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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차이콥스키

last modified: 2014-12-14 07:54:00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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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닥터 하우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Петръ Ильи́чъ Чайко́вскій [1]) 1840.05.07~1893.11.06

Contents

1. 설명
2. 차이콥스키의 유명 작품들



▲ 발레곡 《호두까기 인형》(Nutcracker) 中 〈행진곡〉(March). 호두까기 인형에는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인 수많은 곡들이 존재하므로 한 번씩은 들어보는 것을 권한다. 사실 전부 한 번쯤 들어 본 음악들이다

1. 설명


러시아의 작곡가.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차이콥스키가 맞다. 그런데 2005년에 외래어 표기법에 러시아어 한글 표기법이 추가되기 전까지는 죄다 '차이코프스키'로 써서 오히려 '차이콥스키'가 어색할 지경이다. 그런데 러시아인들은 '취콥스키'에 가까운 발음으로 읽는다. 이는 위의 이름표기에서도 보이듯이 그의 성인 차이콥스키에 역점이 가운데(чайк'о'вский)에 위치하면서 모음인 а의 발음이 약화되는 현상 때문.(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а가 и발음 음가를 가지는 경우는 ч,ш 뒤에 위치한 강세없는 а에 한정한다. 대표적인 예로 시계를 뜻하는 단어인 часы. 치씌 정도로 읽는다. 물론 남부방언에선 차이콥스키라고 그냥 부르기도하고...)

러시아 지방 캄스코보트킨스크에서 출생. 아버지는 광산 감독관으로 우랄 지방 곳곳의 광산을 전전했고 그 때문에 가족들도 아버지를 따라서 이곳 저곳으로 이사하면서 살았다. 프랑스인 가정교사의 교육으로 어릴 때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지만, 아버지나 어머니는 차이콥스키가 별로 음악적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아버지가 법률가로 키우려고 했었다.

1850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법률 학교에 입학하여 가족과 떨어져 살게 되었다. 여기서 그의 동성애적인 성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동성애는 차이콥스키의 인생과 음악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편으로는 법률학교 안의 합창단에 들어가서 음악 공부도 이어나갔다.

1859년, 법률학교를 졸업한 후 법무성의 1등 서기관으로 근무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을 끊지 못하던 중 1860년에 안톤 루빈슈타인 형제가 제안하여 러시아 최초 음악원의 1기 학생으로 입학해 음악가의 길을 가게 된다. 초반에는 안톤 루빈슈타인과 절친한 사이였지만 음악적 노선의 갈등으로 결국 안톤 루빈슈타인과 불화를 일으킨다. 루빈슈타인 형제는 서유럽의 음악을 중시하고 소위 러시아 국민악파라 불리는 "러시아 5인조"의 음악을 수준이 낮다고 절하했다. 그러데 차이콥스키가 이 "5인조"의 음악적 성향에 접근한 작품인 "폭풍우"라는 관현악곡을 작곡하니 루빈슈타인이 격노하고, 이것이 불화의 요인이 되고 만다.

결국 차이콥스키는 안톤 루빈슈타인의 동생인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이 설립한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가 되어 페테르부르크를 떠난다. 차이콥스키는 발라키레프의 소개로 국민악파 "5인조"와 친분을 나누지만 차이콥스키의 음악적 성향이 리스트바그너의 영향으로 서유럽쪽으로 기울면서 국민악파와는 결국 결별하게 된다.

1874년에는 차이콥스키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피아노 협주곡 제1번 B단조"를 작곡했다. 당초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에게 연주를 의뢰했으나 니콜라이는 이 작품이 난해하고 연주 불가능한 곡이라며 거절했다. 결국 한스 폰 뷜로의 지휘로 보스턴에서 다른 피아니스트와의 협연으로 초연되었지만 당대의 평가는 니콜라이의 평가와 썩 다르지는 않았다.(최근 현대건설 힐스테이트 아파트 광고에도 나오는 이야기다)

이후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서 1878년까지 근무하며 작곡활동을 병행하다가 러시아 철도왕의 미망인 나즈데다 폰 메크 부인의 후원을 받게 되면서 교수직을 사임하고 작곡에만 전념하게 된다. 폰메크 부인은 약 15년동안 차이콥스키를 후원해 주었지만 실제로 두 사람이 서로의 실물을 본 것은 오직 2~3번 뿐이라고 한다. 이는 폰메크 부인이 차이콥스키를 후원하기로 했을 때 서로 한 약속 때문이었다. 또한 차이콥스키는 폰메크 부인과 약 15년간 1200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 받으며 플라토닉한 사랑을 나누게 된다. 차이콥스키의 동성애 성향은 익히 알려져 있지만 이러한 인물들이 연상의 여인에게 정신적 사랑을 바라고 어머니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은 사실 꽤 있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1890년에 폰메크 부인은 파산을 이유로 더이상 차이콥스키를 후원할 수 없다고 통보한다.[2] 폰메크 부인의 일방적인 결별 선언에 차이콥스키는 극심한 괴로움에 휩싸이게 되었고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차이콥스키가 아무리 편지를 보내도 폰메크 부인은 더이상 답장을 보내지 않았고 사실상 둘의 관계는 끝난 것이다. 이 때문에 차이콥스키는 죽는 순간까지 폰메크 부인에 대해 강한 애증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임종 직전에도 폰메크 부인의 이름을 부르며 '저주받을 여자'라고 외쳤다고 한다. 흠좀무…

동성애에 대한 죄책감 등으로 여성과의 정상적인 연애나 결혼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차이콥스키는 10살이나 어리고 음악원 제자였던 안토니나 미류코바의 열성적인 구애에 시달리다가 미류로바가 결혼해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협박(…)까지 한 탓에 결국 맘에 없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마음에도 없는 결혼인 탓에 결혼생활은 행복할 리가 없었고 차이콥스키는 석달을 못 버티고 도망쳐버려 결혼생활은 파탄으로 끝났다[3]. 이 결혼 사건은 차이콥스키의 음악의 분위기까지 바꿀 정도로 중대한 사건이었다. 결국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게 된 그는 신경쇠약으로 이어진 후 유럽으로 도피성 요양여행을 떠나서 이탈리아에 이르러서야 겨우 심신을 회복할 수 있었다.

1878년, 귀국한 차이콥스키는 명작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했고 1888년에는 발레음악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완성했다. 이 때에 이르러 차이콥스키는 세계적인 음악가의 명성을 얻게 된다. 1890년 그간 차이콥스키를 후원하던 폰 메크 부인이 갑자기 후원을 중단해버렸다. 차이콥스키는 후원이 끊긴 후에도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었으나 폰메크 부인과의 교류가 끊기게 되면서 큰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차이콥스키는 미국 여행후, 오페라 "욜란타"와 발레음악 "호두까기 인형"을 작곡했다.

그의 생애 마지막해가 된 1893년,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작품 중 최후 걸작이 된 "교향곡 제6번 비창"을 작곡했다. 그리고 11월 6일, 의문의 죽음으로 세상을 떠났다. 공식적으로는 끓이지 않은 물을 들이켜서 콜레라로 죽었다라고 발표됐지만 당시에도 그런 엉터리같은 소리를 하느냐! 비난이 적지않았다. 왜냐고?

콜레라는 당시 불치병이나 다름없었기에 이걸로 죽었다면 격리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장례식에는 무려 6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모였으며 러시아 모스크바 정교회 주교를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이 장례식 미사까지 하고 음악 동료,친구들,지인들,친척들도 죄다 참석했다. 그래서 지인들은 콜레라로 죽었다는 당국 발표에 대하여 장례식에서 무척 기분나뻐하며 이래놓고도 콜레라라고 허풍을 치네요? 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더불어 장례식 끝나고 콜레라라 유행했다는 것도 없었다. 그리고 차이콥스키는 위에 서술된 걸 봐도 꽤 부유하게 살았으며 활동 영역도 부유층.귀족층에게 살았다. 이들은 깨끗한 물을 마시고 당시 콜레라는 더럽고 가난한 빈민층이나 걸리는 병이었고 사실이었다.(지저분한 물을 마시고 그런 환경에서 살아갔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콜레라에 걸려죽었다? 지인들이나 당시 친척들도 참 어이없어 했다.

일각에서는 차이콥스키가 당대의 실권자인 스텐본크 톨몰 공작의 조카와 동성애 관계를 맺었고, 이것을 알아차린 공작에 의해서 자살을 강요당해서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또한 다른 주장으로는 공작이 황제에게 차이콥스키를 고소하였으며 정교회 국가인 러시아에서 동성애는 죽음의 죄였기 때문에 이 고소장을 넘겨받은 검찰부총장이자 챠이코프스키와는 법률학교 동창인 니콜라이 야코비가 차라리 명예로운 자살을 종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것은 콜레라의 증거로 언급되는 쌀뜨물 같은 설사가 비소를 먹은 경우에도 나타나는 증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백한 증거가 없는 탓에 확실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러시아 고전주의 음악을 완성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그의 음악에 대해서는 당대에 평가가 엇갈렸다. 서유럽에서는 그의 음악을 대중적이라고 평가절하했고, 러시아에서는 민족주의적인 경향과 거리가 있다고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쉬우면서도 깊은 울림을 가진 것으로 오늘날에 클래식 애호가들의 깊은 사랑을 받는 작곡가가 되었다.

피아노, 바이올린의 연주기법에 있어서 당대 음악가들을 능가하는 진보를 이뤘는데 이 때문에 그의 피아노, 바이올린 협주곡들은 난해하고 음악형식에 맞지 않는다는 평가를 당대에 받았다. 다양한 작품들을 남겼는데 "예브게니 오네긴" 같은 오페라, "백조의 호수" 같은 발레음악 등의 무대음악부터 6곡의 교향곡, 다양한 표제음악적 성격의 교향시와 관현악곡들, 피아노 음악과 실내악곡 등에서 여러 걸작들을 남겼다.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에 꼽힌다. 전문가들의 견해는 차이콥스키의 음악에 보이는 정서와 한국인들의 정서가 맞아 떨어져서라는 분석을 하기도 하는데, 어쨌든 피아노 협주곡 1번이나 바이올린 협주곡, 교향곡 6번 비창이 한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클래식 음악의 상위권에 늘 랭크되는 걸 보면 한국인과 뭔가 맞는 부분이 있는건 분명한 것 같다.

2. 차이콥스키의 유명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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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현대 러시아어 표기로는 Пётр Ильи́ч Чайко́вский.
  • [2] 일설에 따르면 폰메크 부인의 재정적 불안은 작은 이유 중 하나일뿐이며, 실제로는 차이콥스키와의 관계를 중단하라는 폰메크 부인의 가족들의 압박과 폰메크 부인이 차이콥스키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게된 것이 후원을 중단한 결정적 이유였다고 한다.
  • [3] 말이 좋아서 파탄이 되었다지 그렇게 간단하게 끝난 것도 아니었다. 차이콥스키는 아내가 바람을 피웠다고 이혼할 것을 주장하면서도, 아내의 성관계 요구에는 부들부들 떨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미류코바는 결혼을 지속할 것을 원했기 때문에 법적으로 이혼하지는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아내가 자신의 동성애 사실을 폭로할 것이라고 두려워한 차이콥스키가 이혼을 포기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결국 이 복잡한 결혼관계는 미류코바가 정신병에 걸려서 죽으면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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