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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왕의 난

last modified: 2015-04-08 20:39:47 by Contributors

八王之亂

Contents

1. 개요
2. 배경
2.1. 막장을 달리는 서진의 사회상
2.2. 종실 번왕들의 권력 비대화
3. 전개
3.1. 서막 : 바보 황제와 외척의 전횡
3.2. 전반 : 가남풍의 유혹
3.3. 중반 : 나대는 놈 족치기
3.4. 후반 : 사마월의 승리
3.5. 종막 : 하지만 영가의 난
4. 사건 정리
4.1. 정리
4.2. 팔왕
5. 기타 창작물에서

1. 개요

서진을 말아먹은 일련의 내란. 사건의 중심에 있던 종실왕들이 모두 8명이라고 해서 팔왕의 난 되시겠는데, 자기가 짱을 먹겠다고 황족들끼리 아귀다툼을 벌이는 바람에 서진은 완전히 국가 막장 테크를 탔고, 곧이은 흉노의 침공으로 중원을 상실하게 된다.

2. 배경

2.1. 막장을 달리는 서진의 사회상

삼국시대위나라를 멸망시키고 황제가 된 서진의 무제 사마염은 재위 전기에는 그럭저럭 명군이었다. 위나라의 '각박하고 사치스러운' 법가적 질서에서 한나라 시절의 '인자하고 검소한' 유교적 질서로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설정한 그는 간관(諫官)을 설치하여 직언을 받아들이고, 삼년상을 꿋꿋이 치르거나 사치스러운 모피코트를 그 자리에서 태워버리는 등 나름대로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사마염은 정작 사치의 중심에 있는 귀족 사회를 관리하는 데에는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근본적으로 사마씨는 구품중정제로 구축된 귀족 사회의 일원이었고, 또한 조씨를 밀어내고 집권하는 과정이 너무나도 탈법적이었기 때문에 그 권위가 귀족들보다 나을 게 없었던 것이다.[1]

그러다 보니 위나라 말의 각박한 법가적 질서는 와해되었지만, 이를 보환하기 위하여 강조했던 유교 질서는 진 왕조 건국 과정의 근본적인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여, 사회 윤리적인 기능을 상실하고 형식만을 강조하게 되었다. 윤리 의식의 부재로 권력층은 부패와 사치에 빠져들었고, 권력에서 소외된 지식인들은 도교적 청담 사상에 몰두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사마염 자신마저도 삼국통일을 성취한 뒤 곧장 개념을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리고 사치향락에 빠져들었으니, 황제가 이렇게 솔선수범(?)을 보이는 상황에서 서진의 사회 분위기는 가히 소돔고모라의 동양 버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사마염은 남자의 로망 1만 궁녀 하렘물을 현실에 강림시키기도 하고, 사마염의 사위 왕제명동에 경마장낙양 한복판에 목장을 차린다거나, 왕개석숭의 돈지랄 레이스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지?

더군다나 이 시기 중국의 환경은 극심한 자연재해가 거듭되면서 또한 막장을 달리고 있었다. 이렇게 경제 기반이 붕괴되어가는 마당에 석숭과 같이 정권을 잡은 소수 귀족들에게 극단적으로 부가 집중되는 양극화 현상은 정권에서 소외당한 중소 귀족들의 불만이 축적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나도...나도 돈지랄 할 거야!

2.2. 종실 번왕들의 권력 비대화

더욱이 사마염은 또 다른 문제를 쌓아놓았다. 앞서 는 지나치리만큼 황족을 견제하고 공신들을 위주로 국정을 운영했다. 단적으로 조비자신의 동생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살펴보면 견적이 나온다. 이때문에 황제가 신하들의 세력 조율에 실패하면 황권이 그대로 삼켜질 수 있었고 기반이 불안했던 조비의 손자 조방에 이르러 황족 가운데 가장 큰 권력을 가지고 있던 조상사마의의 쿠데타로 숙청당하고 호족출신 공신들이 사마씨에게 붙으면서 황제는 허수아비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전례를 답습하지 않기 위해 사마염은 황족들의 권력을 비약적으로 강화시켰다. 지방의 번왕으로 책봉된 황족들이 임의로 휘하의 관리를 임명할 수 있게 했고, 더불어 각 번왕에게 지방의 도독직을 겸임시키거나 적게는 1천에서 많게는 5천에 달하는 병력을 거느리게 함으로써 군권까지 쥐어주었다. 그러면서도 통일 이후 재분열을 막기 위해 지방의 도독직과 자사직을 분리시키면서 번왕의 권력을 통제할 수단은 오직 황제의 권위와 중앙의 군부만이 남았다.

이것은 당연하게도 황통을 지닌 사람이 행정권에 군사권까지 가지고 할거한 형국이 되었다. 황족들이 지나치게 큰 권력을 가지게 됨으로써 황족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할 경우 내분의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 것이다. 그래도 사마염 생전까지는 억지행동과 돈지랄을 통해서나마 황제의 권위가 그런대로 유지되었고, 귀족들의 연합에 의한 중앙 군부도 일단 건재했기에 그럭저럭 종실왕들을 통제할 수 있었다.[2]

하지만 사마염 다음으로 즉위한 것이 제대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백치 황제 사마충이었고, 이를 틈타 외척 세력이 전횡을 일삼기 시작하면서 중앙 군부도 황제의 제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자 지방에서 군권을 잡고 있던 종실왕들은 점차 황제의 권력과 자리를 탐내기 시작했고, 여기에 정권에서 소외당한 중소 귀족들이 영합하면서 결국 모종의 사건으로 분쟁은 폭발하게 된다.

3. 전개

3.1. 서막 : 바보 황제와 외척의 전횡

12월에 황후의 아버지인 진군장군 양준을 거기장군으로 삼고, 임진후(臨晉侯)로 책봉하였다. 상서 저략(褚略)과 곽혁(郭弈)이 양준은 그릇이 작아 국가의 중책을 맡기에 불가하다고 하였으나, 황제가 따르지 않았다. 양준이 교만해져 남을 업신여기고 스스로 우쭐거리니, 호분이 양준에게 말하였다.
"경은 딸을 믿고 더욱 거만하게 구는구려! 앞 시대의 일들을 두루 살펴보면, 천자의 집안과 혼사를 맺고 집안이 멸망하지 않은 일이 없었소. 단지 이르거나 늦거나 했을 따름이오." ─ 자치통감, 함녕 2년(276)

서진의 무제 사마염은 처음 양염(楊艶)을 황후로 삼았고, 양염이 죽자 다음에는 그 사촌인 양지(楊芷)를 황후로 삼았는데, 이렇게 연속으로 두 명의 황후를 내면서 안 그래도 명문귀족이던 양씨 일가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가 되었다.[3] 이후 사마염이 삼국을 통일한 뒤 개념을 안드로메다로 보내고 풍악을 울려라 테크를 타기 시작하자, 양지의 아버지와 그 형제들인 양준·양요·양제 삼형제는 명실공히 권력의 핵심이 되어 전횡을 일삼으니 사람들은 이들을 삼양(三楊)이라고 불렀다.

여기에 사마염의 태자 사마충이 무능하다 못해 정신장애가 의심될 정도의 바보인지라 사마염은 작은아버지인 여남왕 사마량과 사돈인 개국공신 위관을 중용해서 양준을 견제하고 사마충을 보좌하도록 안배를 해 두었지만, 사마염이 병석에 드러눕자 양준은 곧장 손을 써서 사마량을 허창으로 전출보내고, 뒤이어 위관의 아들이 술주정이 심하다며 헐뜯어서 시집간 공주의 혼인을 파기하도록 여론을 몰아 위관이 버로우를 타게 만들었다.

골골거리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사마염은 이러한 양준의 전횡에 놀라 사마량이 양준과 함께 섭정하라는 유조를 내리지만, 양준은 중간에 유조를 빌려가서 배째라며 안 돌려줬고(...) 결국 사마염이 다시 혼수상태에 빠지자 황후 양지가 사마염을 대신해 양준에게 섭정을 맡기는 조서를 내렸다. 이윽고 사마염이 죽고 사마충이 즉위하자, 양준은 황궁에 들어앉는 한편 아직까지 허창으로 내려가지 않고 있던 사마량이 내란을 꾸민다고 몰아세워서 허창으로 도망치듯 내려가게 만들었다.

3.2. 전반 : 가남풍의 유혹

양준의 전횡으로 불만이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 가남풍은 밀사를 보내 사마충의 이복동생 초왕 사마위에게 양준을 주살하라는 명을 내린다. 초왕 사마위는 얼씨구나 하고 양준과 양씨 일족을 싹 쓸어버리고 중앙에 입성하나, 가남풍은 의도적으로 사마위를 배제하고 사마량과 위관을 다시 중용한다. 이에 사마위가 불만을 품자 가남풍은 다시 사마위에게 밀사를 보내 황제의 명이니 사마량과 위관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안그래도 부글부글 끓고 있던 초왕 사마위는 한달음에 사마량과 위관을 제거해 버린다. 사마위는 스스로 공을 세웠다고 떠들고 다녔고 특히 명망 높은 노신들로서 신하들과 백성들의 신임을 얻고 있던 두 사람이었기 때문에 범인을 색출하자는 여론이 높아졌다. 결국 가남풍은 여론을 반영하고 토사구팽으로 사마위를 처형했다.

간단히 말해 가남풍이 초왕 사마위를 이용해 정적들을 전부 제거하고 초왕 사마위까지 제거했다. 당연히 권력은 가남풍 손으로… 계획대로. 사실 사마유 독살사건도 가남풍이 한 짓이라는 설도 있다. 이후 가남풍이 전횡을 저지르자 각지에서 권력을 잡고 있던 사마씨들의 불만은 날로 높아진다. 여기서 가남풍이 실책을 저지르는데 혜제 사마충의 아들 황태자였던 사마휼은 똑똑해서 자신의 권력에 방해가 될까 봐 지나치게 견제하여 죽이려 했다. 사마위는 일단 지은 죄가 있었으므로 문제가 안됐지만 가남풍이 다른 사마씨도 죽이려 든다는 것이 알려지자 지방 각지에서 권력을 잡고 있던 사마씨들이 분개하였는데 이 중 조왕 사마륜[4]이 가장 크게 반발했다. 그러나 사마륜은 다른 꿍꿍이가 있었기 때문에 정작 사마휼을 구하려 들지는 않았고 결국 사마휼은 가남풍이 보낸 사람이 건넨 독약을 거절했다가 결국 약 찧는 절구에 맞아 죽게 된다.

3.3. 중반 : 나대는 놈 족치기

조왕 사마륜은 드디어 속셈을 드러내어 제왕 사마경[5]과 함께 낙양으로 진군해서 가남풍과 그 일족을 멸족하고 권력을 잡는다. 그런데 혜제 사마충을 뒤로 몰아내고 사마휼의 아들 사마장을 죽였다. 게다가 사마장의 형 사마반과 동생 사마상은 요절하여 사마충과 사마휼의 대는 확실히 끊긴다. 조왕 사마륜은 스스로 황제로 즉위했지만 제왕 사마경 - 장사왕 사마예 - 성도왕 사마영 - 하간왕 사마옹이 연합하여 축출당하고 살해당한다. 권력을 잡은 제왕 사마경은 사마륜과 똑같이 자기가 다 해먹으려다가 사마륜이 죽은 것처럼 사마예, 사마영, 사마옹의 손에 죽는다.

그리고 장사왕 사마예는 애가 멍청한건지 욕심이 큰 건지(...) 앞에서 둘이나 그렇게 죽은 걸 보고서 똑같이 해먹으려다가 성도왕 사마영, 하간왕 사마옹의 손에 죽는다.

또한 이 시기부터 지방 주둔군 외에도 국경 주둔군이나 이민족까지 동원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진다. 따라서 이 때부터 사실상 서진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리기 시작한다. 이것은 사마염이 천하통일 후 지방 주둔군을 감축하여 지방의 통제력을 상실하기 시작한 사태가 심화된 현상이었으며, 결국 이민족의 침입으로 서진의 멸망의 시작이 된다. 참고로 이 시점에 이르면 이제 25명에 달하던 사마염의 아들들 가운데 살아있는 사람은 사마영, 사마치, 사마안 고작 셋 뿐이었다.(...)

3.4. 후반 : 사마월의 승리

중앙에서 이 난리가 일어나고 있으니까 일족끼리 이게 무슨 짓이냐며 예장왕 사마치와 동해왕 사마월이 군대를 이끌고 성도왕 사마영의 본거지인 업으로 진군한다. 비록 첫 거사는 실패하고 사마월은 봉국으로 패퇴했지만, 동해왕파인 유주자사 왕준(王浚)과 병주자사 사마등(司馬騰)이 탁발부를 비롯한 여러 선비족을 거느리고 사마월을 밀어주면서 다시 대립구조가 서게 되었다.

  • 성도왕 사마영, 하간왕 사마옹 + 장방 ← 흉노족
  • 동해왕 사마월, 예장왕 사마치 + 유주자사 왕준, 병주자사 사마등 ← 선비족

이에 성도왕 사마영은 유연의 흉노족을 끌어들여 자신의 본거지인 업을 지키지만, 정작 사마영 자신이 지레 겁먹고 낙양으로 튀어버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막장으로 치닫는 중원의 형편을 생생히 목격한 유연은 업을 빠져나온 뒤 흉노족을 끌어모아 독립을 선언하고 한(漢)나라를 세워 병주자사 사마등과 대립하면서 영가의 난의 씨앗이 뿌려진다.

혜제를 끼고 낙양의 장방에게로 달아났던 성도왕 사마영은 다시 장안으로 옮겨갔다가 하간왕 사마옹의 배신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사마옹은 예장왕 사마치에게 황태제의 자리를 양보하고 사마월을 자신과 동격으로 올려놓는 등 타협의 제스처를 보이지만, 사마치와 사마월은 장안을 함락한 뒤 낙양으로 환도하고 사마옹은 죽여버렸다. 이와 동시에 혜제가 사망하면서 둘은 합의를 통해 예장왕 사마치가 황제에 위에 올라 회제가 되고, 동해왕 사마월은 권력을 잡고 회제 사마치를 돕기로 하여 일단 6년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은 일단락된다. 여기까지가 팔왕의 난이다.

3.5. 종막 : 하지만 영가의 난

그러나 이것은 중국 역사상 유례없는 혼란기의 서막에 불과한 이벤트였다. 이 막장극을 보고는 "한족 놈들 별거 아니구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이민족들이 사방에서 발호하기 시작했고, 흉노를 규합한 유연의 아들 유총이 남하하면서 그 부하 석륵, 왕미, 유요 등이 화북 각지를 휩쓸고 다니기 시작했다. 이미 서진의 지방 통치는 와해되었기에 실권자인 동해왕 사마월이 중요 지점에 자신의 친인척을 파견해서 거점을 장악하게 하는 등 고군분투했지만 그 와중에 사마치가 반역을 의심하자 동해왕 사마월은 분사했다.

사마월의 뒤를 이어 대권을 잡은 태위 은 낙양에서 탈출하기 위해 사마월의 장례를 위해 동해로 간다는 핑계로 낙양을 떠났다. 한마디로 말해 황제를 버린 셈이다. 그런데 피난민들과 낙양 주둔군이 대거 그의 도망에 합류하여 무려 10만명에 달했다. 그러나 이미 낙양 주변은 흉노의 놀이터가 된지 오래라 해당 지역을 담당하는 석륵이 왕연 일행을 중간에 기습했고 이들은 사로잡히거나 모두 죽었다. 사로잡힌 왕연 등도 결국 밤에 일부러 무너뜨린 담장에 깔려 죽었다. 문제는 그나마 없는 낙양 주둔군이 엄청나게 줄어들었으며 지방 주둔군은 사마염의 감축과 여태까지 팔왕의 난으로 인한 소모로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물론 지방을 장악한 군벌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도 자기 코가 석자인 경우가 많은데다가 굳이 수도인 낙양을 구원할 이유도 없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군대 없는 국가가 돼버린 꼴이다.

이 어처구니 없는 팀킬로 낙양은 유총이 보낸 유요, 석륵, 왕미, 호연안 등의 한족, 흉노족 연합군의 공격으로 무너졌고 동탁이 파괴한지 100여년 만에 또 다시 파괴되어 폐허가 된다. 이 흉노의 침입을 '영가의 난'이라 하며 사마치는 체포되어 유총에게 끌려갔다가 결국 죽음을 당한다. 그리고 뒤를 이은 민제 사마업도 사로잡히고 죽으면서 결국 서진은 멸망한다.

이 후 화북 지방은 여러 민족이 난립하는 혼란기가 도래하고 장강 이남은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을 거치면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서진 황족이자 낭야왕 사마[6]가 과거 오 지역을 근거로 하여 동진의 건국을 선포한다.

4. 사건 정리

4.1. 정리

  • 291년
    양준 VS 사마위 + 가남풍
    사마량 + 위관 VS 사마위 + 가남풍
    사마위 VS 가남풍

  • 300년
    가남풍 VS 사마륜 + 사마경
    사마륜 VS 사마윤[7]

  • 301년
    사마륜 VS 사마경 + 사마예 + 사마영 + 사마옹

  • 302년
    사마경 VS 사마예 + 사마영 + 사마옹

  • 304년
    사마예 VS 사마영 + 사마옹

  • 306년
    사마영 + 사마옹 VS 사마치 + 사마월


그러니까, 291년 이래로 대략 한 놈이 나댐 → 나머지가 합동으로 조짐 → 그 가운데 한 놈이 나댐 → 나머지가 합동으로 조짐 → 그 가운데 한 놈이 나댐 → 나머지가 합동으로 조짐루프물 테크를 탄 걸 알 수 있다.(...) 참 쉽죠? 그놈이 그놈 고만해 미친놈들아

4.2. 팔왕

8KingBattle.jpg
[JPG image (43.36 KB)]

8왕의 분봉지. 하지만 성도왕처럼 분봉지와 실제 병력을 가지고 지배한 지역이 다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아서 큰 의미는 없다. 책봉된다고 반드시 부임하는 것도 아니고. # 출처

일련의 사건을 주도한 종실왕과 그 활약상(...)은 다음과 같다.

  • 여남왕(汝南王) 사마량(司馬亮)
    • 선제 사마의의 5남, 무제 사마염의 숙부.
    • 황실의 가장 큰 어른으로 양준이 죽은 뒤 자동으로 정권을 인수받았다가 사마위에게 살해되었다. 사실 이 사람은 난을 일으킨 게 아니라 모살당한 것이므로 팔왕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 초왕(楚王) 사마위(司馬瑋)
    • 무제 사마염의 5남.
    • 여남왕을 주살했지만 그 자신도 가남풍에게 주살당했다.
  •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
    • 선제 사마의의 9남, 무제 사마염의 숙부.
    • 가남풍을 주살했지만 결국 황제에 올랐다가 사마경 등에게 주살당했다.
  • 제왕(齊王) 사마경(司馬冏)
    • 제헌왕 사마유의 아들, 무제 사마염의 조카.
    • 거점은 허창(許昌)으로 조왕을 주살했다.
  • 장사왕(長沙王) 사마예(司馬乂)
    • 무제 사마염의 16남.
    • 거점은 낙양(洛陽)으로 조왕과 제왕을 주살했다.
  •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
    • 무제 사마염의 6남.
    • 거점은 업(鄴). 조왕, 제왕, 장사왕을 순서대로 주살했다.
  • 하간왕(河間王) 사마옹(司馬顒)
    • 사마방의 3남 안평헌왕 사마부의 손자, 태원열왕 사마괴의 장남, 무제 사마염의 6촌.
    • 거점은 장안(長安). 역시 조왕, 제왕, 장사왕을 순서대로 주살했다.
  •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
    • 사마방의 4남 사마욱의 손자, 고밀문헌왕 사마태의 차남, 무제 사마염의 6촌.
    • 최후의 승리자로 성도왕과 하간왕을 주살했다.

  • 팔왕에 들어간 여남왕 사마량보다는 예장왕 사마치가 팔왕에 들어가는 것이 더 합당하다. 단지 사마치가 즉 3대 황제 회제가 되었으므로 황제의 예후상 팔왕에서 빠진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역사서에서 지목하는 여남왕 사마량은 단지 초왕 사마위에게 살해당했을 뿐이지만 사마치는 사마월과 함께 팔왕의 난에 가담하여 성도왕과 하간왕을 주살한 인물이다. 사마치가 황제로 즉위하여 공식적으로는 팔왕의 하나로 분류하지 않는다고 하나 그의 행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일부 역사서에서도 그가 팔왕의 난을 일으킨 인물 중 하나임을 명시하고 있다. 뭐, 사마윤(允) 같은 경우에는 아예 무시당하는 상황인데 뭐...

아래는 팔왕의 난과 관련된 주요 인물의 간단한 계보도.

고조 선황제 사마의세종 경황제 사마사제헌왕 사마유제무민왕 사마경
태조 문황제 사마소세조 무황제 사마염효혜황제 사마충민회태자 사마휼
진헌왕 사마간효민황제 사마업[8]
초은왕 사마위
장사려왕 사마예
회남충장왕 사마윤
성도왕 사마영
오경왕 사마안사마업[9]
효회황제 사마치[10]
사마유[11]
여남문성왕 사마량
낭야무왕 사마주낭야공왕 사마근중종 원황제 사마예[12]
조왕 사마륜
안평헌왕 사마부태원열왕 사마괴하간왕 사마옹
동무대후 사마규[13]고밀문헌왕 사마태동해효헌왕 사마월

서진이나 이들의 뻘짓 덕분에 국방력이 쪼그라드는 바람에 통일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이민족의 침략과 혼란으로 이후 수백년간 다시 고통받게 될 서진 백성들 입장에서 보면 한마디로 압축해 천하의 개쌍놈들 동족끼리 진짜 잘하는 짓이다.-_-

사마염을 중심으로 불과 7촌 이내 사람들끼리[14] 서로 죽고 죽였으니 나라가 폭싹 망하는 건 당연지사.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란 말을 엄청난 스케일과 엄청난 퀄리티로 정말 완벽히 실천했다.(...) 이 또한 가히 대륙의 기상이라면 기상이다. 더 편하게 생각하면 사마의의 부친인 사마방의 손자~현손자끼리 치고박고 싸운 거다.

오죽하면 촉한정통론이 두각을 나타낸게 촉에 맞선 위를 이은 국가란게 이 모양이라서 그렇단 얘기가 나올 정도다(...).

그런데 옆 나라에 이런 게 있는데 굳이 한국사를 소재로 해서 막장 을 만들 이유가 없지 않나... 하지만 사극 작가들은 공부를 안하잖아? 안될거야 아마 [15]


5. 기타 창작물에서


네이버 카페 삼국지 도원결의의 유명 회원 중 한 명은 삼국지 11의 시나리오를 개조해서 팔왕의 난을 배경으로 만든 바 있다. 당시 팔왕의 각 세력을 하나의 세력으로 등장시켜 재미를 높이는 한편, 익주자사 나상이나 양주자사 장궤 등도 독립세력으로 등장시켜 두고 흉노의 유연, 선비족의 모용외, 저족의 부홍 등 훗날 영가의 난의 주인공이 되는 이민족 세력도 설정해두어 상당한 퀼리티를 자랑한다. 참고로 이 팔왕의 난 시대 이후의 사건인 영가의 난도 만들어 놓았다.
2014년 12월 3일 이 시나리오를 다시 손봐서 무장수 551명의 팔왕의 난 시나리오를 다시 만들엇다. 사마충의 경우에는 무장수가 무려 108명이나 된다. 심지어 이 무장들이 죄다 열전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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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조비 역시 헌제를 핍박하여 황제가 되었지만 그래도 헌제에게 위해를 가하진 않았다. 그러나 사마소가충을 앞세워 조모를 진짜로 죽여버렸다. 동진의 명제 사마소도 '우리 선조가 한 짓을 보니 서진이 오래가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되고 이 나라도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라며 동명이인을 디스 한탄했다.
  • [2] 다만 사마염은 일단 황제이긴 했지만 가부장권으로 사마씨를 통제하는 것이 어려웠다고 보기도 한다. 창업군주인 조조에게 직접 후계자로 지목되었고 조조의 장남으로서 가부장적 권위를 이어받아 가졌던 조비와는 달리, 사마염은 실질적인 창업군주인 사마의의 손자이며, 장남인 사마사의 자손이 아니라 차남인 사마소의 자손이라는 약점이 있었다. 이 때문에 사마염은 조비와는 달리 자신보다 항렬이 높은 숙부들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 [3] 삼국지에서 계륵의 고사로 유명한 양수가 바로 이들의 증조할아버지다. 그 아버지인 4대조 양표, 5대조 양사, 6대조 양병은 모두 태위를 지냈고, 7대조 양진은 사도를 지냈으니 이 정도면 그 유명한 원씨 일족과도 맞먹는 명문가. 여기에 외척까지 되었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4] 사마의의 아들이자 사마소의 이복동생으로 백부인 소생이다.
  • [5] 사마유의 아들
  • [6] 낭야왕 사마주의 손자
  • [7] 사실 팔왕의 난 가운데 유일한 방어 성공 케이스지만... 그렇기 때문에 묻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다른 왕을 죽인 적이 없는 사마량은 위관과 함께 정권을 장악한 적이 있지만 사마윤은 정권을 장악한 적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패자는 말이 없다
  • [8] 제4대 황제. 영가의 난으로 낙양이 무너지고 서진이 망했어요 상태가 되자 장안의 임시정부에서 황제로 추대되지만, 역시 얼마 못가 망했어요. 이로써 서진은 완전히 망했어요.(...) 그만해
  • [9] 백부 사마간의 양자가 됨.
  • [10] 제3대 황제. 8왕의 난을 수습하고 황제로 즉위하지만, 얼마 못 가서 영가의 난으로 낙양이 무너지면서 망했어요.
  • [11] 백부 사마사의 양자가 됨.
  • [12] 제5대 황제. 낙양이 무너지면서 회제가 잡혀 죽고, 장안이 무너지면서 민제까지 잡혀 죽자, 건업에서 새로이 황제로 즉위한다. 이것이 동진의 시작.
  • [13] 사마규(馗)는 사마욱(旭)이라고도 한다.
  • [14] 7촌이 멀어 보이는가?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손자와 당신 사촌의 아들이 정확히 7촌간이다. 현대 핵가족 사회에서 7촌은 아주 멀게 느껴지지만 친족관계가 밀접했던 고대 사회에서는 매우 가까운 관계이다.
  • [15] 남의 나라 역사 특히 막장 시대는 함부로 다루기 어려운 소재이다. 삼국지는 애초에 삼국지연의라는 문학작품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에서 다룰 수 있던거고. 당장 중국이나 일본에서 원 간섭기의 막장스러운 고려의 역사를 엄청 고증 잘 해서 사극으로 만들었다고 해보자. 칭찬이 나올까 욕이 나올까. 실제로 연개소문(드라마)의 경우 수나라 황실의 막장극을 표현했다가 중국의 항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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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08 20:3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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