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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페 2세

last modified: 2015-03-19 09:45:12 by Contributors

통일 스페인의 역대 국왕
카를로스 1세 펠리페 2세 펠리페 3세

(ɔ) Titian from
갑옷을 입은 펠리페 2세, 티치아노 베첼리오[1], 1551년경
왕호 스페인의 왕 펠리페 2세 (Felipe II Rey de España)
생몰년도 1527년 5월 21일 ~ 1598년 9월 13일 (71세)
출생지 스페인 바야돌리드
사망지 스페인 엘에스코리알
재위기간 1556년 1월 16일 ~ 1598년 9월 13일

Contents

1. 개요
2. 치세의 명암
3. 콤플렉스와 가톨릭에 대한 집착
4. '서류왕'으로서의 행적
5. 네덜란드의 이탈
6. 영국과의 급격한 불화와 칼레 전투
7. 후계자 문제와 파산, 그리고 종교적 성과
8. 후대의 평가

1. 개요

Felipe II (1527.5.21 ~ 1598.9.13)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제2대 국왕. 스페인 재위 1556 ∼ 1598.

영국에서는 필립 왕, 프랑스·독일·오스트리아 등에서는 필리프 왕으로 불린다. 포르투갈 왕으로서는 필리프(Filipe) 1세, 스페인에서는 펠리페 2세로 불린다.

카를 5세의 장남이자 스페인에서의 후계자로, 유럽 최대 최강의 초강대국으로서 황금 시대 스페인을 통치한 왕이다. 이 시기 스페인은 잉글랜드, 프랑스, 교황청 할 거 없이 모두 그 군대의 깃발과 함대만 보아도 벌벌 떨 만큼의 강대한 국력을 자랑했고, 대영제국보다 훨씬 일찍 유럽, 북아프리카, 아메리카, 태평양, 아시아에 걸쳐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유지하였으며[2], 이 과정에서 다른 유럽 강국들에게 몰매를 얻어맞고 특히 네덜란드라는 걸출한 영지[3]잉글랜드라는 훌륭한 파트너십를 잃은 것도 모자라 아예 그쪽에 해상 입지를 빼앗긴 근본적 계기를 만든 원흉으로 지목되어 비판을 받은, 실로 파란만장했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군주이다.

2. 치세의 명암

치세 중 스페인이 누대로 워낙 잘나가고 국력이 압도적이었거니와, 펠리페 2세 본인도 종교적 외곬수성과 네덜란드에서의 폭정, 공격적 대외 원정 등으로 말미암아 적대국들을 많이 야기했기에 어그로를 많이 끌어 치세 중 공과 과가 매우 극명하게 나뉘는 왕으로서 그의 업적은 아래와 같다.

<업적(?)>

  • 1557년 캉탱 전투에서 프랑스군에 승리. 2년 뒤 카토-캄브레시스 조약을 통해 서유럽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당분간 꺾어버림[4].
  •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에서 기즈 가문과 가톨릭 세력을 지원하여 프랑스의 혼란과 분열을 유지시킴. 펠리페 2세가 프랑스 전역에 투자한 것은 그래도 네덜란드 전역에 비하면 훨씬 적은 비용을 들여 많은 효과를 봤다. 물론 위그노 전쟁 이후 급진 가톨릭 세력의 기반이 약해지자 직접 군사를 보냈다가 패하고 반스페인 감정만 키우는 등 뒤끝은 안 좋았지만.
  • 1565년, 영유중이던 필리핀에 무력을 행사해 직할 통치에 들어감. 이 땅에 그의 이름을 따서 필리핀이라 명명. 물론 필리핀 원주민들 입장에서는 천하의 원쑤.
  • 1568년, 잔존중이던 스페인 내 이슬람 교도들을 완전히 찍어눌러 스페인 땅에서 씨를 말림.
  • 1571년, 오스만 제국과의 레판토 해전에서 무적함대를 투입하여 신성 동맹의 승리에 기여함. 여기서 펠리페 2세의 가장 큰 공로라고 한라면 카를 5세의 또 다른 아들이자 자신의 배다른 형제 돈 후안을 총사령관으로 발탁한 점일 것이다.
  • 1580년, 부왕의 정략결혼, 즉 포르투갈 왕족인 모후의 후광에 힘입어 왕계가 끊어진 포르투갈과 그 식민지를 스페인에 합병, 60년간 이베리아 반도 통일. (이베리아 연합)
  • 1584년, 엘 에스코리알 궁전을 완공해 스페인의 부를 과시. 부왕 카를 5세의 묘도 이곳으로 이장했다.
  • 문화적으로 척박했던 스페인에 부르고뉴와 이탈리아 출신의 예술가, 건축가 등을 초빙하여 스페인 바로크 문화의 물질적 토양을 형성.
  • 1554년, 영국 메리 1세와의 정략결혼으로 영국 정계에 밥숟갈을 올리며 훗날 엘리자베스 시대에도 스페인의 물밑 지원을 받는 가톨릭과 아일랜드 세력을 유지. 다만 개인적으로는 매력도 없는 메리 튜더와의 결혼은 불우했으며 영국 입장에서도 흑역사로 기억한다.
  • 부왕 카를 5세(카를로스 1세) 때부터 추진한 콩키스타도르 체제 개혁책[5]을 계승하는 한편 원주민 노예제를 금지하고 스페인이 아메리카와 필리핀을 수백년간 통치할 행정적 인프라를 구축했다. 그는 행정 지역을 재편성하고, 감찰 관료를 주기적으로 보내며, 원주민 노예제를 금지하면서 보다 중앙집권적인 통치 체계를 모색했다. 이러한 펠리페 2세의 개혁은 원주민들의 파악을 확실하게 하는 긍정적인 면이 있었다[6].
  • 네덜란드에서 삽질을 해 놓고도 전쟁을 통해 결국 반기를 든 17개 주 중에서 10개를 굴복시킴. 이 굴복한 10개 주가 훗날의 벨기에. 사실 이 업적의 직접적인 수훈자라면 단연 돈 후안과 함께 당대 스페인을 대표하는 명장알레산드로 파르네제겠지만, 기존의 알바 공 대신 그를 대 플랑드르 책임자로 기용해 병권을 쥐어준 준 것도 펠리페의 안목이라면 안목.

<병크>

  • 잦은 내란과 대외전쟁으로 인하여 국고 탕진. 부왕의 경우 숙적 프랑스 및 교황청과의 전역을 빼면 대체로 방어전과 치안 유지 중심의 전투를 수행했고 또 전비에 걸맞는 충분한 효과를 본 반면, 펠리페가 일으킨 전쟁은 대체로 공격전의 성격을 띈데다 그럼에도 실속 없는 결과물이 많았다. 물론 판토 전투 등 그 나름대로 자랑해도 좋을 만한 군사적 성과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 부왕이 스페인에 흡수시켰던 알토란 땅 네덜란드 통치를 잘못하여 80년 전쟁으로 불리는 네덜란드 독립 전쟁을 유발함. 게다가 이로 인해 떨어져나간 네덜란드는 결국 스페인을 제치고 해상의 패자로 등극해버린다.
  • 1557년부터 1596년까지 총 4차례에 걸쳐 스페인의 국가 파산 선고.
  • 1558년, 메리 1세 사후 즉위한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에게 구혼했으나 퇴짜맞음. 사실 거의 불가능한 결혼이었다. 이후 영국과의 외교관계가 급격히 악화.
  • 1559년, 그 유명한 '금서 목록'을 선포해 사상적 탄압 개시[7].
  • 1588년, 영국과 분쟁을 일으켜 터진 칼레 해전에서 오스만을 이겼던 그 무적함대를 왕창 날려먹음. 동시기에 육상을 통한 네덜란드 원정 또한 실패.
  • 후계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서거. 뒤에 다루겠지만 나름대로 애를 엄청 쓰긴 썼다. 하지만 명색이 도덕을 중시하는 가톨릭 군주면서도 아들의 약혼녀를 NTR해버린 병크만큼은 실로 역사에 남을만한 오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무능한 이미지가 상당한 왕이지만, 사실 그 개인을 뜯어보면 굉장히 불우하다. 그의 치세 중 스페인이 워낙 많은 적을 추가로 양산했고[8] 내성적 성격 탓에 프라이버시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던 펠리페 2세는 살아 생전 어떠한 본인의 사생활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못하게 하였던 반면, 안토니오 페레즈의 밀고 사건[9], 오란녜 공 빌렘의 변호론같은 정치적 숙적[10]에 의한 기록은 많이 남아 후대까지도 많은 비판을 받은 군주이다.

다만 펠리페 2세가 비록 스페인의 황금 시대에 걸맞는 명군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치세의 영욕을 저울질해보면 그래도 자신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며 스페인의 영광을 계승해 그 당대에도 유지시켰다는게 현대 학계 일각의 평가다. 적어도 부왕 카를 5세에 의해 소싯적부터 체계적으로 제왕학을 수업하며 쌓은 정치적 감각과 철저한 종교관념에 따른 신실함은 확실히 보유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포용력과 융통성에 대한 결여만은 어쩔 수 없이 군주적 자질의 결함으로 지적받음에도 말이다.

3. 콤플렉스와 가톨릭에 대한 집착

펠리페 2세는 뛰어난 부왕 카를 5세의 업적을 능가해야 한다는 콤플렉스에 일평생 시달렸다. 부왕은 적장자인 그에게 1540년 밀라노 공작을, 1554년 나폴리시칠리아를, 1555년 플랑드르의 통치권을 부여하며 일찌감치 제왕학 수업을 시켰다. 그리고 1556년에 부왕이 자신에게 스페인 왕관을 넘기고 은둔 생활에 들어가자, 그는 그런 아버지에게 한시바삐 자신의 유능함을 입증해 자랑스런 아들로 칭찬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의 치세 중 가장 큰 핵심 사업의 하나인 거대한 엘 에스코리알 궁전의 건립도 부왕을 기리는 동시에 부왕의 위업을 계승 수행하겠다는 의도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었으며[11], 그 때문에 일부러 부왕의 유해를 그곳으로 이장 안치하였다.

통치권을 막 받았을 무렵의 그는 매우 성실했다. 주야를 불문하고 격무를 마다않았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늘 기도를 잊지 않았다. 심지어 결혼관계 역시 정무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했던 부왕의 신념까지도 본받아 평생 성행위를 기피했다(…). 이건 부왕과 장인마저도 정도가 지나치다고 느낄 정도였다. 아들아, 뭐하는 짓이냐? 고자가 되는 중입니다, 아버지.

그의 통치에 있어서 가장 확연한 성격은 가톨릭 신앙에 대한 광신적 집착이다. 이는 부왕의 유일한 오점이 종교개혁 당시 끝내 유화적으로 마무리를 지어 가톨릭을 수호하지 못했던 것이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외골수적 신앙적 집착은 무력 탄압으로 이어져 국고 탕진과 대내외적인 반대세력을 야기하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사촌뻘인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유화책을 추진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종교개혁과 신앙 투쟁의 시대에 왕의 신심은 어찌 되었든 신민들에게 있어서는 미덕으로 여겨져, 적어도 가톨릭 교인들에게 있어 펠리페 2세는 '유럽에서 가장 경건한 기사도의 군주'로 호평을 받기도 했다. 모리스코 문제를 제외한 스페인 내부 통치에 있어 당시까지도 국론의 일치를 보지 못했던 스페인 내부 통합에 큰 기여를 했고, 오스트리아의 방계 합스부르크 가문을 비롯한 국제 기톨릭 세력의 맹주격인 위치로 장점 또한 많이 가져다 주었다. 물론 그 탓에 적대자들도 늘어나긴 했지만 말이다.

펠리페 2세와 합스부르크 스페인의 광신적이고 전투적인 가톨릭 신앙은 펠리페 2세의 단순한 개인사를 넘어 당시 스페인이란 국가의 역사적 배경을 고려해서 이해해야 한다. 애초에 스페인이란 나라는 레콩키스타를 통해 언어, 문화, 정치 체계가 모두 달랐던 카스티야, 레온, 아라곤, 나바라 등의 이베리아 반도의 소국들이 통합되어 만들어 진 나라이다. 15세기 후반 톨릭 군주 페르난도와 이사벨라의 결혼으로 한 나라로 통일 될 때도 군사적, 외교적 측면에서의 통합만 이루어졌지,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서는 여전히 정책이 다른건 물론이오, 당장 카스티야인과 아라곤인들은 서로를 외국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12]. 당장 이베리아 본토 내에서만 해도 이렇듯 정치적 통합에 장벽이 많았는데, 아라곤령의 남이탈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상속지였던 플랑드르, 부왕 치세에 더욱 확장된 식민지, 펠리페 2세의 제위중 편입한 포르투갈까지 포함한다면 '스페인'이란 나라의 실질적인 정치적, 사회적 구심점은 레콩키스타와 이교도에 대한 가톨릭 신앙의 십자군적 투쟁이라는 공통적인 역사적 경험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상황에서 스페인이 종교적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정치체로서 자살에 가까운 행위였으며, 펠리페 2세의 유별난 광신성은 이러한 근본적인 역사적 문맥에 개인적인 성향이 가미된 것 정도라 봐야 할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스페인의 종교적 열기는 정치적, 사회적 차원으로도 그대로 이어져 실제로 스페인에서는 렌티노 공의회보다 50년 가량 앞선 가톨릭 군주와 스네로스 추기경시절에 이미 성직자의 교구 부재 문제, 사제들의 무지함, 교회 내의 위계 질서 확립 등 기존 교회가 시달리고 있던 많은 문제를 혁파하고 자체적인 재번역판 성경 출간[13], 알칼라 대학 설립, 인문주의 학문적 토양에 기반한 신학 교육 체제 정비 등 훗날 가톨릭 교회 전체가 직면할 개혁 자체를 대다수 이룬 상태였다. 종교 개혁의 시대에 프랑스를 제외한 다른 가톨릭 세력이 [14] 스페인의 리더쉽을 따른건 이러한 신앙적인 측면에서도 스페인이 선례를 보여주어 여러 면에서 따를 만한 입장에 되어 있었던 점 또한 크다.

실제로 네덜란드를 제외한 다른 제유럽 국가 중 합스부르크 왕조 스페인은 다른 국가들이 시달렸던 식량 폭동도 적었고, 전통적 자치권을 둘러싼 아라곤과 남이탈리아의 단편적 반란들을 제외하고는 내부적으로는 굉장히 안정적인 편이었고, 많은 동시대 스페인인들은 "스페인의 안정은 종교적 안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라는 식의 기록과 발언을 통해 이를 뒷받침하기도 했다. 애초에 종교개혁이 휩쓸고 간 16세기, 17세기 유럽은 종파적 배타성이 일반적이었다. 종교가 달라? 이단이라고? 그럼 죽여야지! 종교적 관용은 네덜란드, 베네치아, 독일의 자유시들 같은 상업적 여건 때문에 공존이 불가피한 곳에만 이루어졌다. 배타성과 탄압이 일반적인 시대에 현대적 가치를 들이 대는 점부터 펠리페 2세와 황금기 스페인에 대한 부당한 견해라고 보는 것이다. 30년 전쟁당시의 프랑스나 작센 선제후국 처럼 동시대에 종교적 여건과 분리 된 실리 추구 정책을 폈거나 폴란드-리투아니아, 오스만 제국 처럼 종교적 관용이 그 특징인 동시대의 다른 사례들도 있지만, 이러한 나라들과 스페인의 경우는 원론적으로 그 문맥 자체가 다른게 바로 저 위의 역사적 전통에 있다.

그리고 기억하자. 현대적 가치관에 따르면 관용과 다양성의 긍정적 선례로 평가 받는 위의 예외적인 국가들이지만, 실제로 전성기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예수회의 학문적 지원을 등에 엎고 폴란드를 스페인, 이탈리아 도시 국가 같은 공격적이고 본격적인 카톨릭 단일 국가로 만들고 싶어하는 귀족들, 란실베니아헝가리의 개신교도들과 연합하여 종교 개혁을 폴란드 내에서도 확산 시키려는 개신교 귀족들, 그리고 양쪽 라틴계 기독교들 사이에 쩌리가 되지 않고 정치적, 종교적 자치를 확보하려는 현대 우크라이나 일대의 정교회 계열 코사크 귀족들이 정신없이 삼파전을 벌이면서 국력의 막대한 부분을 손실했다 [15].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 치하의 종교적 관용은 애초에 비무슬림들의 열등함과 차별을 기반으로 깐 불평등한 공존이지, 현대적 의미에서의 관용이 아니다. 베네치아, 함부르크, 리가 등 종교적 관용의 보루로 평가 받는 도시 국가들도 역시 경제적 필요에 따른 이교도의 존재가 허락을 받은 거지, 내부적 민간 차원에서 주도하여 공권력도 은근슬쩍 동조한 반개신교, 반카톨릭, 반유대인 폭동은 빵값 오를 때 마다 주기적으로 터졌던 이벤트. 기본적으로 애초에 정교 분리란 개념 자체가 등장하지 않았던 시절에 스페인만 유별나게 광신적이라고 까는 건 핀트가 어긋난 평가다.

게다가 애초에 이 종교 개혁의 시대 당시 가톨릭 세력의 반격의 핵심이 된 렌티노 공의회의 성직자의 교구 참석, 면죄부 판매 문제, 사제 교육의 문제 등 많은 규항 자체가 공의회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의 파격적인 정치적 지원에 힘 입은 스페인 출신의 주교들이 옛날 방식 그대로의 교회 구조를 유지하고 싶었던 친 교황청파와 프랑스 주교들을 상대로 치열한 키배를 벌여 규정 된 반쯤은 스페인이 주도한 개혁이었던 만큼, 이 당시 스페인 입장에서 가톨릭 신앙과 국가적 행보는 불가분의 관계였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애초에 중세 까지만 하더라도 무슬림들이나 들끓는 이베리아 반도 촌구석에 박혔던 촌동네에 불과 했던 카스티야가 르네상스와 근세에 들어와 유럽 정치 전체를 좌우지 할 만큼의 패권 국가로 부상한 동기가 카톨릭 반격의 선봉에 있었던 건데 패권 국가가 자신을 패도로 올려 준 길을 버린다는 거 자체가 말이 될까?

프랑스의 경우야 위그노 전쟁이라는 수백만의 목숨을 앚아간 정신나간 종교 내전을 겪고 종교 문제 자체에 질린 만큼 질린 후에야 이러한 종교적 정체성과 국가적 정체성의 분리가 이루어 질 수 있었고,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귀족들의 자치적 전통이 워낙 강해서 이렇게 종교(뿐만 아니라 사실 국정 모든 일에 관련해)와 관련된 중앙의 확고한 개입 자체가 불가능해서 종교적 관용이 이루어 졌을 수 있었던 것이지, 이러한 특별한 케이스 몇몇을 유럽 전반에 곤란하다. (되려 이 종교적 관용의 가장 큰 사례인 폴란드-리투아니아 또한 17세기 초반 이후 중앙에서 포괄적인 차원은 아니지만 (중앙 권력 자체가 없으니) 사회적인 차원에서 비가톨릭 교도들에게 대한 차별이 만연해 졌고, 기스문드 3세의 치세 때는 이러한 중앙 권력 강화 정책의 일환으로 가톨릭 세력의 강화를 추진하다가 대대적인 귀족들의 반란 때문에 철회해야 됐다. 이는 유럽 전체의 정치적인 구조 자체가 중세적 느슨함에서 근대의 중앙 집권 국가로 전환하던 전근대 시기에서 이렇게 역사적인 큰 여건 자체를 거스르는게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 사실을 고려하면 스페인의 광신성 또한 그 자체적인 문맥에서 어느 정도 볼 수 있을 것이다.)

4. '서류왕'으로서의 행적

펠리페 2세는 몸소 현장에서 뛰었던 부왕과 달리, 합스부르크 왕조의 통치를 인정 받는 대가로 후대 왕들은 스페인 내의 정해진 궁정에서 스페인인 관리를 통해 스페인 중심의 국정운영을 요구한 카스티야 귀족들의 요구에 따라 모든 정무와 전쟁 수행 등 사무 일체를 궁정 내에서만 보았다. 본인 또한 부군에 비해서는 내성적인 성격이기도 했고. 때문에 현지 사정에 정통하던 부왕에 비해 현실 감각이 떨어졌다. 그는 이러한 결점을 행정 체계의 개편을 통해 보완하려 했다. '서류왕'이라는 이명이 붙을 정도로 모든 업무방식을 서류를 통해 보고받고 결재했으며, 온종일 작은 집무실에 틀어박혀 사무를 보았다. 이를 뒷받침하고자 모든 관료 임명권과 서임권을 자신의 권한으로 귀속시켜 스페인의 국정을 중앙집권화했다. 이 방식은 오늘날 관점에서는 그 전에 비해 선진적이긴 했지만, 처리 과정이 매우 더뎠고 당장 팩스도, 이메일도, 전화도 없는 시대에 서류로 통한 공무에 집착하다 보니 공무의 양의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게다가 결벽에 가까운 완벽주의자였던 펠리페 2세는 정부 전반에 걸쳐 직접적인 개입을 하여 결국 본인도 감당하지 못할 양의 서류의 산더미에 묻혀 행정 전반이 더디어 지는 결과까지 초래했다[16].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지방 및 대외 영지에서의 반발을 적절하게 수습하지 못하는 실책을 범하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의심이 많고 우유부단했으면서도 또 한번 결정을 내리면 그 결정이 아무리 실패적이어도 결코 바꾸지 않는 고집마저 강했다. 그 아들과 손자인 펠리페 3세, 4세의 경우 특정 관료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한을 부여해 정국이 레르마 대공, 올리바레스 공작 등의 측근에게 놀아난 반면 펠리페 2세는 반대로 지나치게 신하들을 불신하고 모든 일을 직접 관리하려고 들어 행정 전반에 심각한 차질을 낳았다. 알레산드로 파르네제처럼 검증되고 유능한 신료들과 관리들마저 그의 견제 탓에 기를 펴지 못했던 것이다.

또 평생 여러 나라를 왕래하며 5개 국어를 구사하던 국제인인 부왕에 비해 펠리페 2세는 제대로 된 회화를 스페인어 하나 밖에 못했다.[17] 정치 철학 또한 현장에서 모든걸 지휘하는 타입이었던 카를 5세에 비해 펠리페 2세는 '군주는 자고로 한 장소에서 국정의 모든 일을 내려다 보며 총괄 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엄청난 전쟁 도발량에 비해 정작 본인은 평생 전장에 한 번도 직접 나간 일이 없었다. 게다가 상술했듯이 사무 또한 서류에 입각한 관료제 방식을 통해 수직적으로만 처리하였다.

이러한 행적을 통해 펠리페 2세의 성격이 내성적이고 폐쇄적이라는 평가가 주를 이루나, 국내 순행만큼은 부왕 못지 않게 자주 했고, 가끔씩 경호원이나 측근을 일체 대동 하지 않고 돌아다녔으며, 막상 신민들과 만나면 스스럼 없이 대해 주는 등, 외향적이라고까진 못하지만 나름대로 액티브한 면도 있었다. 동시대 스페인인들은 펠리페를 행차 중에 억울한 일이 있어서 감히 왕의 행차에 끼어 들어 탄원을 하려는 신민이 있었으면 일부로 경비대를 무르고 그 말을 들어 주었던 친근하고 허례허식이 없었던 따뜻한 왕으로 기억했다.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다양한 문화적, 이념적 사업과는 별도로 본인 자신은 허례허식을 경멸하고, 문제나 일의 핵심에 집중하며, 나름 소박하고 서민적인 성격에 가까웠다. 대외적으로는 재위 초 네덜란드 순행을 끝으로 남은 40년간 이베리아를 떠나지 않았으나 포르투갈 왕위를 얻은 후(=자국령에 편입한 후) 반기를 든 포르투갈 귀족들을 진압하고자 직접 리스본에 행차한 일이 있었고, 사실 네덜란드에도 알바 공의 반기 진압 이후인 1575년에 직접 행차 하려고 했는 등[18] 재위기간이 길었던 만큼 대외적 활동 사항은 있다.

사실 애초에 부왕은 근본적으로 동서유럽에 걸쳐 거대한 땅덩어리를 그것도 직접 통치했으니 다른 시기의 군주들과 견주어도 비교하기 너무 격차가 큰 대상이고, 게다가 카를 5세 제위 중 스페인인들의 한가지 불만 요인이 "도대체 왕께서는 언제쯤 진득하게 왕좌에 붙어있는 것이냐"였으니[19] 이러한 펠리페 2세의 정주성은 스페인 내부적으로 보면 비록 반대파 및 이교도에 대한 적극적 탄압으로 말미암아 그에 따른 반발 및 궁정 암투가 가속화되는 부작용은 있었으나 국가 정체성 강화에는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펠리페 본인도 이러한 자신의 국정 방침의 부작용 또한 모르는 점이 아니라 국정에 뚜렷한 지역별, 과제별 통치에 특화 된, 현대 정부 부처 세분화의 선례가 되는 자문회의 설치와 도로, 우편 시스템의 전반적인 정비, 체계적인 정보 기관 구축 등을 통해 권력의 집중화에 따른 비효율적인 비대화 또한 줄이려고 노력을 했으며, 결과적으로는 통치해야 했던 땅의 범위와 문제들의 산재함에 비교하면 당시 스페인 국정 체계는 타국에 비하여 훨씬 더 효율적이고 일관적이었던 편에 속한다. 총체적으로 평가하자면 부군의 시절에는 여전히 합스부르크 가문의 사적인 보편 제국에 가까웠던 합스부르크 제국이 펠리페의 치세를 통해 스페인 중심의, 스페인이 주도하고, 주로 스페인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는 본격적인 스페인 제국으로 변화 했다 정도로 말 할 수 있다.

5. 네덜란드의 이탈

펠리페 2세의 비타협적 종교관과 독불장군 성향이 가장 화근을 끼친 것은 플랑드르였다. 플랑드르는 부왕인 카를 5세에게 있어서는 고향이자 자신을 서포트해준 기반이었으나, 고지식한 펠리페 2세에게는 그저 스페인의 일개 속령 이상이 아니었다. 펠리페 2세는 전통적인 도시적 자치권을 누리던 플랑드르를 철권으로 통치했다. 먼저 현지 사정에 익숙한 자신의 누이를 총독으로 파견했다.

흔히 네덜란드 독립 전쟁을 이야기 할 때 가장 큰 요인으로 종교를 꼽지만 이는 그에 앞서 선행된 펠리페의 가혹한 폭정에 대한 반발 구심적 요인으로서 급부상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당할 것이다. 펠리페 2세의 제위 도중 네덜란드 지방에서 신교도가 인구의 다수를 차지했던 지역은 역설적으로 스페인군이 다시 점령하는데 성공한 엔트워프, 겐트, 브뤼셀 같은 지역이었고, 암스테르담이나 하를렘 같은 북부 네덜란드의 대도시들을 비롯한 대부분 지역은 17세기 이전 까지만 해도 여전히 가톨릭이 다수였다.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서 종교 문제는 기폭제적 역할을 하긴 했으나, 직접적인 원인은 종교가 아니라 수 백년 동안 상업 도시로서 자치와 지역적 정치적 자유를 중시하는 네덜란드 지방의 정치적 전통을 무시한 점이 더 크다. 단적으로 반란 초기의 지도자였던 오란녜 공 빌렘[20], 에그몽 백작 라모랄, 후른 백작 필리프 몽모랑시를 포함하여 반란을 주도한 귀족층은 대부분이 가톨릭이었다. 종교 문제가 쟁점이 된 계기는 이러한 네덜란드의 도시들은 상업적, 정치적 전통에 따라[21] 종교적 관용과 공존을 인정 하는 것이 전통이었는데 이러한 전통이 없는 스페인은 개신교도들을 이단으로 찍어 누르려고 하니 이를 막으려고 한 네덜란드의 정치적 엘리트들과 충돌하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 유럽에서도 첫 손가락에 꼽히는 수준의 직물 사업 중심지로서 유럽 경제의 핵심이었던 곳은 암스테르담이다.

정리하자면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큰 역사적 배경은 이미 부르고뉴 백국 시절, 즉 15세기 후반 부터 내려오는 해안가의 상업적 자치 도시들의 자유로운 정치적 전통과 부르고뉴의 공작들과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들로 내려오는 중앙 집권적 정치적 변화가 종교라는 기폭제를 통해서 폭발하였다고 보는게 맞다. 사실 개신교에 대한 탄압과 정치적 단일화는 부왕 카를 5세 시절부터 쭉 이어졌던 정책이지만 네덜란드인들은 그래도 카를 5세를 동향인으로서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에 대해 큰 반발을 하지 않았다. 여기서 펠리페 2세가 저지른 확실한 잘못은 대대적인 반란이 아니라 과격화 된 하급 귀족과 마드리드 사이에서 중재를 하려고 하였던 에그몽 백작 라모랄을 순식간에 처형해 버리고, 반란의 기운이 조금이라도 거세지자 마자 알바 공작을 통해 계엄령을 내리는 등 정치적 불만과 대대적인 반란이라는 두 과정 사이를 섬세하게 해결하려고 하는게 아니라 무조건 내 편 아니면 적 편이라는 편협적이고 독단적인 방식으로 찍어 눌렀다는 것에 있다. 전 세계를 돌아 다니면서 장기적인 안목과 그를 위해 조신할 줄도 알았던 부왕에 비하면 확실하게 그 좁은 맹렬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연유로 네덜란드의 귀족들을 중추로 스페인 당국에 대한 저항이 일어나자 신교도들의 반기는 더욱 거세져 1566년부터 네덜란드 전역에 걸쳐 신교도들의 상파괴 운동이 일어났다. 상황이 이리 되자 스페인 당국에서는 당대 최고의 군인으로 명성이 높았던 강경파 알바 공작을 총독으로 파견하여 귀족들을 처형하고 종교 재판을 실시 하는 등 폭압적인 탄압책을 실시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로 결국 네덜란드 전역은 반란의 불길에 휩싸였으며, 반란을 진압하러 파견된 스페인군이 급여 미불에 대한 불만으로 엔트워프 같은 대도시들을 약탈하기 시작하자 결국 1581년 네덜란드 의회에서는 펠리페 2세를 정식으로 폐군으로 선언하고 80년에 걸친 네덜란드 독립 전쟁이 시작했다.

신대륙보다 더 큰 부를 안겨주던 네덜란드의 이탈은 스페인에게 있어서는 큰 타격이었다. 펠리페 2세는 남은 플랑드르의 이탈을 막기 위해 더 열심히 틀어막았다. 불행 중 다행히도 157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펠리페 2세의 일련의 중앙집권적 식민제도 정비에 더해 기술적 발달에 따른 새로운 '은 제련법'이 결정적인 빛을 보았고[22], 이를 통해 신대륙의 부가 안정적으로 공급되기 시작한데다, 필리핀을 통한 과의 교역 역시 활황을 띄는 등 여러모로 운이 따라주면서 군인들의 월급도 정상화될 수 있었다. 또한 알바 공의 공석에 대체 투입한 당대의 명장 알레산드로 파르네제의 기막힌 전술 역시 스페인군의 역량 강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를 바탕으로 스페인군은 프랑스어를 쓰는 발롱계 지방을 포함한 훗날 벨기에가 되는 남부 네덜란드의 반란을 진압하고 굴복 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남부 플랑드르는 200년 가까이 더 스페인 통치 하에 남게 되었다. 이는 훗날 네덜란드가 그 땅을 수복하고서도 통치에 실패해 벨기에의 독립을 야기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6. 영국과의 급격한 불화와 칼레 전투

재위 초기에만 해도 그다지 길진 않지만 영국과 그럭저럭 사이가 좋았던 시기가 있다. 1554년, 카를 5세는 당시 막 영국의 국왕이 된 사촌동생 메리 1세와 자신의 장남이자 스페인 국왕이 될 예정인 펠리페와의 결혼을 주선했다. 이 당시 펠리페는 첫 결혼 후 2년만에 아내와 사별해 9년이나 홀아비로 지낸 상태로, 정략적으로도 국가와 가톨릭의 번영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 그녀가 11세 연상임에도 불구하고 큰 불만을 갖고 있지 않았다. 나이와 별개로 영국에서 보내온 초상화도 꽤 미화가 잘 되어 있어 흡족했다.

그러나 막상 만나보니 메리 1세는 (펠리페 2세 생각에) 미인은 커녕 오히려 못생긴 여자였기 때문에[23] 펠리페 2세는 기겁했다. 일단 정략혼인의 결과 명분상으로 영국까지 다스리게 되었지만, 펠리페는 스페인 현지에 틀어박혀서 바쁘다는 이유로 영국을 별로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메리 1세는 펠리페에게 첫눈에 반한 상태였기에, 그가 좀처럼 오지 않자 지독한 뿅가죽네상사병에 걸렸다. 그녀는 펠리페 2세와 결혼할 당시에도 이를 거부하며 영국 현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무력으로 찍어눌렀으며, 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펠리페의 요청을 받아들여 프랑스와의 전쟁에 참가했다. 대체로 영국 내에선 펠리페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지만, 어쨌든 여왕의 남편이므로 속으로야 어쨌든 겉으로는 스페인과 동군연합 관계었다.

1558년, 바다 건너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펠리페 2세는 메리 1세의 이복여동생이자 차기 영국 국왕이 된 엘리자베스 1세에게 청혼했다. 개인적으로는 언니보다 다루기 힘들어 보이는 엘리자베스와 부부가 된다는 선택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으나 영국에서의 지배권을 유지해서 신교 세력을 몰아내고,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서 한 거였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입장에서는 당연히 헨리 8세앤 불린의 결혼을 반대했던 펠리페 2세의 아버지 카를 5세에 대한 앙금도 있었고, 종교적으로도 성공회에 독실했는데다, 당시 영국 내에선 스페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이복언니 메리 1세의 남편이었던 사람이기에 굳이 결혼하려면 (일단 당시 영국의 국교기도 했던 가톨릭 기준으로) 교황에게 특별한 허락을 받아야 하는 등 여러 가지로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라서 퇴짜를 놨다.

빡친 펠리페 2세는 1559년, 외아들 돈 카를로스약혼자이자 당시 자신의 적국이었던 프랑스공주 엘리자베트와 덜컥 재혼해버렸다. 이 결과 부왕, 아니 증조부 때부터 지긋지긋하게 이어진 프랑스와의 악연도 막을 내리고 그 종지부인 토캉브레지 조약을 맺게 된다. 카토 캉브레지 조약을 기점으로 17세기 리슐리외 추기경을 필두로 하여 부르봉 가문의 통치권이 확실하게 뿌리 박을 때까지 프랑스는 위그노 전쟁의 불길에 휩싸여 나라가 분열 되었으며 스페인 또한 프랑스라는 걸출한 전통적인 라이벌을 꺾을 수 있었다.

또한 이것은 당시 잘못했다가는 스코틀랜드와 관련하여 프랑스와 본격적으로 전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리던 영국을 압박하는 효과도 있었다. 하지만 영국 입장에선 그나마 다행이었던 게, 스페인은 이 문제에 개입하지 않았다. 이건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 측에서 엘리자베스 1세에게 계속 혼담을 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펠리페는 사실 개인적으로는 엘리자베스에게 약간 호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24], 완전히 적이 되는 것보다는 그녀를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과 결혼하게 해서 동맹 관계가 되는 게 더 나을 거라고 생각한 듯하다. 이 탓에 영국에 있어 합스부르크 사람들은 여왕의 남편 후보로서 유력했지만, 스코틀랜드의 섭정 마리 드 기즈 왕대비(메리 스튜어트의 어머니)가 사망하면서 상황이 약간 달라졌고, 결국 엘리자베스 1세는 그들의 청혼을 거절했으며 본격적으로 성공회를 되살렸기에 자연스레 스페인과 영국의 사이는 나빠졌다.

비록 네덜란드의 반란군에게는 여전히 골머리를 썩고 있었음에도 그는 능력있던 부왕의 대외적 명성을 이어가고자 했다. 그리고 그 타겟은 자신의 청혼을 퇴짜놓았고, 가톨릭 교도인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를 처형한 엘리자베스 1세영국이 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와 그녀 치하의 잉글랜드는 결국 성공회 국가가 되었으나, 그녀에게 나름대로 호감을 가졌던 펠리페 2세는 그 뒤에도 다른 가톨릭 국가들 이상으로 영국에 여전히 미련이 있었다. 그러나 잉글랜드가 본격적으로 네덜란드 반군들을 지원하기 시작하고, 프란시스 드레이크를 필두로 한 잉글랜드 해적들이 들끓자 이를 진압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잉글랜드를 침공할 무적 함대를 출병시킨다.

이미 네덜란드 전역에서 정신나간 전비를 소모한 경험이 있는 펠리페 2세는 가능하면 잉글랜드를 정복하나, 좀 더 현실적인 차원에서는 잉글랜드의 외교적인 굴복이라도 유도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제대로 된 육군도, 100년 전쟁 이후 체계적인 군사 개혁도 겪지 않은 잉글랜드는 스페인군이 상륙이라도 하면 성공적으로 물리칠 가능성이 전무하였기 때문에[25] 잉글랜드는 해적 프란시스 드레이크와 노예상인 존 호킨스, 탐험가 월터 랄레이 등을 중용해 대처했다[26]. 아무튼 당시 영국 정규 해군의 역량을 고평가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이를 계기로 영국 해군의 교리가 각을 갖춘데다 본격적으로 국가적 지원까지 등에 업기 시작해 훗날 대양을 장악하는 기초 역량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무적함대는 칼레 항구에서 영국 해군의 매복에 걸려 타격을 받았고, 태풍으로 인하여 함대가 와해 되자 지휘 체계가 무너진 채로 뿔뿔이 흩어져 브리튼 섬을 빙 도는 삽질을 범했다. 때문에 육지에서 합세하려던 막강한 스페인 육군과의 합동작전도 무산됐고, 고생 끝에 브리튼 섬에 가까스로 상륙한 스페인 해군 병력들은 현지 주민들과 병력에 의해 개발살 당했다.

사실 당시에 스페인 해군은 무적함대라는 별칭은 있었지만 그렇게 견고한 해군은 아니었다. 스페인의 주력 부대는 어디까지나 레콘키스타를 통해 축적 된 경험과 양질의 지휘관, 그리고 선진화 된 보급과 군 행정 체계로 밀어붙이는 육군이었고, 전문적인 해군양성이 꾸준했던 나라는 아니다. 외교력으로 해상 도시 국가와 동맹을 맺어 크고 작은 이슬람 함대와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이는 스페인의 힘이기보단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함대 동원력과 오랜 해상생활로 잘 훈련된 선원들의 힘이라고 봐야한다. 해군의 특성상 오랫동안 바다 생활을 해온 전문가들이 없으면 오합지졸이나 다름 없었고, 스페인 함대도 물량만 많았지 이런 인적자원에서 부족한 면이 많았다.

영국의 무적 함대 격파 성과는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과장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나, 당장 7백만 두캇이라는 거금을 들여 계획한 원정이 한방에 박살나자 어쨌든 그 여파는 컸다. 땅을 파서 두캇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세금이 되어 몰아쳤으니 결국은 국가 파산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 정계에서는 비통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잉글랜드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이게 된건 자명한 일. 이 기세를 몰아 잉글랜드는 카디즈 항에 원정군을 보내는 등 본격적으로 반격을 하려 하였으나 당장 군사적 인프라의 차이가 명확한 판에 제대로 된 게임이 될 리가 없었고, 스페인은 스페인 나름대로 위그노 전쟁 지원과 레판토 해전, 무적함대 손실로 인한 재정파탄으로 전쟁을 할 여력이 없었다. 결국 펠리페 2세 사후 1604년 런던 조약에서 잉글랜드가 네덜란드 반군에 대한 모든 지원을 포기하며 사략 행위를 중지 하는 것으로 스페인에게 약간 유리한 방향으로 끝나는 것에 그쳤다.

후대 역사학계에서는 '애초에 펠리페 2세의 목적이 잉글랜드의 외교적, 심리적 위축이란 점에서는 어느 정도 성공이라 할 수도 있다'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당장 파산까지 무릅쓰며 설립한 피 같은 7백만 듀캇이 한방에 사라진 점을 볼 때 이건 좀 억지스러운 주장이다.

7. 후계자 문제와 파산, 그리고 종교적 성과

펠리페 2세에겐 자식운은 별로 없었다. 총 4번 결혼했는데, 3번째 결혼까지는 아들이라고는 첫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돈 카를로스 하나만 있었다. 문제는 이 왕자에겐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었다는 것이다. 펠리페 2세는 아들이 치는 사고를 감싸주면서 동시에 제국을 이끌 후계자로서는 엄격하게 키우려 했는데, 돈 카를로스는 아버지에게 반감을 갖고 성장했다. 또한 아들의 상태가 나아지지 않는 것에 실망한 펠리페 2세 역시 그가 성년이 된 후엔 반쯤 포기해서, 부자 간의 사이는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다 돈 카를로스가 머리를 크게 다쳐 사경을 헤매다 깨어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후 그는 정말 막나가기 시작한다.

내심 하나뿐인 아들과의 사이가 좋아지길 바랐던 펠리페 2세는, 이젠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자 찢어지는 심정으로 아들을 유폐시켰다. 일설에 따르면 그런 꼴을 견디다 못한 펠리페 2세가 독살했다고도 한다. 돈 카를로스가 사망한 후, 돈 카를로스와 염문설이 돌 정도로 그를 가까이 대했던 3번째 부인 엘리자베트는 충격으로 앓다가 아들을 사산한 후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돈 카를로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돈 카를로스 항목을 참고.

일련의 불행을 겪고 몸을 추스린 펠리페 2세는, 돈 카를로스의 약혼녀였으며 자신과 친족관계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안나와 1570년에 결혼한다. 둘 사이에서 5명의 자녀가 생겼지만 박복하게도 4번째 아내인 안나마저 30세라는 젊은 나이로 죽고 자녀들도 아들인 펠리페 3세 외에 다 일찍 죽었다. 거기다 근친상간의 폐해인지 이 펠리페 3세마저도 좀 모자란 아들이었다. 이에 펠리페 2세는 "왜 이렇게 성실한 자신에게 능력 되는 아들 하나를 주지 않으셨나이까" 라며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한다. 후계를 이은 펠리페 3세는 여러모로 암군에 속하는지라 훗날 스페인의 몰락의 기점이 되는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 물론 국가 재정 파산을 1번도 아니고 4번이나 한 펠리페 2세 본인도 그 계기를 적지 않게 제공했다.

가정사에서 해소되지 못한 걸 외부적인 문제로 발산하려 했는지, 그는 거듭되는 국고 파산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원정군을 일으켰다. 1565년에 필리핀에 군대를 보내 총독을 세워 통치시키고, 1571년엔 오스만 제국과의 레판토 해전에도 함대를 투입해 승리를 거둔다. 프랑스에서 터진 위그노 전쟁에 가톨릭 수호를 명분으로 개입해 프랑스 정국의 혼란을 지속 시키고 서유럽의 패자로서 위치를 공고히 하였다. 1580년엔 1578년부터 왕계가 끊어진 포르투갈의 후계에도 개입해 포르투갈의 왕위까지 거머쥐고 포르투갈의 식민지도 흡수했다. 이렇듯 1570년대에서 1580년대 초까지는 펠리페 2세가 가장 잘 나가던 시기였다. 그러나 내실은 국가 파산. 레판토 해전 승전 이후 2번째 파산을 선언하며 전통적인 스페인 국고의 최대 수입이었던 내부 소비세(alcaldes)를 배로 올려 당시 스페인은 유럽 최강대국이었으면서도 내부 살림은 가장 팍팍한 편에 속했다.

네덜란드프랑스에서의 전역에서도 펠리페 2세의 군대는 끝내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하지만 남부 플랑드르와 파리 시민들을 가톨릭으로 붙잡아두는 것은 성공했다. 그 결과 남부 플랑드르는 가톨릭 국가인 벨기에가 되었으며, 프랑스의 위그노(신교)군 총대장인 앙리 4세도 다 이겨놓고 막판에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프랑스 또한 가톨릭 국가로 남았다.[27] 이탈리아에서도 가톨릭을 비호하여 효과를 거뒀다. 중남미 대륙과 필리핀에도 여파가 미쳤다. 게다가 그가 적극적으로 비호했던 예수회와 다른 가톨릭 종교 단체들의 포교 활동은 큰 성공을 거두어 예수회 신부들은 이 시기 전 유럽의 가톨릭 귀족들 자제들의 교사가 되었고, 아메리카에도 수 많은 교회가 새워졌으며, 심지어 중국과 일본에도 그 영역을 넒혔다. 적어도 그가 일생을 두고 매진했던 신앙의 사수만큼은 영국 외 국가에서 어느 정도 성공했던 셈이다.


1598년 9월 13일, 펠리페 2세는 에 걸려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부왕만큼이나 굴곡 많고 파란만장한 일생이었다. 유해는 자신이 지은 엘 에스코리알의 왕실 영묘에 안장되었다. 통일되었지만 불안정한 이베리아 반도와 그 식민지가 무능한 아들 펠리페 3세에게 계승되었다.

8. 후대의 평가

당시 스페인의 대외 강경책으로 대립한 정적들이 후대에 열강으로 부상한데다, 광신적인 종교적 열기에 따라 실제 탄압도 거세다 보니 적이 워낙 많아 스페인 국외에서는 후대에 걸쳐 시종일관 지독한 폭군으로 묘사되었다. 사실 스페인 내에서조차도 돈 후안, 파르네제같은 당대의 걸출한 인물들이 펠리페의 견제를 받아야만 했던 것을 남이예종의 경우처럼 안타까운 상황으로 꼽는 평가는 있다.

실제로 재정적인 측면에선 명백하게도 당시 유럽 최강국의 군주라는 양반이 비서에게 국고 재정 서류를 두고 "솔까말 이게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라고 시인하며 국가 파산의 상황을 4차례나 반복하는 모습은 확실한 암군이라 칭함에 부족함이 없다.

특히 잉글랜드에서는 개신교와 성공회 교인을 학살한 블러디 메리의 남편으로, 국사의 서사시적 위치에서 대악인의 자리를 차지하여 훗날 잉글랜드의 국가적 역사관에서는 필리페 2세-나폴레옹-히틀러로 이어지는 국적 1호의 연대기에서 전근대의 최종보스를 차지하는 오명을 입어 영국의 영향이 워낙 컸던 미국 등지에서도 평가가 그대로 이어졌다. 게다가 말년의 정치적 스캔들로 인해 외국으로 망명한 안토니오 페레즈라는 펠리페 2세의 서기 또한 악소문을 많이 퍼뜨려 (안 좋은 의미로) 근세 유럽사에서 가장 주목을 많이 받는 군주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펠리페 2세 치하의 스페인은 수치적으로는 그가 왕위를 이어 받았을 때 보다 더 크고, 더 강성해 있었다[28]. 다만 간과해선 안 되는게, 그만한 발전상 자체는 사실 펠리페가 아니더라도 어지간한 능군이면 충분히 돌아갈 만큼 애당초 스페인의 기본 포텐셜 자체가 대단한 상태였으며, 비교는 어디까지나 상대성을 중시해야 한다는 점이다.

가령 부왕 시절의 스페인은 영국 따윈 당연히 닥치고 버로우시키며 프랑스도 거뜬히 패배시킬 군사력과 재력을 보유했으나, 펠리페 시기를 거친 후 스페인은 영국을 위협적인 적성국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데다, 비 온뒤에 땅이 더욱 굳어 새로 안정을 찾은 프랑스에 대해서도 변변히 대처하지 못한 채 계속 입지가 역전되는 신세에 빠졌다[29]. 설령 다른건 다 용인하더라손 치더라도 네덜란드 이탈로 말미암은 결정적인 국가적 손실은 말할 필요가 없다. 네덜란드 하나만으로도 다른 업적을 모조리 상쇄해먹을 정도로 그 타격은 심대한 수준이었다. 만약 스페인이 네덜란드를 잘 구슬려 벨기에처럼 오래 간수했다면 진실로 세계사가 바뀌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종교적으로는 펠리페 2세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가톨릭 세력의 반격이 상당한 성공을 이루어 독일 등지에서 개신교 세력은 그의 치세 말엽에는 슬슬 후퇴하고 있었고, 지중해의 경우 비록 튀니지를 잃고 말았지만 레판토에서 오스만에게 한방 먹여줄 수 있었다. 그의 사후 범 유럽 가톨릭 세력의 구심점으로서 스페인의 위치는 확고했으며, 그의 선대에 인정 받아 성장하기 시작한 예수회는 이제 유럽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톨릭 신앙의 반격의 명실부공한 선봉에서 맹활약하고 있었고, 심지어 스페인을 대단히 경계하던 적국 잉글랜드의 제독이었던 노팅햄 경 찰스 하워드마저 그를 "기독교 세계의 최고의 군주"라 부르며 경외감을 표했다. 물론 이로 말미암아 계속 가톨릭만을 고집한 나머지 그 다음 대에서의 30년전쟁 결과 신교 세력이 승리를 거두자 스페인의 영향력과 재정에 심각한 악영향을 초래하면서 다소 빛이 흐려지긴 했지만 말이다.

신대륙의 광활한 식민지에 대해서는 선대로부터의 콩키스타도르 약화책을 계승한 펠리페 2세 특유의 강고해진 중앙 집권과 관료제에 대한 고집으로 대대적인 행정 개편이 있었다. 그리하여 인디오 노예제를 폐지했으며 예수회 등 선교사회의 대대적인 파견으로 피정복민에 대한 인도적 대안을 마련한 공로를 인정받기도 하며, 그에 더해 은 제련법을 비롯한 당대의 기술적 진보 덕분에 그의 치세 후기에야 드디어 신대륙의 엄청난 귀금속이 제대로 스페인 본토에 흘러들어오게 되었다. 비록 그 땅 자체를 그가 얻어낸 것은 아니지만, 창업 못잖은 수성적 성과인 신대륙의 행정적 재구축과 장기 지배에는 그가 기여했다는 평가도 있다. 다만, 그 이면에는 자치를 누리며 평화롭게 지내던 필리핀을 강제로 수탈하기 시작했으며[30], 부왕이 획득해 물려준 튀니지네덜란드 등의 주요 국외 영토를 빼앗기거나 상실했다는 부정적인 일면 또한 존재한다.

그런 한편 카스티야와 역사 깊게 내려오는 라이벌 관계였던 포르투갈의 왕위와 해외 식민지를 넘겨 받아 동군연합을 이루어 광활한 영토를 관장하게 되었다. 물론 이 점에 있어 그가 능군이라서기보단 부왕이 포르투갈 왕족 모후를 맞아들인 결혼동맹과 부왕이 말년에 포르투갈 섭정인 누이와 연대해 이루어낸 물밑 기초작업, 그리고 적절한 시기에 찾아온 포르투갈 왕위 단절 등의 호재 요소를 결코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포르투갈과의 관계는 마치 예전 카스티야와 아라곤이 그러했듯이 실상은 독자적인 국론과 이해관계, 언어가 여전히 병존하는 상태였다. 표면적으로는 같은 왕을 모시지만 식민지도 제각각 나누어 경영하고 상호간에 간섭을 최대한 자제하는 형태였던 것이다. 펠리페 입장에서는 실질적인 통합을 더욱 추진하고 싶었지만, 포르투갈 내에서 아비즈 왕가의 사생아였던 안토니오나 모계를 통해 역시 아비즈 왕가와 이어져 있었던 라누치오 파르네제 등 다른 경쟁자들 중심으로 반대 세력이 이미 생겼으며, 포르투갈 현지 귀족들의 도움을 받아 이들을 꺾었어야 했던 처지 때문에 결국 포르투갈 또한 실질적인 통합이 아니라 동군연합만 이루어 지는 형태로 편입 되었다. 이게 펠리페 당시만 하더라도 스페인 입장에서는 영토를 추가하니 좋고, 포르투갈 입장에서는 여전히 실질적으로 독립 국가인 셈이니 손해 볼게 없었는데, 펠리페 사후 네덜란드와의 전쟁이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브라질과 아시아 무역항들로 확대 대는 등 서로의 불똥이 튀기 시작하면서 이 애매한 정치적 관계 때문에 단적인 해결 또한 불가능해 지면서 결국 포르투갈 독립 전쟁과 이베리아 연합의 붕괴의 단초를 제공하고 말았다. 동군연합이라는 느슨하고 애매모호한 형태의 통합이 가지는 한계 도한 명백해 진게 17세기 유럽이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건 이 동군연합 제국들 중에서도 가장 크고 강성했던 합스부르크 스페인이었는건 자명한 일이다.

이렇듯 그는 창업보다 수성 군주로서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더욱 체계적인 국가 통치 체제를 구축한 점에 있어서는 그도 충분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군주라기보다는 차라리 내각 책임자에 적합한 인물형으로, 만약 그가 왕이 아니라 수상이나 장관의 위치였다면 오히려 더 큰 업적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당대의 군주 중 펠리페 2세만큼 전근대 유럽 국가의 영욕을 모두 겪은 군주는 없다. 한편으로는 광신적인 신앙적 전쟁과 탄압 야기로 종교개혁 이후 크게 위축 되었던 가톨릭 신앙의 반격을 주도하는 한편 예수회를 꾸준히 진흥시켜 영향력을 강화한 반면, 그러한 광신성과 정치 감각의 부재로 스페인의 국운을 꺾은 가장 큰 단일 요소라 할 수 있는 네덜란드의 상실 및 영국과의 불화를 초래했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네덜란드는 육군이[31], 영국은 해군이 보다 더 진흥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와 관련해서는 잘못된 정책으로 반란이 터지도록 동기 부여를 하면서, 또 스페인의 군사적 역량만큼은 여전히 유럽 최강 수준을 유지하여 반란을 일으킨 주의 과반수 이상[32]은 탈환 및 유지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지켜낸 플랑드르에서도 전대에 비해 주민들의 반감이 더 올라간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반면 아라곤과 포르투갈에서는 전통적인 정치적 형태를 존중하여 이베리아 반도의 정치적 통합에 약진을 이루었는데, 또 그 종교적 열기는 어디 가질 않아 당시 발렌시아 지방 농민들의 다수를 차지했던 모리스코들을 탄압하여 대대적인 모리스코의 반란 또한 초래했다. 사실 부왕 치세의 중후반기보다는 펠리페 치세의 스페인에서 더 내란이 많았다. 그나마 남아있던 무슬림들과 이단적 부류 역시 철저하게 발본색원해 추방 및 제거함으로써 쓸만한 인재들을 잃는 부작용도 초래했다.

또한 프랑스와 대대로 이어진 적대관계를 풀고 겨우 화친을 맺어놨음에도 그 직후 일시적인 내분에 뛰어들어 이를 이용해보려다 후대에는 더 큰 적을 지게 되었다. 훗날 프랑스가 30년전쟁에서 신교 편에 붙은게 과거 스페인에 대한 국민적 앙금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이는 스페인이 가톨릭의 맹주를 점했다고 하나 역시 가톨릭국인 프랑스는 계속 이를 인정하지 않아 입지에도 악영향을 끼치는 결과를 냈다.

해외로 눈을 돌리면 신대륙 식민지 관리를 대대적으로 손보아 체계를 확실히 하는 한편, 비록 주민 당사자들에게는 불행이었지만 필리핀에 총독을 파견해 철권 통치시켜 태평양 기지로 삼아 대중국 무역을 더욱 효과적으로 이행하는 작업도 이룩했다. 그러나 그런 한편으로는 지중해 너머의 요충지인 튀니지를 오스만에 빼앗기고 아프리카에서의 영향력이 사그라든 오점도 엄연했다.

이러한 결과 스페인이 신세계의 엄청난 부를 벌어들였음에도, 이 돈을 모두 소모적인 대외 전쟁에 탕진하고, 대대적인 은 수입으로 인해 물가 불안정화를 초래 하여 스페인의 국고가 쑥대밭이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면서도 베네치아와의 경쟁으로 지중해 상업 패권이 심각하게 약해진 제노바와 독일(푸거 가문 등)의 자본가들을 스페인 편으로 끌어들여 외교적으로는 범지중해적 가톨릭 동맹을 형성할 수 있었으나, 재정적으로 당장 쓸 수 있는 자금줄을 얻은 대신 스페인 자체적인 경제적 부흥이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펠리페 2세는 무굴 제국의 6대 황제 우랑제브와 닮은 면이 많다. 제국의 국력이 최절정기에 이르렀을 때 잦은 전쟁을 일으켜 국고를 크게 까먹은 점도 그렇고(한무제?), 종교적 불관용으로 종교가 같은 이들을 더 결속시킨 대신 적대자를 크게 늘린 점도 그러하며, 후계 처리의 실패로 제국이 쇠퇴에 접어든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차이점이라면 지극히 외향적으로 재위 내내 객지를 돌아다닌 아우랑제브와 달리 펠리페 2세는 궁정에서만 머물 만큼 내성적이었다는 것과, 힘을 잃은 부왕을 유폐 감금한 패륜아 아우랑제브와 달리 펠리페 2세는 부왕을 질투에 가까울 정도로 흠모했다는 점이다. 이래서 극과 극은 통한다는 건지도. 사실 아우랑제브 역시도 영욕의 치세를 겪은 군주의 대표 사례에 끼는 인물이다.

종합하자면, 서울대학교 주경철 교수의 말마따나 펠리페 2세와 이후 합스부르크 군주들 치하의 스페인은 문자 그대로 정신 분열증적인 영광과 굴욕의 양극을 오가는 사회였다.

그에 대한 평가야 어쨌든 당대 유럽 최강국이었던 스페인의 군주인 펠리페 2세의 비중은, 적어도 서유럽사에 있어서는 부왕에 버금간다 할 만하다. 그래서 아돌프 히틀러, 나폴레옹 다음으로 유럽사에서 관련 전기가 가장 많이 쓰여진 인물이다. 16세기 후반 유럽 최강대국 스페인의 영화와 영욕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긍정적인 면이든 비판적인 면이든 유럽사의 맥락 속에 그 위치와 영향력만은 큰 무게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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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카를 5세의 환대를 받고 스페인에 초빙되어 1570년대까지 많은 초상화와 작품들을 남긴 화가로, 교황 바오로 3세와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의 초상화도 그렸다. 오늘날에는 바로크 양식의 선구자로 꼽힌다.
  • [2] 사실 이는 애초에 카를 5세의 제국을 묘사하면서부터 나온 수식어이다.
  • [3] 당시 세계적인 은광이었던 스페인 치하 남미의 포토시에서 1년 동안 캐는 양과 네덜란드의 항구 중 하나인 안트베르펀(영어권에서는 앤트워프)의 1년 수입이 같았다. 그 정도로 꿀단지였던 곳.
  • [4] 물론 그보다 더 직접적인 이유는 앙리 2세의 급서로 인한 프랑스의 내분 때문이다. 또 생캉탱 전투에서 이기긴 했지만 그보다 30여년 전인 파비아 전투 수준의 완벽한 대승도 아니었다. 다만 나름대로 잘 나가던 앙리 2세의 코를 제대로 꺾어줬다는 점과, 생캉탱 전투 날짜가 성 라우렌티우스의 축일이었고 이걸 기념하는 엘 에스코리알 궁전까지 건립하여 펠리페 정권 이미지에 혁혁한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다.
  • [5] 카를 5세 본인도 그 에르난 코르테스를 파면하고 직접 총독을 임명해 파견하는 등, 말년에 콩키스타도르 개혁에 적극적인 박차를 가했다. 또한 자신 대에 새로 차지한 필리핀과 튀니지에 대해서는 불필요한 간섭 대신 최대한 자치권을 배려해주는 모습을 보였다.
  • [6] 물론 선왕 카를 5세 역시 그 전대와 비교하여 콩키스타도르의 폐해를 개혁하려던 흔적이 역력했던 것 역시 사실. 다만 온전히 스페인 쪽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아들에 비해 광활한 영지를 위협하던 무수한 외적들과 종교적 내분 수습에 더 우선순위를 뒀다고 보는게 정확할 것이다. 더구나 부왕 때 자치를 누리게 해주던 필리핀에 총독과 대규모의 군대로 원정을 감행해 원주민들을 철권으로 억압하기 시작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카를 5세가 끝까지 사수한 북아프리카 거점 튀니지마저 오스만 제국에 빼앗기는 실책을 범하고 아프리카에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해버렸으니, 그의 식민지 관리에는 그늘 역시 분명히 존재한다.
  • [7] 다만 이 점은 당시 체계적인 검열 시스템의 부재, 금서 목록을 총괄하는 이단심문국의 관료제적 허술함, 그리고 검열의 실질적인 비집행으로 인하여 서류상에만 남아 있는 법이 되었다. 당장 이단심문국의 검열은 스페인 내부의 인쇄소에만 손을 댈 수 있으니 금서 목록에 등록 된 책이 필요하면 바다 건너 이탈리아나 플랑드르의 인쇄소를 통하면 아무 문제 없이 구할 수 있었다는 소리. 어떻게 보면 괜히 불필요한 오명 하나만 추가한 꼴이 되었다.
  • [8] 영국, 네덜란드, (내전 후의)프랑스, (합병 이후 독립 투쟁을 전개한)포르투갈 등.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 자체로 그의 업보라고 할 수도 있다. 부왕 시절 헨리 8세 치하의 영국만 하더라도 문자 그대로 이혼 문제 때문에 생긴 간판만 바꾸었지 실질적인 알맹이는 여전히 가톨릭 국가였으며 아직 신교도와 가톨릭의 대립이 정치적, 국제적 대립으로 발전하지는 않은 상태여서 타협의 여지가 남아 있었지만, 영국 국교회 자체가 에드워드 4세의 치세를 겪어 대륙 칼뱅주의를 본딴 종교적 변혁이 급격화 되면서 두 나라는 결국 영영 결별하고 만다. 그와 반면 아들 펠리페 2세가 다스린 16세기 후반은 독일과 북유럽에서의 루터교의 입지 확립과 결정적으로 급격한 칼뱅주의의 대두로 인하여 종교 문제가 전유럽적인 정치 문제로 부상했기 때문에 기존의 외교 구도 자체가 훨씬 더 양극화 되어서 외교 활동 자체가 더 제한적이었다. 그래도 사보이, 제노아, 스카나이탈리아 반도도시국가들은 여전히 펠리페 2세의 시대에도 무리 없이 스페인영향권에 편입 되었으며, 부왕 시기의 교황과의 대립 또한 펠리페 2세가 윽박지르고 교황이 데꿀멍 하는 형태로나마 갈등이 해소 되었다. 부왕의 워낙 범세계적인 안목과 깊이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근본적으로 16세기 전반과 후반의 유럽의 여건 자체가 확 바뀌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 [9] 펠리페 2세가 총애하던 비서로, 펠리페 2세의 명에 따라 이복 동생 오스트리아의 돈 후안과 정치적 암투를 주도하다가 돈 후안의 비서가 정치적 살인을 당하고 이 일이 궁정 내의 스캔들로 커져 자신에게 체포령이 떨어지자 펠리페 2세와 스페인 궁정에 대한 비밀 자료+유언비어를 가지고 프랑스로 튀어 비밀들을 넘겼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토사구팽을 저지른 펠리페 2세 본인이 자초한 면도 크며, 실은 경쟁자 돈 후안 역시 왕위에 걸맞게 능력이 출중하고 세인의 신망도 두터운 인물이었다. 만약 돈 후안이 펠리페의 왕위를 이었다면 펠리페 3세의 후계로 이어지는 길고 쓰린 내리막길 대신 계속해서 스페인이 전성기를 이어나갔으리란 평가도 굉장히 많은 편.
  • [10] 낭설로 밖에 보이지 않는 근친상간, 아들 살해 등에 대한 막장 드라마성 유언비어를 그대로 여과 없이 써놓아 후대에 생긴 펠리페 2세를 둘러 싼 음험한 분위기의 형성의 소스가 되었다.
  • [11] 카를 5세도 옛 이슬람 성터인 알함브라 궁전 내에 자신의 이름을 딴 궁전을 건립했다. 그러나 후기엔 이슬람 건축에 감명을 받았던지 더는 이상 이슬람 유적을 훼손하지 못하게끔 단단히 못을 박았으며 그 결과 많은 유적이 지금까지도 보존될 수 있었다.
  • [12] 특히 아라곤령에서 지방 관리들이 종교 재판관들의 마을 출입 등을 불허 하는 일들이 많았는데 이 때마다 내새운 명분이 외국인 관리들의 불법 침입이라는 점만 해도 그렇다
  • [13] 이게 그 유명한 콤플루텐스 경으로, 기독교 초창기 성 히에로니무스가 발간한 불가타 경 이전 유럽에서 최초로 신약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재번역 한 판본이다
  • [14] 그나마 프랑스 내에서도 devots, 즉 '신실파'라 불리는 친스페인 급진 가톨릭 세력이 위그노 전쟁 이후 리슐리외의 집권 까지 프랑스 정계 내의 큰 한 축이었다.
  • [15] 당장 대홍수를 불러 일으킨 보흐단 흐멜니에츠키의 코사크 대봉기도 그렇고, 반왕실 반란들이나 스웨덴, 모스크바 대공국이 연루 된 왕위 계승 전쟁들 같은 동시대 이중 공화국의 국내외 분쟁들에는 반드시 종교적인 문제가 들어가 있었고, 충분히 폭력을 수반하지 않은 정치적 차원에서 교섭하거나 적당히 타협해서 넘어 갈 수 있었던 문제들도 종교적 단초가 들어가 더 격렬한 분쟁으로 심화 되는 등, '관용을 통해 종교 문제에서 자유로웠던 이중 공화국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중유럽 사학계가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룬 현대에는 거의 논파 된 테제이다.
  • [16] 서울대 주경철 교수의 저서 '테이레시아스의 역사'에서 돈키호테를 다루며 '당시 스페인 왕은 하루에 처리할 서류를 저울로 재고 앉았을 정도로 대충 처리 했다'라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이 저울이 농땡이 부리려고 저울로 서류의 양을 잰게 아니라 무게라도 재면서 하루에 처리할 양을 정해두지 않으면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며 똥도 못 쌀 정도로 업무량이 많았기 때문이다. 진시황? 결국 말년에는 소화불량, 신경과민, 당뇨병 같은 지극히 현대적인 요즘 과로하는 사무원들이나 걸릴 법한 병들로 고생했다.
  • [17]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는 소싯적의 통치 경험과 모계의 영향으로 알아 듣기는 다 알아 들을 수 있었으나 스피킹이 안됐고, 프랑스어는 그나마 스피킹이 가능 했으나 성격 자체가 부끄러움이 많아 발음 망치는게 부끄러워 일부러 회화를 안 했다. 결정적으로 치세의 대부분인 40년간을 자국 내에서만 보낸 탓에 뒤로 갈수록 그 정도는 더 악화됐다.
  • [18] 병환과 가족 일 때문에 못 했다. 그리고 이 놓친 행차가 그의 평생을 괴롭히는 네덜란드 독립 전쟁이 터지는 것에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다만 이후의 중요한 원정군에도 자기 자신만은 끝까지 쏙 빠지면서 대신 누가 봐도 뻔히 한심한 아들을 국왕 대리로 투입한 것을 소심한 면모로 들 수는 있다. 이는 부왕이 겐트에서의 반란 당시 몸소 친정하는 의욕을 보인 것과 대조적인 점.
  • [19] 당장 부왕의 제위 초기에 터졌던 카탈로니아 직공 길드, 카스티야 코뮤네로스의 봉기만 하더라도 반란의 주체였던 도시민들이 아예 봉건적인 사회 형태 자체를 뒤집으려는 사회 혁명적 슬로건을 내걸기 이전 까지만 하더라도 귀족들 다수가 반란군들과 국왕군 사이에서 저울질 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나마 카를로스 1세가 영광스럽게 성공적인 대외 정책을 거두어서 고양된 스페인인들이 이러한 국왕의 부재를 용인하고 지지해 준 것이었으며, 이 때문에 카를로스 1세에게 후계자는 반드시 스페인에서 자란 '토착 스페인인'이라는 조건을 내걸었던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에 대한 종교적, 정치적 탄압의 시초나 수 많은 전쟁으로 인한 빚이나 펠리페 2세가 짍어 져야 했던 짐들 중 다수의 시초는 부왕에게 물려 받은 것 또한 적지 않다.
  • [20] 말을 대단히 아껴 침묵공 빌렘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 [21] 당장 장사 하는데 비즈니스 파트너가 종교가 다르다고 싸우는건 곤란하지 않은가. 네덜란드의 경우도 그렇고, 베네치아를 포함해 근세 유럽의 이러한 상업 도시들은 종교적 관용이 인정 되는 몇 안되는 경우였다.
  • [22] 포토시 은광은 그 전까지 인디오가 쓰던 재래식 제련법을 모방해야만 했었다. 생산성이 떨어졌던 것은 당연한 일.
  • [23] 재미있게도 이 일화는 헨리 8세랑 네 번째 부인인 안나 클레브스와 비슷하다. 사실 메리도 어릴 때는 미인이라는 평을 들었지만 워낙 고생을 많이 하는 바람에... 세월이여
  • [24] 여자로서 호감을 가졌는지는 알 수도 없고, 사극 쓸 것도 아니면 중요하지도 않으나, 일단 군주라는 동업자인데 여자면서도 배짱이 두둑했던 엘리자베스를 군왕의 자질을 가진 호걸로서 높게 평가했다
  • [25] 당장 당시 잉글랜드의 방어 계획만 보아도 스페인군의 상륙 지점을 완전히 잘못 예측 하는 등 스페인 상대로 제대로 된 전면전을 치를 능력이 전무하였다
  • [26] 당시의 노예상인이나 탐험가, 해적은 무시할 자들이 아니다. 드레이크는 스페인의 군항 포트 로얄을 점령하고 산토도밍고 서부의 토르투가 항을 해적항화 하였고 존 호킨스는 당시 부실하던 잉글랜드의 재정을 크게 책임지는 상인이었으며 월터 랄레이는 훗날 아크 로얄 호를 건조하는 뎁포드 조선사를 관리하게 된다.
  • [27] 수 백만의 희생자를 남긴 것 치고는 뭔가 허전한 위그노 전쟁의 이러한 결말은 과연 그 뒤끝이 상당히 심하여 이후 프랑스 정계 또한 여전히 세력이 강한 친 가톨릭, 친 스페인 신실파와 위그노 세력, 그리고 종교와는 상관 없이 왕권 자체를 강화하려고 하는 앙리 4세와 그 아들 루이 13세의 대결 구도로 이루어져 결국 1620년대 까지 위그노들의 반란을 몇차례 진압하고 리슐리외 추기경이 신실파와 그 수장 마리 드 메디치를 숙청하면서야 정치적 안정이 이루어졌다.
  • [28] 기본적으로 현대 학계에서는 '스페인의 몰락'이란 테제 자체가 도전을 받고 있고, 국제 열강이란 측면에 한정해서 '몰락'이란 모델을 계속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 기점은 펠리페 2세보다 한두세대 더 뒤로 본다. 제정적인 측면에서 펠리페 2세의 치세가 스페인의 약점을 부각시켰다 하더라도, 당장의 국력과 국제적 영향력으로 17세기 초반의 스페인은 100년 전 보다 훨씬 강하면 강했지, 꿀릴 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 [29] 사실 위그노 전쟁은 펠리페가 병사하기 전에 이미 매듭되었다.
  • [30] 흔히 이것을 펠리페가 필리핀을 정복했다는 둥 숭고한 업적으로 포장하곤 하는데, 정작 필리핀 자국의 관점에서는 강대국이 약한 나라를 상대로 한 본격적인 식민 수탈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필리핀이 스페인령이 된 계기는 군사활동 이전에 부왕이 체결한 사라고사 조약 때문이다. 사실 당시에도 마음만 먹었으면 어렵잖게 직할 통치를 할 수 있었으나 카를 5세는 자신 전대까지 구축된 투사력으로 충분하다 보았고 그 이상 대서양 너머로 영유권 확보를 넘어서는 과도한 무력을 투사하길 원하지 않았다.
  • [31] 스페인이 자랑하던 테르시오를 붕괴시킨 형진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 [32] 이 당시만 하더라도 네덜란드에서 인구도 많고 부유한 지역은 현대 네덜란드가 아닌 벨기에 지방, 즉 정치적 수도였던 브뤼셀, 알프스 이북 유럽 최대의 무역항이었던 엔트워프 등이었지만 막상 이렇게 스페인이 탈환한 지역들은 독립 전쟁 과정에서 다 파괴되어 버려 네덜란드의 세력 밸런스가 결정적으로 북부로 넘어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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