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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클랜드 전쟁

last modified: 2015-04-05 09:19:14 by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배경
2.1. 상륙 침공
2.2. 영국의 외교전
3. 전개
3.1. 빙하 작전
3.2. 블랙 벅 작전
3.3. 컨커러의 순양함 격침
3.4. 아르헨티나의 반격 - 셰필드 쇼크
3.4.1. 프랑스 배신 떡밥
3.5. 영국의 상륙전
3.6. 엑조세의 마지막 발악
3.7. 영국의 승리
4. 결과
5. 트리비아
5.1. 명칭 문제

1. 개요

1982년, 아르헨티나영국포클랜드 제도를 침공하면서 발생한 전쟁.

2. 배경

갑작스런 전쟁이라 영미권 언론은 포클랜드 침공 배경에 많은 소설을 썼다. 아르헨티나가 국내 불만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일으켰다는 설, 포클랜드 제도 인근 해역의 석유 자원을 노린 것이라는 설, 마거릿 대처 당시 영국 총리와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을 여자랍시고 만만하게 보고 전쟁을 터트렸다는 설, 경제난에 빠져있는 영국이 쓸데없는 포클랜드 제도[1]에 관심을 갖지 않을것이란 판단 아래 전쟁을 감행했다는 설 등등등.

당시 아르헨티나는 군사독재와 오일쇼크로 인한 경기침체, 외국자본 유입에도 커져가는 빈부격차[2], 외채의 증가로 국민의 불만이 쌓여있었고, 때문에 국민 관심을 다른데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1978년 월드컵을 개최하고 해당 대회에서 온갖 무리수를 두어 자국팀을 우승시킨 것 등이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이러한 내부적 요인으로 전쟁으로 내부적 단결을 꾀할 필요성과 함께, 포클랜드 제도의 영국군은 소수여서 기습으로 손쉽게 제압이 가능하다는 점, 영국 해군의 마지막 정규 항공모함 크로열이 퇴역하여 영국이 유사시 장거리 항공작전을 하기 어려워졌다는 점, 무엇보다 영국이 몇 해전에 IMF 구제금융을 받을 정도로 경제력이 나빠졌다는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2.1. 상륙 침공

결국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 지상군 4,000명이 해군의 지원으로 포클랜드 제도를 기습 침공했다. 현장의 영국군은 고작 100여명으로 미미한 충돌이 있었으나 이내 제압당하고 항복했다.


갑작스런 침공으로 국제사회가 런던을 주목했다. 예전같지 않은 영국의 모습에 영국이 외교적 항의 및 협박 차원에서 그칠 것이라는 관측이 중심적이었으나, 이는 오판이었음이 드러났다.

2.2. 영국의 외교전

철의 여인이라 불릴만큼 강경한 성향을 가진 마가렛 대처 총리는 대외정책 역시 매우 강경하여 즉시 탈환작전을 군에 명령했다. 여기에 쇠퇴 일변도의 영국이라도 더이상 해외영토가 잠식되고 대외 영향력이 침해당하는 걸 좌시하고만 있지 않겠다는 국민 여론이 들끓어 오르면서 영국은 순식간에 전쟁 분위기에 휩싸인다.[3]

언뜻 '겨우 조그만 섬 때문에, 1만km 떨어진 곳까지 가서 전쟁을 했나?'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영국에게 포클랜드의 가치는 결코 무시할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포클랜드의 지리적 위치는 남극으로의 전진기지였고, 파나마 운하가 차단될 경우,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대체 항로의 가치를 지녔다. 여기에 포클랜드를 포기할 경우, 세계 각 지역의 다른 식민지들, 특히 지중해의 해군 요충지인 지브롤터의 영유권까지 위협받는 파급력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1970년대 제기된 포클랜드 인근의 석유 자원 매장 가능성은 덤.

대영제국은 아직 망하지 않았다. 반드시 맞받아친다!는게 이 전쟁에서 영국측의 기본 방침이었다. 그것을 비유한게 아래의 잡지 표지면에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다.
(ɔ) from

제국의 역습[4]

대처 총리는 즉시 아르헨티나와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영국 의회는 여야의 전폭적인 지지와 함께 전쟁을 승인했고, 4월 5일 영국은 기동함대의 출동을 명한다.[5] 마침내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와는 별개로 대처 총리는 영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외교전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먼저 아르헨티나의 침공 다음날에 UN 안보리에서 아르헨티나를 침략자로 규정하며 즉각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유럽 국가들의 대아르헨티나 수출금지 조치를 유도했다. 심지어는 영국과 아르헨티나 양국의 동맹이었던 미국의 지지까지 얻는 데 성공했다.[6]

당초 미국은 자국과 동맹이었던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에서 중재외교를 실시하여 전쟁으로의 악화를 막으려 했고, 이 과정에서 알렉산더 헤이그[7] 당시 국무장관이 부에노스 아이레스, 런던을 오가는 셔틀외교를 수행했다. 미국은 '아르헨티나 군이 철수한 후, 포클랜드 현지 주민들의 주민투표로 귀속국가를 결정한다'는 중재안을 제시했지만, 아르헨티나의 거절로 무산되었다. 결국 4월말 미국도 영국을 공개 지지하면서 아르헨티나에 대한 무기수출 금지를 포함한 제재안을 발표했다. 이로써 영국은 국제사회, 특히 동맹 미국의 지지를 등에 업고서 아르헨티나와의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3. 전개

대서양의 영국에서 남대서양의 포클랜드까지의 원정은 영국으로서도 거의 지구 반바퀴를 돌아가는 기나긴 여정이었다. 4월 중순에서 하순에 걸쳐 긁어모을 수 있는 함대와 항공기는 모두 동원되었다. 심지어는 호화 여객선 퀸 엘리자베스 2세까지 징발하여 병력을 수송했다. 1956년 수에즈 전쟁 이후 이렇게 본격적인 군사행동은 오랜만이었다.

3.1. 빙하 작전

5월에 접어들어 영국군의 반격이 개시되었다. 첫번째로 SAS를 파견해서 아르헨티나 사령부를 기습하기로 했다.(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도 소개된 내용.) 그런데 그 작전이라는게 헬리콥터를 이용해서 SAS 대원들을 포트 스탠리 빙하에 내려놓는 것이었다. 그 이유라는 것도 또 걸작인데, "아르헨티나 애들이 설마 빙하를 거쳐서 급습할 것이란 생각은 안하겠지?" 그 말을 들은 헬리콥터 조종사들은 "차라리 폴라리스 미사일을 날리는게 더 빠를걸요."라고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어쨌든 SAS 대원들은 빙하에 도착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끔찍한 날씨 앞에 장사없다고, 결국 GG를 치고 항공모함으로 귀환했다. 이 와중에 3기의 헬리콥터 중 2기가 손실됐지만 전사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결국 이 작전은 실패했다. 과연 프로젝트 하박국을 계획했던 광인의 나라답다

3.2. 블랙 벅 작전

그 다음으로 영국군은 아르헨티나군이 포클랜드의 행장을 쓰지 못하도록 활주로에 폭격을 가하는 "블랙 벅(Black Buck)" 작전을 시행했다. 1단계로 벌컨 폭격기, 2단계로 함재기 시해리어가 동원되고, 3단계는 함포사격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특기할만한 일은 1단계로, 대서양어센션(Ascension)섬에서 발진한 벌컨 폭격기가 몇차례나 중급유를 받아가며 왕복 7천km 를 날아갔다는 점. 이 기록은 걸프전에서 미군 B-52가 미 본토 - 이라크 - 영국 주둔 미 공군 기지를 날아가기 전까지는 세계기록이었다.[8]

다만 날아간 거리에 비해서 효과는 미미한 수준으로 투하한 폭탄들은 대부분 빗나가거나 활주로 가장자리에 떨어지고, 단 한 발만이 제반시설에 했을 뿐이다. 그린 구스 비행장과는 달리, 포트 스탠리 비행장은 그럭저럭 제트 전투기를 운용할만 했지만[9], 이곳도 벌컨의 폭격을 얻어맞아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10] 결국 아르헨티나는 초음속 제트 전투기인 미라지본토에서 출격할 수 밖에 없는, 아주 불리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말인즉슨, 아르헨티나 전투기들은 전투 공역에 진입해도 작전 가능 시간이 5분 이내였으며(영국 본토 항공전의 Bf109E가 어째서 어려움을 겪었는지 상기해보라.) 그나마 그 와중에도 애프터버너점화하여 속도 이점을 살릴 수 없었다.[11] 즉, 무장 및 전술적인 상황에서 열세[12]이면서 속도 이점도 살리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이었던 것이다.[13]

사실 5월 1일에도 아르헨티나 공군 및 해군 비행단은 영국 전함들을 폭격했다. 이 당시만 해도 P-2 넵튠들이 날아다녔던지라 그나마 영국 해군의 움직임을 알아챌 수 있었는데 이것도 며칠후에 장비를 정지합니다가 되면서 도루묵...어쨌든 이 날 공격은 중고도(15,000 피트 이상, 3만 피트 이하 고도)에서 실시했는데, 영국군 함대 공망에 걸려 도리어 털렸다고 한다. 이후부터 저공 침투(대략 100피트-30m 상공-고도로 침투했다.) 전술을 기본으로 삼게 된다. 이 저공 침투 때문에 불발탄이 많이 생겨 큰 피해를 주지 못했기에 무시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자유 낙하 폭탄들은 보통 500 파운드(227kg)나 1,000파운드(454kg)의 무게다. 이런 쇳덩이들이 400kts(740km/h)속도로 날아들어오는 것이다. 포탄만큼은 아니라도 상당한 피해를 주며 이 때문에 호위함 같은 경우는 명중했다 하면 침몰 직전까지 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3.3. 컨커러의 순양함 격침

© from
영국 해군의 원자력 잠수함 컨커러(HMS Conqueror)

5월 2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초로 "극적"인 교전상황이 발생하여 이목을 끈다. 영국 해군의 원자력 잠수함 컨커러(Conqueror)가 아르헨티나 순양함 헤네랄 벨그라노(General Belgrano)를 시켰다.[14][15]

(ɔ) Unknown from
ARA General Belgrano underway; 아르헨티나 순양함 헤네랄 벨그라노

후대 역사가들의 평가들 중에는 이 사건은 사실 아르헨티나의 뻘짓 때문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오래되었지만 강력한 전함이라고 잘 짜여진 호위 함대의 잠수함 방어 체계를 전혀 동반하지 않고 행동하는 건 그야말로 자살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게 다 현대전을 안치러봐서 그렇다

원자력 잠수함의 실전격침 첫 사례 정도로 보이는 이 교전의 의의는 생각보다 큰데 아르헨티나의 해군 가용전력 대부분이 투입되어 있었고[16] 포클랜드 북쪽에서는 항공모함 베인티싱코 데 마요의 함대가 남쪽에서는 헤네랄 벨그라노의 함대가 포클랜드를 봉쇄하고 반격으로 나서려던 중이었다. 이 해전 이후 아르헨티나 해군은 후퇴함으로서 제해권(과 제공권[17])은 영국이 쥐게 된다. 이로써 영국은 사실상 이렇다할 방해없이 포클랜드 섬을 공략하게 되었으며[18] 아르헨티나 입장에서는 전투기들 항속거리 끝자락에 위치한 영국 해군에 제대로 된 피해를 줄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포클랜드 전쟁 전체의 승패를 결정지었다고 할 정도다[19].

이 격침된 아르헨티나 순양함은 건조된지 43년이 지난 1939년미국제 함선으로 건조 직후에는 진주만 공습에서도 살아남은 배였다. 박물관에 모셔져야할 배가 아르헨티나에서는 현역으로 뛰다가 노년에 곱지못한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안습 크리 + 지못미.(…)

풀 메탈 패닉의 잠수함투아하 데 다난(풀 메탈 패닉!) 부함장인 리처드 마듀커스는 이 당시 컨커러에서 부함장을 하였고 여기서 실전 첫 경험을 했다고 한다.그리고 모자 돌리는 습관도

3.4. 아르헨티나의 반격 - 셰필드 쇼크

© Nathalmad (cc-by-3.0) from
HMS Sheffield; 영국 구축함 셰필드(Sheffield)

그리고 이틀 뒤 아르헨티나 공군의 반격은 해전에서 새로운 러다임를 제공한다. 5월 4일 보복에 나선 아르헨티나군 해군항공대 소속 쉬페르 에탕다르 공격기가 엑조세 미사일로 영국 구축함 셰필드(Sheffield)를 격침시킨 것이다. 이로써 장군 ….[20][21]

당시 아르헨티나군 전투기는 2대씩 짝을 짓고는 셰필드를 공격하기 위해 으로 진입해왔는데[22], 공교롭게도 셰필드의 대공 레이더가 두 전투기를 한대로 인식하는 치명적인 버그가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두 대가 모두 레이더에 감지되는 순간, 이러한 상황을 예정하지 못했던 셰필드의 전투 통제 시스템은 오류로 먹통이 되어버렸고, 아르헨티나군의 쉬페르 에탕다르는 셰필드로부터 어떠한 대공 공격도 받지 않는 '거의 훈련 상황' 속에서 엑조세를 셰필드에 명중시킨다. 이로서 제트 스트림 어택이 실제로도 유효한 전술 기동임이 증명되었다. 또한 영국 해군은 이 과정을 좀 더 면밀하게 조사한 끝에...

  • 당시 영국군도 사용하는 엑조세를 쉐필드의 컴퓨터가 아군 장비로 인식, 적성 장비로 인정하지 않아서 대응할 수 없었다.
  • 왠지는 모르지만 함장 이하 주요 승무원들이 CIC에 없었다. 뭐냐 이건….
  • 이전부터 오보가 끊이질 않았기에 이것 또한 오보로 판정한 대공전 통제함 인빈시블이 동료함의 경고를 인정하지 않았다.
  • 낮게 날아온 쉬페르 에탕다르 기들을 레이더가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다.
...등의 보고를 내놓았다.

재미있게도 이때 셰필드를 격침시켰던 엑조세는 발탄이었다.[23] 미사일의 남은 가 인화한 화재가 배를 집어삼킨 것이다...결과적으로 불발탄은 아니었다. 네이팜탄 변종이려나 그러나 미사일 자체가 영 좋지 않은 함교 전투 통제실에 직격하는 바람에 세필드는 격침 이전에 이미 바다 위에 떠있는 고철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나 연료가 남아있던 로켓 모터가 화재를 일으켰고 이때 하필이면 셰필드의 피해 컨트롤 시스템이 피격과 함께 멈춰버린 바람에 화재진압에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안 되는 날은 뭘 해도 안 된다는 진리를 여실히 보여준다. 참고로 셰필드는 영국으로 예인중에 피탄된 곳에 물이 들어와(…) 6일 뒤인 5월 10일에 최종 침몰했다. 안습….

그런데 더더욱 안습한 사실은, 아르헨티나는 쉐필드의 침몰 사실을 영국 언론이 기사를 낼 때까지 스스로 알아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장거리 정찰이 가능한 기체들은 전쟁 초반부에 전부 장비를 정지합니다 꼴이 나 버렸고[24], 장거리 레이더 또한 작동 불가 상황이라 믿을 건 실전에 투입되었던 조종사들의 증언이었는데, 이러한 증언은 예로부터 신뢰도가 그다지 적절하지 못했다. 일단 불이 붙으면 격침! 이라고 잘못 알 수도 있는 것이고, 더군다나 이 엑조세 두 기를 쏘았던 쉬페르 에탕다르 조종사들은, 발사 직후 방공망의 사거리를 벗어나기 위해 바로 도주했기에 발사는 했는데, 도무지 어찌되었는지 알 방도가 없었다[25].

이후 셰필드 격침 전과를 기록한 엑조세는 옛 소련스틱스중국제 짝퉁 실크웜 못지않은 대함 공격수단으로 각광을 받는다. 이 사건은 대함 미사일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줘서 '셰필드 쇼크'라고 부르고 이후 군함의 건조에 있어서 대함방공능력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기 시작한다.

쉬페르 에탕다르

엑조세 발사 순간

피격당한 셰필드

  • 한편, 엑조세 미사일 자체는 프랑스군영국군(!)을 포함한 유럽의 몇몇 나라들이 사용중이라 NATO의 무기 목록에도 당연히 들어있고, 때문에 영국군 미사일 경보체제등이 엑조세를 아군 무기로 착각하여 작동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3.4.1. 프랑스 배신 떡밥

  • "아르헨티나에 엑조세+쉬페르 에탕다르 조합을 판매한 프랑스가, 영국에 엑조세의 정보를 넘겨줘서 고객을 배신했다"는 이야기가 사실인양 인터넷을 떠돌아다니고 있지만 이건 프랑스 안티들이 만들어낸 거짓말이다.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를 기습공격하자마자 프랑스는 즉각 아르헨티나로부터 주문받았던 엑조세와 쉬페르 에탕다르의 인도를 중지했으며, 영국에도 정보를 알려주지 않음으로서 동맹국과 고객 양쪽과의 의리를 모두 지켰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미 70년대부터 영국은 엑조세를 도입해 운용한 국가였다. 뭐하러 정보를 또 얻겠는가. 한마디로 까기 위한, 억지 주장이니 (더 이상) 믿지 말고 말하지도 말자. 그러니까 진짜 문제는 주문한 물품을 다 받지도 못했는데 전쟁을 일으킨 아르헨티나 쪽에 있었다. 급하게 전쟁을 일으켜도 딸랑 다섯 발밖에 안 받은 대함 미사일을 가지고 전쟁을 일으켰다니….
    안티들 중, 위 떡밥이 논파되면 "어쨌든 고객에게 물건을 넘기지 않은 것은 배신이다! 프랑스는 나쁜 나라다!"라고 비난하는 2페이지(…)로 넘어가는 경우가 생기면 이렇게 반박해주자. 포클랜드 전쟁은 엄연히 아르헨티나가 먼저 기습 도발했으며 전 세계가 비난한 침략전쟁이다. 예를 들자면 일본독도에 쳐들어오거나, 한국대마도에 쳐들어간 격이다. 당연히 친 놈이 나쁜놈이다(적어도 유럽 입장에는 그렇다.). 게다가 이 아르헨티나에 대한 무기수출 금지는 비단 프랑스 독단적인 조치가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내린 조치로, 같은 이유로 독일 역시 아르헨티나에 넘기기로 했던 구축함의 인도를 전쟁기간 동안 보류했다.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에는 이탈리아가 이라크에게 5척의 구축함을 다 완성된 상태임에도 인도를 거부했다. 만일 이때 이 구축함들이 이라크로 넘어왔으면 이란 해군은 그나마 유지되던 고속정 부대마저도 전멸했을 것이다.
    그래도 포기를 모르는(…) 극렬 프랑스 안티들은 위 두 가지가 모두 깨지더라도 "전쟁 중에는 그렇다 치더라도 전쟁 끝났으면 주문한 물건은 줘야지요? 돈만 먹고 모른척한 프랑스 나쁜 놈!"이라며 마지막까지 반격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는데, 전쟁이 끝나자 주문한 물건을 정확히 다 넘겨줬다. 프랑스는 약속을 지켰다(마찬가지로 독일도 넘기기로 했던 구축함을 넘겼다.). 프랑스는 잘못한 게 없다!
  • 위와 마찬가지로, "프랑스가 공군합동훈련을 통해 영국에게, 아르헨티나의 주력기인 미라지의 비행성능과 정보를 넘겨줬다"는 소리도 새빨간 루머에 불과하다.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원래 정기적으로 합동훈련을 하며, 포클랜드 전쟁때문에 시행된 훈련이 아니다. 게다가 프랑스 공군이 공중전 훈련에 미라지를 안 갖고 가면 뭘 갖고 가겠는가?라팔 무엇보다도 이 훈련에 참가했던 영국 조종사들은 포클랜드에는 가지도 않았고, 정작 영국에게 정보를 제공한 것은 뉴질랜드 공군, 그것도 프랑스제 미라지가 아닌 미국A-4 스카이호크 공격기에 대한 정보였다. 게다가 그 정보가 아르헨티나군이 사용하던 그 모델들이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A-4 항목을 참고하여 등장 시기를 체크해 보자. 30년이 지난 기체에 관한 정보가 이리저리 넘어갔다고 전쟁 수행에 큰 문제가 생긴다면 자체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다.
  • 한 가지 더 첨언하자면, 아르헨티나 스스로는 엑조세를 운용하지 못했다. 기술적으로 매우 진보된 물건이라 그 동안 A-4 스카이호크와 비유도 폭장만 사용하던 아르헨티나는 도입시 상당한 기술장벽으로 발생한 애로사항 때문에 슈페르 에탕다르에 설치된 발사대 자체도 제대로 튜닝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다소에서 기술진을 파견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는데오오 이거슨 고객감동 서비스 이 기술진들이 포클랜드 전쟁시에도 그대로 남아서 셋업을 도와주고 있었다. 이쯤되면 프랑스는 대인배라고 불러야 한다. 출처: #

3.5. 영국의 상륙전

5월 21일 영국군이 동포클랜드 산 카를로스(섬 서북쪽 위치, 반면 포트 스탠리는 동쪽이다.)에 상륙하면서 본격적인 상전이 시작되었다. SAS 2대대와 3대대, 코만도 여단과 육군 제5여단(구르카 대대 포함)이 투입되었으며 목표는 섬 동쪽 끝의 포클랜드 제도 최대도시이자 독부가 있는 항구도시 포트 스탠리. 이 날 아르헨티나 공군 FAS가 공습을 가했는데, 엑조세를 피해 이 곳에 상륙하던 계획이 도리어 역류해, 자연 방벽(근처에 산지와 언덕이 제법 있는 지형이라 엑조세를 방어하기는 좋았다)에 저공비행하는 FAS 기체들을 발견하지 못해 제법 큰 피해(대략 5척이 큰 피해를 입고 격침까지 가기도 했다)를 당한다. 물론, 그래봐야 상륙작전은 잘 끝났기에 아르헨티나에게 남은 건 털리는 것 뿐이었지만...덤으로 이 날 카라[26] 및 에르마치도 휴대용 대공 미사일(레이피어, 블로우파이프)에 탈탈 털렸다.[27]

5월 25일, 아르헨티나군은 다시 한번 쉬페르 에탕타르를 동원하여 영국 함대 본진에 두 발의 엑조세 미사일을 발사하였으나 이번엔 영국군이 엑조세 발사를 탐지하고 즉시 대응에 나서 본진은 타격을 입지 않았으나 그 중 한 발이 수송선 아틀란틱 베이어[28]에 명중하여 불길이 치솟았고 적재되어있던 물자인 에섹스 헬기와 치누크 헬기가 있는 상태로 5월 30일 격침되면서 이후 영국 해군측이 헬기를 이용한 대규모 상륙작전이 힘들어졌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아르헨티나군은 더 심각한 보급난을 겪고 있었다.

5월 28일, 진격로의 측면을 위협하는 아르헨티나군 잔존부대를 제거하여 안전을 확보코자 섬 중앙의 좁은 길목인 구스 그린(Goose Green)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 영국군 피해는 전사 17명, 부상 31명. 반면 아르헨티나군 피해는 전사 250명, 부상자 121명, 투항병력 1,400명…. 사실 SAS에 구르카까지 투입된 순간 사망 플래그는 성립된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구르카병들이 실전에 참여하기도 전에 전투에서 패하고 지칠대로 지친 아르헨티나군들은 구르카병들이 온다는 소문(구르카 항목 참조)에 항복했다고 한다. 덕분에 상태가 멀쩡한 아르헨티나군 포로들이 가득한 사진이 남게 된다.

일시적으로 이긴다 하더라도 제해권을 영국이 장악한 이상 추가적인 지원은 없어 결국엔 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아르헨티나 병사들은 대부분 징집병으로 전문성이 의심되는 병사들이었다. 쉽게 말해 총알 떨어진 카빈총 든 예비군 10명이 중무장한 네이비씰 1명과 맞서 싸웠다는 이야기다. 숫자가 차이가 나더라도 게임이 될 리 없다. 게다가 아르헨티나측이 머리수[29]만 믿고 중화기도 없이 병력을 분산배치하는 바람에 완전히 망했어요. 서경석 퇴역 장군이 집필한 <전투감각>을 보면 보급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그 사례로 포클랜드 전쟁 당시 아르헨티나군의 방한장비가 부족한 것을 꼽고 있다. 전쟁시기가 겨울(남반구이므로)임을 감안하면... 그러나, 이 아르헨티나군 수송부대 조종사들도 사실 용자들이다. 전쟁이 시작되고, 여건상 포클랜드 섬 주변의 제공권은 당연히 영국군의 차지였던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보급 및 부상자 후송 임무를 수행했다. 주로 밤중에 이륙했는데, 이 당시 악천후를 감안하면 호위기들도 없이 임무를 수행한 이 조종사들은 영웅 칭호를 받아 마땅한 사람들일 것이다. 실제로 아르헨티나군의 C-130이 초계중이던 해리어들에게 격추되기도 했다. 이분들이야말로 소븐가르드 가실 분들이다.~ 당시 포트 스탠리를 점령하고 영국이 응답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때문에 포클랜드 제도에 그토록 인해전술을 시전한 것이다. 그러나 활주로 확장 공사(1주일 걸릴 것으로 예정) 및 전차, 야포탄 등 그야말로 전쟁수행에 필요한 물건들은 제대로 운송할 수 없었다. 전쟁 준비를 거진 1달에 걸쳐 할 수 있었기에 서두른다면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야말로 정신력부족으로 인해 현대전의 필수품은 물론, 기본적인 보급품(월동 장비마저도..)마저 다 빼먹어 버린 것이다. (더군다나 현대적인 해군의 부재로 전부 공중수송을 했으니 중장비 수송은 거의 불가능했으므로...) 애초에 개념이 있었다면 이런 상황에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았겠지만.]

3.6. 엑조세의 마지막 발악

5월 30일, 아르헨티나군은 마지막 남은 한 발의 엑조세 미사일을 발사하는 승부수를 띄웠으며, 작전이 끝난 직후 "이번에 발사한 엑조세가 인빈시블에 명중했뜸!"이라 발표했다. 영국은 즉시 "헛소리 작작 하시죠. 우리 인빈시블 멀쩡하거든요?"로 맞받아쳤지만 피격당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아 한동안 아르헨티나 측의 발표대로 인빈시블이 피격당해 손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 마지막 엑조세는 함대 방공망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게 정설이다. 그리고 아르헨티나측의 발언도 약간 일리가 있게 보였던 게, 그 전에 얻어맞고 폐기 상태가 된 채 둥둥 떠있던 애틀랜틱 컨베이어가 그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즉 헐크 함선을 인빈시블로 오인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이 당시 영국 언론들도 조용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첫 엑조세 공격이 이들 덕분에 아르헨티나에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장님 놀려먹은 셈이다.

참고로 이 마지막 엑조세 공격 당시에 인빈시블의 시킹 헬리콥터 조종사로 근무 중이던 엘리자베스 2세의 둘째 아들 앤드류 왕자가 인빈시블의 갑판 위에 있었다고 한다(....) 흠좀무

3.7. 영국의 승리

5월 31일, 영국군은 켄트 산에 도달하여 포트 스탠리를 포위할 태세를 갖추었다. 상황이 아르헨티나에게 불리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UN은 포클랜드 철수를 제안하지만 이를 거부했다. 결국 전세가 영국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그동안에도 자신을 남미국가가 아닌 서방 백인 국가의 일부로 생각했던 아르헨티나는 정작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이 자신들을 지원해주지 않게 되자 급기야는 다른 중남미 국가들의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었다. 이제야 말이냐! 그러나 대부분의 중남미 국가들은 오히려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제도 침공을 비난하거나 지원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칠레는 아예 영공통과 허용 등으로 영국을 지원[30]했다. 중남미 국가들도 유일하게 페루 한 나라만이 아르헨티나를 지지했으나 이미 전세는 뒤집을 수 없을 정도로 영국 측에게 유리해졌다.[31]

6월 8일 기동부대가 이동한 상태에서 항공 호위기가 적은 상태로 상륙 작전을 펼치다가 상륙함(LSL) 2척이 A-4 공격기에 의하여 피해를 입게 된다.

당시 방공 미사일인 레이피어는 5여단 본부대 호위로 빠져있었고, 체공하던 해리어들도 아르헨티나 공군기들이 침투하는 척하면서 빠져버리는 것 때문에 지친 상태라서 제대로 된 저지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고, 이 상륙함 자체가 현대적인 LSD나 LPD 같은 게 아니라 LST에 가까운 형태인지라 이후 영국측의 상륙 전술이 초수평선 상륙 작전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실제로 아르헨티나군에서 급히 차출한 항기들로 이루어진 미끼 부대를 운용해 해리어들을 낚시하기도 했다. 이는 아르헨티나가 B-108 칸베라를 보유했기에 민항기를 출격시켜 영국군들로 하여금 칸베라 폭격기들이 출격한 것으로 오인하게끔 낚시를 시도한 것이다. 실제로 효과가 꽤 있어서 영국군 조종사들 및 승무원들을 피곤하게 만들었고, 저공 침투하는 A-4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포클랜드 판 볼로 작전...이 아니고 Fenix 작전이다. FAS 지휘관인 크레스포 준장을 보면 점점 누군가가 생각난다. 덤으로 이 A-4들은 해리어들에게 AIM-9L을 맞고 털렸다. 미사일 만세!! 미사일 만세!! 어!???.

6월 11일 영국군 최후의 공세가 개시되었다. 이때 영국군은 영공을 개방해준 칠레 영공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면서 아르헨티나에 대한 공세를 실시했다. 사흘 뒤인 14일 포트 스탠리의 아르헨티나군은 백기를 들면서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4. 결과

포클랜드 제도는 영국 영토로 남게 되었다.

영국 측 전사자는 250여명, 아르헨티나 측은 600여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이후 21세기까지의 세월 동안 양측 참전자들 중 자살한 이들이 전사자의 수를 넘어선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자살자 숫자가 과장되어 있다는 말도 있다. # Mod에 따르면 포클랜드 참전 군인의 7%, 즉 95명이 자살과 관련된 죽음을 맞았다.
이 전쟁에서 발생한 민간인 피해는 사망자 3명. 모두 포클랜드의 영국인 주민으로 6월 11일 마지막 공세 때 영국군의 오폭으로 사망했다.

전쟁이 아르헨티나의 패배로 종료되자 레오폴도 갈티에리 대통령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광탈 레이날도 비뇨네 장군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고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비뇨네 역시 국내의 반발을 이기지 못하였고 결국 이듬해인 1983년 비뇨네 정권도 여러 반정부 세력들의 공격을 받아 붕괴되면서 1976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여 반인륜적 폭력과 살인 등으로 국가를 공포로 몰아넣은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은 포클랜드 전쟁으로 사실상 붕괴되었고, 이후 아르헨티나는 라울 알폰신이 대통령이 되는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경사났네 경사났어

영국도 뜻밖에 막대한 전비를 쓰고 사상자도 꽤 나온 전쟁이었다.[32] 그래서 영국에서는 이 전쟁을 미국베트남전에 비유하고 있다. 그런데 규모와 피해는 비교도 안 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엄살같다…. 아니, 그전에 위에 언급된 아르헨티나군의 장대한 삽질들을 고려해 보자.

여하간 대처는 그 막대한 전비에도 불구하고 지지도가 급상승해 정권연장에 성공했으며, 덕분에 노동당은 길고 긴 야당 시절을 보내게 된다. 이에 대해 포클랜드 전쟁에서의 막대한 전비는 안 그래도 힘든 영국 재정에 직격타를 날렸으며, 영국 경제가 막장화되는 데에 크게 기여한 전쟁이기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전쟁 이전 70년대의 영국은 연간 2.8%의 저성장, 석유파동으로 연평균 20% 이상의 인플레이션 발생, 평균 10.1%의 실업률, 영국병으로 생긴 고비용 저생산성에 의한 재정악화 등으로 경제규모가 1인당 GDP 세계 18위까지 떨어지며 신음한 반면, 전쟁 이후인 1980~1990년 이후부터는 경제가 다시 발전해 2013년 기준으로 세계 6위. 즉 포클랜드 전쟁이 영국 경제를 망쳤다는 설은 근거가 떨어진다. 이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회적 문제가 생기긴 했으나, 영국이란 나라의 총 경제규모 자체는 엄청나게 발전했다. 적어도 IMF 금융지원을 받던 1970년대[33]보단 훨씬 낫다.[34] 물론 전쟁으로 인해 영국 경제가 살아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영국이 전쟁하다가 경제 말아먹은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5. 트리비아

  • 과거 예비군정신교육이라 쓰고 세뇌교육이라 읽는다의 주요 단골 소재 중 하나였다. 아르헨티나가 무리하게 영국하고 싸우다가 참패해서 하이퍼 인플레이션에 직면해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대국민 혼란이 일어난 대신, 승전국인 영국은 지금도 잘 먹고 잘 산다는 이야기. 그러나 사실, 이 전쟁은 결국 두 나라 모두 경제와 나라 분위기를 흔들어 놓았다. 다만 나라 경제기반 자체가 약했던 아르헨티나[35]는 영국과 달리 재기에 실패해 쿠테타와 군사독재로 인해 지금의 막장이 된 것은 굳이 긴 설명을 붙일 필요도 없다.
  • 위의 찌라시와는 또 별개의 군 정훈교육 자료가 있다. 이건 포클랜드 전쟁 당시 영국 언론의 무분별한 전황 보도촉새짓가 아르헨티나의 전쟁수행에 도움이 되어 이후 영국 언론이 자체 통제에 들어간 것을 다루고 있다. 즉 전시상황에서 국민의 알 권리가 어디까지 보장되어야 하는지 고민해보자는 내용.
  •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본래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침공 계획은 1982년 말로 맞춰져 있었다. 이때쯤이면 엑조세 미사일을 탑재할 수 있는 슈페르 에땅다르를 비롯한 주력 무기의 도입이 완료되고, 영국이 퇴역시킬 계획인 주력 군함들이 실제로 사라지는 가운데, 겨울(그것도 남극!)이라서 날씨도 극히 추워질 것이므로 영국이 반격하는 데 훨씬 불리해질 것이라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전략이었던 셈. 하지만 그해 3~4월에 경제난으로 아르헨티나에서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면서 다급해진 군부 정권이 국내 여론을 반전시키기 위해 침공을 서둘렀다는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국내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군사적인 이점을 스스로 포기하고, 불리한 전쟁을 자초했던 셈. 디스커버리 채널의 관련 다큐

5.1. 명칭 문제

한국에서는 당시 서방의 보도를 그대로 받아들여 포클랜드 전쟁이라고 칭하나 포클랜드 제도는 아르헨티나에서는 말비나스 제도라고 불리기에 이 전쟁은 아르헨티나 편을 든 나라들에서는 말비나스 전쟁으로 불리게 되었다. 실제로 영국이 이겨서 포클랜드 제도는 포클랜드 제도로 남게 되었고 그렇게 널리 알려져 있기에 큰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인과 대화할 때 등에는 기분 나빠할 수도 있으므로 주의. 한국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한국과 일본이 독도를 두고 전쟁했는데 이를 다케시마 전쟁이라고 부르냐 독도 전쟁이라고 부르냐 하는 문제와 같다. 그래서 이 문서는 말비나스 전쟁으로도 들어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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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그 당시로 따져도 총 인구가 3,000명이 안 되는 지역인데다 산업도 목축업(양치기) 정도라 자급자족도 쉽지 않은 곳이다
  • [2] 이 당시 아르헨티나 군사독재정권은 신자유주의를 실험적으로 받아들였는데 그게 역효과를 불러일으키면서... 헌데 정작 이러한 정책이 영국과 미국에서 히트치면서 90년대에 역수입ㅋ 물론 결과적으로 대망하긴 했지만
  • [3] 포클랜드 전쟁 전의 대처 정권의 지지율은 높게 잡아서 25%를 넘지 않았다고 한다. 즉, 이 전쟁이 다음해에 있을 선거를 대비해서 정권의 지지율을 높일 수 있는 유력한 방안이었다. 이 승리로 대처는 무려 1990년대까지 지지를 연장하게 된다.
  • [4] 여담으로 이 사진에 나오는 항공모함 허미즈는 전쟁이 끝나고 1986년 인도에 팔렸다. 인도에서는 거인이라는 뜻의 비라트로 현역에서 활동 중에 있다. 안습제국.
  • [5] 처음에는 대규모 원정을 위해 좀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이미 남반구의 4월은 겨울을 앞두던 터라 "정치적인 목적에서라도 포클랜드 회복은 필요하며, 할 수 있다. 대신 포클랜드로 갈거면 지금 가야 한다"는 해군참모총장 헨리 리치 대장 등의 조언을 받아들여 일단 본토와 지브롤터에 있는 전투함을 싹 긁어모으고 상선까지 징발했다.
  • [6] 반면, 4월 포클랜드 제도를 점령한 직후 아르헨티나 측에서도 미국에 협조를 요청했었으나 결국 거부당했다.# 주석 27 참조. 아르헨티나는 미국이 반공을 명분으로 자신들을 지지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아르헨티나가 정상적인 전쟁 명분을 가진 것도 아니기에 미국으로써는 영국을 편드는 것 외에는 답이 없었을 것이다.
  • [7] 나토군 사령관을 역임했던 육군 대장 출신.
  • [8] 미군이 그동안 장거리 폭격비행 기록을 수립하지 않은 건 물론 전선 가까이의 해외기지를 이용한 덕분이었다. 다만 보안상의 문제로 1999년 유고 공습(코소보 사태)과 2001년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는 B-2 스피릿이 아예 미 본토에서 목표지역 사이를 논스톱 왕복비행하기도 했다. 흠좀무….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는 인도양 디에고 가르시아 섬의 기지를 이용하여 그나마 비행거리를 줄일 수 있었다.
  • [9] 사실, 전쟁 직전에도 여러 전문가들은 이 비행장을 연장 공사(대략 1주일 걸린다.)해주면 제트 요격기 및 공격기들을 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으나, 아르헨티나 수뇌부는 영국이 1만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로 기동함대를 보내지는 못할 것이라고 오판했고, 설령 온다고 해도 인해전술이면 충분할 것이라는 안일한 판단에 의존했다. 적어도 FAS(Southern Air Force, 스페인어로 Fuerza Aérea Sur를 줄여서 FAS) 지휘관이 이쪽을 터치할 수 있었다면 상황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는 의미없는 예상일뿐... 이 비행장에서 미라쥬와 엑조세를 탑재한 슈페르 에땅다르, A-4를 운용하고 있었다면 우리는 불타는 영국의 폭격기, 군함들의 사진으로 이 전쟁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중요한 전략적 요지였으나 판단 미스로 탈탈 털린 것이다.
  • [10] 결정적인 피해는 아니었다. 이후에도 여기서 지속적으로 C-130 수송기 및 정찰기들을 운용한다.
  • [11] 이랬다가는 연료가 없어서 본국에 돌아가지 못한다. 애초에 포트 스탠리 비행장은 활주로가 짧아 미라지가 뜨고 내리기에는 무리인 곳이다. 그래도 미라지 한 대가 연료부족으로 비상착륙을 시도하기는 했다. 대공포 사수들이 격추시켜서 그렇지...안습. 그래도 대공포 사수들을 욕할 수는 없는게, 그 날 새벽부터 영국군의 공습과 해상포격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이들은 결과적으로 전쟁 기간중 해리어 4대를 격추한다.
  • [12] 영국의 해리어는 아르헨티나가 쓰던 Matra 530과 Shafrir-2와는 넘사벽인 AIM-9L을 사용했다.
  • [13] 이런 와중에서 폭격을 가하여 영국 함선들을 격침시킨 아르헨티나 조종사들은 그야말로 용자, 대인배들이다. 사실, 이만큼이라도 한 게, FAS의 지휘관은 베테랑 조종사 출신의 장성(다시 말해 경험치 만땅)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 [14]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침몰로 323명의 승무원이 전사하고 700명의 승무원들은 악천후속에서 구조되었다고 나왔다.
  • [15] 헤네랄 벨그라노는 아르헨티나에서 건조한 순양함이 아니라 1938년에 취역한 미국의 브루클린급 경순양함 USS Phoenix(CL-46)였다. 진주만 공습 와중에 아무런 상처없이 살아남아 남은 전쟁동안 활약했지만 결국 전쟁후 아르헨티나에 매각되어 활동하다가 침몰..
  • [16] 정확히 말해서 투입되어 있었다는게 포인트다. 물에 띄워놓으면 뭐할건데, 유기적으로 잘 짜여진 체제가 있어야지...실제로, 대잠 전력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아 전쟁 전 4월 동안에도 대부분의 수송은 공중으로 했다. 잠수함 공격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 [17] 항공모함조차 짱박혀 버렸으므로, 함재기들도 본토 기지에서 출격하게 되어 간당간당한 항속거리 내에서 작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함재기들이야 전부 A-4들이었으나, 영국도 미사일을 제외하면 해리어 또한 공중전에 유용한 기종은 아니었다.
  • [18] 게다가 첫 날 이후로 최첨단 레이더 시스템까지 오프라인이 되어 영국군 전함들이 포격 거리로 접근하기 전까지 알아챌 수도 없었다.
  • [19] 사실은, 대잠 전력을 갖춘 함대, 장거리 전폭기, 정찰기 편대 등 해상전의 필수 요소들조차 없이 전쟁을 벌였다는 건 애초에 시작하기 전부터 진 싸움이었다.
  • [20] 그렇지만 아르헨티나가 보유하고 있던 쉬페르 에탕다르와 엑조세는 각각 5기와 5발 뿐이었다. 항공모함을 격침시키는 대박이 나지 않는 이상 전황 자체를 뒤집기에는 좀 적었다. 사실 영국군이 상륙을 시작한 5월 중순 이후부터는 항공모함을 격침시켰다고 해도 털렸을 것이다. 지상군은 장비도 부족하고 예비군보다 못한 수준이며, 아르헨티나 해군은 항구에 짱박혀 있었으니...
  • [21] 아르헨티나 공군 및 해군 항공대는 전쟁 전에 자국의 42식 구축함을 이용해 가상 전투를 벌여 보았으나 생환기가 50%정도 밖에 안 되는 결과를 보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방법이 없었다... 까라면 까야지 아놔
  • [22] 빔 기동(Beam Maneuver). 라이트 노벨 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에서도 등장하는 공중기동.
  • [23] 그러나 영국군의 실험결과 대함 미사일들은 격추되거나 불발탄이더라도 상당한 위력을 가지고 있음이 증명되었다. 이는 자유낙하 폭탄들에도 적용되는데, 포클랜드 전쟁중 프리깃함들에 명중한 불발탄 자유낙하 폭탄들이 끼친 피해를 감안하면 절대로 이 명중한 불발탄의 위력을 평가절하할 수 없다.
  • [24] 이 기체들도 사실 노후화된 기종들이라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기에는 문제가 좀 있었다.
  • [25] 사실, 아르헨티나가 이렇게 부족한 면모를 많이 보이는 이유는, 군대 조직 자체를 남미 패권 싸움을 위해 구성했기 때문이었다. 즉, 고속 장거리 전폭기가 없었고, 재급유기도 단 2대였던 이유는 보통 국경 지역에서 벌어지는 소규모 분쟁을 대비해 시스템을 구축해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조금 어려움에 처했다고 그 자리에서 해상전을 벌여 버리니... 암릿처 성역 회전동맹군이다.
  • [26] 푸카라는 사실 반정부군 게릴라나 마약 조직을 진압하기에는 최적의 기체였다. 그러나 이런 기체들을 최신 무기들이 오가는 현대 전쟁터에 내보내는건...하도 끔찍해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27] 실제로,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서 이들을 이용해 영국 함대를 공격하는 시도도 해보았으나, 20mm 탄환으로 가벼운 기스를 내는 것 밖에는 전과가 없었다.
  • [28] 수송선에 전방에 수직이착륙을 하기 위하여 방염처리한 장소를 만든 것이라고 하면 정확하다. 해당 함정에 대해서 항공모함이라고 하는데 사실 이 함의 임무는 2척의 항공모함에게 헬기와 해리어를 전달하는 것이다. 하지만 워낙 컨테이너선에서 해리어를 운용한다는 사실이 너무 놀랍다보니 항공모함이라고 표기하지만 정확히 이야기하면 항공기 수송함이다.
  • [29] 지상군(알보병이 대부분)만 10,000명 가량 투입했다. 포클랜드 제도 인구가 많이 따져봐야 3,000명인 사실을 감안하면 인해전술 그 자체다. 제한된 수송 전력으로 이 병력을 수송하느라 5월 개전까지 준비 기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장비(전차, 야포, 공사용 장비 등)와 전문가(공병 등)들은 전혀 데리고 오지도 못했으며, 개인 화기의 탄환도 재고 부족에 허덕이고 있었다. 대한민국 국방부육방부라고 까지만 이 동네는 정말로 육방부 인증했다...
  • [30] 당시 칠레는 아르헨티나와 극히 사이가 좋지 않았다.
  • [31] 사실 페루는 포클랜드 전 발발 초 아르헨티나와 영국를 상대로 평화협상을 중재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게 되자 아르헨티나 지지로 돌아섰다.
  • [32] 아르헨티나의 함선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은 이유는 초반 헤네랄 벨그라노 격침 이후 아르헨티나 해군이 항구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 [33] 정확히는 1976년에 금융지원을 받음.
  • [34] 예를 들어 1970년대까지 영국의 농업은 말 그대로 파탄났지만, 전쟁 이후 1980년대 이후부터는 최신 기계화되어 2000년 기준으로 국내 필요량의 60% 정도의 양을 생산하면서 노동력은 2%만 사용한다. 금융 및 일반 서비스 분야도 이때부터 엄청나게 발전했다.
  • [35] 70년대의 오일쇼크가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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