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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last modified: 2015-04-13 10:24:00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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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차

1. 개요
1.1. 토번(吐蕃)
1.2. 청과의 공존과 현대사
2. 티베트 독립운동
2.1. 티베트 독립 문제는 과장되었다?
2.1.1. 이에 대한 반론
2.2. 판첸 라마 문제
2.3. 티베트 독립운동의 현재
2.4. 티베트의 역사와 현실을 아는 방법
2.5. 티베트에 대한 중국인들의 인식
3. 티베트로 가는 길
3.1. 칭짱철도
3.2. 칭짱도로
3.3. 쓰촨성 - 티베트 도로
3.4. 신장 위구르 자치구 - 티베트 도로
4. 대중문화에서의 티베트

1. 개요


티베트 전도. 현재 칭하이성으로 편입된 암도(Amdo)와 쓰촨성으로 편입된 캄(Kham) 지방이 포함된 원래의 티베트 지도이다.

(ɔ) Unknown from

티베트의 깃발설산사자기.

Tibet Travel Video Guide

티베트 국가. ༄༄། བོད་རྒྱལ་ཁབ་ཀྱི་རྒྱལ་གླུ།(뵈걜 캅끼 걜루: 승리의 노래)[2]

སྲིད་ཞིའི་ཕན་བདེའི་འདོད་རྒུ་འབྱུང་བའི་གཏེར།
씨시 팬데 되구 즁외 떼르
윤회계와 열반계의 소원을 이루는 보고(寶庫)

ཐུབ་བསྟན་བསམ་འཕེལ་ནོར་བུའི་འོད་སྣང་འབར།
툽땐 쌈팰 노르뷔 외낭 바르
불법(佛法)의 여의보주(如意寶珠)가 빛이 난다네.

བསྟན་འགྲོའི་ནོར་འཛིན་རྒྱ་ཆེར་སྐྱོང་བའི་མགོན།
땐되 노르진 갸체르 꾱외 괸
법과 중생을 널리 이롭게 하시는 보배를 지니신 보호존[3]

འཕྲིན་ལས་ཀྱི་རོལ་མཚོ་རྒྱས།
틴래끼 뢸초걔
크나큰 위업(偉業)의 장엄(莊嚴)이 바다같이 펼쳐져

རྡོ་རྗེའི་ཁམས་སུ་བརྟན་པས་ཕྱོགས་ཀུན་བྱམས་བརྩེས་སྐྱོང།
도제 캄쑤 땐빼 쵹뀐 잠째 꾱
금강계의 견고함으로 시방(十方)을 사랑과 자비로 보살피신다네.

གནམ་བསྐོས་དགའ་བ་བརྒྱ་ལྡན་དབུ་འཕང་དགུང་ལ་རེག
남꾀 가와 갸댄 우팡 궁라 렉
하늘이 내려준 만 가지 환희의 위상이 중앙에 솟았네.

ཕུན་ཚོགས་སྡེ་བཞིའི་མངའ་ཐང་རྒྱས།
퓐촉 데시 응아탕 걔
원만한 4가지 덕(德)의 위력이 늘어가고

བོད་ལྗོངས་ཆོལ་ཁ་གསུམ་གྱི་ཁྱོན་ལ་བདེ་སྐྱིད་རྫོགས་ལྡན་གསར་པས་ཁྱབ།
뵈종 쵤카 쑴기 쾬라 데끼 족댄 싸르빼 캽
티베트 삼방(三方), 모든 땅에 즐거움과 기쁨이 새로이 퍼지리.

ཆོས་སྲིད་ཀྱི་དཔལ་ཡོན་དར།
최씨끼 뺄 욘다르
불교와 세간의 훌륭한 덕이 성행하고

ཐུབ་བསྟན་ཕྱོགས་བཅུར་རྒྱས་པས་འཛམ་གླིང་ཡངས་པའི་སྐྱེ་རྒུ་ཞི་བདེའི་དཔལ་ལ་སྦྱོར།
툽땐 쵹쥴 게빼 잠링 양빼 게구 시데 뺄라 죠르
불법이 시방에 퍼지어 세상에 광대한 중생의 행복에 기여하기를

བོད་ལྗོངས་བསྟན་འགྲོའི་དགེ་མཚན་ཉི་འོད་ཀྱིས།
뵈종 땐되 게챈 니외 끼
티베트 땅의 불교와 중생의 선상(善相) 태양에서

བཀྲ་ཤིས་འོད་སྣང་འབུམ་དུ་འཕྲོ་བའི་གཟིས།
따시 외낭 붐두 토외 시
쏟아지는 상서로운 무량 광명의 위력으로

ནག་ཕྱོགས་མུན་པའི་གཡུལ་ལས་རྒྱལ་གྱུར་ཅིག།
낙쵹 뮌배 율래 갤규르 찍
암흑의 어두운 싸움에서 승리가 있기를


중국 서남부 티베트 고원에 위치한 티베트자치구 및 거기서 사는 토착 민족을 일컫는 말. 범위를 확장하여 티베트 고원 전체나 티베트인들의 거주지 전체를 일컫기도 한다. '눈(雪) 위의 거주지'라는 뜻의 몽골어 투베트에서 유래하였다. 중국에서는 티베트를 시짱자치구(西藏自治區, 서장자치구)라 칭하고 있다. 이 시짱자치구는 서북쪽으로는 신장위구르자치구, 둥북쪽에는 칭하이성, 동쪽에는 쓰촨성, 동남쪽에는 윈난성, 미얀마, 남쪽으로는 히말라야 산맥 너머 인도 공화국, 부탄, 네팔 등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 티베트 고원은 평균 고도가 4,900m에 달해 세계 최고의 고원 지대, 고산지대이다. 당장 중심도시 라싸만 해도 해발고도가 무려 3,400m를 넘어 3,650m 가량 된다.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와 거의 비슷한 해발고도.[4] 14세기 경까지는 과거 이 지역 왕조인 토번(吐蕃)으로 통칭되었다. 수도라싸(Lhasa, 拉薩, '하싸'라고도 발음함). 사실 티베트인들은 시짱자치구 외에도 칭하이성, 쓰촨성 서부 고원지대, 윈난성 서북부에도 거주한다. 윈난성 서북부의 샹그리라 현도 원래 티베트인들의 영역이다. 다만 거기까지 어떻게 한족들이 들어왔다는 게 문제. 아니 어떻게 들어왔지?[5]

시짱 자치구만 따진다면 티베트의 면적은 1,228,400km²로 남한 면적 12배 정도의 크기에 인구는 300만 명 정도지만, 중국 내 "티베트인 자치주"까지 포함한 지역[6]은 면적 약 220만km²에 인구 800만 명에 달한다.

이곳에 사는 유명한 동물로 티벳여우티벳 토끼[7]가 있다. 그리고 티벳궁녀 포탈라궁도 유명하다.

1.1. 토번(吐蕃)

© Gabagool (cc-by-3.0) from

8c 후반 토번왕조의 위세가 절정에 달했을 시기. 현재 시짱자치구 영토 4배에 육박한다.

토번의 고유발음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특히 번(番) 자의 발음을 놓고 말이 많은데, 중국에서는 '번'에 해당하는 판(fan)과 보(bo)의 두 발음이 대립하고 있다. 토번이 역사서에 기록될 당시(수나라 무렵) 중국어의 발음을 재구한 학자들은 퉈퐈, 퉈피원, 퉈편 등으로 발음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이 중 뒤에 ㄴ받침이 붙은 쪽이 보편적으로 쓰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즉 '번' 쪽을 좀더 밀고 있다는 얘기. 이 '蕃' 자가 티베트를 나타내는 고유어 Bod를 음차한 것인지, 혹은 단순히 글자 뜻 그대로 오랑캐라는 의미를 나타낸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8]

고대 튀르크 및 소그드어로 기록된 문헌에는 이 지역을 튀퓟(Tüpüt)으로 부르고 있다. 이 명칭은 티베트 북부 지역을 나타내는 티베트어 tu phod 이나 stod pod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되며, 꽤 유력한 가설 중 하나로 취급받고 있다.[9] 이 발음이 아랍 세계로 전해진 뒤 영어권에서 Thibet이라고 불리다가, 현재 영문명칭인 Tibet으로 정착됐다.

토번왕조가 언제 시작되었는가, 그 원류는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정보는 없다. 다만 기원후 4세기경에는 이미 토번의 선조라고 할만한 정치집단이 등장하여 천천히 중앙 티베트에서 영향력을 확장한 듯 싶다.[10] 토번의 원류가 되는 집단은 라싸 남동의 얄룽(톨기 지방)을 기점으로 근처의 여러 부족을 흡수해 세력을 늘렸다. 약 570년경 남리룬첸이 즉위하여 티베트는 연대고증을 시작한다. 이때부터 토번은 비로소 주변 경쟁세력을 능가하는 국력을 갖추는가 하면 중앙집권화에 대한 준비 역시 시작했다. 그러나 지나친 확장에 대한 반발로 619년[11], 남리룬첸이 독살되고 속국들이 다시 독립되게 만든다. 그러나 그의 아들 송첸감포(재위 630년~650년)가 불과 13세의 나이로 그 모든 것을 평정하고 통일 티베트의 서막을 연다. 633년, 송첸감포[12]는 스키타이 계열 유목민를 평정하고, 티베트 일대를 통일한 후, 수도를 라싸로 정하고 토번(吐蕃) 왕국을 건설한다.

634년, 송첸감포는 에 사신을 보내 예물을 교환하고 토번의 남쪽에 위치하는 네팔의 릿체비 왕조에 사자를 보내, 브리쿠티 데비(赤尊公主)를 왕비로 맞이했다. 636년, 당태종에게 당의 황녀를 왕비로 맞이하고자 사자를 보냈지만, 토번이 당나라의 속국인 토욕혼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거절당한다. 그러자 송첸감포는 20만의 군사를 일으켜서 토욕혼을 정벌하였고, 겸사겸사 백란 등의 강족의 마을도 공략한 후, 송주(현 쓰촨성 쑹판현)를 내놓으라고 당나라에 요구했지만 당나라에 패배했다. 그 후 다시 당태종에게 특사 가르통첸(재임 652~667)을 보내, 금 오천 령을 납폐로서 주었고, 당나라는 토번의 상승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641년 문성공주(文成公主)를 보내 왕비로서 맞이하게 한다.

원래 문성공주는 송첸감포의 아들인 공손공첸에게 시집갔으나 아들이 낙마사고로 사망해 유목민의 사취수제와 정략에 의해 시아버지랑 재혼한다(지못미 문성공주).[13]

여하튼 문성공주와 송첸감포의 결혼은 누가 숙이고 들어갔느냐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14] 일단 송첸감포는 문성공주가 싫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문성공주가 '자면의 풍습'(얼굴에 적토를 바르는 풍습)을 싫어하자 이를 폐지하는 등 정성으로 대했다. 또한 친당정책을 시작해 당나라와 교역하며 인도에 사신을 파견하는걸 도와주기도 했다.

그러나 송첸감포 사후 양국 관계는 완전히 파탄났다. 사실 이럴 수밖에 없는 게 당시 토번 왕국의 국력은 극에 달했고, 명신 가르통첸의 개혁과 이로 인해 강화된 가르 가문의 집권을 유지시키기 위해 성과가 필요했기에, 결국 669년 안서사진을 공격하여 함락해 양국은 마침내 완전히 적대적으로 변하게 된다.

이로 인해 당은 당연히 반격을 가했지만 이미 토번왕조는 대외적인 제도 정비에 성공하고 군사력 또한 증가되어 큰 성과 또한 얻지 못했다. 그러나 위안인 건 699년 치둑송첸의 대숙청으로 가르친링이 제거되었고 710년 금성공주의 혼인으로 일시적으로 화평이 나오기는 했지만, 715년경부터 당은 토번에 대공세를 가해 토번의 영향력을 점차 조금씩 감소시키기 시작했고 고선지의 원정으로 그 성과는 극에 달했다. 하지만 고선지 역시 탈라스 전투에서 아바스 왕조군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당의 빈자리는 다시 토번이 차지한다. 당은 토번에게 매년 공물을 바치며 이들을 달래고자 한다.

하지만 토번의 정복 활동은 계속되어 왕국의 힘은 8세기 후반 더욱 확장됐다. 토번은 파키스탄 북부와 네팔, 인도 북부는 물론 중국의 간쑤성(甘肅省)과 쓰촨성(四川省) 지방을 점령하고 실크로드를 장악해서 거대한 국가로 발돋움 했고, 763년 당이 안녹산의 난으로 혼란에 빠지자 공물을 보내지 않았음을 빌미로 삼아 20만 대군을 몰아 당군과의 수 차례에 걸쳐서 정면 대결을 시도, 여기서도 승리를 거두며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을 점령했고 자신들이 당의 황제를 마음대로 세울 정도로 기세를 날렸다. 그러나 791년 서역전역에서 위구르에게 패하면서 조금씩 영향력이 줄어들고 800년대 초반부터는 남조왕국에서까지 견제를 받고 결정적으로 아바스 왕조와의 대결에 국력을 소모하고 당, 위구르와의 전쟁에서도 큰 성과를 얻지 못해 결국 당과의 화친을 한다.

결국 토번과 당은 820년 협정을 통해 국경선을 확정함으로서 앞으로의 무력충돌을 피하기로 한다. 이때의 확정 조약은 티베트의 수도 라싸의 조캉사원[15] 앞에 당번회맹비라는 내용으로 세겨져 지금까지 세워져 있다. 여담이지만 '이 비문이 세워진 날부터 토번인은 토번인의 땅에서, 당나라인은 당나라의 땅에서 각자 영원히 행복하게 살 것이다.' 라고 쓰여져 있었고 1950년 대지진으로 국경지방의 비석이 파괴되기 전까지 이 비문은 그 역할을 훌륭히 이행하였다. [16]

토번은 줄곧 당과 대립을 반복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대적인 관계만은 아니었다. 송쩬 감포 왕 자신부터가 당의 제도와 기술 수용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마누라가 당 공주이기도 하고… 문성공주는 티베트 불교에서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서 추앙받고 있으며, 이 시기 율령제와 한자를 비롯한 유교 경전등 다른 한자문화권과 같은 중국 문화를 받아 들였다. 그러나 티베트는 나중에 인도 문자 계열을 잇는 티베트 문자를 따로 만들어 활발히 씀으로서 한자, 한문 사용은 정착하지 않았으며[17] 불교도 한역 불경이 아니라, 티베트어로 바로 번역하여 받아들이면서 중국 문화권과는 선을 그었다[18].

토번은 9세기 이후 마지막 왕인 랑데르마가 암살당하면서 실질적으로 붕괴된다. 당시 그는 불교를 매우 강력하게 탄압했는데[19] 이에 반발한 한 승려가 신의 계시를 받고 티베트 전통 종교인 본교 사제처럼 검은칠을 한 흰옷을 입고 역시 검은칠을 한 백마를 타서 당과 토번간의 회맹비를 보던 랑데르마의 미간을 맞추어 암살하는데 성공한다. 헤드샷! 이에 친위대가 쫓아갔으나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검은 칠이 벗겨서 흰 옷을 입은 사람과 흰 말을 탄 사람으로 변해 친위대가 알아보지 못해 성공적으로 도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토번은 중앙 귀족간에 왕위 쟁탈이 벌어졌고, 왕실 직계의 일부가 서부 티베트로 도망가 구게(Guge)라는 새로운 왕국을 세웠다. 그러나 막상 본국은 그 국력을 완전히 상실한 채, 895년 마지막 찬포 위송이 살해당하면서 멸망된다. 그 후 티베트는 다른 민족들에게 중앙아시아 지역을 빼앗겼으며, 토착종교 뵌교와 외래 종교 불교 간의 대립, 불교 내의 파벌 간 다툼과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으로 인해 조각조각 나뉘고 만다. 그리고 티베트는 끊임없는 침략에 시달리며 주변 강국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으로 전락했다.[20]

1239년, 몽골은 티베트를 점령한 뒤 종교 지도자를 대리 통치인으로 선택했고, 티베트 불교 겔룩파의 수장이자 티베트의 서열 1위인 달라이 라마는 이렇게 생겨났다. 몽골의 중국 정복 왕조인 은 한때 말을 듣지 않는 달라이 라마를 제치고 티베트 불교 샤꺄파의 수장이자 티베트의 정치적 서열 2위인 쌰꺄틴진을 식민 정책의 동반자로 선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란 속에서도 티베트 문화는 꾸준히 존속되었으며, 마침내 달라이 라마 5세 롭상 갸초(Lobsang Gyatso, 1617~1682) 때 티베트는 다시 통일된다. 당시 동아시아의 패권을 쥐고 있던 청나라의 황제는 달라이 라마황제의 스승으로 대우하였으며, 달라이 라마가 황궁을 방문할 때는 당시 중국 문화권의 국가 중에서는 유일하게 황제와 같은 높이의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1.2. 청과의 공존과 현대사

청나라는 티베트를 몽골과 그 주변 국가들을 억제하기 위한 정치적 이유로 처음 티베트를 국가로서 인정하였다. 이 이후로 티베트와 청은 '스승과 시주자'의 관계로 유지되었으며 5대 달라이 라마는 스승으로서 황제의 아래가 아닌 옆에 앉았으며, 이후 청은 '암반'이라는 내정 간섭 기관을 설치, 상당히 장기간 내정간섭을 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21], 최근들어 이 암반 역시 사실상 티베트 내정에 관여한 일이 없었던 것을 증명하는 사료 등이 발굴되어 내정관섭기관이라기 보다는 '주티베트청대사관'이 아니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19세기 청나라티벳몽골에 대해 직접 영유권을 주장하며 서방의 접근을 경계해왔다.

만주몽골은 티베트와 밀접한 관계였으나 지금 중국이 주장하는 '속국관계'와는 달랐으며, 원과 청은 한족의 나라인 중국이 아니라는 것이 티베트 측의 주장이기도 하다. 여하튼 1912년 신해혁명으로 인해 청이 멸망하면서 티베트의 상황은 변화를 맞이한다.

달라이 라마 13세 툽텐 갸초는 청이 멸망하자 세력을 규합해 1913년 수도 라싸에 잔존한 중국군을 몰아내고 자신을 수장으로 한 독립국가 건설에 나섰고 중국과 세계에 "만주족의 나라와 세속적, 영적인 관계가 끝난 것으로 보아 티베트는 명실상부 독립국임을 밝힌다."라고 선언하였으나 당시 국제 사회에서 티베트의 독립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영국은 인도 지역 이권 수호를 위한 방파제로 삼고자 티베트 정부에 무기를 지원해주고 영국 공관을 설치, 공사관을 파견하였으며 네팔, 영국, 부탄 등과 국가와 국가 간의 지위로서 몇몇 조약을 체결하기도 하였다.

중일전쟁 와중인 1940년 중화민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 14세 텐진 갸초의 즉위식에 사절단을 파견, 1948년 티베트 정부가 강제로 몰아내기 전까지 이들을 불러들이지 않으며 상징적인 제스처를 취해보였다. 영국 역시 제2차 세계대전 중 티베트 지역에 소수의 군대를 파견해 은근히 이들을 괴뢰국처럼 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2차대전 종전 후 영국이 인도를 상실하고,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를 거두자 상황은 달라졌다.

인도를 독립시킨 영국은 더 이상 티베트와 무관해졌기 때문에 이들의 운명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고, 인도와 중국은 당시에는 우호관계였기 때문에 인도는 굳이 티벳 문제로 중국의 어그로를 끌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전의 국민당 정부와 마찬가지로 베이징 정부는 이지역의 영유권을 선언했고, 1951년 라싸인민해방군을 진주시켰다. 베이징달라이 라마 측은 몇 차례의 협상을 해서 티벳이 중국의 영토임을 인정하지만, 달라이 라마의 자치권을 보장하는 선에서 타협하게 된다. 이것을 '티베트의 평화적 해방을 위한 17조 협의'라고 한다. 위키백과의 17조 협의 항목

이것으로 이 문제는 일단락되는것 같았고, 1950년대에 달라이 라마중국 정치협상회의의 티벳 대표로 베이징에 와서 몇차례 마오쩌둥과 만나기도 했다. 처음에는 매우 우호적이었고, 달라이라마는 마오쩌둥이 자신을 아들처럼 대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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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그림 (41.74 KB)]

1954년 베이징에서 열린 한 회의에서. 가운데가 마오쩌둥, 왼쪽이 판첸라마, 오른쪽이 달라이 라마.

그러나 차근차근 토지개혁과 같은 공산화 정책이 시행되자 기득권인 귀족층을 중심으로 반발이 일어나서 이 지역은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1958년에서 중국전역에서 대약진운동이 야기한 대기근이 발생하자 원래부터 식량사정이 좋지 않던 티벳의 반중 감정은 폭발하게 되었다. 1959년 이곳에서는 엄청난 혼란을틈타 생수 중국봉기가 일어났고, 이 봉기를 중국군이 무자비하게 진압하면서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망명하게 된다. 많은 티베트인들이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 북부, 네팔 등지로 망명을 떠났다.

달라이 라마 14세와 티베트 내각은 티베트 내에서의 독립운동의 가능성과 달라이 라마 14세의 신변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기에 1959년 인도로 망명하여 북인도 히마찰프라데시주(州) 다람살라에 망명정부를 수립, 지금에 이르고 있다.

2. 티베트 독립운동

중국 공산당이 처음부터 실시한 정책은 잔혹한 학살 정책이었다. 특히 주요 대상이 된 것은 티베트인들을 이끄는 지도자인 승려들이었다. 수많은 승려들이 강제로 환속당했고 종교를 금지하는 공산당 강령에 따라 종교 탄압이 벌어졌다. 이에 항의하는 승려들은 학살되었다. 이에 수많은 승려들이 역시 인도로 망명을 떠났다. <티베트에서의 7년>, <쿤둔>이라는 영화를 보면 이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다.

티베트인들은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서 수렵, 벌목, 채광 같은 일들을 금기시하여,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자연 환경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중국은 이곳에서 , 석탄, 우라늄과 같은 천연 자원을 마구잡이로 캐냈다. 또한 표범, 과 같은 짐승들을 남획, 현재 멸종 위기로 지정되었다.

결국 티베트 정부는 중국의 적대국인 인도망명 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문화대혁명 기간 중에는 3,700개에 달하던 사찰 중 라싸 주변과 정치적으로 중요했던 동티베트의 13개 사찰만 남고 모조리 파괴되거나 감옥, 창고와 같은 곳으로 용도가 변경되었다. 티베트어로 된 경전이나 불상, 같은 종교적 성물은 물론 전통 티베트 의상, 신발 같은 공예품들은 대부분 압수 또는 소각당했다.[22]

당시 티베트에서 독립운동을 했다고 하여 체포, 복역 중이던 승려 팔덴 갸초의 저서 《가둘 수 없는 영혼》[23]에 따르면, 당시 감옥 안에서조차 수감자들이 가지고 있던 염주, 불경과 같은 종교적인 물건을 비롯, 심지어는 유목민들이 쓰던 가죽 주머니마저 구시대의 물건이라 하여 소각했으며, 문화대혁명 당시의 티베트인들의 인권은 거의 없었다고 진술하였다.[24]

이후 망명한 티베트인들은 독립운동에 나섰다. 1959년 3월 10일 티베트인들은 라싸를 중심으로 집단 무장 봉기에 나선다. 그러나 압도적인 중국군의 공세 앞에 무장 봉기는 실패로 돌아가고,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남긴 채 실패로 끝난다. 이후 두어 차례 크고 작은 무장 봉기가 시도되었지만 이 역시 번번이 실패로 끝나고, 달라이 라마 14세 텐진 갸초(Tenzin Gyatso, 1935년생)의 비폭력 평화 투쟁 노선의 영향도 있어 무장 투쟁은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된다. [25]

한편, 인도 북부 다람살라에 망명 정부를 수립한 달라이 라마 14세는 국제적으로 중국을 규탄하고 티베트 독립을 호소하는 비폭력 노선을 견지하고 있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1989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노벨평화상도 티베트 독립의 가능성을 높여주지는 못했다. 주한 티베트 대사관은 일본 도쿄의 티베트 임시 대사관이 겸임하고 있다

물론 어떤 의견이든 반대되는 의견이 존재는 하는 법이니 이런 의견이 나오기도 한다. 이에 대한 반박은 아래 문단에 있다.

그리고 2006년 10월에 벌어졌던 난민 총격 사건이나 2010년 8월에 벌어진 시위자에 대한 총격, 그 외의 여러가지 사건들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과연 죽의 장막 밑에서 진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어쨌거나 티베트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건 어디까지나 여론일 뿐, 달라이 라마가 내한하려 할 때, 우리나라 불교계가 탄원서도 내보고 서명도 받아봤지만 외교통상부에서 현재까진 비자발급을 거부하여 좌절되었다.

그리고 열도의 병크에 다소 묻혀서 그렇지, 근년부터 중국이 티베트에 은근슬쩍 방사능 폐기물을 몰래 버리는 탓에 티베트인들이 원인모를 질병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2.1. 티베트 독립 문제는 과장되었다?

티베트 독립에 대한 반발 여론이 존재한다. 주로 중국의 주장을 여과없이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는 친중 세력의 주장으로, 2011년 출판된 정호영의 저서 <인도는 울퉁불퉁하다>[26]와 2008년 <민중의 소리>에 기고한 김도균의 <티베트 독립은 누구의 이익에 복무하나>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은 티베트 독립을 반대하는데 그 논지는 다음과 같다.

1. 티베트는 중국에 점령되기 이전에 노예제 사회였고, 사지를 절단하는 고문이 자행되던 곳이었다. 절대 다수의 티베트인들은 어떠한 자유도 누리지 못했고, 소수의 봉건 귀족들로부터 50%나 되는 이자를 물고 돈을 빌리면서 살던 빈민이었다.

2. 중국이 티베트를 다스리고 나서 티베트인들의 생활수준은 급격히 향상되었다.

3. 티베트인들은 현재까지도 자신들의 고유 언어를 사용하며, 자체 TV 방송까지 할 정도로 자유를 누린다.

4. 인도로 망명한 티베트 망명 정부중국의 악행을 과대포장하여 거짓말을 했다. 물론 중국군에 의한 티베트인들의 학살이 있기는 있었지만, 그 수는 매우 적다.

5. 또한 티베트 망명 정부에서 일하는 티베트 승려들은 인도 정부로부터 세금을 면제받고, 가난한 인도인들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부유하다.

6. 달라이 라마미국CIA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았다. 티베트 인권 문제 거론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더러운 음모이다. 달라이 라마에게 1989년 노벨평화상을 준 이유도 중국천안문 6.4 항쟁을 비난하기 위해서이다.

7. 티베트를 침략한 중국 군대는 소수였다. 또한, 군사력에서 절대 열세였던 티베트인들이 달라이 라마의 권고에 따라 중국군과의 저항을 중단한 것은 현명한 일이었다. 그러니 티베트인들더러 무기를 들고 중국과 맞서 싸우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8. 현재 티베트 독립을 운운하는 자들은 순수한 티베트 민중이 아니라 중국에 의해 기득권을 빼앗긴 티베트의 봉건 지배층들이다. 과연 일반 티베트 민중들이 독립을 원할까??


2.1.1. 이에 대한 반론

1. 티베트에는 지주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세금을 바치는 소작인 이외에도 유목민, 상인, 반 유목 소작인, 장인 등의 다양한 계층이 존재했다. 비교적 적은 수의 대농장이 있었던 캄과 동부 지방인 암도에서는 더 넓은 땅을 가졌던 자유 소작인 차지가 있었고, 자기 토지를 소유하고 정부에 직접 세금을 내는 개인이 다른 지방보다 더 많이 살았다. 티베트 민중들을 가리켜 농노제와 노예제라는 단어는, 1949년부터 자신들의 티베트 점령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중국이 꾸며낸 날조에 가깝다. 중국에 의해 농노로 분류된 티베트 여의사 최덴(D. Choedon)은 노예제와 농노제라는 명명을 무색하게 만드는 글을 발표한 바 있다.

이 글에서 최덴 여사는 "우리는 생계를 잇는데 아무런 지장도 받지 않았다. 우리 지역에는 단 1명의 거지도 없었다."라면서 티베트 사회는 다소간의 자족적이고 느슨한 사회라고 묘사했다. 또한 달라이 라마 14세의 어머니 딕끼 체링(Dikkyi Cheling)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내가 어릴 때 가끔씩 가뭄에 못 이긴 중국인들이 티베트로 넘어와 구걸했다. 그러나 티베트인 거지는 없었다."라고 했다. 대체 누가 거지고 누가 배푸는 사람인지 모르는 주객전도의 상황 중국의 티베트 통치에 대해 호의적인 저널리스트인 크리스 멀린(Chris Mullin)과 알렉산드라 다비드 넬(Alexandra David Neel), 조지 N 페터슨(Geroge N. Patterson) 같은 다양한 티베트 여행자들도 최덴의 발언에 동의했다.

참고로 중국 관영 매체인 신화통신은 2000년, 달라이 라마망명 정부를 비난하면서 역대 달라이 라마들이 9살 된 남자 아이의 배를 갈라 심장을 먹고 몸을 토막 내 나무에 걸었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비난을 퍼부었다. 그런데 중국 정부의 입김을 받는 관영 언론에서 하는 보도가 얼마나 신빙성이 있을까? 신화통신과 비슷한 중국의 관영매체 CCTV2002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을 악의적으로 비난하던 사례도 있었다.

이런 개소리는 일찍이 우리나라 역시 당한 바가 있고 현재진행형이다. 대한제국의 국권을 피탈한 일본 제국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은 원래부터 무당과 고문과 노비가 판을 치던 미개하고 못살던 지금의 북한같은 악랄한 나라~ 라는 국까의 개드립이 아직까지도 인터넷에 횡행하고 있다.

2. 다음은 1989년 3월, 티베트 수도라싸에서 벌어진 티베트인들의 봉기에 대해서 중국군이 저지른 무자비한 학살에 관한 내용이다. 상당한 신빙성이 있는데, 중국 공산당의 간부가 증언했기 때문이다.

티베트인 청년이 무장경찰에게 돌 2개를 던졌다. 부소대장이 물었다. "저놈을 패야 하지 않습니까?" 돌멩이 하나를 다리에 맞은 부대대장이 명령을 내렸다. "패라!" 그러자 부소대장은 무장경찰 3명을 이끌고 돌을 던진 티베트인을 쫓아갔다. 티베트인들은 일반 티베트 가족이 사는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무장경찰은 문을 차고 들어가 모든 거주자를 사격으로 싹슬이했다. 가족 6명이 모두 죽었다. 가족 중 막내는 겨우 11세였다. 그러나 돌을 던진 티베트인은 벽을 타고 올라가 도망쳤다. 무장경찰은 그의 뒤를 쫓아가 다리에 총상을 입혔다. 그러자 한 무장경찰이 부리나케 달려가서 자신의 총을 들어 티베트인의 머리에 대고 발사했다. 그런데 소총이 갑자기 오발되어 그 뒤에 있던 무장경찰 하나가 목에 총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병사가 죽는 것을 보고 분노한 부소대장은 돌을 던졌던 티베트인의 머리를 때렸고, 티베트인 청년의 머리가 깨져 가 밖으로 쏟아졌다.

이 티베트인 청년이 경찰에게 총으로 구타당했을 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자신의 집 문간에 서있던 한 티베트인 가족 6명이 '살인자! 살인자!'라고 외쳤다. 부소대장은 경기관총을 들더니 가족을 향해 기관총을 쏘아대 모두 죽여 버리고 말았다.


이 사건들은 <Amnesty International, Urgent Actiom 8/3/1989, PRC 'Fear of MassArrests/Torture/Summary Execution in Tibet'>(앞의 글)에 인용되었다. '1989년 3월 5일과 그 이후로 라싸에서 벌어진 사건에 관한 직접목격증언(Eye Witness Accounts Of Events in Lhasa, Tibet, on and after March 5th 1989)'앞의 글. <가디언>(1989년 3월 7일자)라싸 휩쓴 유혈 폭동(Bloody Rioting Sweeps Lhasa). 두 티베트인 가족의 몰살이 관련된 돌멩이 투척 사건은 홍콩의 잡지인 <홍콩제밍(Hong Kong Cheng Ming)> NO. 139, P.24, 1989년 3월 1일자에도 실려있다. 방문자, 티베트인 학살에서 256명 사망 주장(Visitor Claims 256 Deaths in Tibetan Massacre) <Reference News> columm 라싸의 학살(Massacre in Lhasa), Huang Min. 이 글의 필자인 황민은 베이징에서 중국 공산당 간부와 만난 뒤, 상기 사건에 관한 진술을 들었다고 고백했다.

이 간부는 1989년 3월의 라싸 학살 사태에 발생한 티베트인 사망자가 256명이라는 수치 정보도 흘렸다. 시위자가 돌을 던지자 총으로 쏴죽이고, 전혀 상관없는 일가족까지 총살해 버린 중국 무장경찰. 티베트인들은 참 잘 살고 있나 보다. 만약 한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티베트 문제가 과장되었다는 자들은 우리가 참 잘 산다면서 자화자찬할까?

3. 그런 논리라면 1920년대부터 태평양 전쟁 이전까지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언어와 글자를 사용하고 방송국에서도 한국어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문화 통치를 받았으니, 일제강점기는 행복한 시대였다고 볼 수도 있는가??

또 티베트에서 11살에 망명한 티베트인 승려 푼촉 최중(Puntsog Chojung)은 "우리 지방은 아이들이 학교에 가서 처음 3년간만 티베트어를 배우고 나머지는 중국어를 배웠다. 수업은 중국어로 진행되었고, 단지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집에서 이야기할 때만 티베트어를 썼다. 간혹 티베트의 다른 지방에서 친척이나 순례자가 왔는데 사투리의 차이로 말이 통하지 않을 때는, 중국어가 공용어로서 사용되었다.[27]" 라고 할 정도이니 중국 정부가 얼마나 티베트어 교육에 무관심한지는 자명한 일이다.

4. 티베트 전쟁 내내 중국이 보인 잔학무도함은 너무나 심각해서, 수년동안 티베트 공산당 지도자였고 티베트 민족정치자문의원회의 부회장이라는 중책에 있던 푼촉 왕걀마저 중국군이 저지르는 잔학 행위에 항의했다가 티베트인의 자유 투쟁에 동정을 표했다는 명목으로 투옥되었을 정도였다.

또한 라싸에 주둔했던 중국 인민해방군 포병대 지휘관이었던 청호칭 대령은, 동료들이 저지르는 끔찍한 학살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티베트군으로 전향해 버렸다. 청호칭 대령은 한국전쟁에 참가하여 미군과 싸웠고, 티베트로 파견되어 군인으로 몇 년을 더 복무했다가 티베트 저항군에 가담하여 예전의 동료들과 싸웠다.

나중에 그는 티베트 동부 지방인 캄과 암도에서 일어난 티베트 저항군과 중국군과의 전투로 인해 약 4만 명의 티베트인들이 죽었으며, 중국군 수뇌부에서 더 이상 티베트인들의 봉기를 막기 위해서 티베트인들에게 주는 식량 배급을 줄이고 통제를 강화하고 더 긴 시간 동안 노동을 시켜야 한다고 작성한 기록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그는 롭상 타시라는 티베트식 이름도 얻었는데, 중국군탱크비행기가 티베트 민간인을 노리고, 티베트 마을들이 중국군 폭격기에게 폭격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청호칭 대령은 인도에서 티베트 난민으로 여러 해를 살았다. 티베탄 리뷰 1979년 10월 호에 그와의 인터뷰가 남아있다. 제목은 티베트 자유를 위해 싸운 중국군 대령(A Chinese Colonel Who Fought for tibet's Freedom).

5. 티베트 망명 정부의 티베트 승려들이 자동차를 타고 잘 산다고 그들의 독립 주장에 정당성이 없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 동포들이 보내준 돈으로 (상대적으로) 유복한 삶을 누리며 미국에서 일본조선에 저지르는 악행을 폭로, 독립운동을 했던 한국독립운동가들을 보면서 "저들은 저렇게 잘 사는데 무슨 독립을 하겠다는 거냐?"라고 꼬투리를 잡는 것과 같은 셈이다.

1905년, 러시아로 파견된 조선 사신 이위종은 러시아 정부를 상대로 일제가 조선을 침탈하고 있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러시아가 나서서 일본을 막고 조선의 독립을 지켜달라는 활동을 벌였다. 그러면서 그는 러시아인 아내인 바로네사 엘리자베타 놀렌과 별거하고, 다른 러시아인 여성인 엘리자베타 에피모바와 동거하는 등 문란한 사생활에 빠졌다. 만약 러시아인이나 외국인이 이런 이위종의 행동을 문제삼으면서 "당신의 방탕한 꼴을 보니, 무슨 조선 독립을 운운하는가? 당신이 외치는 조선 독립에 어떤 당위성이 있느냐?"라고 말하며 조선의 독립을 부정한다면 그 말에 수긍해야 할까?

망명 정부와 티베트 승려들이 인도 정부에 세금을 내지 않는 다는 말은 중국의 억지왜곡이다. 망명인이라는 신분이기에 어느 정도 세금에 감면을 받는 면도 없지는 않지만, 인도 정부의 보호를 받고 인도 내에서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이상 세금을 꼬박꼬박 내고 있다. 또 인도 내의 티베트 사원의 경우 사원의 사무원이나 청소원 등은 인도인들을 우선으로 고용하여 오히려 인도인들의 일자리를 만들어 주고 있는 상황이다.

6. 이 논리대로라면 장개석 총통의 중국 국민당으로부터 자금과 무기를 지원받아 일본에 맞서 독립운동을 벌였던 김구이봉창, 윤봉길 등의 한국독립운동가들도 모두 중국의 앞잡이나 첩자라는 말이 된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미국 정보 기관인 OSS(CIA의 전신)으로부터 군사 훈련을 받고 대일 항전에 나섰던 한국인 독립운동가들도 모두 미국의 스파이라는 말인가?

무엇보다 저런 식의 논리는 티베트인들을 가리켜 "너희는 미국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서 중국을 물어뜯고 있으니, 순수하지 못하다."라는 뉘앙스가 담겨져 있다. 그러나 티베트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조국중국에게 짓밟혔는데, 외부의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맨주먹으로 강대한 중국에 맞서 싸우다 몽땅 죽어야 할까? 이것은 마치 강대국에게 침략당한 약소국이 어떤 외국의 도움도 받지 말고 혼자만의 힘으로 싸워야 정당하다는 황당한 논지와 무엇이 다른가?

조선독립운동가들의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자. 혼자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강력한 일본의 힘에 맞설 수 없어서 일본과 대립하고 있는 중국이나 미국의 힘을 빌려 싸우려 한다. 그런데 그런 독립운동가들에게 일본이 이렇게 말한다. "왜 너희들은 우리와 싸우고 있는 중국이나 미국한테 도움을 받느냐? 너희들은 그들한테 포섭된 첩자가 아니냐? 조선 독립? 좋지. 그런데 중국이나 미국한테는 절대 손 벌리지 말고, 너희들만으로 해야 해."

이게 얼마나 얼토당토 않은 황당한 비난인가?[28]

1989년에 달라이 라마한테 노벨평화상을 준 일을 두고 트집잡는 것도 웃긴다. 같은 해에 라싸에서 일어난 중국의 무자비한 유혈 시위 진압 때문에 준 일인데,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일도 중국의 사정을 봐가면서 줘야 한단 말인지?

7. 인도로 파견된 중국군이 매우 적은 수였을 거라고 말한 내용은 <인도는 울퉁불퉁하다>에 실려있다. 그러나 그 말의 출처는 저자인 정호영 본인이 직접 발로 뛰면서 취재를 하거나 구체적인 사료를 제시하며 주장한 게 아니라, 미국친중 좌파 성향의 저술가인 마이클 파렌티의 말에서 "아마 티벳에 진주한 중국군은 소수였을 것이다."라는 극히 추상적이고 단순한 (구체적인 자료나 근거도 없는!)주장을 그대로 배껴온 것이다. 과연 마이클 파렌티의 이와 같은 주장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을까?

1950년 10월 약 2만 명의 중국군이 티베트 동부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티베트 저항군의 격렬한 반격에 부딪치자, 1957년 중국은 탱크와 포병과 항공기까지 포함된 15만 명의 대군을 집결시켜 다시 티베트를 침공한다. 그렇다면 전부 합쳐 17만 이상의 군대가 동원된 셈인데, 이걸 가리켜 소수라고 부른다면 대체 얼마나 많아야 다수라고 해야 하나? 소수라면 소수겠지, 중국에겐 1950년대에 시작된 티베트와 중국의 전쟁은 약 20년 넘게 계속되었다. 만약 중국이 선전하는 대로 티베트가 억압적인 사회였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티베트인들의 항전이 지속될 수 있었을까? 가장 큰 전투는 티베트군과 중국군을 합쳐 10만 단위의 병력이 참가했을 정도다.

티베트인들은 1970년 무렵까지 CIA의 도움을 받아 중국군의 침공에 게릴라전으로 맞서 끈질기게 저항했다. 티베트인들의 무장 항쟁이 사라진 이유는 달라이 라마의 저항 중단 권고가 아닌, 1973년 들어서 미국이 중국과 정식으로 국교 수립을 하자, 그에 따라 중국과의 대립 정책을 포기하는 바람에 더 이상 티베트 저항군에게 도움을 줄 수가 없게 된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 그에 따라 티베트 전사들은 중국군과 계속 싸우다 전사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인도로 망명하게 되었다.[29][30].

티베트인들의 對 중국 무장 항쟁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은 국내에도 번역된 <티벳전사>를 참조하기 바란다.

8. 독립운동도 무슨 직업처럼 자격증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가? 참, 구차한 핑계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나섰던 독립투사들 중에서 정말 못 먹고 못 살았던 일반 서민들이 많았나? 아니면 어느 정도 먹고 살만 했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고급 학문을 익히고 배웠던 지식인들이 많았나? 당연히 후자다. 위의 논리대로라면 일제강점기의 한국 독립투사들 중에서 부유한 집안의 지식인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싸웠던 불순분자란 말인가? 그런데, 정작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 중에서는 부유한 집안 출신이 대부분이다.

또, 기득권층인 왕실이나 양반 계층에서도 자기 사비를 들이고 집안 식구들을 거지로 만들면서까지 일제에 맞서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자기들의 기득권을 일제에 빼앗기자 그것을 되찾기 위해서 싸웠던 부정하고 타락한 집단으로 매도하란 말인가? 그렇다면 왕실이나 양반 계층 같은 사람들은 결코 독립운동에 나서서는 안 된다는 뜻인지2

달라이 라마 망명 정부가 원하는 것은 꼭 분리 독립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자치권 선에서 만족하고 있다. 중국 정부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티베트 공산당에 의해 지배되는 허울뿐인 자치구의 현실이 티베트인들을 분노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의 자치권 요구마저도 거부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 자체가 미국의 조종을 받는 첩자라고 주장하면서, 그와 티베트 망명 정부와의 어떠한 협상도 하지 않고 있다. 티베트 연구가들의 말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現 달라이 라마가 늙어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고 한다. 달라이 라마가 최고의 지도력을 보유하고 있기에 아직 주류 세력은 아니지만, 아예 달라이 라마의 비무장 노선을 비판하면서 무장 투쟁을 부르짖는 독립 운동가들도 있다고 한다.

2.2. 판첸 라마 문제

판첸 라마달라이 라마와 같은 겔룩파의 중요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이자 티베트의 종교적 서열 2위이다. 대대로 판첸 라마는 달라이 라마의 환생자를 인정하는 역할을 맡아 왔다. 그리고 현재의 달라이 라마 14세 이후의 달라이 라마 15세를 인정하는 역할이 바로 판첸 라마 11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판첸 라마 10세 롭상 틴레이 훈둡 최끼 겔첸(Lobsang Trinley Lhündrub Chökyi Gyaltsen, 1938년 생)는 달라이 라마 14세가 티베트를 탈출한 후에도 중국과의 협조 노선을 택해 티베트에 머물렀다. 문화대혁명 때는 그가 주지를 맡고 있었던 티베트 제2도시인 시가체의 타쉬룬포(Tashilhunpo) 사원이 파괴되었으며, 그 당시 투옥되어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말년에는 전국인민대표대회 부위원장이 되어 티베트인의 권리 향상에 힘쓰나, 1989년 1월 28일 티베트 사원 방문 중 급사했다(향년 50세). 달라이 라마 14세의 말에 따르면 심장 발작이 사인이라 한다.

판첸 라마 10세 사후에 달라이 라마 14세와 티베트 망명정부는 환생자를 찾기 시작하여, 1995년 5월 14일, 겐뒨 최끼 니마(Gedhun Choekyi Nyima, 1989년 생)라는 6세의 남자 아이를 판첸 라마의 환생자로 인정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티베트 망명정부의 환생자 인정을 승인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환생자를 찾았다. 달라이 라마 14세에 의한 신 판첸 라마 인정 포고로부터 3일 뒤, 중국 정부는 겐뒨 최끼 니마와 그의 부모 및 형을 연행해 버리고 대신 6세의 소년 기트 노르브(Qoigyijabu, 1990년 2월 생)를 새로운 판첸 라마로 즉위시켰다. 기트 노르브의 부모는 모두 중국 공산당원이다.

중국 정부는 겐뒨 최끼 니마와 그 가족의 실종에 대한 의혹을 부정했으나, 1996년 5월 28일, 중국 당국에 의한 연행임을 인정했다. 겐뒨 최끼 니마와 그 가족은 중국령 내에 생존하고 있다는 정보는 있으나 여전히 생사불명이다. 중국 측은 그가 안전한 곳에 편안히 살고 있으며 자신이 판첸 라마와 같은 지위에 오르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하지만 글쎄(…) 암살당했다는 설도 있지만 이는 루머로 판명되었다.

2010년 3월, 중국 측에서 세운 판첸 라마 11세 기트 노르브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위원으로 정식 데뷔했다. 즉, 정치판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중국이 만들어 놓은 판첸 라마이니 만큼, 앞으로는 그가 친중국적인 입장을 대변하게 될 것이다.

2.3. 티베트 독립운동의 현재

2008 베이징 올림픽 직전 벌어진 티베트인들의 대규모 시위는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던 티베트 독립운동을 다시 불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티베트인들의 대규모 시위에 맞서 중국 정부가 군대를 동원해 무차별 유혈 진압에 나서자 국제 여론은 유례없이 악화되어 올림픽 보이콧 협박까지 받았다. 하지만 국제 정치의 동력이 언제부터 인도주의였던가? 당연히 각국의 립 서비스에 불과했다.

그러나 올림픽 성화 봉송 과정에서 티베트 지지 시위자들에 의해 성화 봉송 주자들이 습격당하는 일이 벌어졌고, 어느 성화 봉송 주자가 자신의 옷 소매 속에 티베트 국기(설산사자기)를 숨기고 있다가 성화와 같이 찍은 사진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가장 강력한 시위가 있었는데, 티베트 망명자부터 시작해 심지어 프랑스 의회 하원의원들까지 나서 시위에 참여했으며 결국 프랑스 경찰은 성화를 끄고 이들을 교도소로 보내기까지 했다. 한국에서도 티베트 독립 지지자들이 성화가 서울에 도착하던 날 덕수궁 앞에서 시위를 하였으나 수많은 중국인 유학생들로부터 구타와 돌, 금속너트, 스패너 세례 등을 받아 한때 외교 문제가 될 뻔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 경찰은 이에 대해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아 나노 단위로 까이고, 정부 역시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아 한국인들로부터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이것이 천안함 침몰사태연평도 해안 포격 사태 과정에서의 중국의 노골적인 북한 옹호로 결정적으로 터졌다. 일본에서도 티베트 독립 지지자들이 적극적으로 시위를 하며, 특히 도쿄에 도착하던 날 고쿄 앞에서 시위를 한 사실이 있다. 다행인 점은 일본에서는 다른 국가들과 달리 티베트 지지 시위자들이 별 문제없이 무사히 시위를 마쳤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일본 우익들이 중국인들을 강력히 막아내면서 이들을 정신적 및 물질적으로 많이 도와준다는 점.

하지만 티베트 독립의 가능성, 특히 달라이 라마 14세가 주창하는 비폭력 독립운동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사그러들지 않고 있다. 중국의 점령 기간이 점점 길어지고 국제 사회가 티베트 독립운동을 직접 돕는 등의 공세적인 정책보다는 중국의 현 세력권[31]을 인정하고 대신 팽창을 막는 쪽으로 돌아서고 있기 때문이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이에 '중도 정책'이라는 완전한 독립이 아니라 자치권 확대를 요구하자는 정책을 제시했고, 티베트 망명정부가 이를 망명 티베트인들을 대상으로 한 투표에 부쳐 보기도 했으나, 아직도 티베트 망명정부 안에서 무장독립운동 노선과 비폭력 노선 간의 노선 갈등이 크다. 하지만 티베트인들은 달라이 라마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양 측이 갈라설 정도는 아니며 일단은 무장 독립운동 노선이 달라이 라마에게 한 수 접고 들어간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자치권 확대든 비폭력 노선이든 간에 달라이 라마 14세를 인정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한다.

티베트 불교 카규파의 수장이자 티베트의 서열 3위인 카르마파 라마 17세는 중국의 탄압에 견디다 못해 지난 1999년 14살의 나이에 인도로 망명했는데, 달라이 라마와 함께 지내고 있다. 달라이 라마 14세가 나이가 많으니만큼, 그의 사후 리더십 공백을 우려하는 망명 티베트인들은 달라이 라마 14세가 어서 후계자를 지명하길 바라고 있으며, 현재는 후계자로 카르마파 라마 17세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다만 그와 별도로 카르마파 라마 17세가 과거의 라마들처럼 실권을 잡지는 못할 전망. 해방 이후를 생각한 것일 가능성이 크지만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망명 정부 내에서도 민주화를 추진중에 있다.

다만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티베트 지역에 대한 한족의 이주정책, 티베트인에 대한 강제 피임, 종교 활동 억압이 강해지고 있고, 특히 티베트-칭하이 노선의 칭짱철도(靑藏鐵路)가 깔리면서 점점 티베트 고유의 독자성이 퇴색되어 가고 있다. 다만 이것이 티베트인들 자신의 중국화로 이어지고 있지는 않은데다, 아직 인구 면에서 만만찮고 중국 자체도 고령화가 꾸준히 진행되는지라 티베트가 중국과 완전히 동화될 거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언젠가부터 티베트인들은, 승려는 물론이고 일반인들까지, 심지어 젊은이들과 청소년들까지도 분신자살로 중국의 식민지배에 항거하고 있다. 티베트 불교와 티베트인들의 영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비폭력을 가르치기에, 무장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분신자살로 항거한다나. 소년부터 아이 엄마까지… 끊임없는 티베트인 분신

2.4. 티베트의 역사와 현실을 아는 방법

국내에도 출판된 저서인 《티베트, 말하지 못한 진실》과 《달라이 라마가 들려주는 티베트 이야기》 그리고 《가둘 수 없는 영혼》을 참고하기 바란다. 특히 《티베트, 말하지 못한 진실》은 풍부한 자료와 정확한 출처까지 갖춘 명저이다.[32]

현대사는 아니지만 2011년 《티베트, 1만년의 이야기》가 우리나라에 번역되었는데 중국에서 편찬된 책이 맞냐 싶을 정도로 티베트에 대해서 중립적인 시각을 취하고 독립성을 인정한다. 다만 인민해방군의 '1950년 티베트 평화적 해방'을 기준으로 이야기를 끝냈다는 점. 내용도 탄탄하니 읽어볼 것을 추천.

만일 티베트 역사 전반을 좀 더 쉽게 알고 싶다면 한국인이 쓴《티베트 비밀역사》를 읽는 것도 나쁘지 않다. 문체가 읽기 편하고 저자가 중국에서 공부한 덕에 한국 내에서 접하기 힘든 중국이나 대만 쪽 사료를 많이 인용하여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사실도 알 수 있다. 단 저자 자신의 의견도 간간히 들어가 있으니 다른 티베트 관련 책도 읽으면서 교차검증하는 것이 좋다. 한편 티베트의 문화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티벳의 문화》을 읽어볼 것. 티베트 굴지의 명서로서 아직도 세계적인 인지도를 자랑하고 있으며 근대 티베트를 '직접 조사'해서 쓴 책이기에 신빙성 또한 높은 편.

2.5. 티베트에 대한 중국인들의 인식

절대 다수의 중국인들은 "티베트는 중국 고유의 영토"라는 중국 정부의 선전을 철썩같이 믿고 있다. 따라서 외국에서 티베트 문제를 언급하면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 미국유럽 같은 서방 국가들이 중국을 분열시키려는 음흉한 술책을 쓴다면서(…).

또한 티베트계들이 따로 살던 주변 다른 나라들[33]이 티베트 합병에 겁먹고 고민 끝에 차라리 인도가 낫다고 여겨[34] 인도와 합병하자, 중국인들은 이것을 비난하고 그 중 하나인 아루나찰 프라데시 주가 중국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티베트인 자체를 중국 한족보다 열등한 민족으로 보려는 시각도 존재한다. 한 예로 2008년, 미국에 유학 중인 중국인 여대생이 "나는 티베트 독립에는 반대한다. 하지만 티베트에는 여전히 가난에 시달리는 불쌍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의 복지와 인권을 돌보아 주어야 한다."라는 지극히 온건한 말을 했다가 수많은 중국인 네티즌들로부터 엄청난 인신공격을 당했다. 공포에 질린 중국인 여대생은 이사를 떠나고 말았다.

당시 중국인 네티즌들이 그녀를 비난했던 반응의 요지는 이랬다. "티베트는 공산당에서 원조를 많이 해주어서 풍족한 지역이 되었는데, 뭘 또 도우란 말이냐?"[35]

국내의 정치 사이트인 서프라이즈에서 활동 중인 모 중국인은 "티베트인은 평소에도 무기를 가지고 다니는 거친 족속이니, 엄하게 다루어야 한다."면서 중국 정부의 티베트 인권 탄압을 정당화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딴지일보에서 인터뷰한 어느 중국인 공무원은 놀랍게도 티베트 독립을 찬성한다는 말을 했다. 중국에도 티베트 독립에 대해서 긍정적인 사람이 극소수이지만 있기는 있다. 단, 그런 사람들의 목소리는 공개적으로 표출되지 못한다. 2008년 경, 중국 정부는 반국가분열법을 제정해서 "티베트와 위구르는 중국 고유의 영토이며, 이를 부정하는 자는 처벌하겠다"는 입장을 더욱 강경하게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중국에서 활동하는 외국인도 티베트 문제에 대해서 언급했다가는 중국 정부에 의해서 강제 추방이나 입국 금지 같은 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하니, 흠좀무. 반대로 위에서 보았듯이 외국에 있는 중국인도 중립적인 의견을 무심코 내뱉었다가 같은 중국인들에게 욕을 듣는지라 쉽사리 얘기를 꺼내기가 어렵다.

그 덕분에 부탄중국 식당을 찾아보기 어려우며 중국인 입국도 딴지를 거는 나라가 되어버렸다[36]. 더불어 이 나라는 인도에게 국방도 맡기면서 골수 친인도국가가 되어 중국을 견제하고 있다. 이 나라에선 중국인은 호시탐탐 티베트계라는 점 하나로 부탄을 잡아먹으려는 걸로 여긴다고 하며, 인도 측도 과거 티베트계가 살던 아루나찰 프라데시 주를 명백한 인도 영토로 여기며 이주를 권장한다. 그래서 중국과 인도는 이 지역을 두고 계속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다.

파룬궁 회원들에게는 적의 적은 우리편이니 같은 편이라는 입장인 듯. 때때로 해외에서 티베트 독립운동가들과 파룬궁 회원들이 연합하여 시위를 하는 광경을 볼 수 있지만,단지 립서비스일 뿐이고[37],파룬궁이 바란건 공산당해체지,중국 자체 분열이 아니다#.여담으로는 파룬궁은 중화민국 주도로 대륙 통일을 지지한다.#

즉 티베트에 대해서 아예 다른 시각적 접근 자체를 거부한다.

중국은 이에 대해 자신들은 다민족 국가이다, 즉 개별 민족들의 독립 요구를 다 받아줄 경우 나라가 쪼개어져서 더이상 하나의 중국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반박한다. 허나 당장 티베트도 그렇고 신강 위구르 자치구 에서도 독립 요구가 거세다. 중국 입장에서는 하나의 중국을 위해서 이러한 소수민족의 독립요구를 억누르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일단 위구르와 티베트를 빼고 나머지 소수민족들이 대부분 민족적, 언어적으로 중국에 한족화되었거나 티베트와 달리 거주하는 영토 면적들도 작고 독립하려는 의지가 없다.

3. 티베트로 가는 길

티베트로 가는 여행경로는 꺼얼무에서 라싸로 들어가는 청장공로(칭짱도로)나 철도(칭짱철도), 비행기만을 이용하게 되어 있다. 티베트의 경우 반드시 중국 비자 외에도 티벳입경허가서가 필요하며, 라싸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추가로 여행허가서가 필요하다. 대한민국 외교부에서는 여행자제로 명시하고 있지만, 라싸를 제외한 티베트의 모든 지역은 사실상 여행금지다.[38]

3.1. 칭짱철도

2006년에 라싸까지 개통한 전 세계에서 제일 높은 지역을 다니는 철도. 탕구라 고개(Tanggula) 일대 구간은 해발 5,072m으로 세계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철도 구간이다. 탕구라 역은 해발 5,068m. 당장 대한민국에서 제일 높은 추전역이 850m인 거 생각하면 6배 가량 더 높은 셈이다.

총 2,200km 가량 되는 구간 중 960km 가량은 영구동토를 가로질러서 질주한다. 티베트의 광활한 대지를 가로지르는 열차의 모습은 포풍간지. 워낙 고고도로 다니다 보니 이 구간에서 운행하는 디젤 기관차도 고고도 대비 특수장치가 적용되어 있으며[39] 객실에는 산소마스크가 준비되어 있다. 해발 4,000m 이상부터는 제한속도 80km/h로 간다. 이처럼 티벳은 워낙 고고도에 위치하기 때문에 여행전 운동으로 어느 정도 몸을 건강하게 만들고 가는 것이 좋다. 자칫하면 정말 고산증으로 죽을 수도 있다.

이 철도와 병행하는 칭짱도로가 같이 개통되어서 티베트로의 물자 수송은 정말 쉬워졌지만, 티베트에서 유혈사태 발생시 인민군의 개입이 좀 더 수월해졌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경부선 철도를 이용해서 진격하려고 했다는 점, 코레일 최대의 고객 중 하나가 바로 국군이라는 점을 감안해보자. 당장에 매주 금요일마다 연무대역을 통해서 쏟아져 나오는 신병들의 수송에도 무궁화호가 이용된다. 그래서 티베트 현지에서 칭짱철도 건설 반대운동이 심했으며, 달라이 라마칭짱철도의 완공이 티베트에 '문화적 대학살' 을 초래할 것이라며 비난했다.

1988년 티베트 소요사태 당시, 도로사정이 나빠서 인근 칭하이성과 쓰촨성 주둔 군대를 동원하지 못하자, 수천 km 밖의 난징군구에 주둔중인 공수부대를 투입해야 했다.

3.2. 칭짱도로

위의 칭짱철도와 병행 운행한다. 전에는 칭짱고속도로라고 되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한국의 88올림픽고속도로만도 못한 도로상태인 것 외에도 법상으로도 고속도로가 아니라서 칭짱도로로 수정되었다.[40] 철도보다 조금 더 고도한계가 높은데, 철도는 탕구라 고개를 5,000m에 턱걸이로 넘어 버리지만 도로는 5,200m까지 올라간다. 물론 이 도로에서도 삼보일배하며 라싸포탈라궁으로 가는 사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3.3. 쓰촨성 - 티베트 도로

미지의 도로. 쓰촨성 청두에서 서쪽으로 산을 타고 올라가서 라싸에 이르는 도로인데, 극악의 험난함을 자랑한다. 그래도 나름대로는 화물차도 제법 다니는 모양. KBS차마고도에 한 번 출연했었다. 삼보일배하면서 라싸로 가는 순례객들을 볼 수 있는 여러 도로 중 하나.

3.4. 신장 위구르 자치구 - 티베트 도로

쿤룬 산맥을 지나는 2개의 도로중 서쪽의 것인 219번 국도가 아크사이친을 통해 신장의 예청과 티베트의 라체를 잇고, 동쪽의 109번 국도가 라싸와 거얼무 사이를 잇는다. 도로는 2개밖에 없다.

4. 대중문화에서의 티베트

맥스 브룩스좀비 아포칼립스 소설 세계대전Z에서는 전 세계적으로 벌어진 좀비와의 전쟁 이후 중국으로부터 독립하여 티베트 인민 공화국이라는 나라를 세우게 된다. 사회주의 국가냐?[41]

티베트를 배경으로 다룬 작품으로는 브래드 피트 주연의 <티벳에서의 7년>과 달라이 라마의 일대기를 다룬 <쿤둔>이라는 영화가 있다. KBS에서 방영됐었던 다큐멘터리 차마고도도 티베트에 대해 다루고 있다.

<데프콘 한중전쟁>에서 나오는 티베트는 한국미국, 러시아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비밀리에 지원하는 바람에 반중 독립전쟁이 터진다. 무장한 시위대가 무장경찰부대를 사격으로 쓸어버리는 장면은 정말 끝내주는 장면. 중국의 진압부대를 체게바라식 전법으로 패퇴시키는 등 잘 싸우는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엔 한국중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에 따라 어느틈에중국에서 독립한다!

2004년 중국에서는 게임 하트 오브 아이언이 1930~40년대의 티베트, 신장, 만주독립국으로 묘사한 것이 역사왜곡이라는 이유로 발매금지되었다. 정작 만주국은 일제의 괴뢰국으로 나오는데도 이랬다.

영화 2012에서는 인류 최후의 보루 지역으로 나온다. 그 근처에 있는 초밍계곡에 방주를 만들고 있었던 것.

바람의 왕국이라는 라이트노벨 작품도 있다. 문성공주인 취란과 손쳄감포의 아들인 리짐과의 로맨스라고는 하는데, 문성공주 연대기 같은 작품이다. 작가는 모리 시우코. 한국에는 학산문화사에서 나왔으며, 현재 한국에서 출간된 권은 12권까지, 그외에는 연재를 하지 않는지 책이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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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대한민국 외교부 해외안전여행 기준에서는 여행자제라고 명시되어 있으나 라싸를 제외한 티베트의 모든 지역은 사실상 여행금지이다.
  • [2] 약칭 '걜루'라고 불리는 티베트 국가는 티베트 망명 정부에서 사용되는 국가로, 現 달라이 라마 14세의 스승이었던 트리쟝 린뽀체가 작사하였다. 곡은 오래전부터 사용되던 종교의식 곡에서 나왔기에 작곡가는 불분명하다. 중국이 침략하기 전의 국가는, 곡은 동일하나 가사는 장수를 바라는 노래로 영국의 국가 God save the Queen과 비슷한 느낌의 가사였다.
  • [3] 티베트의 특별한 수호본존인 관세음보살을 이른다.
  • [4] 정확하게는 라파스보다는 약간 낮은 해발고도이다. 볼리비아의 별명 중에 남아메리카의 티베트라는 별명이 있다.
  • [5] 인구 10만명 이상의 도시 중 해발고도 3,000m를 넘는 도시는 전세계에서 20개가 안 되며, 산소공기가 부족하여 고산병에 걸릴 수 있는 지역이라 저지대에 살던 사람들이 진출하기가 쉬운 곳은 아니다. 주권국가의 수도 중에 3,000m 위에 있는 수도는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뿐이다.
  • [6] 하이 성의 대부분과 쓰촨 성 서부, 윈난 성간쑤 성 일부 지역에 걸쳐 있다.
  • [7] 인터넷에 떠도는 기묘한 표정의 토끼 비슷하게 생긴 동물이 아니다.
  • [8] 티베트 망명 정부에서는 아예 이러한 논쟁을 피하기 위해 한자표기를 圖博(Tǔbó)로 하고 있다.
  • [9] 이 명칭이 고원을 뜻하는 튀르크어 Töbäd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 [10] 사실 꽤나 늦은 출발이다. 왜냐하면 이미 서부 일대에는 샹슝국도 있고 탕구라산맥 동부에는 숨파와 같은 부족연맹국가가 이미 등장했기 때문이다.
  • [11] 630년 즉위설도 있다
  • [12] 왕은 틀린명칭이다. 토번의 군주는 찬포(贊普)라는 고유명칭을 쓴다.
  • [13] 사실 문성공주 자체의 혼인은 당시 당나라에 큰 사건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누구와 어떤 관계인지도 관련이 없을 정도다. 간신히 강하왕 이도종의 종녀(宗女)라는 기록만 있을뿐이다.
  • [14] 사실 당태종공주를 시집보낸 건 토번이 3번째이다. 문제는 앞선 2번은 당나라가 상위의 입장에서 보냈기때문에 이것도 당나라 우위의 결혼일 가능성도 있다.
  • [15] 대조사(大照寺)라고도 한다. 문성공주가 세웠다.
  • [16] 다행히 라싸 지방의 당번회맹비는 아직 무사하고 조사도 가능하다.
  • [17] 하지만 티베트어중국어와 여러 가지로 비슷하다. 두 언어 모두 Sino-Tibet language family, 즉, 중국-티베트어족에 속한다. 이 어족은 한장어족이라고도 부른다. 티베트어에서 고대 중국어와 비슷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 [18] 그러나 극소수의 중국계 불교서적이 티베트어로 번역되었는데 그중에는 신라인으로 당에서 끝발을 날리셨던 원측스님의 책도 있다. 참고로 이 책은 중국, 한국에서는 이미 소실되었고 티베트어 본만 남아있다!! 한국중국불교학자들이 역으로 이 책을 번역하는 상황
  • [19] 승려 강제 결혼, 강제 사냥, 사원 및 불경 화형식…
  • [20] 단 이 당시 토번은 하나의 정치세력이 아니라 수십개의 지방세력이 할거해 있던 상태다.
  • [21] 일제강점기 때의 만주국 같은 개념
  • [22] 그리고 대부분 외국의 박물관(주로 북미유럽)으로 팔려나갔다(…)
  • [23] 꿈꾸는 돌, 정희재 역.
  • [24] 이 책을 보면 나오는 말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정도로 매우 잔인한 고문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이 책 외에도 궁리 출판사에서 나온 아마아데 著 《그래도 내 마음은 티베트에 사네》가 있다. 하지만 번역 수준이…
  • [25]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티베트의 무장 저항군은 1970년 무렵까지 티베트 변경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미국 CIA의 도움을 받아 중국군에 게릴라전으로 맞서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973년 미국닉슨 대통령이 중국과 국교 수립을 하면서 더 이상 중국에 대한 적대 정책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그에 따라 미국이 주는 도움도 끊겼다. 그 바람에 티베트 저항군들은 중국과 싸우다 전사하거나 인도로 망명, 티베트의 무장 항쟁은 끝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 [26] 이름부터 느껴지지만 주로 인도의 사회문제를 다룬 책으로, 티베트와는 한 파트를 제외하곤 하등 상관없는 책이다. 저자가 특별히 티베트에 관해 자세히 알고 쓴 책도 아니다.
  • [27] 현재 인도에 살고 있는 티베트인들은, 수도 라싸의 말을 표준어로서 배우고 사용한다.
  • [28] 알기 쉽게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면,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침략을 받은 조선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니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국왕에게 "어째서 너희들은 외국인 명나라에 도와달라고 하느냐? 그건 반칙이다. 조선일본 1대 1로만 싸워야지!"라고 트집을 잡는 것과 똑같은 병크다. 전쟁이 무슨 스포츠 경기인가? 1대 1 타령하게(…)
  • [29] 망명한 티베트 게릴라들은 인도 국경을 넘을때 검이나 활같은 고전무기는 일부 소지가 허가되었지만 총이나 폭탄같은 화기는 모두 인도 정부에 넘겨주었다.
  • [30] 현재 인도에 망명중인 생존 게릴라들과 그 후손등은 현재 게릴라 부대를 친목모임의 형태로 유지하고 있으며 종종 티베트 독립에 관련된 시위나 행동을 할때 부대의 군기를 게양하고 있다.
  • [31] 라오스, 캄보디아, 중앙아시아의 국가들이 대표적이다. 북한의 경우는 좀 애매하다.
  • [32] 단, 이 책의 경우 자료와 출처의 정확성과는 별개로 국내 번역본의 경우 1990년에 출판된 제3판에 기초하고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천안문 사태 직후 쓰인 책인 만큼 중국의 인권이나 경제 상황에 대한 묘사가 시대에 뒤떨어져 뒤떨어져 있는 부분이 있어 중국과 티베트의 현재를 이해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 새로운 번역본이 나오면 또 모르지만.
  • [33] 부탄이나 시킴이나 라닥같은 작은 왕조들은 대대로 티베트를 큰 형님 나라로 조공을 바치며 섬겨 왔다.
  • [34] 실제로 인도에 흡수된 이지역 주민들은 티베트인들보다는 실질적인 자치권을 누리고 있긴 하다.
  • [35] 사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티베트는 중국에서 풍족한 지역 중 하나였다. 물론 지금은 윈난과 간쑤, 구이저우와 더불어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중 하나이다. 지역 총생산은 중국 최하로, 원래 티베트의 암도 지역이었던 칭하이성의 절반도 안 된다.
  • [36] 부탄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양쪽 모두 외교관계가 없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 국제연합 회원국들 중에서 양쪽 모두 외교관계가 없는 나라로서는 유일하며, 부탄구호기사단을 제외하면 양쪽 다 외교관계가 없는 나라들은 다 미승인국들 뿐이다.
  • [37] 파룬궁들은 장쩌민관련 기사를 낼때 친일파 집안이라네,소련군 간첩 경력이 있었다네,파룬궁 탄압했네,천안문사태를 주도했네,땅팔아먹었네 뭐네 하면서 선전하는데,장쩌민의 티베트 탄압 관련 기사는 거의없다.
  • [38] 티벳입경허가서는 발급 절차가 까다로우며 그나마 안전한 지역인 라싸만 해도 단독여행이 금지되고 단체여행만 가능하다.라싸만 해도 이러한데 험악하기 짝이 없는 현재 티베트 지역 상황상 다른 지역은 어떠하겠는가? 게다가 라싸 외 지역은 다시 발급 절차가 까다롭기 그지 없는 여행허가서를 또 발급 받아야 하고 역시 일정 인원 이상의 단체여행만 가능하다.
  • [39] 2006년에야 철도가 개통된 이유 또한 기술적 문제로 객차마다 고고도 대비 특수장치를 만들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 [40] 실제 노선번호는 109번 국도이며, 티베트에 있는 실제 고속도로는 라싸 인근에 있는 공항고속도로가 전부이다. 지도, 라싸공항고속도로 시종점 스트리트뷰 참조
  • [41] 여담이지만 인민공화국이라해서 무조건 사회주의 국가가 된다하면 오산이다. 인민공화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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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3 10: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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