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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침공

last modified: 2015-04-15 21:46:28 by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배경
2.1. 히틀러의 영토 확장욕과 영프의 방관
2.2. 독일-폴란드 국경 분쟁
2.3. 독일의 경제 위기
2.4. 소련-폴란드 국경 분쟁
2.5. 독소 불가침조약
2.6. 자작극과 개전
3. 전쟁 계획
3.1. 독일군
3.2. 폴란드군
4. 진행
4.1. 독일군의 공세
4.2. 소련의 침공
4.3. 종지부
5. 병력 및 피해
6. 종결 이후
7. 2차 대전 이후
8. 뒷이야기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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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9월 6일. 독일 주간뉴스

Invasion of Poland (영어: 폴란드 침공)
Kampania Wrześniowa (폴란드어: 9월 군사작전)
또는 Wojna Obronna 1939 Roku (폴란드어: 1939년 방어전)
Fall Weiß (독일어: 백색 작전)
또는 Polenfeldzug (독일어: 폴란드 원정)

1939년 9월 1일부터 10월 6일까지 약 1달 동안 진행된 독일 제3제국폴란드 사이에 벌어진 전쟁. 그리고 이를 계기로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전쟁, 헬게이트인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영국·프랑스의 선전포고 소식을 들은 침공 당사자인 아돌프 히틀러는 고작(?) 폴란드 침공만으로 세계대전이 발발했다는 것에 충격이 커서 한동안 말도 못했을 지경이었다.히틀러: 아니 체코슬로바키아는 손 놓고 방관한 놈들이 고작 폴란드를 침공했는데 선전포고하네??? 그건 니 입장이고,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와의 약속을 지켰을 뿐이지. 문제는 실제로는 공격을 안했다는 거지만

2. 배경

2.1. 히틀러의 영토 확장욕과 영프의 방관

히틀러는 1932년 수상이 된후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독일을 옥죄던 베르사유 조약을 폐기하고 무제한 군비를 하겠다고 주장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뜨끔했지만, 갓 취임한 히틀러를 그냥 입만 살아있는 선동가라고 생각했으므로 이런 발언을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후 1934년 히틀러는 대통령과 수상을 합친 직위인 총통에 올라 나치 이외의 모든 정당을 해산하고 수권법을 통과시켜서 절대권력을 확립하였다. 이렇게 독일에서 독재 체제를 구축하자마자 외부로 시선을 돌렸다. 히틀러의 침략 논리는 "독일인이 사는 곳은 모두 독일 영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36년 히틀러는 비무장지대로 되어 있던 라인란트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는 명백한 베르사유 조약의 위반이었으나 원래 독일의 영토였기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는 외교적 항의에 그쳤다. 이후 한발 더 나아가 독일이 1938년 불법적으로 오스트리아를 합병했는데도 영국과 프랑스는 역시 가만히 있었다. 오히려 이탈리아베니토 무솔리니가 이에 발끈해서 군대를 출동시켰는데, 히틀러는 쥐트티롤을 이탈리아에 주는 대가로 무마했다. 이런 사례같이 히틀러를 용인하여 전쟁을 피하려는 영국과 프랑스의 소극성은 시쳇말로 약한 외교로서 후에 매우 비판을 받지만, 영국과 프랑스같은 민주 국가는 전체주의 국가와는 달리 기본적으로 전쟁을 싫어하는 여론을 거스를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30~40대의 대부분이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참호전을 겪은 참전용사들이라서 어떡하든 전쟁은 피했으면...하는 여론이 대세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것을 잘 모르는 히틀러는 스스로 승리했다고 생각했다.

이후 히틀러는 약소국인 체코슬로바키아에게 독일인 주민이 다수인 주데텐란트를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가 나서서 히틀러를 막아줄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체코를 배신하고 주데텐란트를 히틀러에게 떼어주면서 다시 전쟁을 회피한다. 이때 히틀러는 영불의 대표단에게 "이번만 봐주면 다시는 안 그러지"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불과 반 년만에 히틀러는 뮌헨 협정으로 보장된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무시하고 체코를 병합, 슬로바키아를 괴뢰국으로 만들며 영불과의 약속을 파기했다. 속았다는 걸 깨달은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가 공공연히 다음 목표로 외치고 있는 폴란드의 단치히 회랑 문제에서 폴란드를 전면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한다. 약속은 개나 줘버려!

당시 프랑스의 대독일 전략은 '마지노선을 중심으로 1차 세계대전 방식의 방어를 두둑히 하고, 기타 국가들로 독일의 뒤를 친다'는 것이었다. 그 기타 국가들은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폴란드로 모두 프랑스의 전략에 동의한 상태였다. 하지만 동맹국 체코슬로바키아를 독일에 팔아버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그 중 폴란드를 빼고 모두가 독일에게 잡아먹힌 상태였던 것이다.

최악의 경우 폴란드가 사라지고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후방안전이 확실히 된 독일과의 1대1 전쟁'은 프랑스에게 악몽같은 상황이었고, 그래서 프랑스는 영국과 함께 폴란드에 대한 독립보장을 확고히 했던 것이다.

2.2. 독일-폴란드 국경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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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와 단치히 자유시는 독일 본토를 동프로이센과 갈라놓고 있었다.

근본적인 배경은 단치히 회랑 문제였다. 독일의 기원인 프로이센은 제1차 세계대전 종료와 베르사유 체제를 통해 동서로 쪼개지고, 그 가운데 회랑 지역을 신생 독립국인 폴란드가 얻게 되었으며, 해당 지역의 핵심 항구도시인 그단스크는 단치히 자유시로서 사실상의 독립국가로 존속하고 있었다.

독일로서는 육로로 연결되지 않은 동프로이센 지방과 본국과의 연결이 절실히 필요했다. 이는 제3제국 이전의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부터 제기된 문제로, 독일은 히틀러와 나치 등장 이전부터 단치히 회랑을 강제로 잃어버린 땅이자 반드시 되찾아야 할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 문제는 1934년 1월,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으로 어느 정도 일단락되었으나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뮌헨 협정으로 독일이 주데텐란트를 접수하더니, 1939년 3월에 체코를 통채로 꿀꺽해버리면서 본격적으로 단치히 문제가 대두되었다.

국경지대의 조그마한 땅[1][2]을 얻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 분할에 가담한 폴란드였던만큼, 그단스크 문제를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나치 독일의 주장에 의하면 그단스크의 할양이 폴란드 회랑의 무력화라고 보기 힘들고, 히틀러도 폴란드에 회랑의 철도 치외법권을 요구하는 대신 그단스크 25년 자유이용권을 준다는 것이었으나, 폴란드는 자존심이 매우 강한 나라였다는 것이다. 이미 폴란드 회랑에 그단스크를 대신하여 건설한 그디니아[3]의 물동량이 그단스크를 넘어선 상황이었으므로 그단스크 할양이 폴란드 회랑 할양과 같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 독일의 생각이었다.

문제는 히틀러의 외교적 신뢰도가 매우 낮았다는 것과 폴란드가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는 것이었다. 라인란트, 오스트리아, 체코의 문제로 히틀러의 신뢰도는 매우 낮았고 폴란드는 주변 모든 국가에 분쟁을 일으킨 나라답게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 실제 그단스크 문제는 1938년 후반부터 독일-폴란드간 외교교섭으로 진행되고 있었으나 폴란드는 히틀러의 의도라는 것을 알자마자 거부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단스크가 독일이 폴란드에게 원하는 최소한도였다는 것이다.

당시 독일은 폴란드를 프로이센의 영토를 강탈한 주적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 영토를 회복하는 것은 독일국민 전체의 바람이었다. 단지 그 범위가 차이났을 뿐인데, 그단스크, 폴란드 회랑, 포즈난[4]의 순으로 중요도를 인식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본적인 요구인 그단스크도 폴란드가 거부하면 독일 내부는 히틀러와 나치당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들끓을 수 밖에 없던 것이다.

이렇게 단치히 문제에서 폴란드의 거부가 이어지자, 합법적으로 집권한(...) 히틀러는 점차 폴란드를 대화상대로 삼기를 포기하였다. 이후 히틀러는 폴란드에 순차적으로 강경한 요구를 꺼내고 대 폴란드 전쟁을 준비한다. 1938년에는 단치히와 회랑 통행권을 요구하던 독일이었으나 1939년 초에는 회랑까지, 1939년 4월경부터는 전쟁계획을, 5월에는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어 폴란드 침공을 기정사실화하였다. 여기에 뮌헨 회담과 체코 합병으로 외교적으로 자신감이 생기고 독일의 국력도 강해졌다고 인지하게 된 것도 빼놓을 수가 없다.

결과적으로 나치 독일의 입장에서는 1938년의 제안만으로 독일이 폴란드를 내륙국으로 만들 요구를 했다는 것은 자료의 일부만 보고 말한 것이며, 히틀러가 처음에 요구한 것은 그단스크와 회랑 통행권이라는 것이 당시 독일의 주장이다.

하지만, 이건 조금만 살펴봐도 말이 안된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영토적인 면에서 봐도 단치히 자유시가 독일측으로 넘어가면 사실상 회랑의 폭이 절반으로 줄어들고 영해의 폭도 크게 줄어들게 된다. 그리고 독일 뿐 아니라 폴란드도 그단스크를 자국의 영토로 생각하고 있었고, 실제 그단스크에 폴란드의 소규모 군대가 주둔하며 세관을 관리하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서 히틀러의 요구대로 하면 독일 영토가 되는 그단스크를 폴란드가 마음대로 이용할 수 없게 된다. 이런 경우에 대해서는 히틀러의 약속 따위야 위에서 설명한 대로 부도수표에 가까우니 논할 가치조차 없다.

1938년 10월 말에 리벤트로프폴란드 회랑을 지나는 철도와 도로를 포함해서 그단스크를 독일에 돌려주고 대신 단치히 지역에서 폴란드에게 무상으로 항구를 제공하고 또 국경선을 공동으로 지키면서 불가침 협정을 25년으로 연장하는 안에 합의하여 독일과 폴란드의 모든 이견을 일거에 해결하자고 제안하고 있었다. - 히틀러 평전 2권 P217, 이언 커쇼

그리고 통행권은 우습게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회랑 통행권을 나치 독일에게 부여하면 앞서 언급한 그다니아를 포함해서 사실상 회랑 전체의 통치권을 상실해버린다. 위에 언급한 대로 회랑의 철도 치외법권을 요구했기 때문에 이 제안이 받아들여지면 철도로 독일 군대와 민간인이 제집 드나들듯이 폴란드 회랑을 왔다갔다할 것이 뻔하며, 철도 부지가 사실상 독일의 영토가 되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서 위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도로에 대해서도 치외법권을 요청한 것은 위의 예시문만 들어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치외법권 자체만 따져도 타국의 주권을 심각하게 해치기 때문에 외교관이나 대사관에만 한정적으로 적용되는 등 매우 좁은 범위만 적용하는데, 위의 예시문을 보면 치외법권 수준이 아니라 그냥 폴란드 회랑을 지나는 철도와 도로 중 단치히와 연결되는 것을 통째로 독일에게 할양하라고 적혀있다. 이러면 독일이 아주 인심을 써서 도로 1개와 철도 1개만 이 주장을 적용했다고 해도 해당 도로와 철도가 폴란드 회랑을 횡단하기 때문에 말 그대로 폴란드 회랑은 두 조각으로 갈라지며, 확실하게 폴란드의 바닷길은 차단된다. 이 정도면 칼만 안들었지 강도 수준이다.

원래부터 자국 국경에서의 검문검색 및 통제권은 주권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축이며, 이게 무너지면 사실상 영토 통제권을 상실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지금의 유럽연합같이 자국 영토의 통행권을 민간인에 한해 타국에게 부여한다는 것은 21세기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가능해진 것이며, 제2차 세계대전 개전 직전의 상황에서 저런 주장은 말만 그럴싸했지 땅을 바쳐라!에 더 가깝다.

여기에 더해서 독일은 폴란드를 123년이나 식민지로 분할 점령 통치한 입장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인해 간신히 독립한 폴란드의 입장에서는 통행권 요구를 빙자해 몇십 년도 지나지 않아서 명백한 자국 영토를 다시 뜯어가겠다는 시도를 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이야기일 뿐이다. 게다가 그 영토가 국가 멸망 전에도 폴란드의 영토였고, 신생 폴란드에게는 유일한 해양 출구인 폴란드 회랑이라 중요성도 크며, 체코슬로바키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독일의 요구를 들어주었다고 해도 추가 요구가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당장 독일의 주장에서도 최소한의 요구라고 써놓지 않았는가?

한마디로 말해서 폴란드가 양보를 하건 안하건 간에 약간의 시간 차이를 빼면 폴란드의 운명에 변함이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것을 가지고 폴란드가 산통을 깨뜨려서 독일의 침공을 불러왔다던지 하는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나치 독일의 일방적인 생각일 뿐이다. 애초에 폴란드 영토인 곳을 독일 영토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인데, 당시의 독일은 그런 것 따위는 인식하지 못했다. [5]

2.3. 독일의 경제 위기

히틀러와 나치당은 훗날 케인즈식의 경제정책으로 1930년대의 대공황의 위기를 돌파하였다. 아이러니하게 이 대공황은 독일 국민들이 기존 정치계에 대해 실망하는 계기가 되어 히틀러가 집권할 수 있었던 가장 큰 기회였다. 히틀러는 독일의 대공황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전쟁준비에 매달렸다. 군수산업을 팽창시키고, 효율적인 군수업무를 위한 사회 인프라에 건설에 매달리다 보니 1930년대 후반에는 독일의 대공황은 거의 극복된 것처럼 보였다. 이는 미국이 뉴딜정책으로 민간 인프라 건설에 몰빵하여 대공황을 극복하려고 한 것과는 방향은 다르지만 어쨌든 결과는 비슷했다.

그러나 민간 인프라와는 달리 생산성이 거의 없던 군수방면에만 몰빵한 결과 독일정부는 재정위기를 겪게 되었다. 그동안 계속 지출을 늘리면서 적자 예산을 편성한 결과 1930년대 후반부터는 누적된 재정적자로 파산의 그림자가 닥쳐왔다. 히틀러로서는 권력을 놓지 않으려면 전쟁 밖에 선택할 길이 없었다. 다른 나라를 침략해서 한몫 단단히 챙겨오지 않는 한은 정부재정은 붕괴하고 자신도 권좌에서 내려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의도에 맞게 나치독일군은 다른 나라를 점령하면 우선 그 나라의 중앙은행을 털어서 금괴를 독일로 운송하는 짓을 제일 먼저 하곤 했다.[6] 이렇게 다른 나라로부터 강탈한 금괴가 수백톤이고, 이것은 전후 '히틀러가 숨겨놓은 비밀 금괴'의 떡밥이 되었다. 참고로 그리스는 경제위기가 벌어진 2015년, 이렇게 강탈당한 금괴를 포함한 액수를 독일에 손해배상 청구를 했는데, 독일은 이미 끝났다며 깔끔히 씹고 있다. 물론 가만히 있다가 들춰낸 그리스가 잘한건 아니지만, 어쨌든간에 독일은 이렇게 2차대전중 점령한 각국으로부터 강탈한 금괴를 모두 제대로 돌려준 것도 아니며, 상당 액수는 은닉되었다가 독일의 전후 경제 부흥 자금으로 쓰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히틀러의 입장에서 전쟁은 불가피했다. 이것이 영국-프랑스의 개입 우려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침공을 개시하게 된 한 이유였다.

2.4. 소련-폴란드 국경 분쟁

한편 폴란드는 동쪽의 소련과도 국경분쟁이 있었는데, 원래 러시아 제국의 일부였던 폴란드가 독립할 때 쯤 소련은 공산혁명에 뒤이은 적백내전 때문에 완전히 피폐해져 있었다. 한편 우크라이나에서도 공산주의자들과 반혁명세력(백군)과의 내전이 벌어졌는데, 친폴란드 백군은 전황이 불리하자 폴란드에 원조요청을 했고, 폴란드는 이를 기회로 우크라이나에 출병했다. 이에 반발한 공산주의자들은 볼셰비키 러시아(아직 소련 연방 성립 전이었다)에 구원요청을 하여 우크라이나 내전은 소련-폴란드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투하체프스키가 지휘하는 소련군은 우크라이나에 침공해온 폴란드군을 격퇴했으나, 패주하는 폴란드군을 추격하던 소련군이 폴란드의 수도인 바르샤바 근처에서 대패하며 전세는 역전되었다. 소련군은 패퇴했고, 반혁명세력의 창궐로 다른 곳이 다급해진 러시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공화국은 우크라이나의 반을 폴란드 공화국에 떼어주고 정전협정을 맺었다.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가 폴란드에 합병되자 정교회 성당이 파괴당했고 우크라이나어 교육이 금지되었다. 나머지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이 출범하자 거기에 가입해 소련의 일부분이 된다. 소련의 일부가 된 우크라이나는 미증유의 기아사태인 홀로도모르를 겪게 된다.

이렇게 폴란드는 동서로 소련-독일이라는 양대 강대국과 모두 국경분쟁을 일으키고 있었고, 독일과 소련 모두 폴란드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2.5. 독소 불가침조약

한편 나치 집권 후에 독일이 노골적으로 반소련 정책을 취하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서방(영국-프랑스)과의 집단안보체제를 구상하였다. 그래서 외무장관 막심 리트비노프는 서방국가들을 방문하여 협상을 벌였으나, 소련의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양국으로부터 문전박대를 받았다. 특히 폴란드는 독일이 침공하더라도 소련군이 폴란드 국내에 들어와 독일군과 싸우는 것을 극렬반대했기 때문에 소련과 서방과의 협상은 결렬된다.

한편 히틀러는 자신의 침략전쟁에 소련이 처음부터 개입하면 이후 계획에 중대한 차질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 다음부터는 소련과 일시적인 화해를 모색하였다. 스탈린도 유대인인 리트비노프를 해임하고[7] 자신의 심복이었던 로토프를 외무장관에 임명하여 독일에 화해 제스처를 보냈고, 결국 양 독재자는 의기투합하여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였다.

한편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있던 프랑스 외에도, 영국이 전격적으로 폴란드와 상호안전보장조약을 체결하면서 위기가 고조되었다. 독일과 폴란드는 서로를 비난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을 막기 위해 독일에 여러 경로로 압력을 넣었다. 독일은 4월 28일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과 영국-독일 해군조약을 파기하며 맞대응했다. 그러던 8월 23일, 독소 불가침조약이 체결되면서 모든 것이 엉클어졌다.

히틀러는 소련의 동의를 얻어낸 이상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 영불 양국은 1938년에도 뮌헨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버린 적이 있었다. 히틀러는 군부에 폴란드 침공을 명령했고, 곧 백색작전(Fall Weiß)이라는 계획안이 세워졌다.

2.6. 자작극과 개전

8월 31일 밤, 폴란드 국경에 위치한 독일 도시 글라이비츠의 한 방송국에 폴란드군 소규모 병력이 기습침투를 한 다음, 방송국을 점거하고 독일에 대한 전쟁선언문을 낭독했다. 물론 독일의 자작극이었다. 폴란드군으로 위장한 독일 요원들이 쌩쑈를 한 다음, 폴란드 군복을 입힌 채 사살한 죄수들 시신을 버려두고 떠난 것.

그리고 9월 1일 새벽, 독일은 폴란드의 선제 공격에 대한 반격이라는 구실로 전면적인 침공을 개시했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3. 전쟁 계획

3.1. 독일군

독일군은 전통적인 포위섬멸전 교리에 따라 전 전선에서 공세를 가해, 폴란드군의 퇴로를 끊은 다음 포위하여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중부전선에서의 공세는 자제하고, 대신 북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 여기에 당시 독일의 괴뢰국이던 슬로바키아군도 남부집단군과 함께 공격에 가담하여 대규모 공세를 실시, 양군이 비스와 강 유역에서 합류하여 국경에 집중배치된 폴란드군이 미처 퇴각하기 전에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하기로 하였다.

주공은 남부집단군으로, 8군과 10군이 폴란드 영토 중앙을 가로질러 진격하는 결정적인 공세를 가하고, 14군은 슬로바키아, 헝가리 국경을 따라 폴란드 영토 남쪽으로 진격하기로 되어있었다. 특히 10군에는 독일군 기갑세력이 집중되어 있었다.

한편 북부집단군 중 4군은 단치히 회랑을 관통, 동프로이센과의 육상교통로를 개척하며, 동프로이센에 있던 3군은 그대로 남하하여 포위망의 북쪽을 강화하기로 했다.

이들은 비스와 강에서 합류, 폴란드군 주력을 포위섬멸하고 이후 주력이 사라지고 예비군 동원이 채 끝나지 않은 폴란드를 짓밟으며 수도 바르샤바로 곧장 진격할 계획이었다.

3.2. 폴란드군

폴란드군의 계획은 철저한 방어전이었으며 반격은 빨라도 개전 2달 후, 예비군 동원이 완료되고 서부전선의 영국·프랑스가 공세전에 나서는 시점에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즉, 폴란드가 목표로 했던 것은 절대적인 시간 벌기, 즉 지연전이었다. 또한 폴란드는 독일의 공세에 맞서기 위해 폴란드 중앙에 대규모 산업시설을 건설하여 침략군에 맞설 현대적 무기를 생산할 본격적인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폴란드는 방어계획에서 최대의 실수를 저지르고 마는데, 바로 전 영토 절대사수 개념이었다. 폴란드의 방어계획 핵심은 국경에서의 방어전이었으며, 국경에서 밀리기 시작하면 차근차근 후퇴하여 최종적으로 비스와 강에서 마지막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폴란드군의 주력부대는 모조리 독일과의 국경지대에 배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독일과 마주한 국경선 지역이 근본적으로 너무 길었으며[8], 국경선과 그 부근에는 방어선으로 쓸만한 지역이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예비군 동원까지 완료해도 과연 국경선 전체를 지킬 수 있는지도 의문이 가는 실정에서 상비군만으로 국경선을 지키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무리수라는 결론이 나온지 오래였다.[9]

이런 이유로 인해 서방 연합군 및 폴란드군 소수파는 국경 방어를 포기하고 비스와 강 동쪽에 주력을 집중시켜, 방어하기 용이한 비스와 강을 천연의 방어선 삼아 항전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전략전술적으론 현명해도 폴란드가 절대 선택할 수 없는 전략이었다. 만약 이 전략을 채택한다면, 폴란드는 자국 최대의 산업 및 광산지대, 그리고 핵심 인구밀집지역을 포기해야 하며, 그 면적도 국토의 절반이 넘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건 소련이 동부 국경선을 공격하지 않았을 때나 유효했으며, 덤으로 비스와 강은 철벽 방어선으로 부를 정도로 강력한 방어선도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비스와 강이나 그 외의 다른 폴란드 내륙지방에 위기상황을 감안해서 방어선 구축이나 요새 건설을 한 것이 거의 없으므로 후퇴해서 방어선을 지킨다고 해도 얼마나 버틸지 의문이었다. 또한 비스와 강을 방어선 삼아도 문제가 되는 것이, 비스와 강 너머에 있는 동프로이센 주둔 독일군이 방어선의 후방으로 공격해올 수 있기 때문이다. 폴란드 자체가 국가방어에 매우 불리한 것이, 폴란드 공업 중심지와 인구밀집지역, 광산지역이 서부 지역에 있었고, 폴란드-독일 국경 자체가 바로 이 지역을 둘러싸는 형태로 있었다. 정말 이 정도로 방어적 측면에서 안습인 나라도 찾기 힘들지...

더군다나 폴란드는 독일군의 주공이 단치히 회랑 쪽으로 집중될 것으로 오판하고 단치히 및 동프로이센 주변에 주력의 1/3을 집중 배치했다. 사실 이는 매우 상식적인 판단으로, 단치히 문제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인 만큼, 독일이 단치히와 폴란드 회랑을 강점하고 폴란드의 반격 역량을 소멸시키는 선에서 전쟁이 끝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독일은 폴란드 전토의 점령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사실 히틀러에 대한 평전을 쓴 이언 커쇼에 따르면 히틀러는 전면적 승리가 확실시된 그 순간까지도 폴란드 처리를 두고 고민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단치히 회랑과 과거 독일 제국이 지배하던 폴란드 영토만 차지하고 나머지를 괴뢰 독립국가로 두는 방안을 고려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경우라도 일단 독일군이 폴란드 전역을 점령하는 것 자체는 변함이 없다. 다만 전쟁 후에 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당장 병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폴란드 정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예정보다 빨리 예비군을 총동원하려고 했지만, 그런 조치는 독일의 침공을 빨리 불러올 수 있다고 서방 연합국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개전할 때까지 총동원령이나 예비군 소집을 하지 못했다. 서방 연합국들이 도와주진 못할 망정 쪽박을 깨는 것은 체코에 이어서 두번째다

4. 진행

4.1. 독일군의 공세

9월 1일 새벽 4시, 친선우호를 목적으로 그단스크에 기항한 독일 해군의 전(前)드레드노트급 전함 슐레스비히-홀슈타인[10]이 그단스크에 있는 폴란드 요새를 11인치 주포로 기습 포격하는 것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11] 독일군은 계획대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휘하 남부전선군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파상공세를 퍼부었으며, 남부의 허술한 폴란드군 방어선은 얼마 안 가 무너졌다. 비스와 강과 폴란드 중심부로 가는 길이 활짝 열린 것이다.

페도르 폰 보크 휘하 북부집단군도 폴란드군의 방어선을 밀어내며 성공적으로 진격, 폴란드군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9월 3일에는 폴란드 해안지방이 동프로이센과 독일 본토의 독일군에 의해 폴란드 본토로부터 차단되었으며 이 날 귄터 폰 클루게의 군대는 비스와 강에, 게오르그 본 퀴흘러의 군대는 나레프 강에 도달했다.

이날 남부 전선의 발터 폰 라이헤나우의 기갑부대도 바르타 강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2일 뒤인 9월 5일에 그의 좌익은 폴란드의 공업도시 우치(Łódź)에, 우익은 키엘체(Kielce)에 도달했다. 8일까지 라이헤나우 휘하 기갑군단은 바르샤바 외곽으로 진주했으며, 9일까지 라이헤나우 휘하 우익의 경사단들은 바르샤바와 산도미에쉬(Sandomierz) 사이의 마을을 점령했다. 그 동안 빌헬름 리스트는 프제미실 근교의 산 강 주변까지 진격했다. 같은 시기 북부 전선의 하인츠 구데리안의 제 3군은 나레프 강을 도하하여[12] 부크 강에 형성된 폴란드군의 방어선을 공격하였다.

폴란드군의 분전으로 몇몇 전선에서 전진이 늦춰지기는 했으나 독일군은 예정된 계획대로 진격했으며, 바르샤바는 독일군에 둘러싸이는 형세가 되었다. 사실상 1주일만에 폴란드군의 국경 방어계획은 대실패로 끝나, 폴란드 회랑(Korytarz Polski)과 대폴란드(Wielkopolska), 상부 실롱스크(Górny Śląsk)를 상실하기에 이른다. 폴란드군은 바르샤바와 르부프 방면으로 퇴각하면서 독일군과 전투를 치루었다. 여기에 폴란드군은 나치 독일의 훈련을 받고 후방에서 반란을 일으킨 독일계 반란군과 남쪽 국경선에서 치고 올라오는 친독 슬로바키아군마저 상대해야 했다.[13]

거기다 전 전선에서 루프트바페의 맹공습이 개시되었다. 이 공격으로 인해 폴란드의 지상군은 전투수행에 막대한 지장을 받았는데, 돌파한 독일군을 영격하는 것 자체가 지장을 받은 데다가, 통신연락이 끊어지고 후방에 있는 보급·통신·지휘체계가 집중공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피난민까지 도로에 몰리는 등의 사태가 겹쳐 사실상 이 때부터 폴란드군은 각자 알아서 전투하는 상황에 몰리게 되었으며, 통합지휘 따위는 물 건너가게 된다. 물론 이 정도로 폴란드군의 전투의지가 상실된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원래 실력을 다 발휘할 수 없는 불리한 처지에 놓인 것은 사실이었다. 9월 8일에는 독일군이 바르샤바 외곽에 진주하여 바르샤바의 폴란드 방어군과 교전을 벌였으며, 13일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포위전이 시작되었다. 이 전투는 거의 3주가 지난 28일에 이르러 끝난다. 이보다 약간 앞선 12일에는 폴란드 동부의 르부프도 페르디난트 쇠르너 휘하 독일군의 공격을 받았으며, 이 도시는 소련군이 진주한 22일에 필리프 골리코프 휘하 소련군에 항복했다.

그러나 폴란드 공군이 손가락만 빨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흔히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기량적으로도 우수해진 파일럿과 Bf109 등 신형 전투기로 무장한 독일 공군에게 수적으로 불리한 폴란드 공군이 완전히 밀렸으리라고 생각하나 그것은 사실과 한참 동떨어져있다. 폴란드 공군은 독일 공군의 신형 전투기인 Bf109에 비해 한참 뒤쳐지는 전투기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숫적으로도 한참 불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공군의 전투기 285기를 손실시키고 279기를 반파시키는 등 대단히 분전했다. 란체스터 법칙이 잘 적용되는 공중전에서 질적, 수적으로 우세한 적에게 일방적으로 학살당하지 않고 분전했다는 것은 충분히 칭찬받을 만 하다. 그러나 폴란드 공군 전투기 조종사들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공군은 독일군의 질적, 수적 우세에 밀려 제공권을 상실하고 만다. 14일에는 개전 당일에 400기에 이르렀던 폴란드군의 항공기가 54기까지 줄어들었고[14], 이 시점에 이르러 폴란드 공군은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그러나 살아남은 전투기 조종사들은 영국으로 망명하여 훗날 영국에서 벌어진 영국 본토 항공전에 도움을 주게 된다.

결국 9월 9일, 독일군이 의도한 대로 미처 후퇴하지 못한 폴란드군 주력 22만 5천여 명, 보병 8개 사단 및 기병 4개 여단이 포위망에 갇히고 말았다. 브주라 전투라 불리는 일주일간의 전투에서 폴란드군은 포위망을 뚫고 바르샤바 방면으로 후퇴하기 위해 총력을 다했으나 이 포위망에 투입된 독일군은 질적 차이를 빼더라도 숫적으로 42만 5천여 명으로 이미 2배에 달하는 상태였다.

사실 이 폴란드 군대는 이미 바르샤바 외곽에 다다른 독일군의 옆구리를 쳐서 패배, 후퇴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 폴란드군 반격의 주력으로, 초반에는 이 반격이 꽤 유효해서 독일군이 3천여 명의 포로를 내며 패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독일군이 바르샤바에 투입된 기갑병력을 브주라 방면으로 돌리고 루프트바페까지 맹폭을 개시하면서 폴란드군이 역으로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9월 16일, 브주라 전투의 막바지에 이르자 독일군 제1기갑사단이 폴란드군 전선을 정면으로 가로지르는 돌파를 선보이며 폴란드군의 전선을 무너뜨렸고, 폴란드군은 중장비를 모두 버리고 비스와 강을 맨몸으로 헤엄치며 건너는 절망적인 퇴각을 해야 했다. 결국 9월 22일이 되면서 포위망 탈출에 실패한 폴란드군이 모조리 항복, 폴란드군은 더 이상의 반격 여력을 상실했다. 이 전투에서만 폴란드군 1만 8천여 명이 전사, 17만여 명이 포로로 사로잡혔으며, 독일군도 8천여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4.2. 소련의 침공

그리고 브주라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던 9월 17일, 폴란드는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61만여 명에 이르는 소련군이 전 국경에서 전격적으로 쳐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15][16] 스탈린은 독일이 바르샤바를 점령하기 전까지 개입할 마음이 없었지만 바르샤바는 28일까지 저항했고(...) 몸이 달아오른 스탈린은 17일 공격을 개시했다. 이미 거의 모든 주력이 독일군을 막기 위해 달려나가 있던 상황이라 동부 국경은 말 그대로 텅텅 빈 상황이었다. 2만여 명의 폴란드 국경수비대가 소련군을 막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나마 소련쪽 국경선을 수비하던 소규모 경비부대와 긴급 소집된 예비군 부대들이 결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소련군은 이들을 손쉽게 박살내며 서쪽으로 나아갔다.폴란드 사령부는 동부 국경의 폴란드군에게 전투 행위를 포기하고 남동부로의 폴란드군 퇴각대열에 합류할 것을 지시했으나 그 와중에 몇몇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이미 대숙청으로 인해 상당한 피해를 입었던 소련군은 훨씬 빈약한 폴란드군을 상대로 졸전을 벌여 패배하는 일도 잦았으며, 실제 전투로 인한 차량 손실은 적었지만 기계적 결함으로 인해 수백여 대의 기갑차량이 퍼져버렸다.

사실상 이 시점에서 폴란드의 패망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원래 9월 17일 소련 침공 당시 폴란드군 전력의 80%(95만 명 중 75만 명)가 아직 남아있었기에 소련이 동부 지역에서부터 침공해 오지 않았다면 어쨌을 지는 모를 일이다. 폴란드 침공 막바지에 독일군 육군이나 공군의 탄약, 포탄 수급 상황은 거의 시망 상태라 재고량 자체가 각각 2주 정도 밖에 안 남은 상황이었다. 즉, 독일군을 격파한다는 폴란드군의 목표는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원체 빈약한 독일군의 보급선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고, 군수물자의 재고도 얼마 없었으며, 무엇보다도 영국과 프랑스의 군수물자 지원이 루마니아를 경유해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기에 만일 소련군이 폴란드 동부를 침공해오지 않았다면 폴란드군이 남동부의 방어선으로 후퇴하고 독일군은 루마니아의 콘스탄차(Constanta) 항과 갈라치(Galati) 항을 경유한 영국과 프랑스가 날라다준 르노 R-35/40과 항공기, 탄약, TNT로 무장한 폴란드군과 대치하면서 정말로 위에서 언급한 2달째를 맞게 될 터였다.

게다가 폴란드 사령부는 어차피 바르샤바는 포기하기로 결정하여, 당시 바르샤바에 남겨진 폴란드군의 임무는 도시를 사수하면서 최대한 독일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것이었으며, 이들이 이렇게 저항을 지속하는 동안 주력부대는 남동쪽으로 퇴각한 다음 서방 연합군의 지원을 받으면서 저항을 지속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물론 이 시점에 이르면 폴란드 공군이 괴멸 지경에 이르렀고 또한 상당수의 병력이 독일군에 포위당한 채로 퇴각하고 있었기에 폴란드 사령부의 생각대로 100% 진행될지는 의문이었지만 적어도 저항이 상당기간 지속되리라는 것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상당수의 병력이 루마니아 국경지대의 '루마니아 교두보'로 후퇴하기도 했다. 하지만 9월 17일 이후 소련이 공격해 오면서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폴란드 사령부는 루마니아 교두보를 형성하여 방어한다는 기존의 계획을 취소, 프랑스로 퇴각하여 후일을 도모한다는 계획을 짰으며, 12만여명에 달하는 폴란드군이 루마니아와 헝가리 국경지대로 진군하여 탈출했다. 루마니아 국경지대로 탈출할 수 없었던 북부의 폴란드군 가운데 2만여명은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로 탈출하였다.

한편 독일군이 폴란드 군의 끈질긴 항전을 받으며 전선을 돌파하던 9월 7일, 프랑스 군은 11개 사단을 동원, 독일군의 자르 지방에 대한 공세를 감행하지만 애초에 독일한테 별다른 피해도 주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프랑스는 그냥 폴란드와의 조약을 준수하는 모양새를 보이기 위해 진군한 것이었지 결정적인 타격을 입힐 생각은 없었기에 프랑스 군은 굉장히 성의없이 공세에 임했다. 결정적으로 17일 소련이 폴란드 동부를 침공하자 프랑스군 총사령관 모리스 가믈랭은 폴란드는 이제 끝났다고 주장하면서 군사 행동 중지를 명령했고, 9월 20일에는 아예 한술 더 떠서 자르 일대에 주둔하던 프랑스 군에게 퇴각 명령을 내려버렸다.[17][18]

4.3. 종지부

소련의 침공으로 폴란드는 국토 동남부 지역으로 피난, 장기 항전을 하겠다는 최악의 시나리오 계획마저 발동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수도 바르샤바는 발레리안 추마(Walerian Czuma) 중장과 바르샤바 시장 스테판 스타쉰스키(Stefan Starzynski)의 지도 하에 겁없이 수도 내로 침입한 독일 제 4기갑사단을 통구이로 만들어 내쫓고[19] 독일군 장성 베르너 폰 프리치(Werner von Fritsch)를 전사시키는 등 훌륭히 저항했으나 루프트바페의 무차별 폭격을 받은 뒤 독일군의 공격을 받아 9월 28일 함락되었고, 다음날에는 바르샤바 북부의 모들린 요새도 항복했다. 이 때까지 바르샤바 방어군 6천여 명이 전사하고 10만여 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시민 사망자도 2만 5천여 명에 달했다. 이때즈음 독일군과 소련군이 전 전선에서 만나 승리를 자축했으며, 폴란드군은 와해되어 항복하거나 무기를 버리고 집으로 도망가거나, 혹은 극소수 항전의지를 가진 자들만이 남아 싸우거나 루마니아로 망명하는 중이었다.[20] 결국 폴란드군 16만 명이 외국으로 탈출해서 이들 중 12만 명은 루마니아에 들어왔고, 최종적으로 이들 중 8만 3천여 명이 프랑스로 탈출하였다.

결국 1939년 10월 6일, 코츠크(Kock)에서 싸우던 마지막 폴란드군이 항복하면서 폴란드 전역은 종결되었다.

5. 병력 및 피해

  • 폴란드
병력: 95만~100만여 명[21]
피해: 6만 3천여 명 전사, 13만 3천여 명 부상, 66만여 명 포로[22][23]

vs

  • 독일
병력: 150만~160만여 명[24]
피해: 16,343명 전사, 3천 5백여 명 실종, 3만 3백여 명 부상[25][26]

  • 소련
병력: 61만여 명[27]
피해: 1,475명 전사, 2,383명 부상[28]

6. 종결 이후

(ɔ) unknown war correspondent of TASS from

님들 2년 후 캐삭빵 콜? 그렇게 제3제국은 삭제되었다.

적과의 동침- 서쪽과 동쪽으로부터 각각 폴란드를 침공해온 독일군과 소련군은 폴란드 영내에서 이렇게 조우했다. 그러나 이들은 2년 후…

독일과 소련은 독소 불가침조약에서 합의한 대로 폴란드를 반으로 쪼개 나눠가졌다.[29][30] 폴란드 정부 및 소수 군 장병들은 영국에서 망명정부 및 망명군을 조직하여 항전을 선언했다. 훗날 영국 본토 항공전 때 폴란드 망명 조종사들이 영국 공군에 가세하여 파일럿 부족에 시달리던 영국군에 도움을 주었고[31], 전쟁 전체를 통틀어 지상요원까지 합한 인원 2만명 가까이가 영국 공군에 입대해서 싸웠다. 육상 전투에 있어서도 북아프리카의 토브루크 공방전과 이탈리아의 몬테카시노 전투 전투,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연합군의 팔레즈 포위망에서 독일군의 퇴로를 막는 임무[32]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전체적으로 서방 측에서 싸운 폴란드군은 25만 명에 달해서 적지않은 기여를 했고, 이들 중에는 마켓 가든 작전에 참전한 폴란드 공수부대도 있다. 또한 폴란드군은 그동안 수집해왔던 독일군 암호체계 에니그마에 대한 모든 자료와 암호 해독 인력을 영국 정부에 넘겼고 영국은 이를 바탕으로 독일군 암호 해독에 성공, 대서양 전투에서 유보트를 막을 수 있게 된다.[33] 이외에도 프랑스 침공으로 독일에 함락당한 프랑스 내에서도 폴란드인들이 프랑스 국내군과의 연계 하에 저항활동을 펼쳤다.

단순히 국외에서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애국적인 폴란드인들이 반독운동에 참여했다. 프랑스와 달리 독일은 괴뢰정부도 세우지 않고 총독부(Generalgouvernment)를 설치하여 폴란드인과 유대인들을 노예화하고 학살했다. 그 절정은 유대인들에게 행해진 홀로코스트로, 아우슈비츠에서만 150만명에 이르는 유대인과 폴란드인, 러시아인, 기타 민족들이 목숨을 잃었다. 또한 노예화 교육과 공공연히 행해진 공개처형과 가축몰이(lapanka)[34]는 폴란드인들로 하여금 분기탱천하게 만들었다.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에 충성하는 폴란드 지하정부(Polskie Państwo Podziemne)가 폴란드 국내에 결성되어 조직화 및 정보 수집[35], 대외 선전[36], 군사활동[37]에 주력했다. 전쟁기간 동안 폴란드의 국내군(Armia Krajowa)의 수효는 40만 명에 이르렀으며[38] 이외에도 공산주의 성향의 인민군(Armia Ludowa), 극우 민족주의 성향의 민족방위군(Narodowe Sily Zbrojne), 중도 및 농업주의 성향의 농민 대대(Bataliony Chlopskie)까지 모든 노선의 폴란드인들이 가세하여 반독투쟁을 벌였다.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반독운동은 더더욱 활발해졌고[39] 조직도 더욱 확대되었다. 유대인들의 구출에도 협력하여 바르샤바 게토 봉기바르샤바 봉기에서 유대인들의 저항활동을 돕고 구출하는 동시에 아우슈비츠에도 비톨트 필레츠키(Witold Pilecki)를 파견하여 내부 정보를 수집하여 연합국에 전달했다. 전쟁기간 동안 폴란드 저항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추축국군의 숫자는 15만여 명에 이른다. 레지스탕스 활동에 과장이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전투 과정에서 발생한 부상자와 행방불명자, 포로까지 합치면 1개 군 이상이 폴란드 내에서 녹아내렸다는 말이 된다. 소련군에 의해 최전선의 독일군의 뼈와 살이 발리던 1943년 4월에도 독일군은 45만여 명의 독일군을 치안유지를 위해 폴란드 지역에 주둔시켜야 했다.[40]

소련군은 포로로 잡은 폴란드군 사병들은 모두 조기 석방했고, 장교들은 자국내의 수용소로 데려갔다.[41] 이후 여러번의 심문을 통해 비협조적으로 판명된 장교들은 모두 1년 후 처형해서 암매장했고, 이 수는 2만 2천여 명에 달한다.[42] 그 이유에 대해서는 폴란드가 다시는 소련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아예 지배층을 모조리 섬멸하려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나 모두 처형당한 것은 아니며 소련측에 협조적이었던 인사들은 살아남았다. 이들은 독소전쟁 발발 이후 소련이 조직한 친소 폴란드군(런던에 있던 망명정부와는 대립하는 세력)에 들어가 나치와 다시 싸웠고, 훗날 소련의 위성국이 된 폴란드군의 수뇌부가 된다. 소련군과 함께 싸운 폴란드인들은 서방측과 싸운 폴란드인들과 수가 비슷해서 거의 20만 명에 달하며, 레니노 전투, 콜베르그 전투, 베를린 전투와 바우첸 전투에서 열심히 싸웠다.[43][44]

침공 과정에서 나치당이 절대의석을 차지하고 있던 단치히 자유시는 독일로의 합병을 선언했고, 이후 폴란드 서부영토 일부와 단치히 회랑이 독일 본토에 편입되었으며 나머지는 총독부가 설치되어 독일의 지배를 받았다. 당연하지만 나중에 패배한 후 독일은 폴란드로부터 뜯어낸 영토를 모두 토해낸 건 물론이고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그나마 남아있던 동부 영토까지 거의 대부분 폴란드한테 빼앗겨[45] 훌륭한 인과응보의 예를 보여주었다(...).[46]

한편 9월 3일, 독일에 전쟁을 선포한 영국과 프랑스는 전혀 공세를 취하지 않았다.[47] 단지 일부 프랑스군이 독일 국경을 넘어서 밀고 들어갔다가 그냥 되돌아왔다. 이는 폴란드가 너무 빨리 무너지자 동원령에 따라 병력이 충분히 소집된 후 공세를 가하려던 작계 자체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 만약 이때 영국과 프랑스가 현역 부대만으로 공세를 가했다면, 독일은 항복했을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독일이 전 유럽을 지배하게 되는 1940년의 상황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1940년 5월 독일군의 본격적인 프랑스 침공까지 영불 연합군과 독일군은 선전포고 상태이면서도 서로 마주보면서 편안히 쉬었다. 이런 상황을 일명 가짜 전쟁(혹은 앉은뱅이 전쟁)이라고 부른다.

마지막으로 독일의 경우, 폴란드 침공을 통해 병력 및 장비의 손실이 의외로 컸으며, 비실전적인 전술과 전략을 교정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사실 전략적인 면에서는 폴란드군이 완패했지만, 전술적인 면에서는 TKS7TP같은 탱켓이나 경전차가 주력인 빈약한 기갑전력을 가진 폴란드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은 전투도 많았으며, 보병간의 전투에서는 그야말로 백중지세. 공중전의 경우도 제공권을 잡긴 했으나 폴란드 공군의 무력화에는 실패하여 독일군의 폭격기가 다수 격추되는 등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 전략적인 면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세히 살펴보면 독일의 입장에서는 상처뿐인 승리였던 전투가 상당히 많았다. 덕분에 폴란드 침공에서 잃어버린 장비의 보충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서부전선에 참여한 독일군 부대도 꽤 있었다.

반면 제대로 된 전투 없이 폴란드의 동부를 집어삼킨 소련군은 전혀 교훈을 얻지 못했으며, 그 결과는 독소전쟁 발발 시점에서 소련군의 패퇴로 이어진다.

7. 2차 대전 이후

폴란드를 나누어 가진 소련과 독일의 운명은 이후 제2차 대전의 승전국과 패전국으로 확실히 갈렸다. 소련이 가져간 폴란드 영토는 그대로 소련 영토로 확정된 반면, 해당 영토를 잃어버린 폴란드를 달래기 위해서 소련이 엄청난 압력을 행사한 결과 독일은 점령한 폴란드 영토를 모두 내뱉은데다가 덤으로 프로이센령의 상당 부분을 폴란드에 내주었다. 동프로이센 동부 지역은 소비에트 연방의 일부였던 리투아니아에, 쾨니히스베르크는 러시아로 넘어간다. 그리고 원래 오데르 강과 나이세 강 지류의 동부에 속한 독일 영토를 분리해 폴란드에 내주는 오데르-나이세 라인으로 폴란드-동독 국경이 확정되었다. 이때문에 원래 폴란드의 중앙에 위치했던 수도인 바르샤바는 현재의 폴란드 영토에서는 상당히 동측으로 이동한 것처럼 보인다. 연합국은 원래 1933년 이전 국경대로 원상복귀를 원했지만 스탈린이 폴란드 동부를 합병했기 때문에 이 원칙은 물건너가고, 오데르 강 동쪽만 폴란드에 넘기려고 하자 폴란드에 보상이 적다는 요구에 오데르-나이세 라인(현재 국경)으로 확정된다. 오데르-나이세 라인이 절대적인 것도 아니라서 해당 축선의 서쪽 도시인 슈테틴도 폴란드로 넘겼다.

독일 통일 이전에 동독과 폴란드 사이에 합의된 이 국경에 대해 동독은 당연히 인정했지만 서독에선 통일 전까지 인정하지 않았고 서방 연합국의 초기 의견대로 1933년 국경을 주장했다. 하지만 독일은 통일 조건으로 현재 독일-폴란드 국경 동쪽 영토 요구권을 영구히 포기하는 것을 명문화했다.[48] 히틀러 때문에 전쟁 전의 1/3정도 되는 많은 영토를 잃어버렸으니 히틀러가 죽일 놈이다 허나 폴란드에 귀속된 영토 중 슐레지엔 지역은 공업화된 지역이지만 포젠, 동프로이센, 포메라니아는 애초에 농업지역에 인구도 적은 곳이었다. 즉 경제적으론 그다지 가치가 높은 지역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지역에서 추방된 독일인들이 서독으로 유입되어 빠른 경제 복구가 가능했다는 견해도 있다.

8. 뒷이야기

  • 이 전쟁에서, 폴란드 기병대가 독일 전차를 골판지 전차로 오판하고 기창돌격했다는 말이 널리 퍼졌다. 이 이야기를 그대로 쓴 책이 라이프 제2차 세계대전과 이를 참고한 알기 쉬운 세계 제2차대전사다.

    그러나 후대에 알려졌듯, 이 이야기는 과장된 면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추적 과정에서 아예 허구로 취급되는 경우도 많은데 기병 돌격 자체가 없었던 일은 아니다. 일반 보병이나 포병 부대로도 종종 행해져 성공했고, 문제의 대기갑부대 돌격도 퇴로가 끊기는 등 절망적인 경우에 이루어지긴 했다. 사실 이런 상황은 어느 특정 전투라 꼽을 것 없이 전역 곳곳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는 폴란드군에서 기병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당시 폴란드군의 기병은 소총과 기관단총 등으로 무장한, 실질적으로는 오늘날의 기계화보병 내지 헬기 강습 보병의 역할을 맡도록 훈련되어 있었다. 신생국인 만큼 공업 생산성도 뒤떨어지고 기계화 비용을 감당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기갑차량 대신 말을 사용한 것 뿐이었다.[49] 실제로 1920년대 소련과의 전쟁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폴란드 기병이다. 그리고 일부 기병부대들에는 이미 상당수의 오토바이와 수송트럭, 장갑차가 군용장비로 주어지는 등 부분적이나마 기병의 차량화와 기계화가 진행 중인 상태이기도 했다.

  • 히틀러를 포함한 독일 수뇌부는 영국과 프랑스가 참전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못했다. 결국 9월 3일, 양국의 선전포고를 전달받은 히틀러 포함 독일 수뇌부는 망연자실한 채 '20년 만에 다시 패전의 길을 걷는가?'라며 좌절했다. 뮌헨 협정 파기를 묵인했기 때문에 폴란드도 봐줄거라 예상했지만, 영프의 반전 여론은 뮌헨 협정 파기 후 사라졌고 폴란드 침공 때 참전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었다. 따라서 히틀러의 오판. 이 부분은 프랑스 침공 항목 참고.[50][51]

  • 폴란드가 프랑스보다 1주일이나 더 버텼으니 '폴란드는 강력했다!'는 폴란드 옹호론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폴란드가 프랑스보다 정말 강하다는 것은 아니고 말 그대로 마지막 1인까지 절망적인 저항을 한 점을 높이 산 것이다. 프랑스는 폴란드보다 훨씬 강력하고 중무장한 국가였다. 차라리 폴란드가 더 잘싸웠다고 말한다면 모를까[52], 프랑스보다 폴란드가 더 강력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프랑스는 프랑스 침공 당시 낫질 작전에 당했으면서도 아직 100만 이상의 병력이 멀쩡히 남은 상태에서 핵심 주력부대의 소멸과 수도방어 불가 등이 겹치면서 조기에 항복한 경우이니 감투정신을 비교할 수는 있으나 직접적으로 강약을 비교할 수는 없다. 만약 프랑스가 폴란드처럼 철저항전으로 나섰으면 전쟁은 몇 달을 끌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실제 군부내 소장파들은 항복불가 철저항전을 주장했으나, 서전의 패배로 인해 지상군 1/3이 그대로 소멸되고 나머지 1/3이 마지노 선에 묶여서, 그 서전으로 사실상 패전이 확정된 것이라 여겨 넋이 나간 우파 정권과 군 상층부는 항복을 결정했다. 이후 영국으로 망명한 항전파 장교들을 드골이 결집해서 자유 프랑스를 만든다.[53]

  • 폴란드의 외교정책은 약소국이 주위 국가의 곤경을 정치, 군사적으로 악용함으로서 생길 수 있는 최악의 결과를 보여준다. 1, 2차 대전 사이, 폴란드가 아직 신생국일 때, 이 나라가 전쟁을 걸지 않은 주변국이 하나도 없을 정도다. 결국 주변국들, 특히 독일과 소련이 힘을 회복하자 헬게이트로... 특히 소련과 관련해서 많이 까이는데, 왜냐하면 당시 소련은 적백내전으로 헬게이트가 열린 상황에서 폴란드가 소련 서부를 침공하여[54] 키예프까지 점령했기 때문. 이후 미하일 투하쳅스키가 이끈 소련군에게 열나게 얻어터지면서 바르샤바까지 밀렸다가 겨우 살아났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험악한 이웃을 만들어낸 것이 폴란드만의 책임은 아니었다. 당장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우는 폴란드가 체코슬로바키아에게 침공을 당한 후 일방적으로 얻어터졌고,출처 우크라이나의 경우도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후 당시 동갈리치아 지방의 폴란드 중심도시 중 하나인 르부프(Lwów, 우크라이나어로는 리비우(Львів; Lviv))를 자신들의 수도로 선언(당시 르부프에는 폴란드인들이 더 많았다)해 버리자 폴란드가 깜짝 놀라서 우크라이나에 덤벼든 것이기 때문. 독일의 경우에는 대폴란드(Wielkopolska)와 상부 실롱스크 지대의 폴란드인들이 독일인들에게서 벗어나 폴란드에 합치려 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폴란드 분할 이전에 이 지역은 명실상부한 '폴란드 영토'였다. 123년만에 국가 재건에 나서는 폴란드 입장에서 과거 영토였던데다가 '바다로 향하는 통로'인 대폴란드 지역을 먹는 것은 당연했던 것. 게다가 실롱스크의 경우는 독일인들이 폴란드인들을 상대로 학살까지 벌인 상황이었다. 여기에 과거 역사까지 감안한다면 일방적으로 폴란드가 깽판을 부려서 주변 국가들과 모두 적대관계에 돌입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나마 지적할게 있다면 소련-폴란드 전쟁 전쟁 기간인 1919-1920년 이웃한 리투아니아를 공격하여 원래 리투아니아 수도인 빌뉴스에 괴뢰국을 설립하고 나중에 자국 영토로 강제 편입시킨 것 정도(단 이 당시 빌뉴스에는 폴란드인 인구가 전체의 무려 65%를 차지하고 있었다. 리투아니아인의 비율은 6%에 불과했고).

    하지만 1938년~1939년에 걸친 폴란드의 외교정책은 변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1938년 뮌헨 협정 때 체코 분할에 가담하여 자기들과 함께 독일에 맞서 싸울 강소국 체코슬로바키아를 무너트린 일이나, 1939년 독일의 위협에 맞서 영국, 프랑스와 소련이 군사동맹을 모색할 때 차라리 나라가 망하고 말지라면서 끝내 소련군의 지원을 거부한 케이스가 대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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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체코-폴란드 국경의 톄신 지방(폴란드명 '치에쉰(Cieszyn)', 또는 '자올졔(Zaolzie)'참고), 그 외 폴란드-슬로바키아 국경지대의 소규모 영토
  • [2] 면적은 작지만 석탄이 매우 풍부하고 보헤미아-슬로바키아-폴란드의 크라쿠프를 연결하는 철도교통의 요지인데다 거주하는 폴란드인들의 숫자도 적지 않아 폴란드에게는 중요한 곳이었다. 물론 그 이유만으로 체코슬로바키아 분할에 가담했다는 사실에 면죄부를 주기는 어렵지만.
  • [3] 독일명 고텐하펜
  • [4] 독일명 포젠
  • [5] 그래도 이해가 잘 안간다면, 일본이 한국에게 부산, 독도를 일본 영토로 넘겨주고, 중국까지의 철도 통행을 일본 맘대로 할 수 있도록 조치하라고 협상안을 보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일본의 입장에서야 협상안이지만, 한국의 입장에서는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일인 것이다.
  • [6] 체코를 병합한 후 가장 먼저 했던 짓거리가 바로 체코 중앙은행의 금괴를 턴 일이다.
  • [7] 유대인인데다가 대숙청으로 긴장된 당시 소련 분위기를 생각하면 당장 시베리아로 끌려가도 이상하지 않았으나, 워낙에 서방과 폭넓은 인맥관계를 자랑하던 리트비노프였으므로 미국 대사로 좌천되는 선에서 끝났다. 사실 미국이 소련을 인정한 것이 불과 몇년전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말 그대로 귀양살이나 다름없었다.
  • [8] 폴란드와 독일의 국경선은 2,000km에 달했고, 여기에 뮌헨 협정으로 인해 연장된 슬로바키아와 폴란드 국경선 800km까지 더하면... 뿐만 아니라 이 국경선은 거의 대부분 드넓은 평야지대로 제대로 된 자연적 방어선도 없었다.
  • [9] 때문에 체코슬로바키아와 프랑스처럼 국경지대에 각종 장비를 설치하고 부대를 배치, 기지 설치 등 요새화 작업에 착수했으나 애초에 길이부터 2,800km에 이르는데다가 자연적 방어선의 이점도 없이 모든걸 새로 건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있던 현대식 무기들마저 외국에 팔아서 돈을 버는 등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있던 폴란드가 이걸 혼자 완수하기는 무리였고, 결국 방어선이 완료되기도 전에 전쟁이 터져버렸다.
  • [10] 당시 독일 해군에는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과 슐레지엔이 있긴 했지만, 시대상 이들이 활동하기엔 너무 구형이었다.
  • [11] 포격을 당한 베스테르플라테의 수비대는 2백여 명에 불과했지만, 이들은 3천여 명의 독일군을 상대로 4백여 명에 이르는 피해를 입히며 9월 7일까지 버틴다. 북부 해안 지역에서 폴란드군의 조직적 저항이 완전히 종결된 것은 헬 반도의 폴란드군이 항복한 10월 2일에 이르러서였다.
  • [12] 이 과정에서 9월 7일부터 10일까지 720명 규모에 대전차소총 2문으로 무장한 폴란드 군에게 350대의 전차와 657문의 대포를 보유하고 항공지원까지 받을 수 있었던 42,200여 명에 이르는 독일군이 3일동안 쩔쩔매는 츠나 전투가 벌어진다.
  • [13] 폴란드 침공 기간 동안 2천여 명의 독일 반란군이 전사했다. 전쟁기간 동안 1만 6천여 명의 독일군이 전사했음을 생각한다면 이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게다가 반란행위 이외에도 독일군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폴란드 민간인을 학살하는데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결국 이로 인해 폴란드인들의 원망을 받은 독일계는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폴란드 전토와 새로 폴란드가 얻은 독일 동부 영토에서 독일 본토로 강제이주당했다.
  • [14] 원래 폴란드 공군의 항공기는 600여 기에 달했지만 이 중 70% 정도만 실제로 독일군과 맞서 싸우는 데에 투입되었다.
  • [15] 벨라루스 전선군: 378,610명, 전차 2,406대 및 대포 3,167문, 우크라이나 전선군: 238,978명, 전차 2,330대 및 대포 1,792문
  • [16] https://ru.wikipedia.org/wiki/Польский_поход_РККА#.D0.A1.D0.A1.D0.A1.D0.A0_2
  • [17] 나중에 가믈랭은 프랑스 침공 당시에도 간첩으로 오인받기 좋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잘못된 명령만 남발하면서 프랑스 군의 패배에 공헌했다(...).
  • [18]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257&contents_id=80631&series_id=3264
  • [19] 공장에서 가져온 테레빈유를 길거리에 쏟아붓고는 전차대가 진입하자 불을 붙여버렸다.
  • [20] 루마니아는 후일 추축국에 가담하지만 이때는 중립국이었다.
  • [21] 이외에도 폴란드로 망명한 체코슬로바키아군이 결성한 군단도 있으나 숫자가 1천여 명에 불과했고 침공 시점까지도 조직이 완료되지 못해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안습.
  • [22] 독일군에 의해 42만여 명, 소련군에 24만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또한 사상자 중 7천여 명의 전사자와 2만여 명의 부상자가 소련과의 전투에서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23] 이외에도 폴란드 민간인 15만~20만 명이 독일군의 폭격과 학살로 사망했다. 그 밖에 독일계 제 5열 및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게릴라, 공산주의 빨치산에게 살해당하거나 동부 폴란드에서 소련군에게 학살당한 민간인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 [24] 이외에도 슬로바키아군 5만여 명을 끌어들였지만 망명 체코슬로바키아군과 마찬가지로 전쟁에는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참고로 슬로바키아군의 피해는 37명 전사, 11명 실종, 114명 부상, 그 밖에 2대의 항공기와 장갑차 몇대를 손실했다.
  • [25] 참고로 폴란드 내에서 제 5열로 활동하다가 사망한 독일계 민간인 2천여 명을 포함하지 않은 수치다. 전쟁기간 동안 3,250명의 독일 민간인이 사망했는데, 이들 거의 대부분은 제 5열로 활동하다가 죽거나 피난 와중에 독일군의 폭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
  • [26] 실종자 수치는 전쟁 이후에도 여전히 행방불명된 독일 병사들의 수치이다. 폴란드 침공 이후 아돌프 히틀러의 연설에 의하면 10,576명 전사, 3천 4백여 명 실종, 3만 222명 부상으로 나오지만, 이 수치는 실제보다 약간 축소된 수치로 볼 수 있다.
  • [27] 적게는 47만여명에서 많게는 80만명까지 추산하기도 한다.
  • [28] 소련측의 공식적인 발표로, 우크라이나 전선군에서 972명 전사 및 실종, 1,741명 부상, 벨라루스 전선군에서 503명 전사 및 실종, 642명 부상의 피해를 냈다. 단 이는 어디까지나 소련 측의 주장으로, 조지 샌포드(George Sanford)에 의하면 3천여 명 전사, 1만여 명 부상이고, 이고르 부니치(Igor Bunich)에 의하면 전사자 및 실종자만 5,327명이다.
  • [29] 이를 일컬어 폴란드에서는 1772년, 1793년, 1795년에 각각 일어난 제 1, 2, 3차 폴란드 분할에 이어 제 4차 폴란드 분할(IV rozbiór Polski)이라 칭하기도 한다.
  • [30] 그 밖에 슬로바키아와의 분쟁지역이던 국경지대 일부는 슬로바키아에, 빌뉴스(폴란드명 '빌노(Wilno)')와 그 주변 일대는 리투아니아 영토로 편입되었다. 단 슬로바키아에 할양된 영토는 종전 후 원상복귀.
  • [31]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숫자에 비해 가장 큰 활약을 한 게 폴란드 파일럿들이었다.
  • [32] http://en.wikipedia.org/wiki/Hill_262.
  • [33] 하지만 망명정부가 이렇게 많은 협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칠은 얄타 회담에서 폴란드 영토를 소련에 넘긴다.
  • [34] 대상이 가축이 아닌 일반 폴란드 시민으로, 거리에서 갑자기 폴란드인들을 한 구석으로 몰아넣고는 이들을 강제이주하여 학살하거나 강제노동의 대상으로 삼았다. 가축몰이는 비유적인 단어인 것.
  • [35] 예를 들어 V-2로켓의 정보를 수집하여 연합국에 전달한 게 이들이다.
  • [36] 신문발행 및 대외연락 및 라디오 방송.
  • [37] 대독봉기 및 독일 주요 요인 암살, 폴란드인 강제이주 및 학살에 대한 저항. 이는 폴란드 지하정부의 군사적 축인 국내군을 통해 이루어졌다.
  • [38] 일반적으로 국내군의 인원 숫자를 40만 명이라 하며, 실제 동조자의 숫자까지 합치면 최고점은 100만여 명이 넘어갔다.
  • [39] 1942년까지만 해도 폴란드 레지스탕스에 의해 1달 평균 250~320여 명의 독일군 손실이 있었으나 1944년 초에 이르러 850~1천 7백여 명으로 증가했다.
  • [40] 이 수치는 독일 지역으로 병합된 폴란드 회랑 및 그 일대와 폴란드 동부 지역을 포함하지 않은 수치다.
  • [41] 이외에도 120만여 명에 이르는 폴란드인들을 소련 내의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송하여 강제노동을 시켰다. 이들 중 살아남은 사람은 절반 정도에 불과했고, 카틴 학살과 달리 이는 서방 국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안습.
  • [42] 단순히 장교뿐만 아니라성직자, 작가, 정치인, 교수, 조종사, 변호사, 의사 등 폴란드 엘리트들도 이 학살의 희생자가 되었다.
  • [43] 단 레니노 전투의 경우는 창설된 지 얼마 안되었을 뿐만 아니라 병력과 보급품도 부족했기에 독일군에게 패배했으며, 전쟁 말기 바우첸 전투의 경우는 폴란드 공산군측의 지휘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 했다.
  • [44] 바우첸 전투의 경우는 연합군과 소련군에게 샌드위치로 쌈싸먹히고 있던 나치 독일이 전쟁 말기에 이르러 거둔 사실상의 유일한 승리이기도 하다. 최초의 군사적 승리의 대상이 된 것도 서러운데 이 정도면 레알 안습...(뭐 그래도 이 승리는 유종의 미를 거둔 건 제외하고 독일에게 아무런 전략적 의미도 없었지만)
  • [45] 쾨니히스베르크와 그 인근 지역은 러시아에게 뜯겼다.
  • [46] 이에 대해서는 2차대전 후 독일과 폴란드의 영토 문제를 참고할 것.
  • [47] 이는 영국과 프랑스가 국내 반전여론과 대공황의 여파로 인한 예산 부족에 발목이 잡혀 전쟁할 준비가 안 됐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 동안 독일이 깽판치는 데도 뮌헨 협정 전까진 묵인하고 있었다. 또 1차대전처럼 방어적으로 나서서 소모전으로 끌 계획이었지, 침공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리고 폴란드가 적어도 3달은 버틸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 [48] 다른 조건으로는 동독 지역에 독일연방군을 제외한 나토군 배치 금지, 핵무기 영구적 포기, 통일독일 상비군 37만 이하 제한 등이 있다.
  • [49] 폴란드군이 기계화에 집중하지 못한 이유는 독립 직후의 정치적, 경제적 혼란과(1795년부터 1918년까지 123년간 분할통치를 당하다가 1차대전 직후 간신히 나라가 다시 수립되었다), 1920년대 국경선 문제로 인한 폴란드와 독일간의 무역전쟁 및 1920년대 후반기에 들이닥친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폴란드의 무역 및 수출이 정체된 것이 컸다. 실제로 전차와 항공기를 만들어서 국외로 수출도 한 것을 보면 확실히 생각은 있었는데 돈이 없어서 못했던 게 맞다.
  • [50] 이전 설명에서 체코슬로바키아보다 폴란드에 대한 침공이 정당성이 더 크다고 했는데,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다. 독일계의 숫자도 폴란드보다 체코슬로바키아가 훨씬 많았고, 과거 독일로부터 폴란드가 얻은 영토도 123년만에 국가재건이 나서는 폴란드가 당연히 먹어야 할 영토이고, 이는 다른 조약도 아니고 베르사유 조약에서 확정된 바였다. 뿐만 아니라 해안 지대를 내주면 폴란드는 독일의 괴뢰국 수준으로 전락하게 될 텐데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 [51] 오히려 폴란드가 비판받아야 할 점은 뮌헨 협정의 체코슬로바키아 분할에 참여한 것이다. 당시 수준급의 선진국이자 공업국으로 강력하고 훌륭하게 무장한 체코슬로바키아의 육군은 대(對)독일전에 있어 폴란드 및 영국과 프랑스에 큰 도움을 줄 것이었다. 그러나 폴란드는 과거에 체코슬로바키아에 강탈당한 치에쉰 지역을 돌려받고 싶어 연합국에 배신당한 체코슬로바키아를 버리고 오히려 체코슬로바키아의 분할에 동참, 해당 지역을 다시 먹어버렸다. 근시안적인 폴란드의 외교정책이 비판받아야 하지, 침략군에 맞서싸운 폴란드가 비판받아서는 안 된다.
  • [52] 폴란드의 경우는 국경이나 지형 자체가 폴란드의 방어에 매우 불리하게 되어있었다. 위에서 말했듯이 폴란드와 독일의 국경선은 폴란드의 핵심 지역을 둘러싼 형태였다. 여기에 소련의 침공까지 받았는데 그럼에도 프랑스와 비슷하게 버텼으니...
  • [53] 물론 그렇다고 프랑스가 잘 싸웠다는 건 더더욱 아니다. 애초에 폴란드는 독일과 힘겹게 전쟁하다가 소련이 동쪽을 가격하여 패배가 더욱 가속화된 것이지만, 프랑스의 경우는 영국과 함께 싸웠음에도 나치 독일에게 털리는 역사적 참패를 당했다(이탈리아는 독일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고).
  • [54] 이전 문서의 설명처럼 폴란드가 갑툭튀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국경지대(라기에도 뭣하지만)에서도 산발적인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소련은 당시 독일에서 일어나고 있던 혁명을 지원하고 싶었기 때문. 하지만 어쨌든 먼저 본격적인 대규모 군사적 행동을 벌인 것은 폴란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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