 70년대 마지막 앨범인 "Red"를 11월에 발표하게 되는데, 이는 킹 크림슨의 앨범 중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다음으로 걸작으로 뽑히는 앨범이다.[11]

3.3. 재결성 후 2차 공백기 까지


80년대 들어서 로버트 프립은 "리그 오브 젠틀맨"이라는 밴드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로버트 프립은 빌 브루포드와 연락해서 새 밴드를 만들고자 했다.[12] 이후 로버트 프립은 이전의 킹 크림슨과는 전혀 다른 음악을 만들기를 원하여 당시 토킹 헤즈와 투어를 돌던 에이드리안 벨류를 영입하였고, 이후 베이스 멤버를 모집하기 위해 오디션을 진행하다가 오디션을 진행하다가 나간 뒤 토니 레빈과 함께 돌아와 베이스 멤버로 채택하게 된다. 토니 레빈은 기존의 베이스가 아닌 새 악기 채프먼 스틱을 사용하자는 이야기를 했고, 프립은 흔쾌히 승낙했다.




이후 1981년 프립은 "Discipline"이라는 이름으로 새 밴드를 결성하지만 다시 이름을 킹 크림슨으로 바꾼 뒤에 새 앨범 "Discipline"을 낸다. 이 앨범은 뉴웨이브적인 성향을 많이 띈다. 당시 이 요소를 싫어한 대중들에 의하여 질타를 받았지만 이후 재평가가 이루어져 명반이란 수식어를 달게된다. 그 뒤에 1982년 "Beat"와 "Three Of A Perfect Pair"를 발표한 뒤 음악이 맘에 들지 않았던 프립은 밴드를 다시 해체한다. 이쯤되면 해체를 즐기는 걸수도

3.4. Thrak 발표부터 현재까지


90년대 초, 에이드리언 밸류는 로버트 프립을 찾아가 다시 킹 크림슨으로 밴드 음악을 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있다고 강하게 주장했고, 프립은 무슨 흥미가 또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그에 동의해 밸류가 다른 뮤지션과의 투어를 끝낸 이후 새로운 형태의 킹 크림슨을 구성하기 위한 절차에 돌입했다. 밴드는 80년대 킹 크림슨의 라인업 - 빌 브루포드, 토니 레빈, 에이드리언 밸류 - 를 포함한 뒤 트레이 건과 팻 마스텔로토를 영입하기에 이른다. 프립은 두 명의 드러머, 베이시스트, 기타리스트를 둔 이 형태를 "더블 트리오" 라인업이라고 했다.

5기 킹 크림슨은 94년의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 리허설을 가졌고, 같은 해 10월에는 EP 'Vrooom' 을 발매했다. 5기 킹 크림슨에서 선보인 음악의 방향성은 그동안 킹 크림슨이 보여준 음악의 장점만 가져다 섞은 것으로 평가된다. 오직 리듬 악기만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듯한 'Disipline' 시절 킹 크림슨의 요소와 강하고 직선적인 느낌의 'Red' 의 요소를 모두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당시의 인더스트리얼 계열 음악에서 인상을 받은 앰비언트 사운드 역시 고루 사용했다. 한 편, 에이드리언 밸류에 의해 쓰여지거나 완성된 많은 곡들의 형식은 1960년대 이전 팝 음악의 요소도 고르게 보여주고 있었다. 대략 비틀즈 스러운 형태라고 하면 이해가 조금 더 쉬울 듯. 또한 새로운 기술을 음악적으로 사용하는 걸 아끼지 않았던 프립을 위시한 밴드 멤버들은 당시에 폭넓게 쓰이던 미디를 녹음 작업 곳곳에 사용했다.

이후 94년 10월 말,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의 공연을 시작으로 밴드는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했다. 이 공연은 녹음된 뒤 95년 8월에 'B'Boom: Live in Argentina' 라는 제목의 앨범으로 발매되었다. 셋리스트에는 70년대 중반의 세 곡과 (Red, Larks' Tongues In Aspic Part II, The Talking Drum) 80년대 초에 선보인 여섯 곡이 포함되었다. 공연을 마친 직후 밴드는 피터 가브리엘의 개인 스튜디오인 리얼 월드 스튜디오에서 앨범의 녹음을 시작했다.


95년 4월, 5기 킹 크림슨의 첫 풀렝쓰 앨범인 'THRAK' 이 발매되었다. 이 중 몇몇 곡은 EP Vrooom의 곡들을 정리해 재녹음한 것이다. 대부분의 리뷰어들은 이 앨범을 '정교하고, 딱딱하며, 시끄러운 기타 상호작용으로 규정할 수 있는 재즈 냄새나는 락' 또는 '역동적이고 쭉 창의적인 리듬이 있는 물건' 으로 평했다. 앞서 말했듯이 다양한 요소들이 들어간 킹 크림슨의 사운드는 이런 평을 얻음으로서 어느정도 성공한 셈이다. 앨범의 호평과 함께 킹 크림슨은 95년에서 96년 동안 투어를 계속했다. 중간에는 'Thrakattak' 과 같은 실험적인 아방가르드 라이브 앨범도 선보였고, 몇몇 공연의 라이브도 녹음되었다. 물론 발매는 5기 킹 크림슨이 해체된 이후인 2000년대 초에야 되긴 했지만.

그러나 이것도 잠시, 밴드는 점점 복잡해지고 비용이 많이 들어 유지하기가 어려워졌고, 97년 중반에 내쉬빌에서 진행한 밴드의 리허설에서도 프립을 만족시킬 만한 밴드의 원동력은 나오지 않았다. 이 때 프립과 브루포드 사이에 균열이 발생했고, 브루포드는 이 때 상황에 대해 "지금 로버트와 난 어디서 저녁을 먹을지조차 정할 수 없고, 그게 안되면 (프립과) 같이 음악도 할 수 없다는 걸 여러분도 확신할 것" 이라고 말할 정도로 갈등이 심각해져 있었다. 거의 동시에 지속되던 밴드의 소재 고갈과 획일적인 그룹 아이디어로 인해 킹 크림슨은 결국 다시 활동을 정지했다. 다만 아얘 밴드를 깨버리는 대신, 규모가 작은 하위 그룹으로 멤버를 재구성해 스핀오프 활동을 계속하기로 하는데, 이런 일련의 조합들을 'ProjeKcts' [14]라고 한다.

이후 행보는 추가바람.

4. 여담


  • 킹 크림슨은 로버트 프립이라는 기인의 카리스마로 움직이는데, 공연내내 구석의자에 앉아서 기타를 연주하는 것으로 유명하다.[15] 연주스타일은 프립스타일, 농담이 아니라 정말 "Fripp-like sound"라고 하면 대부분 알아듣는다. 기타에 여러 장비를 연결해서 특이한 소리를 내는걸 좋아하던 그는 아예 기타로 엠비언트 음반을 내기도 했다.[16] 그는 당대에 등장한 다른 프로그레시브 록/아트 록 뮤지션들과 달리 약물이나 환각을 싫어했다고 한다. 거기에 본인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영입할 때 약 안하는 사람들만 받았다고. 사실 핑크 플로이드시드 바렛을 제외하고는 약을 안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밴드가 파워를 잃지 않고있으니.. 이건 약해야지 예술이 된다고요 거리는 몇몇 아티스트들이 배울만한 점이라 할 수 있다.[17]

  • 그의 기타소리는 생활 속에서도 들을 수 있다. "윈도우 비스타" (Windows Vista)의 시작음, 종료음, 경고음 등이 모두 그의 기타 연주라고 한다. 왜 하필 비스타일까

(이 밴드를 거쳐간 멤버들이 아주 화려한데 잘 찾아보면 꽤 재미있다.)

  • 피트 신필드 : 밴드의 작사가이자, 조명, 무대디자인 담당이었으며, 대표곡 "Epitaph"를 작사한 사람이다. 아래의 그렉 레이크의 밴드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의 곡들도 작사해주었다. 본업이 시인이었던 만큼 작사능력이 출중하다. "Island" 등 정말 다른 영문시에 비견해도 뒤지지 않는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로버트 프립과의 불화 이후 킹 크림슨을 탈퇴한 이후엔 프로듀서로 활동하기도 했다.[18] 트히 이탈리안 프로그레시브 록의 독보적 존재인 "PFM"의 프로듀싱과 가사의 영문 번역을 맡아 세계 진출에 큰 도움을 주었다.

  • 그레그 레이크 :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의 "레이크"이자, "Epitaph"를 부른 보컬베이스.
  • 리 커슬레이크 : "유라이어 힙", "오지 오스본 밴드"의 드러머.
  • 존 웨튼 : 이후 "유라이어 힙", "UK", 밴드 "아시아"에서 맹활약하는 베이시스트보컬리스트.
  • 마이크 자일스 : 드러머. 록분야에서 이례적인 프리 재즈적인 무질서한 드럼 연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 피트 자일스 : 위의 마이크 자일스와의 형제. 베이시스트이다.
  • 이언 맥도널드 : 건반악기 연주자 겸 관악기 연주자. 로버트 프립이 밴드의 주도권을 잡기 이전 사실상 음악적인 리더였으며[19], 킹 크림슨의 "Red" 앨범에서 관악기 세션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이후 또다른 수퍼밴드 "포리너" (Foreigner)를 결성했다.

  • 키스 티펫 : 전위 피아니스트. 센티페드란 퓨전재즈 밴드도 결성했으며, 부인은 유명한 가수 "줄리 드리스콜".

  • 토니 레빈 : 베이시스트. 기존의 베이스가 아닌 그가 개발한 '스틱'이란 독특한 악기를 사용.

  • 그 중 가장 중요한 멤버는 드러머인 빌 브루포드. 이미 또다른 프로그레시브 록밴드예스에서 엄청난 기량을 발휘하고 있었지만, 리더인 존 앤더슨과 이후 예스의 음악방향 설정에서 갈등을 빚은 뒤 로버트 프립의 부름으로 킹 크림슨에 합류한다.[20]

5. 디스코그래피


5.1. 스튜디오 앨범


  •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1969)
  • In the Wake of Poseidon (1970)
  • Lizard (1970)
  • Islands (1971)
  • Larks' Tongues in Aspic (1973)
  • Starless and Bible Black (1974)
  • Red (1974)
  • Discipline (1981)
  • Beat (1982)
  • Three of a Perfect Pair (1984)
  • THRAK (1995)
  • The ConstruKction of Light (2000)
  • The Power to Believe (2003)

5.2. 라이브 앨범


  • Earthbound (1972)
  • USA (1975)
  • The Great Deceiver (1992)
  • B'Boom: Live In Argentina (1995)
  • Thrakattak (1996)
  • Epitaph (1997)
  • The Night Watch (1997)
  • Absent Lovers: Live in Montreal (1998)
  • Live in Mexico City (1999)
  • The ProjeKcts (1999)
  • Heavy ConstruKction (2000)
  • Vrooom Vrooom (2001)
  • Ladies of the Road (2002)
  • EleKtrik: Live in Japan (2003)
  • Live in Argentina, 1994 (2012)

6.1. 6에서 따온 랙의 별칭


버그나 회선 렉 등으로 인해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멈추는 현상에 대해 유저들이 붙인 별칭. 물론 당연한 것이겠지만 아는 사람만 이렇게 부른다(...). 사실 일어나는 상황은 별로 없다. 왠만큼 구린 컴퓨터가 아닌 이상..

채팅 등에서 갑자기 모두들 아무 말도 안하는 것도 이 현상의 일환 (...)

사실 더 월드 (3번 항목)랑 별 차이없어 보이지만 자신이 폴더를 화면 끝에서 끝으로 옮기는 도중에 랙이 걸렸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랙이 풀림과 동시에 폴더는 화면 끝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그야말로 '그 사이의 시간은 지워진다'는 것이 된다고(...)

온라인으로 대전격투게임을 하다가 렉이 걸리게 되면 자신은 가만히 있는데 상대만 신나서 내 캐릭터를 두들겨 패는 장면을 목격하게 될 때가 있다. 가드도 불가능하고 손발 하나 뻗지 못하고 샌드백이 된 자신의 캐릭터를 보면, 정말 킹 크림슨이 실제로 능력을 쓰면 어떻게 되는지 확실하게 체험하게 된다. 삭제된 시간 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상대방의 캐릭터 뿐!
----
  • [1] 심지어 더 후의 드러머인 키스 문도 이 앨범을 대놓고 깠다!
  • [2] 이 데모곡은 컴필레이션 앨범인 "A Young Person's Guide to King Crimson" 에서 들어볼 수 있다.
  • [3] 영향력 있는 커뮤니티 사이트인 ProgAchives.com에 프록 월드컵이란 주제의 포럼이 올라온적이 있는데, 데뷔 후 몇십년이 지나도 1위 먹는거 보면 확실히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포럼 주최자가 마지막에 "킹 크림슨과 싸웠는데도 꽤 많은 표를 얻은 핑크 플로이드가 대단하다"는 농담을 적었을 정도다.
  • [4] 피터 신필드는 밴드에 들어가기 전 컴퓨터 프로그래머로서 배리 고드버와 함께 일했는데, 그는 아티스트이기도 했다. 그리고 킹 크림슨의 멤버가 된 뒤, 고드버에게 앨범커버 작업을 의뢰했다. 고드버는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이 그림을 창조했다. 이듬해, 고드버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고, 이 그림은 그가 남긴 유일한 회화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로버트 프립은 이 그림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 [5]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프립은 Power의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샘플링 원작자인 자신에게 한 푼의 돈도 돌아오지 않았다면서 카녜와 유니버설 뮤직을 매우 깠고, 심지어 이 때문에 음악 산업에 염증을 느껴 은퇴 선언까지 고려했었다. 말해주기 전에는 몰랐다는 것으로 봐서 사실상 "나 허락 받았음" 수준인 듯.
  • [6] 이 곡을 커버한 음악가들 중 오지 오스본도 포함되어 있다.
  • [7] 보컬의 오디션을 뽑는 뮤지션에는 록시 뮤직의 브라이언 페리, 엘튼 존, 심지어 밴드의 매니저까지 참가 했으나 (!) 전부 탈락했다. (...)
  • [8] 뮤어는 상당한 괴짜로 알려져 있는데 5집 "Larks' Tongues in Aspic"의 제목과 커버는 그가 디자인한 것이고, 앨범 발표 직전 종교적 수행을 이유로 탈퇴한다.
  • [9] 제이미 뮤어가 밴드에 있던 기간은 꽤 짧지만, 이 때가 킹 크림슨이 '다수의 드러머' 구성을 시도한 첫 번째 사례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 [10] 이에 설득력을 더해주는 것이 앨범 제목인 Larks' Tongues In Aspic이다. Aspic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을 말하는 것이고, Larks는 종다리과의 새를 말하는 것이다. '부드러움 (묵) 에 내재된 딱딱함 (종달새의 부리)' 라는 의미인 것이다.
  • [11] 이 앨범의 곡 중 가장 명곡이라 평가받는 "Starless"에 관한 일화가 있는데, 사실 본 곡은 전작 "Starless And Bible Black"의 타이틀곡으로 쓰려다 프립과 브루포드의 마음에 들지 않아 누락시켰다가 이후 "Red"에 수록했다고 한다.
  • [12] 당시 프립은 킹 크림슨을 재결합시킬 의사가 없었다.
  • [13] 초기 발매 시의 앨범 아트는 이것과 조금 다르다.
  • [14] 이 표기는 오타가 아니다. 프립은 5기 킹 크림슨 이후로는 유난히 c 앞에 K 를 많이 썼다. 킹 크림슨의 이니셜이 뭔지 생각해보자. (...)
  • [15] 심지어 G3 공연에서도 의자에 앉아서 얌전히 연주만 했다.
  • [16] 브라이언 이노와 합작으로 1973년 "No Pussyfooting"이란 앨범을 내기도 했다.
  • [17] 요즘 음악 내용이나 밴드 인터뷰에 따르면 마약과 환각에 긍정적인(? 밴드 "Tool"과 같이 투어를 다닌다고 한다. 참 기묘하다.
  • [18] 피트 신필드는 킹 크림슨의 음악에도 참여하고 싶어했지만 로버트 프립은 그의 뮤지션적인 재능을 인정하지 않아서 작사가로 머물러야 했다.
  • [19] 로버트 프립에게 멜로트론이라는 악기를 소개해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 [20] 빌 브루포드의 킹 크림슨 가입에 대한 재밌는 일화가 있는데, 당시 빌 브루포드는 예스와의 음악적 견해차이로 힘들어 하고 있었고 기분전환이나 할겸 친구들과 여행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갑자기 찾아온 폭우때문에 잠시 몸을 말리려 급하게 음악소리가 들리는 어떤 집에 잠시 들어갔는데 그 집이 바로 로버트 프립의 집이었던 것.노렸나? 당시 한창 잼 세션 중이었던 프립은 빌과 그의 친구들에게 세션에 같이 참여할 것을 요청했고, 거기서 빌이 드럼을 치는 모습을 보고 감명받은 프립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다음날 전화로 빌에게 멤버로 들어올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그의 극히 건조하고 절제된 드럼 연주는 기존의 록 연주와는 많은 차이가 있고, 중반기 이후 킹 크림슨의 음악과 완벽히 부합한다. 로버트 프립이 가장 오래 붙잡아두고 있던 멤버.이때부터 예스는 하락세를 걷게되었다 카더라
Valid XHTML 1.0! Valid CSS! powered by MoniWiki
last modified 2015-02-16 06:01:34
Processing time 0.1094 s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