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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프랑코

last modified: 2015-09-16 11:14:11 by Contributors

1975년 10월. 갈 날을 암시하듯 살이 쪽 빠져버렸다.

Francisco Paulino Hermenegildo Teódulo Franco y Bahamonde Salgado Pardo de Andrade
프란스코 파울노 에르메네도 테둘로 프랑코 이 바아데 살르도 데 안드[1]

1892년 12월 4일 ~ 1975년 11월 19일

스페인장군이자 독재자유럽 최후의 파시스트라는 평을 받는 인물. 통칭 카우디요(Caudillo).[2] 왜 파쇼놈들은 퓌러두체니 하길 좋아하는 거지?[3] 프랑코 이베리아의 지도자

1936년 공산당과 기타 좌파의 연합세력인 인민전선의 집권에 위기감을 품은 스페인 우파의 반란으로 시작된 스페인 내전의 주역으로 권좌에 올라 1939년 스페인의 독재자가 되고 1947년에는 스페인을 왕정체제로 되돌린 뒤 스스로 섭정이 되어 종신권력을 획득하여 1975년 사망할 때까지 스페인에 철권통치를 펼쳤다.

프랑코 시절의 스페인은 20세기 초 호르티 미클로시가 독재하던 헝가리처럼 국왕없는 왕국이었다. 다만 헝가리의 경우 왕정시절의 상징물들을 민주화 이후 부활시킨것을 제외하면 완전히 의원내각제 공화국(명목상의 대통령제)으로 전환했지만 스페인은 다시 왕에게 국가원수 지위를 돌려주었다는 차이점이 존재한다.

Contents

1. 유년기
2. 군인으로서의 경력
2.1. 모로코의 전쟁영웅
2.2. 제2공화국
3. 스페인 내전
3.1. 장군들의 반란
3.2. 권력장악
3.3. 내전의 승리
4. 2차 세계대전의 프랑코
5. 프랑코의 정치
6. 프랑코 이후

1. 유년기

1892년 12월 4일, 스페인 북부의 주요해군기지였던 갈리시아 주의 페롤에서 출생. 가문 대대로 해군에서 복무했던 군인 가정[4]에서 태어났으며, 1살 위의 형 니콜라스와 동생 라몬, 그리고 2명의 누이가 더 있었는데 이중 형 니콜라스는 프랑코의 집권에 큰 공헌을 하게 된다.

2. 군인으로서의 경력

2.1. 모로코의 전쟁영웅

소년 프랑코는 원래 집안의 내력에 따라 해군에 지원하려 했지만 그 무렵 스페인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미서전쟁) 식민지를 거의 다 잃고 해군이 대폭 축소되어 해군사관학교도 1906년부터 1913년까지 문을 닫는 지경이어서 아버지의 권고에 따라 1907년 톨레도에 있는 보병사관학교에 입교했다.

1910년 사관학교를 졸업하여 중위로 승진한 프랑코는 1912년에 당시 스페인 육군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모로코 전선으로 파견되어 이른바 리프 전쟁이라고 불리는 모로코 베르베르 인들과의 전쟁에 참여한다. 사실 당시 스페인군은 전술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2류 이하의 군대였기 때문에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 했지만, 역설적으로 이는 일정 정도의 용기와 담력을 지닌 장교들의 화려한 무용담과 그를 통한 급속한 출세가 가능한 환경을 제공했고, 때문에 전군 16만 남짓이던 스페인군에 장군과 장교가 무려 1만 2천명이 넘는 기형적 구도가 형성되었다.

프랑코도 이러한 시류에서 예외적인 존재는 아니었는 바, 사실 지금 남아있는 그의 사진만 보더라도 키는 작고 체격도 군대에서 일반적으로 먹어주는 몸짱과는 거리가 먼지라 동료 장교들이 다들 꼬마 프랑코, 계집애 파카(프란시스코의 애칭)라고 부르며 조롱했을 정도였지만 프랑코는 모로코 현지민들로 구성된 용병부대 레굴라레스의 지휘관으로 임관하여 맹활약을 펼침으로써 그들을 압도한다.

1916년, 23세에 이미 스페인군 최연소 대위가 되어 전도유망한 장교로 명성을 얻고 있던 프랑코는 엘 비우츠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되는데, 그 부분이 하필이면 영 좋지 않은 곳이었고, 이 때문에 한쪽 고환을 잃었다고 추측된다.[5] 하지만 그는 중상을 입은 중에도 의사를 권총으로 협박하여 자신을 수술하게 했고 기적적으로 회복, 모로코 원주민 병사들로부터 기적의 남자라고 불리게 된다. 이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그는 스페인 최고무공훈장을 받지 못했지만, 그 대신 스페인군 최연소 소령, 즉 최연소 영관이 된다.

1923년 다시 중령으로 승진한 프랑코는 스페인군이 프랑스 외인부대를 본따 창설한 스페인 외인부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같은 해 결혼도 했는데, 스페인군의 전쟁영웅이었기 때문인지 결혼식에서의 대부 역할을 맡은 사람은 다름아닌 당시의 국왕 알폰소 13세였다고 한다. 이 결혼으로 딸[6] 하나가 태어났다.

이후에도 계속 출세가도를 달린 프랑코는 다시 1926년에 스페인군 최연소 장군(...)이 되고, 1928년에는 사라고사에 새로 세워진 사관학교의 교장이 된다. 이 사관학교는 종전의 보병, 기병, 포병장교를 따로 양성하던 관례를 깨고 통합적인 장교양성과정을 통해 군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는데, 여기서 교육받은 장교들은 훗날 프랑코의 충실한 친위세력이 된다.

외인부대 사령관 시절 프랑코에 대한 일화가 있는데, 어느 날 너무나 부실한 급식을 참다 못한 병사들 사이에서 불온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급기야 주동자격인 병사가 프랑코의 얼굴에 음식을 집어던졌는데, 프랑코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식당 담당장교를 불러오게 해 그 병사가 보는 앞에서 "즉시 급식의 질을 개선하도록" 이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그 직후 그가 내린 두 번째 명령은 "그리고 저 자(자신에게 음식을 던진 병사)를 즉시 끌어내 총살하도록!" 이었다. 훗날 프랑코가 걷게 될 길을 암시하는 듯한 상당히 섬뜩한 일화다.

2.2. 제2공화국

1930년대 초,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경제불황과 정치적 실책을 극복하지 못한 부르봉 왕가[7]알폰소 13세가 해외로 망명하면서 왕정이 붕괴되고 제2공화정이 수립된다. 그러나 프랑코는 그때까지만 해도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툭하면 쿠데타를 남발하던 다른 장군들에 비해 공화정부로서는 다루기 쉬운 인물로 비춰졌는데, 1931년 무렵 산후르호 장군의 쿠데타에도 참여하는 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당시 전쟁장관을 맡고 있던 마누엘 아사냐가 사라고사 사관학교를 방문했을 당시 생도들에게 프랑코가 갖고 있던 카리스마적인 영향력을 알게 된 것이 원인이 되어 사관학교는 그대로 폐쇄되었고(…), 프랑코는 사관학교 폐쇄 후 6개월 동안 보직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1933년 2월, 발레리아스 제도로 파견되는데, 1933년 10월, 이른바 아스투리아스 혁명이라고 불리는 무정부주의 반란이 발발하자 당시 전쟁장관 디에고 이달고의 지원을 얻은 프랑코는 사단장 자격으로 반란 진압을 담당, 후에 스페인 내전의 용장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 훌리오 야구에 중령이 지휘하는 외인부대를 파견하여 오초아 장군의 응원군과 함께 반란군을 참혹하게 진압한다. 이 과정에서 오초아 장군은 모로코 출신의 용병들이 포로 밑 양민 학살 등의 만행을 저지르는 것을 막고, 포로들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했다는 이유로(...) 전간기 파시즘으로 가득 찬 스페인 군부 내에서 왕따가 돼버리는 통에 프랑코는 반란진압의 1등공신이 되고, 이로 인해 1935년, 아프리카 파견군 총사령관을 맡고 다시 스페인군 참모총장이 된다.

3. 스페인 내전

3.1. 장군들의 반란

1936년, 공화정 수립 4년만에 다시 정부가 붕괴되고(…) 이른바 인민 전선이라고 불리는 자유주의-좌파 연합세력이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자 우파 세력의 불안감은 극에 달한다. 이미 스페인 좌우파의 대립은 유혈사태로 이어진 전례가 있었고, 선거에서 승리하자마자 일부 급진 세력이 감옥을 부수고 민병대를 조직하는 등의 병크를 터뜨리는 통에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았던 중도 세력까지도 좌파에 반발하는 판이었다. 게다가 공화국은 왕정시대 거의 절대적인 특권을 보장받던 가톨릭 교회[8]를 상당부분 제재했기 때문에 종교세력의 반발도 위험수위에 달해 있었다.

인민 전선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위험 세력들을 제재하기 위해 군의 유력한 장군들을 외부로 떨어뜨려놓는 조치를 취한다. 이에 따라 프랑코도 참모총장직에서 해임되어 카나리아 제도로 추방되었으나, 오히려 이 때문에 프랑코는 자신의 세력기반이던 아프리카 파견군과 더욱 긴밀히 접촉할 수 있었고 이 시점에서 정부에 대한 그의 의견도 확고해진다. 하지만 프랑코는 이 시점에서도 태도를 명확히 하지 않은 채 상황을 주시하는 길을 택했고, 이 때문에 동료 장군들로부터 불신을 받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훗날 권력을 간단히 장악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같은 해 7월, 우익의 거물 정치인이던 칼보 소텔로가 좌파 경찰에 의해 살해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 결국 7월 말, 국민 진영(내셔널리스트)이라는 이름으로 장군들과 우익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스페인 내전의 막이 오른다.

3.2. 권력장악

당시 국민 진영의 유력한 장군들은 대부분 스페인 영내에 기반을 두고 있었지만 프랑코는 아프리카 파견군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때 스페인군은 사실상 아프리카 파견군을 제외하면 향토방위군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에 프랑코의 영향력은 반란 초기부터 가장 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때까지 반공주의 외에는 다른 정치적 성향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던 그의 태도 때문에, 국민 진영을 구성하던 여러 파벌들에게 프랑코는 가장 적절한 지도자로 비춰졌고, 여기에 그의 형 니콜라스 프랑코의 로비 활동이 결실을 맺어 1936년 10월 1일, 프랑코는 국민 진영의 본거지인 부르고스에서 총통=3군 총사령관(Generalísimo) 겸 국가수반이 된다.

여기에 그의 강력한 경쟁자가 될 수 있었던 몰라 장군이 1937년 원인불명의 비행기 사고로 급사하면서 - 사실 프랑코의 경쟁자 내지는 경쟁자 예비 후보들이 유독 비행기 사고로 많이 죽었는데,자세한 내막은 아무도 몰라[9] 프랑코의 권력기반은 더욱 탄탄해진다. 세비야와 안달루시아 지역에서 왕초 노릇하던 케이포 데 야노 장군이 내전 내내 프랑코에게 찌질찌질걸리적거리긴 했지만, 내전이 끝난 뒤 실권을 빼앗기고 아무 힘도 쓸 수 없게 되었다.

3.3. 내전의 승리

당초 16만 정도이던 스페인군은 내전 발발 당시 국민진영측에 약 10만, 공화정부측에 6만 정도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국민 진영에서 프랑코가 이끌던 4만에 이르는 아프리카 파견군, 그 중에서도 주로 모로코 현지인들로 구성된 용병부대 레굴라레스와 스페인 외인부대에 필적할 정예부대가 공화정부측에는 없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실전경험있는 지휘관들이 이른바 아프리카 당, 즉 아프리카 파견 경력을 매개로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화정부는 정예병사도, 신뢰할 지휘관도 없었던 판이었다. 그나마 공업지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1차 세계대전 당시의 경제호황으로 인해 축적해두었던 상당량의 금괴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해군의 상당수가 공화정부를 지지했다는 점 정도가 공화정부가 믿을만한 것이었지만...태생부터 허약할 수밖에 없었던 연립정권이었던 인민 전선 정부는 이런 이점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처음부터 갈팡질팡해야 했다.

사실 프랑코를 비롯, 국민 진영의 주요 지휘관들은 용감한 군인이긴 해도 전략가로서의 재능은 부족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당시 유럽 기준에서 볼 때) 1936년 7월의 반란도 실상 굉장히 조악한 것이어서, 정부가 단호하게 대처하기만 했어도 조기진압의 가능성은 높았다. 하지만 공산당과 기타 좌파 정당들의 이해관계가 부딪히는 바람에 일이 꼬였던 것이다. 반면 프랑코가 이끌던 국민 진영에는, 왕당파인 카를로스 파와 파시스트 정당인 팔랑헤 당 등의 내부 계파가 있었긴 했지만, 아프리카군을 중심으로 한 군대의 힘을 가진 프랑코의 힘이 이들을 억제하기 충분했기에 통합된 세력을 이끌 수 있었다. 그나마 이런 내부 파벌들도 내전 승리를 눈앞에 둔 프랑코가 팔랑헤 당을 중심으로 파시스트, 보수주의자, 왕당파에다가 노동조합주의자들까지(물론 좌파는 아니고, 파시즘의 원류가 되는 국가노동조합주의자들) 모조리 통합하는 친위쿠데타를 감행, 이른바 "통합 팔랑헤당"을 만든다. 이런 프랑코 정권의 복합적인 성격 때문에 현재 학자들은 프랑코의 정치성향을 파시즘인지, 단순한 권위주의+내셔널리즘으로 보는지 의견을 달리 한다. 후자의 경우 저러한 프랑코 정권의 복합적인 태생적인 성격과 그 내에서 주도하기 보단 조절자 역활을 했던 프랑코의 역할을 강조 하는 반면, 전자로 보는 경우 카톨릭 보수주의를 근반으로 한 강제적인 국민적 사상 교육, 이에 따른 전쟁 이후로도 지속 되었던 전시 체제, 그리고 역시 카톨릭 교회를 매개로 한 국가 이데올로기의 일상의 침투 등을 주목 하며 프랑코 정권을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등과 함께 걷는 전체주의 정권으로 간주한다.

이런 상황에서 인민 전선 정부에 치명타를 날린 것은 아돌프 히틀러가 이끌던 나치 독일 정부와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끌던 파시스트 이탈리아였다. 히틀러는 스페인의 풍부한 광산과 대서양 연안에 있는 잠재적인 해군기지들을 노렸고, 무솔리니는 장차 영국지중해의 제해권을 두고 다툴 때 영국의 지중해 주요 거점인 지브롤터를 견제할 수 있는 새로운 파시스트 국가를 확보하고 싶어했던 것. 게다가 당시 급속도로 재무장하고 있던 독일로서는 새로운 장비와 전술을 실전으로 시험한다는 점도 무시 못할 매력이었다. 이 때문에 독일은 포켓전함 '도이칠란트'와 '아드미랄 셰어'를 파견하여 공화정부 측 해군을 견제하고, 도르 군단으로 유명한 지원 병력을 파견, 이탈리아도 자국의 최신 피아트 전투기와 안살도 경전차를 비롯해서 수만 명의 파시스트 의용군을 파견한다. 여기에 공화 정부 집권과 함께 좌파의 보복을 우려하여 해외로 도피했던 스페인 자본가들이 영국과 미국에서 로비 활동을 펼쳐 공화 정부에 대한 지원을 차단함과 동시에 프랑코에 대하여 미국이 석유를 계속 수출하게 만든다. 오죽하면 국민 진영에서 "우리가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독일의 폭격기와 이탈리아의 대포, 미국의 석유와 신용대부와 차량 덕분"이라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

여기에 공화정부가 그나마 국제여단을 비롯한 지원세력들을 자폭이나 다름없는 병크를 터뜨리며 날려먹고, 스탈린이 이끌던 소련이 공화 정부의 금괴를 삥뜯는 등의 사태가 겹쳐 결국 1939년, 프랑코 군대에 의해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10]가 함락되면서 프랑코는 사실상 스페인의 카우디요(지도자)가 된다.

4. 2차 세계대전의 프랑코

프랑코는 내전 기간 중 독일과 이탈리아, 두 파시즘 국가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프랑코 그 자신도 친파시스트적 성향을 띠었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 동안 두나라와 비교적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실제로 스페인의 주요 항구였던 카디스는 대전 기간 동안 독일 해군의 기지가 되었고, 청색사단이라는 이름으로 1개 보병사단이 독소전선에 파병되기도 한다.[11]

그러나 무솔리니는 그 특유의 허세(...) 때문인지 프랑코에게 그리 많은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면서 스페인에 필요 이상의 지원을 퍼부은 반면, 결국 이 때문에 이탈리아는 무솔리니가 그나마 잘하고 있던 경제분야를 고대로 말아먹어 2차 세계대전 그 숱한 병크를 터뜨리는 또 하나의 원인을 초래하고 만다. 히틀러는 지원의 대가로 스페인 북부의 광산들을 차지했고 웬 독일산 돼지가 공화 정부에도 무기를 파는 등의 행각을 벌였으니(헤르만 괴링 항목 참조), 강한 민족주의자이기도한 프랑코로서는 감정이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프랑코는 당시 비시 프랑스의 국가수반이었던 페탱 원수에게 "선생님[12], 가지 마세요. 저놈들이 선생님한테 책임을 다 덮어씌우려 한다고요."라고 말하고, 히틀러와의 동맹 교섭현장에도 일부러 몇시간이나 늦게 도착하여 히틀러를 빡돌게 만드는 등, 거리를 어느 정도 두려고 했던 것 같다.[13]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우리가 내전 때문에 산업이 개쪽돼서 무기도 못 바꾸는데, 님들 무기 좀 무상으로 줄래염?ㅋ 그러면 동맹함 정도로 끝낸 듯하다. 물론 위에서도 썼듯, 자국내 항구를 군사거점으로 제공하고, 독소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는 대놓고 추축국에 가담하지는 않지만 소련과의 전투에 참전하고 싶어하는 자원병을 제공하겠다고 제의하였기에[14], 2차대전에서 표면적으로 중립이었지만 사실상 참여한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프랑코의 강력한 요청으로 인해 파병된 부대는 소련하고만 싸웠다. 그리고 독일이 잘 나가던 1940년대만 하더라도 "우리 내전 전후 복구만 도와주면 당장이라도 참전해서 도와드림"이란 식으로 살랑이를 떨었으나, 이 내전 복구와 스페인군을 다시 전력이 될 만한 단계로 재건하는 것 만으로도 천문학적인 투자를 필요를 해서 히틀러가 거절하였다. 게다가 프랑코가 무기뿐만 아니라 식량, 석유에 비시 프랑스령 북아프리카 식민지 - 모로코 전체, 알제리의 일부, 사하라 사막 등 - 까지 요구해대니, 아무리 지브롤터 공략이 매력적이라도 히틀러가 선뜻 들어줄 수 있을 리 없었다. 이러다가 전황이 슬슬 안좋아 보이기 시작하는 1942년부터 역으로 히틀러가 참전 좀 하라고 살랑이를 떨다가, 그 이후 독일의 패색이 확실히 짙어지자 완전히 쌩깠다. 그리고 무솔리니 또한 내심 지중해에서 다른 경쟁자가 생기는 것을 바라지 않아 등 뒤에서 히틀러에게 스페인을 끌어들이지 말라는 압력을 넣었다.

전쟁 말기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프랑코는 재빨리 청색사단을 국내로 소환하고 독일과의 관계를 단절, 1944년 말, 프랑코가 연합국과의 협상에 나섰다는 이야기를 들은 히틀러는 프랑코 개객기라고 내뱉었다고 한다. 삥뜯을 땐 좋았지[15] 하지만 연합국, 특히 소련을 비롯한 공산 세계 또한 내전 당시의 프랑코가 한 짓거리를 잊은게 아니고, 무엇보다 2차대전 직후와 냉전 체제가 본격화된 50년대 사이에는 동서방을 가리지 않고 파시즘에 대한 혐오 분위기가 세계적으로 대세여서 2차대전에 휘말려 드는건 피했을 망정 외교적으로 스페인은 남아공, 서독 등과 함께 여전히 국제적 천민 취급을 받으며 고립되었다.

1947년 이미 대가 끊긴 것이나 다름없던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복권을 선언하면서 왕위를 이을 적합한 인물이 나타날 때까지는 내가 섭정이라고 선언, 종신 집권을 합법화한다(…).

5. 프랑코의 정치

군인으로서의 화려한 무용담과 집권 과정에서의 교묘한 책략으로 꽤나 간지나는 인물로 보이지만 그의 정치 행태를 보면 전혀 간지나 카리스마 따위가 아니라 오히려 삽질, 비굴함, 운빨이 삼박자로 가득차 있다. 특히 경제정책의 경우 후술에서 설명하겠지만 말 그대로 주먹구구식이라 위기에 취약하여 이후 유로존 위기 상황에서 스페인이 국가 막장 테크를 밟는 주 원인으로 작용했다.

말이 좋아 빨갱이 공산주의자와 무신론자들로부터 스페인의 가톨릭적 정체성을 보존하는 데 성공했다 뿐이지, 실제로는 철저한 반공주의, 중앙집권주의, 스페인 단일국가주의를 국시로 옛 공화주의 세력을 갈아마시다시피 하는 것은 물론, 카탈루냐, 바스크 등 지역 분리주의 세력도 마찬가지로 거의 갈아마시다시피 탄압했던지라 지금까지 집계된 프랑코 정권하에서의 사망자만도 20만을 넘어서며, 그나마 이것도 극히 일부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16]. 심지어 아침식사를 한 뒤 커피를 마시면서 사형수 명부를 갖다놓고 이름 옆에 사형, 연기, 사형 후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할 것 등을 직접 기입했다고 하니(…). 이 시기 한때 스페인 민중의 다수를 차지했던 공화주의파,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등의 세력은 죄다 외부로 망명 or 사형 크리를 밞아서 스페인 내부의 진보, 좌파 진영이 아예 절멸당했다가 [17], 프랑코 정권이 2차대전이란 고비를 넘기고 어느 정도 '프랑코 체제'라 부를 만한 것이 자리 잡은 50년대 중후반 쯤에 다시 대학생, 근대 자유주의 성향의 정권 내 반독재 인사들, 망명 2세대, 바스크와 카탈로니아 민족주의 세력이 다시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프랑코 독재 정권에 대한 저항 2기가 나타나게 된다.

프랑코 정권이 단순한 피비린내나는 학살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스페인의 사회적, 제도적 인프라를 망친 점으로 지목되는 것은 문화, 예술, 학문 방면에서 처절한 지식인 계층의 탄압이었다. 내전 발발 이전 스페인의 문화적, 예술적 사조를 주도핟던 '27년 세대라고 불렸던 문학인, 예술인들 중에서 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겔 에르난데즈는 처형, 옥사당했고, 드로 살리나스, 안 라몬 히메네즈는 망명지에서 객사했다. 학계에서도 당시 대부분 공화국,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등을 지지했던 스페인의 인텔리 계층은 라우디오 산체스 알보르노, 몬 피달, 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메리코 카스트로, 등 당시의 거물 역사학자, 철학자, 비평가 등이 대거 중남미, 북미, 프랑스, 등지로 망명하면서 되려 남의 나라 대학 배만 불려주었고, 내전 이전만 해도 상당히 발전해있었던 스페인의 역사학계와 문화비평학은 대거 작살나서 오히려 70년대, 80년대를 들어 미국, 멕시코, 아르헨티나, 프랑스 등을 통해 역수입되었다. 실제로 서구권 지식인 사회 전반에서 히스패닉 역사, 문화, 예술 등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대폭 늘었던 시기가 바로 이 망명인사들이 전 세계로 흩어진 40년대, 50년대의 일이다(...).

프랑코 지지자들이 프랑코의 주요한 업적으로 꼽는 것은 경제정책이다. 1940년대와 50년대 스페인의 경제는 독일과 이탈리아에 진 막대한 부채를 갚는 것과 동시에, 프랑코의 이른바 '자급주의', '군수공업우선주의'로 인해 거의 파탄 직전까지 갔다는 비판도 있지만, 사실 당시 스페인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외국과의 교역을 활발하게 하려고 해도 그럴 상황이 못 되었다. 고립된 것도 따지고 보면 프랑코 때문이지만. 게다가 독재자들이 나라 굴린다는 게 그렇듯이, 정부 각 부처의 장관들과 고위 관료들을 모두 전문성과는 하등 상관 없는 정치적인 이유로만 골랐기 때문에 나머지 유럽이 모두 2차대전의 참화에서 재기하고 경제적인 호황기를 누릴 1950년대 후반까지 스페인의 경제는 한국전쟁 직후 한국과 마찬가지로 전후 복구는 그럭저럭 잘 됐지만[18] 그 이상은 하지 못한, 즉 경제적 파탄 수준에 있었다.

정치적인 기반도 불안하고, 국제적으로는 왕따고, 경제 사정은 또 개판이니 결국 50년대 중후반을 기점으로 대대적인 수술을 가했다. 냉전 시기 서방의 편집증적 좌익공포증에 편승하여 갑작스럽게 자신을 반공 투사 1세대로 국제 무대에서 포장하기 시작하였다. 한 예로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코는 한국에 스페인 지원병을 파병할 용의가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전에 참전을 해서라도 UN과 서방 국가들의 인정을 받겠다는 뜻을 내보인 것.[19] 스페인의 한국 파병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이러한 노력들을 통해 1950년대 후반부터 미국을 비롯한 서방진영와의 관계를 회복하여 국제 교역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수 있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내부 사정 또한 까를로스파, 왕당파, 파시스트 등 복잡한 정파 싸움의 교통 정리가 이루어져 이제 눈치 안보고 제대로 된 전문 관료들을 선임하기 시작하였다. 뒤늦지만 이러한 개혁 조치로 스페인은 저임금 노동력과 괜찮은 수준의 제조업을 갖추게 되어 프랑코의 경제정책도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이러한 조치가 자신이 집권하고도 20년이나 지난 뒤에 취해졌다는 것이지만.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은 내전 끝나고 20년 뒤인 1950년대 후반에야 내전 및 혼란 이전 경제 수준을 완전히 회복했다. 능가했다는게 아니라 20년이나 지나야, 다른 유럽 국가들은 전부 다 2차 대전이 끝난 지 10년도 넘었고, 마셜 플랜의 지원과 눈부신 전후 경제 발전으로 인하여 진작에 유례없던 호황기를 한창 누리며 전후복구를 수년 만에 끝내고 빠른 속도로 고성장에 돌입하는 사이 스페인은 겨우 경제가 막장이 되고 내전이 벌어지기 전인 1930년대 이전 수준으로 돌아간 것이다. [20] 물론 이후에는 성장이 궤도에 오르면서 빠른 속도로 서유럽을 어느 정도 따라잡았고 이에 따라 국민소득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긴 했지만. 물론 이에 대해서 프랑코 실드 치기 바쁜 현지 우익들은 스페인은 마셜 플랜의 지원을 못 받아서 그렇다고 그렇게 징징대는데 애초에 왜 미국이 스페인만 마셜 플랜에서 쏙 빼놓은지 생각해 보자. 괜히 처칠 같은 우익 인사들마저도 이미 버스는 지나갔지만 훗날에나마 '그때 눈 앞의 레드 컴플렉스를 치우고 공화국을 도왔어야 했다' 하며 후회한 게 아니다. 게다가 소위 그 프랑코 시기의 경제 발전이란 것도 작위적이고 중구난방으로 이루어져 그 결과를 현대의 스페인인들이 현재 유로존 경제 위기로 톡톡히 치르고 있다. 게다가 프랑코 이전이라고 해서 스페인의 중공업과 산업이 아예 없었냐면 그것도 아닌 게, 바르셀로나의 제조업, 바스크 지방의 조선업, 북부 아스뚜리아스 지방의 철광업 등은 유럽 전체에서도 상당한 경쟁력을 자랑하는 산업이었는데, 당시 대부분 지역 자치주의 성향이었던 현지 산업가 계층 또한 프랑코가 싸그리 갈아버려 오히려 있던 기반을 지가 발로 걷어차고 나라를 바닥으로 떨어뜨린 후에 막판에야 다시 건설한 셈이다. 그래도 스페인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소득이었던 그리스나 포르투갈, 아일랜드에 비하면 중공업이 튼튼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한국과 일본의 조선업이 흥하기 전까지 유럽 조선업의 선두주자였고, 자동차의 경우 한국 다음의 생산량을 자랑한다. 고속철도도 프랑스로부터 기술이전을 받아서 자체 개발할 정도. 죽은 독재자에 대한 옹호란 게 다 그렇지만, 우익들이 프랑코를 옹호하면서 내세우는 경제 발전도 비슷한 경우를 전세계적으로, 그리고 장기적 관점에서 비교하면 초라하면 초라했지 그리 딱히 특출날 것도 없다. 한국, 중남미 등이야 진짜 막말로 아무런 기반 산업, 제도적 인프라, 인적 자원이 아예 없는 상황에서 시작했지만, 스페인은 아무리 삼류 국가여도 프랑스와 딱 국경을 댄 유럽 국가여서 애초에 프랑코가 집권하기 이전에는 나름 쌓아둔 게 있었다.

전반적으로 경력 자체만 두면 내전에서도 이기고, 2차대전도 비껴나가고, 경제 발전도 하는 등 나름 뭔가 잘한 것 같이 보이지만, 그 내부적인 과정을 뜯어보면 거의 대부분 운빨이거나, 나름 머리 굴려서 집행한 것도 나라 전체를 위한다기보다 자신의 지지계층 소수만을 위해 지극히 이기적인 방향으로 머리쓴 것이고, 2차대전 이후 고립에서 입을 싹 씻은 후 다시 국제 사회에 편입된 모습 등을 보면 입으로는 허구한 날 과거의 영광으로의 희귀니, 스페인의 명예니 같은 소리는 실컷 떠들었지만 필요에 따르면 말을 바꾸는 것도 서슴치 않았으며, 무엇보다 정작 자신 국민 앞에서는 끝도 없이 당당한 주제에 히틀러, 무솔리니, 아이젠하워, 처칠 등 본격적인 강대국의 지도자들 앞에서는 저자세로 굽신거리는 등 좋게 평가하기가 힘들다. 단순히 경제 발전 하나만으로 프랑코를 좋게 평가하기에는 뿌린 피가 일단 너무 많고, 그 경제 개발이란 것도 지금 스페인이 겪고 있는 고난의 씨앗이 통제 불가능한 공권력, 뿌리 깊은 부정부패, 능력이 아닌 이념과 충성도에 따른 코드 인사, 그리고 이런 상류층의 비행의 성역화 등 프랑코가 뿌린 씨앗과 깊게 연관된 것을 보면 제대로 된 공로라고 할 수나 있을지 의문이다.

단적인 예로 비교적 최근까지 직접적인 폭탄테러 등으로 스페인을 괴롭힌 바스크 지방의 ETA를 필두로 한 테러리즘, 그리고 당장 지금 독립 선언을 한다 만다 하는 카탈루냐의 분리주의 운동은 역사적으로 프랑코 이전에는 전례가 없거나, 있어도 스페인 내에서 자치권의 확대와 보장을 요구하는 훨씬 더 온건한, 중앙에서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소수의 지식인들과 산업가들 중심의 지역주의 운동 수준에 가까웠다. 역사적으로 스페인이란 나라는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세력에 맞선 여러 카톨릭 왕국들의 동군연합에 뿌리를 둔 만큼 이웃 프랑스와는 대조적으로 지방 자치 전통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으며, 중앙 또한 이를 대체적으로 존중하고 합리적으로 교섭을 하는 게 전통이었다. 실제로 스페인 각 지방들의 사법적, 정치적 통합은 까딸루냐의 경우 18세기 중반, 바스크 지방은 19세기 후반에야 이루어졌으며, 당연히 통합 이후에도 자국어 사용같은 시시콜콜하면서도 민감한 문제로 지방을 건드리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프랑코는 정권을 잡은 이후 우리나라로 치면 일제 시대 조선어금지령 마냥 강제로 수백년간 현지에서 일상 언어로 수백년간 사용된 딸루냐어, 바스크어를 제한도 아니고 무조건 금지먹이며 공권력을 동원해 스페인 역사상 유례 없는 탄압을 가하며 중앙에 의한 복속을 강요했다. 차라리 일제 마냥 해외 식민지에서 그랬다면 원래 그런 시대였다라는 실드라도 쳐 주지만, 까딸루냐나 바스크 지방은 오히려 현대 스페인의 중심인 까스띠야보다 더 현지에 독립적인 정치적, 사회적 집단으로 오래 있었으면 오래 있었지, 자국 땅에서 이런 뿌리 없는 강제동화정책의 대상 따위나 될만한 곳이 아니었다. 실제로 아직도 빌바오바르셀로나의 중장년층 사이에서 젊은 시절 거리에서 무슨 급한 일에 자연스럽게 모어인 바스크어나 까딸루냐어를 사용했다고 해서 헌병대에 끌려가 뺨때귀 맞은 이야기가 우리나라 중장년층의 버스 불심검문 스토리만큼 자주 들을 수 있는 얘기다. 자기네 땅에서 이런 유례없는 탄압과 강제동화정책을 40년 가까이 겪으며 산 이 지방들은 프랑코 정권 말기 독재자가 죽을 기미가 보이자 아예 스페인이란 나라 자체에 질색을 하며 폭탄을 통해서든, 로비를 통해서든 노골적인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급진적 방향으로 선회했다.

6. 프랑코 이후

1967년
1975년 1월
프랑코는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후예로 이탈리아에 망명중이던 [후안 카를로스 왕자를 만난 뒤 1969년 그를 '스페인의 왕', 동시에 자신의 후계자로 선언한다. 원래는 후안 카를로스 왕자의 아버지이자 알폰소 13세의 아들인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이 살아있었기 때문에 왕위 계승 순위에서 그가 앞섰지만 자유주의 성향이 강한 후안 백작을 탐탁치 않게 여긴 프랑코는 백작 대신 그 아들을 지명했고, 백작은 이를 받아들여 계승권을 포기했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프랑코는 외동딸 하나만 있었고 아들이 없어서 권력을 세습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프랑코 정권 말기에 이르면 서방과의 관계가 계속 긴밀해지면서 이전처럼 나라 문을 닫고 살기는 어려워졌기 때문에 아마 아들이 있었어도 세습은 안 했을 공산이 크다.

프랑코는 후안 카를로스 왕자가 어릴 때부터 그를 신경써서 교육했다고 하는데, 교육 내용이 실질적으로 죄다 군사교육. 후안 카를로스는 육해공군 사관학교 세 곳을 모두 졸업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프랑코는 장래의 임금님에게 스페인 전군의 장교단에 골고루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맥을 만들어 준 것. 덕분에 후안 카를로스 왕자가 왕위에 오른 뒤 군의 움직임에 민활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고도 하니 이건 꼭 깔 거리는 아니긴 하다. 후안 카를로스 왕자가 후계자 수업 시절 프랑코에게 정치를 가르쳐 달라고 하자 후안 카를로스가 통치할 때는 자신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통치할 것이기 때문에 자기 방식은 아무 도움이 안 될 거라고 말하며 거절했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후안 카를로스 국왕은 자신이 직접 들은 얘기라고 증언했다. 그런데 국왕 본인이 단순히 후계자 사이를 넘어 아버지와 떨어져 자란 본인은 프랑코에게서 부성애를, 아들 없이 산 프랑코 본인은 국왕을 아들처럼 아끼며 자랐기에 후안 카를로스가 그래도 어느 정도의 개념은 있어서 공적인 자리에서 대놓고 프랑코 옹호 발언은 안 해도, 사석에서 다른 사람이 프랑코를 비판하는 건 용납을 못할 정도로 개인적으로는 프랑코에 대한 친밀감이 크다. 반면 정치적인 이유로 사형과 수감을 비롯한 탄압은 그의 권력 말년이라고 특별히 더 누그러지고 온건해지고 이딴 거 없었기에 후안 카를로스가 프랑코의 실드를 치기 위해 한 발언이라 추정되고 있다.

1975년 노환으로 사망(82세)한다. 프랑코가 죽은 뒤 스페인은 입헌군주국으로 복귀했으며, 왕이 된 후안 카를로스 1세의 노력으로 군의 준동을 억제하고[21] 다시 좌파정부가 집권하여 민주화의 길을 걷게 되었으나 그 후유증이 너무 커서 스페인 국민들은 암묵적으로 침묵 협약을 맺어 그 당시의 일을 입밖에 내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다고 한다.

프랑코 사후 정권의 야만성이 드러났지만 과거사 청산 노력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현 사회당 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 스페인 정부는 독재 시절의 어두운 과거를 애써 외면했다. 과거를 보기보다 미래를 보고 살아야 한다는 이유였다. 지금은 과거사 청산이 진행중. 하지만 프랑코의 집권이 워낙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에 명암이 극명히 갈리는 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프랑코가 순 막장이었다면 아무리 국제정세가 어쨌건 저쨌건 간에 스페인이 존속할 수 있었을 리도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전쟁 이후에도 20만명 이상의 정치범들을 처형 또는 살해하고, 전쟁이 끝난지 40년이 다 되가는 집권 말년까지 숙청을 계속한 건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 범죄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정신나간 나치식 인종주의를 어설프게나마 받아 들여서 빨갱이들이가 되는 것은 열등한 유전적 요인이 있으니 그 형질을 물려 받은 빨갱이 자식들은 사회에서 정화해야 한다[22] 라는 명목으로 공화파 포로와 정치범들의 자식들을 막무가내로 납치하여 부모에게 격리시켰는데, 이 당시 스페인이 또 그걸 제대로 고아원에라도 보낼 능력조차 없었던 나라였기 때문에 부모에게서 강제로 떨어져 사회의 암지에서 버림받아 자라게 된 아이들이 30만명이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조직적인 애들 납치를 카톨릭 사제와 수녀들이 조직적으로 도왔다는 것이다! 더 황당한 것은 단순히 정치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미혼 여성이나 믿음이 약하다고(!) 생각되는 어머니에게 아이가 죽었다고 말한 후 그 아이를 '신앙이 투철하고 경제적으로 유복한'가정에 입양시켜버렸다는것. 더더욱 황당한것은 이런 애들 납치에서 나오는 돈에 맛들린 의사 성직자 수녀들이 조직을 짜서 90년대까지 했다는것이다..! 사회의 존경을 받는 소위 "사"자 돌림들이 이런짓을 하다니 ...

이 때문에 스페인 인구의 절대 다수가 카톨릭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은 반교회주의 또한 대중적으로 강한 나라다. 중세에는 종교재판을 통해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백성들을 탄압하였고, 근대에는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같은 이웃나라들이 산업을 발전시키고 부국강병을 이룰 동안 신(神) 타령이나 하면서 근대화를 등한시하는 바람에 스페인은 3류 국가로 주저앉았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23] . 특히 20세기에는 프랑코와 결탁하여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하며 온갖 부정부패를 저질렀으니 인식이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다. 성직자들의 '고아 장사'는 21세기에 이르러서도 현재진행형이며, 부정부패 스캔들이 터질 때마다 고위 성직자들이 연루되는 일이 다반사다(스페인은 유럽 내에서 국가청렴도가 최하위권[24] [25]). 덕분에(?) 현대 스페인 민중들은 이름은 죄다 동네 교구에 등록 되 있고, 깜짝 놀랄 때 마다 미사 때 성체를 의미하는 (영어로는 holy host) "오스띠아! (¡Hostia!)"라고 외치는 반면, 성직자들은 생산적인 일은 안하는 주제에 생산성 낮은 본인들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지만 권력자들과 결탁하여 감언이설을 뿌리며 더러운 돈이나 버는 암적인 잉여들로 보는 시선이 팽배하다.

다만, 카톨릭 교회 당사자들 입장에서도 할 말이 없는건 아닌게, 일단 위의 교회 상류층의 비리와 사회적 무책임함은 주교단 등 고위 사제들 중심으로 존재했지, 대다수 마을 사람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일반 신부들은 민중들과 마찬가지로 저런 착취적인 구체제의 희생자에 가까웠다. 그리고 당장 내전이 터지고 좌파들이 자기네 교회와 성직자, 수녀들을 테러하고 한 쪽에서는 스페인 전통이네 뭐네하면서 치켜세워주는데 좌파 편을 드는게 오히려 이상하다. 공화국 정부, 좌익 혁명 단체들과의 합의로 정치적, 군사적으로는 공화파에서 싸웠지만, 사회적으로는 구체제를 유지하며 군종사제 등을 유지했던 바스크 지방의 경우가 많은 점을 시사한다. 게다가 카톨릭 교회 내에서도 시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들었지만 자성이 없는 것도 아니라서, 일단 내전이 휩쓸고 간 이후 프랑코 정권 내부에서의 카톨릭 인본주의에 기반한 반정권 인사도 많이 배출 되었고, 피상적으로나마 현대 스페인 카톨릭 사제들 또한 이 시절의 얘기는 피하거나 아니면 소극적으로나마 잘못을 인정하는 경우가 많다. 스페인 내전과 연관 되어 스페인 사회 내에서 카톨릭 교회의 입지가 단단히 꼬여버린게, 나머지 카톨릭 교회 전반은 2차대전 당시 파시즘에게 대체적으로 무기력하게 협조한 과거를 적극적으로 반성하고, 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근대 세계와의 대립 보다 화해, 공존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했던 반면 프랑코 정권이 필요했던 카톨릭 교회는 바로 옛날의 반동적이고, 억압적이었던 그 모습 그대로의 교회였기 때문이다. 영화 등의 매체의 경우, 같은 우파쪽이라도 팔랑헤나 그냥 군인들은 가차없는 인간 말종으로 묘사하는 반면 그나마 성직자들이나 비교적 종교기사 코스프레를 하는 카를로스파는 개념으로 쳐준다[26]. 어찌 되었던 전통적인 신앙의 요새였던 스페인에서 벌어진 근현대사의 비극으로 현대 스페인의 카톨릭 교회의 위치 자체가 단단하게 꼬여버렸고, 이를 벗어나 발전하기 위해서는 카톨릭 교회가 프랑코 정권의 멍에를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50년 뒤 루마니아의 차우세스쿠가 한 짓을 반대편인 우파에서 선례를 남긴 것이다. 그리고 2차대전의 참화를 피한 거나 경제적 발전은 프랑코의 개인적 유능함보다 당시 국제적 여건의 도움이 더 컸다. 막말로 2차대전 이후 70년대 까지 약 30년의 기간은 서방이든, 공산주의 동구권이든, 이제 막 생긴 제 3세계든 세계 경제 자체가 급성장하던 시절이었다. 여기서 다른 유럽 국가들은 마샬 플랜의 원조를 받아 가며 1950년대 중반까지 전쟁 전 경제수준을 대부분 회복.[27] 1950년대 후반 쯤 되면 전쟁 전에도 상상치 못한 번영을 누리고 있었던 반면 스페인의 경우 프랑코와 스페인 내전의 낙인으로 인하여 왕따 신세를 면하지 못하다가 60년대까지 미국의 저널리스트 존 군터를 비롯한 동시대 관찰자들에게 '스페인은 지정학적으로만 유럽이지 차라리 아프리카에 속한다고 보는 게 맞다' 따위 소리나 듣고 있었다.[28] 그나마 본격적으로 서방 국가들의 경제성장이 시작되던 1950년대 후반에 타이밍을 잘 잡아 나라문을 연데다 그 이전에도 최소한의 경제 기반은 제대로 갖춰놓은[29] 덕택에 최악은 피했을 뿐. 다만, 여기서도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이 흡사 조선시대의 고종의 대안세력이라 할 수 있었던 개화파들이 지금 시점에서 볼 때 좀 맛이 갔다는 평가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스페인 역시 프랑코의 대안세력이라 할 수 있는 좌파세력이 경제적으로 볼 때 프랑코보다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오늘날의 그나마 정상적인 좌파들이나 옆동네의 민 전선과는 달리 이들은 말 그대로 소련을 추종하여 공산화를 모색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현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에게는 정치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아버지 같았던 인물이었는지라 프랑코의 외동딸 카르멘은 1975년에 공작(1st Duchess of Franco) 작위를 받았다.

전몰자의 계곡 성 십자가 대성당(Valle de los Caídos).
전몰자의 계곡 성 십자가 대성당 내부에 있는 프랑코의 무덤.

프랑코 묘역은 공화군 포로 1,200명의 강제노역으로 만들어졌다. 프랑코 비판자들은 그의 묘역을 역사교육센터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치의 만행을 반성하는 생생한 교육현장으로 변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모델로 삼고 있다. 이에 대해 프랑코 추종자들은 오히려 그의 묘역을 성역화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여담으로 완공 후 계산한 총 길이가 교황청에서 '이보다 더 크게 지을 수 없음'이라고 못 박은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조금 더 길다. 그래서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1미터 짧아지는 지점에 격벽을 짓고 '여기서부터가 성당입니다'라는 안내문을 붙였다고 한다. 바티칸은 무서운가 보지?

프랑코는 1975년 사망하면서 '모든 정적들에게 용서를 빌며 정적들을 진심으로 용서한다'는 유언을 남겼다.이러한 점을 봐선 그래도 인간성과 양심은 남아있었는 모양 . 본인 스스로 비인간적인 철권 독재정치의 문제점을 시인한 셈이다. 프랑코는 말년에 결장암, 동맥경화 등 합병증에 시달렸고 1975년 11월 3일 위수술을 받고 혼수상태로 17일을 버티다가 19일에 사망하고 20일날 그의 죽음이 공표되었다. 그 또한 포르투갈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와 마찬가지로 측근들이 마치 그가 살아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 결과 이미 죽은 사람이 스페인령 사하라를 모로코에 양도하는 협정에 서명하게 되었다.

그의 기일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기묘한 비화가 있다.

36.07.18 - 스페인 내전의 발발일
39.04.01 - 스페인 내전의 종전일

이 두 날짜를 각각 더하면

75.11.19 - 즉, 그가 사망한 날짜가 된다.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 집권기는 멕시코 영화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의 두 장편영화, '악마의 등뼈'와 '판의 미로'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토르 에리세집의 정령, 를로스 사우라마귀 기르기도 이 시대를 배경으로 다루고 있는 영화들.

스탈린이 그러했듯이 이 사람도 성인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스페인 내에서 존재한다. 사유는 빨갱이들로부터 스페인과 가톨릭을 수호했다는 이유. 물론 어디까지나 일부 이단이나 그러하고 마 교황청 및 가톨릭 주류는 상큼하게 씹는다. 애초에 카톨릭 교회 자체가 2차 바티칸 공의회를 겪으며 자유주의와 어느 정도 관계 회복을 하면서 프랑코 정권과 사이가 급속도로 냉각해졌으며, 정권 말기에는 카톨릭 교회 내의 반체제 인사들도 많이 배출 되었다. 프랑코 정권을 직접적으로 대놓고 긍정할 정도의 스페인 현지 골수 우익은 전통적 우파적 민족주의적 정체성의 일환으로 카톨릭 정체성을 강조할 뿐이지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바티칸과 교회 자체는 '자유주의와 결탁한 변절자' 비슷한 존재로 보고[30]. 당장 겨우 40년 전인 7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카톨릭 교회 입장에서는 대놓고 나치스 경례를 하며 프랑코와 시시덕거리는 톨레도 총대주교의 사진 같은 역사가 지금도 당장 검색하면 좌르륵 쏳아져 나오는 가능하면 지우고 싶은 깨끗치 못한 역사이기 때문에 (...) 서로 냉담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편이다.

여담이지만, 톨레도 역사박물관에 따르면 키가 145cm라고 한다. 참고로 티리온 라니스터역을 맡은 피터 딘클리지의 키가 135cm이고 상루저 취급받았던 추축국 지도자들의 키도 150cm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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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너무 긴 이름이라 발음 편의를 위해 강세 음절을 굵게 표시. 이 이름을 짧게 줄이면 프란시스코 프랑코 이 바아몬데(Francisco Franco y Bahamonde)가 된다. 스페인 사람들의 정식 이름에는 대부분 이런 식으로 부계/모계 성이 몇 대씩 어마어마하게 따라붙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Teódulo까지가 이름/세례명이고, 그 뒤가 전부 성이며 그 중에서도 Franco와 Salgado는 부계쪽, Bahamonde와 Pardo de Andrade는 모계쪽 성이다. 참고로 프랑코의 모계쪽 성은 대체로 갈리시아/포르투갈 계통의 가문명이다.
  • [2] 한국어로는 평상시 '대장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렸다는 정도의 의미. 이 별명은 에르난 코르테스도 같다.
  • [3] 여담이지만 이런 드립은 1937년 타임지에서도 나온 바 있다.
  • [4] 월간 항공에선 그를 유태인이라고 쓴 바 있다.
  • [5] 추측된다고 쓴 것은, 훗날 독재정권하에서의 스페인이 위대한 카우디요가 짝x알이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했을 리가 없으므로.
  • [6] 이 딸의 외손자가 카페 가문과 부르봉 가문의 전체 남계 후손의 수장이며(부르봉 왕가의 항렬로 볼때 후안 카를로스 1세보다 빠르다. 다만 여러 가지 이유로 국왕이 되지 못했다.) 현재 명목상의 프랑스 국왕인 루이 20세이다. 물론 현직 국왕이 아닌 왕위요구자이다.
  • [7] 프랑스의 그 부르봉 왕가 맞다. 다만 루이 14세가 억지로 옹립한 방계이며 이후 벌어진 일련의 전쟁으로 프랑스 왕으로서의 정통성은 상실했다.
  • [8] 원래 가톨릭 교회 전체를 공격하려고 했으나 그것은 너무 부담스럽다 하여 예수회가 주 타겟이 되었다. 앤터니 비버의 스페인 내전에 따르면 가령 토지나 재산 등의 몰수, 특권 박탈 등의 주 타겟이 예수회였다. 이 때 몰수당한 재산이나 특권 등은 프랑코 시대에 정부에서 돌려준다. 여기서 또 황당한 건 정작 반동적 극우 사상이 팽배했던 당대 스페인 카톨릭 교회 내부에서 그나마 가장 자유주의적이고, 인민친화적인 색체를 보였던 파벌이 예수회였다는 것이다. 사실 당시 스페인 좌파 지식인들 상당수 본인들 또한 역사적으로 종특수준으로 교육을 강조했던 예수회 교육 과정이나 기관 출신이었고, 당시 스페인 진보 교육계를 지배했던 조류였던 아나키스트 란체스크 페레르 이 가르디아의 에스꾸엘라 모데르나 (근대 학교) 운동 또한 예수회의 영심수련에 큰 영향을 받은 운동이었다. 역설적으로 스페인 카톨릭 교회 내에서 예수회의 존재감이 너무 강하다 보니 반대편에서도 단순히 카톨릭 교회의 상징적인 샌드백으로 골라버린 경우이다
  • [9] 다만 섣불리 프랑코 짓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는 게, 스페인 내전 동안 국민군이 사고로 잃은 군용기는 공화군에게 격추당한 군용기보다 많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직까지 비행 기술 자체가 새로운 기술이라 여러가지 기술적, 운용적인 측면에서 불안정했던 시대다
  • [10] 사실 정확히는 마드리드가 함락된 것은 아니었다. 공화파의 주요 거점 도시들이었던 바르셀로나 등이 함락되었지만, 프랑코의 군대는 평화협정이 맺어지기 전까지 마드리드를 완전히 함락시키지 못하고 시내에서 전진과 후퇴가 반복되는 시가전만 벌어지고 있었다.
  • [11] 이 청색 사단은 구성원 중 적지 않은 수가 친지, 친구 등이 내전 당시 공화파로 싸우다가 감옥에 같혀 있어 연좌제를 피하는 겸 그들의 형기를 조금이라도 줄여 보려고 참전했다는 비극적인 여담이 있다
  • [12] 프랑코는 페탱 원수의 제자였고, 페탱은 프랑코를 "유럽에서 가장 날카로운 검"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무렵 페탱은 그런 프랑코와의 관계를 고려한 프랑스 정부에 의해 스페인 대사로 파견되어 있었다.
  • [13] 사실 이건 프랑코의 책략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실상은 프랑코가 그때 히틀러를 만나기 위해 사용했던 교통수단이었던 스페인 철도가 워낙 개판이었다나(…).
  • [14] 히틀러는 형태야 어찌됐든 스페인이 참전하는 것이니 흔쾌히 수락하였다.
  • [15] 다른 얘기로는 연합국에서 프랑코에게 중립국인척 하면서 계속 독일을 지원하면 스페인을 추축국으로 인정하고 공격하겠다고 했고 프랑코는 히틀러에게 그대로 하소연하면서 청색사단을 빼돌릴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 히틀러도 만약에 스페인이 공격당하면 스페인을 지켜줄 상황도 아니고 스페인 방향에서 연합군이 밀고 올라오면 곤란해지니 차라리 친독일성향의 중립국으로 놔두는게 낫다고 판단해서 프랑코가 발을 빼는걸 허용했다는 얘기도 있다. 소련에게 밀리던 상황에서 스페인 사단만 빼갈게요 한다고 곱게 들어줄리도 없고...
  • [16] 내전 중에 사망한 숫자는 뺀 것이다. 프랑코 정권이 정권 말기 조직적으로 대대적인 기록 말살을 저질러 정확한 숫자가 파악될 날은 요원하지만, 근 몇년간 암매장된 집단 무덤이 대거 발굴되면서 희생자의 추정 숫자는 갈수록 늘고 있다. 같은 전간기~2차대전~대전 후 유럽에서 스탈린히틀러를 제외하면 이 정도 숫자의 자국민 학살을 저지른 독재자는 없다.
  • [17] 이를 두고 영국의 근현대 스페인사 전공 역사학자인 폴 프레스턴은 '스페인의 홀로코스트'라고 표현했다
  • [18] 애시당초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국가일 경우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쉽게 복구한다. 아프리카나 남아시아 국가들이 복구를 못하는 건 그걸 예전에 유럽인들이 만들어놓고 간 다음 새로 만들 능력 자체가 없기 때문.
  • [19] 유사한 사례로 이탈리아가 있다. 추축국의 일원이었던 이탈리아는 스페인처럼 UN에 가입하지 못하는 등 국제적으로 고립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한국전쟁 때 의료 지원단을 파견하였다.
  • [20] 이 와중에서도 스페인의 지배 계층은 그 나라 최고 대귀족 가문 중 하나인 알바 공작가의 여공이란 처자가 1947년, 나머지 유럽마저도 박살이 나서 스페인 전체가 내전 후 파괴와 고립에 떨던 시절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싸고 호사스러운 2천만 페세타나 쏟아부은 결혼식을 치르는 등, 마치 계급 투쟁의 승리를 과시하는 듯 막장 행보를 거듭했다. 프랑코 사후 처음으로 경제가 개판이 되자 갑자기 과거의 공화국 시절 적-황-자색의 깃발을 들고 쏟아져 나오는 현대의 스페인인들의 행동에는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바탕에 있다.
  • [21] 사실 1981년 2월 23일 의회가 점령당하는 쿠데타가 일어났으나 비교적 문제없이 진압할 수 있었다.
  • [22] 애초에 1934년 아스뚜리아스 혁명 진압과 내전 당시 모로코 식민지병을 끌고 와 공포 정책을 편 것을 두고 좌익에서 "왜 니들 우익은 천날만날 레콩키스타드립 치면서 스페인 정화 운운하는 주제에 그 스페인 노동자들 죽일 때는 왜 바로 그 무어인들을 끌고오냐?" 라고 따지자 우익쪽에서 변명이라고 꺼냈던 소리였다. 좌익은 생물학적으로 스페인인이 아니라는 소리.
  • [23] 다만 이게 또 역사학적으로 엄밀하게 말하면 정확하다고 볼 수도 없는 판단인게, 이 와중에서도 세계적으로 스페인의 명성을 높힌 문필가, 역사학자, 철학자들 상당수가 예수회 교육 과정을 받았거나, 예수회 학교 출신이거나, 아예 예수회 소속이거나 어떤 식으로든 카톨릭 교회와 연관이 되 있다. 한편으로는 멀쩡한 동네 후비며 이웃들을 서로에게 밀고하게 만드는 종교재판관들을 배출하는 반면, 반대로 또 의기 높고 헌신적인 봉사자들, 지식인들을 배출한 집단이 스페인 카톨릭 교회다. 스페인 역사에서 카톨릭 교회의 영향력은 단순하게 일방적으로 판단하기에는 너무나 깊은 존재이다
  • [24] 흔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한국 사회는 유럽처럼 청렴하지 못한 걸까?"하면서 안타까워 하지만, 명심하자, 유럽이라고 무조건 다 청렴한 건 절대 아니다. 사실, 유럽연합 가입국들 기준으로 대한민국은 그래도 딱 중간 정도는 된다. 우리나라보다 월등하게 청렴한 나라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독일, 영국 정도고, 대충 프랑스 정도까지만 와도 한국이랑 비슷비슷하다. 스페인쯤 되면 우리 기준으로도 정신나간 대형 사건들이 수시로 벌어진다. 대표적인 사례로, 무려 전 국왕의 부마(!)씩이나 되는 사람이 빈민층 자녀 스포츠선수 육성 재단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한국 돈으로 수백억 단위의 공금을 횡령하질 않나(...), 일개 도시의 경찰서장이란 인간이 있지도 않은 파출소를 있는 것처럼 꾸며서 허위로 예산을 타낸 다음 퇴임하면서 먹튀하질 않나... 또 다른 예로, 스페인 고속철도(AVE) 노선을 보면, 인구가 수백명에 불과한 마을이나 반경 수 킬로미터 이내에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각각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은 유리궁전역들이 무려 아홉 곳이나 되는데, 이게 다 지방 토호들이 시공사와 중앙정부 관료들을 구워 삶은 결과물이다. 부정부패가 어떤 식으로 나라살림을 갉아먹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 [25] 그리고 상기한 과거사 때문에 스페인에서는 이 비리와 부정부패를 지도하는 계층이 주로 왕족, 지방 옛 귀족 가문들과 결탁 된 금융권, 프랑코 정권의 비호 아래 큰 재벌 등 어디 어디 공작가 하면 대부분 국민들이 딱 알 정도로 밀착되어 있으며, 중앙 왕실에서 부터 동네 토호들까지 위아래로 고르게 썩은 물이 흐른다(...). 게다가 같은 입헌군주국가인 영국과 비교되는 면도 있기 때문에 국민들의 원성이 더욱 큰 상황이기도 하다. 영국 왕실은 대부분의 경비를 자체적인 관광 사업이나 각종 투자를 통해 자체적으로 충당하지만, 스페인 왕실은 전적으로 국민이 낸 세금으로 경비를 소모한다. 이러니, 영국 왕족들은 국민들에게 아쉬운 소리도 거의 안 하고 사회활동도 왕성하게 하고, 특히 왕자들의 경우는 험지에서 목숨을 걸고 군인으로서 솔선수범하는데 반하여, 자기네 나라 왕족이란 작자들은 핏줄 덕택에 국민 혈세로 놀고먹는 주제에 경제난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뒤로 한채 아프리카에서 흥청망청 초호화판 여행이나 하고 오고, 그런 왕의 부마란 인간은 상기한 바대로 가난한 아이들 스포츠 인재로 육성하라고 만들어 놓은 재단을 자기 돈주머니 마냥 예산이나 빼돌리기나 하니, 국민들이 분노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이렇기 때문에 2010년대 재정 긴축의 그림자 아래 사는 현대 스페인인들은 다른 나라 왕실들과 확연히 비교되는 자국 왕족들의 낯뜨거운 추태를 적나라하게 목격한 뒤로는 아예 이런 체제를 고착시켜 버린 프랑코 정권과 이를 승계한 현대 부르봉 복고 왕정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고 구 공화국 체제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아예 당장의 헌정 질서 자체를 부정하는 여론이 강하게 나오는 것이다
  • [26] 같은 발상, 반대편에서 소련의 지지를 받고 네그린과 결탁해 공화진영에서 트롤링을 일삼은 공산당은 우익에게는 당연히 집중적으로, 좌파 내에서도 극딜 당하며 현대 스페인 공산당은 의례적으로 '그 시절의 잘못 된 선택을 반성한다'라는 식으로 자아비판을 해야 하는 무언의 압력을 받는다. 반면 스페인 고유의 민중적 전통에서 시작하여 민중의 영웅관에 딱 부합한다는 문화적 버프를 잔뜩 받은 CNT나, 양쪽에서 버림 받은 시대의 피해자인 POUM같은 동네는 비교적 전반적인 칭송을 받는 편이고, 적어도 그 순수성은 이념과 무관하게 인정을 받는 편이다. 정작 공화국 정부의 숫적 대다수를 차지하는 사회주의 노동자당(PSOE)은 현대에 들어 너무 기성정당이 되 버려서 과거에는 공산당이나 CNT에게 휘둘렸고, 현대에는 그냥 무능하다고 까인다(...)
  • [27] 웃긴 건 한국도 전쟁 전 경제수준을 1950년대 중반 경에는 회복했다는 것이다. 물론 한국은 전쟁 전에도 가진 게 워낙 없어서 사실 한국전쟁 자체가 경제적으로 입힌 피해는 크지 않았다.
  • [28] 사실 원조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로, 그는 '피레네 산맥 이남은 아프리카다. 라고 스페인을싸잡아서 포르투갈까지 디스한 적 있다.
  • [29] 살라자르와 이 점에서 차이가 크다. 살라자르는 프랑코보다 온건했지만 산업화를 싫어해서(산업화로 나라가 발전해서 국민들이 의식을 트게 되면 정권이 망할 수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사례에서도 나타나며 아프리카 등지의 독재자들도 같은 이유로 나라를 적절히 가난하게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식민지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제조업 등 전반적인 국가 공업 육성과 인재 양성에는 무관심했다.
  • [30] 이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2차대전 이후로 명맥이 끊기질 않고 지금까지 내려오는 최후의 순수한(?) 파시스트들이라 할 수 있다. 프랑코 정권이 70년대 까지 워낙 오래 버티다 보니 다른 서방 국가에서는 엄두도 못낼 저런 공개적인 파시즘 옹호 세력이 많은 편이다. 프랑코 정권이 학술적 의미로 순수한 파시즘이 맞냐 아니냐는 정권 내부의 행정적 차원에서의 학술적인 문제지, 공교육 과정, 대민 선동 등을 통해 대중과 직접 만나는 차원에서의 프랑코 정권은 유대인들과 볼셰비키들의 사주로 스페인에 침투한 비국민 빨갱이들과 자유주의자들, 지역 분열주의자들에게 대항하여 단일 카톨릭 스페인 민족을 수호하는 성전이란 바람직하게 일관적인 전투적, 혁명적, 정화적 파시스트 운동으로 자신을 포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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