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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와 전투

last modified: 2015-03-14 22:09:19 by Contributors

Battle of Tarawa

타라와 전투
작전명
Operation Galvanic(충격 작전)
날짜
1943년 11월 20일 ~ 1943년 11월 23일
장소
타라와 환초 베티오
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미국 일본
지휘관 줄리안 C.스미스 시바자키 케이지
병력 35,000명 2,619명 및 건설 노동자 2,200여명
피해 규모 1,696명 전사 4,690명 전사
결과
미군의 승리
기타
미군의 첫 상륙전, 그러나 막대한 희생자가 나옴.

Contents

1. 개요
2. 배경
3. 경과
4. 이후 이야기

1. 개요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 중 1943년 11월 20일~23일까지 타라와 환초에서 진행된 미국 해군 + 해병대의 연합상륙작전.

일본 본토로의 진공을 위한 길닦기 작업의 일환으로 일본군이 점령한 주요 환초에 대한 탈취작전 중에 하나였는데, 타라와 전투만큼은 미국에서는 비극이란 표현을 사용할 정도로 엄청난 사상자가 난 전투였기 때문에 미국 역사를 비롯하여 태평양 전쟁을 다루는 역사서 등에서 비중있게 다룬다.

거의 모든 전투는 타라와 환초 베티오 섬에서 벌어졌지만 그냥 이 지역을 대표하는 환초의 이름을 따서 타라와 전투라 부른다.

2. 배경

1943년 과달카날 전투가 끝나고 본격적인 반격 작전을 구상 중이던 미군은 진격 방향을 놓고 의견 통일이 되지 않고 있었는데, 일단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어하던 본토의 높으신 분들은 태평양의 주요 환초들을 점령한 다음 대만오키나와를 거쳐 일본 본토로 가는 방안을 강력하게 밀고 있었으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비롯한 일선 사령관들은 배후에 적을 두면 곤란하다는 이유로 필리핀과 인도차이나 지역을 확보한 다음 일본 본토로의 진격을 주장하고 있었다.[1] 결국 수뇌부의 의견 통일은 쉽사리 이뤄지지 않았고 어쨌든 어느 방향으로 진격을 하건 길버트 제도와 마셜 제도는 반드시 점령하고 넘어가야 하는 곳이었고, 일본군도 주요 요소에 병력과 물자를 파견하고 토치카와 비행장을 건설하는 등 방어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오다 보니 일단 먹어야 되는 곳은 먼저 먹고 남은 키배는 나중에 뜨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미 해군은 길버트 제도와 마셜 제도, 부타리타리 환초[2] 등지에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파견하여 대대적인 공습을 가하여 기지와 항공병력을 무력화시켰고 이후 미 육군 27보병사단을 주축으로 한 상륙전이 시작되어 점령에 들어갔고 이어서 길버트 제도의 타라와 환초에 대한 상륙작전에 들어갔다. 타라와 환초는 훗날 마리아나 제도로의 진격을 위한 해군 함대의 중간거점이자 육상에서 운용 가능한 중폭격기들의 항공기지로 활용될 계획이었다.

한편 일본군 역시 놀고 있지 않았다. 수뇌부가 전쟁 도중에 병맛 넘치는 행위를 많이 하긴 했어도 길버트 제도의 전략적 가치를 모를 정도로 무뇌하진 않았다. 게다가 아직 육군에서는 개전 초반의 정예병력들이 남아있고, 장비도 일본군 기준에서는 충실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일단 일본 본토에서 2,600명 남짓의 정예병력을 차출하여 타라와 환초에 배치하였고 14대의 95식 경전차 하고를 배치하였으며, 방어진지 구축을 위해 1,300명 가량의 노동자들을 투입하였다. 그리고 해안 방어를 위한 포들을 설치하였고, 러일전쟁 당시 노획된 8인치 대포까지 가져와서 설치하였다. 여기에 500개에 달하는 견고한 벙커와 토치카를 설치하였으며, 섬의 모든 거점과 연결된 참호를 구축하였다. 거기다 초호에서 육지로 이어지는 얕은 지대에는 통나무나 쇠로 된 꼬챙이들을 박아놓아 앰트랙과 같은 상륙용 주정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도록 방해작업까지 해둔 상황이었다.

이러한 일본의 철저한 대비에 비해 미 해군의 경우에는 전함의 함포와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공습으로 일본군을 싹 쓸어버리고 해병대 병력을 투입하여 잔챙이들을 정리하면 끝이라는 다소 안일한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비극의 단초가 되었다.

여담으로 타라와에 파견된 1,300명의 노동자 중에는 강제로 징집된 한국인이 다수[3]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3. 경과

미 해군은 2척의 정규항공모함, 1척의 경항공모함, 5척의 호위항공모함, 3척의 전함, 8척의 순양함, 14척의 구축함, 17척의 수송선에 미 해병 2사단을 대동하고 타라와 환초에 모습을 드러냈다. 우선 수상함들이 포문을 열고 1시간 반 가량 섬 전역에 포격을 가하였고,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함재기들이 날아다니며 일본군이 구축한 방어시설에 폭격을 가하였다. 이 정도 했으면 틀어박힌 일본군은 전멸했을 거고 방어시설은 남아있지 않을 거라고 판단하고 상륙을 지시하였다.

하지만 일이 초장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상륙작전을 추진한 날짜가 조수 간만의 차가 최소가 되는 시기인 조금[4]이었음에도 수심이 전혀 깊지 않았던 것. 이는 다름아닌 미 해군의 정보부족 때문이었는데, 본디 베티오 섬 지역은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조금 시에도 수심이 상당히 낮아지는 날이 하루에서 이틀 정도 있었다. 그런데 미군 측에서 이걸 모르고 하필 상륙하는 날을 그 날로 잡은 것(…).

한편 미 해군의 포격이 중지되고 해병들이 상륙을 준비하자 깊게 판 방공호 속에 숨어있던 일본군은 즉시 빠져나와 반격 준비를 하였고, 미 해군의 포격으로 대부분의 화포가 상실되었지만 운 좋게 살아남은 대포들을 즉시 확보하여 해변을 향해 오고 있는 해병들에게 정확한 사격으로 환영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특히 수심도 예상보다 낮은 상황에 일본군이 설치한 각종 장애물에 걸려 앰트랙 및 상륙주정들이 퍼지기 시작했고 소수의 앰트랙만이 해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결국 최초로 상륙한 부대는 곳곳에 설치된 통나무와 장애물로 인해 소수만이 살아남았을 정도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전차들을 동원하여 일본군이 설치한 장애물을 밀어버리려 했으나, 일부 전차는 상륙주정과 함께 바다속으로 잠기고 간신히 상륙한 탱크들도 적 75mm 대공포 사격에 피격 되고 보병 지원없이 단독으로 싸우다가 파괴 되고 아군 항공기에 오폭 당하는 등 극소수 만이 살아남아 전투를 지속해야했다.

이런저런 악조건 속에서 미군은 정오 무렵 해변을 점령하였고 전열을 가다듬은 후, 활주로를 비롯한 주요 거점 장악을 위해 병력을 전진시키기 시작했다. 이 무렵 몰래 숨어있던 일본군이 격파된 채 여기저기 퍼져있던 앰트랙에 잠입하여 앰트랙에 부착된 M2 중기관총으로 미 해병대 후방에서 기관총탄을 갈겨대는 바람에 한바탕 소동이 발생했고, 병력을 재규합한 해병대가 반격을 가하여 앰트랙을 다시 탈환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상륙 이틀 차에 섬 서쪽 끝을 완전히 장악한 미군은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으나, 정작 나머지 지역에서 진격한 미군은 일본군의 강력한 저항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본군은 단순히 잔병들이 벌이는 최후의 발악이 아니라 토치카와 벙커, 참호를 이용해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저항했다. 게다가 밤 사이 일본군이 몰래 주요 거점에 중기관총을 설치하고 마구 긁어대는 바람에 해변과도 떨어지게 되었고, 상륙한 해병대끼리도 서로 떨어져 고립되는 사태를 빚기도 하였다. 결국 계속되는 고전으로 미 지상군 지휘부는 해안가에서 지원을 위해 대기 중이던 해군 함대에 무전을 넣어 "이거 답이 안나와요 캐리어항공모함 가야됩니다!"를 외쳤다. 이에 항공모함에 대기 중인 함재기가 발진하고 전함의 주포가 불을 뿜으면서 지상군이 요청한 장소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중기관총들을 급히 수배하여 일본군이 설치한 기관총 포대와 맞불을 놓은 것으로 응수했다. 그 결과 일본군이 방어선을 포기하고 물러나면서 일부 진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

이 무렵 일본군 일부가 인접한 바리키리 섬에서 베티오 섬으로 지원 차 접근하고 있었으나 미리 정보를 입수하고 기다리고 있던 해병대가 항공지원과 전차, 곡사포의 지원을 등에 업고 섬에 상륙하려는 순간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그리고 이 날 타라와 환초 방어를 지휘하던 케이지 시바자키 소장이 전사하였다.

비록 일본군 사령관이 전사하긴 했어도 일본군이 구축한 방어선이 건재하고, 워낙 맹렬히 저항하고 있던 까닭에 전투가 끝나진 않았고, 중장비와 탱크를 동원해서 공세를 퍼부으면서 일본군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결국 수적으로 열세였고 미군의 공세에 밀린 일본군은 차츰차츰 물러나기 시작했고 미군은 그 뒤를 추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몇 차례 미 지상군에 반격을 가하기도 하였지만 번번히 미군의 포격에 밀려 좌절되었고 몇 차례 반자이 어택도 감행하지만 당연히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의 전투는 미군이 진격하고 그럼 미리 구축된 토치카나 벙커에서 일본군이 맹렬히 저항하고 이를 뚫기 위해 군함이나 곡사포를 가져와서 날려버리는 식으로 진행이 되었다. 그렇게 4일만에 베티오 섬에서 맹렬히 저항 중이던 일본군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이후 일부 병력이 나머지 섬들을 싹 정리하면서 타라와 환초에서의 전투가 마무리되었다.

이 전투로 일본군은 5,000명 중에서 겨우 146명의 생존자(17명의 일본인, 126명의 한국인)만 남긴 채 전멸하였다. 반면 미국 역시 지상군에서 3,300여명에 달하는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4. 이후 이야기

첫 상륙전투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자 미군 수뇌부는 할 말을 잃은 듯한 반응을 보였고 미국 본토 역시 들끓었다. 언론에서는 이 작전을 주도한 미군 수뇌부와 태평양 함대 사령부를 씹어대기 시작했고, 국민들은 물론 정치인들까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잖아?"라면서 비난을 퍼부었다.

호되게 데인 태평양 함대 사령부는 상륙작전 절차를 재검토하였다. 특히 미군을 가장 고전하게 만들었던 것이 일본군이 건축한 콘크리트 토치카 및 벙커란 점에 주목하고 하와이 근처에 이를 완전히 똑같이 재현한 시설을 구축하고 다방면으로 공격 방법을 연구하였다. 이를 통해 타라와 전투 수준의 상륙준비포격을 해봤자 아무 성과가 없음을 파악하게 되었고, 전함 주포에 철갑탄을 장전해서 정확하게 명중시켜야 콘크리트 토치카와 벙커를 격파가 가능하단 사실을 알아냇다. 이에 따라 이후 전투에서는 상륙준비사격의 양과 기간을 크게 늘렸는데, 상륙을 시작하기 며칠 전부터 전함과 순양함을 동원하여 철갑탄과 고폭탄으로 섬을 아주 콩가루로 만들어놓고, 구축함의 근접사격과 항공기 공습으로 나머지 잔챙이를 정리한 다음 지상병력이 들어가는 순으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지원사격방식도 기존의 무차별사격에서 사격후 목표의 파괴 정도를 확인하고 재차 사격해서 확실하게 끝장낸 후 다음 표적으로 이행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이러한 방식은 태평양 방면 전선에서 미 해군의 상륙전 FM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상륙장갑차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비록 초기의 앰트랙들이 빈약한 장갑으로 인해 개박살난 경우가 많지만, 그런 앰트랙마저 없었다면 상륙 자체가 불가능했으리라는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다. 당장 산호초 등의 장애물에 걸려서 기존의 상륙주정은 해안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멈출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상륙주정만으로 대부분 상륙한 제2파나 제3파 상륙부대도 제1파 상륙부대만큼 큰 손해를 입게 된 것이다. 안 그래도 무거운 짐을 들고 최소한 허리까지 차오르는 물을 뚫고 심하면 1km 이상 떨어진 해안에 상륙하는 것 자체가 엿같은 일인데, 일본군의 기관총 사격까지 가해지면 그냥 헬... 그래서 앰트랙의 장갑과 화력이 강화되고, 수량도 크게 늘어나게 된다.

여기에 더해서 상륙전시 통신상태가 불량해서 근접지원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전황보고가 힘들었다는 점을 감안해서 지휘함으로 불리는 통신과 지휘만 담당하는 군함을 새로 만들게 되었으며, 근접항공지원을 원할하게 하기 위해 해당 임무에 맞는 훈련을 이수한 전담부대가 필요함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또한 상륙하기 전에 상륙지역을 실제로 정찰하고 장애물을 폭파할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므로 UDT같은 특수부대가 창설되었다.

한편 메이킨 전투에 참가했던 미 육군 27보병사단의 평판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이들이 일본군과 교전하게 되면 적극적인 돌파가 아니라 안전빵을 고수하는 형태로 맞상대하는 바람에 27사단이 담당한 구역에서는 전투가 질질 늘어지게 되었고, 타라와 전투에서 해병대가 상당한 사상자를 낸 것과 달리 메이킨 전투에서 육군은 경미한 사상자를 내었지만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대기 중이던 호위항공모함 리스컴 베이가 일본군 잠수함의 어뢰에 맞아 격침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게다가 항모에 탑승 중이던 호위항모부대 지휘관을 비롯하여 687명이 전사[5]하기까지 했으니 해군과 해병대는 그야말로 이를 박박 갈면서 "그 X같은 땅개색히들이 거지같이 전투지휘하는 바람에 이렇게 된 거다!"라며 욕을 해댔다. 이후로도 27사단은 상륙작전에 계속 참여했지만 해군과 해병대가 보기에는 여전히 '작전지휘 거지같이 하는 땅개색히들'이었고 결국 참다 못한 상륙부대 총지휘관 스미스 해병대 중장이 배에서 내려 직접 찾아가 사단장 스미스 육군 소장을 해임시키는 미군 역사상 초유의 사태를 벌이기도 했다(…).[6]

미군은 이러한 지옥도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라 굳게 믿었지만 현실은 시궁창. 이오지마 전투에서 타라와보다 더 심한 지옥도를 경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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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맥아더의 주장인 '배후에 적'은 사실 핑계거리이고, 자신이 필리핀에서 한 아윌비뷁 약속도 있고 필리핀에서의 여러가지 정치적 영향력을 감안하여 내린 결정이란 설도 있다.
  • [2] 메이킨 전투가 일어난 곳으로 메이킨은 부타리타리 환초에 있던 섬이었다.
  • [3] 타임-라이프 시리즈의 <남태평양 전투>에 따르면 전원이라고 한다.
  • [4] 조수간만의 차가 최소가 되는 만큼 썰물 때에도 물이 그리 많이 빠지지 않는다.
  • [5] 전사자 중에는 진주만 공습에서의 영웅적인 활약으로 흑인 수병 사상 최초로 훈장을 받은 도리 밀러도 끼어있다.
  • [6] 사이판 전투 당시 벌어진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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