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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침공

last modified: 2015-04-11 22:39:40 by Contributors


1940년 독일 주간 전시뉴스

"내 결정은 번복되지 않는다, 때가 되면 프랑스를 공격한다, 나는 승리할 것이며 죽을 각오로 도전하겠다"

"전쟁은 어두운 방의 문을 여는 것과 같다, 무슨 일이 일어날 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돌프 히틀러

Contents

1. 개요
2. 배경
3. 독일의 전략
3.1. 우리 어쩌면 좋지?
3.2. 만슈타인의 "낫질(Sichelschnitt)" 계획
3.3. 불완전한 만슈타인 계획의 채택
4. 연합국의 전략
4.1. 우리는 공격하기 싫어요!
4.2. 딜(Dyle) 계획
4.3. 영국의 입장
5. 양측의 전력과 그 배치
5.1. 독일군
5.1.1. A집단군
5.1.2. B집단군
5.1.3. C집단군
5.2. 연합군
5.2.1. 프랑스군 총사령부
5.2.2. 북동 작전구
5.2.2.1. 제1집단군
5.2.2.2. 제2집단군
5.2.2.3. 제3집단군
6. 황색 상황(Fall Gelb) - 1940년 5월
6.1. 아르덴 공세전야
6.2. 첫 술부터 삐끄덕거린 아르덴 공세
6.3. B집단군의 저지대 침공과 연합군의 대응
6.4. 스당 돌파 - 전세를 결정 짓다
6.4.1. 19기갑군단의 스당 돌파
6.4.2. 프랑스군의 느렸던, 너무도 느렸던 역습
6.4.3. 41기갑군단과 15기갑군단의 마스 강 돌파
6.4.4. 승패가 갈리다: 프랑스군 최후 역습 실패
6.5. 강철의 대격돌 - B집단군의 딜방어선 공격
6.6. 대서양을 향한 질주, 그리고 제동
6.7. 연합군의 국지적 역습, 그리고 됭케르크
7. 적색 상황(Fall Rot) - 1940년 6월
8. 결과

1. 개요

프랑스 침공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연합국의 프랑스 침공, 보불전쟁 당시의 프로이센에 의한 침공,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면 침공(슐리펜 계획)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침공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나(더 거슬러 올라가면 백년전쟁카를 5세의 침공 등도 있다) 흔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것을 지칭한다고 보면 된다. 상대편엔 대부분 독일이 들어가 있다.(...)

1939년 9월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의 진영 간 최초 전면전.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의 대독 선전포고 이후 가짜 전쟁에 이어 벌어진 사건이며, 1940년 5월 10일부터 프랑스가 독일과 정전협정을 맺은 동년 6월 21일까지의 시간 동안 벌어진 전투였다.

폴란드 침공이 전초전 또는 개막식이었다고 한다면, 프랑스 침공은 유럽과 대서양 전선에서의 본 게임이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서술하는 것은 관점에 따라 중일전쟁을 2차 대전의 시작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2. 배경

1939년 9월 1일, 아돌프 히틀러가 다스리는 제3제국은 지난 6개월 동안 단치히의 영유권을 두고 외교적 분쟁을 빚은 끝에 결국 폴란드를 군사적으로 침공하였다. 당시 히틀러는 이 전쟁을 일종의 무력시위, 단순한 퍼레이드 정도로 여겼다. 그 이유는 아래에서 서술되는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독일은 프랑스에 비해 병력의 규모 및 훈련도, 장비의 양과 질, 군수보급체계 등 뭐 하나 우위를 점한게 없었다. 영국/프랑스와의 본격적인 전쟁은 꿈도 못 꾸는 상황이었다. 히틀러와 나치는 해군의 Z계획 등 군사력 증강과 군수공업 시설 건설이 완료되는 1945년경을 본격적인 프랑스 침공 시점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실제 독일의 무기생산은 제공권 상실로 연합군의 엄청난 폭격에 시달리면서도 1944년 가을에 최고점을 찍는다. 1930년대 후반부터 건설하기 시작한 군수공업시설이 그때야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1939년 폴란드 침공은 본격적인 세계대전 개전이 아니라 체코 병합과 같은 무력시위 성격의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틀러의 생각으로는 폴란드와는 제대로 된 전쟁을 치르겠지만 1939년 3월 체코의 완전 합병 이후 군비증강 및 대독 적대정책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한 영국 및 프랑스는 이 무력시위에 깜짝 놀라 그 동안의 적대정책을 버리고 독일의 패권을 인정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한 마디로 내가 만만한 애 싸대기를 제대로 한 방 날리면 나머지들은 그거 보고 겁먹어서 다같이 손들겠지라는 레벨의 어이없는 미래 예측이었다. 또는 믿지 않았더라도 이런 논리로 군부 및 정치, 경제계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회의적인 입장의 사람들이라도 제발 그렇게 되길 간절하게 빌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렇게 안 됐다간 독일이 망할지도 모르는 위기였다. 특히 반히틀러 입장의 군인들이 더 그랬는데, 당시 독일군은 양면전쟁은 절대 하지 마라. 했다간 본진 털린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1939년 9월 3일부로 독일은 양면전쟁을 시작했다(…). 사실 히틀러도 양면전쟁의 말로를 잘 알고 있어서 소련과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었지만... 이때는 반 히틀러 진영조차 정말 두손두발 다 모아 히틀러의 말이 현실이 되거나, 아니면 그가 한시라도 빨리 제정신을 차리기를 기도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1938년 초에는 오스트리아 문제로 한 방 먹었고, 그해 가을에는 체코슬로바키아 문제로 또 한 방 먹었으며, 덤으로 1939년 초에는 슬로바키아의 분리독립과 체코의 완전 합병으로 최후의 일격을 먹은 상태였다. 따라서 이미 영국과 프랑스는 아무리 늦어도 1939년 초, 빠르게 보면 1938년 가을 시점에서 머지않아 독일과 일전을 치르지 않을 수 없다고 믿었고, 이에 가능하면 자기들이 직접 군대를 보내지 않고도 독일과 싸워 이길 수 있을 만한 강력한 동맹국을 찾고 있었다. 그 동맹국으로 뽑힌 것이 폴란드였다. 당시 폴란드는 독립 직후의 혼란기에 소련을 침공해서 승리를 거둔 역사도 있었기 때문에 중부 유럽의 군사강국처럼 보였다. 이 때문에 폴란드와 군사동맹을 맺으면서 당시 네빌 체임벌린 영국 수상은 폴란드를 가리켜 "그 강력한 나라"라고 일컬을 정도였다. 하지만 폴란드 주재의 영국-프랑스 무관들은 폴란드의 한심한 군사적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폴란드군은 모래로 만든 성 또는 외화내빈이라고 본국에 보고했다. 특히 공군이나 기갑부대는 절망적이었으며, 육군의 주력은 창기병대였고, 공군은 고작 200여대[1]의 전투기를 보유했으며, 그나마 복엽기가 대부분이었다. 통신이나 수송 또한 매우 전근대적이었다. 그러나 영-프 정치가들은 친서방적인 폴란드 체제[2][3] 에 일종의 환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반소적인 폴란드 정부의 눈치를 보아 소련과의 동맹에 매우 소극적으로 나왔다.

소련의 막심 리트비노프 외교부 장관은 는 영-프-폴-소로 이뤄진 독일 포위망을 구성하려 했으나, 소련과의 역사적으로 악연이 있던 폴란드는 소련과의 협력을 막무가내로 거부했다. 그러자 영프는 폴란드의 눈치를 봐서 소련과의 동맹을 주저했고, 소련이 제안한 집단안보체제에 건성으로 반응했다.[4] 스탈린은 애써 회담장을 마련했는데, 영-프 협상단이 무성의로 일관하자 격노했고, 특히 독일이 주변국을 침략할 경우[5] 소련은 100여개사단을 동원하여 막겠다고 하며 이에 대해 영국은 몇개 사단을 내놓을 수 있냐고 묻자, 영국이 파견할 수 있는 지상군이 불과 4개 사단이란 걸 듣고는 아연질색했다. 스탈린은 이들은 소련과 독일을 싸움 붙인 후에 어부지리를 기대하는거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 시작했다.[6] 결국 그는 영-프와의 협상이 결렬되자 반독일적인 리트비노프를 해임하여 독일에 화해의 제스처를 보냈고, 이를 감지한 독일은 외상 리벤트로프를 보내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기에 이른다.

이러한 외교는 나중에 서방측에게 치명적인 실수가 되었다.

어찌되었든 폴란드를 동맹국으로 만든 영국과 프랑스는 역시 당시의 독일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큰 소리로 어흥하고 고함치면 폴란드가 기가 팍 살아서 독일의 뺨을 제대로 한 방 갈길 것이고, 그럼 독일은 깨갱하고 꼬리를 내릴지도 모른다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영국과 프랑스는 9월 3일 정오 독일에 앞으로 5시간 내에 폴란드 침공을 중지하거나 침공을 중지하겠다는 확실한 보장을 하지 않으면 선전포고를 하겠다는 최후통첩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점에서 히틀러 및 제3제국 수뇌부의 반응은 이랬다.

내가 통역을 마치자 그곳은 침묵으로 휩싸였고...(중략)...히틀러는 돌처럼 굳은 채 가만히 전방을 바라보았다. 훗날 알려진 것처럼 흥분하거나 미쳐 날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의자에 미동도 없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영원처럼 느껴진 잠깐 동안의 정적이 흐른 뒤, 갑자기 히틀러는 창백한 모습으로 창가에 서 있던 외무장관 리벤트로프를 분노에 찬 눈빛으로 노려보며 이렇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건가?"
마치 리벤트로프가 영국의 반응을 잘못 알렸다고 지적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리벤트로프는 목멘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아마 프랑스도 머지않아 우리에게 동일한 내용의 최후통첩을 보낼 것 같습니다."(…)
괴링은 나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번 전쟁에서 또다시 패배한다면 과연 신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실까?"

- 히틀러의 통역실장 파울 슈미트의 회고 -

(출처 : 칼 하인츠 프리저 저 "전격전의 전설(Blitzkrieg-Legende)" 2-1장)


사실 이런 상황은 이미 독일 국내에서도 매우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폴란드 침공을 전후해서 군부에서의 반 히틀러 움직임이 본격화되기 시작했으며, 이런 군부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히틀러는 반복적으로 폴란드 침공과 관련해서 서방세계, 특히 영국을 자극하지 않을 것임을 군부에게 반복적으로 다짐해 왔었다. 심지어 히틀러의 정책을 성실히 따르면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대영/대프랑스 방어전을 계획하던 참모본부 참모장교들에게 히틀러가 "님들 그러다가 영국이나 프랑스가 그거 알면 걔네들이 그거 핑계로 쳐들어올지도 모른다고! 그거 님들이 책임질거임?"이라면서 펄펄 뛰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저런 상황이 마침내 현실로 다가오자 전 독일이 데꿀멍 모드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히틀러로서는 이미 엎지른 물을 주워담을 길이 없었다. 히틀러는 현대 역사가의 눈으로 보면 말 그대로 벼랑끝 전술, 배째라 전술을 구사해서 극적으로 주변국의 양보를 이끌어내는 도박사적 행위로 자신의 인기를 유지해 왔으나, 당시 독일 국민들은 그런 히틀러의 배째라 정신을 강력한 영도력과 탁월한 정치적-군사적 식견에 힘입은, 적어도 서너 수는 미래를 내다보는 철저한 전략결과물이라고 믿었다. 이것을 조장한 것이 히틀러와 나치당, 정확하게는 괴벨스로 대표되는 당시 나치독일의 선전부서였기 때문에, 이제 와서 그동안 한껏 부풀려놓은 히틀러의 위대한 식견을 함부로 깔아뭉갤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 벌어질 일은 히틀러의 실각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미 양면전쟁이 확실시되고 프랑스가 9월 7일부터 16일까지 1차로 11개 사단, 최종적으로는 총 41개 사단을 휘몰아 자르란트로 30km나 밀고 들어온 상황이었다. 사실, 프랑스군도 상황은 엉망이어서 자르로 진격하는 임무에 동원된 41개 사단 중에서 제대로 완편된 사단은 고작 3개에 불과했지만, 프랑스군에 맞선 독일 제1군 예하 사단들은 아직 편성이 제대로 되지도 않아서 중장비는 전혀 없는 말 그대로 총만 든(경우에 따라선 소총도 없는) 군중에 불과했다. 군복조차 조달되지 않아 소총도 없이 집에서 들고 온 삽을 하나 메고 독일 국방군이라고 스탬프를 찍은 완장(...)만 찬 병사들마저 만 명 단위로 있었을 정도. 당연히 이들은 프랑스군 침공에 대해 직접적인 저항은 거의 하지 않고, 단지 도시와 마을을 소개하고 주요 길목에 막대한 양의 지뢰를 매설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프랑스의 군사적 압력에 무력하게 굴복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9월 16일을 기해 프랑스가 전면 동원령을 발령함에 따라 이제 절대로 전쟁은 피할 수 없어 보였다.

그나마 히틀러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자르를 침공한 프랑스군은 9월 17일을 기해 철수를 시작, 마지노선 서쪽의 원래 주둔지로 돌아가 버렸으므로 히틀러에게는 기회가 다시 주어졌다. 폴란드와의 전쟁을 서둘러 끝낸 다음 프랑스를 격파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폴란드 점령이 완료된 직후인 1939년 10월 9일을 기해 히틀러는 총통지령 6호(Führer-Anweisung N°6)를 발령, 프랑스 침공 계획을 공식화했다.

물론 아직 확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독일만 그런 게 아니라, 프랑스도 영국도 그랬다.(…)

3. 독일의 전략

3.1. 우리 어쩌면 좋지?

1939년 10월 폴란드 전토가 독일과 소련에게 분할 점령되고, 개전 직전에 있었던 독소 불가침조약 체결로 독일은 일단 양면전쟁 상황은 간신히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독일은 현재 총병력 450만 중 실제 전투력을 가진 병력이 200만을 넘지 않는 상태에서, 해외 주둔군을 포함해서 정규군만 200만이고 단기간에 3~400만 이상을 추가 동원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프랑스를 상대로 어떻게 싸워야 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히틀러는 어차피 빠른 시간 내에 병력을 충분히 늘릴 수도 없는 지금, 아직 프랑스가 동원을 마치기 전에 서둘러서 먼저 치고 보는 게 낫다며 10월 중, 늦어도 11월 말 침공을 군부에 명령함으로서 독일 국방군 참모본부를 대 패닉에 빠트렸다. 하지만 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쥐를 잡듯이 히틀러의 생각도 일리는 있었다. 이는 프랑스의 동원체계는 상당히 굼뜬 편이어서, 소집된 예비군이 전투부대로서 편성되는 데는 수 개월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1939년 11월 시점에서 독일군과 프랑스군이 전장에 투입 가능한 정규군 및 소집완료 예비군 병력합계 자체는 200만 대 200만으로 서로 거의 같았다. 다만 프랑스에게는 군복무를 마친 예비군 400만 명과 해외주둔군 150만 명이 더 있었고, 독일에게는 훈련되지 않고 총도 없는 소집대상 민간인 500만 명만 있었다.(...) 즉, 제1차 세계대전 식으로 생각하면 첫 한 방에 프랑스를 집어먹지 못하면 다음에 먹히는 건 독일이었다. 하지만 독일군도 제대로 편제가 완성된 것이 아니라서 서로 준비없이 양군이 충돌하면 독일군이 발릴 가능성도 높았다는 것이 문제였다.[7]

그래서 독일 군부는 필사적으로 히틀러를 설득, 그나마 그해 겨울 동안은 침공하지 않을 수 있었다. 가짜 전쟁의 소강 상태는 바로 이런 독일 수뇌부의 판단에 따라 독일이 설설 기었으며, 아울러 프랑스 및 영국 역시 아직 병력 동원이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 가능한 한 독일의 선공으로 전쟁이 시작되어 소모전을 유도, 독일이 지친 다음에야 공세로 나가는 1차 세계대전식 전략을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독일은 아직도 제대로 가동되지 않고 있던 군수산업 가동율을 높여 부족한 장비와 탄약을 보충했다. 당장 폴란드 전역이 종결된 시점에서 독일 국방군이 보유한 탄약은 전군에 필요한 기본 예비탄약의 30~50% 미만이었다. 당시 기본 예비탄약은 전투 2~3회를 치르는 탄약이었으므로, 사실상 전군이 딱 한 번 싸우면 끝나는 탄약 밖에 없었다. 여기에 더해서 폴란드 침공 당시 소모한 각종 기갑, 기계화장비를 보충하는 귀중한 기회를 얻었다.

이 기간 동안 독일 국방군 참모본부는 히틀러가 총통지령으로 하달한 프랑스 침공을 현실화시키기 위한 작전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개전 전까지만 해도 프랑스로 쳐들어가면 우리는 망한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던 참모본부는 가능하면 프랑스 침공 없이 전쟁이 끝나기를 원했고, 이 때문에 1939년 10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제출된 대 프랑스 작전계획은 허술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어린애가 봐도 실패할 게 뻔해 보이는 작전계획 이상의 작전안을 만들지 못한다면, 히틀러도 전쟁을 포기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섞인 일종의 태업이라는 견해도 있을 정도다.

그런데도 히틀러는 정 안 되면 이대로라도 치고 나가겠다는 주장을 걸핏하면 밝혔고, 이 때문에 참모본부, 특히 참모총장이었던 프란츠 할더 상급대장은 히틀러를 내가 직접 쏴죽여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정도까지 몰렸다. 원래 할더는 1938년부터 히틀러에 대한 저항했으며, 1939년 11월에는 실제로 쿠데타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할더 본인의 소심함과 더불어 순간적인 판단착오로 쿠데타 계획은 무산되었다. 이때의 쿠데타 멤버 중에 훗날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당시 프랑스에서의 사태를 주도한 슈퇼프나겔 장군이 있었고, 할더도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이후 이 1939년의 반란 기도가 발각되어 체포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당연하게도 할더는 말로 끝내지 않고 나름대로 준비도 진행했는데, 한스 그로스쿠르트 대령도 이런 암살음모모의에 가담한 사람 중 하나였다. 이 무렵 할더에게 히틀러를 폭탄으로 암살할 전문가를 알선하라는 비공식 명령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때의 폭탄테러 계획은 훗날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에서 현실화되었다. 그로스쿠르트 대령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1943년에 수용소에서 죽었지만, 그가 남긴 일기장에는 이런 대목이 적혔을 정도다.

"눈물을 흘리며 할더가 말했다. '여차하면 그를 죽여버리려고 요 몇 주 동안 히틀러에게 갈 때 주머니에 권총을 넣어갔다네.'"

이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점점 흘러갔고,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희망은 이미 1939년 10월 이후 끝장이 나 있었다. 이제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됐고, 반 히틀러 진영마저 결국 이렇게 된 바에는 어떻게든 이겨 볼 수 밖에 없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히틀러를 제거한다면 그 뒤에나 할 수 있는 일이었고, 일단은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독일군은, 적어도 참모본부 차원에서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감을 못 잡고 있었다. 당장 프랑스 침공에 투입할 부대는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나고 있었지만, 한 마디로 있는 군대를 모조리 올인해서 2~3개 집단군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확실해져 있었지만,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할까에 대해서는 계속 우왕좌왕중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할더가 그렇게 전전긍긍하고 있을 동안, 1939년 10월에 작성된 프랑스 침공작전 초기안에서 조공부대로 결정된 A집단군(Heersgruppe A)의 참모장이었던 어떤 인물이 누구든지 보기만 해도 "이놈 미쳤군!"이라고 외칠 만한 기상천외하고 위험한 작전계획을 수립, 제출했다.

그의 이름은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었다.

3.2. 만슈타인의 "낫질(Sichelschnitt)" 계획


1939년 10월에 최초 작성된 프랑스 침공계획, 이른바 "황색 작전(Fall Gelb)[8]"의 초안은 슐리펜 계획과 기본적으로 같은 구성으로, 바다에 인접한 우익에 주공을 두어 우익에서 좌익으로 크게 선회, 벨기에 및 북프랑스에서 방어에 나설 프랑스군을 포위섬멸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프랑스군이 한 번 당했던 일을 또 당할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당시 슐리펜 계획의 기본 전제는 프랑스가 현재의 마지노 선 일대에서 독일에 대한 대규모 침공을 감행한다는 전제 하에 발생하는 회전문 효과를 이용해서 프랑스군 주력을 포위한다는 것이었는데, 1940년의 프랑스군이 그때의 프랑스군처럼 적극적으로 공격해 올 가능성 또한 낮다는 것도 문제였다. 한마디로 회전문 효과는 기대 못하고, 오히려 강력한 적 주력부대와 정면충돌을 피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면 아직 취약한 독일군은 참패를 면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 군사적 문외한의 눈에도 자명해 보일 정도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군사적으로는 순간적 재치조차 없다고 독일군 내부에서 비웃음을 사고 있던 히틀러조차 "이래서야 이길 리가 없잖아! 다른 데에서 주공을 더 늘리지 않으면 안돼!"라고 대번에 계획안을 반려시킬 정도였다.

이에 11월에 원래의 주공 남쪽에 새로운 주공을 두었지만, 이는 그저 단순한 전력의 분산만을 부를 뿐 기존의 계획과는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여기에 히틀러는 히틀러대로 더 남쪽으로 세 번째 주공을 만들면 어떨까?라는 의견을 제시, 안 그래도 부족한 병력이 셋으로 쪼개지는 대참사가 벌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진짜 문제는 하마터면 이 계획이 진짜로 채택될 뻔했다는 것이었다. (...) 아깝다

그런데 바로 이 세 번째 주공이 자리잡게 된 기존의 조공부대인 A집단군에 바로 그 만본좌가 있었다. 만슈타인은 이렇게 세 번째 주공이 설정되는 시점에서, 그가 A집단군 참모장으로서 현장에 도착했던 1939년 10월 이후 가능성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한 가지 계획을 입안하게 되었다. 임무형 지휘체계에 근거, 일선 지휘관 및 그 참모부가 그 상급사령부, 경우에 따라서 최고사령부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 작전행동을 입안, 실행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었던 독일군이었기에 가능했던 계획입안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아무런 이름이 붙지 않았던 이 계획은 다음의 4단계 발상을 거쳐 기획되었다.

  • 첫째로, 현재의 작전계획은 너무나도 뻔하기 때문에 적도 이런 상황에는 당연히 대비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쉽게 실행 가능하고 합리적인 계획을 세운다면 이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 그리고 그 승산은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적이 차마 생각도 못할 기상천외한 작전으로 적의 허를 찔러야 한다.

    • 마지노 선의 건설이 바로 이런 상황의 유도를 위한 것이었다. 마지노선은 단순한 바보짓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지노 선이 없는 상태에서라면 독일군은 이런 뻔한 정면결전이 아닌 다른 방향의 기동전을 시도할 여지가 비교적 많았다.

  • 따라서, 적이 주공이라고 생각할 부분에 실은 조공을 두고, 적이 조공이라고 생각할 부분에 주공을 둔다. 적이 주공이라고 생각할 부분은 원래 계획의 주공인 벨기에 북부 방면이고, 적이 조공이라고 생각할 부분은 벨기에 남부와 룩셈부르크 일대, 즉 아르덴 고원 일대이다.

  • 이렇게 병력을 운용할 경우, 적절한 기만의 결과로 적이 아군의 조공을 주공으로 착각하여 벨기에로 기동하게 할 수 있다면 아르덴으로 기동한 진짜 주공은 적의 주력이 벨기에로 진입하는 틈을 타서 회전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텅 빈 진공으로 빨려들어가듯 프랑스군의 배후로 진입, 벨기에로 들어간 프랑스군을 완전 포위섬멸할 절호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

  • 단, 이 경우 시작부터 적의 주력과 접촉하게 될 벨기에 방면에 비해서 적의 후방으로 기동해야 하는 주공부대는 그 기동거리가 과격하게 늘어나고, 또한 현대전은 1차 세계대전 때와는 달리 피아 신속한 부대 전개 및 역습이 가능하기 때문에 가능한 한 높은 기동력과 강력한 전력을 가지고 적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깊숙이 돌파 가능한, 연속적인 전투 기획 및 실행이 가능한 작전술 제대로서의 기갑부대가 주공이 되어야 한다. 이들은 신속하게 아르덴을 돌파, 북프랑스까지 수백 킬로미터를 진격해서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 프랑스와 벨기에 및 영국 유럽원정군 주력을 단기간에 포위섬멸해야 한다. 시간이 너무 걸리면 적이 정신을 차리고 반격을 시도할 가능성이 크고, 역습에 대응할 만한 예비전력을 확보해서 이를 기동시키기엔 현재 독일군의 역량부족이 적나라하게 노출될 것이다.

    • 이와 같이 종심이 깊고 크게 호를 그리는 우회기동의 형태가 낫 같고, 덤으로 낫으로 단숨에 모든 풀을 베어버리는 것과 같은 효과를 노렸다는 점 때문에 이 작전계획을 낫질에 비유한 것이 유명해졌다. 그런데 앞에서 멋지게 독일어로 쓰긴 했지만, 사실 원래 낫질 비유를 처음 쓴 건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이고, 당연히 원래는 영어 표현(Sickle Cut)이었다.

만슈타인은 이와 같은 작전을 기획, 자신의 사령관이었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상급대장에게 제출했다. 견실하고 신중한 지휘관이었던 룬트슈테트는 만슈타인의 기획안을 지지하지 않는 입장이었으나, 실현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는 동의하여 이를 국방군 총참모부에 보고했다. 원래 만슈타인은 원래 그의 능력 및 독일 국방군 내부의 연공서열로 볼 때, 사실은 차기 육군참모총장이 되야 할 인물이었다. 그러나 1938년의 인사파동으로 그 기회를 놓쳐 일선 집단군 참모장이 되었고, 이 때문에 당시 룬트슈테트를 포함한 주요 지휘관들은 만슈타인이 능력에 비해 보잘것없는 한직에 있다는 인상을 받고 있었다. 이것이 당시 만슈타인이 세운 개념안 수준의 계획을 참모본부에 보고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받아든 사람은... 바로 프란츠 할더 상급대장.

하지만 할더는 매사 모두 합리적이고 안전빵이며 정교한 계획을 선호하며, 그런 성격 때문에 수학문제 풀이가 취미일 정도였다. 작전이 안 풀리거나 뭔가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수학문제집을 꺼내들고 문제를 푸는 게 취미인 사람이니, 이런 사람이 볼 때 도박성 짙고 적이 보기에도 그렇고 아군이 보기에도 일견 비합리적인 작전계획을 들고 나오니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특히 만슈타인의 당시 계획에는 심각한 결점이 두 개 있었다. 이는 기동전이 가지는 본질적인 약점이기도 하다.

  1. A집단군의 원래 임무는 마지노선 방향에서 독일군의 측면을 찔러 들어오는 프랑스군의 역습을 저지하는 데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공이 출발할 경우, 자칫하면 주공의 출발점에서부터 주공부대가 측면 위협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기동부대의 기동이 빠르면 빠를수록 보호해야 할 측면이 점점 넓어지는데, 과연 이 넓어지는 측면을 제때 보호 가능하도록 병력을 전개할 기동력이 있는가? 아니, 아예 병력이 있기나 한가?

  2. 더구나 작전술적 차원, 즉 연속적인 군단급 전투를 기획할 수 있는 야전군 사령부급의 기갑부대 운용은 아직까지 경험이 없거니와 심지어 이론적 토대조차 다져져 있지 않은 말 그대로 미지의 영역이다. 그와 같은 완전 미지수의 작전술 제대를 별안간 편성하고, 더구나 그들에게 국가의 명운이 달린 주공을 맡긴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도박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만슈타인도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고 있었고, 특히 2번 문제에 있어서는 독일 기갑부대의 아버지로 불리는 하인츠 구데리안 등과의 의견 교환을 통해 어느 정도의 이론적 기반을 다져나가는 중이었다. 또한 1번 문제에 대해서는 역시 만슈타인답게 정말 깨는 방법으로 해결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얼마 안 되는 병력을 또 쪼개서 남쪽에서 적이 반격을 하기 전에 그쪽을 주공이라고 착각하도록 제대로 한 방 치고, 적이 혼란스러워하다가 다시 반격으로 집중하려는 시점에 적의 북쪽 주력을 섬멸한 기동부대가 서둘러 남하해서 그놈들을 또 측면에서 포위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첫 번째 작전을 그대로 한 번 더 재현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단계까지의 계획안이 나오기 전에, 만슈타인은 모가지당했다.(...) 사실 그럴 만도 했던 것이, 참모본부의 계획에 반기를 든 것으로도 모자라서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도박성 짙은 작전을 일개 집단군 사령부의 사령관도 아니고 참모장이 제출했으며, 덤으로 원래 조공부대였던 집단군이 주공부대로 둔갑하는 것이 언뜻 보기에는 화려한 전공을 탐내는 기회주의적 작태로 보일 수도 있었다. 여기에 만슈타인과 참모총장 할더는 군부 내의 파벌에서 서로 반대 파벌에 속했으므로, 파벌 단위의 경쟁심리 역시 동시에 작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만슈타인은 지난 폴란드 침공 당시의 공훈을 인정받았다는 식으로 후방에서 한참 편성 중인 38군단 군단장으로 전출되었고, 그의 후임으로는 이런 도박성 짙은 기동전은 꿈도 꾸지 않을 견실하고 신중한 사람이 배치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 직전 만슈타인의 어느 참모장교가 38군단 예하의 사단참모로 전출되는 것을 보고 만슈타인은 "앞으로 큰 싸움이 있을 텐데 후방으로 가면 공훈은 언제 세우나?"하고 농 섞인 위로를 했는데, 겨우 며칠 뒤에 자신이 바로 그 군단 군단장으로 부임하는 바람에 그 참모장교랑 마주보고 데꿀멍했다.(...)

3.3. 불완전한 만슈타인 계획의 채택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 40년 1월 이후가 되면 반 히틀러파 역시 작전을 최대한 성의있게 짜서 어떻게든 전쟁부터 이기고 봐야 한다는 데 동의할 수 밖에 없게 되어 있었다. 여기에 1940년 1월 10일 공군 소속 참모장교였던 헬무트 라인베르거 소령이 기존의 황색작전 계획서를 휴대한 채 실수로 벨기에에 불시착해 버리는 불상사가 생겼다. 물론 소령은 계획서를 파기하려 했지만 파기되기 전에 벨기에군에게 체포되었다. 덕분에 기존 작전을 폐기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함으로서 새로운 작전안의 기획이 불가피해졌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참모총장 할더의 눈에 다시 띈 것이 바로 만슈타인의 작전 초안이었다.

할더 역시 견실하고 신중한 용병을 선호하는 타입이라고는 하나, 이와 같은 기상천외한 작전 자체는 일단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고려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특히 할더와 같은 고급 참모장교는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대안이라 해도 일단은 검토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였고, 또한 그 개인적으로도 선호하는 바였다. 바로 그런 이유로 최초 작전안 건의 당시에는 이를 반려했었고, 상황이 단단히 꼬이고 보자 새삼 그 가능성이 높아진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여기에 만슈타인 역시 부하인 헤닝 폰 트레스코프 대령이 히틀러의 보좌관인 슈문트와 친했다는 것을 포함한 개인적인 인맥을 통해 자신의 계획을 히틀러에게 직소, 히틀러는 그 본래의 도박사 기질에 딱 맞는 모험적인 작전안을 듣자 그 세부 내역의 이해 수준과는 상관없이 이의 채택을 기정사실화했다. 마침 할더 역시 이 시점에서 만슈타인 계획으로 프랑스 침공에 임할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던 탓에, 결국 만슈타인 계획은 프랑스 침공 계획으로 정식 채택되었다. 그러나 역시 이 작전의 원래 기획자인 만슈타인은 자리를 옮긴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작전 기획에 더 이상 참가하지 못했고, 작전의 세부 기획과 실행은 프란츠 할더 상급대장, 그리고 새로운 주공부대로 부상한 A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 상급대장과 그 휘하에 새로 창설될 작전술 제대로서의 기갑부대 지휘관이 맡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생겼다.

  1. 주공을 맡아야 할 A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 상급대장은 알아주는 신중파다. 그런 경우 과감한 참모장을 달아주면 적극성을 보강할 수 있었을 텐데, 일단 A집단군이 조공이라는 기존 계획에 따라 인사이동을 하는 바람에 하필이면 신임 참모장으로 임명된 조텐슈테른은 신중한 사람으로 정평이 난 인물이었다. 즉 집단군 전체가 위에서 내린 임무를 이행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기를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2. 또 여전히 기갑부대의 작전술 제대 편성은 이론상으로도 제대로 정립된 게 없고, 할더가 아무리 이 계획의 가치를 인지했다 해도 다른 모든 지휘관들까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상태에서 웬 기갑이라는 듣보잡 병과가 전쟁을 혼자 다 치르도록 내버려두기엔 작전술 제대 지휘관으로서의 자존심이 용서하지 않는다. 안 그래도 임무형 지휘체계에 따라 자율사고 및 행동에 익숙해진 독일군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3. 게다가 기갑부대의 작전적 가치는 아직 입증되지 않았으나, 야전군 사령부 입장에서는 적어도 군단급 기갑부대는 야전군 작전행동의 한 국면에서 강력한 전술예비대로서 운용 가능한 세력임이 이미 입증돼 있었다. 원래대로라며 자기에게 주어져야 할 강력한 기갑부대가 웬 듣보잡 작전술 제대를 만드느라 어디론가 끌려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게 된다면, 그 지휘관은 날개를 잘린 꼴이 된다. 안 그래도 병력이 부족해 죽겠는 전장에서 그나마 강력한 부대까지 뺏긴 지휘관들이 과연 어떻게 나올 것인가?

이런저런 문제점들 때문에 결국 할더는 만슈타인이 세운 최초의 계획에서 그다지 큰 진보를 이루지 못한 채, 오히려 부분적으로는 퇴보한 기획안을 세울 수 밖에 없었다. 이중에서 가장 큰 퇴보는 바로 기갑부대의 작전술 제대, 즉 기갑군(Panzerarmee)를 창설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기갑군은 바르바로사 작전 때까지도 결국 현실화되지 못했고, 1941년 10월에야 처음으로 창설되었다. 일단 기갑부대를 작전술 차원에서 운용할 수 있도록 새로운 지휘부를 창설하는 것까지는 어떻게든 할 수 있었으나, 다른 야전군 사령관들의 눈치를 보느라 정식 야전군이 아닌 일종의 편법, 즉 다수의 군단을 예하에 가지고 있으나 야전군은 아닌 특수목적 집단인 기갑집단(Panzergruppen)을 만들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사령관 역시 여러 가지 이유로 기갑부대 관련 경험이 거의 없는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기병대장을 앉힐 수 밖에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말 그대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는데, 여기에다가 할더 자신도 작전이 실패할 가능성이 너무 높다고 여겼기 때문에 클라이스트 대장의 제1기갑집단(Panzergruppe 1, 일명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이 처음 계획된 주공에서 필요한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경우 그냥 기갑집단을 해체, 원래 계획대로 각 기갑군단을 야전군에 분산 배치해서 각 야전군의 핵심 기동예비로 전환 운용한다는 배수진을 치고 말았다. 한 마디로 클라이스트에게 "작전제대 사령관 타이틀을 계속 유지하고 싶으면 제대로 성공시켜라!"라는 강력한 엄포를 놓음과 동시에, 만슈타인 계획의 중요 전제 중 하나인 기갑부대 단독의 종심 깊은 돌파 및 기동이 실패할 경우에도 일단 전통적인 프로이센식 기동전을 시도할 여지를 남겨두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퇴보는 현실적으로 만슈타인 계획의 가장 큰 위협인 돌파 기갑군 측면에 대한 마지노선 일대에서의 역습 위협에 대한 대책이 부실하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는 해결하기 위해선 적극적인 공세밖에는 답이 없었는데, 기갑부대는 전력을 다해 벨기에의 프랑스군을 포위섬멸해야 했으므로 여기에 돌릴 충분한 기갑부대가 없었다. 이 때문에 할더의 기갑부대 종심기동은 취약한 소부대에 의한 특정 거점의 수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불안한 구조가 되고 말았고, 이 문제의 타개는 결국 작전진행 기간 동안 있었던 몇몇 지휘관의 임기응변과 더불어 어느 용감한 부대의 맹활약을 통해 제한적인 수준으로 이루는 데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그런 부족한 조치들에도 불구하고 만슈타인 계획은 1940년 3월 이후가 되면 독일 국방군의 프랑스 침공 계획으로서 확실하게 다져졌고, 이런저런 크고 작은 작전상 마찰 때문에 적지 않은 장애를 겪긴 했지만 결국 프랑스 침공에서 독일군이 승리를 거둔 결정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하도 프랑스에서 제대로 대박을 친 나머지, 독일의 국가전략 자체가 꼬여버리는 결정적인 원인이 돼 버렸다.

4. 연합국의 전략

4.1. 우리는 공격하기 싫어요!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유럽의 군사강국, 그중에서도 육군 강국이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사실상 유럽에 존재하는 열강 중에서 제대로 된 징병제를 유지하는 단 둘뿐인 강대국이었다. 게다가 나머지 하나는 이탈리아였다. 독일도 허울뿐인 징병제는 유지했지만, 보유 가능한 군사력 규모 제한이 너무 커서 실질적으로는 모병제나 다를 바가 없었다. 당연하게도 상비군 규모 역시 방대하기 때문에 필요할 경우 소집 가능한 예비역 병력은 말 그대로 가공할 수준으로, 당시 전 세계를 통틀어서 프랑스보다 규모가 큰 육군을 가진 군대는 오로지 인구빨로 밀어붙이는 중국과 화력,생산력으로 밀어붙이는 소련뿐이였다.

실제로 프랑스는 1939년 9월 개전 직후 제1차 동원령을 통해 1940년 5월 시점에서 프랑스 본토 및 전 식민지를 통틀어 총 600만에 달하는 대군을, 그것도 최소한 병사의 기본 훈련까지는 다 끝난 상태로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같은 시기 독일은 프랑스보다 인구가 훨씬 많았음에도 1차대전 막바지에 참전했던 50대 초반~중반 아저씨까지 100만 단위로 소집했다. 문제는 조만간 손자가 태어날 배나온 아저씨가 1917~1918년에 20살이 돼서 군복무를 1년 정도 했다는 이유로 이병이나 일병, 잘해야 상병으로 소집된다고 생각해 보라. 장교도 아니고 병사, 그것도 일선에서 헉헉대며 뛰어야 할 소총수로 말이다. 당연하게도 숫자에 비해 전력이 되기 힘들었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런 무리수를 동원하고도 겨우 500만을 확보했고, 그나마 최소한의 훈련이라도 거친 병력은 300만도 채 되지 않는 병력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이런 상황에서, 대독 전선의 주력을 맡을 군대는 누가 뭐래도 프랑스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인에게는 잊고 싶은 악몽이 있었다.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도 프랑스는 서부전선의 실질적인 주력이었고, 그만큼 많은 희생을 치렀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는 징집적령기에 있는 18~27세 남성의 27%가 전사했고 부상자를 합치면 이보다 더 높은 수치가 희생되었다. 이로 인한 인구 손실은 사실상 복구 불가능한 규모였다. 더구나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인구증가율이 낮은 나라였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 발발 시점에서 프랑스는 오히려 1차 세계대전 때보다 소집 가능한 인구가 더 줄어든 상황이었다. 이런 추세는 사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 후반까지 계속되었고, 그에 비해 전통적인 프랑스의 가상적국 독일의 인구는 점점 늘어만 갔다. 비록 경제적 혼란과 베르사유 조약의 제약으로 독일의 군사력은 여전히 무시 가능한 수준이었지만, 독일의 잠재력은 이미 192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프랑스를 거의 압도하는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프랑스는 그렇게 생각했다.[9][10]

그리고 이 문제 때문에 프랑스는 대독 포위망의 구성에 전력을 다했다. 프랑스 혼자서 독일과 장기전을 벌여 이기기는 어렵고, 단기전으로 결판을 내려면 공격이 불가피한데 이는 막대한 희생을 각오해야 하므로 이 역시 감수하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독일이 딴맘을 못 먹도록 주변국 모두와 힘을 합쳐 독일을 포위하면 어떨까? 그것이 프랑스의 초기 대독 전략이었고, 이런 전략에 따라 프랑스는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 독일과 접경하고 있는 중부 및 동부 유럽의 약소국들과 군사동맹을 체결했다. 목표는 독일이었고, 독일이 어느 한 나라와 전쟁을 시작하면 나머지 나라들은 다들 힘을 합쳐 독일을 박살낸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런 공수동맹 관계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독일이 어느 한 나라를 공격할 경우, 나머지 나라들은 독일을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프랑스는 자기들이 공격을 하기 싫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과 동맹관계를 맺은 것이었다. 따라서, 프랑스가 바란 것은 독일이 프랑스를 공격하면 체코와 폴란드가 독일의 뒤통수를 쳐주는 것이었지, 독일이 폴란드나 체코를 공격하면 프랑스가 독일의 뒤통수를 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실제로 다른 동맹국이 프랑스를 위해 희생하기만을 바란 것보다는 그런 위협을 가하는 것만으로도 독일이 알아서 쫄기를 기대했던 것이지만, 만약 독일이 똘끼를 충만시키면 그때부터는 답이 없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벌어진 것이 바로 오스트리아 합병, 체코 합병이었고, 이 두 번 모두 프랑스는 결국 중립국과 동맹국을 배신하고 말았다. 이 두 번의 배신은 결국 더 이상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 없고, 아무런 친구도 남지 않은 채 프랑스 혼자 대독 전선을 떠맡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심각한 위협으로 돌아왔고, 결국 프랑스는 폴란드만은 저버리지 못했다. 그 결과 벌어진 것이 1939년 9월의 자르 침공과 이후 계속된 가짜 전쟁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제대로 공격을 할 수도 없었다. 프랑스는 독일이 여전히 군사적으로는 장기간에 걸쳐 군사력을 재건해야 하는 약체 상태고 아울러 경제공황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점, 아울러 프랑스 역시 경제적으로 혼란스럽다는 문제 때문에 1차 세계대전 이후 군사력의 현대화를 등한시한 상태였다. 여기에 프랑스군은 1차 세계대전의 전훈을 거쳐 화력만 충분하다면 방어가 공격을 쉽게 압도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결국 프랑스는 1939년 자르 침공을 중간에 그만뒀던 것이다. 특히 1935년 군비재건 선언 이후 독일군의 신속한 재건을 본 프랑스는 독일의 잠재력이 본격적으로 드러났다고 여겼고, 실은 내실이 없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는 독일이 실은 자기들과 대등 이상의 군사력을 이미 가지고 있으며, 그런 적을 상대로 섣부른 공격에 나섰다가는 자칫 프랑스의 멸망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안 그래도 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는 섣부른 공격 때문에 벨기에 방면을 텅 비웠고, 이 때문에 하마터면 개전 후 단 6주만에 전쟁에서 질 뻔했었다. 그래서 프랑스는 독일의 주공 방향이 확실해지면 그쪽을 먼저 틀어막고, 적의 공격력을 최대한 받아낸 다음 약체화된 독일군을 상대로 조심스런 공격을 가한다는 계획을 확정했다.

그리고 프랑스군은 이런 전략에 맞는 아주 중요한 장점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마지노 선이었다. 마지노선의 존재는 프랑스군으로 하여금 주력군을 프랑스-독일 접경이 아니라 북쪽, 독일군의 우회돌파 코스로 예상되던 벨기에 방면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들었다. 만약 독일군이 마지노선으로 정면 공격을 한다면 그거야말로 기대할 일이고, 우회로를 잡아 공격해 온다 해도 적을 확실히 틀어막을 수 있는 충분한 예비 병력이 존재했던 것이다.

더구나 프랑스는 독일과의 국경선 전체를 마지노 선으로 차단한 데 그치지 않고, 1차 마지노 선 공사가 끝난 뒤 추가적인 확장 공사를 거쳐 1940년 현재 벨기에와 프랑스 국경선 일대에서도 비교적 낮은 밀도나마 요새선의 구축이 진행 중인 상태였다. 이는 벨기에와 프랑스 사이 국경선은 본래 방어 대상이 아니었다. 이 선에 요새를 구축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벨기에가 독일의 침공을 받는다 해도 보호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감안하고서도 이루어진 조치다. 한마디로 독일군이 설사 아르덴을 포함한 중부전선의 돌파를 시도한다 해도, 최강의 수준은 아니긴 해도 비교적 잘 구축된 요새선을 한 번 뚫긴 해야 하는, 그것도 독-프 국경의 마지노선과 달리 적의 포화를 무릅쓰고 마스(Maas) 강을 도하한 다음 바로 강변에 줄줄이 늘어선 콘크리트 벙커로 육박하는 말도 안 되는 강행돌파를 성공시켜야 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4.2. 딜(Dyle) 계획

프랑스는 독일이 프랑스를 공격할 경우 어디에서 공격을 감행할 것인가를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일단 독-프 국경선은 이미 마지노 선의 1차 구축이 끝나 있으므로, 아직 충분히 많은 병력을 절약하는 효과는 기대할 수 없지만 일정한 병력만 배치해 두어도 독일의 공격을 확실히 저지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게다가 실제로는 당시 프랑스군이 프랑스 본토에 두고 있던 병력의 1/3에 해당하는 36개 사단을 배치했으니 마지노 선에 한해서 병력과 장비부족문제는 없었다. 따라서 독일은 이런 강력한 방어선에 정면 공격을 하지 않으리라 여겼다. 오히려 해 오면 고맙겠다는 것이 프랑스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마지노선 바로 북쪽의 룩셈부르크 및 벨기에 남부 방면 역시 프랑스군은 방어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우리라 여겼다. 바로 프랑스와 벨기에의 국경 일대에 흐르는 마스 강 중류를 방어선으로 삼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고, 여기까지 오기 위해서는 지형적으로 매우 복잡하고 기동부대의 신속한 전개가 어려운 아르덴 삼림지대를 돌파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아르덴 삼림지대의 존재는 공격부대가 충분한 밀도로 전개하는 것을 방해하리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독일군이 아르덴 삼림지대를 주공으로 삼으면 그만큼 방어하기도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울러 마스 강변에도 마지노선의 연장선이랄 수 있는 장갑벙커가 다수 설치되고 있어 방어에 유리하다는 점도 감안되었다. 그리고 이런 점을 독일군 상층부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슈타인의 최초 계획이 나왔을때 할더가 '이색히 돌았구나'라는 격렬한 반응을 보이면서 만슈타인이 계획과 함께 바로 묻힌 것이다. 프랑스와 독일의 군상층부는 보불전쟁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지리적 유불리와 유사시 침공루트에 대해 몇십년동안 준비해왔기 때문에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벨기에 중북부 및 네덜란드에 이르는 넓은 구간이었다. 이 지역에는 프랑스와 벨기에의 국경 사이에 충분히 넓은 자연장애물로서의 하천이 없었고, 아울러 지형 역시 매우 평탄해서 대군을 일시에 투입할 만한 조건이 확보되는 곳이었다. 또한 결정적으로, 이 구간은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주공으로 삼았던 바로 그 방향이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군은 독일군이 벨기에 북부를 거쳐 주공을 가해 오리라고 여겼다. 이 양상에 대응하여 프랑스가 설정한 방어선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었다. 그 첫번째는 벨기에/네덜란드 일대에 진입하지 않고, 됭케르크 일대에서 마지노 선에 이르는 프랑스 국경선 전체를 감싸는 양상이었지만 이는 1차 세계대전 때 벨기에군 단독으로 독일 주공의 저지를 맡겼다가 벨기에군 전체가 사실상 연합군 전열에서 탈락하다시피하는 사태를 불렀던 전훈을 무시하는 행동이었기에 사실상 실행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2차대전 개전 이후 프랑스의 최종 목적은 영불해협에서 알프스까지 끊기지 않는, 전체적으로 독일의 강력한 공격을 격퇴할 수 있는 튼튼한 방어선의 구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최종적으로 프랑스군 총사령관 가믈랭은 초기안, 즉 프랑스-벨기에 사이의 국경선을 방어한다는 방어지침 대신 프랑스군 주력을 벨기에로 진입시켜 벨기에 안, 정확하게는 마스 강과 연결된 다른 하천을 방어선으로 삼아 대략 22개 사단으로 추산되는 벨기에군과 힘을 합쳐 독일의 주공을 격퇴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벨기에 영내에 방어선을 설정하고 독일군의 침공을 저지한다는 목표 하에 제시된 방어선은 크게 두 개였다. 그 첫번째는 투르네-에스코(Escaut) 강-앤트워프로 이어지는 것이었고, 이것을 에스코 계획 혹은 플랜 E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두번째 안은 나뮈르-딜(Dyle) 강-앤트워프를 잇는 것이었고, 이것은 딜 계획 혹은 플랜 D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개전 초기 프랑스군 총사령관 겸 연합군 총사령관이던 가믈랭은 본래 에스코 강에 연한 방어진지를 점령하는 에스코 계획을 실행할 예정이었고, 딜 계획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는 의도는 없었다.[11] 하지만 폴란드 전역 이후 독일군과의 군사적 긴장 상태가 길어지고 벨기에군이 성공적으로 방어진지를 점령하면서 가믈랭은 딜 계획을 통한 방어선의 연장이 충분히 가능하리라는 판단을 내렸고, 최종적으로 연합군은 11월 9일 열린 회의를 통해 딜 계획을 확정지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는 벨기에 중부에서 발원해서 앤트워프로 이어지는 하천인 딜 강을 따라 프랑스 북부에 전개된 주력부대를 신속 전개, 이 강을 방어선으로 삼아 브뤼셀 전면, 벨기에 영토의 거의 중앙을 가르는 방어선을 형성하여 독일군을 막아서기로 결심했다. 또한 벨기에는 원래 중립국이었음에도 1914년에 독일군에게 영토의 대부분을 점령당하는 치욕을 겪었기에, 프랑스의 이런 작전계획을 인정했으며, 여전히 중립을 고수하고 있어 독일의 침공이 없이는 준 동맹국인 프랑스와 영국군의 자국 영토 진입을 거부하는 입장이던 벨기에군 역시 프랑스군의 방어 효율을 높이기 위한 각종 방어시설의 구축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사실 벨기에로서는 이런 프랑스의 작전계획에 협력하지 않으면 1차 세계대전 때처럼 최후의 항전거점으로 요새방어선이 구축된 앤트워프로 전군을 철수시켜 독일군의 우회기동로를 열어주면서 자국 영토의 70% 이상을 독일군의 점령지로 내줄 수밖에 없었으므로 사실상 부득이한 선택이었다. 당장 독일군은 1차 세계대전 때 벨기에 도시에 들어와서 사소한 저항이 있었거나 있었다는 핑계를 대고 도시에 불을 지르고 아이를 포함한 민간인들에게 무차별 발포하는 일을 숱하게 저질렀다. 이 문제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전 세계에 큰 충격을 날렸으며, 사실상 2차 세계대전에서 있었던 독일군의 점령지 만행의 서곡이랄 만했다. 희생자는 2차 세계대전의 그것에 비해 적었지만, 강도 자체는 인종차별 문제(즉, 유대인 문제)를 제외하면 절대 낮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벨기에군으로서는 죽기살기로 싸워서 독일군을 격퇴한다는 옵션을 배제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군은 벨기에 한가운데의 딜 방어선에서 독일군을 맞서 싸운다는 계획을 확정했다. 그리고 이 방어선을 점령함으로서 프랑스군은 중요한 이점을 세 가지 얻었다.

  1. 딜 강을 따라 전개하는 방어선은 에스코 계획에 따른 방어선/프랑스-벨기에 국경보다 훨씬 짧으므로[12], 그만큼 많은 병력을 좁은 전면에 집중해서 방어력을 높일 수 있다.

  2. 벨기에가 완충지대가 되기 때문에 독일군에 의한 북프랑스의 주요 공업지대 공격 가능성이 극히 낮아졌다. 현대전은 물량전이므로 북프랑스의 보호는 프랑스군이 간절히 필요로 하는 물량을 확실히 지켜낼 수 있다.

  3. 만약 벨기에에서 독일의 공격을 받아내고 역습을 실시할 수 있게 된다면, 벨기에에서 네덜란드를 거쳐 전진하면 바로 독일의 주요 공업지대인 루르를 공격할 수 있게 된다. 현대전은 물량전이므로 루르 공격은 독일의 물량을 결정적으로 빼앗을 수 있다.

이어서 이런 딜 계획의 당위성을 입증하는 사건이 하나 터졌다. 바로 1940년 1월 10일에 발생한 라인베르거 소령 사건으로, 이때 벨기에군은 독일군이 벨기에 영내로 2개의 주공을 투입하는 작전계획서 전문을 입수했다. 그리고 이 주공 중에서도 특히 무게가 실린 것이 바로 딜 방어선으로 가해지는 두 개의 강력한 기갑부대 제파였다. 이 두 개의 제파는 당시 독일군이 가지고 있었던 10개 기갑사단 중 9개가 투입되며, 다른 하나는 네덜란드에 투입될 예정이었으므로, 사실상 이 사단도 네덜란드 제압이 끝나면 딜 방어선에 투입된다고 봐야 했으므로, 딜 방어선의 사전 구축 계획은 매우 시의적절한 조치가 되었다. 또한 강력한 독일군 기갑부대의 신속한 돌파에 맞서기 위해서는 프랑스군 역시 강력한 기갑부대를 최대한 빨리 벨기에 영내로 진입시켜 그들의 딜 방어선 선착을 저지하고, 서둘러 후속 부대를 딜 방어선에 투입해서 확실한 방어선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군은 딜 방어선보다 더 동쪽으로 프랑스군이 보유한 유일한 군단급 기계화부대인 프리우(Prioux) 장군이 지휘하는 기병군단(Corps de Cavalerie)을 돌입시켜 강력한 독일군 기갑부대에 맞선 지연전을 실시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또한 이때 노출된 독일군 작전에서 네덜란드 역시 독일의 공격을 받게 된다는 점, 독일이 주력을 벨기에 침공에 투입하기 때문에 네덜란드가 예상보다 오래 버틸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는 점에 착안한 프랑스군은 딜 방어선의 북쪽 끝에서 네덜란드까지를 연결하는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른바 브레다(Breda) 계획이었고, 이를 위해 프랑스군은 북동부전선 전체의 전략예비대로서 보유하고 있던 야전군인 제 7군을 벨기에 북부로 투입하기로 했다. 안 그래도 프랑스는 체코와 폴란드의 포기 때문에 벨기에로부터 확실한 믿음을 사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벨기에의 신뢰를 확보하자면 한층 더욱 적극적으로 대독 전선에 나서야 했다. 이것이 브레다 계획의 수립 배경이었다.

원래 딜 방어선은 그다지 길지 않은 방어선이었고, 이 때문에 프랑스군은 원래 벨기에가 가진 22개 사단에 프랑스군 10개 사단과 영국군 5개 사단을 투입하는 것으로 충분하리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딜 방어선에서 연결되는 새 방어선을 구축한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20개 사단이나 되는 병력의 추가 투입을 결정한 것이다. 이는 사실상 프랑스군이 가지고 있었던 마지막 예비병력이었다. 물론 만약에 대비해서 이런 기동은 독일군의 주공이 확실히 벨기에로 향할 때에만 실시하도록 돼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와 벨기에군, 네덜란드군이 딜-브레다 선에 전개된다면, 상황에 따라서는 벨기에 중앙에서 가해지고 있는 독일군의 주공을 뿌리째 잘라버리는 결정적인 수단으로 써먹거나, 심지어 상당한 전력을 북쪽으로 돌려서 독일의 루르를 공격함으로서 독일의 산업생산을 완전히 박살내기를 기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만약 독일이 전혀 다른 작전으로 프랑스를 공격한다면, 그때 프랑스군 최고사령관은 말 그대로 대사건의 방관자로 전락하기 십상이라는 위험부담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때 프랑스군은, 사전에 잘 계획된 공격 계획에 따라 공격을 감행했다가 완전 쫄딱 망할 뻔했던 1914년의 재앙 이후 사전 계획 수립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하나로만 생각하고, 진짜 핵심적인 작전은 전쟁이 시작되고 적의 의도가 확실해지면 그때 가서 실시하는 것으로 교리를 정립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런 교리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정반대로 돌아갔던 것이다.[13]

더군다나 프랑스군이 지닌 약점은 사령부 체계에도 있었다. 전군총사령관 가믈랭과 북동부군 사령관이자 전군 부사령관인 조르주 간에 임무분담을 비롯한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은 것이다. 당장 가믈랭이 자신의 의견을 조르주와 조율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약 75km를 차로 달려서 위치한 조르주의 전용지휘소로 가야만 했다. 조르주가 주재하는 북동부전선 사령부가 가믈랭의 사령부에서 약 56km가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가믈랭과 조르주 간의 의견조율을 담당하여야 할 북동부전선 참모들이 소재한 곳이 총사령부와 북동부전선 사령부의 중간 지점이었다. 게다가 가믈랭의 사령부는 무선통신 설비나 텔레타이프 설비도 없어서 전선에서의 상황 전파는 오토바이를 이용한 전령을 이용하여 통상 48시간이 소요되는 상태였다. 심지어 고대로부터 사용된 연락수단인 문서 전달용 비둘기 한 마리도 없었다. 참다 못해 최소한 전신기 한 대 정도는 설치해야 한다는 건의가 있었고, 이에 대한 답은 "군사 명령을 하달하는 것을 경마경기 결과를 전달하는 것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 답이 없다.(...) 설상가상으로 나중에 가믈랭이 해임되고 새로 임명된 베강이 선택한 지휘소에는 전화기가 딱 한 대 있었는데 12시부터 2시까지 사용할 수 없었다. 왜? 인접 도시간 전화를 연결하는 교환수들이 점심시간을 지켜줄 것을 강력하기 요구했기 때문. 역시나 답이 없다.(...) 총사령부에 직속하는 참모 조직도 보유하지 못한 가믈랭 입장에서는, 급변하는 사태에 대처할 수 있는 수단이 하나 더 줄어든 셈이다.

4.3. 영국의 입장

영국은 본래 1920년대에는 독일에 매우 동정적인 입장이어서, 프랑스의 대독 경계심을 지나친 것이라고 비난하곤 했다. 이 문제는 결국 프랑스가 대독 전략에서 수세적 입장, 즉 앞에서 언급된 다른 나라들과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맹렬한 동맹관계 추구의 원인이 되었다. 영국 역시 프랑스의 이 전략에서 예외는 아니어서, 대독 문제에서 비교적 유화적으로 나가야 하지 않을까 여기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강력한 요구 때문에 이 동맹관계의 보증인이 됐다. 한 마디로 친구 빚에 대해 보증을 선 셈이었는데, 이렇게 진 빚을 프랑스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고스란히 부도를 낸 이상, 영국은 이제 그 빚을 고스란히 떠안을 수 밖에 없는 입장이 되었다. 그리고 소심한 연대보증인이라면 이 단계에서 어떻게든 연대보증을 벗어나고 싶어 안달이 되기 십상이었고, 영국인들 역시 실제로 연대보증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긴 했다. 하물며 빚쟁이인 프랑스가 1939년 2월 체코의 독일 완전 합병 상황을 가리켜 만약 뮌헨에서 물러나지 않았다면 피만 흘리고 독일에게 작살날 뻔했다~라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으므로 더욱 그랬다.

그러나 영국은 신사기행의 나라이기에 앞서 세계 최강의 경제대국이자 세계 최강의 해군국이고, 그만큼 자존심도 강했다. 그런 영국에게 있어서 그 동안 불쌍하다고 몇 번인가 편도 들어준 적 있는 독일이 난데없이 영국을 자칫 연대보증으로 한방 먹일 분위기를 만드니 열을 받을 수 밖에... 그런 와중에 1938년의 합의와는 달리 체코의 완전 합병이 이뤄지자 프랑스와 달리 영국은 "이놈들이 약속을 어겼어!"라면서 일단 국민적으로 격분했다. 이 시점에선 아무리 정부가 유화정책을 추구하고 싶어도 다음 총선에서 지기 싫으면 일단 반독 정책 자체는 추구해야만 했다.

그래서 영국은 폴란드에서 전쟁이 터지자 프랑스를 강력하게 압박해서 진짜로 독일하고 한판 붙는 거다라고 선언하게 만들었다. 기왕 빚을 갚을 거라면 연대보증인 혼자 덤터기를 쓰는 것보단 둘이 힘을 합쳐서 어떻게든 갚아 보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다. 안 그래도 지금까지의 상황은 영국이 프랑스에 질질 끌려간 경향도 없지 않았으므로, 일을 여기까지 커지게 만든 빚은 톡톡이 받아내야겠다는 판단도 있었다. 덤으로 독일은 영국이 보기에 프랑스 없이 혼자 싸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문제는 영국이 해군은 강력하고 돈은 많지만 육군은 약하다는 데 있었다. 영국군은 전통적으로 모병제에 기반하는 작은 군대였다. 따라서 프랑스처럼 강력하고 거대한 육군을 단기간에 확보하기 어려웠고, 그에 반해 독일은 이미 강력한 육군과 공군을 확보하고 있다고 예상했다. 따라서 현재 상태에서 전쟁의 결정적 향배는 영국이 얼마나 더 많은 육군과 공군을 유럽에 보낼 수 있느냐에 따라 판가름나리라고 생각했다. 이에 영국은 서둘러 본토에서만 200만에 달하는 대군을 소집, 이를 준비시키기 시작했다. 영연방 국가들까지 하면 최종적으로 소집될 병력은 약 500만 이상이었으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언젠가는 프랑스군과 대등한 규모에 더 강력한 육군을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발상을 한 이유는 아직까지는 대영제국의 위상이 살아있긴 해서 영국은 돈과 자원이 많았고 상대적으로 안전한 후방에서 군을 육성할 수 있었으므로, 프랑스군이 당면한 전쟁에서 돈과 병력을 소모하는 동안 충분히 현대적이고 거대한 군대를 구축, 유럽에 파견할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단 전쟁은 시작됐고, 프랑스군은 독일군에 대해 확실한 수적 우위에 서 있지 못하다고 보였다. 이는 1차 세계대전 때도 마찬가지였고, 이 때문에 영국은 1차 세계대전 당시 3개 군단으로 구성된 영국 원정군(BEF)을 보내 개전 직후 프랑스로 보내 프랑스군의 지휘 하에 부족한 프랑스군의 병력을 보충하기로 했었다. 그리고 당연히 영국군은 이번에도 최소한 개전 초기에는 같은 일을 해서 프랑스가 자국을 지켜낼 수 있도록 하고, 어느 정도 시간을 두어 대군을 건설, 프랑스와 함께 독일의 침략자 정권을 파멸시킨다는 전략을 수립했다. 이는 프랑스군의 수비 지향 전략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이 보낼 수 있는 병력은 한정돼 있었다. 결국 영국군은 1차 세계대전 때와 별반 차이가 없는 규모인 10개 사단으로 구성된 BEF를 유럽으로 보내 프랑스군의 좌익에 배치하는 데 그쳤다. 그리고 이 10개 사단은 사실상 당시 영국군이 가지고 있었던 정규군의 절반 이상이자, 제대로 무장돼 있고 훈련도 마친 병력의 전부였다. 그나마 2개 사단은 아직 완편이 아닌 상태였다. 만약 이들이 사라지고 나면 영국은 사실상 육군을 다시 무에서부터 건설해야 했다. 같은 문제는 1차 세계대전 때도 있었고, 이 때문에 1차 세계대전의 BEF는 군을 보전하기 위해 소극적으로 행동하다가 동맹군에게 불신을 사는 경험을 했다. 당장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은 프랑스군의 작전계획상으로 일관되게 프랑스 제5군의 측면을 엄호해야 했지만, 영국군은 결국 1914년 9월 마른 전투 때까지 프랑스군에 대해 충분한 엄호를 제공하지 못한 채 후퇴를 거듭했다. 사실 그때 영국군이 프랑스군처럼 적극적으로 싸웠다면 더 일찍 프랑스가 망했겠지만, 그래도 영국이 자기 군의 안전을 도모하다가 동맹의 신의를 저버릴 뻔했다는 사실까지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2차 세계대전의 BEF는 1차 세계대전 때에 비해 적극적으로 주어진 임무를 이행하기로 결정했고, 프랑스로서는 다행스럽게도 2차 세계대전 때의 영국군은 1차 세계대전 때보다 더 선진적이고 잘 구성된 지휘체계 및 잘 무장된 육군을 유럽에 투입해서 적극적으로 독일군에 맞섰다. 그러나 아직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할 능력은 없었고, 어디까지나 프랑스군의 일원으로서 프랑스가 구축한 전선의 수비에 기여하는 1개 야전군으로서만 활동할 수 있었다.

한편, 영국 공군은 당시 독일을 제외하면 유럽에서도 질적으로 가장 우수한 공군이었고, 또한 유럽에서 전략폭격을 주요 교리로 하는 제대로 된 전략공군을 가진 유일한 공군이었다. 이에 영국은 독일에 대한 전략폭격을 수시로 실시, 독일의 전력 강화를 지연한다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영국 공군 폭격기 사령부는 이에 충분한 전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고, 몇 차례 산발적인 공습은 있었으나 전단지 살포 이상의 효과적이고 실질적인 활동은 거의 없었다.

연합국은 이런 전략적 상황판단과 결정 하에서 1940년 5월 10일을 맞이했다.

5. 양측의 전력과 그 배치

5.1. 독일군

독일군은 1940년 3월을 기점으로 만슈타인 계획, 즉 지헬슈니트 기동을 기본 작전안으로 설정하고 예하 부대의 배치 및 운용계획을 확정했다. 이에 따라 독일군은 총 3개 집단군으로 나누어 독일과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그리고 프랑스 국경선 일대에 전개되어 각각의 임무에 따라 해당 국가에 대한 공격을 준비했다.

독일군의 3개 집단군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은 주공인 A집단군으로, A집단군의 전개 구역은 벨기에 남부와 룩셈부르크, 그리고 일부가 프랑스에 속한 르덴 고원 전면이었다. 독일군은 이들 A집단군을 주공으로 삼아 프랑스 영내로 종심 깊은 공격을 감행, 프랑스 북동부에 전개된 프랑스군 및 벨기에군과 영국군을 포위섬멸하고자 하였다.

두 번째 집단군인 B집단군은 A집단군에 이어 두 번째로 강력한 세력으로, 전개 구역은 A집단군의 우익인 네덜란드 및 벨기에 북부 방면 전면이었다. B집단군은 제1차 세계대전당시 독일군 주공과 마찬가지로 벨기에를 침공하는 임무를 받았는데, 이 공세가 단순 조공에 불과함에도 A집단군이 포위섬멸할 목표물인 프랑스 북동부전선 부대들이 독일군의 포위기동 기도를 깨닫지 못하게 해야 했기 때문에 그 공격 기세 및 충격효과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우익이 벨기에 및 프랑스에 가했던 것 이상으로 강력해야 했다. 이 때문에 B집단군은 개전 초기 독일 공군의 가용한 지상지원 공군력 거의 전부를 배정받았고, 아울러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부대였던 공수부대 거의 전 병력을 공군으로부터 지원받아 네덜란드 및 벨기에에 대한 공지합동작전을 감행하도록 명령받았다. 유명한 에방 에말 요새 공격이 바로 이 공수부대에 의한 공격 중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마지막으로 C집단군은 단 19개 사단만을 보유함으로서 가장 약한 집단군이었으며, A집단군의 좌익인 프랑스-독일 국경선, 즉 마지노 선 전방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의 임무는 적극적인 기만행동을 통해 C집단군이 마지노선 전면을 강습하거나, 마지노선을 남쪽으로 우회해서 스위스를 공격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는 마지노선 일대에 배치된 프랑스군이 A집단군의 돌파전면보다 자신들의 전면에 집중하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이에는 C집단군만이 아니라 A집단군에서도 예하 1개 군단이 투입되었는데, 이들은 실제로 단 한 지점이긴 하지만 마지노 선을 돌파해 버리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하의 세부 편성표는 분산된 내용을 취합한 것이어서 부분적으로 사실과 다를 가능성이 있다. 수정바람)

5.1.1. A집단군

A집단군은 독일군의 프랑스 침공작전 주공부대로 선정되었으며, 예하에 4개 야전군을 가지고 있었다. 사령관은 게르트 폰 룬드슈테트 상급대장이었으며, 참모장은 원래 에리히 폰 만슈타인 중장이었다가 그가 38군단 군단장으로 이임한 후 게오르그 폰 조덴슈테른 중장으로 대체되었다. 또한 야전군은 아니지만 야전군과 대등한 작전술 제대인 기갑집단을 보유한 유일한 집단군이기도 했다.

  • 제2군(남작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 대장, 참모장 루돌프 콘라트 소장)
    (육군 총사령부 예비로 초기 작전에는 참가하지 않음)

    • 제17군단(베르너 케니츠 대장)
      제297보병사단
      제298보병사단

    • 제38군단(에리히 폰 만슈타인 대장)
      제44보병사단
      제72보병사단
      제82보병사단

  • 제4군(귄터 폰 클루게 상급대장, 참모장 쿠르트 벤네케 소장)

    • 제2군단(카를 하인리히 폰 슈퇼프나겔 대장)
      제12보병사단
      제31보병사단
      제32보병사단

    • 제5군단(리하르트 루오프 대장)
      제62보병사단
      제94보병사단
      제263보병사단

    • 제8군단(발터 하이츠 대장)
      제8보병사단
      제28보병사단

    • 제15기갑군단(헤르만 호트 대장)
      제5기갑사단
      제7기갑사단(에르빈 롬멜 중장)

    • 군 예비
      제12보병사단
      제211보병사단

  • 제12군(빌헬름 리스트 상급대장, 참모장 에버하르트 폰 막켄젠 소장)

    • 제3군단(쿠르트 하제 대장)
      제3보병사단
      제23보병사단
      제52보병사단

    • 제6군단(빌헬름 푀스터 대장)
      제15보병사단
      제205보병사단

    • 제18군단(오이겐 바이어 대장)
      제25보병사단
      제81보병사단
      제290보병사단

  • 제16군(에른스트 부슈 대장, 참모장 발터 모델 중장)

    • 제7군단(오이겐 폰 쇼베르트 대장)
      제16보병사단 (한스-팔렌틴 후베 소장[14])
      제24보병사단
      제36보병사단
      제76보병사단
      제299보병사단

    • 제13군단(하인리히 폰 피에팅호프 중장)
      제17보병사단
      제21보병사단
      제160보병사단

    • 제23군단(알브레흐트 슈베르트 중장)
      제73보병사단
      제82보병사단
      제86보병사단

    • 군 예비
      제6보병사단
      제26보병사단
      제71보병사단

  • 제1기갑집단(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기병대장, 참모장 쿠르트 자이츨러 대령[15])


    • 제41기갑군단(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 중장)
      제2보병사단(차량화)
      제6기갑사단
      제8기갑사단

    • 제14군단(구스타프 폰 비터스하임 대장)
      제13보병사단(차량화)
      제29보병사단
      그로스도이칠란트 보병연대[16]

5.1.2. B집단군

B집단군은 C집단군과 함께 프랑스 침공의 조공부대로 선정되었다. 다만, 그저 견제에 불과한 임무만을 받고 있는 C집단군과는 달리 B집단군은 가능한 한 많은 적을 끌어들이고 그들을 고착, 견제하면서 심대한 타격까지 입혀야 했다. 사실상 B집단군은 며칠 내에 네덜란드의 항복을 받아내고 벨기에의 절반 이상을 석권하는 등, A집단군보다 적어도 어떤 의미에서는 훨씬 어려운 임무를 맡은 셈이었다. 이 문제 때문에 B집단군은 2차 세계대전 당시 기갑군단끼리 충돌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하지만, 이때의 기갑전은 2차 세계대전 중 서부전선에서 발생한 최초의 기갑전이었고, 또한 프랑스 침공 당시 발생한 최대 규모의 기갑전이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조공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매우 막중한 임무를 맡았기 때문에 그 전력은 공수부대와 기갑군단을 가지고 있는 등 비교적 높은 수준이었다. 사령관은 페도르 폰 보크 상급대장이고, 참모장은 한스 폰 잘무트 소장이었다.

특징적인 것은 B집단군이 가진 강력한 조공부대, 특히 적의 주의를 최대한 끌어야 하는 피에로로서의 임무 때문에, 이때까지 전 세계를 통틀어서 대대 이상 규모로 운용된 적이 없는 공수부대가 사단 규모로 투입되었다는 것이다. 정확하게는 공수부대가 아닌 공중강습부대, 현대 기준으로 말하면 항공수송 가능한 경사단이었으나, 이들의 선도를 위해 공군 소속 정규 공수부대가 대대 단위로 투입되었고 그 패턴은 현대 공수사단이 전개하는 방식의 원형이기 때문에, 정규 공수사단의 전개로 간주할 수도 있다. 이 공수부대의 투입은 연합군이 독일군의 주공방향을 오판하게 만드는 최대의 요소가 되었다.

또한 B집단군 예하 군단 다수, 그리고 1개 야전군은 침공 이후 A집단군으로 전속되었다. 이를 전후해서 B집단군 예하 부대는 기만 목적을 포함한 다양한 작전명령을 통해 하루이틀 간격으로 수많은 사단과 군단이 이리저리 오갔기 때문에, B집단군의 편성은 매우 혼란스럽다. 따라서 아래의 편성표는 A집단군의 그것에 비해 훨씬 부정확하다. 원래 독일군은 전통적으로 예하 부대의 자율성을 충실히 보장하는 특성이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하급 제대를 다른 상급 제대 아래로 보내거나 넘겨받는 부대이동 및 임무 전환을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훗날 편제표 정리하는 사람들이야 머리를 쥐어뜯고 싶어지겠지만 이런 자율성은 독일군의 임기응변 능력을 한층 높였고, 프랑스 침공 당시에도 이런 기능들 덕분에 독일군은 필요한 곳에 필요한 부대를 뒀다 뺐다 하는 복잡한 기동을 순조롭게 실시했다.

총사령관 드로 폰 보크 상급대장.

  • 제6군(발터 폰 라이헤나우 상급대장, 참모장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소장)

    • 제16기갑군단(에리히 회프너 대장)
      제3기갑사단
      제4기갑사단

    • 제4군단(빅토르 폰 슈베들러 대장)
      제4보병사단
      제22공중강습사단(공수부대가 아니라 수송기로 전개하는 경보병사단)[17]
      제33보병사단
      제94보병사단

    • 제9군단(헤르만 가이어 대장)
      제15보병사단
      제205보병사단

    • 제11군단(요아힘 폰 코츠플라이흐 중장)
      제7보병사단
      제253보병사단

    • 제27군단(알프레트 베거 대장)
      제211보병사단
      제213보병사단
      제218보병사단
      제239보병사단

    • 제40군단(게오르그 슈툼메 대장)
      제44보병사단
      제87보병사단

  • 제9군(요한네스 블라스코비츠 대장, 참모장 카를-아돌프 콜리디트 소장)

    (이 야전군은 프랑스 침공전 중인 1940년 5월 15일에 창설되었으며, 창설기간 중에 타 야전군 및 육군 총사령부로부터 3개 군단을 배속받았다. 따라서 개전 시점의 편성표에서는 사단이 없고, 야전군 사령부 역시 창설 준비 중인 단계이다.)

  • 제18군(게오르그 폰 퀴흘러 대장, 참모장 에리히 마르크스 소장)

    • 제10군단(크리스티안 한센 대장)
      제18보병사단
      제61보병사단
      제216보병사단
      제1기병사단

    • 제26군단(알렉산드르 보드리히 대장)
      제34보병사단
      제45보병사단

    • 군 직할
      제8기갑사단
      SS-VT 사단[18]

  • 독일 공군 제7비행사단(Flieger-Division) 예하 2개 감편 연대[19]

5.1.3. C집단군

C집단군은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 직후부터 서부 독일의 방위를 책임지고 있는 야전군이었으며, 1940년 5월 시점에서 그 규모는 단 19개 사단이며, 실제로는 18개 사단에 1개 사단 규모에 해당하는 고정배치 국경수비부대인데다가 그나마도 제대로 무장된 사단은 몇 개 되지 않았다. 이들 C집단군은 A집단군 우익에서 스위스 국경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분산 배치되어 프랑스 침공에 임해서 현재 마지노 선일대에 배치된 프랑스군을 현 위치에 고착시키는 기만작전 임무를 맡았다. 사령관은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상급대장이었고, 참모장은 한스 펠베르 중장이었다. 참고로 C집단군 전임 참모장이 바로 프랑스 침공 당시 A집단군 참모장이었던 조덴슈테른 중장이었다. 이후 조덴슈테른 중장이 프랑스 침공 준비단계 및 초기 단계에서 지속적으로 신중론을 펼쳐 부대지휘에 지장을 끼친 데에는 집단군 창설 초기 자르 침공에 맞서 워낙 압도적인 프랑스군을 상대로 절망적인 방어전을 기획했던 경험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임무를 위해 C집단군은 예하에 보유한 19개 사단 이외에도 수많은 부대를 더 가진 것처럼 정부 및 군 상층부의 지원 하에 적극적인 기만작전을 수행했다. 예를 들어 B집단군이나 A집단군으로 갈 부대를 기차 타고 가는 길에 잠깐 C집단군 구역 근처에서 한 번 내려놓고 며칠 있다가 한밤중에 몰래 "얘들아 여기가 아닌갑다" 하고 도로 기차 태워서 원래 담당구역으로 보낸다거나 하는 식으로 병력 규모를 뻥튀기하는 건 기본이고, 보병 출신 병사 몇 명한테 기갑병 전투복을 입히고 거리에 내보내서 흥청망청 쓰게 만든다거나, 특급호텔 하나 앞에다가 보초 두 명 세우고 군단 사령부 간판만 세운 다음 집단군 사령부에서 장교들이 식사하러 왔다갔다 하거나(오오! 공금으로 비싼 밥 먹기!), 방송국에서 초대형 스피커와 라디오 중계기를 빌려다가 다른 데에서 움직이고 있는 기갑부대 이동 소음을 생중계하거나, 철도 운행이 끊긴 한밤중에 지역 철도청을 구슬러서 기관차하고 화차 몇 대를 왔다갔다 하게 하고 그 위에 짐을 전차 비슷하게 쌓고 방수포로 덮어둔 다음 병사들이 우우 몰려다니게 하거나 하는 등등.

이때의 기만공작 중에서 가장 걸작은, 이 부대들 중 상당수가 스위스를 침공하러 가는 것처럼 위장하는 것이었다. 독일은 필요하다면 중립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침공하는 짓을 서슴치 않는 나라로 알려져 있었고 이는 1차 세계대전이 확전된 원인도 사실 독일이 중립을 보장했던 벨기에를 무단 침공했던 것이 크게 작용한 것만 봐도 충분했다. 여기에 더해서 스위스가 충분히 강력한 예비군 세력을 보유하고 있다고는 하나 막강한 독일군 앞에선 아침식사거리밖에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던 탓에, 결국 이런 기만공작은 스위스를 침공한 독일군이 무방비 상태인 프랑스-스위스-이탈리아 3국 국경을 통해 이탈리아군과 연합해서 남프랑스를 침공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로 연합국 사령부에 부각되었다. 물론 병력도 뭣도 부족한 독일이 스위스를 진짜로 침공할 리는 없었지만서도.

하여튼 이런 기만공작에도 불구하고 C집단군은 프랑스 침공에 참가하는 3개 집단군 중에서 제일 취약한 전력을 보유했다. 기갑부대는 사실상 없고, 예하 야전군 2개의 휘하 군단들 중에서 제대로 된 전투력을 보유한 군단조차 사실상 없는 등, 말 그대로 허울뿐인 야전군이었다.

  • 제1군(르빈 폰 비츨레벤 대장[20], 참모장 프리드리히 미트 소장)

    • 제37임시군단(Höheres Kommando z.b.V.XXXVII)[21] (알프레트-뵘 테텔바흐 중장)
      제215보병사단
      제246보병사단
      제257보병사단
      제262보병사단
      제129국경경비연대

    • 제12군단(고트하르트 하인리치 중장)
      제75보병사단
      제268보병사단
      제125국경경비연대

    • 제24군단(남작 레오 디트리히 프란츠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 대장)
      제60보병사단
      제168보병사단
      제252보병사단
      제127국경경비연대

    • 제30군단(오토 하르트만 대장)
      제93보병사단
      제258보병사단
      제132국경경비연대

  • 제7군(프리드리히 돌만 대장, 참모장 발터 피셔 폰 바이케르살 소장)

    • 제25군단(카를 리터 폰 프라거 대장)
      제555보병사단
      제557보병사단

    • 제33임시군단(게오르그 브란트 대장)
      제554보병사단
      제556보병사단

    • 군 예비
      제96보병사단

  • 집단군 예비
    제94보병사단
    제98보병사단

5.2. 연합군

1940년 5월 10일 프랑스 전역의 주역인 북동부 전구를 중심으로 서술한다. 알프스 일대 주둔군 등은 생략하도록 한다. 프랑스는 총 3개 집단군 규모의 병력이 독일과의 국경선 일대에 배치되어 있었다. 병력의 규모 및 질 측면에서는 독일군과 대등 혹은 우세한 전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수적으로 주력이 되는 프랑스군을 중심으로 하여 영국 대륙원정군/벨기에군/네덜란드군 등이 연합전선을 이루어 독일의 침공에 대응하는 것이 연합군의 목표였지만...전쟁 진행 과정은...

5.2.1. 프랑스군 총사령부

프랑스군 총사령부는 프랑스군 총사령관 겸 연합군 총사령관 모리스 가믈랭 대장을 수장으로 하고 있었으며 부사령관으로 알퐁스 조르주 대장을 두었다. 이후 가믈랭이 해임되면서 1차 세계대전의 영웅 막심 베강 대장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기존의 전략 계획 하에서는 최고의 전략 예비대 역할을 수행해야 할 7군이 1야전군 휘하에 들어가 딜 계획의 핵심 부대로 기능하게 되면서 프랑스군 총사령부 산하에 배치되어 있는 병력들은 전선에 투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예비병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총사령부 예비
    제10보병사단
    제14보병사단[22]
    제23보병사단
    제28산악보병사단
    제29산악보병사단
    제36보병사단
    제7북아프리카보병사단
    제5식민지보병사단
    제7식민지보병사단
    제8식민지보병사단
    제1흉갑기병사단
    제2흉갑기병사단
    제3흉갑기병사단
    제4흉갑기병사단[23][24]
  • 제21군단
  • 제23군단[25]

5.2.2. 북동 작전구

프랑스 북부와 동부 전선 전역을 총 지휘한 사령부로 예하 3개 집단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령관은 알퐁스 조르주 대장.

5.2.2.1. 제1집단군

딜 계획의 주력부대로 예하 4개 야전군과 영국 대륙원정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령관은 가스통 비요트 대장. 이후 비요트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제1군 사령관 블랑샤르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실질적인 프랑스 육군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부대가 바로 1집단군 산하 병력들이었다. 프랑스군은 마지노 선으로 프랑스군의 우익이 방호되고, 중부 전선은 마스 강과 아르덴 고원이라는 자연 장애물이 존재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독일군의 주공이 벨기에 방면일 수밖에 없다는 확신 하에 최정예부대를 좌익 일대에 대대적으로 집중 배치해 둔 상태였다.

본래의 계획대로였다면 프랑스군/영국군의 일부 부대가 플랑드르 일대일 것으로 추정되는 독일군의 주공에 대응하여 벨기에군이 구축한 방어선에 합류하여 독일군의 주공을 방어하면서 단축된 전선을 통해 밀도 높은 방어전력을 확보하는 수준에 오르는 것이 1집단군의 기본적인 목표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7군이라는 야전군 규모의 기동력 있는 예비대를 확보하여 예상치 못한 상황에도 대응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할 수 있었다.

문제는 프랑스군이 이 일대에 보유하고 있던 예비대가 사실상 전무한 상태나 다름없었다는 것. 상술한 바와 같이 딜 계획이 브레다 계획과 결합/확대되면서 작전술 차원의 예비대로 랭스에 주둔하고 있어야 할 7군이 방어선에 직접 투입되었고, 북동부전선 전체가 전략적으로 투입할 수 있는 예비대가 사라진 상태였다. 북동부전선을 총괄하던 조르주 장군은 이에 거세게 반발하며 1개 군단만을 방어선에 추가 투입하고 7군의 주력은 집단군의 예비 병력으로 두어 기동성 있게 대응할 것을 제안했으나 가믈랭의 결단은 확고했다.

  • 제1군(조르쥬 블랑샤르 대장 -> 르네 프리우 중장[26])

    • 기병군단
      제2경기계화사단
      제3경기계화사단

    • 제3군단
      제1차량화보병사단
      제2북아프리카보병사단

    • 제4군단
      제15차량화보병사단
      제1모로코보병사단

    • 제5군단
      제12차량화보병사단
      제5북아프리카보병사단
      제101요새보병사단
      제519전차대대집단[27]

  • 제2군(샤를 윙치제르 대장 -> Henry Freydenberg 중장)

    • 제10군단
      제55보병사단
      제3북아프리카보병사단

    • 제18군단
      제41보병사단
      제3식민지보병사단

    • 군 예비
      제2경기병사단
      제5경기병사단
      제3차량화보병사단
      제71보병사단
      제1식민지보병사단
      제503전차대대집단

  • 제7군(앙리 지로 대장)

    • 제1군단
      제4보병사단
      제25차량화보병사단

    • 제16군단
      제1경기계화사단[28]
      제21보병사단
      제60보병사단
      제9차량화보병사단

    • 군 예비
      제515전차대대집단

  • 제9군(앙드레 코라 대장)

    • 제2군단
      제5차량화보병사단

    • 제11군단
      제4북아프리카보병사단
      제18보병사단
      제22보병사단

    • 제41군단
      제61보병사단
      제102요새보병사단

    • 군 예비
      제1경기병사단(5월 10일 개전 당일 제1기병여단을 배속받음)
      제4경기병사단
      제53보병사단
      제33북아프리카보병사단
      제3스파히여단
      제518전차대대집단

  • 영국 대륙원정군(자작 존 고트 대장)

    • 제1군단
      제1보병사단(해롤드 알렉산더 소장)
      제2보병사단
      제48보병사단

    • 제2군단(앨런 브룩 중장)
      제3보병사단(버나드 몽고메리 소장)
      제4보병사단
      제50보병사단

    • 제3군단
      제42보병사단
      제44보병사단
    • 원정군 직할부대
      기갑여단/기갑정찰여단
      제5보병사단
    • 자르 파견군[29]
      제51보병사단

  • 집단군 직할
    제1북아프리카보병사단
    제32보병사단
    제43보병사단
    제68보병사단

5.2.2.2. 제2집단군

2집단군은 프랑스와 독일 국경 사이에서 방어를 맡는 주력 부대로, 마지노 선 수비를 주 임무로 삼고 있었다. 바꿔 말하면 황색 상황으로 연합군의 실질적 주력인 1집단군과 영국 대륙원정군 등을 제압한 이후 이후 적색 상황에서 쌈싸먹힐 예정이었던 목표물. 사령관은 앙드레 프레틀라 대장. 후에 3군 사령관이던 샤를 콩데로 교체된다.

2집단군의 경우 서부전선에서 5월 말에서 6월 초에 이르는 기간까지 사실상 잊혀진 부대처럼 취급되고 있는데, 마지노 선에 틀어박힌 2집단군은 후에 쌈싸먹힐 때까지 작전술적 차원에서 뭔가 한 일이 사실상 없다.(...) 할 일도 없었겠지만. 마지노 선 일대에서 조공을 맡은 독일군 C집단군과 숨바꼭질만 하다 엉겁결에 대대적인 포위를 당하고 막대한 포로로 전락한 꼴.

만약 2집단군 소속 전력 중 한 개 야전군 정도라도 마지노 선에서 빠져나와 전선의 예비대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면 프랑스 침공이 고작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끝나는 일이 되었을까 하는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게 만든다. 결국 북동부전선 전체가 무너진 것이 선형 방어에 대한 고집과 상례를 벗어난 상황에 대응할 예비대의 부족에 기인한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 제3군(샤를 콩데 대장)

    • 식민지군단
      제2보병사단
      제7보병사단[30]
      제56보병사단

    • 제6군단
      제26보병사단
      제42보병사단

    • 제24군단
      제51보병사단

    • 제42요새군단
      제20보병사단
      제58보병사단

  • 제4군(에두아르 레퀸 대장)

    • 제9군단
      제11보병사단
      제47보병사단
      제502전차대대집단

    • 제20군단
      제52보병사단
      제82아프리카보병사단
      제10독립전차대대

    • 군 예비
      제45보병사단
      제1폴란드보병사단

  • 제5군(빅토르 부레 대장)

    • 제8군단
      제24보병사단
      제31보병사단

    • 제12군단
      제16보병사단
      제35보병사단
      제70보병사단

    • 제17군단
      제28산악보병사단
      제62보병사단
      제103요새보병사단

    • 제43요새군단
      제30산악보병사단

    • 군 예비
      제44보병사단
      제501전차대대집단
      제517전차대대집단

  • 집단군 예비
    제3경기병사단
    제6보병사단
    제8보병사단
    제4식민지보병사단
    제6식민지보병사단
    제6북아프리카보병사단
    제87아프리카보병사단
    제1스파히여단
    제511전차대대집단
    제513전차대대집단
    제520전차대대집단
    제532전차대대집단

5.2.2.3. 제3집단군

3집단군은 마지노 선의 극동단 및 남단의 수비를 담당하고 있는 부대였다. 다만 개전 시점까지 3집단군이 완편되었다고 볼 수 있을지는 조금 의문이다. 실질적으로 마지노 선의 수비를 보조하는 성격에 가까웠으며, 2집단군과 알프스 방어군 사이의 간격 메우기 및 마지노 선 일대의 예비대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게 가능할 것이다. 사령관은 앙드레 앙트완 베송 대장. 전격전의 전설에서는 3집단군 전체가 개전 이후 새로 편성된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 제6군[31](로베르 투숑 중장)
    • 제45군단
      제57보병사단
      제63보병사단
      제2폴란드보병사단

  • 제8군(잔느 가르슈리 대장 -> Émile Laure 중장)

    • 제7군단
      제13보병사단
      제27산악보병사단
      제2스파히여단

    • 제13군단
      제19보병사단
      제54보병사단
      제104요새보병사단
      제105요새보병사단

    • 제44요새군단
      제67보병사단

  • 집단군 예비
    제506전차대대집단

6. 황색 상황(Fall Gelb) - 1940년 5월


6.1. 아르덴 공세전야

만슈타인의 낫질(Sichelschhitt) 계획의 혁명적 사상은 오직 혁명적 방법을 통해 실현될수 있었다. 구데리안의 끈질긴 요구끝에 창설된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은 휘하에 5개의 기갑사단과 3개의 차량화보병사단을 거느린 프랑스전역에 있어 가장 강력한 기동전투부대였다.

그러나 그 위용에 비해 A집단군 사령부는 클라이스트 집단군을 결코 좋게 보지 않고 있었는데 그들이 보기에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은 기존의 군사교리와 너무나 어긋난 이단아였으며, 허술하게 조직된 골칫덩어리부대였다.룬트슈테트 상급대장은 그들이 성공적으로 적 깊숙이 돌파해 들어가야지만 독립적인 작전권을 허용하겠다고 밝혔는데 물론 돌파가 유야무야 되 후속부대에 따라잡힌다면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은 바로 그 부대에 예속되어야 했다.즉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의 가장 큰 장애물은 적이 아니라 아군부대에 따라잡히는 것이었다.이건 뭐 술래잡기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이러한 지시는 역으로 집단군의 엉덩이에 불을 붙이는 효과도 낳았다.

A집단군의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에 대한 차별은 기동로 배정에 있어서도 계속되었다. A집단의 사령관들과 참모진들은 끊임없이 기갑부대의 능력에 대한 의구심을 제기하였고, 결국 불안해진 룬트슈테트는 구데리안의 19군단은 스당방면으로, 라인하르트의 41군단은 북쪽으로 25km 떨어진 몽테르메로 진격하는 원래 계획 대신 부대를 제대별로 나누어 일렬종대로 나란히 진격시키고자 했다. 거기다 보병사령관들이 도로의 우선권을 주장한 결과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은 170km에 달하는 진격로에서 단 4개의 도로4만여대의 차량을 통과시켜야 하는 끔찍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원래 나란히 진격해야할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의 제41군단과 제19군단은 비엔나 소세지마냥 늘어서게 되었고 라인하르트 군단은 마스강 도하직전에나 몽테르메쪽으로 우선회할 수 있었다. 따라서 대규모의 교통혼잡은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고 오직 기동성만이 생명인 낫질계획에서 이러한 교통혼잡은 작전전체를 분쇄해버릴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대한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의 개선 요구는 이 부대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A집단군 사령부에 의해 계속해서 묵살되었다.

그리고 5월 10일 새벽 05:35분 한 줄기의 호각소리와 함께 운명의 프랑스 침공이 시작되었다.

6.2. 첫 술부터 삐끄덕거린 아르덴 공세

5월 10일 A집단군의 진격은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나 다름 없었다.당일 정오까지 선두의 구데리안의 군단은 벨기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지만 뒤따르던 라인하르트의 41군단은 막 라인강을 넘고 있었고 2제대는 이미 작전계획시간에서 10시간이나 지체하고 있던 제 1제대의 후미와 뒤섞이고 있었다.

5월 11일 독일군은 이제 수십킬로미터에 달하는 교통정체에 시달리고 있었다. 적의 역습에 대한 잘못된 오보와 진격로상에 미리 프랑스와 벨기에가 부설한 지뢰를 비롯한 숱한 장애물은 진격을 더욱 지체시키고 있었다. 여기에 기갑사단에 뒤쳐지고 싶지 않은 보병사단들이 기갑사단의 예정된 진격로에 끼어들어 옴으로써 상황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정도의 개막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라인하르트 군단은 진격은 커녕 이틀동안이나 독일 국내에 갇혀 있었고 결국 13일 국경을 넘게 되었지만 양익대형으로 전환하려는 순간 6보병군단이 라인하르트 군단의 진격로에 차량들을 들이밀어버리고 발끈한 라인하르트 군단이 무작정 부대를 밀어붙임으로써 끔찍한 혼란이 야기되었다. 공세를 취해야할 사단전체가 뿔뿔히 흩어지고 예하부대들의 위치도 파악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제 독일군의 정체는 마스강에서부터 라인강변에 이르기까지 250km에 달하는 장대한 구간으로 확대되었다. 그야말로 유럽역사상 전무후무한 교통정체가 독일군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지만 이런 상황은 1944년 아르덴 대공세 때도 발생했으며, 여기서 독일군은 사실상 좌절하고 만다.

소위 알려진 전격전에 걸맞지 않은 이런 비극적 지체는 어떻게 프랑스 침공이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아하게 생각하게 만들 정도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한 것은 상부의 작전착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했던 임무형 지휘체계에 근거한 중 하급 지휘관들의 분투덕분이었다. 그리고 한가지 '기적'도 따라붙었다. 독일군이 스스로가 만든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던 동안 그들의 공세를 저지해야할 연합군의 공군기들이 단 한대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한 이유는 프랑스 공군 총사령관이 독일 공군의 능력을 과대평가 하여 가용기들과 지원부대들을 전선 부근이 아니라 대서양 방면의 후방기지에 집중 배치한 것이 문제였다. 안 그래도 가뜩이나 짧은 항속거리를 가진 프랑스 군용기들이 독일방면도 아니고 대서양으로 몰렸으니 제때에 전선의 육군을 지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프랑스군은 전쟁을 최대한 장기화할 생각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항공기 생산과 조종사 교육에 많은 시간이 걸리는 정예 공군력은 최대한 아껴 둘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당시 프랑스는 독일 공군이 엄청난 생산력을 기반으로 하는 거대 공군이라고 생각했고(실제 규모의 3배 이상으로 판단했다는 징후가 당시 항공기술 관련 언론 보도에서 종종 보인다. 독일 공군은 1만 대 이상의 전술기를 보유하고 있다 운운), 때문에 프랑스 공군은 생산을 독려함과 동시에 많은 항공기를 미국 등에 주문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그러고도 모자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최대한 아끼고 아껴 보자는 생각에서 저런 조치를 취했다. 이런 사정은 영국 공군도 비슷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프랑스군은 전술적 목표에 대한 공군 지원 요청을 금지하고 있었던 덕분에, 설령 전면의 기지에 공군력이 집중배치되어 있었다 해도 문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6.3. B집단군의 저지대 침공과 연합군의 대응

A집단군이 아르덴에서 공세를 펼치는 동시에 B집단군은 네덜란드와 벨기에에 이르는 저지대 일대에 강력한 조공을 가했다. B집단군 항목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독일군은 B집단군에게 단순한 조공 이상의 역할까지도 기대했기 때문에 B집단군은 조공 치고는 매우 강력한 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군과 벨기에군의 방어선은 그 공격 앞에 무너졌고, 결국 리히 회프너가 이끄는 16기갑군단의 기동로가 활짝 열리게 되었다. 16기갑군단은 마스 강의 만곡부에 위치한 겜블루의 간격을 향해 기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겜블루의 간격은 딜 방어선이 정상적으로 가동하는 상황 하에서도 방어전의 수행에 큰 문제가 존재하는 지역이었다. 전면은 상당히 좁은 편이지만 자연 장애물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합군에서도 매우 중시하는 지역이므로 프랑스군 사령관 가믈랭은 이러한 독일군의 기동을 보고 마침내 기획해 두었던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딜 기동이 시작된 것이다.

딜 기동에 투입될 연합군의 좌익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편제되었다.

  • 대서양 연안에 접하는 좌익을 형성할 프랑스 7군은 안트웨르펜(앤트워프)를 경유해 브레다 방면으로 진출, 네덜란드군과 연결한다.

  • 영국 대륙원정군은 브뤼셀을 지나 딜 방어선에 진출, 와브르와 뢰벤 일대를 확보한다.

  • 프랑스 1군은 영국 대륙원정군의 우익과 연결, 와브르와 마스 강 만곡부 일대를 확보한다.

  • 방어선 남부에는 프랑스 9군의 좌익을 파견, 벨기에 영토 내 마스 강 유역을 책임진다.

이 기획에 따라 연합군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특히 취약한 겜블루 일대의 방어선을 방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프랑스 1군이 갖춘 최강의 창, 프리우 장군이 지휘하는 기병군단이 딜 방어선 너머 지역까지 기동했다. 기병군단은 티를러몽-안뉘-위를 잇는 저지진지를 구축, 후방에서 기동중인 보병사단들이 방어선을 온전히 갖추는 시점까지의 시간을 버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르덴 일대는 프랑스군과 벨기에군 그 누구도 자리를 명확히 메우지 않고 있었다. 이 일대에 배치되어 있는 벨기에군은 총 22개 사단 중 2개 사단에 불과했으며, 이들 역시 전면적인 공세에 대응할 정도의 전력을 갖추고 있진 못했다. 가믈랭은 아르덴 일대에서의 전력 공백에 대해 "그들(벨기에군)은 싸우지도 않고 증발해 버렸다."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이는 프랑스와 벨기에 사이의 치명적 오해(grave malentendu franco-belge)에서 비롯된 것인데, 양국은 서로 상대방이 아르덴에서 각자의 책임 지역을 굳건히 방어해 줄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아르덴 일대에 배치된 프랑스군과 벨기에군은 어떠한 협조체제도 없이 각각의 독립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아르덴 돌파를 시도할 A집단군에게는 최적의 상황이었다.

6.4. 스당 돌파 - 전세를 결정 짓다

6.4.1. 19기갑군단의 스당 돌파

공세의 선봉이 된 것은 19기갑군단 소속 1기갑사단이었다. 이들은 말 그대로 주공 중의 주공이었고, 이러한 위상에 걸맞게 계획된 시간에 정확히 스당에 도달하기 위해 가장 양호한 기동로를 부여받았다. 19기갑군단장 구데리안은 1기갑사단에게 "필요시 본인은 귀관들에게 최소한 3일 정도는 취침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명령을 남길 정도였다. 1기갑사단 군수참모가 2만 정에 이르는 각성제를 관리하고 있었을 정도로 1기갑사단의 임무는 중차대한 것이었다.

마르틀랑주를 신속하게 점령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보당주에서 여덟 시간이나 발목이 잡혔다. 이는 독일군의 니비 강습 작전에 이은 통신선의 절단으로 보당주 일대에서 잠시간의 지연전을 펼칠 예정이던 벨기에군 중대가 철수 명령을 수령하지 못한 게 컸다. 성공한 강습 작전이 오히려 기갑군단의 전진을 방해한 것이다. 심지어 벨기에 내부의 기동로가 체계적으로 파괴되면서 1기갑사단의 진격은 크게 늦춰졌다. 본래 목표대로라면 5월 10일 저녁 벨기에의 제 2 요새선이 구축되어 있는 뇌프샤토를 공격해야 했지만 그 다음날 아침까지 공세가 미뤄졌고, 결국 지연전을 수행하기로 되어 있던 프랑스군 5경기병사단이 리브라몽과 뇌프샤토를 축으로 진지 편성을 완료하고 만 것이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사단장 키르히너 중장은 뇌프샤토를 직접 공격하지 않고 지연전을 수행하는 프랑스군의 간격 사이를 돌파하여 프랑스군 지연전 부대의 후방 깊숙히 진출해 프랑스군의 방어선을 붕괴시켰다. 이 신속한 돌파를 바탕으로 보당주에서 소요한 시간을 벌충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격으로 프랑스군은 세무아 강 차안으로 줄지어 퇴각하는데, 독일군은 이 틈을 타 스당 돌파에 있어 최후의 천연 장애물 지대로 꼽히던 부용을 기습했다. 공세를 당한 이래 독일군의 속도 앞에 허우적대던 프랑스군은 이 공격을 지나치게 과대 평가해 부용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말았다. 보병 하나 없는 1개 전차대대의 기습 공격 앞에.

이러한 양상은 무자이브에서도 지속되었다. 부용 서쪽의 무자이브에 대해 전투지경선을 넘으면서 독일군 1개 중대가 기습공격을 가했는데, 무자이브의 교량을 방어하던 3스파히여단이 5경기병사단보다 좀 늦게 철수하면서 생긴 틈을 독일군 중대가 파고든 것. 문제는 3스파히여단장이 이런 사태가 발생하자 상급 지휘관에게 보고하지도 않는 채 철수해버린 것이다. 결국 좌측방이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는 위기감을 느낀 5경기병사단 역시 철수하면서 세무아 강변의 프랑스 전선 전체가 연쇄적으로 붕괴된 것이다. 결국 스당 방어선이 독일군 앞에 고스란히 노출되게 되었다.

스당 일대는 프랑스 제2군의 좌익을 형성하고 있던 10군단이 방어를 책임지고 있는 지역이었다. 10군단은 예하에 55보병사단과 3북아프리카보병사단의 두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스당 방어의 핵심이 되는 것은 55보병사단이었다. 프랑스군은 마스 강과 마르페 고지라는 천연의 방어물이 있는 스당 지역은 B급 사단에 불과한 55보병사단 하나로도 충분히 틀어막을 수 있다는 판단을 했으며, 상대적으로 스당의 동쪽인 무종 지역의 방어 강화에 역점을 두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스당 지구를 맡고 있는 55보병사단이 손가락만 빨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방어선의 구축에 나섰다. 문제는 무리할 정도의 진지 공사. 55보병사단은 30세 이상 예비역을 중심으로 구성된 사단이었고, 그 점을 감안할 때 교육훈련을 통해 사단의 전투력을 재고하는 것이 절실했건만 사단장 라퐁텐 장군은 부족한 훈련도를 감안할 때 더 많은 벙커를 지어서 막아야 한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던 것이다. 그 덕분에 진지 공사는 공사대로 완성되지 못하고, 병사들은 병사들대로 훈련을 받지 못해 구축된 방어선을 어떻게 지켜야 할 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이는 스당 돌파를 위해 스당과 유사한 지형에서 수 회에 걸친 훈련을 받은 독일군과는 정 반대의 양상이었다.

거기다가 방어선을 지켜야 하는 55보병사단 내부의 문제 때문에 스당 지구의 취약성은 더욱 증대되었다. 그나마 방어선의 구조를 아는, 초기에 방어선을 축성한 병력들이 교대 원칙에 따라 이동하면서 해당 방어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교대 병력들이 해당 방어선을 지켜야 하는 상황에 이른 것. 거기다가 부대간의 지나친 교대 원칙으로 인해 부대 내부의 결속력은 심각하게 약화되어 있었다. 거기다 독일군의 공세 직전 예비대로 있던 71보병사단이 기존 55보병사단의 방어 구역 내로 진입하면서 작전지경선 문제로 혼란이 더해진 판이었다.

한편 독일군도 완벽한 상황은 아니었다.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의 부족한 교통로 문제로 마스 강변에 전 부대가 집결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해진 것이다. 구데리안은 클라이스트에게 도하의 연기를 요청했으나 클라이스트는 공격 일정의 준수를 명령했다. 결국 구데리안은 당장 손에 쥔 패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 그나마 그의 입장에서 다행인 것은 공군의 가용 전력 대부분을 투입할 수 있었다는 것 정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공세의 날이 밝았다. 5월 13일 오전 8시부터 스당 지역에 독일 공군의 집중폭격이 감행되었다. 연이은 편대의 출격과 교대를 바탕으로 하는 롤러식 폭격이 스당을 뒤덮었다. 스당 지역에 독일 공군은 310대의 폭격기와 200대의 슈투카, 300여 대의 전투기/전폭기를 집중 투입했고, 기갑집단이 마스 강을 도하하기 직전의 90여분 동안에는 750여 대에 이르는 슈투카와 폭격기가 집중되었다. 구데리안이 큰 위협으로 평가한 55보병사단의 포병대는 이 폭격으로 사실상 무력화되면서 도하 작전에 영향을 제대로 미치지 못했다. 폭격이 입힌 물리적 피해 자체는 프랑스군이 입은 인명 피해가 56명에 불과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미미했지만, 거의 모든 야전 통신선이 절단된 데다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던 55보병사단 병력들이 공황상태에 빠지면서 지휘체계 자체가 거의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상술한 바와 같이 일단 방어선의 시설 자체는 건재한 상황이었으며, 독일군은 프랑스군의 반격에 직면했다. 이 상황에서 독일군 보병들이 말 그대로 대활약을 펼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임무형 지휘체계가 제대로 적용되는 경우 어떤 위력을 보여줄 수 있는지를 제대로 과시했다고 할 수 있다. 중대급 내지는 소대급 부대임에도 불구하고 도하 이후 능동적으로 공세를 진행, 실패 위기에 있는 도하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어낸 것이다. 특히 49공병대대 2중대의 일개 소대장이던 루바르트 중사가 이끄는 10여 명의 병력이 유일하게 도하에 성공해 7개의 벙커를 장악하며 10기갑사단의 공세를 위한 돌파구를 틀어쥘 수 있었던 사례는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비교적 수월하게 도하에 성공한 1기갑사단과 달리 2기갑사단과 10기갑사단은 상당한 악전고투를 겪어야 했다. 특히 2기갑사단의 경우 마스 강변까지의 기동로에 은/엄폐물이 거의 없는데다 프랑스군 포병의 위협에 사단의 좌익이 노출되어 있었다. 거기다 1기갑사단에 포병 전력을 집중시킨 터라 사용할 수 있는 포는 경포 뿐이었는데, 아르덴 어딘가에서 탄약 운반 차량들이 헤메고 있는 통에 그나마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먼저 도하를 마친 1기갑사단 병력들이 그나마 돌파구를 형성한 덕에 2기갑사단은 도하를 성공할 수 있었는데, 이는 주공을 스당 서쪽의 개활지로 잡지 않는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하는 사례였고, 스당을 주공으로 지향하는 것을 반대했던 클라이스트도 주공 방향 문제에 있어서 구데리안이 옳았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이 시각, 서부전선을 통틀어 가장 기이한 사건으로 알려진 55보병사단의 와해가 발생한다. 사단 사령부가 위치하고 있던 불송 일대에 독일군 기갑부대가 출몰했다는 풍문이 돌면서 사단 전체가 사실상 붕괴되어 버린 것. 사실 그 시점에 불송 일대에는 기갑부대는 커녕 독일군 보병 하나 없었다. 불송 북쪽의 고지에서 포탄이 발사되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한 프랑스군 포병 장교가 혹시 전차포탄일수도?라는 뉘앙스의 보고를 했고, 이 보고가 순식간에 확산되면서 불송으로 독일군 기갑부대가 몰려오고 있다!로 와전된 것. 순식간에 단 몇 시간만에 55보병사단은 산산조각나며 상당수의 병력이 방어선을 방기하고 말았다. 이후 이 사태의 원인 규명을 위한 조사위원회에서 당시 55보병사단에 복무한 장교와 병사들은 나는 전차를 보았다능! 거짓말 아니라능!이라며 팔딱댔지만...독일군 기갑부대는 이러한 붕괴가 발생한 지 12시간 가까이가 지나서야 나타났음이 밝혀졌고, 보고서들은 이 사태를 집단환각 증상으로 평가했다.

6.4.2. 프랑스군의 느렸던, 너무도 느렸던 역습

한편 연합군 역시 이러한 사태에 대응해 역습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독일군이 형성한 돌파구는 아직 좁았고, 1기갑사단이 도하하며 설치한 골리에의 교량을 제외하면 중화기를 나를 수 있는 통로가 없었다. 이 교량에 연합군은 공군력을 집중시켰고, 10군단은 2군에서 2개 전차대대를 배속받아 증강된 2개 보병연대를 중심으로 한 역습을 지시했다. 더불어 2군 사령관 욍치제르 장군은 총사령부에서 2군 지역으로 배속된 21군단에 군 예비대 상당수를 추가시켜 군 차원에서의 역습을 준비했다. 이 역습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만 했다면 독일군의 돌파는 아마 실패로 돌아갔을 것이다. 제대로 들어가기만 했다면 말이다.

우선 공군 차원에서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독일군은 골리에 교량 일대에 조밀한 방공망을 구축했고, 가용한 공군력까지 총집결시켰다. 반면 연합군 공군은 제대로 집중되지 못했으며, 그나마도 축차적으로 투입하며 참혹한 피해를 입었을 뿐이다. 그 결과 결국 골리에 교량의 파괴에 실패했으며, 구데리안은 19기갑군단의 주력을 마스 강 너머로 도하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타이밍에 10군단의 역습이 성공했다면 어떻게든 저지할 수 있었겠지만...역습의 지휘를 맡은 55보병사단장 라퐁텐 장군은 문서화된 명령의 서식을 수령하기 전까지는 역습을 수행할 수 없다며 공식 명령을 받기 위해 사단 지휘소를 떠나기까지 했던 것이다. 결국 라퐁텐은 역습 명령을 수령한지 아홉시간이 지난 5월 13일 오후 8시에 후에 역습을 지시했고, 역습이 시작된 것은 열한시간 반이 지난 이후였다. 덤으로 역습 명령의 수령 자체도 늦었다. 군단장 그랑샤르 장군이 역습 명령을 최초로 발한 것은 16시. 라퐁텐은 이 최초의 명령으로부터 4시간이 지나서야 역습 명령을 수령한 것이다! 그나마도 우익의 역습 병력이 지체되고 있어 본래 계획보다 반 규모에 지나지 않는 병력으로 역습에 임하게 된 것이다.

55사단이 공황에 빠진 상황이긴 했지만 방어 거점의 상당수가 건재했다는 점, 예비대가 아직 남아 있었다는 점, 그리고 역습 명령 하달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전투 의지와 사기가 왕성했고 전세가 결코 불리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독일군을 밀어붙이기에 충분했고, 이 시점에 역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게 연합군 입장에서는 천추의 한이라 하겠다. 더 희극이 된 것은 우익을 맡은 역습 부대는 대규모 탈영병의 물결에 휘말려서 역습이 지체되다가 상급 부대의 명령을 수령하기 위해 사단 지휘소로 이동하던 연대장 모네 중령이 탈영 혐의로 체포되었다는 것. 근데 모네 중령은 레종 도뇌르 훈장 수훈 경험이 있는 전쟁영웅 출신이었다.(...) 이런 양반이 탈영할 리가 없잖아 이 XX들아! 심지어 모네 중령은 이걸 빌미로 중령 계급을 박탈당하고 레종 도뇌르 훈장 수훈자 명단에서 제명되기까지 했다. 답이 없다

한편 플라비니 장군이 지휘하는 21군단은 2군 차원의 역습을 위해 2개 군단급의 부대를 동원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군단 직할로만 3흉갑기병사단과 5경기병사단, 3차량화보병사단에 1기병여단 등을 보유했고, 여기에 2군 예하의 예비대와 10군단의 잔여 병력 등을 배속받은 것이다. 문제는 이들 역시 턱없이 느리게 움직였다는 것. 5월 14일 6시에 르 쉔느에 대기하고 있던 3흉갑기병사단은 13시가 돼서야 기동을 시작했다. 플라비니 장군이 지휘하는 역습부대 전체는 무려 17시 30분이 되어서야 공격 준비를 완료했다. 이 시점에 구데리안이 측방 위협을 무시하고 돌격을 주도하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프랑스군이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였다고까지 할 시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다시금 연합군에게는 천추의 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더 큰 병크가 터지고 말았으니...겁에 질려 후퇴한 병력들과 역습에 실패한 10군단 예비대를 확인한 플라비니 장군이 역습 자체를 취소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집중되어 있던 기갑부대를 산산조각으로 해체해 분산 방어에 투입하기까지 한 것.

그리고 이러한 프랑스군의 역습 좌절은 스당 역습에 있어 핵심 교두보가 될 수 있는 스톤을 공세적 방어의 일환으로 10기갑사단으로 공격한 구데리안의 공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와해되어 후퇴하는 프랑스군이 플라비니의 역습 포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감안하면, 만슈타인이 제시한 개념을 구데리안이 현실로 옮긴 셈이다. 그리고 프랑스군과 독일군은 이 스톤 고지를 두고 피로 피를 씻는 치열한 접전을 벌이게 된다. 그로스도이칠란트연대를 배속받은 10기갑사단은 5월 15일 새벽에 스톤 고지 일대에 출현했고, 선형 방어 사상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는 프랑스군은 스톤 고지를 공격해 탈환해야 한다는 일념 하에 스당에의 역습까지도 포기하고 스톤 고지 일대에서 고착되어 버렸다. 그 사이 구데리안이 지휘하는 19기갑군단의 주력은 빠르게 서쪽으로 진격할 타이밍을 벌었던 것이다.

북동부전선을 총괄하는 조르주 장군은 욍치제르 장군에게 분노를 터뜨리며 스당 일대에의 전면 역습을 재촉했다. 하지만 이미 분산되어 버린 병력을 재집결시키는 것은 매우 난해한 작업이 되어 버렸고, 5월 15일 14시에 예정되었던 스당 일대에 대한 역습은 18시 30분까지 늦춰지다 결국 취소되었고, 스당이 아닌 스톤 고지에 대한 반격을 준비하게 되었다. 더 웃기는 것은 취소 명령을 제 때 하달받지 못한 2개 전차중대가 국지적인 역습에 나섰고, 독일군을 유린할 했다는 것. 샤르 B1 bis 전차는 독일군의 37mm Pak 36 대전차포로는 거의 난공불락에 가까운 대상이었으나, 이 2개 중대는 자기들만 역습중인 것을 알고 급히 후퇴했다. 결국 독일군을 스당 일대에서 저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는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사라졌다. 프랑스군은 9군과 신편된 6군을 바탕으로 독일군의 진격을 차단하려 했지만, 채 방어진형을 재구축하기도 전에 19기갑군단은 프랑스군이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의 가공할 속도로 기동하고 있었고, 5월 16일 아르덴 운하의 서쪽 구릉지대를 돌파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드디어 낫질이 대서양을 향해 뻗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프랑스군의 이런 형편없는 대응은 프랑스군의 극도로 경직된 육군 교리에 큰 문제가 있었다. 프랑스군은 1차대전의 교훈을 통해 화력 팩터가 기동 팩터를 충분히 압도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육군 교리를 정립했고, 화력 팩터의 집약적 운용을 위해 매우 정형화된 전투 개념을 도입했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 교리는 근본적으로는 1차대전 당시 프랑스군이 정립한 군사 교리와 다를 바가 없는 형태였고, 오히려 그 통제를 더욱 강화한 방식이었다. 이런 교리는 기동 팩터가 화력 팩터를 다시금 압도하기 시작한 2차대전과는 전혀 맞지 않는 방식이었다는 것이 프랑스군의 무력한 역습에서 드러난 것이다.

6.4.3. 41기갑군단과 15기갑군단의 마스 강 돌파

한편, 본래 구데리안의 19기갑군단과 병진하기로 되어 있었던 라인하르트의 41기갑군단 주력은 아르덴의 끔찍한 교통 정체 속에 갇혀 있다시피 하다가 병력의 진격이 매우 늦어지고 있었다. 2보병사단은 5월 14일에 이르러서야 .도착할 수 있었고, 특히 8기갑사단은 구데리안이 이미 아르덴 운하 서쪽까지 진출한 5월 16일에야 마스 강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기계획된 시간인 5월 13일 16시에 마스 강변에 도착한 것은 6기갑사단 예하의 1개 보병대대 뿐이었고, 어찌어찌 몽테르메를 확보하여 작은 교두보를 만들기는 했지만 프랑스군의 방어 태세가 확고하여 위기를 겪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전선에서의 돌파를 성공하게 만든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기갑집단의 의미를 불신하는 보수적인 독일군 장군단이었다. 몽테르메에서의 정체를 핑계로 A집단군 사령부는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을 12군에 배속하려고 했고, 라인하르트의 41기갑군단을 12군 예비로 돌리면서 6기갑사단만 전선에 남기겠다고 협박명령했다.

지금까지 충직하게 야전군의 지시를 따라 왔던 클라이스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제대로 빡쳐서A집단군의 명령을 완전히 무시하고 예하 전 병력에게 공세를 지시했고, 6기갑사단은 고작 네시간 반만에 견고한 프랑스군의 방어선을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돌파에 성공한 6기갑사단장 르너 켐프 장군은 도하를 완료한 가용 부대 전체를 묶어 프랑스군 후방 종심으로의 돌파를 감행했고, 결국 몽코르네까지 성공적인 돌파를 이뤄낸 6기갑사단은 19기갑군단과 조우하면서 프랑스 6군이 구축한 방어선을 무력화시켰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마스 강 중부 일대의 프랑스군 방어선은 사실상 완전히 붕괴되었다. 그리고 클라이스트 기갑집단 역시 존속할 수 있었다.

마스 강 북부에서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의 우측방 엄호를 담당하게 된 헤르만 호트의 15기갑군단은 프랑스 9군의 좌익 부대가 투입될 지역을 돌파하게 되었다. 15기갑군단은 벨기에군이 구축한 장애물과 아르덴 지역에서 지연전을 펼치는 프랑스군 경기병사단인 1경기병사단과 4경기병사단을 극복해야 했다. 15기갑군단 산하에 있는 2개 기갑사단 중 에르빈 롬멜이 지휘하는 7기갑사단은 5기갑사단보다 앞서 나가고 있었고, 5기갑사단 예하 31전차연대를 추가로 증원받아 마스 강 도하를 시도했다. 5월 12일 기준으로 기존의 목표였던 디낭의 교량은 도하 전에 폭파되었고, 폭파가 늦어진 이브와의 교량도 독일군이 장악하기 직전 폭파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브와로부터 3km 남쪽에 위치한 우(Houx) 지역을 흐르는 마스 강에는 하중도가 있었고, 이 하중도와 강의 양안을 잇는 제방은 수위 조절 문제로 인해 폭파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 제방을 통해 5기갑사단이 도하를 시도하게 되었다. 7기갑사단은 우 남부와 디낭 북쪽에서 교두보를 형성하였고, 프랑스군의 격렬한 저항을 받으면서도 결국 우 남쪽의 교두보를 통해 마스 강을 도하했다.

도하 이후 7기갑사단은 5월 14일 옹에를 목표로 한 공세에서 롬멜이 전사할 뻔한 위기를 겪었다. 참고로 이 방향으로 7기갑사단 전체 전력이 투입되게 된 개요가 재미있는 게, 선봉 부대를 이끌던 비스마르크 대령에게서 옹에에서 포위되었다(eingeschlossen)라는 비보를 듣고 롬멜이 직접 진격한 데 이어 4군 사령관 귄터 폰 클루게 상급대장이 2군단 예하대까지 투입을 고려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포위되었다는 게 아니라 옹에에 도착했다(eingetroffen)을 무선상의 발음 문제로 잘못 알아들은 것이었다. 결국 간신히 옹에를 함락시키며 마스 강 서쪽 12km에 위치한 모르빌까지 진출, 프랑스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5기갑사단 역시 도하에 성공하며 오르바스티아를 함락시키는 등 맹활약을 펼쳤는데, 이 와중에 5기갑사단장 하르틀리프와 롬멜 사이에 교량 부설용 자재를 놓고 갈등이 벌어진다. 자세한 내용은 에르빈 롬멜 항목 참조.

6.4.4. 승패가 갈리다: 프랑스군 최후 역습 실패

한편 이 공세에 대해 프랑스군이 역습을 시도하지만... 이번에도 너무 느렸다! 본래대로라면 4경기병사단의 일부를 배속받은 5차량화보병사단과 1경기병사단의 일부를 배속받은 18보병사단, 그리고 6전차대대를 바탕으로 역습을 감행해야 했지만...우선 제일 먼저 독일군과 접촉한 18보병사단은 지엽적인 반격을 몇 차례 시도한 것을 제외하면 전혀 역습을 시도하지 않았다. 11군단장 마르탱 장군이 정오에 18보병사단 지휘소를 방문할 때까지 총 7시간 반 동안 2개의 교두보가 형성되고 있는 꼴을 그냥 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결국 마르탱의 불호령을 받아서야 상황인식을 한 지 8시간이나 지난 20시에 역습이 시행될 예정이었는데, 그나마도 21시로 늦춰졌다가 보병들이 지체되어 끝내 역습을 중단했다. 5차량화보병사단의 경우는 오전 2시에 독일군 보병들의 침투를 확인했는데, 5시간 반이 지난 이후에야 대응을 결심했고, 최종적으로는 오후 2시에 역습을 감행하기로 했는데 이나마도 1시간이 늦춰졌다. 거기다 루프트바페의 공습을 받아 역습에 나선 보병대대가 후퇴해야 했다. 재역습은 오후 8시 15분으로 잡혔지만, 보병의 이동이 지연되어 9시, 그리고 10시까지 연기되었다. 이러더니 역습을 지원하기로 한 포병대가 야간을 핑계로 작전 불가를 주장하며 아침까지 역습이 연기되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5월 14일 2군단이 역습에 나서 오르바스티아 일대를 잠시 탈환하긴 했지만, 이미 독일군은 옹에 남부까지 진출한 이후였다.

군단급 역습을 통한 대응에 실패한 프랑스군은 야전군 예비를 동원한 반격을 기도했다. 본래 1군 휘하에서 겜블루의 간격을 메우기 위한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던 1흉갑기병사단이 디낭 방면으로의 역습 준비명령을 하달받은 것이다. 하지만 5월 14일 오전 동안을 허비한 이후 오후 2시에 이르러서야 역습 명령을 전달받을 수 있었고, 2시간이 지난 이후에야 사단 선두 부대가 기동에 나섰다. 그리고 주둔지 35km 북쪽의 플라비용 북부까지 향하는 데 5시간이 지나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만약 1흉갑기병사단이 조금만 더 기동력을 발휘했다면 7기갑사단의 기갑부대를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는 기회가 이 시점에 주어졌다. 1흉갑기병사단이 숙영지를 펼친 곳에서 고작 5km 떨어진 곳에 7기갑사단의 전차연대가 숙영지를 짰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샤르 전차의 조루 수준인 항속거리였다. 연료 수송 부대가 하필 부대 후미에 처져 있다가 헤메는 통에 보급을 받지 못한 1흉갑기병사단은 절호의 호기를 놓치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간신히 연료를 보급받나 했더니 공습으로 연료 수송 차량 상당수가 거덜나면서 보급이 더욱 늦어졌고, 간신히 연료를 보충하는 동안 독일군 기갑부대가 1흉갑기병사단을 기습했다. 선두에 선 것은 롬멜이 이끄는 7기갑사단. 다만 이 교전을 통해 롬멜이 1흉갑기병사단을 섬멸했다거나 1흉갑기병사단이 독일군 5기갑사단/7기갑사단의 협공에 당했다는 것은 잘못이다. 이유는 후술한다.

롬멜은 이후 5기갑사단 31전차연대가 전장에 도착하자 이들에게 전장을 인계하고 빠져나왔다. 한 마디로 말하면, 프랑스군 1흉갑기병사단이 상대한 것은 한 번에 1개 연대씩 총 2개 연대의 독일군 기갑부대였다. 결국 1개 기갑사단과 1개 전차연대의 대결이었는데...프랑스군이 발렸다. 말 그대로. 프랑스군 기갑부대는 무전기의 부재로 제대로 된 지휘통제를 받지 못하고 우왕좌왕했으며, 독일군 기갑부대의 협공 앞에 말 그대로 혼란스럽게 싸우다가 각개격파를 당했다. 전차의 개별 성능에서는 안드로메다급 차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연료의 부족과 지휘체제상의 혼란이 1흉갑기병사단에게 파멸을 부른 것이다. 결국 플라비용 전차전에서 독일군이 프랑스군 종심 깊숙이 진격할 기회를 얻고 제대로 활용하면서 9군이 펼치고 있던 방어선이 조각조각나고 말았다.

6.5. 강철의 대격돌 - B집단군의 딜방어선 공격

A집단군이 진격하는 동안 관심에서 벗어나 있던 B집단군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다룰 필요가 있다. 상술한 바와 같이 B집단군은 주공 방향에 있어서의 혼선을 주기 위해서 A집단군의 우측면에서 강력한 조공을 가하고 있었고, 연합군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딜 계획을 발동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B집단군은 이 딜 계획을 통해 동원된 연합군 전력을 최대한 오래 붙들어 놓을 필요가 있었고, 그 선두에 선 것이 회프너가 지휘하는 16기갑군단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출격한 것이 프리우 장군이 지휘하는 프랑스 1군 예하에 배속되어 있던 기병군단이었다. 시간을 살짝 거슬러 올라간 5월 12일, 연합군과 독일군의 가장 날카로운 창 끝인 기병군단과 16기갑군단은 안뉘 일대에서 대대적인 정면 충돌을 펼치게 되었다.

흔히들 이 전투에서 각기 415대와 623대라는 전차 수만 가지고 독일군이 월등히 우세한 전력을 바탕으로 싸움을 걸었다고들 평가한다. 하지만 이들 중 실질적인 전투력이 될 수 있는 전차의 수, 그리고 보조 전력의 수를 감안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16기갑군단이 예하에 두고 있던 전차 623대 중 실질적으로 프랑스군의 전차와 맞대응할 수 있는 3호/4호 전차는 각기 73대/52대에 불과했다. 1호/2호 전차가 사실상 전력외나 다름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는 415대 VS 125대라고 봐도 무방할 상황이었던 것이다. 거기다 기병군단이 보유하고 있는 장갑차들은 1호/2호 전차에 필적할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당장 기병군단 예하에 있던 AMR-ZT-63은 1호/2호 전차와 비등한 수준이었고, 90여대의 파나르 178 장갑차는 4호 전차를 격파할 수 있는 25mm 주포를 장착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프랑스군의 부족한 기갑전 교리/선형 방어전술에 있었다.

프랑스군이 전차 성능 면에선 월등히 앞서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5월 12일 오전 독일군 전차들이 안뉘에서 프랑스군 기갑부대와 정면 격돌을 펼쳤을 때, 독일군은 전차전에서 월등히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기갑전에 있어서의 교리가 명확히 정립되지 않은 프랑스군은 무전기의 부족으로 인해 확실한 지휘 통제를 받지 못했으며, 제병협동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독일 공군의 맹폭을 받은 프랑스군 기갑부대는 전차전에서 벌어들인 이익을 다 까먹고 말았다. 더불어 구태의연한 선형 전술을 기갑부대에 적용하면서 기병군단은 상대적으로 분산되어 운영되어야 했고, 회프너는 이 약점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5월 13일, 16기갑군단은 선형으로 늘어선 기병군단 예하 부대 중 3경기계화사단의 책임 구역에 전체 전력을 집중시켜 돌파에 성공했다. 이 때에도 프랑스군이 전과는 더 뛰어났다. 프랑스군이 전차 105대를 잃는 동안 독일군은 160여 대의 전차를 잃은 것. 하지만 기갑전에서 선형 방어전술을 고집한 탓에 3경기계화사단이 큰 피해를 입고 물러서자 2경기계화사단 역시 후퇴해야 했고, 프랑스 기병군단 전체가 전장에서 물러나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더군다나 기병군단은 후퇴하면서 제대로 된 지연전조차도-그렇다, 본래 임무인 지연전조차도!-수행하지 못했는데, 지연전은 커녕 접적조차 유지하지 못했고, 일렬 종대 대형으로 신속한 철수에만 급급했다. 독일군 지휘관들은 이 상황을 노려 프랑스군의 전열에 끼어들었고, 포병은 피아식별조차 되지 않아 독일군을 제압하지 못했다. 이런 혼란 상황 속에서 회프너는 딜 방어선 일대까지 빠르게 육박하여 공세를 감행했다. 초기에는 보전합동이 되지 않아 4기갑사단이 큰 피해를 입고 회프너 역시 공세의 중단을 지시했지만, 명령을 수령하지 못한 3기갑사단이 프랑스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며 16기갑군단 전체가 겜블루 일대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한다. 이 와중에 프랑스군은 또 다른 실책을 범하는데, 후퇴한 기병군단을 대대급으로 분할하여 각 보병사단에 배속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결국 집중된 화력으로 독일군에 대해 역습을 감행하는 선택지가 불가능해지면서 프랑스군은 독일군에 대해 작전술적 차원에서 역습을 감행할 수 있는 예비대를 상실하고 말았다.

요약하자면, A집단군의 측면을 위협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세력인 기병군단이 B집단군의 강력한 조공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으면서 A집단군의 쾌속 진격이 이어질 수 있었다. 비록 전술적 차원에서는 16기갑군단이 큰 손실을 입었다. 당장 343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던 4기갑사단은 5월 16일 오전 기준으로 137대의 전차만이 가용한 상태였고, 이 중 4호 전차는 4대에 불과했다. 하지만 작전술적 차원에서는 독일의 공격이 제대로 먹혀든 것이다.

6.6. 대서양을 향한 질주, 그리고 제동

하지만 이러한 쾌속 진격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장군단 내부는 심각한 노선 대립으로 곪아들어가고 있었다. 이는 전통주의자와 혁신주의자 사이의 갈등으로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문제는 과거의 선형 전술을 어떻게인식하느냐였다. 전자의 경우 기갑부대가 고속으로 적 후방을 향해 진격하는 것은 측방을 그대로 노출하는 위험천만한 행위였다. 후자의 경우는 구데리안의 발언을 인용하는 것으로 설명을 대체할 수 있다. "기갑부대에게 측방 노출은 가장 유리한 상황을 의미한다. 그것이 길면 길수록 더 유리하다." 이 두 노선의 갈등이 결국 폭발한 것이 5월 17일 구데리안이 일시적으로 19기갑군단장 자리에서 해임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 사건을 보기 이전에,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가 어떤 위치에 있는 인물인지에 대해 먼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클라이스트는 구데리안으로 대표되는 혁신주의자와 보수적인 독일 장군단 사이에서 중간 조정자 역할을 맡고 있는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클라이스트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클라이스트는 귀족 가문 출신의 기병장교 출신 인물이다. 기병은 전통적인 프로이센 귀족 군인 계급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는 병과였다. 그리고 이 기병으로 대표되는 구 프로이센 귀족 장교들은 독일군의 중추 파벌 중 하나였으며, 앞서 언급한 전통주의자를 대표하는 집단이었다. 실제로 1930년대 후반 즈음 기갑사단 대신 경사단(Leichte Division)이라고 하는 차량화된 기병사단 비슷한 것이 창설된 것 역시 보수적인 프로이센 귀족 장교들과의 정치적 타협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귀족 장교 출신인 클라이스트가 기존 귀족 장교층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와는 별개로, 클라이스트는 새로운 교리인 기동/기갑전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이해도를 가진 인물로 보인다. 구데리안은 클라이스트의 역량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유고슬라비아 침공/독소전쟁 등에서 보인 클라이스트의 역량과 전과는 그의 군사적 재능이 결코 범용한 장군 수준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이 부분에서 클라이스트는 보수적인 귀족 장교층과 새로이 등장한 소장파 기갑 장교들 사이를 조율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구데리안이 지나칠 정도로 혁신적이었다는 것. 보수적인 기성 장교층과 구데리안 사이에서 클라이스트는 필사적으로 양자 사이를 조율하려 노력했지만 구데리안의 급진적인 발상과 기동은 클라이스트가 조율할 수 있는 한계 너머까지 치닫고 있었다. 심지어 클라이스트가 하달한 전진 가능 범위 너머까지 구데리안이 이미 진격해 있는 경우가 발생하기까지 하면서 결국 클라이스트와 구데리안 사이의 갈등이 팽배하게 되었고, 또 빡쳐서 클라이스트가 일시적으로나마 구데리안를 직위해제시키는 과정까지 이르렀다. 이 갈등은 일단 일시적으로나마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을 배속받았던 12군 사령관 리스트가 직접 둘 사이를 조율해야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클라이스트 기갑집단 산하의 기갑부대들은 5월 17일과 5월 18일 양일간을 사실상 제자리걸음으로 보내야 했다. 하지만 이 정지 사건은 보수적 독일 장교단에게서만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12군 사령관 리스트나 A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가 구데리안으로 대표되는 기갑부대의 고속 전진을 달갑게 여겼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궁극적인 정지의 책임은 바로 보수적인 독일 장군단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돌프 히틀러에게 있었다. 도박사적 기질로 폴란드 침공과 프랑스 침공을 기획했던 히틀러는 작전이 최고의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순간 스스로 작전에 제동을 걸어 버렸던 것이다. 그는 1914년 마른 전투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 마른 강을 넘어 파리를 향해 돌격을 거듭하던 독일군 우익은 노출되어 있던 측방에 프랑스군의 강력한 역습을 얻어맞고 그대로 주저앉았으며, 그 결과는 결국 기나긴 참호전으로 이어졌다. 히틀러는 A집단군의 엄청난 고속 진격과 측방 차장을 신경쓰지 않는 기갑부대에게서 마른의 위기를 느꼈는지도 모를 것이다. 베니토 무솔리니에게 5월 18일 히틀러가 보낸 편지에서 이런 위기감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1914년의 마른 기적이 더 이상 반복되지는 않을 것이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답답해진 것은 할더였다. 할더는 만슈타인 계획을 처음 보고받은 시점에서 보였던 우유부단해 보일 정도의 소극적 태도를 벗어던진 채 만슈타인보다 더 만슈타인다운 계획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정지 명령을 받은 상태에서 대서양 지역에 대한 포위망은 B집단군과 일부 기갑부대만으로 형성하고, A집단군의 정예부대를 투입하여 독일군이 정지한 동안 엔 강과 솜 강을 따라 방어선을 형성하려 하는 연합군을 포위, 대서양과 남측방 일대에서 동시에 거대한 포위망을 펼쳐 단 한 번의 승부로 연합군 지상군을 격멸한다는 것. 하지만 히틀러는 거의 신경쇠약 상태로 이 계획마저 강력하게 거부했다. 결국 남측방 일대를 공세적으로 방호한다는 만슈타인의 구상은 구데리안 기갑군단에게서 잠깐 꽃을 피우려 하다가 히틀러에 의해 채 피기도 전에 꺾여 버린 것이다.

결국 히틀러는 총참모부의 전권을 박탈, 최종적으로 남측방 일대에 2군과 4군, 거기에 12군을 투입하여 방어선을 형성한다는 계획을 지시했다. 하지만 이미 공황 상태에 빠지다시피 한 연합군이 남측방에서 역습을 당시 걸어올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당시 연합군 주요 인물들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북동부전선 사령관 조르주는 5월 14일 새벽 스당 돌파 소식을 듣고 울음을 터뜨렸으며, 그 날 저녁 프랑스 수상 레노는 윈스턴 처칠에게 스당 방면이 돌파되었으며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는 내용의 전문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처칠과의 통화에서 레노는 우리가 당했습니다. 우리가 이 전쟁에서 패하고 말았습니다!라고 선언했을 정도. 그리고 15일 저녁 프랑스군 총사령관 가믈랭은 공개적으로 전쟁에서의 패배와 더 이상의 희망이 없음을 선언했다. 유일한 전략적 예비대인 7군이 딜 방어선에 투입되면서 프랑스군은 투입할 수 있는 예비대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이 와중에 그 유명한 샤를 드 골의 역습이 감행되어 국지적인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후에 중부 나토군 총사령관에 오른, 당시 대위였던 그라프 폰 킬만스에크는 드 골이 이끄는 4흉갑기병사단의 역습이 프랑스군의 유일한 "시간적, 공간적, 방향 면에서 완벽한 역습"이었다는 평가를 내렸다. 4흉갑기병사단이 받은 최초 임무는 엔 강 유역에서의 방어선 구축이었지만, 드 골은 과감한 역습을 지시했고, 독일군의 후위인 몽코르네 지점을 정확히 찌를 수 있었다. 4흉갑기병사단은 기존의 프랑스군이 보여 온 운용 방식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고속/집중된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독일군의 기민한 대처와 항공우세, 그리고 완편되지 못한 전력 등의 한계로 인해 4흉갑기병사단의 역습은 국지적인 차원에 그쳤을 뿐이었다. 히틀러의 편집증적인 남측방에 대한 위협이 연합군 전체의 작전술적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은 여전히 제로에 가까웠다.

한편 이러한 정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 명령을 사실상 무시하고 미친듯이 진격을 감행하던 독일군 부대가 있었으니...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에르빈 롬멜이 지휘하는 7기갑사단이 그들이었다. 정지명령이 떨어진 상태에서 전면적인 진격은 명령에 의해 금지되어 있었으나, 4군 사령관 클루게 상급대장은 역습 징후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보고받고 서쪽으로의 제한된 진격을 시도하기로 했다. 호트는 이 명령을 받고 7기갑사단에게 아벤 방면으로의 공세 명령-보다 엄밀히 따지자면 작전명령이라기보단 공세 준비 하달 명령이었지만-을 내렸다. 하지만 군단의 명령이 도착했을 때 이미 롬멜은 아벤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보다 엄밀히 따지면, 사단장과 전차부대만.

그리고 여기서 롬멜은 한바탕 대대적인 활극을 펼친다. 101요새사단의 방어선을 돌파한 7기갑사단은 그 후위의 2차 방어선까지 강력한 공세를 가해 돌파했고, 형성된 돌파구를 따라 종심 깊이 진격을 감행했다. 그리고 우연하게도, 롬멜의 진격로 일대에 프랑스군 5차량화보병사단의 주력과 18보병사단/1흉갑기병사단의 잔존 병력 일부가 숙영지를 잡고 있었다. 7기갑사단은 야간 숙영을 준비중이던 프랑스군을 완벽하게 유린하고 5월 17일 자정에 아벤에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 시점에 1흉갑기병사단 최후의 전차 16대가 독일군 기갑부대와 혈전을 펼쳐 큰 피해를 입혔지만, 결국 13대의 전차를 상실하고 급히 퇴각했다.

롬멜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서쪽으로 더욱 깊숙히 진격, 랑드르시까지 진출해 상브르 강을 건널 수 있는 교량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5월 17일 새벽 6시 30분, 롬멜은 단 2개 대대만 동반한 채 상브르 강을 건너 르카토 일대까지 진출한 상태에서 일단 진격을 멈추었다. 이 과감한 활극이 펼쳐지는 동안 후방에 남겨진 사단의 후방지휘소는 사단장과 전차연대가 사라졌다는 데 급분노한 군단에게 쪼인트를 까이고서식명령을 수령해 사단장에게 전달하려 노력했지만, 기이하게도 롬멜이 멈춰야 할 타이밍에 롬멜의 무선 교신이 연이어 끊기면서 이 명령은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결국 르카토에서 롬멜은 진격이 늦어지는 본대를 데려오기 위해 3호 전차 1대와 지휘장갑차만 동원해서 프랑스군 패잔병이 우글거리고 있을 동쪽으로 돌아가는 모험을 떠났다. 그나마 귀환 도중 3호 전차는 고장이 났으며, 이 와중에 롬멜은 지휘장갑차만 이끌고 퇴각하던 프랑스군들까지 포로로 잡아 아벤으로 진격하고 있던 사단 본대와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장대한 활극은 연장된 마지노선으로 불리던 프랑스군 방어선을 돌파하며 돌파구를 형성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어졌다.

6.7. 연합군의 국지적 역습, 그리고 됭케르크

결국 5월 19일 할더는 끈질긴 설득 끝에 히틀러에게서 대서양 연안까지의 자유로운 진격을 마침내 승인받았다. 할더는 16기갑군단과 39군단의 지휘권을 헤르만 호트에게 넘겨 기갑군 규모의 기동부대를 편성했고, B집단군이 격렬한 공세를 통해 연합군을 붙들어 둔 사이 맹렬한 기세로 대서양 해안까지 진격하기 시작했다. 할더는 이 진격 당시를 회상하며 "당시 우리는, 혈통 좋은 명마가 기수에게 고삐를 잡혔다가 갑자기 입에 물린 재갈이 풀려 결승선으로 질주해 승리한 듯한 느낌이었다."라고까지 할 정도였다.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은 됭케르크로, 호트 기갑집단은 아라스로 격렬히 질주하며 연합군의 후방에 쐐기를 박아넣고 있었다.

그리고 이 과감한 진격으로 인해 기갑집단 중심의 선두부대와 후위부대 사이에 상당한 간격이 발생했고, 특히 아라스 일대에서는 폭 40km 정도의 회랑이 형성된 상태였다. 연합군이 이 일대를 찌른다면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 마지막 찬스에서조차 연합군이 제대로 그 찬스를 살려내지 못하고 말았다는 점에 있었다.

일단 5월 19일 가믈랭 장군이 작전명령 12호를 발령해 조르주 장군에게 독일군 선두부대 후방의 간격을 향해 "기동성을 갖춘 특수임무부대"의 진격을 명령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게 뭔가 구체적인 계획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명령문에서 구체적인 요구 사항은 하나 뿐이었다. "모든 것은 1분, 1초에 달려 있다."는 한 문장. 문제는 이 날 가믈랭이 보직에서 해임되고 74세의 노장 막심 베강이 그 자리에 올랐다는 것. 베강은 기본적으로 1차대전적 지휘 마인드를 가진 인물이었고, 직접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가믈랭의 즉각적인 역습작전 지시를 취소해 버렸다. 5월 20일 독일군이 이미 솜 강 하구의 아브빌에 이르렀다는 걸 생각하면 이는 사실상의 미친 짓이었다. 명령이 취소되고 베강이 한 일은 신임 내무장관 예방, 벨기에로 직접 날아가서 군 사령관/벨기에 국왕 예방이었다.

그리고 이 사이, 역습에 적극적이지 못한 프랑스군에게 정말 빡친 영국군 총참모장 아이언사이드 장군이 독자적으로 작전권을 행사해 아라스 일대에서의 역습을 감행하기로 했다. 아이언사이드는 영국 대륙원정군 사령관 고트 장군과 함께 1집단군 사령관 비요트 장군을 방문해 역습 계획에 합의했다. 1개 기갑여단으로 증강된 영국군 2개 사단과 프랑스군 2개 사단, 거기에 1경기계화사단을 다시 배속받은 기병군단이 포함된 대대적인 계획이었고, 이 계획이 제대로 성과를 냈다면 독일군은 거덜이 났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거덜이 났을 거란 표현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기병군단과 1기갑군단이 맞붙은 안뉘 전차전에서 독일군이 입은 피해를 다시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이 와중에 아이언사이드가 역습에 소극적인 비요트의 멱살을 틀어쥐기까지 했었다.

문제는 사소한 부분에서 시작되었다. 사실상 절망에 빠져 있는 상태였던 비요트와 1군 사령관 블랑샤르는 작전의 전권을 5군단장 알트메어 장군에게 위임했다. 그런데 아이언사이드가 생각한 역습의 시점과 알트메어가 생각한 역습의 시점이 들어맞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언사이드는 무슨 일이 있어도 5월 21일 공세를 시작하는 것을 원했고, 그렇게 영국군을 움직였다. 하지만 블랑샤르는 알트메어에게 5월 21일부터 공세를 시작한다고 기재한 명령문을 보냈고, 알트메어는 5월 22일에나 준비가 완료된다고 보고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5월 21일의 아라스 역습은 사실상 영국군 단독으로 감행한 역습이 되어버렸다. 그 경과는 아라스 전차전 항목 참조.

결국 영국군의 아라스에서의 역습은 실패로 돌아갔다. 허망하게 3일이라는 시간을 허비해 버린 베강은 5월 22일 발표된 베강 계획에 따라 역습을 지시했다. 문제는 말은 베강 계획이지만... 처칠의 표현을 빌리자면 베강의 새로운 명령은 폐기된 가믈랭의 제 12호 명령과 비교했을 때 그만의 열정적인 어투 외에는 다른 점이 없었다는 것이며, 그나마 솜 강 남변의 3집단군이 제대로 된 역습을 실시하지 않으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5월 23일, 정말 최후의 역습을 감행할 수 있는 기회가 왔지만 아라스 역습에서 큰 피해를 입은 고트 장군은 프랑스군에 대한 신뢰를 접어버리고 전 부대를 대서양 해안으로 퇴각시킬 것을 명령했다. 더욱 심각해진 것은 1집단군 사령관 비요트 장군이 5월 21일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으면서 1집단군의 지휘 공백이 발생해 버린 것. 이 지휘공백으로 허둥지둥하던 프랑스군은 23일 예정된 역습을 계속 미루다가 결국 역습을 취소하기까지 했다. 프랑스군은 재앙을 막을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5월 24일, 독일군은 북프랑스 일대의 항구 대부분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유일하게 연합군이 통제할 수 있는 항구로 남아있는 곳은 됭케르크 뿐이었고, 대부분의 병력이 됭게르크 동쪽에서 독일군 B집단군과 접전을 벌이고 있는 상태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제 남은 것은 됭케르크 일대의 포위망을 향해 다가오는 독일군에 의한 포위 섬멸 뿐이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 바로 기적이 벌어지게 되었다. 됭케르크 일대에서 진격하고 있던 독일군이 정지해 버린 것.

자세한 사항은 됭케르크 철수작전 항목을 참조할 것. 할더와 브라우히치 등 독일군 참모부의 핵심 인사들은 어떻게든 히틀러를 설득하여 정지 명령을 취하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히틀러는 여기에 대해서만큼은 요지부동이었고, 결국 됭케르크 일대에 연합군이 방어선을 어느 정도 구축하고 다이나모 작전을 통해 주력 병력을 철수시키기 시작한 5월 26일에야 정지 명령은 취소되었다. 3일 8시간에 이르는 제자리걸음은 연합군을 완벽한 몰락으로부터 구원한 것이었다.

이 사건에 대한 독일군의 입장은 한 문장으로 요약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늘이 주신 기회를 놓쳐버렸다. 이 말은 육군 총참모부 서방육군분석과장으로 재직하던 울리히 리스 소장(1944년 12월 기준. 침공 당시는 중령이었다.)이 남긴 말이다.

7. 적색 상황(Fall Rot) - 1940년 6월

비록 한참 늦었지만, 됭게르크를 접수한 B집단군은 해안을 따라 남서쪽을 향한 공격에 나섰다. 프랑스군의 정예는 북동부전선에서 벌어진 교전을 통해 거의 붕괴되다시피 했다. 황색 상황에서 연합군이 상실한 가용 제대는 61개 사단에 이르는 숫자였다. 다이나모 작전으로 영국군의 대부분이 철수하면서 연합군에게 남은 가용 제대는 고작 65개 사단에 불과했다. 예비대를 거의 상실한 연합군의 입장에서는 돌파된 전선을 메울 병력마저 사치에 불과했다. 적색 상황에 이른 시점에 연합군이 방어해야 하는 전선은 965km에 달했던 것이다. 이 시점에 독일군의 가용 제대는 142개 사단에 달했고, 독일은 영국 해협 일대의 제공권까지 틀어쥐고 있었다. 여기에 프랑스 내의 민간인들이 대거 피난에 나서면서 연합군은 기동로마저 상실한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군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이 시점에 독일군이 펼친 공세는 예상했던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내선의 강점을 갖추고 있던 프랑스군은 강력한 저항을 펼쳤다. 다이나모 작전으로 철수했던 10만 명에 이르는 프랑스군이 재차 상륙하여 방어선에 증원되며 프랑스군의 사기는 크게 올라 있었다. 이미 패전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프랑스군이었지만, 근 한 달에 이르는 교전으로 실전 경험을 쌓은 장교단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은 강력한 저항을 펼쳐 독일군을 저지했다. 5월 23일부터 28일 사이 프랑스군은 7군과 10군을 신편하는 데 성공했고, 베강이 지휘한 고슴도치 전술을 통해 단단한 종심을 갖춘 프랑스군 방어선은 독일군에게 극심한 소모를 강요했다.

독일 B집단군이 파리를 공격하며 입은 극심한 손실은 이 시점에 프랑스군이 펼친 선전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에리히 회프너가 지휘하는 16기갑군단은 재편된 이후 감행한 공세에서 거의 20%에 이르는 장갑차량을 손실했다. 1차대전에서 경험을 쌓은 베강이 솜므 강 일대에 펼친 단단한 방어선은 독일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던 것이다. 제공권을 사실상 장악한 독일 공군의 활약이 없었더라면 공세의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독일 공군은 손실을 감수하면서도 집중 운용되었고, 그 결과 프랑스군의 기동은 상당 부분 봉쇄되었다.

하지만 독일군이 승기를 잡았다는 사실 자체는 부인할 수 없는 판이었다. 프랑스 10군은 결국 심각한 손실을 입고 물러서야 했고, 손실에 비례해서 독일군의 진격 속도는 빠르게 상승했다. 6월 10일, 프랑스 정부는 파리를 무저항도시로 선언했고, 독일 18군은 프랑스군의 파리 방어선을 곳곳에서 돌파했다. 6월 13일 처칠은 영불 최고작전회의에 참석해 영불연방의 창설을 제안했지만 이 제안은 거부되었다. 6월 14일, 결국 파리는 함락되었다. 6월 18일에 이르면 롬멜이 지휘하는 7기갑사단은 셰르부르 항을 점령했고, 이 와중에 아직 철수하지 않았던 영국군 51보병사단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 와중에 독일 C집단군은 A집단군의 마지노 전선 포위를 돕기 시작했다. 메츠 일대의 요새망을 둘러싸 알자스 일대에서의 반격을 차단하는 게 작전의 목표였다. 구데리안은 이 공세에 참여해 베르됭 일대에 편성된 마지노 선을 강타했다. 6월 15일, 호랑이 작전(Unnternehmen Tiger)이 발동되었고, C집단군은 라인 강을 건너 마지노 선에 대한 정면 공세를 감행했다. 이 작전 자체는 사실 실패로 돌아갔다. 마지노 선의 방어력은 거의 무적이나 다름없었다. 일례로, 호랑이 작전 중 마지노 선의 북단에서 벌어진 8시간 동안의 전투에서 독일군은 297명의 사상자를 냈는데, 이 공세로 프랑스군에 발생한 사상자는 2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그럼에도 방어선을 방기하고 물러나야 했는데, 지금 마지노 선에 박혀 있는 부대가 사실상 프랑스군이 보유한 마지막 정예 부대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프랑스군의 현실을 잘 알고 있는 독일군은 공세를 통해 마지노 선에 프랑스군을 잡아 놓았고, 구데리안이 지휘하는 기갑집단[32]은 쾌속으로 진군했다. 6월 17일 구데리안은 프랑스-스위스 국경지대에 위치한 퐁타를리에에 도착했는데, 이 때 구데리안의 진격 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 독일군 사령부조차도 구데리안의 진격 속도를 믿지 못할 정도였다. 이런 진격을 통해 라인 강을 도하해 마지노 선을 돌파한 C집단군 예하의 7군과 연결되며 포위망이 완성되었고, 프랑스 2집단군은 50만 명에 육박하는 포로로 전락했다.

8. 결과


(ɔ)

Office for Emergency Management. Office of War Information. Overseas Operations Branch. New York Office. News and Features Bureau.

from



프랑스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진들.

잃어버린 조국

파리에 걸려 있는 나치 독일의 깃발들.



파리에서 행진을 벌이는 독일군과 항복 조약 체결 장면.
이 동영상의 배경음악은 파리 입성 행진곡으로 1814년 프로이센군이 나폴레옹군을 무찌르고 파리에 입성한 걸 기념하는 곡으로 만들어졌다. 이후 보불전쟁, 프랑스 침공에서도 파리를 털 때마다 연주했다. 당연히 수도 파리가 먹힌 것을 축하하는 곡에 기분이 좋을 리가 없는 프랑스는 이 곡을 금지곡으로 만들어버렸다.

6월 17일, 신임 프랑스 수상 페탱은 독일에게 휴전을 제의했고, 6월 22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정전 협정 체결 직전인 21일 뒤늦게 이탈리아군이 참전하긴 했지만[33], 역시나 신나게 얻어맞고(...) 극히 작은 영토 확장을 달성하는 데 성공했을 뿐이었다. 6월 24일 로마에서 이탈리아-프랑스 사이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6월 25일 새벽 1시 35분을 기해 최종적으로 정전이 이루어지며, 비시 프랑스 정부가 수립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의 항복 사절단이 타고 온 열차의 객차를 프랑스에서 그대로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은 프랑스의 항복 조인식을 이 객차 안에서 진행했다. 조인식이 끝난 후 독일은 이 객차를 베를린으로 가져와 부수고 태워버렸다.

이 결과로 전 세계가 충격에 빠졌다. 서유럽에서 독일에 맞설 만한 유일한 육군 강국이라는 프랑스의 허무한 패배는 승자인 독일과 동맹국인 영국은 물론 다른 강대국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다. 독일군은 무적의 군대처럼 보였고 그 누구도 독일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프랑스는 공군과 육군의 불협화음과 구태의연한 전술로 독일군에게 각개격파당했고, 일부만이 다이나모 작전을 통해 영국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영국은 프랑스가 무너지면서 사실상 유럽에서 고립되어 홀로 독일과 싸우는 처지가 된다.

이후 프랑스는 둘로 나뉘어 북부는 독일의 직할 통치를 받게 되었고, 남부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했던 앙리 필리프 페탱을 수반으로 하는 비시 프랑스라는 독일의 괴뢰 정부의 지배를 받았고 프랑스 식민지 대부분이 이들 비시 프랑스에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에 영국은 자국 수호를 위해 프랑스의 식민지들에 주둔해 있던 프랑스 군함들을 기습해 모두 철저하게 침몰시켰다. 이렇게 그나마 남아있던 해군을 모두 잃어버린 프랑스는 식민지를 유지할 능력과 여기서 얻어낼 수 있는 이득도 잃어버려 전후 대부분의 식민지를 잃게 된다. 거기에 독일이 전쟁을 벌이면서 부족한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점령지인 프랑스에도 많은 부담을 줬기 때문에 프랑스 국민들의 형편도 아주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런 여러 이유로 체면도 구기고 국가 자체도 만신창이가 된 프랑스에게 있어서 제2차 세계대전은 레지스탕스자유 프랑스가 없었다면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을 흑역사가 되었다.

이로서 1년도 안 돼서 끝날 것이라 여겨졌던 서유럽 내의 분쟁은 참혹한 세계 대전이 된다.[34] 영국과 프랑스가 방어 대신 공세를 펼쳤다면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말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많다. 그 정도로 전간기부터 영국과 프랑스도 엄청난 삽질을 해댄 것이다.

이후 자신만만해진 독일은 영국 본토 항공전을 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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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당시 나치 독일의 작전기는 2천대가 넘었다.
  • [2] 하지만 당시 폴란드 정치도 독일이나 소련까지는 안되겠지만 마찬가지의 군국주의-전체주의 국가였다. 특히 1938년의 체코 분할에 나치 독일과 협력하기도 하는 등의 짓거리를 하기도 했고, 외교는 더 막장이라 1918년 건국 이후 분쟁을 벌이지 않은 주변 국가가 없을 정도였다.
  • [3] 당시 폴란드의 국가수반인 유제프 피우스트스키는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한 독재자로 죽을 때까지 권력을 휘둘렀으며, 몐주모제 연방이라는 이름으로 중세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당시의 영토를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당연하게도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는 최악이었고, 폴란드 국민들은 그런 그를 지지했다.
  • [4] 소련이 마련한 회담에서 영국-프랑스 협상단은 비행기나 열차가 아닌 배를 타고 레닌그라드에 와서 관광으로 시간을 더 많이 보냈다고 한다.
  • [5] 당시 소련과 독일은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았다.
  • [6] 영국은 실제로는 10개 사단을 파견했지만, 프랑스/독일에 비하면 매우 적은 규모다.
  • [7] 이 당시의 상황은 하츠 오브 아이언 시리즈의 확장팩 중 하나인 Darkest Hour의 1933년 시나리오에서 독일군 플레이를 해 보면 실감할 수 있는데, 국방군 재건 이벤트로 막대한 수의 사단이 생기기는 하나 제대로 완편/현대화된 사단이 없다. 이를 재건하는 데만도 긴 시간이 걸린다.
  • [8] Fall이란 말은 독일어로 Case라는 뜻. 따라서 원래는 황색 상황이라고 번역되는 것이 직역이지만 대개 황색 작전, 청색 작전(스탈린그라드), 백색 작전(폴란드 침공), 녹색 작전(체코슬로바키아 침공 계획) 등으로 번역되곤 한다. 영어권에서는 Case와 Operation을 구분해서 쓰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잘 구분하지 않고 둘 다 작전이라고 부르는 데서 생기는 해프닝. 독일에서는 Fall과 Unternehmen으로 분류한다. 일반적으로 Fall이 좀더 큰 단위로 쓰인다.
  • [9] 실제로도 당시 독일의 경제력은 프랑스의 거의 2배에 달하는 수준이었다.
  • [10] 여기에 더해 인구 비를 보면 프랑스가 이렇게 생각한 것에 합리적 근거가 있다고밖에 할 수 없다. 1차대전 개전 즈음인 1910년에 이미 독일과 프랑스의 징집 가능 인구 비는 1.6:1에 이르렀고, 1939년이 되면 그 비는 3:1 이상으로 벌어진 상태였다.
  • [11] 10월 24일 가믈랭이 내린 작전명령에 따르면 프랑스군의 방어 중점은 에스코 계획에 따르는 것이었고, 딜 계획은 어디까지나 독일군 공격 이전에 방어진지를 점령할 여유가 있다는 전제 하에서 실행할 예정이었다.
  • [12] 딜 계획에 따른 방어선은 에스코 계획에 따른 방어선이나 프랑스 국경선보다 약 7~80km 가량이 짧았다.
  • [13] 독일군은 이와 정반대의 시각을 견지하고 있었다. 몰트케의 금언 중 하나가 그런 시각을 대표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적 본대와 마주한 다음 상황까지 정확하게 예측한 계획은 존재하지 않는다."
  • [14]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에서 독일 1기갑군을 지휘한 그 후베다.
  • [15] 제대로 된 야전군이 아니라 참모부조차 제대로 갖춰져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고 한다.
  • [16] 19기갑군단에 일시배속. 이 시점에는 아직 사단으로의 편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무장 친위대 산하 기갑사단들이 창설 당시에는 연대로 출발했던 것을 떠올리면 된다.
  • [17] 이 사단에는 육군 병력만이 아니라 당시엔 연대 규모로 존재하던 독일 공군 공수부대가 대대 규모로 포함돼 있어서, 이들이 수송기 착륙에 필요한 비행장 확보 임무를 맡았다.
  • [18] SS 특수목적 사단. 이 사단은 후에 SS 2기갑사단 다스 라이히의 모체가 된다.
  • [19] 훗날 제1공수사단으로 개편된 사단. 예하 2개 공수연대는 보유한 대대 일부를 노르웨이 침공 및 육군 22공중강습사단에 파견한 탓에 실제 프랑스 침공 투입 병력은 연대 규모가 되지 못했다.
  • [20] 훗날 원수가 되었고, 히틀러 저항운동에 참가한 최고위 장군이다.
  • [21] z.b.V는 이런저런 잡다한 부대를 모아 특정 임무 수행을 맡기는 임시 부대고, Höheres Kommando는 군단급 지휘부를 가리킨다. 직역하면 특수임무사령부가 되지만, 혼동의 여지가 있어 임시군단으로 번역했다.
  • [22] 이후 자유 프랑스군의 주요 지휘관 중 하나로 떠오르는 드 라트르 드 타시니가 지휘하고 있었다.
  • [23] Division Cuirassée de Réserve. 엄밀히 하자면 예비를 붙여야 하지만 생략한다.
  • [24] 제4흉갑기병사단은 개전 당시 아직 완편되지 않은 상태였으나 참전했기에 기록한다. 당시 사단장은 샤를 드 골.
  • [25] 21군단과 23군단은 군단 사령부와 군단 직할부대만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예하에 배속된 사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유사시 예비사단을 배속받아 전선에 투입되는 일종의 예비 사령부 역할을 하는 군단이다.
  • [26] 본래 1군 예하 기병군단장이었다.
  • [27] Groupe de Bataillons de Chars. 독립전차대대가 아닌 규모인 경우가 많다. 전차 1~3개 대대 정도 규모로 구성된다.
  • [28] 본래는 기병군단 산하에 있는 부대였지만 원 소속 부대와 분리되어 있었다.
  • [29] 소규모 분견군을 증원받아 프랑스군 식민지 군단 휘하로 들어갔다.
  • [30] 5월 16일 이후 2집단군 직할로 돌려짐.
  • [31] 6군은 확실히 개전 당시에는 완편되지 않았으며, 스당 일대가 돌파당하는 시점인 5월 14일 기준으로는 완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2군과 9군의 전투지경선 일대에 투입되면서 2흉갑기병사단/14보병사단/36보병사단/41군단 등을 배속받았다.
  • [32] 이 시점에 구데리안이 지휘하던 19기갑군단이 기갑집단으로 재편되었다. 전격전의 전설에는 기갑군으로 승격되었다고 했지만 이는 책의 잘못으로, 독일군은 독소전쟁 이전에 기갑군을 창설한 바 없다.
  • [33] 선전포고 자체는 6월 10일에 이루어졌지만 전쟁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음을 이탈리아군 수뇌부가 잘 알고 있었기에 병력 투입이 늦어졌다.
  • [34] 독소전쟁의 시작인 바르바로사 작전은 낫질 작전과 매우 닮아서 규모와 몇몇 세세한 차이점만 빼면 본질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소련은 프랑스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큰 땅을 가지고 있었고, 국력도 프랑스와는 레벨이 달랐기에 결국 바르바로사 작전은 실패하고 수 년간 양 군이 총력전을 펼치며 처절하게 싸우는 지옥으로 변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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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1 22: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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