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D R , A S I H C RSS

토머스 에디슨

last modified: 2015-09-09 18:08:29 by Contributors

(ɔ) Louis Bachrach, Bachrach Studios, restored by Michel Vuijlsteke from


토머스 알바 앨바 에디슨 (Thomas Alva Edison, 1847년 2월 11일~1931년 10월 18일)

"잠은 인생의 사치입니다! 저는 하루에 네시간만 자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숙면을 취할때 말입니다." - 시몬스 침대 광고

그러면서 이 분은 꿀잠

Contents

1. 개요
2. 사업가로서의 에디슨
2.1. 니콜라 테슬라와의 갈등과 악의적 선전
3. 가족관계
4. 여담
4.1. 서브컬처에서의 등장

1. 개요

미국 오하이오 주 출신의 사업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발명을 했으며 그 숫자만 해도 자그마치 1096개에 이른다(특허만일 거다. 아마.). 그 업적을 기려서 보통 발명왕 에디슨이라 불린다. 대표적인 발명품은 전기와 관계된 것들, 예컨대 전구 등. 그래서인지 전기, 특히 직류전기에 대한 믿음이 대단했다. 니콜라 테슬라를 견제하기 위해 제작한 전기 의자는 그의 일생일대의 오점[1]으로 남으며 현재에 와서도 에디슨의 오점에 대해 논할 때 가장 먼저 꺼내는 화두가 되었다. 하지만 비록 그와 같은 일을 저질렀지만 그가 역사에서 이룩한 업적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알을 품어 병아리를 부화시키려 하는 등 이런저런 기행을 많이 하여, 당시 매우 보수적인 초등학교 선생은 이러한 에디슨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고 초등학교 3학년 때 퇴학시켰다. 그러자 에디슨의 어머니가 스스로 선생님이 되어 에디슨에게 온갖 지식들을 가르쳤다. 에디슨의 성격은 어렸을 때부터 뭔가 알아내기 위한 시도를 엄청나게 하고 다니는 성격을 가진 인물이였으며 이러한 에디슨의 실험정신이 훗날 에디슨을 세계 최고의 발명왕의 위치에 도달하게 해 주었다. 특히 결론을 얻을 때까지 실험을 멈추지 않는 에디슨 특유의 집념은 높이 살 만하다.

소년시절에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관련해서 유명한 이야기는 기차에서 실험하다 폭발하는 바람에 차장에게 귀 등을 얻어맞아 청력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과거에는 이 이야기가 정설처럼 퍼졌으며 지금도 위인전에 때때로 등장한다. 또다른 이야기로는 그 폭발 자체로 인해서 청각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는 것이 있다. 다르게는 어릴 때 앓은 성홍열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서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에디슨 자신이 설명하기로는 신문을 팔다가 타야 할 기차가 출발하는 바람에 다급하게 뛰어올랐다가 떨어져서 크게 다칠 뻔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차장이 다급하게 에디슨을 잡아당겨서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때 하필 귀를 잡았기 때문에 이후로 그 귀는 잘 들리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 차장은 그 이전이나 이후에도 에디슨에게 친절했으며 에디슨이 성인이 된 후에도 그 차장과는 종종 서로 방문하며 사이좋게 지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소년시절 자신의 인쇄기로 신문을 만들어 판 이야기도 유명하다.

위인전에서는 유독 어릴 때 얻어맞는 인물로 묘사된다. 자퇴하기 전엔 교사에게 얻어맞고, 친구 가지고 인체실험 했다가 종아리를 얻어맞고, 기차에서 실험하다 귀싸대기 맞고...탐구심이 왕성하고 적극적이었다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상당한 악동이었던 듯하다.

청년시절 그가 특허를 내려 했던 전기식 투표장치는 소모적인 의회의 투표방식을 개선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었지만 의회에선 소수당에 의한 의사방해도 인정되는 등 빠른 의사결정보다 지루한 투쟁과 타협의 과정을 더 우선시하는 터라 그 기계는 환영받지 못했다. 자신의 기계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을 안 에디슨은 그 이후 세상에 필요한 발명을 한다는 것을 모토로 삼게 된다.

그의 발명은 철저히 반복실험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전구를 발명할 때는 적합한 필라멘트를 찾기 위해서 자신의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실험해보았고 심지어는 발명팀 크루에슬리의 구레나룻과 매켄지의 붉은 수염까지 뽑아서 실험해보았다 한다.[2]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실험해보고도 실패하자 이후 주변에 없는 것, 외국에서 수입한 대나무를 이용하여 실험에 도전했다(태워서 탄화된 무명실이란 말도 있다. 사실 양산형 최초는 무명실이고 그 후 널리 보급된 건 개량된 대나무).[3]

대표적인 발명품으로는 축음기(전축), 영사기(영화), 실용적 장거리 전화, 전구, 전기 냉장고 등이 있다.

2. 사업가로서의 에디슨

에디슨은 발명가인 동시에 사업가이기도 하며 그가 세운 에디슨 전광회사는 몇 차례의 분열과 재합병을 거쳐 유명한 그룹기업인 제너럴 일렉트릭(GE;General Electric)사가 되었다.

전구 개발 당시 위에 쓰였듯이 온갖 고생을 하며 자체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고 이 문서에는 쓰여 있었지만, 에디슨은 전구를 자체 발명하지도 못했다. 에디슨보다 먼저 전구 발명에 성공한 조지프 스완[4]의 아이디어를 도용해 전구를 만드는 데 성공했던 것. 자기가 스완의 아이디어를 도용했으면서 오히려 스완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도용했다고 고소했다 패배하기까지 했다. 출처

빅뱅 이론 시즌 8 15화 시작 부분에서 이와 관련해 셸든이 에디슨을 까기도 했다.

에디슨은 스완이 관련 특허까지 신청한 사실을 알게 되자 스완을 돈으로 매수해 합작회사를 차려 특허권 문제를 제거했다(특허권 문제가 생기면 돈으로 그 회사를 아예 사버리는 누군가를 연상하게 한다.).

에디슨의 정말로 대단한 업적은 에디슨 전광회사를 세워 미국 가정에 전기를 연결한 것이기도 하다. 전구를 개발해봤자 집에 전기가 없으면 말짱 헛 거니까.

하지만 이 회사도 결국은 말아먹고 슈타인메츠라는 기업가에게 넘겨야 했다. 그 밖에도 탄광업 및 시멘트 업체를 운영하기도 했는데 죄다 말아먹었다.

대표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헨리 포드. 하지만 포드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에디슨에게 자신은 가솔린을 이용한 차를 만들고 싶다고 하자 그를 격려했지만 곧 까맣게 잊어버렸다 한다(...). 앞서 말했듯이 그는 전기가 최고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초창기엔 전기자동차가 대세였다(사실 100km를 먼저 찍은 것도 전기자동차다.). 그게 이어졌으면 지금 기오염이니 뭐니 소리 안해도 되잖아

에디슨은 전기자동차의 동력원으로 쓰기 위해 니켈-철 전지(에디슨 전지)를 개발했는데 에디슨 전지는 당시의 납축전지보다 에너지 밀도가 훨씬 더 높고 충전 시간도 절반밖에 되지 않았으나 비싸고 낮은 온도에서는 작동이 잘 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었다.

헨리 포드의 포드 T형에 장착되었지만 전기자동차가 생산된 지 몇 년 만에 생산중단되고 자취를 감추자 이를 아쉬워했다고 한다. 에디슨 전지는 1903년부터 1975년까지 에디슨 자신의 이름을 딴 에디슨 축전지 회사에서 생산되었다.

여하간 이러한 사업가적 성향이 가장 정점을 이룬 것이 테슬라와의 갈등이다.

2.1. 니콜라 테슬라와의 갈등과 악의적 선전

에디슨과 테슬라 이 둘은 동시대의 발명가라는 점은 동일하지만 그 방식에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에디슨은 자신이 발전시킨 DC(전기)를 최고라 생각했지만 테슬라는 그 점에 동의하지 않았다. 테슬라는 AC(교류전기)를 발전시켰고 이 때문에 에디슨은 AC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서 교류 전기를 이용하여 사람을 사형시키는 기계인 전기의자를 제작해냈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코끼리 한마리를 교류 방식을 이용해 공개 처형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상당한 비난을 사기도 했다.

이후 테슬라와 그가 세운 회사가 자신의 직류전원에 대항하는 교류전원을 발명하자 그와 그 회사를 비즈니스로 묻어버리려 했으나 에디슨의 라이벌이었던 조지 웨스팅하우스가 그를 받아들인 덕에 실패했다. 뒷공작으로 테슬라를 몰락시키기 위해 불량배를 풀었다. 그리고 테슬라의 회사를 망하게 할 악의적인 물건을 발명했다는 소문도 있다. 전기의자를 만들기 위해 길거리에 돌아다니던 동물들을 싹쓸이했다는 말도. 하지만 결국 테슬라가 이겼다. 그래서 지금 직류는 가정용 산업용 전원에는 쓰지 않고 자동차,건전지철도 등 일부에만 사용하고 있다.

그 외에도 에디슨의 발명은 태반이 산업스파이에 의한 것이고 창작은 거의 전무하다는 소문도 존재하며 그 외에도 악명은 매우 많다. 스스로도 남의 아이디어를 참고하는 것이 발명의 첩경이란 투의 말을 남겼다.



3. 가족관계

에디슨은 한평생 발명/사업에 힘써왔지만 가족에게는 정말로 소홀했다. 첫째 마누라를 쓸 만한 발명품을 만들어내지 않는다고 구박했고 대학교육에 대한 콤플렉스 탓에 자식들을 모조리 공과대학으로만 보냈다. 공돌이 양산의 선구자이신 에디슨 성님

첫 번째 부인 메리 스틸웰이 죽었을 때 일이 바쁘다며 장례식도 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한동안 적적하게 지내다 두 번째 부인이 된 미나 밀러에게 모스 부호로 프러포즈했다는 다소 아슷흐랄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너드의 조상

가족에 소홀했던 탓인지 자식들의 삶도 좋지 못했는데 첫째 아들 토머스 주니어는 '전기 활력 회복기'라고 이름 붙인 가짜 건강기계를 만들어 팔다 고발당하는 등 아버지 이름을 빌려 사기나 치는 사기꾼이었다. 둘째 윌리엄은 하는 사업마다 망해서 매주 40달러씩 생활비를 대주는 처지가 되었다. 문제는 윌리엄의 부인이 허영심이 많았은지 주 40달러 가지고 어찌 사냐고 시도때도 없이 편지를 보내 에디슨을 닦달했다는 거.[5]

다만 셋째 아들 찰스 에디슨은 정계로 진출해 훗날 뉴저지 주의 주지사가 되었다. 자신의 아버지와 가장 친밀하다고 자부하던 그였지만 그마저도 아버지 얼굴을 평생 봤던 시간이 채 1주일도 되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4. 여담

명언으로는 천재는 1% 영감과 99% 노력으로 이루어진다(Genius is one percent inspiration and ninety-nine percent perspiration)가 있다.[6][7]

어린이 대상으로 한 위인전에서도 위에 말이 나왔는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1%의 영감'이 아니라 '1%의 재능'으로 번역이 되어왔었다. 영어교육이 초등학교는 커녕 유치원 시절부터 시작되는 최근에 와서는 영감이라는 단어로 제대로 번역되어 나온다고 한다.

말년에 자기가 태어나서 유년기를 보낸 오하이오 주 밀란의 옛 집을 찾았는데 그 집이 아직도 전등 없이 가스등을 켜고 있다는 걸 보고 뒷목 잡고 쓰러졌다는 얘기가 있다.

한국 국내 최초의 전기는 세종대왕이 발명한 전구이다 고종경복궁에 설치한 전구인데 이것은 에디슨 전기회사에서 구입하였다. 우리 측 기록인 승정원일기에는 에디슨을 의대손(宜代孫)이라 적었다고 한다. 에디슨 본인은 동양의 궁궐에 자신의 전구가 달린다는 사실에 상당히 기뻐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구에 들어가는 전기를 생산한 발전기의 냉각수를 궁궐 연못에서 끌어써서 죄 없는 물고기들만 때죽음 당했다고에디슨은 나의 원수 에디슨을 죽입시다.

1892년 에디슨은 촬영장치인 키네토그래프(kinetograph)와 그것을 볼 수 있는 장치인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를 발명하여 활동사진을 볼 수 있게 하지만 최초의 영화의 타이틀은 촬영기와 영사기를 이용한 미에르 형제에게 돌아간다. 에디슨도 여러 사람이 모여 화면을 볼 수 있는 뤼미에르 형제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영화 사업을 하면서 1908년 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동부지역에서 활동하던 10여개 영화사를 묶어 영화특허회사(MPPC)를 만들어 시장을 독점하려 한다. 독점력을 무기로 영화 길이도 자기 마음대로 길어지지 않게 하는 등 횡포를 부리자 여기에 반발한 영화인들은 에디슨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서부의 한 깡촌에 자리잡아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는데 그 깡촌의 지명이 바로 할리우드. 오늘날 미국 영화 산업에 에디슨이 크나큰 영향을 준 셈이다. 자신이 의도한 바와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지만. 다만 다른 의견도 있다. 당시 에디슨이 투자하던 것은 짧은 단막극 형식, 니켈로디온에 올리는 간단하고 짧은 영화였지만 당시 영화의 주류는 유럽이었고 유럽에서 서사가 있는 장편의 영화들이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영향으로 서사가 있는 영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특히 서부영화가 인기가 있었다. 할리우드도 서부영화 로케이션을 위해 찾았다고 아예 자리를 잡은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할리우드를 건립할 쯤에는 MPPC의 영향력은 약해진 상태였다고 한다.

더불어 영화 불법 공유를 처음으로 한 인물이기도 하다. 조르주 멜리에스의 영화 《달 세계 여행》의 필름을 유럽에서 빼돌려 미국에서 복사 후 전국에서 상영해 큰 돈을 벌었던 것. 당연히 라이선스 따위는 무시했고 멜리에스는 미국에 영화를 팔지 못해 큰 피해를 보아야 했다. 《달 세계 여행》은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의 요소들이[8] 처음으로 시도된 대작으로 상업적으로는 오늘날의 블록버스터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니 블록버스터 영화의 시조가 최초의 영화 복돌이를 탄생 시킨 것. 태초에 영화 복돌이는 영화 제작자보다 돈이 많았다

말년에는 자기 나름대로 영혼과 영계에 심취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발명품들을 몇 가지 만들었다고 하는 얘기가 있지만 실제로 남아있지는 않다. 이때 발명했다고 하는 것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영계통신기. 하지만 사실은 이마저도 에디슨이 만우절을 맞이해서 어수룩한 대중잡지 기자한테 구라를 깐 거였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다만 아서 코난 도일을 비롯해서 당시의 유명인사 중에서 오컬트에 심취하는 사람들의 수는 적지 않았고 그 중에 상당수가 사회고위층 내지는 과학자이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충분히 있을 법한 것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에디슨이 오컬트에 빠졌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죽기 직전의 마지막 호흡(정확히 말하자면 날숨)을 친구였던 헨리 포드가 병에 담아놓았고,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세계 최대의 에디슨 박물관은 의외로 국내에 있다. 강릉에 있는 참소리 박물관이 그것인데, 말은 소리, 악기, 음향기 박물관이지만 소장이 에디슨 빠라 실상은 에디슨 박물관인 것. 주요 발명품인 축음기는 미국에서도 보기 힘든 물건이 즐비하며, 에디슨 전기자동차부터 장남감 인형, 초창기 GE의 가전 제품 등 별의 별 물건이 다 있다. 위에 얘기한 마지막 날숨을 담은 통, 편지 등도 소개되어 있다. 소장품이 너무 많아 전시품은 소장품의 일부라고 한다. 어린이를 위한 프로그램도 있어 가족끼리 갈만하다.

정치적 성향을 이야기하면 평생 공화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강했지만 1912년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진보당을 지지했고(루스벨트의 연설을 레코드로 만들어 직접 판매하기도 했다.) 1차대전 무렵에는 우드로 윌슨민주당을 지지했다.

4.1. 서브컬처에서의 등장

시간탐험대에서는 배터리 방전으로 뻗어버린 돈데크만을 분해하고는 그 원인을 알아내어 램프의 바바를 시켜 번갯불에 쳐넣어 회생시킨 적이 있으며 지옥선생 누베에서는 영계통신기를 이용한 떡밥으로 등장했었다. 거기에 따르면 저승에서도 다양한 물건을 발명중이라고 한다(...).

새신 크리드 시리즈에서는 성당기사단의 일원으로 나왔다. 여기서도 현실과 맞춰서 니콜라 테슬라를 방해했다. 그리고 테슬라는 암살단과 접촉하게 되었다고.

라이어 소프트에로게 시리즈인 스팀펑크 시리즈에서는 그야말로 만악의 근원으로 등장한다. 에디슨경 항목 참조.

2013년에 몬스 침대의 광고 자료화면으로 등장했다. '잠은 3시간만 자도된다'라면서 숙면을 취한다는 전제에서 그렇다고 언급. 그런데 목소리가 여성스러워서 놀랐다는 반응이 꽤 있다. 이말년시리즈의 잠은행 편에서는 이 광고에 빗대어 "에디슨이 잠을 오래 잤다면 그 많은 특허를 도둑질 하지 못했을 것이다!"라며 깠다.

일본에서도 산토리발포주 라쿠젠(楽膳) 광고에 나왔는데, 여기서는 코믹 컨셉으로 성우가 더빙을 해서 들어봐야만 웃긴 아↘ 쇼-크마시고 싶구나 라쿠젠이라는 명대사를 남겨 과 함께 MAD 소재가 되었다.

서방 에선 1%yolo와 99%swag로 이루어진다카더라
----
  • [1] 또 하나 코끼리를 전기로 감전시켜 죽이는 대형 전기 처형기도 발명했으나 딱 1마리를 감전으로 죽이니 아주 지옥같은 모습이 펼쳐져 이 또한 엄청나게 욕먹고 당장 없애버려 흔적도 남지 않았다. 코끼리 참조.
  • [2] 매켄지의 수염은 상당히 오래 갔다고 한다. 다만 불빛이 너무 흐려서 상용화하진 못했지만...상용화 하기로 결정했다면 오늘날에도 전구에 메켄지의 수염이 쓰이고 있을 것이다.
  • [3] 거꾸로 말하자면 이론과 공식으로 간단히 알 수 있는 것을 필요도 없는 실험을 반복했다는 말도 된다. 이는 과학적 이론과 공식에 능통했던 테슬라와의 커다란 차이점 중 하나.
  • [4] 사실 이 사람도 최초는 아니었다. 최초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보먼 린지(James Bowman Lindsay).
  • [5] 이게 뭐가 문제냐면 당시 매주 40달러가 거저 들어온다면 어지간한 회사원과 동급의 수입이 그냥 들어왔던 셈이다...
  • [6] 1929년 기자회견에서 한 말로 알려져 있으며 1932년 하퍼스 매거진에 원래 올라온 이 문장의 전문은 "None of my inventions came by accident. I see a worthwhile need to be met and I make trial after trial until it comes. What it boils down to is one per cent inspiration and ninety-nine per cent perspiration(내 발명 중 우연으로 만들어진 것은 없다. 충족되어야 할 가치가 있는 요구를 발견하고 그것을 위해 실험하고 또 실험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1퍼센트의 영감과 99퍼센트 땀이다)"이다.
  • [7] 문맥상 노력을 강조하는 명언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나 일부 책에서는 '1%의 영감이 없으면 99%의 노력도 의미가 없다'는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두 저자의 자의적 해석이며 이 내용과 관련해 인터넷에 떠도는 에디슨과의 인터뷰 내용도 출처가 불분명하여 신뢰도가 떨어진다.
  • [8] 컷을 나눈다거나, 셋트를 이용한다거나, 현실에는 없는 이야기가 있다거나 등. 소리와 컬러필름을 제외한 어지간한 영화적 요소들은 이 영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흠좀무...
Valid XHTML 1.0! Valid CSS! powered by MoniWiki
last modified 2015-09-09 18:08:29
Processing time 0.0981 s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