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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기군

last modified: 2015-01-15 14:39:03 by Contributors

팔기군(八旗軍)은 청나라의 군사제도이자 사회 계급의 일종이다.
청나라의 중앙군은 8개의 집단으로 구분되었으며 깃발의 색깔이 모두 달라서 팔기군이라고 한다. 깃발은 남색, 황색, 백색, 홍색 4가지 색을 가지며, 깃발 전체가 단색인 정람기, 정황기, 정백기, 정홍기와 깃발에 홍색 테를 두른(홍색 기는 백색 테) 양람기, 양황기, 양백기, 양홍기 총 8개 기가 있어 팔기라고 했다. 각 부대의 구분은 깃발로 했고, 깃발=부대가 되었다. 팔기군이라고 하기 때문에 청나라의 팔기가 8개의 군단으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로는 팔기만주, 팔기몽고, 팔기한군이 각각 8기로 이루어졌기에 총 24개로 구분되었다. 또한 청나라가 중국 대륙의 지배권을 획득한 이후에는 팔기 제도가 사회 계층 집단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기=군단으로 볼 수 없다. 전시에는 기 단위로 부대가 편성되었지만 실제 각 기에 속하는 기인들은 훨씬 넓은 외연을 가지고 있었다.

팔기군은 청나라의 시조 누르하치가 17세기 초에 설립하였다고 전하며 청나라가 중원을 통일한 후 청나라 제도의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팔기군중 상위 3개 깃발군(정황기, 양황기, 정백기)는 황제의 직속부대이고 나머지 5개의 깃발군은 여러 제후들의 관할이었다. 각 군단에 대한 지휘권을 누가 장악하느냐는 청나라 권력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최종적으로 청나라가 대륙의 지배권을 확보한 뒤인 옹정제 시기 팔기는 황제 아래에 모두 직속되었다.

팔기군은 1601년 누르하치가 만주족을 통일하고 각부족의 부대를 깃발로 구분하는 군단으로 재편한 것에서 출발한다. 이후 만주족이 몽골고원으로 진출하면서 몽골군도 이 시스템에 편입되었고, 이후 한족도 이 제도로 편입하였다. 이때 만주인으로 구성된 원조 팔기를 팔기만주라 호칭하며 몽골인은 팔기몽골, 한족은 팔기한군이라 칭했다. 청나라가 중국 대륙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다지기 전까지 팔기군은 상당히 개방적인 조직이었다. 위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처럼 만주인이 아니라도 팔기에 적극적으로 편입시켰다. 사르후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조선 원정군 포로들 또한 팔기의 일부로 편제되기도 했다.[1] 입관 이후 남명과의 싸움이나 삼번의 난 당시 한족 군대와의 싸움에서도 투항병이나 베이징 인근 거주 농민들을 적극적으로 팔기군 안으로 받아들였다.

삼번의 난까지 종결되고 중국대륙에 대한 청나라의 독점적인 지배권이 확립되자 팔기군은 새로운 인원의 유입이 차단되었으며 청나라가 중국대륙을 지배하는데 있어 지배집단으로서 기능했다. 여기에는 팔기 안에 포함된 몽골팔기[2], 한족팔기등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같은 한족이라도 팔기 소속 한인팔기와 일반 한족은 전혀 다른 신분이었다. 만주팔기가 팔기군 안에서도 서열은 확고했고 몽고팔기군이 그다음, 한족팔기 순으로 서열이 정해졌다. 전체적 인원에 있어 입관 당시 1644년을 기준으로 만주팔기가 40~45%가량을 차지하고 몽고 팔기군이 22%, 나머지가 한인 팔기군이었다.[3] 이후에 팔기군 인구가 늘어나면서 종종 한인팔기군은 한족으로 강등되었는데, 초기 입관 당시 화포나 수군을 담당하며 전투력에 있어 상당한 도움이 되었던 한인팔기군이 몽고나 만주출신에 비해 한족들 생활에 물들었기 때문에 18세기부터 "원래 한족이었으니깐 쟤넨 어쩔수 없다" 식으로 한인으로 강등되었다. 한군팔기 입장에서도 기적에 들면 오로지 군바리고 만주나 몽고팔기에 비해 대우도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몰래 장사를 하다가 적발되는 등 기적에 미련 없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지배집단으로서의 팔기군이 소멸하지 않게 하는 동시에 중국 대륙에 대한 지배력을 구석구석 침투시키기 위해 청나라는 팔기군을 각지에 파견-주둔하게 하면서도 동시에 일반 한족 피지배층과는 완전히 분리시켜 생활하도록 하였다. 당시 팔기군은 수도인 베이징에 거주하는 금려팔기와 각 지역 요충지에 주둔하는 주방팔기로 구분되었다. 청나라는 베이징 내성의 한족을 모두 몰아낸 다음 오직 금려팔기만이 베이징 내성에 거주할 수 있게 했으며 한족과 섞이는 것을 금지했다. 각지의 주방팔기들 역시 지방에 주둔하면서도 주둔지역에서 주방팔기의 거주지를 성벽을 이용해 철저히 격리하였다. 이는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팔기가 인구상으로 훨씬 많은 일반 한족들에게 흡수되지 않게 하는 장치가 되었다. 각지에 파견되어있던 주방팔기는 한족으로 이루어진 군대인 녹영과 함께 청나라의 주요한 군사력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청나라 후기에 들어 팔기군은 차츰 청나라 정부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물단지로 전락하였다.[4] 팔기군은 군사조직인 동시에 이민족에 의한 정복 왕조인 청나라의 중국 통치의 기반이 되는 지배집단이었기 때문에 결코 해체시킬 수가 없었다. 문제는 팔기군의 구성원은 기본적으로 직업군인이었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팔기군에게는 국가가 녹봉을 지급하였는데 팔기군의 전력이 심각하게 떨어져서[5] 실질적으로 군사력의 역할을 전혀 수행할 수 없는 상황[6]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배집단을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녹봉을 지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한족과의 동화를 막기 위해 다른 직업을 가지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문제가 더더욱 심각했다.

이처럼 청나라 군사력의 중핵이었던 팔기가 유명무실해지고 한족 지방군인 녹영마저도 그 질이 형편없이 하락하면서 그 결과 아편전쟁태평천국에서 청나라는 고전을 하게 된다.[7] 이때 호남성의 선비인 증국번과 그 제자 이홍장은 의용군을 모집하여 태평천국을 토벌하였고, 이후 이홍장이 실권을 잡자, 이 의용군을 기반으로 후에 청나라의 신군격인 북양군이 만들어진다. 그래도 유명무실하게 8기군은 존재했다고 하지만, 19세기 말의 청나라의 주력은 북양군이었다. 그리고 이 북양군의 지휘관들이 후에 중국 군벌의 시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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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베트남 하노이 부근의 응옥 호이(玉回) 마을에는 낌(金)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청나라 군대를 따라 왔던 조선인들의 후예라고 주장하고 있다. 베트남 혁명 시기에 족보가 다 사라져 확인할 길은 없지만, 18세기 말 레 왕조를 무너뜨린 떠이 썬 출신 삼형제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20만 팔기군에 포함됐던 이른바 '조선 팔기'의 병사 중 일부가 포로로 잡혀 정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출처: 최병욱 <동남아시아사>)
  • [2] 나중에는 군마 부족이 심해질 때 몽골 팔기가 실질적인 청나라의 기병부대가 되었다.
  • [3] 마크 C. 엘리엇 <만주족의 청제국>
  • [4] 청나라가 안정되면서 팔기군은 원래의 임무를 잊어버리고 향락에 빠져들었다.
  • [5] 백련교 반란군이랑 태평천국 반란군을 진압하지 못해 지역에서 모집한 상승군으로 진압해야 했다.
  • [6] 팔기군은 기병이어야 되는데 군마 부족이 심각해진 나머지 몽골팔기를 제외한 다른 팔기군은 군마가 없어서 보병으로 싸워야 하는 안습의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 [7] 심지어 농민 폭동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고 고전했다. 농민군이 태평천국군이랑 백련교도보다 무장의 질이 형편없는데도 진압 못한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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