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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

last modified: 2015-04-03 12:12:26 by Contributors

Contents

1. 체코소설가
2. 규원의 시


1. 체코소설가


이름 Franz Kafka
생몰년 1883년 7월 3일 ~ 1924년 6월 3일
국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현 체코)
출신지 프라하

나는 문학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으로 만들어져 있다.[1]

책은 우리 내면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네.[2]

카프카는 몽상가였고, 그의 작품들은 꿈처럼 형상화되어 있다. 그의 작품들은 비논리적이고 답답한 꿈의 바보짓을 정확히 흉내 냄으로써 생의 기괴한 그림자 놀이를 비웃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 웃음이, 비애의 그 웃음이 우리가 가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최상의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카프카의 이러한 응시의 결과물들이 세계 문학이 낳은 가장 읽을 만한 작품으로서 평가하게 될 것이다. -마스 만

독어권 작가계의 끝판왕. 한국인이 일본문학의 끝판왕인 격 [3]
빈센트 반 고흐급의 시대를 초월한 천재.

1883년, 프라하에서 부유한 상인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였던 헤르만 카프카(1852~1931)는 밑바닥에서부터 자수성가한 억센 유대인 상인이었고, 그 때문인지 어릴적부터 병약하고 감성적이었던 프란츠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걸핏하면 아들인 프란츠에게 고함을 질렀고 마구 때리기까지하며 키웠는데 이 교육 방식은 프란츠 카프카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게 된다. [4]

프라하에 보존된 카프카의 생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카프카는 프라하에서 태어나 프라하에서 학교를 다니고, 프라하에서 직장 생활을 했으며 죽어서도 프라하에 묻힌 프라하 토박이였다. 어릴 때부터 병약했지만 독서를 즐겼으며, 성장한 후에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노동 보험 공단에서 일하게 된다. 가족들이 그의 창작 활동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수시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와중에도 가족들이 모두 잠든 밤 중에 글을 쓰는 등 틈틈히 저작 활동을 이어가 영감을 받고 하룻밤만에 변신을 완성하기도 한다. 말이 없고 무뚝뚝한 사람이었지만, 결코 불친절한 성격은 아니어서 재정적으로 곤란한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고 가난한 노동자들에겐 종종 친절과 선의를 베풀었다. 이 밖에도 인형을 잃어버려 울고 있던 이웃집 소녀를 위해 상상력을 발휘하여 편지를 작성해 여행을 떠난 인형에게서 편지가 왔다며 소녀에게 전달해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직장 생활과 창작 활동을 병행하기도 했는데, 글을 쓰는 것은 절대 돈벌이나 명성벌이에 이용돼어선 안 되며 오로지 사람과 예술을 위해서만 창작되어야 한단 본인의 신념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일했던 노동 보험 공단도 박봉이었지만 소외된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다는 사명감에 카프카 본인은 마음에 들어했고, 게다가 근무 시간도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까지로 비교적 짧아 책을 읽고 글을 쓸 시간이 난다는 장점도 있었다. 2시 경 회사 일을 마치고 귀가한 후 3시부터 7시 반까지 잠을 자고, 밤 11시경에 글을 쓰기 시작해 새벽 2시 혹은 좀 더 늦게까지 쓰기도 했다고. 업무로는 주로 기업의 이의 제기에 대한 반박문 작성, 보험회사의 일을 홍보하거나 법정에서 회사를 변호하는 일을 맡았다 한다.

지금에서야 카뮈사르트르에게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추앙받기도 하고 관련 논문이 우수수 쏟아져나오는 작가답게
[5] 널리 알려진 네임드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너무 시대를 앞서간 작품을 썼던 탓인지 전혀 알려지지 못했다. 애초에 본인이 스스로 발표한 작품이 몇 편 없었기도 하고... <변신>이라든지, <유형지에서>, <>, <실종자>, <시골 의사> 등 인류 문화사에 남을 명작들이 가득했으나 그 중 출판된 단편[6]은 극소수였고, 몇몇 평론가들이 카프카의 소설을 호평하기도 했지만 말 그대로 호평 수준에서 끝났을 뿐 그의 작품을 깊숙히 탐구하기엔 너무나 부족했다. 그나마 받았던 호평도 시간에 묻혀 잊혀졌다.

말년엔 신경 쇠약으로 발작까지 일으키던 카프카는 41살의 젊은 나이로 폐결핵에 걸려 요절하는데, 숨을 거두며 친구였던 막스 브로트[7]에게 자신의 모든 원고를 불태워줄 것이란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카프카 소설의 진면목을 알고 있었던 막스 브로트는 친구의 유언을 어기고 그의 원고를 모두 보존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재출판했다. 현재 프라하성의 황금 소로에 있는 그의 작업실은 서점이 되어있고 그 작업실에서 집필한 시골의사 등의 작품을 그 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다. 카렐교 근처에는 카프카 박물관도 있으니 한 번 들러보는 것도 좋다.

다만, 카프카의 장편들은 전부 미완이다. 스스로가 상당수 작품을 찢거나 불태웠기 때문이다. 심지어 길거리에서 자신의 글을 갈기갈기 찢어 휘날리면서 미치도록 웃다가 경찰들에게 끌려간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럴 때마다 그의 아버지는 한심한 아들이라며 정신병원에 강제입원시키려고 했지만 당시 정신과의사가 입원 치료는 필요없고 안정이 필요할 뿐이라고 하여 정신병원 강제입원은 면했다.

물론 처음에 출간된 카프카의 장편들도 성한 모습은 아니었다. 브로트가 카프카의 친필 원고를 독점하고 있었기에, 초창기의 판본들은 카프카의 원문을 막스 브로트가 편집한 형태로 나왔다. 브로트의 말로는 카프카와 나누었던 논의를 더듬어서 수정했다고 하지만, 다른 학자들에 의해 신빙성과 적합성을 항상 의심받았다. 브로트의 사후 카프카의 원고는 1961년 유족들에게 넘겨졌고, 다음해에 원고 실소유자인 여조카 마리안네 슈타이너의 요구대로 영국 독문학자인 M.패슬리의 중재에 의해 옥스퍼드대학 보들리언 도서관에 보존되었다. M.패슬리가 이 원고들을 토대로 브로트의 편집이 아닌 순수하게 카프카가 남긴 원고를 토대로 책을 간행한 것은 1982년부터의 일이었다.

아무튼 막스 브로트에게 작품 일부가 간 것이 행운인 셈. 카프카는 총 3편의 장편, <성>, <소송(혹은 심판이라는 제목으로도 출판되어 있다)>, <실종자(아메리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가 고쳤다.) > 등 총 3편의 장편을 썼으나, <소송>의 경우, 결말은 썼지만, 부분적으로 미완, <성>과 <실종자>의 경우 결말 자체가 없다. 그리고 특이한 것이, 이 3편 중 <성>, <소송>의 주인공의 이름이 K이며, <실종자>에서는 카알 로스만(Karl Roßmann)이라는 이름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는 훗날 작가들이 상당히 패러디하는 소재가 되기도 한다. 비록 카프카의 장편들이 모두 미완이기는 하지만, 읽을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평론가들은, 완성되지 않았기에 더더욱 완벽한 작품으로 카프카의 장편들을 꼽는다.

한편 체코에서는 지금도 체코 작가로 여겨야 할 것인가 독일 작가로 여겨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많다. 유대인인데다가 결정적으로 독일어로 작품을 남겼기 때문이다. 우리의 입장으로 보자면, 그는 중국계 일본인 작가로서 서울에서 일본어 작품을 남긴 것과 마찬가지인 셈.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온갖 유럽민족이 섞인 국가였던 탓이기도 했지만. 한 술 더 떠 이스라엘에서는 유태인이니까 이스라엘 작가라고 주장하는데 이건 해외에서 개무시당하고 있다.

그러나 막스 브로트와 사귀던 여성 에스터 호페(1906~2007)는 브로트가 공개하지 않은 카프카 여러 유품 및 친필 원고를 소유권을 주장하며 이스라엘이 그건 이스라엘 재산이라고 하여 국제적인 논쟁이 된 바 있다. 1988년 소더비 경매를 통하여 198만 달러라는 거액으로 소송(위에 나오듯이 심판이란 제목으로도 알려진) 친필 원고는 독일 현대문학 박물관이 구입하여 소장하게 되자 이스라엘은 인정하지 않아서 독일과 논란을 빚기도 했다.

텔아비브 도서관장 다비드 블룸버그는 유태인으로서 자랑인 카프카의 자료는 이스라엘이 공유하는 게 옳다는 말을 하다가 당시 뉴욕도서관장에게 개소리한다며 카프카 본인이 그런 유서라도 남겼냐 까이기도 했다. 이스라엘은 막스 브로트가 이스라엘에 카프카 모든 것을 기부한다는 걸 빌미로 주장하지만 호페는 살아생전,브로트가 남긴 유서를 공개하며 자신에게 상속권을 넘겼다고 반론했다. 호페가 죽고나서 호페의 딸들이 계속 주장하던 와중인 2012년 10월, 이스라엘 법원은 카프카의 남은 모든 건 이스라엘이 가져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으나 호페의 유족들은 항소하며 계속 맞서고 있다. 영국 작가 윌 셀프는 데일리 미러 지에서 이렇게 깠다.

"시오니즘의 성자로서 이스라엘이 카프카를 왜곡하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카프카 본인이 본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분노하고도 남을 일이다."

카프카의 소설은 실존주의자들에 의해 완벽하게 재발견되었다. 당대 프랑스의 지성이었던 샤르트르는 프라하의 병약했던 작가의 작품에 놀라워했으며, 극찬했다. <백년동안의 고독>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마르케스는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카프카 문학의 생명력은 국적과 세대를 넘어서서,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카프카의 인생과 문학관에서 소재를 따온 장편 <해변의 카프카>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체코에서 프란츠 카프카상을 수상했다. 현대 문학의 최고봉 중 한명이라고 불리오는 밀란 쿤데라도 그의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카프카에게서 따온 소재를 자주 언급하기도 했다.

카프카란 이름이 특이해서인지,[8] 유난히 이름이 잘 알려진 작가이기도 하다.(만화가 이우일은 고양이에게 이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카프카는 펠리체 바우어(1887~1960)란 여성과 약혼과 파혼을 반복하다가 결국 완전히 헤어지고 만다. 그 이후로 카프카는 다른 여자들과 여러번 연애를 하나 결국 결혼까지 골인하지는 못했다. 펠리체 바우어 역시 미국으로 건너가서 다른 남자와 결혼하지만 가난에 시달리는데, 카프카가 죽은 후 그가 일약 세계적인 작가가 되자 궁핍에서 벗어나기 위해 연애 시절 주고받았던 연애 편지를 모두 공개해 출판했다. 하지만 비난까지 덩달아 받아야했고 생각보단 큰 돈을 받지 못했기에 결국 그녀는 비참하게 살다가 미국에서 죽었다.

프란츠 카프카는 1924년, 6월 3일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카프카를 평생 괴롭혔던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는 아들보다 7년이나 더 살았다. 카프카는 죽을 때까지 아버지의 억압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아버지'란 위치가 가지는 폭력성이 언급될 때 자주 거론되기도 한다 [9]. 카프카의 소설 대부분이 가진 절망이 아버지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추정되는 해석 이론도 있으며, 심판(Prozess)와 같은 소설은 대놓고 억압적이었던 자신의 아버지를 그대로 투영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카프카의 여동생들은 나치의 광기를 피하지 못한 채,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가스실에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여담이지만 아인슈타인 평전에 따르면, 아인슈타인과 카프카는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이 체코를 방문했을 때, 한 유대인 문화 예술 모임 쪽에서 만났다고 하는데 무슨 대화를 주고받았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생전 카프카가 무명에 가까운 작가였다고 생각하면, 꽤 기적적인 세기의 명사들의 만남인 셈.

카프카에 대한 연구는 만약에 국적을 기준으로 할 경우에는(사실 이것도 현대의 국가를 소급할 경우에) '체코어문학'의 세부 분야로 연구가 진행되어야하는데 문학에서 주된 연구대상으로 다뤄지고 있다. 독일에서 출판된 독일문학사에서도 카프카는 독일작가로 기술이 되어 있다. 이러한 괴리가 나타나는 것은 기본적으로 작가론 연구에서는 그 작가가 사용한 언어를 기준으로 문학을 분류하기 때문이다.[10] 실제로 카프카는 남부 보헤미아 출신이지만 프라하 이주 후 독일계의 김나지움(독일의 인문계 중고등학교)을 거쳐 다니던 대학까지 독일계 대학이었다. 게다가 아직 정치적으로도 체코가 독립된 주권을 가진 나라가 아니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해있던 만큼 독일문화권과 크게 관련있는 곳에서 자랐다고 할 수 있다.[11] 하지만 독일 국적은 아니었으니 '독일작가'라는 말 보다는 '독일어권 작가'로 칭하는 것이 훨씬 정확하다.

1992년 유대인 출신 감독 스티븐 소더버그에 의하여 영화 『카프카』가 만들어진 적이 있다. 주인공이 카프카(제러미 아이언스가 연기했다)이긴 하지만 줄거리는 카프카 소설들의 소재로 꾸며진 허구의 내용이다.

피터 드러커에 따르면 카프카가 노동자용 안전모를 만들었으며, 당시 노동 보험 공단에서 일하던 카프카는 이 일로 1912년에 미국 안전협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했다.

여담으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내 주요 인물인 에드몽 웰즈의 외모가 카프카를 닮았다고 표현된다.

2. 규원의 시

제목만 본따 왔고, 내용 자체는 여러 가지 의미로 파격적인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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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내로라하는 저술가들의 이름에다 가격을 매기고 그것을 메뉴마냥 나열했다는 것만 하더라도 충격적인데 그들 중에서도 특히 문학가들은 싸구려로 취급되는 데서 문학이 현대에서 얼마나 찬밥을 받고 있는가를 표현하고 있다.
프렌치 카페 값싸도 많이 팔리는 게 안팔리는 것 보다는 낫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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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필적감정사가 카프카의 엽서를 보고 필적의 주인공은 문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 말에 대한 카프카의 대답
  • [2] 친구인 오스카 폴락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 [3] 프란츠 카프카는 독일어를 모국어로 하는 유대계 체코인이다.
  • [4] 때문에 문학사에서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라고 그러면 헤르만 카프카가 자주 언급된다.
  • [5] 수전 손탁은 이런 상황에 대해 카프카가 집단적으로 폭행당하고 있다고 대놓고 깠다.
  • [6] 장편은 남아있는 소수마저 전부 미완성이다.
  • [7] 1884~1968/ 이스라엘 건국을 도우면서 시오니즘 찬양과 팔레스타인 학살을 찬양하는 글귀를 쓰면서 이스라엘 바깥에서 매장당하고 오로지 카프카 친구로서 카프카 소설을 발굴하여 알린 사람으로만 알려졌다. 노엄 촘스키는 나치에게 당한 유태인이 나중에 팔레스타인에서 나치처럼 구는경우로 이 막스 브로트를 언급하기도 했다.
  • [8] 체코어로 Kavka는 검은 까마귀란 뜻. Kafka와 비슷한 발음이다. 사실 일반적인 까마귀 보다는 작고 비둘기 만하고 목부분이 회색인 검은새로 프라하에서 비둘기만큼 많이 볼 수 있다.
  • [9]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글을 보면 아버지의 양육 방식부터 시작해서 카프카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가득하다.
  • [10] 희대의 명성을 남긴 러시아 출신의 작가 나보코프의 롤리타가 노문학이 아닌 영문학으로 분류되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 [11] 보헤미아 지역 문화 자체가 오래전부터 신성로마제국의 부속왕국으로 있었던만큼 독일문화권의 영향을 굉장히 짙게 받았다. 더군다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붕괴 이후에도 1945년 이전까지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는 아예 독일계 주민들이 집중 거주하고 있었기때문에 체코의 일부 지역은 독일어권 지역이나 다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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