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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핌 리센코

last modified: 2015-02-13 16:37:44 by Contributors

Трофи́м Дени́сович Лысе́нко
트로핌 데니소비치 리센코, 1898년-1976년

소련의 과학자이자 천하의 개쌍놈.

19세기의 끝에 평범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러시아 혁명 당시에는 달리 눈에 띄는 행적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지만, 이후 1928년에 춘화 처리에 대한 연구로 명성을 얻었다.

이 춘화 처리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식물 중에는 겨울철 낮은 기온에 일단 동면을 한번 해야만 제대로 다음해 성장을 하는 종들이 다수 존재한다. 이런 종의 식물들은 그냥 씨앗을 따서 바로 땅에 심으면 싹이 나지 않거나, 싹이 트더라도 꽃이 제대로 피지 않는 등의 기형으로 성장하는 경우가 많으며, 제대로 겨울의 추위를 겪게 한 다음에 심거나 아니면 인위적으로 섭씨 4도 부근의 저온에서 몇주간 보관했다가 심어야 하는데, 이러한 저온 처리 과정을 춘화처리(春花處理)라고 한다. 밀이나 보리와 같은 작물들도 이러한 춘화처리가 되면 정상적으로 성장이 가능하다. 농업 외에도 원예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과정인데, 튤립과 같은 화훼의 경우, 전 해에 꽃이 피고 진 구근이 인공적이든 자연적이든 겨울을 겪지 않으면, 피라는 꽃은 안피고 잎만 무성하게 나거나, 아니면 괴이한 형태의 상품 가치가 없는 기형 꽃이 피는 참사가 일어난다(···) (참고로 최근 식물학에서는 춘화처리는 영어로 Vernalization이라고 하며 성장한 식물이나 구근을 저온에 두어서 꽃눈의 형성을 촉진시키는 과정에 한정한 용어이고, 씨앗의 발아를 돕기위한 저온 처리는 층화처리(Stratification)라고 따로 해서 구분한다.)

본래 춘화 처리는 그의 고향인 우크라이나 민간에서 과학적인 원리는 알지 못했지만 농부들이 경험상으로 알게 되어 관습적으로 행해지는 것이었으며, 우크라이나 기후에서는 아주 조금의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그의 연구 이전까지 많은 벼들이 춘화처리가 제대로 안되어 겨울에 얼어죽어 버렸으나, 그의 연구 덕에 튼튼한 가을벼의 재배가 가능해졌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작자가 용불용설을 지지했다는 점이다.이건 미친 짓이야 난 여기서 나가겠어 그는 한 세대의 벼에 춘화 처리를 해놓으면 그 다음 세대부터는 처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그냥 심어도 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당연히 이따위 연구 결과가 소련 농업 발전에 도움이 될 리가 없었다. 더 심각한 것은, 그의 이론은 딱 소련이 집단농장 체제로 전환되면서 소련 농업이 개판 5분 전 상황일 때 적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대기근(1933)이 진행되면서 소련 농업부는 바빌로프의 유전학보다는 단기적으로 생산량을 높일 방법을 찾았고, 리셴코의 이론은 거기에 딱 적임자였다. 농업체제 전환의 부작용과 이런 엉터리 이론이 시너지를 일으키면서 그 이후의 소련 농업은 1980년대까지 폭삭 망한다![1][2]

그의 연구 결과가 이렇게 해악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련 정부의 입맛에 딱 맞는 과학자였다. 소련 과학계에서 이만큼 당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인물도 드물었는데다가, 출신 성분도 일반 농민의 아들로 우수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리센코이즘의 사상적 베이스가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인데, 용불용설에 따르면 부모의 후천적 유전형질이 자식에게 유전된다고 한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면 변증법에 의거하여 이에 따라 새로이 공산주의적 인간이 탄생할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리센코이즘은 어찌보면 공산주의를 자연과학적으로도 일견 정당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3] 결과적으로 그는 과학자로서 실수를 잔뜩 저질렀는데도 불구하고 소련 생물학계의 정점으로 올라섰다.

그리고 그의 큰 권력은 또 다른 비극을 불러오게 된다.고만해 미친놈아

그 때 소련에는 전학이 큰 화제를 불러왔는데, 그 연구의 선도자 니콜라이 바빌로프는 진화생물학의 종주국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유전학을 유학하고 유전학을 재배식물에게 적용시켜 많은 연구결과를 나타내고 있었다. 바빌로프는 한때 소련 농업과학아카데미의 총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리센코는 바빌로프의 유전학을 지지하지 않았다. 리센코는 유전학 이론을 연구 결과로 반박하기보다는 선천적인 유전자를 중시하는 유전학이 반 마르크스주의적 학문이라는 식으로 치부하며 바빌로프를 비롯한 유전학자들을 부르주아나 파시스트로 매도하는 데 치중했고, 스탈린 역시 극도의 러시아 국가주의자였던 터라 본인은 러시아인도 아니었으면서 외국 학문이었던 유전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결국 바빌로프는 대숙청의 피바람에 휘말려 감옥에서 43년에 쓸쓸하게 인생을 마쳤다. 그와 동시에 멘델 등의 생물학자들의 이론이나 소련의 유전학도 '부르주아 유사과학'이라는 낙인과 함께 침몰하고 말았다.

바빌로프의 숙청을 본보기로 리센코는 스탈린과 정부의 총애를 등에 업고 과학계의 독재자가 되었다. 이미 과학보다는 유사과학에 가까웠던 그의 이론에[4] 반대하면 반동분자나 파시스트로 몰려 큰일을 당했으므로 소련의 과학자들은 그의 이론에 감히 반대하는 연구를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소련의 생물학 연구 자체가 크게 위축되었으며, 소련의 농업은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받았다.

바빌로프의 숙청을 초래한 그의 권력 자체는 스탈린이 죽으면서 그 위세가 크게 줄어들었지만, 스탈린을 격렬하게 비판했던 흐루쇼프도 생물학에는 무지했던지라(...) 그의 이론은 50년대 말까지도 쓰였다.으아아아 대체적으로 생물학에 제대로 된 지식을 갖추지 않았던 소련과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의 지도자들은 그의 엉터리 이론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몰랐으므로 이걸 농업에 접목시키는 일을 계속했으며, 결국 시베리아-카자흐스탄 지역의 차녀지 개간이 처참하게 실패하고나서야 그와 그의 이론은 맹렬한 비판을 받으며 소련 과학계에서 퇴출되었고 유전학이 대세가 되었다. 하지만 그가 소련 농업에 남긴 상처는 소련이 무너질 때까지도 회복되지 못했다. 아니, 어찌보면 현재진행형.

종합하자면, 소련 농업을 말아먹은 장본인. 이 인간만 없었으면 소련의 농업인구가 미국보다 훨씬 많음에도 생산량은 발끝도 못 따라가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아가서 소련의 붕괴에도 영향을 끼친 셈이다! 게다가 이 작자의 이론이 소련에만 영향을 끼친 것도 아니니...이만한 민폐 과학자도 찾아보기 힘들다. 애초에 소련 체계가 극도로 경직되지 않았다면 이런 과학자의 탈을 쓴 사기꾼이 이 정도로 거대한 영향을 발휘할 수도 없었을 것이니, 자본주의라면 혼자 망하고 끝난다체제 모순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소련에도 유능하고 훌륭한 과학자는 많았지만. 이 사람의 주장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일단의 경향을 리셴코이즘(Lysenkoism)이라 한다. 굳이 유전학 등이 아니라도 사이버네틱스 공학이나 비교언어학 등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로 스탈린 시대에 들어 '부르주아 유사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탄압을 받았다.

참고로 진화론의 발전을 게임북 형식으로 만들어 놓은 책에서 리센코를 쫒아가면 바로 게임 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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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일부 예외도 있긴했지만... 김병화항목 참조.
  • [2] 여담으로 이 때의 농업정책 실패 때문에 소련에서 일반인들에게도 별장(다차)이 널리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물론 소련의 별장은 고위층들이나 유명인들에게 배급되는 별장을 빼면 주말농장에 가깝다.) 물론 1가구 1별장 정책은 흐루쇼프가 소련의 이미지를 대외에 선전하면서도 일반인들에게 부자나 특권층의 상징인 별장을 배급해야되겠다는 의미로 시행한거긴 하지만 그 이면에는 신선채소류의 수급이 지속적으로 원활하지 못하면서 일반인들에게 주말시간이나 휴가를 이용해서 경작을 해서 식량수급문제를 일정부분 해결하는 방안이기도 했다.
  • [3] 사실 이러한 떡밥은 엥겔스 생전에도 자연과학에 변증법을 적용하려는 등의 형식으로 존재했다.
  • [4] 위에 언급한 용불용설이나 반유전학 이론 뿐 아니라 작물을 빽빽하게 심으면 농사가 잘 된다는 밀식 농법도 그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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