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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유잉

last modified: 2015-03-24 23:43:35 by Contributors


이름 Patrick Aloysius Ewing
생년월일 1962년 8월 5일
213cm
체중 109kg
출신학교 조지타운 대학교
포지션 센터
드래프트 1985년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
뉴욕 닉스에 지명
역대 소속팀 뉴욕 닉스(1985~2000)
시애틀 수퍼소닉스(2000~2001)
올랜도 매직(2001~2002)
등번호 33번, 6번
수상내역 1986 Rookie of the Year
All-NBA First Team 1회
All-NBA Second Team 6회
NBA All-Defensive Second Team 3회
NBA All-Rookie First Team
1984 NCAA champion
1984 NCAA Tournament Most Outstanding Player
1985 Naismith College Player of the Year
1985 Adolph Rupp Trophy

뉴욕 닉스 영구결번
No.33

1986년 NBA 올해의 신인상
마이클 조던 패트릭 유잉 퍼슨

Contents

1. 개요
2. 어린 시절
3. 호야스의 파괴자
4. 뉴욕으로의 입성
5. 뉴욕의 왕
6. 갱스터의 결성, 그리고 조던. 조던. 조던.
7. 유잉 VS 올라주원, 그리고 내리막길
8. 사실상 마지막이었던 우승 도전의 기회. 그러나...
9. 기적의 8번 시드, 기적의 파이널행
10. 마지막 불꽃, 그리고 쓸쓸한 은퇴
11. 플레이스타일
12. 이것저것

1. 개요

전 NBA 선수. 90년대 4대 센터의 한 명이자, 비록 우승은 못했지만 월리스 리드의 뒤를 잇고, 모든 뉴욕시민들이 사랑했던 8~90년대 뉴욕 닉스의 심장. 별명은 뉴욕의 왕(The King of New York), 동부의 야수(The Beast of the East), 호야스[1]의 파괴자(The Hoya Destroya.) 등이지만, 널리 알려진 별명은 킹콩[2], 그리고 한국 한정 고릴라[3] 여담으로 콧구멍 사이즈가 그야말로 웅장하다. 오백원짜리 동전도 족히 들어갈만한 사이즈이다.

NBA 원년팀으로 2015년 현재 69년째를 맞는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닉스를 거쳐간 수많은 선수들 중 블래처리포트가 선정한 역대 최고의 닉스 선수로 꼽혔다. 블래처리포트 외에도 다수의 매체에서 역대 닉스 선수들 랭킹을 꼽았으나 절대로 Top 3에서 빠지지 않는 선수.

2. 어린 시절

독특하게도 그는 레게의 고향인 자메이카의 킹스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농구보다도 크리켓과 축구를 하며 자라났지만, 12살에 가족들이 미국 매사추세츠로의 이민을 결정하게 되면서 그는 미국에서의 삶과 동시에 농구와의 만남을 시작하게 된다.

3. 호야스의 파괴자

농구를 시작한 이래로 고등학교 시절에 이를 즈음에 이미 그는 엄청난 덩치를 자랑하는 선수가 되어 있었다. ESPN Sports Century 유잉편에서 한 기자의 회상에 따르면 유잉이 얼마나 압도적이었던지 다른 팀 선수들은 "불공평하잖아.너넨 패트릭 유잉이 있는데..."라고 불평할 정도로 급이 다른 대접을 받았다. 당연히 상대팀 팬들 입방에선 악의 축 취급이어서 "유잉이 문맹이다"를 포함해 온갖 비방과 중상모략이 이어졌다. 어쨌거나 대형 센터로서의 자질을 보이던 그에게 많은 대학들은 리쿠르팅을 시도하기 시작했고, 유잉은 그 중 워싱턴 D.C.의 농구 명문 조지타운 대학교로의 진학을 결정한다.

조지타운 대학교은 당시 존 톰슨 주니어가 코치를 맡고 있었다.[4] 존 톰슨은 보스턴 셀틱스에서 빌 러셀의 백업을 담당하기도 했던 센터로, 조지타운 대학교에 부임하면서 선수생활 경력을 살려서 뛰어난 센터를 조련하는데 일가견이 있음을 보여주었는데, 그 첫 작품이 바로 유잉이었다.[5] 그런 덕분인지 존 톰슨은 유잉의 엄청난 덩치와 잠재력을 폭발시키면서 대학 무대를 평정할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당시 대학에 입학한 유잉은 굉장히 독특한 패션을 추구했는데, 반팔 셔츠를 유니폼 안에 입은 일종의 레이어드 패션이었다. 이는 선수들 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만큼 유잉에 대해 전미가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이런 걸출한 신입생의 합류와 맹활약에 힘입어 조지타운 대학은 82년 March Madness에서 숱한 대학을 박살내며 결승까지 단번에 올라간다. 거기서 마주하게 된 대학은 바로 딘 스미스 산하에서의 첫 우승을 노리던 노스캐롤라이나 타힐스.

당시 노스캐롤라이나는 제임스 워디[6], 샘 퍼킨스[7][8]라는 막강 프론트코트를 갖추고 있는 강팀이었다. 그러나 조지타운은 유잉을 중심으로 한 단단한 수비를 통해 노스캐롤라이나의 공격을 막아내었고 덕분에 당시 게임은 근소한 차이로 엎치락 뒤치락 하는 접전이 이어졌다. 17초를 남긴 상태에서 1점 차이로 조지타운의 리드가 이어지고 있었고, 노스 캐롤라이나의 공격 차례가 되었다. 조지타운은 1점 리드를 지키기 위해 수비를 견고히 다지고 있었고, 특히 워디에게 모든 수비가 집중적인 디나이를 시도하고 있었다. 노스캐롤라이나의 지미 블랙은 워디에게 패스를 투입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은 상태에서 신입생 가드 한 명이 오픈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그에게 어렵사리 볼을 건넸고, 그는 노마크 상태에서 가볍게 점프슛을 성공시키며 팀을 역전시키게 된다. 노스캐롤라이나는 이어지는 조지타운의 공격에서 스틸을 성공시키며 1982 NCAA 챔피언에 등극하고, 결승골을 성공시킨 신입생은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그의 이름은 바로 마이클 조던이었다.[9] [10]

첫 도전에서 고배를 마시긴 했지만, 유잉은 고작 1학년인 상황이었다. 누구도 그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았고, 그 또한 절치부심하며 NCAA 우승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2학년이 된 다음해에는 고작 2라운드에서 탈락하고 말았지만, 3학년이 되자 그는 다시금 팀을 결승전으로 이끌었다. 당시 조지타운과 만나게 된 대학은 바로 "PHI SLAMA JAMA"라 불리던 휴스턴 대학이었다. 당시 휴스턴 대학은 전년도 파이널 준우승팀인데도 토너먼트 MOP를 수상한 최대의 라이벌 아킴 올라주원이 이끄는, 전년도에 준우승을 이뤄낸 강팀이었다. 자메이카산 야수와 나이지리아산 괴물센터간의 대결은 전미를 흥분시켰고, 모든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결승전에서 유잉은 올라주원에게 판정승을 거두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고 MOP를 수상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러한 활약 덕분에 유잉은 84년 로스엔젤레스 올림픽팀에 주전으로 당당히 선발되었으며, 조던 등과 함께 팀을 금메달로 이끈다.

이어지는 84-85 시즌 당시 동년배였던 올라주원과 조던 등 쟁쟁한 라이벌들이 드래프트를 위해 대거 얼리 엔트리를 제출한 가운데, 유잉은 묵묵히 조지타운에서 졸업을 마치기로 결정한다.[11] 그리고 돌아온 85년 March Madness에서 유잉은 다시금 팀을 결승으로 이끄는 기염을 토해낸다. 빌라노바 대학과의 결승에서 조지타운은 2점차 아쉬운 석패를 거뒀지만[12], 그해의 활약은 단순히 그가 일회성 스타가 아닌, 팀을 위닝팀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선수임을 증명해냈고, 다가오는 85년 드래프트는 유잉 드래프트가 될 것이란 왁자지껄한 분위기 아래 유잉은 대학을 마치고 NBA에 입성하게 된다.

4. 뉴욕으로의 입성

85년 드래프트는 앞서 말한대로 "유잉 드래프트"라 불렸다. 당시 유잉의 스카우팅 레포트 장점란에 쓰여 있는 말은 단 한 문장. "Are you kidding?" 전년도에 하위권 성적을 거둔 팀들은 어떻게든 1순위 픽을 잡아 유잉을 영입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이 때문에 로터리 추첨 당일 모두의 시선은 데이비드 스턴의 손에 쏠렸다. 드래프트 당일보다도 로터리가 관심을 끌었던 이유는 물론 1순위는 이견없이 유잉일테니, 누가 뽑을까?에 관심이 쏠렸기 때문. 모든 팀이 사라지고 인디애나 페이서스와 뉴욕 닉스만이 남은 상태에서 2순위에 인디애나 페이서스가 당첨되었음을 알리자 뉴욕 팬들은 그야말로 흥분으로 달아올랐고, 이후 열린 드래프트에서 유잉은 이견의 여지없이 1순위로 뉴욕에 입성하게 되었다.[13][14]

당시 뉴욕 닉스는 그렇게까지 나쁜 팀은 아니었다. 빌 카트라이트와 버나드 킹, 제랄드 윌킨스 등으로 이루어진 라인업은 닉스를 꽤 괜찮은 팀으로 이끌고 있었다. 그러나 주된 선수들의 잇단 부상으로 인해 팀이 나락으로 떨어진 찰나에 유잉을 영입하게 된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유잉은 데뷔 직후 첫 시즌인 85-86 시즌에서 루키임에도 불구하고 50경기에 출장하며 20득점, 9리바운드라는 준수한 성적을 기록하고 팀을 이끌었다. 결정적으로 유잉은 당초 대학시절 선보인 뛰어난 수비력 탓에 공격력이 상대적으로 폄하당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성적은 그의 재능이 빌 러셀보다도 대단할 것이라는 평가마저 듣게 만들었다. 물론 주전급 베테랑들이 대거 시즌 아웃된 상황에서 팀 성적은 여전히 나락인 상태였지만, 스스로도 무릎 부상으로 인해 30게임이나 결장하면서도 일궈낸 성적인 탓에 충분히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며, 그 공로로 신인왕에 선정된다.[15] 이어지는 2년차에 유잉은 카트라이트와 함께 트윈타워를 구축하고 주 포지션인 센터가 아닌 파워포워드 역할을 맡게 되었지만, 익숙하지 않은 포지션임에도 꾸준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은 여전히 애틀랜틱 디비전의 최하위에 머무르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고 만다. 어느 덧 3년차 시즌에 접어든 유잉에게 팀은 새로운 파트너를 선사해주었다. 프로비덴스 대학의 코치를 맡고 있던 30대의 젊은 감독인 릭 피티노와 브루클린 출신의 포인트 가드 마크 잭슨이 바로 그들이었다. 특히 마크 잭슨은 약점이던 가드진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면서 신인왕까지 거머쥐었고, 유잉은 그와 함께 빌 카트라이트를 제치고 주전 센터로 도약하면서 팀을 이끌면서 결국 데뷔 3년만에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 상대는 당시 래리 버드가 이끌었던 강팀인 보스턴 셀틱스였는데, 1승 3패로 1회전 탈락에 그치는 아쉬움을 남기게 된다. 그러나 유잉은 첫 플레이오프를 거치면서 더 이상 풋내기 선수가 아님을 과시하였고, 다가오는 시즌에 대한 기대감을 더하게 만들었다.

5. 뉴욕의 왕

88-89 시즌이 다가오면서 닉스는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게 된다. 그전까지 닉스를 지탱해왔던 기둥 중 하나인 빌 카트라이트를 트레이드하기로 한 것이다. 닉스 구단은 노쇠화를 보이면서 이제 유잉에게도 밀려나버린 후보 센터 대신 주전 센터인 유잉을 보좌하면서 그의 수비 부담을 덜어줄만한 블루워커 보디가드[16]를 물색하던 중, 닉스는 시카고 불스의 찰스 오클리와 빌 카트라이트의 맞트레이드를 성공시킨다.[17] 이를 통해 닉스는 앞으로 팀의 중심은 유잉이며, 그를 통해 우승을 일궈낼 것임을 천명한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시즌에서 닉스는 그야말로 파죽지세의 기세를 보여주었다. 바클리가 이끌던 필라델피아와 버드가 이끄는 보스턴을 제치고 52승 30패라는, 전년도에 비해 파격적으로 상승한 승률로 애틀랜틱 디비전 타이틀을 거머쥔 것이다.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고 만난 필라델피아를 3-0으로 스윕하면서 기대감을 높이던 닉스는 2라운드에서 조던이 이끄는 시카고 불스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홈코트 어드밴티지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닉스는 시카고에게 2승 4패로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 진출권을 빼앗기고 유잉은 대학 시절의 아픈 기억을 곱씹으며 다음 해를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지긋지긋한 유잉과 닉스의 조던에 대한 악연의 시작점에 불과한 것을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다음 시즌, 닉스는 스투 잭슨을 코치로 맞아 새로운 체제를 정비하게 된다. 이 해에 유잉은 개인으로서 최고의 성적을 올리게 되는데, 전 경기인 82경기를 출장하면서 28.6점, 10.9리바운드, 4블락이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기록하게 된 것이다. 덕분에 유잉은 처음으로 NBA First Team에 선정되는 경사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팀은 전년대비 하락한 승수에 머무르고 말았고, 진출한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강팀 보스턴 셀틱스를 무찔렀음에도 불구하고, 2라운드에서 전년도 우승팀인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게 1승 4패의 성적으로 패퇴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해에도 닉스는 유잉의 분전에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플레이오프에서는 당시 첫 우승을 향해 달려가던 조던의 시카고 불스에게 3패로 스윕을 당하면서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6. 갱스터의 결성, 그리고 조던. 조던. 조던.

연이은 플레이오프에서의 탈락로 좌절감을 맛보던 닉스와 유잉에게 더 이상 플레이오프 진출은 목표가 될 수 없었다. 동부의 신흥 강호였던 시카고 불스가 첫 우승을 거둠으로써 레이커스와 셀틱스의 80년대를 마감시킨 마당에 그들 또한 우승을 통해 리그의 명문으로 위상을 새롭게 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첫 걸음을 내딪기 위해 닉스 구단은 명장을 영입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팻 라일리였다. 80년대 매직 존슨을 앞세운 쇼타임 레이커스의 수장인 팻 라일리의 영입은 닉스 구단의 우승에 대한 열망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이와 함께 그리고 팻 라일리는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새로운 밑그림을 팀에게 제시한다. 그것이 바로 숨막히는 질식수비로 대표되는 90년대 닉스, 갱스터의 시작이었다. 화끈한 공격농구를 지향하던 팻 라일리의 레이커스와 정 반대되는 모습을 드러낸 닉스에 대해 많은 이들이 의구심을 드러냈지만, 라일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색깔에 걸맞는 선수들을 대거 영입 / 중용하면서 자신의 신념을 밀어붙인다. 자비에 맥다니엘과 안소니 메이슨, 존 스탁스가 바로 그들이었다. 특히 메이슨과 스탁스는 꾸준한 활약을 보여준 적이 없는 터라 닉스 구단과 라일리에 대한 팬들의 의구심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된 시즌, 돌아온 닉스는 그야말로 숨도 못쉬는 페인트존을 자랑하는 질식수비를 선보이며 승수를 쌓아가기 시작한다. 그들은 득점을 내줄바에는 파울을 안겨주마(...)라는 정신으로 하드파울과 거친 몸싸움 무장한 채 상대를 압도해나갔으며, 이 가운데에는 바로 뉴욕의 왕이자 닉스의 심장인 유잉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렇게 거친 농구를 펼치며 언제나처럼 진출한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그들은 숙적인 마이클 조던시카고 불스를 다시금 만나게 된다. 이전까지의 대결에서 닉스는 언제나 조던에게 페인트존을 유린당하며 넉다운 되는 매번 똑같은 상황을 겪고 있었다. 라일리는 어차피 조던을 완벽하게 봉쇄하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 아래 스탁스와 윌킨스를 번갈아붙이며 외곽을 틀어막는 한편 끊임없이 신경전을 벌이고, 조던이 페네트레이션을 시도할 경우 유잉을 중심으로 오클리, 맥다니엘, 메이슨 등이 페인트 존을 방어하며 점프를 뛰는 순간 샌드위치(...)로 압살하고, 이도저도 안될 경우 하드파울을 범하는 수비 전략을 채택한다. 이는 디트로이트 피스톤즈가 시도하던 던 룰과도 유사한 전략이었는데, 조던의 신경을 긁음으로써(...) 팀 전체의 밸런스를 붕괴시키려는 전략이었다. 이는 효과적으로 작용하였고, 최종전까지 가보지도 못하던 기존의 시리즈와 달리 최종 7차전까지 경기를 끌고 가는데 성공했다. 특히 2승 3패로 뒤진 6차전에서는 유잉이 경기중 발목을 삐어 절뚝거리면서도 골밑에서 잇달아 엔드원을 얻어내 팀을 승리로 이끌어 유잉 커리어 중에서도 손꼽히는 순간으로 꼽힌다.

그리고 시카고 스타디움에서 열린 7차전. 고작 2라운드임에도 불구하고 양쪽의 긴장감은 결승전에 가까운 상태였다. 유잉과 닉스는 이 경기를 통해 첫 왕좌로의 등극을 꿈꾸고 있었고, 전년도 우승팀인 시카고와 조던은 왕조 건설로 이어지는 2연패를 위한 여정에서 가장 큰 도전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플레이오프 탈락이라는 위기에 몰린 마이클 조던은 그 상황을 간단하게 끝내버렸다.. 조던은 42점, 6리바운드, 4어시스트, 2스틸, 3블락이라는 기록을 내며 그를 전담마크하던 스탁스를 6반칙 퇴장시키고, 윌킨스와 유잉은 5반칙에 몰리도록 맹활약하며 110 대 81이라는 스코어로 닉스를 초토화시켜 버린 것이다.[18] 조던님이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전장의 지배자! 유잉은 22점, 9리바운드를 따내며 분전했지만, 또 다시 조던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러한 좌절을 겪고 난 오프 시즌 동안에는 유잉에게 즐거운 경험 또한 있었다. 시즌 종료 후 벌어진 바르셀로나 올림픽관광에서 유잉이 드림팀의 일원으로 선발된 것이다. NBA의 전설들이 함께한 드림팀에서 유잉은 데이비드 로빈슨과 함께 센터로 활약하며 금메달을 획득한다. 유잉은 원래 자메이카 국적이었지만, 조지타운 대학에 진학할 때 미국 국적을 취득해서 드림팀 1에서 선발되는데 문제가 없었다. 라이벌이었던 올라주원은 드림팀 1 당시 여전히 나이지리아 국적을 지니고 있어서 선발되지 않았고, 후에 애틀랜타 올림픽이 벌어질 때 비로소 미국 국적을 취득하여 드림팀3에 선발될 수 있었다.

92-93 시즌이 시작될 무렵, 닉스는 이제까지 활약해왔던 마크 잭슨 대신 닥 리버스(현 LA 클리퍼스 감독)를 영입하였다. 완숙미를 더해가던 유잉은 24점, 12리바운드의 호성적을 거두며 팀을 이끌었고, 더불어 더욱 다져진 조직력을 과시하던 닉스는 이 해 60승, 7할대의 성적을 처음으로 거두며 동부 컨퍼런스 1위를 차지하고, 1번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 그렇게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인디애나 페이서스, 샬럿 호네츠를 완파하며 순항한 닉스는 또 다시 조던과 만나게 된다. 전년도의 아픔을 설욕하기 위해 전의를 다지던 닉스는 홈구장인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치뤄진 첫 두 경기를 승리로 장식하게 된다. 유잉은 25점 17리바운드, 26점 10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시카고의 페인트 존을 짓밟았고, 드디어 유잉과 닉스의 고난도 여기서 끝나는가 싶었다. 그러나 연이은 4경기에서 닉스는 상대적으로 부진했던 조던을 보좌하던 피펜의 맹활약으로 인해 4연패를 기록하게 되었고, 결국 또 다시 탈락의 고배를 마시는 불운을 겪고 말았다.

7. 유잉 VS 올라주원, 그리고 내리막길

93-94 시즌, 조던이 3연패 이후 은퇴를 선언함으로써 닉스에게 이제 동부 컨퍼런스는 문제가 될 수 없었다. 파죽지세로 달린 시즌 동안 유잉은 전년과 같이 맹활약하였고, 플레이오프에 돌입했다. 2라운드에서 스카티 피펜이 이끄는 시카고 불스와 7차전에 이르는 혈투를 펼친 끝에 승리하고,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레지 밀러가 이끄는 페이서스와 7차전까지의 접전 끝에 승리한 유잉의 앞에 등장한 것은 바로 올라주원이 이끄는 휴스턴 로케츠였다. 대학시절 맞붙었던 사실과 현재의 경기들이 연일 매스컴에 비교 보도되는 떠들썩한 와중에 5차전까지 전적은 3승 2패로 닉스의 우위인 상태. 그러나 6차전에서 스탁스가 던진 슈팅이 올라주원에게 블락당하고, 연이은 7차전에서 스탁스가 1할대의 엽기적인 성공률을 보이는 상태에서 유잉은 패배하고, 올라주원은 오래전 아픔을 설욕하는데 성공한다. 사실 마지막 경기인 7차전 패배의 직접적인 책임은 스탁스에게 있었지만, 5차전을 제외하면 시리즈 내내 올라주원에게 무력하게 밀리는 모습[19]을 보인 유잉 또한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다. 그리고, 이 한 끗 차이로 놓쳐버리고 만 우승은 이후 그의 평가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만약 이 때 닉스와 유잉이 6,7차전 중 한 경기만 잡아 우승에 성공했다면 유잉은 4대센터중 가장 먼저 우승의 위업을 달성하는 엄청난 프리미엄 덕택에 최소한 지금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게 확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우승은 로케츠와 올라주원의 차지였고, 다음 시즌까지 우승을 차지해 마이클 조던에 이른 연속 우승을 달성하며 그 당시 4대센터 서열에서 올라주원이 나머지 셋을 앞질러 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해에도 플레이오프에 나선 유잉과 닉스는 전년도의 설욕을 다짐하던 밀러에게 MSG에서 맹폭격을 당하며 고배를 마시게 된다. 마지막 7차전 종료 직전 2점차에서 유잉이 날린 회심의 레이업슛이 림을 들어갔다가 나와버리는 불운으로 컨퍼런스 파이널조차도 올라가보지 못하고 플레이오프 2라운드 탈락의 결과를 맞았다.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그의 전성기를 함께한 팻 라일리도 떠나버리고, 어느 덧 30대의 중반에 접어드는 유잉에게 이제 우승은 그야말로 선수생활의 황혼을 장식해줄 마지막 꿈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95-96 시즌, 돌아온 조던, 새로이 영입된 데니스 로드먼과 더불어 최강팀으로 자리매김한 시카고 불스는 닉스를 가볍게 물리치며 희망을 또 다시 빼앗아 버렸다. 다음해 96-97시즌은 스승이었던 팻 라일리와 조지타운의 후배였던 론조 모닝이 이끄는 마이애미 히트가,[20] 그 다음해에는 닉스 킬러로 자리매김한 레지 밀러의 페이서스가 유잉의 희망을 앗아갔고, 마이클 조던이 또 다시 3연패를 이룩하는 사이에 어느 덧 유잉은 그저 그런 강팀의 그저 그런 에이스이자 일상과도 같은 부상에 시달리는 퇴물센터 정도로 폄하되며 선수생활의 황혼에 접어들고 있었다.

8. 사실상 마지막이었던 우승 도전의 기회. 그러나...

97-98시즌은 닉스가 젊은 유망주들 셋에 그해 뽑은 신인까지 4명을 모두 팔아치우고 즉시전력감인 크리스 더들리와 크리스 밀즈까지 데려오며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우승에 도전했던 해였다. 우선 닉스는 FA가 된 유잉을 4년 6천 8백만 달러의 대형 계약으로 잔류시키는데 성공했다.[21] 또한 닉스의 약점이었던 유잉을 보좌할 수 있는 백업센터로 포틀랜드의 주전 센터 크리스 더들리를[22], 찰스 오클리와 래리 존슨을 보좌할 프론트코트의 제 3의 포워드로 당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주전 스몰포워드로 활약했던 크리스 밀즈를 데려왔다.[23] 타 팀의 주전 선수 두 명을 벤치멤버로 영입한 탓에 그 해 닉스는 백업 멤버들만으로도 웬만한 중위권 팀 수준의 주전 라인업을 꾸릴 수 있는 수준의 엄청난 뎁스를 자랑했다.[24] 유명 스포츠 전문지인 스포트 일러스트레이티드(SI)에서 시즌 개막 전 우승 후보로 또 한번의 3연패에 도전하는 시카고 불스가 아닌 뉴욕 닉스를 꼽았을 정도로 이 시즌 닉스의 기대감은 컸다.

그러나 닉스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재앙이 닥쳐왔다! 12월 20일 밀워키 벅스와의 원정경기에서 유잉이 2쿼터 종료 직전 덩크를 시도하려 공중에 뜬 상태에서 매치업 상대인 앤드류 랭의 파울로 코트에 넘어질 때 오른손이 자신의 몸에 깔려버리는 중상을 당하게 된다. (당시 부상 직후 장면 #) 오른손을 쓰지 못해 왼손으로만 자유투 2개를 던진 뒤(당연히 둘 다 실패) 바로 코트를 떠나 병원행. 진단 결과 손목이 골절되고 인대가 찢어져버린 큰 부상으로 전치 6개월짜리의 중상이었다. 그 전까지 10년동안 겨우 20게임만 빠졌을 정도로 건실하게 닉스의 골밑을 지켜줬던 유잉이 없는 채로 시즌을 치른다는 것은 닉스에게는 말 그대로 재앙일 수 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렇게 유잉은 시즌 아웃되었고 다음날 전 세계 언론의 NBA 소식 머릿기사가 "유잉과 닉스의 우승의 꿈은 이로서 끝났다"였다.[25] 슛을 던지는 오른손의 손목 부상은 이미 노장 센터가 되어버린 유잉이 가진 유일한 경쟁력이었던 미드레인지 점퍼의 정확도마저 앗아가버리는 슬픈 결과를 낳았다. 올스타 투표 1위를 달리고 있었지만 부상으로 올스타전도 출전할 수 없게 되었는데, 애석한 것은 하필 이 해 올스타전이 본인 선수생활 가운데 유일하게 닉스의 홈구장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올스타전이었다는 것. 유잉은 염원하던 우승의 꿈 뿐만 아니라, 뉴욕의 홈팬들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올스타 주전센터로 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작은 꿈마저 날려보내야만 했다.[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잉은 우승에 대한 꿈과 열망을 여전히 버리지 않았다. 플레이오프도 출전이 불가능한 시즌 아웃급 부상이었지만 유잉은 플레이오프때 꼭 돌아오겠다며 동료들에게 어떻게든 플레이오프에 진출해 달라고 부탁했으며, 부상 이후 한 경기도 빠지지 않고 벤치에서 팀 동료들을 응원했다. 유잉이 부상당한 직후 잠깐 휘청거렸던 닉스는 전열을 추스르고 다시 승수를 쌓아나가기 시작, 결국 7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며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는 2번 시드 마이애미 히트와 난투극까지 불사하는 결전 끝에 업셋을 달성하고 2라운드에 진출한다.

플레이오프 2라운드 상대는 레지 밀러의 인디애나 페이서스였고 유잉은 플레이오프때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시리즈 2차전 원정경기에서 드디어 스타팅 센터로 복귀한 것이다. 6개월만의 복귀로 경기 감각이 저하돼 시리즈 동안 야투율이 35%밖에 되지 않는 등 고전했지만, 정규시즌보다 더 치열한 플레이오프 무대에서 경기당 33분을 출전하며 평균 14득점 8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투혼을 발휘했다. 하지만 유잉이 정상 컨디션으로 뛰지 못하는 닉스에게 페이서스는 버거운 상대였고 닉스와 유잉은 또 한번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분루를 삼킨다.

9. 기적의 8번 시드, 기적의 파이널행

98-99시즌, 선수노조의 파업에 의한 직장폐쇄로 인해 단축시즌이 열리게 되었다. 이즈음 유잉은 이미 전성기의 실력을 잃었고, 농구선수에게 치명적인 아킬레스건 부상에까지 시달리고 있었다. 팀 또한 더 이상 유잉에게 미래를 기대하지 않았고, 슈팅가드인 앨런 휴스턴을 실질적인 에이스로 취급하고 있었다. 여기에 오랜 동료였던 스탁스와 오클리를 보내고 라트렐 스프리웰이라는 걸출한 또라이슈팅가드를 영입해 트윈 테러를 결성함과 동시에 더불어 젊은 센터 마커스 캠비를 영입하면서 유잉의 다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작된 시즌, 유잉은 캠비의 영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전 센터로 출장했다. 전년에 비해 현격히 감소한 득점력은 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유잉은 여전히 골밑에서 상당한 존재감을 과시했고, 그를 통해 공격을 책임지는 트윈 테러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하지만 시즌을 치를수록 아킬레스건 부상이 악화되어 가던 유잉은 시즌 개막 후 약 한달 뒤 밀워키 벅스전에서 점프볼 후 착지 과정에서 아킬레스건에 충격을 입고 그대로 경기에서 이탈점프볼만 뛰고 퇴갤한 뒤 부상자 명단에 올랐으며, 유잉의 이탈 후로 팀 성적또한 곤두박질치며 플레이오프 진출 여부를 놓고 다퉈야만 하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유잉의 컴백과 함께 다시 승수를 쌓아나가기 시작하며 샬럿 호네츠를 1게임차로 간신히 따돌리고 결국 막차인 8번시드를 획득하여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 그리고 언제나와 같이 시작된 플레이오프. 8번 시드로 진출한 플레이오프에서 만난 마이애미 히트는 팻 라일리의 지휘 아래 알론조 모닝과 팀 하더웨이를 주축으로 그 옛날 닉스만큼 전투적인 수비를 선보이며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유잉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수비에 집중하며 팀을 이끌었고, 특히 최종전이었던 5차전에서 알론조 모닝을 공수에서 압도하는 엄청난 활약을 보이며 8번시드로 1번시드를 격파하는 쾌거를 이끌어냈다. 사기가 오른 닉스는 상위 시드인 애틀랜타 호크스를 4연승으로 스윕시키며 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했다. 정규시즌 성적은 단연 애틀랜타의 우위였고 수비의 핵 디켐베 무톰보를 축으로 탄탄한 전력을 구축한 팀이었지만, 당시 닉스의 신들린 플레이에 애틀랜타는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4게임 연속으로 완패를 당하는 굴욕을 맛봤다.

인디애나와의 컨퍼런스 파이널 1차전에서 유잉은 제대로 걷기도 힘들어보일 정도로 아킬레스건 상태가 좋지 못했지만, 그 몸으로 무려 40분을 뛰며 16득점 10리바운드로 인사이드를 지키며 팀의 선승에 공헌했다. 선수 시절부터 소름끼칠 정도의 냉정함과 포커페이스로 유명한 페이서스 감독 래리 버드마저도 경기가 끝나고 난 뒤 벙찐 표정으로 "유잉의 아킬레스건 부상에 대해서는 이골이 날 정도로 들어서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유잉이 정말 부상 선수가 맞긴 한거냐? 만약 우리팀의 릭 스미츠가 오늘 그처럼 뛰었다면 앞으로 우린 그를 1년 동안은 볼 수 없었을 거다." 라는 말로 팀 패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팀 주전 선수까지 디스해가며 유잉의 투혼을 이례적으로 칭찬하였고, 레지 밀러 또한 유잉에 대한 존경심을 숨기지 않았다.슬램덩크에서 이정환이 채치수의 발목부상 투혼을 보며 "내가 상대방의 플레이어를 존경하기는 처음이다" 실사판 등장 유잉은 그 다음 2차전에도 변함없이 출전했으나 2차전이 끝나고 난 후 더 이상 출장을 강행한다면 농구선수로서의 생명이 끝날 수 있다는 의료진의 경고를 받게 되었다. 결국 유잉은 이후 3차전부터는 더 이상 경기에 출장하지 못하고 벤치를 지켜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잉의 투혼에 사기가 오른 닉스는 래리 존슨과 마커스 캠비의 분전을 앞세워 시리즈 전적 4승 2패로 8번시드로는 사상 최초로 파이널에 진출하는 전율의 드라마를 연출해낸다.

기적의 8번시드 파이널 진출의 역사를 달성할 즈음엔 전 세계의 농구팬들이 뉴욕 닉스의 투혼에 감동하였고, 파이널 상대팀인 스퍼스 팬들을 제외한 나머지 28팀 팬들 대부분이 대동단결하여 닉스를 응원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비록 파이널에서도 출전할 수 없었던 유잉이었지만, 늘 닉스 라커룸에는 가슴 부위에 선명하게 1999 NBA 파이널 패치가 붙은 유잉의 유니폼이 걸려있었다. 코트에서 함께 뛰지는 못하지만 마음만은 코트 위의 동료들과 함께 하겠다는, 간절히 우승을 염원하는 유잉과 동료들의 의지였다. 그러나 파이널을 앞둔 닉스는 리더인 유잉을 잃어버린 데 이어, 컨퍼런스 파이널 승리의 1등 공신이었던 마커스 캠비와 래리 존슨마저 각각 가정사와 등부상 악화로 인해 파이널 기간동안 제대로 된 컨디션으로 뛸 수가 없었던 최악의 상황이었다. 스프리웰과 휴스턴의 트윈 테러는 건재했지만, 프론트코트가 초토화된 닉스에게 있어 데이비드 로빈슨과 팀 던컨의 트윈 타워를 앞세운 스퍼스는 사실상 넘을 수 없는 벽이었고 모든 전문가들이 거의 만장일치로 스퍼스의 우승을 점쳤다. 단 한명의 전문가만이 닉스의 우승을 점쳤을 뿐으로 역대 파이널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원사이드한 예측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닉스는 감독 제프 밴 건디의 전술과 백업 멤버들의 투혼으로 매 경기를 접전으로 몰아가며 농구팬들을 열광시켰다. 스프리웰과 휴스턴의 트윈 테러는 언제나 그랬듯이 코트를 휘저었고, 정상 컨디션이 아닌 마커스 캠비와 래리 존슨을 대신해 크리스 더들리와 커트 토마스가 스퍼스의 트윈 타워를 맞아 악착같이 버텨냈다. 하지만 결과는 1승 4패로 준우승에 머무르며 시즌을 마감하게 되었고, 그렇게 유잉의 마지막 파이널은 끝이 나고 말았다.[27] 하지만 상대팀인 스퍼스 선수들도 닉스의 투혼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마리오 엘리는 우승 달성 후 "만약 패트릭 유잉과 래리 존슨이 정상 컨디션이었다면 시리즈는 7차전까지 갔을 것이고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 지 모른다"는 말로 닉스를 인정했다.


10. 마지막 불꽃, 그리고 쓸쓸한 은퇴

다음 시즌인 99-00시즌에도 유잉은 여전히 닉스에서 뛰었다. 지난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당했던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인해 유잉은 시즌 초반 20경기를 결장하였고[28], 12월 10일 필라델피아와의 홈경기에서 간신히 컴백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이미 38세의 노장이었던 유잉은 그 컴백 이후 정규시즌동안 단 한 경기도(!) 결장하지 않고 남은 62경기를 모두 선발로 출전하면서 팀의 정신적 지주로 활약했다. 더 이상 전성기와 같은 득점력을 보여주지 못하자 공격에서는 스스로 트윈테러에 이은 제 3옵션을 자처했고, 대신 유잉은 리바운드와 블로킹, 박스아웃에 집중하며 여전히 닉스 프론트코트 수비라인의 핵으로 활약했다.

매 경기가 끝날 때 마다 이 노장 센터는 골절 부상을 입었던 손목, 이미 연골이 다 닳아서 없어져버린 양쪽 무릎, 아킬레스건을 다친 발목 부상부위를 얼음팩으로 둘둘 말고 진통제를 써야할 정도로 몸상태가 만신창이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그는 매 경기당 32.8분을 소화하며 경기당 평균 15득점 9.7리바운드로 더블-더블에 준하는 활약을 펼쳤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냐면 유잉을 제외한 나머지 4대센터 가운데 유잉과 같은 나이에 유잉보다 나은 성적을 기록한 선수가 없다는 것이다.[29] 모두가 닉스의 우승은 안된다고, 힘들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유잉 그 자신은 우승이라는 선수생활 마지막 목표를 향해 본인이 가진 모든 것을 내던졌다. 기자들이 우승에 대해 물을 때마다 유잉은 "시즌이 끝난 다음에 얘기합시다. 그 때쯤이면 내 손엔 챔피언 반지가 끼워져 있을테니까." 라는 말로 일축하며 온전히 경기에만 집중했다.오오 상남자! 당시 닉스의 담당 기자 중 한 명은 이미 농구선수로 뛸 수 있는 몸이 아니지만 게임에 대한 열정이 그를 뛰게 만들고 있다는 말로 유잉의 정신력을 극찬하였다. 그 시즌 초반 불의의 부상으로 은퇴를 하게 되었던 또다른 무관의 제왕 찰스 바클리 도 유잉을 일컬어 설령 유잉이 챔피언십 트로피를 뉴욕으로 가져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고 해도, 그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왔는지를 안다면 어느 누구도 그를 비난할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

유잉의 활약으로 닉스는 세 시즌만에 다시 정규시즌 50승 고지를 탈환하며 3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만난 상대는 빈스 카터트레이시 맥그레디가 이끌던 토론토 랩터스. 워낙 당시 카터의 퍼포먼스가 쩔었고 마침 닉스는 정규시즌에서 토론토에 1승 3패로 열세였던지라 첫 플레이오프 진출을 이뤄낸 토론토의 사기는 무척 높았고 업셋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점쳐지던 시리즈였다. 하지만 유잉과 닉스는 토론토를 3연승으로 스윕시켜버리며 관광을 보내버린다.어서와 플레이오프는 처음이지? 그리고 다음 2라운드의 상대는 4년 연속으로 만나게 된 라일리의 히트. 닉스와 히트는 다시 한 번 7차전까지 가는 대 접전끝에 결국 닉스는 7차전에서 83-82의 1점차 승리를 거두고 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했다. 특히 2승 3패로 뒤진 6차전에서 유잉은 무려 42분을 뛰며 15득점 18리바운드, 최종 7차전에서는 20득점 10리바운드 2블록슛과 더불어 결승점이 되는 역전 투핸드 덩크를 작렬시키며 위기상황에서 앞장서 팀을 이끌었다.

컨퍼런스 파이널에서는 또 다시 레지 밀러가 이끄는 인디애나 페이서스를 만나게 되었다. 인디애나는 전년도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맹렬하게 달려들었고 닉스 또한 주전과 백업 가리지 않고 모두가 크고 작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2년 연속 파이널 진출을 위해 허슬도 불사하며 맞불을 놓았다. 4차전까지 시리즈 스코어는 서로 2승 2패를 기록했지만 레지 밀러와 제일런 로즈의 불붙은 공격력 앞에 결국 5차전과 6차전을 연달아 내주며 2승 4패로 파이널 진출에는 실패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6차전 종료 직전 MSG의 뉴욕팬들은 자기팀 선수들에게 기립박수를 쳐주며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잘했다고 격려해 주는 훈훈한 광경을 연출했다.

아쉽게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페이서스에 패배했지만 유잉은 또 다음 시즌을 준비하며 닉스를 이끌어 가려 하였다. 그러나 주변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몇년 전부터 일부 팬들과 언론으로부터 불거져나온 유잉 무용론[30] 을 비롯해 트윈 테러를 주축으로 리빌딩을 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았고 팀은 유잉을 트레이드하는 방안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수많은 루머들이 양산되며 유잉을 들쑤시게 되었는데 유잉 본인도 이제 이런 반응들에 질렸다면서 트레이드가 된다면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지경까지 갔음에도 대부분은 반신반의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설마 유잉을 트레이드하겠느냐 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몇몇 제안이 틀어져서 잔류하는가 싶었으나...

00-01 시즌을 얼마 앞두지 않은 9월말, 닉스의 GM인 스캇 레이든[31]이 충격적인 소식을 발표한다. 패트릭 유잉을 시애틀 수퍼소닉스로 트레이드시켜버린 것이다![32] 15년이란 세월을 한결같이 뛰어온 프랜차이즈 플레이어를 리빌딩이라는 명목으로 헌신짝처럼 버려버린 이 결정에 팬들은 분노하였고, 유잉은 그렇게 정든 팀을 떠나 시애틀 슈퍼소닉스의 주전 센터로 새 시즌을 맞게 되었다. 당시 시애틀은 LA 레이커스의 샤킬 오닐에 맞서 인사이드를 지켜줄 센터를 절실히 원했고 그 결과 유잉을 얻는 데 성공했지만, 유잉은 노쇠화와 부상 후유증 덕택에 제한적인 플레잉 타임만을 소화할 수 밖에 없어 기대한 만큼의 활약은 해 주지 못했다. 나이에 따른 기량 저하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15년을 헌신적으로 뛰어온 친정팀으로부터 버려졌다는 마음의 상처가 내성적인 성격의 유잉에게는 그의 얼마 남지 않은 기량마저 좀먹는 요소였으리라.

00-01 시즌이 끝나고 FA가 된 유잉은 올랜도 매직과 2년 계약을 맺었다. 이미 그랜트 힐이 33번을 달고 있어 본인은 3+3이자 드림팀 1당시의 배번인 6번을 달고 활약했다. 비록 전성기의 실력은 완전히 잃어버린 그였지만, 데뷔 후 커리어 최초로 백업 센터의 역할을 수행하며 온전히 팀에 헌신하였고 가끔씩 전성기의 실력을 뽐내며 팀의 극적인 승리를 이끌기도 해 클래스가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는 것을 입증해 보였다. 01-02시즌 종료 후 계약기간이 1년 남았지만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만족할만한 선수생활을 보냈지만 우승과 챔피언 반지를 획득하지 못한 것만은 정말 아쉽다는 소감을 남겼다.

은퇴 직후 그 분이 계신 워싱턴 위저즈의 어시스턴트 코치로 임명되었으며 2003년 2월 28일 뉴욕 닉스의 홈경기에서 공식 은퇴식과 함께 그의 배번 33번이 영구결번되었다. 그의 마지막 인사는 "I always will be a knick, I always will be a New Yorker. Thank you very much."



뉴욕의 심장 유잉이 은퇴 직전 타향살이 중에 만난 휴스턴의 레전드 하킴 올라주원과 펼치는 안습 대결 한 컷.[33]

11. 플레이스타일

한국에서만 쓰는 말이지만 이른바 4대 센터[34]라고 불리는 센터 멤버중 하나이다.

NBA에서 83~87년 5시즌 연속으로 드래프트 전체 1위로 지명된 센터중 1명으로 223cm의 엄청난 키에도 뛰어난 스피드로 휴스턴의 공격을 이끌었지만 불과 3시즌만에 무릎이 망가지며 단명한 83년 드래프트 1위 랄프 샘슨, 그 랄프 샘슨과 트윈 타워를 이루었으며 화려한 피벗을 자랑하는 테크니션인 84년 드래프트 1위 하킴 올라주원, 85년 패트릭 유잉, 부상으로 롱런하진 못했지만 뛰어난 패싱센스와 득점력을 보여준 86년 전체 1위 브래드 도허티, 빠른 스피드로 페이스업과 속공을 즐기는 87년 드래프트 전체 1위 데이비드 로빈슨[35]으로 이어지는 특급 센터 계보중 한명으로 유잉은 테크닉, 스피드, 파워 어느 카테고리에서도 독보적인 우위를 가진건 아니었지만, 기본기에 충실하고 골밑 안정감이 뛰어난센터이자, 센터의 교과서이자 이상적인 모델로 불린다. 샤킬 오닐 등장 이전에는 가장 강력한 파워 센터로 인식되기도 했으며, 실제로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의 커리어 전성기때는 큰 보폭으로 치고 들어가는 드랍 스텝에 이어 바로 덩크로 찍어버리는 공격루트를 많이 보여줬다. [36] [37]

젊은 시절 무릎 부상 이후로는 공격의 다변화와 골밑 공격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미드레인지 슈팅을 장착하였는데, 유잉의 슛은 릴리즈포인트가 높은데다가 릴리즈 순간을 의도적으로 매우 늦게 가져가 상대 선수가 알고도 블로킹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거기다 비거리까지 매우 길어 3점 라인 근처에서도 높은 정확도를 자랑했으며 심심찮게 3점슛까지 꽃아넣을 정도였다. 이 미들점퍼 하나만큼은 4대 센터 중에서도 단연 탑으로 어느 누구도 토를 달지 않는다. 덤으로 센터 중에서도 매우 정확한 핑거롤과 턴어라운드 페이드어웨이 슛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투스텝 돌파를 제일 잘 쓰던 선수이기도 했다.

12. 이것저것

패트릭 유잉 항목이 생성된 초반에는 주인공이 유잉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내용은 조던의 유잉 관광스토리가 절반이 넘었었다.(...) 안습. 뭐 조던의 피해자야 차고 넘치는 것이 사실이지만, 유독 그는 하필 조던과 동년배에 1년 차이로 데뷔, 전성기도 겹치고 컨퍼런스까지 같은 덕분에 정말이지 매년 치이다시피 했다. 게다가 4대 센터 가운데 홀로 우승 경험도, MVP와 같은 상복도, 스탯 우위도 없는 탓에 평가 또한 나머지 3인방(올라주원, 로빈슨, 오닐)에 비해 가장 안좋다. 플레이오프에서는 은근히 자기 실력 발휘를 못하기도 했으며, 제대로 맞붙은 94파이널에서 올라주원에게 발리는 바람에...[38] 속칭 4대 센터의 첫판왕(...)

그래도 선수 자체의 인지도나 인기로 치면 데이비드 로빈슨보다는 우위다. 세계의 중심이라 불리는 뉴욕에서 선수생활을 했기도 하거니와 80~90년대 조던에 집중된 매스컴 덕분에 매년 치이는 모습이(...) 전 세계에 방송이 돼서 그런 듯. 심지어 매년 치이는 게 불쌍해서 안티조던 유잉빠가 된 팬들도 상당수 있을 정도. 한편 플레이 스타일도 중반부에 장착한 미드레인지 게임을 제외하면 정말 센터의 표준과도 같기에 90년대 NBA 열풍이 불었을 당시 흔히 센터 하면 떠오르는 선수로 대부분 패트릭 유잉을 꼽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연재된 슬램덩크의 채치수 또한 연습경기에서 33번을 달고 있는 걸 보면...

그리고 실력 자체도 4대 센터 중 꼴지이긴 해도 상당히 근소한 차이다. 베스트5에 해당하는 All-NBA 퍼스트팀에 딱 한번 선정되긴 했지만, 당시 센터진의 뎁쓰가 워낙 깊어 매번 근소한 차이로 밀린 것일 뿐이었다.[39] 그는 실제로 1989시즌부터 1995년까지 7년간 6번이나 MVP투표 5위 이내에 들었다. 하필 역대 최고의 선수랑 동시대에 그의 라이벌 세명이 전부 MVP를 탈 정도의 괴물들이라 그렇지 다른 시대였으면 유잉도 퍼스트팀 단골에 MVP를 노려볼만한 선수었다.

현역시절 내내 고질적인 무릎 부상에 시달렸다. 그 무릎부상 덕택에 대학시절의 괴물같은 운동능력을 상실한 채로 NBA 커리어를 보냈다. 커리어동안 총 4차례의 무릎 수술을 받았다. 경기 때 착용한 양 무릎의 두툼한 무릎 보호대는 유잉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았다.

한편 선수 생활 전반을 박살낸(...) 조던과 사이는 좋은 편이다. 조던이 절친한 친구로 지내는 몇 안되는 스타 플레이어. 조던의 워싱턴 복귀 당시 유잉은 친구의 소속팀인 워싱턴 코치로 선임되면서 새로운 경력의 첫발을 내딛기도 했다. 또 같이 영화에도 출연하기도 했고. 그 영화가 바로 스페이스 잼. 다만 평가야 다들 알다시피 최악이라.. 같이 뛰었던 동료 선수들은 물론 타 팀의 많은 선수들과도 두루두루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 덕택인지 은퇴식에 와서 축하해 준 선수들 중 닉스에서 뛴 적이 없는 선수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 중에서도 대외적으로 알려진 최고의 절친은 대학 후배이기도 한 알론조 모닝.

반면 선수생활동안 언론과는 썩 좋지않은 관계였는데 이는 극성스럽기 짝이 없던 뉴욕 언론에 대해 유잉이 거의 무대응(...)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40] 말이 많아야 기사거리가 늘어나는 기자들 입장에서는 말없이 플레이에만 집중하는 스타일의 유잉은 썩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때때로 리그 차원에서 의무적으로 임해햐 하는 경기 후 인터뷰마저 거부하여 벌금을 물기 일쑤였다.

또한 현역시절엔 90년대 4대 센터 중 가장 말석의 자리에 놓였지만(그래도 NBA 역사상 센터 포지션 Top 10급이다), 현역 은퇴 후 코치로서는 네명 중 가장 좋은 커리어를 쌓아나가고 있다. 워싱턴 위저즈 - 휴스턴 로케츠 - 올랜도 매직을 거쳐 올 2013-14시즌부터 그 분이 계신 샬럿 밥캐츠의 어시스턴트 코치를 역임하고 있다. 오랜 코칭기간동안 감독 수업도 꾸준히 쌓아왔으며 2013년 11월 8일부터 샬럿의 스티브 클리포드 감독이 심장 수술로 몇 경기동안 자리를 비우게 되어 비록 정식은 아닌 감독 대행이긴 하지만 어쨌든 커리어 첫 감독직을 수행하기도 했다.[41]

현역시절 샤킬 오닐과 같은 컨퍼런스였던 탓에 4대센터 중에서도 유독 그와 매치업을 자주 하며 신경전이 잦았다. 특히 오닐은 경기장 안팎에서 유잉을 무시하는 듯한 언행으로 구설수에 올랐으며, 1999년 직장폐쇄 당시 선수협을 비판하며 회장이었던 유잉까지 싸잡아 독설을 날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오닐은 은퇴 후 유잉에 대한 존경심을 여러번 드러내었고, 특히 자신이 진행하는 NBA Game Time 프로그램에서 유잉을 만나고 난 후 눈물을 흘리면서(!) 유잉이 자신의 어릴적 영웅이었다고 뒤늦게 고백했다. 유잉을 그렇게 대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가라데 영화에서 제자가 최고가 되려면 스승을 이겨야 했던 것처럼, 유잉이 자신보다 낫다는 걸 알았기에 그렇게 해서라도 스스로를 밀어붙여야만 유잉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던 것이라고. 그러면서 유잉은 비록 우승은 못했지만 위대한 승부사이자 위대한 선수로 많은 업적을 남겼기에, 역대 Top5 센터에 유잉이 꼭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객관적인 커리어는 오닐이 유잉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에 오닐의 이러한 자기고백은 당시 나름 화제가 되었다.

의외의 사실은 오닐과 매치업한 선수 중 한 경기에서 가장 뛰어난 기록을 쌓은 선수가 다름아닌 유잉이었다는 점. 정규시즌 기준으로 오닐과 매치업해서 한 경기 35득점 15리바운드 이상을 기록한 선수는 유잉이 유일하다.[42] 또한 오닐과의 맞대결에서 무려 8경기나 30득점 이상을 뽑아내 오닐을 상대로 가장 많은 30득점 이상을 뽑아낸 선수이기도 하다. 오닐이 NBA에 입성할 무렵 유잉은 전성기에서 내려오고 있던 시점임을 감안하면 놀라운 기록.

투박한 외모 덕택에 도저히 상상하기 힘들지만 대학 전공이 미술(!)이다. 실제로 굉장히 명석하고 똑똑한 인텔리 타입이라고 한다. 전성기 시절에 NBA 선수들이 꼽은 "월스트리트 금융가에 진출했을 때 가장 큰 성공을 거둘 것 같은 선수는?" 이라는 설문 항목에서 유잉이 1위로 꼽혔다. 1997년부터 2001년까지 선수협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43]

1993년 오프시즌때 우리나라에 유잉 농구화 홍보를 겸해서 2박 3일간 방한했던 적이 있다. 사업 때문에 방문한 것이지만 그 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농구 클리닉은 물론 당시 MBC에서 방영하던 '쇼, 스포츠'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으며, 강원도 산간벽지 초등학교에 방문해 농구대를 기증하고 어린이농구 후원활동을 벌이는 등 짧은 시간동안 봉사도 많이 해 주고 간 편.

아들로 패트릭 유잉 주니어가 있다.[44] 그 바람에 유잉은 시니어를 달게 되었다. 주니어가 NBA에 입성하자 유잉을 기억하던 많은 올드팬들은 주니어도 아버지의 반만큼이라도 활약해주길 바랬지만, 호부견자인지 그다지 활약하지 못하고 있다. 하부리그를 전전하고 있으며 간간히 닉스에 콜업되기도 했지만...거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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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조지타운 대학교 닉네임인 Hoyas를 말한다. 그런데 무슨 뜻인지, 정확한 기원이 무엇인지는 조지타운 대학측도 잘 모른다.(...) 영문사전에 보면 덩굴풀이라지만 그런 거일리가...
  • [2] 의외로 미국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대신 다른 나라들에서 자주 쓰이는 별명. 생김새 때문도 있지만, 유잉이 뉴욕의 심장이라 불리며 활약했던 것과 더불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의 킹콩의 활약이 높은 싱크로를 보이는지라...
  • [3] 저 눈에 띄는 고릴라같은 얼굴(...)과 외모를 모티브로 한 슬램덩크채치수덕에...
  • [4] 1999년까지 코치를 담당했으며, 이후 현 코치인 존 톰슨 3세는 이 코치의 아들이다.
  • [5] 앨런 아이버슨같은 가드 출신도 있지만 패트릭 유잉 이래로 디켐베 무톰보, 알론조 모닝같은 NBA에 족적을 남긴 정통파 센터들이 조지타운 대학교를 나왔다. 그외 현역 선수로는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센터 로이 히버트,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의 센터 그렉 먼로등이 있다.
  • [6] 통칭 빅 게임 제임스. 후일 쇼타임 레이커스라 불리게 되는 LA 왕조에서 압둘자바, 매직 존슨과 함께 트리오를 형성했다. 별명처럼 중요한 경기에서 활약이 굉장했던 강심장을 지닌 포워드였다.
  • [7] 댈러스 매버릭스, 시애틀 수퍼소닉스 등에서 3점이 가능한(!!!) 준수한 센터로 활약했다. 팀 동료였던 조던과 NBA 파이널에서 레이커스 소속으로 한번, 수퍼소닉스 소속으로 한번씩 만나기도(각각 91년, 96년).
  • [8] 퍼킨스는 커리어 말미인 2000시즌에 인디애나 페이서스 소속으로 파이널을 한번 더 밟지만 레이커스에 석패하고 만다. 콩라인? 여담으로 60년대 셀틱스 이후 3연속 우승은 3번 달성되었는데 3차례 모두 해당팀이 (91-93불스, 96-98불스, 00-02레이커스) 우승 첫해에 파이널에서 퍼킨스의 소속팀을 꺾었다는 공통점이 있다...우연하게도 퍼킨스가 은퇴한 이후 3연속 우승팀이 등장하지 않고 있는데 징크스라고 하긴 약하지만 흥미로운 부분. 즉 3연패를 하고 싶으면 퍼킨스를 먼저 밟아야 한다는 소리. 르브론이 올해 파이널 전에 은퇴한 퍼킨스의 집을 방문해 밟아버렸으면 파이널에서 그렇게 무력하게 무너지지 않았을수도있...나??
  • [9] 그때는 이후 이어지는 질기고 질긴 악연을 상상조차 못했겠지만...지못미 유잉
  • [10] 물론 오해는 하지 말 것이 이 둘은 절친 사이이다. 실제로 여러 번의 인터뷰에서 조던은 패트릭 유잉을 최고의 센터로 뽑기도. "올라주원? 걔는 스몰포워드잖아" 정작 그래놓고 최고의 스몰포워드로는 대학선배 제임스워디를 뽑았다
  • [11] 여담이지만 이때 유잉이 만약 동기들과 마찬가지로 얼리 엔트리를 제출했다면, 하킴과 치열한 경쟁을 했겠지만 84년 드래프트의 1번픽은 유잉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대학무대에서 유잉의 가치는 타 선수들에 비해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센터보강이 절실했던 포틀랜드가 30년동안 두고두고 놀림당할 일도 없었을 듯.하킴을 놔두고 여전히 2번픽으로 샘 보위를 뽑았을지도
  • [12] 참고로 이 경기에서 빌라노바가 이길거라고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당시 조지타운은 톱시드팀에 역대 최고의 대학 선수 중 한명이라 인정받던 유잉이 이끄는 팀이었고, 빌라노바는 별 스타플레이어도 없는 8번 시드, 그냥 그럭저럭 강한 팀이었다. 그런데 이 경기에서 빌라노바는 무려 필드골 성공률 78.6%라는, 그야말로 단체로 신들렸다고 할만큼 말도 안되게 슛이 터져 승리를 거머쥔다. 감이 안 잡힌다면, 보통 농구에서 팀의 필드골 성공률은 5할만 넘어도 준수하고, 6할을 넘으면 단체로 삘받은 거고, 7할을 넘으면 던지는 족족 다 들어가는 엽기적인 수준이다. 참고로 2014 NBA결승 3차전에서 샌안토니오 스퍼스가 전반에 75.8%를 기록했는데 전반 24분동안 디펜딩 챔피언 히트를 상대로 21점차를 냈다.이렇게까지 슛이 들어갔는데 2점밖에 안 난건 오히려 유잉과 조지타운의 위엄인 셈.
  • [13] 당시 이 과정을 놓고 설왕설래가 많았다. 원래는 최하위팀 둘이 동전 던지기로 1순위를 결정하던 방식이 많은 부작용이 있다하여 로터리가 처음 적용된 해였기 때문...인데 이에 대해 데이비드 스턴이 일부러 빅마켓인 뉴욕에 유잉을 주기 위해 새로운 방식을 도입했다고 말이 많았다. 심지어 로터리 추첨에서 닉스 것만 귀퉁이가 접혀져 있어서 스턴이 그걸 일부러 뽑지 않았다는 둥...뭐...진실은 저 너머에.
  • [14] 참고로 패자 인디애나가 뽑은 선수는 오클라호마대학교의 파워포워드 웨이먼 티스데일인데, 이 선수는 인디애나, 새크라멘토, 피닉스의 주전 파워포워드였고 15~20점 득점을 올리던 파워포워드지만 2번픽 답지 못하게 올스타에 뽑히지도 못한 평범한 커리어를 보내고, 은퇴후엔 재즈 베이시스트로 활동하다가 2009년 세상을 떠났다. RIP. 그런데 당시 이 해 드래프트에서 유잉은 최고의 선수임에 틀림없었지만, 결과적으로 드래프트의 주인공은 유잉도, 닉스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유타 재즈는 그리 높지도 않은 13순위로 칼 말론을 뽑았기 때문에.둘 다 우승은 못했으니 쌤쌤
  • [15] 하지만 이 당시 입었던 무릎 부상은 안타깝게도 이후 유잉에게 거의 대부분의 운동능력을 빼앗고 만다.
  • [16] 당시 NBA의 골밑은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치열한 육체적 충돌의 경합무대였다. 때문에 1대1 포스트업이나 페네트레이션으로 상대 골밑을 파고드는 상대에 대한 견제가 거의 폭력에 가까웠다. 그래서 대부분의 팀들은 에이스와 팀원을 보호하고, 상대방과의 충돌에서 거칠게 밀어붙이는 선수들을 한 두명씩 꼭 갖고 있었다. 이런 선수들은 수시로 주먹다짐이 벌어지던 80년대 NBA에서 팀간의 충돌이 생길 경우 에이스를 등 뒤에 보호하고 선빵(...)을 날리거나 몸빵(...)을 하는 말 그대로 보디가드 역할을 수행했다. 팀원이 전부 갱스터 분위기였던 디트로이트를 제외하면. 찰스 오클리는 이런 리더쉽이 강한 블루워커의 표본과도 같은 선수였다.
  • [17] 찰스 오클리는 당시 어린 팀이던 시카고 불스에서 군기반장이자 조던의 보디가드 역할을 맡고 있었으며, 실제로도 조던의 매우 가까운 친구였다. 때문에 당시 시카고 불스가 피스톤즈 배드 보이즈의 조던 룰이라 불리는 집단 다구리에서 조던을 보호하던 찰스 오클리 대신 카트라이트를 영입하기로 하자 조던의 분노는 극에 달했으며, 빌 카트라이트는 나이도 새파란 에이스의 분노를 한 몸에 받느라 죽을 고생을(...) 했다. 실제로 조던이 카트라이트를 진정한 팀원으로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참고로 오클리는 조던이 위저즈로 복귀했을 때도 먼저 영입을 주도할만큼 친한 사이이며, 구단주인 현재도 사석에 조던이 나타날 때면 늘상 함께 다니는 사이일 정도. 물론, 불스가 이 트레이드를 한 이유는 센터 빌 카트라이트에 대한 필요도 있었지만, 87~88년 1라운드 전체 10번으로 지명한 클렘슨대학교의 파워포워드 호레이스 그랜트를 주전 파워포워드로 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랜트는 구단의 기대대로 불스 첫번째 3연패 왕조에 넘버3로 대활약했다.
  • [18] 6차전까지의 경기들이 대부분 10점 내외의 점수차였는데, 7차전은 29점차로 그야말로 압살. 그야말로 조던의 위엄이다.
  • [19] 94 파이널 올라주원 평득 26.9점 야투율 50.0% VS 유잉 평득 18.9점 야투율 36.3%. 유잉의 특기였던 점퍼는 파이널에서 저주라도 걸린 것처럼 모조리 빗나갔으며, 스탁스가 7차전에서 그 삽질을 했는데도 시리즈 전체 야투율은 유잉이 더 낮았다. 당시 기준으로 역대 파이널 최다블럭 기록(5차전8개, 시리즈 전체 30개)를 세우는 등 수비에서는 올라주원 못지않은 활약을 보였지만 공격에서 저지른 삽질은 심각하기 짝이 없었다.
  • [20] 당시 마이애미 히트와 뉴욕은 유잉과 모닝의 조지타운 선후배 맞대결, 라일리가 키워낸 두 팀이라는 점, 동일 디비전 소속이라는 다양한 측면에서 상당한 라이벌의식이 들끓고 있었고, 이 해 시리즈에서는 난투극까지 벌어졌다. 결국 난투극으로 인해 닉스는 많은 선수가 징계로 출장할 수 없게되면서 무기력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 [21] FA가 된 첫날에 바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닉스의 제시간 계약기간과 금액에 한 번에 사인했다고 한다. 타 팀과 접촉으로 몸값이나 계약기간을 늘릴 수도 있었지만 유잉은 그런 것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았을 정도로 닉스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선수였다.
  • [22] 이미 전 시즌 최고의 전력을 맞췄던 닉스의 유일한 약점은 유잉을 받쳐줄 백업 센터가 없다는 부분이었다. 이 약점을 공격력은 형편없어도 수비만큼은 매 경기 10리바운드 2블록슛 이상을 보장해주던 수비형 센터의 스페셜리스트 크리스 더들리를 데려오면서 단숨에 해결했다. 오죽했으면 당시 이 소식을 전하던 국내 언론 기사 제목이 '더들리 영입으로 신나는 뉴욕(...)' 이었다. 뉴욕은 그 댓가로 시라큐스 출신으로 신인 첫해 좋은 모습을 보여준 존 월라스를 포기해야 했다.
  • [23] 전해에 뽑았던 월터 맥카티, 단테 존스(여러분이 아는 그 단테 존스 맞다), 그 해 드래프트에서 뽑은 신인 존 토마스에 샐러리 필러용으로 스캇 브룩스(현 오클라호마 시티 감독)까지 4명의 선수를 퍼줬다. 미래 따위는 생각지 않고 오로지 그 해 우승만을 노리겠다는 닉스의 결단이었다.
  • [24] 주전으로 -패트릭 유잉, 찰스 오클리, 래리 존슨, 앨런 휴스턴, 찰리 워드-에 벤치멤버로 -크리스 더들리, 벅 윌리암스, 크리스 밀즈, 존 스탁스, 크리스 차일즈-로 베스트5를 하나 더 꾸릴 수 있었다. 앨런 휴스턴이 오기 전 닉스의 주전 슈팅가드로 활약했던 스탁스는 논외로 치더라도 나머지 네 명 모두 닉스에 오기 전엔 각자 타 팀의 스타팅 멤버로 활약했던 선수들이었다.
  • [25] 선수생활 내내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고통받았던 유잉이었지만 이런 시즌 아웃급 부상은 커리어에서 처음으로 겪는 일이었다. 유잉의 나이로 보나, 미래를 포기하고 그 시즌에 모든 것을 올인했던 팀 사정으로 보나 사실상 마지막 우승 도전 기회나 다름없었기에 너무나 안타까운 부상이었다.
  • [26] 그 전까지 10년 연속 올스타전에 출전했고 이 시즌 또한 출전이 유력했지만 하필 MSG에서 열리는 올스타전을 뛰지 못하게 되었다. 불운도 이쯤되면 정말 가지가지.
  • [27] 당시 애석하게도 뉴욕 언론에서는 트윈 테러를 찬양하면서 부상에 시달리던 유잉을 신나게 까댔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에 감독이었던 제프 밴 건디는 이에 대해 유잉의 공격력은 비록 예전만 못하지만 스탯과 무관하게 팀에게 줄 수 있는 안정감과 수비력, 정신력에서의 공헌이 있기에 비로소 결승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이라며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인간들은 한마디로 멍청한 놈들이라고 일갈했다.
  • [28] 재미있는 것은 유잉이 결장했던 기간동안 유잉 대신 주전 센터를 맡아줬던 선수가 2년 전 유잉이 당했던 시즌 아웃급 부상의 원인 제공자였던 앤드류 랭이었다. 당시 밀워키 벅스 소속이었던 랭은 이후 시카고 불스를 거쳐 뉴욕 닉스에 합류하는데, 당시 닉스는 유잉의 백업 센터 크리스 더들리마저 무릎 부상으로 개막전부터 출전이 불가능하게 되자 시즌 개막을 한달 여 앞두고 급히 제 3의 센터로 랭을 영입했다. 유잉에게 고의로 파울한 것도 아니었던지라 유잉과의 관계는 별 문제 없었다고 한다.
  • [29] 유잉과 같은 나이대의 올라주원 44경기 출전에 경기당 평균 23.8분 10.3득점 6.2리바운드, 데이비드 로빈슨 64경기 출전에 경기당 평균 26.2분 8.5득점 7.9리바운드, 샤킬 오닐 53경기 출전에 경기당 평균 23.4분 12득점 6.7리바운드. 4대 센터 중 가장 평가가 낮은 유잉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늦은 나이까지 더블-더블이 가능한 정상급 기량을 유지했던 선수는 유잉이었다. 나머지 세 선수가 선수생활 전반을 운동능력에 상당 부분 의존해왔던지라 30대 후반에 그만큼 낙폭이 컸던 것에 비해, 이미 데뷔 초 무릎부상으로 운동능력을 모두 상실했던 유잉은 그 때부터 신체능력보다는 철저한 기본기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많은 나이와 만신창이가 된 몸상태에도 불구하고 저런 준수한 성적을 기록할 수 있었던 비결.
  • [30] 1999시즌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유잉이 없이 파이널에 진출 성공했을때부터 일부 언론과 팬들로부터 슬금슬금 나오기 시작한 유잉 무용론은 2000시즌 컨퍼런스 파이널 총 6경기동안 유잉이 빠진 두 경기를 모두 이긴 반면 유잉이 뛴 네 경기를 전패하고 파이널 진출에 실패했을 때 절정에 달했다. 한 마디로 닉스에 유잉이 없는 쪽이 경기력이 더 낫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유잉의 활약으로 이길 수 있엇던 경기는 완전히 배제하고, 유잉이 없이 이긴 경기에만 초점을 맞춘 지극히 보고싶은 것만 골라 보는 결과론으로서 무엇보다 경기에 직접 뛰는 당사자들에게조차 빈축을 샀다. 당시 닉스 감독 제프 밴 건디는 유잉 무용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멍청이들(fools)' 이라는 한 마디로 종결을 지었으며, 트윈 테러의 한 축이었던 라트렐 스프리웰은 '유잉 없이 이긴 경기만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유잉 없이 게임을 뛰는 것은 유잉과 함께 뛰는 경기보다 몇 배는 힘이 든다'고 점잖게 일침을 놓았다. 실제로 99년 히트와의 플옵 최종전에서 앨런 휴스턴의 0.4초 버저비터로 극적인 업셋을 달성한 경기에서는 모닝을 압도했던 유잉의 활약이 없었다면 그런 클러치 상황을 만들 수조차도 없었고, 이듬해 히트와의 플옵 시리즈에서는 2승 3패로 뒤진 일리미네이션에서 두 경기동안 35득점 28리바운드를 쓸어담으며 팀을 위기에서 구해냈으며, 결정적으로 유잉이 떠난 후 글렌 라이스를 데려와 트리플 테러를 구축했던 2001년에 정규시즌 성적의 하락은 물론, 플레이오프에서도 근 13년만에 1라운드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맛보며 기나긴 닉스 암흑기의 서막을 알렸다.
  • [31] 그야말로 닉스에게 잃어버린 10년을 안겨준 악의 축 2인 중 1명. 뉴욕 닉스항목을 참조.
  • [32] 뉴욕 닉스, LA 레이커스, 시애틀 슈퍼소닉스, 피닉스 선즈 4팀이 연루되어 픽까지 포함하면 16명씩이나 움직인 초 대형 트레이드였다. 뉴욕은 유잉과 백업 센터 크리스 더들리를 보내고 그 댓가로 글렌 라이스, 트레비스 나이트, 룩 롱리, 버논 멕스웰, 라자로 보렐, 블라디미르 스테파이나에 미래의 1라운드픽 2개와 2라운드픽 2개를 포함 무려 10명의 선수를 받아왔다. 하지만 이 중에 제대로 쓸 수 있었던 선수는 글렌 라이스 하나 뿐이었으며 그나마도 트윈 테러와 포지션이 중복되어 식스맨으로만 뛸 수 밖에 없었고, 거기에다 꼴랑 1시즌만 뛰고 휴스턴 로케츠로 트레이드되어 떠났다. 리빌딩을 명목으로 받아온 1라운드픽 2개는 한 시즌도 참지 못하고 이미 전성기가 지난 마크 잭슨과 롤플레이어에 불과했던 오델라 헤링턴이랑 바꿔먹어버려 결론적으로 스캇 레이든이 유잉을 트레이드한 명분 자체에 스스로 먹칠을 한 셈이 되었다.
  • [33] 이 당시 라이벌이었던 하킴 역시 휴스턴과 계약 실패로 토론토로 이적했는데, 휴스턴팬들 또한 휴스턴의 레전드가 이렇게 떠나버린 것에 대해 엄청나게 분노했었다. 뭐 그나마 하킴은 기대보다 낮은 금액에 자기가 튕긴 거라 안습함이 덜하긴 했지만...유잉은 그저 지못미
  • [34] 한국에선 시대가 완전히 다른 92년 전체 1위 샤킬 오닐을 조기 은퇴한 도허티 대신 끼워넣는다.
  • [35] NBA 데뷔는 해군 의무복무를 마친 89년부터다.
  • [36] 사실 샤킬 오닐이 데뷔하기 전까지 올스타급 이상 센터중 가장 강한 파워를 자랑하던 선수였다. 다만 오닐처럼 압도적인 건 아니고 약간 우위를 점하는 정도. 그리고 힘에만 의존하는게 아니라 중거리슛과 러닝/점프훅을 포함한 다양한 기술를 이용한 공격을 펼쳤다.
  • [37] 실제로 오닐처럼 중거리슛이 전혀 없고 극단적으로 골밑에만 치중하는데도 경기당 30점 가깝게 때려박을 수 있는 선수는 없었다. (우월한 신체로 종종 오닐과 비교되는 윌트 챔벌린도 페이더웨이슛까지 가능한 다양한 공격옵션을 자랑했다.) 중거리에서 득점을 못하는 선수는 골밑으로 못오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에 결국 한계를 드러낼수밖에 없기 때문. 그러나 오닐은 워낙에 압도적인 신체능력(힘만 어마어마하게 센게 아니라 민첩성이나 점프력도 덩치에 비해 특급)과 사이즈를 지닌 선수라 이게 가능했던것. 그리고 공격범위기 좁아서 그렇지 골밑에서 득점감각과 기술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
  • [38] 유잉 팬들이 가장 애석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1994년 파이널에서 한 경기만 더 잡고 우승했다면 4대 센터 중 가장 먼저 우승의 위업을 달성한 프리미엄 때문에라도 최소한 지금보다는 평가가 덜 박했을 것이라는 부분이다. 그 반면 그만큼 플옵에서 올라주원의 퍼포먼스가 어마어마했다. 일례로 데이비드 로빈슨이 정규시즌에 올라주원과의 맞대결에서 우위를 점했으나 95플옵에서 역대급 하일라이트 필름에 절대 빠지지 않는 드림쉐이크와 함께 호되게 털리며 이미지가 훅 가버린 탓에 로빈슨이 늘 올라주원에 발렸다고 세간에 잘못 인식이 되어버린 예가 있다.
  • [39] 실제로 세컨드팀 선정 횟수가 무려 6회에 이른다.
  • [40]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유잉이 뉴욕에서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이라는 견해도 존재한다. 대개 폿볼이나 야구, 농구 등 종목을 가리지 않고 뉴욕을 거친 많은 스타급 선수들이 언론과 투닥거리다 진저리를 치며 먼저 뉴욕에서 떠버린 케이스가 많았던 반면, 유잉은 아무리 가십성 기사를 써도 상대를 해주질 않았고 이게 한해가 가고 두해가 가며 15년까지 이어지자 언론이 먼저 제풀에 나가떨어진 케이스.
  • [41] 하필이면 감독 데뷔전이 친정팀 뉴욕 닉스전이었다. 결과는 패배(...) 감독으로서의 첫승은 2013년 11월 13일 보스턴 셀틱스 전에서 기록
  • [42] 다만 플레이오프까지 포함시킨다면 하킴 올라주원이 1995 파이널에서 오닐을 상대로 35득점 15리바운드 이상을 기록한 적이 있다.
  • [43] 2014년 현재 선수협 회장은 크리스 폴
  • [44] 참고로 아버지와 진짜 많이 닮았다. 왕콧구멍까지 그대로 빼다박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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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3-24 23:4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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