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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last modified: 2015-08-24 14:01:05 by Contributors

Contents

1. 일본 제국이 일으킨 전쟁
1.1. 개요
1.2. 배경
1.3. 여러가지 모습들
1.4. 기타
1.4.1. 생산력 비교, 1939-1945
1.4.2. 인명 피해
1.5. 관련 항목
1.5.1. 사건, 사고
1.5.2. 전쟁 범죄
1.5.3. 리그베다 위키에 개설된 관련 작품
1.6. 참조
2. 19세기 남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전쟁


1. 일본 제국이 일으킨 전쟁

한자 : 太平洋戰爭
영어 : Pacific War



태평양 전쟁에서 이길수 있다는 그 근거! 그것이 듣고싶습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기름 때문에 전쟁하는 병신들도 있냐?
이시와라 간지

"이제 일본은 망할 것이다. 너희들은 다다미 위에서 죽지 못한다. 그 각오를 해둬라."
사이온지 긴모치

"어제, 1941년 12월 7일 - 이 날은 치욕의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 미합중국은 일본제국 해군과 공군에 의해 고의적인 기습 공격을 당했습니다."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

"이 전쟁이 끝나면, 일본어라는 언어는 이제 지옥에서나 쓰는 언어가 될 것이다."
윌리엄 홀시

태양에서 나오는 힘이, 이제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옥좌가 있는 땅 일본 전체를 일식 상태로 만들어버렸다.
해리 트루먼

일본 제국석유가 없어서 벌인 중립이라는 잠에 빠져들어 있던 미국을 깨어나게 만들고 자신들을 스스로 멸망으로 이끈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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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 제국의 최대 판도. 서쪽으로는 영국 치하의 인도 제국을, 남쪽으로는 다윈 등 호주 북부 도시를, 동쪽으로 미드웨이 및 알류샨 열도를 위협했다.
두 지도 모두 붉은 색 계열은 일본에 맞서 전쟁을 하는 나라, 푸른색은 일본과 일본에 점령 또는 동맹을 맺은 나라들이다.


종전 직전의 판도. 일본의 전선은 이미 산산조각난 지 오래였고, 제해권 및 제공권의 괴멸로 인해 일본 본토와 남방 점령지는 완전히 유리(遊離)되어 있었다.


태평양 전쟁을 알리는 NHK라디오 방송, 12월 8일 오전6시에 일본함대(제국함대)가 영국, 미국을 상대로 선전포고와 다름없는 선언을 한후 결사의 대공습을 실시한다고 알리고 있다.

1.1. 개요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부터 1945년까지 태평양 일대와 동남아시아 지역을 무대로 일본미국을 중심으로 벌어진 중앙 태평양 전선과, 중국 전선 및 영국-인도군이 주도한 버마-인도 전선, 호주군이 주공을 맡은 남서태평양 전역을 포함한다. 일본 극우들은 이 전쟁을 대동아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에서도 나이 든 세대는 이렇게 부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최근에는 중국, 동남아시아 내륙 전선까지 포함되어 있는데 "태평양"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적절하다 하여 아시아-태평양 전쟁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이 태평양전쟁은 우호국 독일의 계획대로만 움직여줬다면 적어도 1942년 초까지 일어날리가 없었던 전쟁인데 미국이 참전을 안했으면 미국의 물자도 랜드리스로 일본을 제외한 추축국에게 전달될 수도 있었다. 어쨋든 일본은 현재까지 인류가 일으킨 전쟁가장 넓은 지역에서 벌어진 전쟁을 벌이게된다. 태평양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육상전이 주로 일어난 다른 전선과 달리 이 지역의 전투는 해전과 상륙전이 대부분이였으며 전후 미 해군해병대는 세계 최강으로 거듭난다. 그리고 미국의 쇼미더머니를 보여주는 대표적 전쟁이다.

이쪽도 유럽쪽의 전선 못지 않게 엄청난 인명이 죽어나갔다. 일본에 의한 민간인 사망자는 2천 5백만이 넘어가고[1] 전사자는 연합군 4백만 이상, 물론 상당수가 중국군이다. 참고로 미군은 약 10만 정도. 일본군은 2백만 이상이다.

태평양의 여러 섬들을 배경으로 한 전쟁인만큼 유럽의 전장에 비해 해전의 비중이 컸으며,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해전들이 펼쳐진 전쟁이기도 하다. 특히 거함거포주의의 몰락과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하는 기동전, 나아가 상륙전, 보급전 등 //을 아우르는 유기적인 대규모 합동작전의 경험은 전쟁사상 엄청나게 큰 변화.

오늘날 미국일본SF 전쟁물에서 흔히 보이는, 탄막이 우주를 가득 메우고 수십~수백기 편대의 격렬한 도그파이트가 벌어지며 함선끼리 함대를 짜서 대단위로 포화를 주고받고 행성을 향해 상륙정이 비처럼 쏟아지는 이런 전쟁의 이미지는 태평양 전쟁에서 주로 형성된 것이다.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 일본군의 온갖 병크삽질들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헛웃음과 대한독립에 기여했음에 감탄을 금치 못하게 만든다[2] . 대표적인 예로 일본 해군과 일본 육군은 서로 다른 국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기본적인 협력조차 안 되었다. 참고로 이 내용은 히틀러의 수기에도 나온다. 물론 독일도 국방군(Wehrmacht)과 SS 간의 갈등도 엄청나게 심각했고[3] 미군도 육군과 해군의 경쟁과 자존심 싸움이 치열했지만, 그 정도(?)는 애교에 가까울 정도로 일본 육군성과 해군성의 반목/대립은 정말 상상을 뛰어 넘는 수준이었다. 단적인 예로, 일본 육군은 미드웨이 해전, 필리핀해 해전(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의 그 중대한 결과조차 뒤늦게 해군으로부터 통보받거나, 심지어 스스로(…) 알아내야 했을 정도. 나중엔 육군이 자체적인 항공모함과 잠수함을 운용하는 비범함도 보여주었다. 이런 것은 영상매체에도 반영돼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도 구리바야시 중장이 나중에야 연합함대의 전멸을 소문(…)으로 듣고 허탈해 하는 장면이 있다.

전쟁의 시작은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미국 태평양함대 기지 진주만을 전격 기습한 것으로 시작했다. 이후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 일대를 석권하고, 인도, 호주까지 위협하였다. 그러나 미드웨이 해전과달카날 전투의 패배를 기점으로 급격히 하락세를 타며 점령지 대부분을 상실하고 본토 코앞까지 내몰리게 된다. 항복을 거부하고 비합리적/광신적인 자살돌격, 카미카제등의 정신나간 만행과 기행을 거듭한 결과 결국 막판에는 인류 최초로 처음이자 마지막인 원자폭탄 실전투입 대상이 되어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1.2. 배경

일본은 이미 중일전쟁의 늪에 빠져서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상황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또 다른 적을 공격하는 것은 양면전쟁을 스스로 일으키는 무모한 행동으로, 군사학이나 병법까지 찾아볼 것도 없이 2:1로 싸울 때 어떤 편이 유리한지만 생각해 봐도 미친 짓이라 하기에 충분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미국유럽태평양에서 양면전선을 형성했고, 이기기까지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미국이니까 가능한 것이고…[4]

게다가 일본이 싸움을 건 상대는 압도적인 국력 차이로 자신들을 밀어버리고도 남을 미국이었고[5], 그것도 비축석유가 부족한 상태에서 도전했다는 것도 문제였다. 개전 직전인 1940년의 자료를 보면 인구는 미국이 1억 3,200만명(그 외에 필리핀 인구도 고려해야 한다.), 일본은 본토 7,200만명과 그 외 지역(만주국 3,700만명, 조선 2400만명, 타이완 600만명)을 합쳐 1억 3,900만명으로 비등했으나 1인당 GDP(1990년 환율로 환산)에선 미국 7,000달러, 일본 본토 지역 2,700달러로 3배에 가까운 차이가 났으며 일본 식민지 지역은 본토의 2분의 1 수준으로 더 열악했다. 당시 기준 명목치로 치면 더 암울한데 식민지의 경우 조선은 일본의 1/5~1/6, 대만은 1/2~1/3 정도의 소득수준을 지녔다. 만주국은 조선보다 더 암울했다. 덤으로 석유의 주요 수입원도 미국이었다.

또한 본토 인구가 대부분인 미국과 달리 식민지 인구가 많은 일본은 동원력에서도 불리했다. 누군가는 '그럼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와 일본 인구가 3배 차이났던 건 뭐임?'이라고 물을지도 모르겠는데, 그건 병력동원이 힘든 러시아에게는 국지전 수준이었고 당시 러시아 자체가 내전으로 치닫는 막장 상황이었으며, 자세히 뜯어보면 다른 서구열강들이 일본을 이용해서 러시아를 견제하려던 대리전 성격을 지닌 게 러일전쟁이었으므로 논외다. 사실 러일전쟁은 당시 최강대국인 영국미국이 일본을 바지사장으로 내세워 러시아와 한판 붙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따라서 태평양 전쟁은 일본의 또라이 기질이 낳은 삽질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며 실제 경과도 이 시각과 별로 다르지 않다.
내가 귀싸대기를 존나 맛깔나게 후리면 감동먹어서 나랑 협상하겠지"[6]

당시 일본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인 추축동맹 파기, 점령지의 군경 철수 및 이권포기, 만주국 해체 등을 내걸며 석유금수조치를 취한 미국의 강경노선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태평양 전쟁이 독일의 상승세에 자극받아 아시아-태평양권을 홀랑 집어 삼키려던 일본의 야욕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점은 변함없다. 못된 짓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는데도 이걸 씹고 만행을 벌이다가 처지가 안좋게 되니까 협상을 하자는데, 그 동안 만행으로 턴 재산과 권리는 다 가지고 간다는 작자가 과연 정상적인 자인지 생각해보자.

당시의 미합중국과 일제는 애초에 양립하기 힘든 관계였다. 당장 1930년 당시의 독일, 일본, 이탈리아는 기본적으로 대공황의 탈출법을 군수산업 위주의 수요 창출에서 찾은 나라들이다. 식민지 쟁탈전 참가는 이에 따른 당연한 결과. 오스트리아, 체코에 만족 못 하고 폴란드까지 치고 들어간 독일처럼, 일본도 만주 뿐 아니라 중국 대륙과 동남아시아까지는 자원 확보를 위해 반드시 차지해야 했다. 국제적으로 그렇게 욕을 들어 먹으면서도 중일전쟁을 지속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질서를 통제해 가기를 원했던 미국과 영국으로서는 일제의 동아시아 석권은 절대 용납할 수 없던 시나리오이기도 하다. 이는 국제정치학, 정치경제학의 통설이다.

히로히토가 말년에 토고 시게노리 당시 외상을 증오한다고 고백한 것도, 자신이 보기엔 타협의 여지가 있어 보이던 헐 노트를 토고 외상이 더 이상의 교섭은 불가능하다고 섣부르게 포기하여 일본을 미국과의 전쟁으로 몰아넣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삼국동맹은 삼국 중 한 나라가 공격을 받았을 때 다른 나라가 방어국을 도와 참전할 수 있다고 명시했기 때문에, 미국이 일본과 전쟁이 발발했다 치더라도 독일에는 따로 선전포고를 하는 등 별개로 취급해야 했다. 문제는 히틀러가 진주만 기습 소식을 듣고 정식으로 대미선전포고를 때렸다는 거.[7] 일부 극우는 "그때 독일이 아니라 미국과 손잡아야 했다. 그랬다면 일본이 승전국으로 지금까지도 그 땅을 유지하고 더 이득이 컸을 것이다."라는 주장도 하는데, 위에 열거한대로 당시 두 나라는 손 잡기가 도저히 불가능할 정도로 어긋난 게 많았다.

일본은 이 전쟁을 일으키면서 추축동맹국인 독일, 이탈리아의 개입으로 미국에 양면전쟁을 강요하고, 진주만 공습으로 확보한 일시적 해상력 우위를 이용하여 최대한 단기간에 미국에 압도적인 피해를 입혀 굴복시키는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양면전쟁이고 뭐고 죄다 씹어버릴 정도로 미국의 국력과 잠재력이 압도적이었다는 것이 문제.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41년 일본에선 미국과의 총력전을 구상하고 준비 과정과 예상 결과를 파악하기 위해 젊은 엘리트 인재들을 모아 총력전 연구소를 설립해 연구하게 한 바 있다. 연구진들이 내린 결론은 당연하게도 '일본의 필패'였다. 연구진들은 일본의 공업 생산력과 자원, 특히 석유의 생산 및 수송 능력[8]을 볼 때 도저히 미국을 총력전으로 이길 수 없다고 정확히 판단하였다. 이 결과를 보고받은 도조 히데키는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책상에서 이루어진 연습으로서, 실제 전쟁이라는 것은 제군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러일전쟁에서 우리 대일본제국은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이겼습니다. 그 당시에도 열강에 의한 삼국간섭으로 어쩔 수 없이 제국은 일어선 것이지, 이길 수 있는 전쟁이라고 생각해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쟁은 계획대로 되지 않지요. 생각 밖의 일이 승리로 연결되어 갑니다. 따라서 제군이 생각하는 것은 책상 위 공론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어디까지나 그 의외성이란 요소를 고려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이 책상연습의 경과를 제군은 경솔하게 입 밖에 내서는 안 됩니다."

쉽게 표현하면 "그 전에 한 전쟁도 어찌어찌 이겼잖아? 이번에도 될거야." 인 것[9].

1.3. 여러가지 모습들

일본의 대본영은 미국과의 큰 국력 차이를 정신론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즉 전투에서 져도 진 것은 아니며, 근성으로 버티면 언젠가는 나약한 귀축영미가 지쳐 나가떨어지리라는 믿음이었다. 물론 일본군은 통상적인 방식으로는 미군에게 대타격을 줄 수 있는 자원도, 기술력도 없었으므로 병사 개개인에게 자폭과 희생을 강요했고, 전쟁 중 일본이 보인 무개념 닥돌 반자이 어택, 인명경시의 극치인 카미카제 전술, 유인어뢰 가이텐, 종이장갑 치하 전차 등 엽기의 극을 달린 전쟁수행과 집단자살, 인육섭취 등의 막장행태들은 이 말도 안 되는 정신론의 말로로 설명이 가능하다. 더욱 비참한 것은 그렇게 인명을 갈아넣어 강요한 피해도 미국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죽창에 야마토혼의 정신을 가득 담아도 원폭을 달고 오는 B-29를 격추할 수 있을 리 없었고, 이 때 당시의 일본제국은 가히 짐승의 나라로 봐도 될 정도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반성하기는 고사하고 당시의 일본의 위세에 취한 인물들은 이 전쟁을 '대동아 전쟁', '백인 압제-착취로부터 아시아 해방을 위해 일본이 총대를 맨 성전'이라 부르며 온갖 미화를 일삼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있다. 웃긴 것은 가끔 저걸 진짜로 믿고 있는 사람도 있다. 덧붙이자면 한 대 남은 가이텐은 야스쿠니 신사에 전시 중.

미국의 입장에서는 전쟁이 인간성을 어디까지 파괴할 수 있고 얼마나 참혹한지를 잘 보여준 전쟁이기도 하다. 개발도 잘 되어 있고 평탄한 지역이 많았고 문화권도 비슷했던 서유럽과 달리 태평양의 섬들은 상상을 뛰어넘는 빡빡한 정글과 험악한 산악 등 '문명'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일반적인 서구문명에서 산 사람이 거주하기 힘든 낙오지에서 전투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인간이 견디기 힘든 끔찍한 극한의 기후에서 싸워야 한다는 점이 더 큰 문제였다. 당장 시간당 100mm 정도의 폭우(스콜)는 일상에 가까우며, 어딜 가나 축축한 진흙탕, 그리고 모기, 거머리 등의 독충 뿐. <더 퍼시픽>에서는 이런 극한의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권총자살해 버리는 병사가 나오며, 실제로도 유럽에 비해 대단히 높은 비율로 전투피로증 환자가 속출하였다. 게다가 1942, 43년 등 전쟁 초기에는 일본군에 비해 지원 규모상으로 크게 나을 게 없었고 특히 과달카날의 해병대는 외부 화력 지원까지도 일본군따위가 우세였으니, 결국 감투정신으로 싸워야 했다. 그리고 싸움 상대인 일본군, 협력 상대인 원주민은 문화권도 완전히 달랐다. 그나마 전쟁 초에는 동남아 일대와 오스트레일리아 북쪽 섬들이 주요 전장이라 영국군과 오스트레일리아군의 도움을 받았는데도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

게다가 인종주의에 찌들었다고 해도 그래도 비슷한 문화권이니 비슷한 상식이라도 통하는 서부전선 독일군과 달리 일본군은 지도부의 무능으로 상식적인 전쟁은 하지 않고 이상한 짓을 하는 별종이었다. 또 오랜 전쟁으로 사기가 떨어져 있던데다 애시당초 서부 전선에서는 가급적 정상적인 전쟁을 치르려 했던 독일군과 달리 일본군은 죽을 때까지 항복하지 않고 싸우도록 세뇌되어 있어서 대화도 통하지 않았다. 포로 항목에 보다시피 미군이 서부전선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히면 유대인이 아닌 이상 힘들지언정 최소한 포로로서 대우는 받았겠지만, 일본군에게 잡히면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힌 소련군처럼 뭔 일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서유럽과 달리 태평양의 섬들은 보급도 어려워 장병들의 생활마저 매우 열악하였다. 휴지 한 통이라도 일일히 배로 실어 날라야 하다 보니 벌어지는 일이다. 과달카날 전투가 양군이 모두 극도로 열악한 보급상황에서 싸워야 했던 대표적인 전장. 유럽이었다면 점령한 도시에서 징발이라도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태평양 한가운데 외딴 섬에 그런 곳이 있을 리 만무하고(…).

이렇게 미군 장병들도 보급품 부족으로 고생고생했는데, 전쟁 중반 이후 보급선이 씨가 마르다시피한 일본군은 그저(…). 미군이 손실을 줄이기 위해 지나친 섬에 남겨진, 본국으로부터의 보급이 끊긴 일본군들은 실제로 둔전(…)과 사냥, 낚시가 중요한 일과였다. 그나마 라바울(Rabaul)처럼 안정적인 식량을 확보한 곳도 있긴 있었다. 개구리 뜀뛰기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 곳이 이 곳이다. 일본의 최정예 비행대였던 '타이난 항공대'도 이곳에 본거지를 오래 두었으며, 최대 20만 명 이상의 육/해군 정예 병력을 배치했을 정도로 일본군의 남태평양 최대 전략거점. 병력이 워낙 많아 우회를 결정했으며, 종전 후 이는 대단히 현명한 선택이었음이 드러났다. 링크 참조. 하지만 라바울 같은 사례는 극히 드물며, 부겐빌(Bougainville) 섬처럼[10] 전 병력의 1/3이상이 굶어 죽어버린 곳이 대부분(…).

전쟁 후반에는 이런 경향이 더욱 악화되었다. 일본군은 섬을 철저하게 요새화했고,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도 항복을 거부한 채 옥쇄하거나 아예 카미카제 같은 야만스러운 전술까지 구사하면서 끝까지 버티려 했다. 그리고 미군은 이런 일본군을 제압하기 위해 출혈을 각오하고 더 높은 강도의 무력을 행사하는 악순환이 벌어졌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니 병사들의 스트레스는 더욱 심해질 수 밖에 없었다. 워낙에 돈이 없어서 철 갖고 엿이라도 바꿔먹으려고 했는지 경북선 등 한반도에서 장사 안 되는 철도를 죄다 뜯어가버리지를 않나, 통영대전고속도로의 모체가 된 대전-삼천포 철도 노선 공사를 중단시키지를 않나... 이런 막장스런 모습도 보여주었다. 돈 없어서 레일을 엿바꿔 먹는다는 것 자체가 패전확률 90%에 수렴하는, 사람으로 따지면 항암치료 포기하고 모르핀만 계속 공급하는 형상이다.

이런 전장이다 보니 장병들에게 '이성'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전투는 언제나 독소전쟁 못지 않게 참혹하게 진행되었고, 고대의 전쟁터에서나 볼 수 있었던 별의 별 마경이 펼쳐졌다. 미군 병사들 중에는 일본군의 시체에서 안경,시계,금니등을 빼가거나 죽은 일본군의 해골을 수집하거나 탱크에 장식으로 매다는 이들도 있었다.[11]

물론 포로학대나 조직적인 포로학살 같은 행위를 당연한 듯이 자행하고, 심지어 포로를 잡아먹거나 산 채로 해부하는 등의 생체실험 행위까지 저지르고 이걸 미화하거나 은폐하려던 일본군에 비하면 충분히 양반이다. 심지어는 자국 민간인까지 거짓 선전으로 집단자살하게 만들고, 정신대/강제노동에 끌려가 인간성을 유린당한 조선인 등 식민지 주민들, 식량이 떨어진 일본군에게 잡아먹히는 등(…) 살해당하고 착취당한 원주민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당장 일본군과 원주민이 우호적으로 지냈던 섬은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남태평양 군도에서 나이 지긋한 원주민들은 JAP의 J자만 나와도 이를 부득부득 갈며 욕을 하기 바쁘다. 오죽하면 식민지배하던 백인들이 압도적으로 낫다며 백인, 미국, 영국, 호주 같은 군대를 솔선수범으로 도왔다. 예를 들어서 과달카날에서 해안 감시원을 하다 일본군 이치키 부대에 잡혀서 고문 당하고 목을 총검으로 찔린 뒤에도 놀라운 투혼으로 탈출에 성공해서 미군에 일본군의 공격을 알리고 은성 무공훈장을 비롯해 영국 기사 작위까지 받은 자콥 C 보우자라는 원주민도 있을 정도다. 일본에서 만든 다큐멘터리를 보면 기미가요를 잘 부르는 원주민 노인들이 나온 바 있는데 못 부르면 죽여서 살기 위해서 불렀다고 했다. 일본의 피해자 행세에 대해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어처구니없어 하는 가장 큰 이유.


전쟁의 참혹함이 워낙 심했기 때문에, 서유럽 전선의 미군을 다루는 매체는 주로 승리의 영광을 다루는 작품들이 주를 이루는 반면 태평양 전선의 미군을 다루는 매체에서는 전쟁의 참혹함과 무의미함을 다루는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와 <더 퍼시픽>을,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씬 레드 라인>을 비교해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이렇게 전투 환경 자체는 유럽에 비해 훨씬 열악했음에도, 중국 전선을 제외한 태평양 전쟁 미군 전사자 10만여 명을 포함한 연합군 사상자는 유럽 서부전선 미군 전사자 28만여 명을 포함한 연합군 사상자에 비해 3분의 1 수준으로 적은 편이었다. 이는 유럽에 비해 태평양 전쟁이 주로 섬들을 빼앗는 국지전으로 진행된 것도 있고 미군이 징검다리 작전으로 일본군의 방어 거점을 우회하며 공격했기 때문이다. 미군이 승기를 잡은 1943년 이후 내내 태평양 전쟁은 제해권을 장악한 미군이 고립된 섬에서 방어로 일관하는 일본군을 소탕하는 모습으로 전개되었고, 서부전선의 개활지에서처럼 대규모 회전은 볼 수 없었다. 물론 그 때문에 일본군도 해군 함대를 제외한 전투병력 중 사상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본격적으로 일본군이 큰 피해를 입기 시작한 건 필리핀 탈환전과 오키나와 전투 등 전쟁 말기의 일.

징검다리 작전은 꼭 필요한 섬이 아니면 우회해 버리고, 대신 남겨진 섬들을 철저하게 고립시키는 이 전략이다. 그래서 개구리 뜀뛰기라 불렸다. 맥아더를 위시한 미육군은 이건 미해군만의 창의적인 작전이 아니야!라고 까고 미육군전사에는 개구리 뜀뛰기가 아닌 우회작전이라고 써 놨지만 어쨋든 전후에 대단히 현명한 전략이었음이 입증되었다. 그 많은 요새화된 섬들을 일일히 점령하려고 했다면 손실이 엄청나게 늘어났을 것이기에…. 그러나 이 작전에는 단점도 존재한다. 우회한 지점은 충분한 전력을 남겨 지속적인 타격을 해야 하는 것(애초에 방어요새의 전략적인 목적도 여기에 있다. 공격자 측에선 일정 규모 이상의 적을 남기고 우회하는 것 자체가 보급로 유지에 대단히 위험하기 때문이다). 이는 대량의 물자가 소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전략의 기초마저 씹어 먹는 이 짓은 미군이니까그리고 상대가 일본이라서 할 수 있었던 작전이다.

1.4. 기타

1.4.1. 생산력 비교, 1939-1945

출처: John Ellis, World War II: A Statistical Survey (New York: Facts on File, 1993), 277-80.
미합중국 일본 제국
전차자주포 88,410 2,515
257,390 13,350
박격포 105,054 알려지지 않음
기관총 2,679,840 380,000
트럭 2,382,311 165,945
전투기 99,950 76,320
폭격기 97,810 15,117
수송기 23,929 2,110
항공모함[12] 141(...) 16
전함 8 2
순양함 48 9
구축함 349 63
잠수함 203 167

절대적인 생산량뿐만 아니라 병기의 질, 병사들의 숙련도 또한 미국의 우위였으며, 이 격차는 전쟁 말기로 갈수록 더욱 더 벌어졌다. 여기에 더해 영국-인도군, 호주군, 중국군, 그리고 전쟁 막바지에 만주를 휩쓴 소련군 등 기타 연합군을 고려하면 태평양 전쟁이 일본의 자폭 전쟁이었다는 본문의 묘사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또, 여기서는 일제 병기와 미제 병기의 질적 격차가 누락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1.4.2. 인명 피해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이 입은 인명피해(사망자)는 총 42만여 명이다. 이중 유럽전선에서의 피해가 30만 명에 육박하고 태평양 전선에서의 죽은 미군은 12만 여명에 불과하다.

전투행위에 의한 직접 전사자의 경우 미국은 태평양 전쟁에서 106,207명의 병력손실을 입었고 포로로 잡힌 병력 중 일본군의 전쟁범죄 및 기아, 질병, 아군 폭격 등을 총합해 12,935명이 추가로 죽었다.[13] 일본으로선 참담하게도, 미국이 이 전쟁에서 잃은 총 병력피해는 일본이 오키나와 전투에서 잃은 병력과 비슷하다.(…) 츠지 曰 : 이게 다 근성이 부족해서

일본의 경우 1937년 중일전쟁 개전 이후 1942년까지 누적 사상자가 60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이때까지의 피해 대부분은 중일전쟁의 수렁 속에서 입은 것이다. 그리고 미국이 본격적으로 쇼미더머니를 치고 반격에 나선 1942년 중반 이후부터 종전까지 3년 동안 태평양과 중국 전선을 합하여 240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그 전까지는 총력전 체제하에서 어떻게든 감내할만한 피해였다면, 본격적으로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그냥 병력이 투입하는 족족 녹아났다는 소리. 거기다 본토가 안전했던 미국과 달리 일본의 본토는 1945년 3월 이후 석기시대로 돌아가버리며 후방의 민간인들까지 엄청나게 죽어갔다.

이는 안그래도 동원능력에서 차이나는 양국 상황을 감안하면 더더욱 크게 작용했다. 일본은 식민지 조선과 대만을 합쳐 1억 운운했지만 실질적으로 동원 가능한 본국의 인구는 7,000만 명. 반대로 미국의 경우 본국의 인구가 1억 3,000만 명으로 거의 배에 가까운 차이가 났고 질적으로도 그 차이가 엄청났다.

전쟁에서 가장 큰 인명피해를 입은 나라는 역시 중국. 중국은 1937년 개전 이래 무려 9년동안 일본과 혈전을 펼쳤고, 그 와중에 일본의 전쟁범죄와 무차별폭격 등으로 최소 1,000만 명에서 최대 2,000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그중 80%가 민간인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1,000만 명 더 많은 피해를 입은 소련과 달리 중국의 말도 안되는 인구력은 2,000만에 달하는 피해를 감수했다.

그 외에 동남아시아에서도 일본의 가혹한 징발정책에 의한 기아와 질병으로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3~4백만,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1~2백만, 필리핀에서 50~100만, 영국령 버마에서 25만, 포르투갈령 티모르에서 5~7만, 영국령 인도에서 150~250만이 죽은 것으로 추정되고, 영국령 싱가포르에서도 학살 및 기아로 5만 명이 죽었다.

유럽 전쟁의 참혹함에 묻히는 경향이 있지만 태평양 전쟁의 참혹함과 인명피해는 유럽의 전쟁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피해 대부분이 유럽 강대국이 아닌 중국이나 동남아 식민지에서 발생한 것, 그리고 이들 지역에 대한 정확한 피해집계나 통계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 태평양 전쟁의 참혹함을 무디게 만드는 요인이다.

1.5. 관련 항목

1.5.3. 리그베다 위키에 개설된 관련 작품

1.6. 참조

  • 대사의 태평양전쟁 이야기(네이버 블로그)
    : 태평양전쟁의 지상/해상/공중전의 공간전사를 연재하는 개인 블로그. 미국 등 외국의 전문웹문서/서적을 번역하여 전투/전역 별로 연재한다.
    각 전투에서 의미있는 움직임이라면 소대 단위까지(!) 서술하는 디테일이 돋보인다. 더욱이 함대구성/군수보급/야전건설/민사전 등 군사행정과 전투를 전후한 배경 설명(장군들의 정치적 갈등 등)까지 대단히 꼼꼼하다. 몇 년 전부터 꾸준히(주 2~3회) 이런 연재를 해 온 터라 나이도 적지 않고 내공이 풍부한 밀덕 단골이웃들이 달아대는 부연설명 등 많은 댓글들도 볼 거리이자 주인장의 자랑거리. 한국어 웹문서 중 이 정도 퀄리티의 태평양전쟁사 포스팅은 매우 찾기 힘들 것이다.
    블로그 주인장인 대사(PW)는 밀덕후 항목에도 설명되어 있듯, 오래전부터 대구에서 개인의원을 운영해 온 내과 의사(!)이다. 아버지가 해군 참모차장이었다고 한다. 성골밀덕후

2. 19세기 남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전쟁

1879년에서 1883년까지 칠레페루, 볼리비아 양국을 상대로 벌인 전쟁. 이 전쟁에서 칠레는 양국을 모두 박살내고 대승을 거두었다. 아마 이 2번 항목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격렬한 전쟁이었음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1번 항목의 포스가 워낙 무지막지하기 때문인 듯.

자세한 것은 태평양 전쟁(남아메리카) 항목을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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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중국 1천 7백만 이상, 인도네시아는 4백만 이상,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2백만명 이상 등등.
  • [2] 일부 몰상식한 군 인사들에게만 해당되었다면 괜찮았겠지만 문제는 군 수뇌부가 전부 이 모양이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의식있는 몇몇 장성들이나 장교들이 한심하다며 혀를 차는 모양새였고 군 수뇌부의 모든 인물들이 하나같이 두뇌들이 집단가출한 듯한 병신짓을 연거푸 해댔고 그런만큼 일본군의 피해는 엄청나게 커지고 있었다.
  • [3] 여기에 대한 자세한 상황은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의 배경에서도 드러난다. 영화 작전명 발키리에서도 언급된다.
  • [4] 그러나 진주만 공습 항목에서 나온 것이지만, 당시 모든 전력을 유럽전선에 집중시킨 까닭에 미국이 일본과 상대한 것은 보유하고 있는 군사력은 미미한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도 일본군이뭐병뻘짓이 아니었다면 승리도 장담할 수 없었다.
  • [5] 미드웨이 해전 항목을 찾아보면 알겠지만 일본이 "전쟁했노라."고 그나마 외칠 수준의 상대국이 바로 미국이었다.
  • [6] 여기서 '감동먹어서'라는 표현은 겁먹어서 벌벌 떨어 요구를 들어주자는 뜻이다. 하지만 중국과 미국은 '감동'을 먹지 않았고 겁먹기는 커녕 싸우려 들었으니...... 이런 생각은 전국시대에서 유래한 것일지도? 추가바람
  • [7] 참고로 이것은 히틀러2차대전 주요 참전국을 상대로 거의 유일하게 제대로 법적 절차를 지켜가며 한 선전포고다. 나머지는 공격을 먼저 하고 선전포고를 하거나 아예 하지 않았다.
  • [8] 개전 후 동남아시아의 유전 지대를 통해 석유를 확보한다는 전략을 두고, 한 연구원은 "구멍 뚫린 양동이로 물을 퍼오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
  • [9] 한 국가 군대의 수장이 이런 발언을 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일본군이 얼마나 전쟁에 대해 안일한 생각을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러일전쟁은 항목을 봐서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러시아의 태평양으로의 세력확대를 견제하기 위해 미,영 2나라가 일본을 내세워 치르게 한 전쟁이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고, 또 하나, 당시 러시아 내부의 사정은 러시아 사병들로 하여금 전쟁에 진지하게 임하게 하지 못하게 만든 요소로 작용했었다. 더구나 일본은 미국이 제대로 빡쳐서 나올 경우, 얼마나 무서워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당장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장관이 진주만 공습의 성공을 보고받은 후 "어쩌면 우린 잠자고 있던 거인을 깨운 것인지도 모르겠군."이라고 독백을 한 것과 상당한 대조가 된다.
  • [10] 이 섬은 호주군이 섬의 중앙 부분만 차지한 채 대치 상태에서 종전을 맞았다.
  • [11] 심지어 이걸 몰래 집까지 갖고 와 창고 따위에 처박아놓기도 했다고. 종전 후 참전용사들이 세상을 떠나자 유산을 정리하던 후손들이 이 해골을 발견하는 바람에 식겁하고 경찰이 출동하는 등 웃지 못할 해프닝도 이어졌다.
  • [12] 호위항모 포함. 그러나 호위항모를 빼도 20대가 기본적으로 넘어간다.
  • [13] 참고로 더 많은 포로가 잡혔던 유럽전선에서 미군 포로 사망자는 1,124명에 불과하다. 이는 독일이 서방측 포로에 한정해서 국제법을 준수하는 합당한 포로대우를 해준 덕분으로 사망자 대부분은 부상 악화, 질병, 아군 폭격에 의한 것으로 전쟁범죄에 의한 사망은 극히 드물다. 대신 독일군은 소련군 포로를 인간 취급도 안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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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8-24 14: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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