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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자파

last modified: 2014-08-11 16:28:46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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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프랭크 빈센트 자파(Frank Vincent Zappa). 미국 뮤지션이자 작곡가, 프로듀서. 1960~80년대 동안 온갖 장르의 음악을 섭렵하고 찬사와 논쟁을 시도때도 없이 불러일으킨 본좌로 꼽힌다.

1940.12.21~1993.12.4

Contents

1. 생애
1.1. 유년기와 뉴비 시절
1.2. The Mothers of Invention 시절
1.3. The Mothers 시절 1
1.4. The Mothers 시절 2 & 소송 전쟁
1.5. 솔로 활동
1.6. 만년
2. 수상 경력
3. 음악적 특징
4. 사회 참여
5. 사생활

1. 생애

1.1. 유년기와 뉴비 시절

볼티모어의 이탈리아계 이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해 천식 등의 질환으로 고생했고, 이 때문에 요양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남서부의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주로 그 곳에서 자랐다. 열두 살 때 스네어드럼을 생일 선물로 받으면서 음악에 심취하기 시작했고, 당시 또래들은 전혀 또는 거의 관심이 없던 드가 바레즈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등의 근현대 음악에 강한 관심을 보이는 등 일찍부터 꽤 특이한 성향을 보였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교내 R&B 밴드에서 드럼을 쳤고, 이 때 훗날 틴 비프하트로 명성을 떨치게 되는 돈 밴 블리엣과 사귀면서 당대 유명 R&B 뮤지션들의 연주에 심취했다. 이 동안 기타도 배웠고, 1959년에는 처음으로 저예산 서부 영화의 OST 작곡과 연주를 담당하기도 했다. 1962년에는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서 녹음 스튜디오를 운영하던 폴 버프 밑에서 녹음 보조 역할로 일했는데, 버프의 스튜디오에는 당시로서는 최신 장비였던 5트랙 녹음기가 있었고 이 장비를 이용해 오버더빙 등의 녹음 기술을 익혔다.

이듬해인 1963년에는 캡틴 비프하트와 함께 스투츠(Stoots)라는 밴드를 결성했고, 재정난에 빠져 있던 버프의 스튜디오를 인수하고 자신의 이름에서 철자를 딴 스튜디오 Z로 개칭해 운영했다. 이 당시 자파는 밴드 공연과 녹음 활동 외에 독립영화 제작도 시도하고 있었는데, 이게 지역 언론에서 포르노 제작으로 와전되어 보도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경찰이 스튜디오와 자파의 집을 압수 수색했고, 자파는 불법 포르노 제작 혐의로 열흘 동안 유치장 신세를 져야 했다. 풀려난 뒤에도 경찰에서는 압수한 녹음 테이프의 일부만을 돌려주고 나머지는 임의 파기하는 등 추가로 엿을 먹였고, 이 사건 이후 자파는 공권력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1.2. The Mothers of Invention 시절

1964년에는 레이 콜린즈의 주선으로 지역 R&B 밴드인 더 소울 자이언츠(The Soul Giants)에 기타리스트로 가입했는데, 자파는 기타 연주 외에도 밴드의 자작곡 작곡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며 밴드의 리더로 거듭났다. 이듬해 5월에는 미국의 공휴일인 마더즈 데이에 맞추어 밴드 이름을 더 마더즈(The Mothers)로 개칭했다. 이 밴드는 당시 로스앤젤레스를 중심으로 한 미국 서부의 언더 음악계에서 점차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이듬해인 1966년에는 프로듀서 톰 윌슨의 눈에 들어 앨범 녹음 작업도 시작했다.

하지만 윌슨이 소속된 음반사인 버브에서는 밴드의 명칭이 욕설인 Motherfucker를 떠올리게 한다는 시덥잖은 이유로 이름을 바꿀 것을 요구했고, 결국 밴드 이름은 좀 더 길어져 더 마더즈 오브 인벤션(The Mothers of Invention)이 되었다. 같은 해 7월에 이 밴드의 데뷰 앨범인 Freak Out!을 내놓았는데, 당대 R&B나 로큰롤에 뿌리박고 있으면서도 자파의 똘끼(...)가 유감없이 발휘된 음반으로 화제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당시 미국 대중음악계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대마초에 시험삼아 손을 대기도 했지만, 자신과 전혀 맞지 않는다고 여겨 포기하고 이후 평생 동안 어떤 마약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1]

1967년에는 동부의 뉴욕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고, 밴드의 2집 앨범인 Absolutely Free를 내놓았다. 이 앨범에서는 1집에서 보여준 똘끼를 그대로 갖고 오면서 라토리오 풍으로 전체 앨범의 곡들을 묶어 이후 비틀즈 등의 밴드가 시도한 컨셉트 앨범의 아이디어를 선취했다. 뒤이어 같은 해 낸 첫 솔로 앨범인 Lumpy Gravy에서도 자신의 두 클래식 우상들이었던 바레즈와 스트라빈스키에 대한 오마주를 보여주는 동시에 초기 샘플링이나 오버더빙, 디스토션 등의 기술을 적극 활용하는 등 당대 대중음악신에서 매우 전위적인 경향을 보여주었다.

이듬해인 1968년에는 밴드의 3집인 We're Only in It for the Money를 발표했는데, 비록 음반사의 징한 간섭 때문에 여러 대목이 검열삭제된 채 발매됐지만 당시 미국 사회 주류의 꽉 막힌 가치관과 본래 취지를 잃고 변질되고 있던 히피 운동 모두를 까버리는 신랄한 가사와 비틀즈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앨범 커버를 대놓고 패러디 하는 등 연이어 충공깽을 선사했다. 이 앨범에서부터 자파는 윌슨 대신 직접 프로듀스도 맡기 시작했고, 이후 발매되는 자파 관련 앨범들은 대부분 셀프 프로듀스로 제작되었다.

한편 같은 해 12월에는 그 동안의 전위적 경향에서 잠시 벗어나 당대 유행하던 두왑이나 서프 뮤직 스타일에 경도한 밴드 4집 Cruising With Ruben & The Jets를 내놓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왔고, 기존 음반사들의 고루한 운영 정책에 지쳤는지 Bizarre라는 이름의 독립 레이블을 차리고 거기서 밴드의 마지막 앨범이자 그 동안의 자파 앨범 중 가장 난해하기로 소문난 Uncle Meat를 내놓았다. 앨범 발표 후 자파는 밴드를 해산했고[2], 절친 캡틴 비프하트를 비롯한 이런저런 뮤지션들의 앨범을 프로듀스하면서 자신의 두 번째 솔로 앨범인 Hot Rats로 재즈 록 연주에 경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1.3. The Mothers 시절 1

1970년에 자파는 두 번째로 밴드를 결성했고, 밴드 이름은 버브의 요구로 교체되기 이전의 명칭인 더 마더즈를 그대로 갖다썼다. 첫 앨범은 같은 해 마찬가지로 자파의 레이블에서 발매된 Chunga's Revenge였고, 이 앨범에서는 기존의 1기 마더즈 앨범에서 보여준 엄청난 혼란과 짬뽕된 장르의 소용돌이에서 탈피해 좀 더 질서정연하고 절도있는 로큰롤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이듬해에는 자파가 밴드 활동을 하면서 찍은 영상들로 재구성한 영화 200 Motels[3]와 그 OST가 발매되었고, 곧 미국과 유럽 순회 공연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일정 중 12월에 스위스의 몽트뢰 카지노에서 공연하다가 어떤 또라이가 저지른 방화로 인해 비싼 악기와 장비들 뿐 아니라 공연장 전체가 홀랑 타버리는 사건이 터졌고,[4] 며칠 뒤 간신히 장비들을 빌려서 치른 런던 공연에서는 또 한 명의 또라이가 무대에 난입해 공연 중이던 자파를 밀쳐 무대 밑의 오케스트라 피트로 떨어뜨리는 사건이 이어졌다. 이 사고로 자파는 심한 골절상을 입어 한 동안 휠체어 신세를 져야 했고, 밴드의 보컬이었던 플로 앤 에디도 이 때를 전후해 탈퇴하면서 2기 마더즈는 단명하고 말았다.

2기 마더즈의 와해 후에는 잔류 멤버들과 세션 뮤지션들로 빅 밴드를 구성해 Waka/Jawaka와 The Grand Wazoo 두 앨범으로 Hot Rats에서 보여준 재즈 록을 확대한 음악을 선보였고, 1972년 9월에 건강을 회복한 뒤에는 이 멤버들로 미국 투어를 한 차례 가지기도 했다.

1.4. The Mothers 시절 2 & 소송 전쟁

1973년에 자파가 세운 첫 독립 레이블인 Bizarre가 해산되자, 자파는 마더즈 1기 이래 자신의 매니저였던 허브 코엔과 공동으로 DiscReet Records라는 두 번째 독립 레이블을 만들었고, 여기서 3기 마더즈를 이끌고 Over-Nite Sensation을 발매했다. 이 앨범에서도 자파는 재즈 록과 R&B, 로큰롤 3대 기조를 유지하면서 물오른 연주력과 작곡 실력을 과시했다. 이듬해에는 솔로 앨범 Apostrophe (')를 내놓았고, 이 앨범은 빌보드 차트 10위에 오르는 등 상업적으로도 성공했다.

같은 해 마더즈 결성 10주년 기념으로 전미 투어를 가졌고, 1975년 마더즈 명의로 제작한 마지막 앨범인 One Size Fits All을 끝으로 밴드를 최종 해체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캡틴 비프하트와 순회 공연을 가지고 그 실황으로 Bongo Fury라는 라이브 앨범을 발매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76년에 오랜 동업 관계를 맺고 있던 허브 코엔과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는데, 자파는 코엔이 공동 레이블의 수익을 삥땅치고 있다고 주장하며 코엔을 고소했고, 코엔도 지지않고 자파를 맞고소하면서 오랜 법정 공방으로 이어졌다. 법원에서는 최종 판결이 있기까지 자파의 녹음 테이프들을 증거물로 동결했고, 자파는 재판이 끝날 때까지 이 테이프들에 손도 대지 못했다.

소송드립 속에서 자파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DiscReet Records 대신 그 배급을 맡고 있던 워너브라더스와 직접 접촉해 LP 네 장짜리 대작 Läther의 발매를 위해 교섭했지만, 워너 측은 자파의 제안을 거절했다. 자파는 다시 경쟁사 머큐리 측에 접근해 앨범 발매 계약을 따냈지만, 이번에는 워너가 자파의 음원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딴지를 거는 바람에 또 무산되었다. 빡친 자파는 파사데나의 KROQ 라디오 방송국에서 자신의 소유였던 앨범 마스터 테이프 전부를 방송했는데, 이 방송을 누군가가 녹음해 해적판으로나마 발매해 줬으면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자파는 이 방송으로 인해 워너와도 법정 공방을 벌여야 했고, 워너 측에서는 Läther 앨범을 1977~79년에 걸쳐 자파의 허가 없이 Zappa in New York, Studio Tan, Sleep Dirt, Orchestral Favorites 네 장의 앨범으로 난도질해 발매했다.[5] 자파는 당연히 이 무단 발매 건에 대해서도 고소미를 먹였고, 1979년에야 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1.5. 솔로 활동

코엔 및 워너와 벌인 지루한 소송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79년 가을에 자파는 세 번째 독립 레이블인 Zappa Records를 만들었고, 여기서 자파의 역대 앨범들 중 가장 많은 판매고를 올린 문제작 Sheik Yerbouti를 내놓았다. 겉보기에는 무슨 아랍 음악 앨범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Shake Your Booty(니 궁디나 흔드셔)를 아랍어 스타일로 패러디한 타이틀이었고, 재즈 록 시대보다 더 직설적인 음악과 가사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수록곡 중 Jewish Princess는 유대인과 여성을 모두 씹어버리는 신랄한 가사로 인해 미국 내 인권 단체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곧이어 핑크 플로이드더 후 스타일의 록 오페라 컨셉으로 Joe's Garage를 내놓았고, 이 앨범에서는 미국의 음반 사전검열 제도에 디스를 거는 등 계속 사회비판적인 내용의 곡들을 삽입했다. 1980년에는 초기 활동기 이래로 오랜 희망사항이었던 개인 스튜디오 Utility Muffin Research Kitchen(약칭 UMRK)를 집에 만들었고, 이후 제작된 거의 모든 자파의 앨범들은 여기서 제작되거나 믹싱/마스터링을 거쳐 발매되었다.

하지만 새로 출범한 Zappa Records도 배급사인 머큐리와 갈등을 빚어 음반 발매가 순탄하지 못했고, 자파는 또다시 새로운 독립 레이블인 Barking Pumpkin을 출범시켜 1978~80년 동안의 실황을 편집한 Tinseltown Rebellion을 발매했다. 1980년에는 통신판매 형식으로 자신의 기타 솔로 위주 연주가 담긴 컴필레이션 앨범인 Shut Up 'n Play Yer Guitar를 발매했고, 이 시리즈는 1988년까지 두 차례 더 발매되었다.

이 시기 동안에는 주기적으로 시도해온 클래식 관현악단과의 협연 작업도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했고, 트 나가노가 지휘한 런던 교향악단의 연주로 자신의 곡들을 관현악 편곡한 앨범 두 장을 1983년과 1987년 두 차례 발매하기도 했다. 비록 자파 자신은 두 앨범의 완성도에 만족하지 못했지만, 이후에도 여러 차례 관현악단과 협연하거나 직접 지휘까지 맡아 하면서 이 방면에도 적극적으로 진출했다.

관현악단과의 연주나 앨범 작업 외에도 연주와 샘플링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당시로는 최신 전자악기인 신클라비어(Synclavier) 연주도 이 시기에 적극적으로 시작했고, 1984년에 당대 본좌급 현대음악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에르 불레즈 지휘의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과 협연한 앨범인 The Perfect Stranger에서도 신클라비어 연주를 오버더빙했다. 같은 해 활동 20주년을 기념해 월드 투어를 가졌고, 가상 브로드웨이 뮤지컬 컨셉으로 Thing-Fish라는 앨범을 발매하거나 자신과 이름이 비슷한 18세기 이탈리아 작곡가 프란체스코 자파의 작품들을 신클라비어로 연주한 음반을 내놓는 등 온갖 형태와 장르의 음악에 도전했다.

1985년에는 당시 갓 설립된 PMRC(Parents Music Resource Center)의 음반 사전 심의 제도[6]에 반대해 의회의 공청회에서 해당 단체의 간부들과 설전을 벌였고, 이 당시의 논쟁 녹음을 샘플링해 Frank Zappa Meets The Mothers Of Prevention이라는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 자신의 밴드 마더즈의 이름을 셀프 패러디한 앨범이기도 했는데, 비록 시전 심의제의 폐지라는 목적은 이루지 못했지만 자신이 아직 여전한 반골 정신을 지니고 있음을 어필했다.

1.6. 만년

1988년에 자파는 생애 마지막이 된 대규모 순회 공연을 개최했는데, 비록 이 공연은 중간에 자파와 밴드 멤버들 사이의 불화로 중단되기는 했지만 Broadway The Hard Way라는 걸출한 라이브 앨범으로 만들어졌다. 이 앨범에서도 자파는 리처드 닉슨, 로널드 레이건, 시 잭슨 같은 거물급 정치인, 텔레비전 개신교 선교사 짐 바커와 팻 로버트슨, 심지어 마이클 잭슨까지 까버리는 전방위 디스를 걸어 화제가 되었다.

이어 이듬해인 1989년에는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했고, 자서전 The Real Frank Zappa Book을 출간했다. 하지만 이 시기를 기점으로 자파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고, 1990년에 립선암 선고를 받은 뒤에는 공연 활동을 줄이고 자택에서 작곡과 기존 실황녹음들의 편집과 재발매 등의 작업에 주력했다.

특히 이 마지막 시기에는 존 케이지칼하인츠 슈톡하우젠 등 현대음악계의 끗빨날리던 작곡가들과 함께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고, 1992년에는 편곡자 알리 아스킨의 도움으로 독일의 현대음악 전문 공연 단체인 앙상블 모데른과 자신의 작품으로 구성한 콘서트를 준비했다. 9월 17일부터 28일까지 프랑크푸르트베를린, 에서 가진 마지막 공식 콘서트들의 실황이 편집되었고, The Yellow Shark라는 이름으로 자파 생전에 나온 마지막 앨범이 되었다.

공연 이후에는 로스앤젤레스의 자택에 칩거하면서 투병하다가 1993년 12월 4일에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향년 52세로 세상을 떴다. 유해는 사망 다음날 간단한 가족장을 치른 뒤 웨스트우드 빌리지 추모공원 묘지에 무기명으로 안장되었다.

2. 수상 경력

  •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 (1995)
  • 그래미상 평생공로 부문 (1997)

3. 음악적 특징

어릴 적부터 R&B나 로큰롤에 심취하면서 동시에 근현대음악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진 덕에 초기부터 전위적인 면모로 주목받았는데, 특히 녹음 편집 기술에 관한 지대한 탐구는 이후 여러 걸작 스튜디오 앨범의 제작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주로 연주한 악기는 기타와 신클라비어였지만, 어릴 적부터 드럼도 연주했고 솔로 앨범에서는 이따금 베이스 기타나 보컬도 직접 맡는 등 악기 연주 실력도 발군이었다.

마더즈 시절이나 그 이후 세션 밴드를 만들면서 작업한 여러 뮤지션들도 이후 거물급으로 대우받으며 활동하고 있고, 특히 활동 후반기 기타리스트 스티브 바이를 발굴해 프로로 데뷰시킨 것이 유명하다. 록이든 재즈든 만년의 전위적 현대음악이든 가리지 않고 손을 대는 음악적 식탐 덕에 이들 장르의 음악인들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념 등을 가리지 않고 사회의 치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가사나 앨범의 컨셉화 등도 자파 음악의 필수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중기의 재즈 록이나 로큰롤 시기를 전후한 전기/후기 작품들은 꽤 난해한 편이라 대중적인 인지도는 생각보다 높다고 할 수 없는데, 한국에도 기껏해야 장국영양조위가 주연한 홍콩 영화 해피 투게더에 삽입된 몇 곡 정도만 아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물론 자파 음악에서 대중성도 어느 정도 한몫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가 평생 동안 추구한 음악적 진보에 대한 이해 없이 이 몇 곡만 듣고 자파 팬이라고 하는 것도 어폐가 있다.

자파 생전 말기와 사후에는 음반 배급사들의 병크나 이런저런 어른의 사정으로 발표되지 못하거나 검열 혹은 축소되어 나온 앨범들의 완전판이 재발매되는 등 꾸준히 음반 발매가 이루어지고 있고, 특히 라이브 앨범들의 경우 스튜디오 녹음으로도 나오지 않은 곡들을 많이 담고 있어서 주목받고 있다.

4. 사회 참여

활동 초기부터 메이저 음반사들과 수시로 티격태격한 에피소드에서 보듯이 주류 업계나 정치권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특히 음악에 대한 사전검열에 찬성하는 단체나 신자유주의 계열 성향의 정치인들은 수시로 씹었다. 아예 이들의 연설 장면을 우스꽝스럽게 연출해 한 곡을 만드는 경우도 있었고, 덕분에 명성에 걸맞지 않게 생전에 주류 음악계로부터 받은 상은 거의 없었다. 자파 자신도 1987년에 그래미상 록 연주 부문에 선정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상을 거부한다고 발표해 엿을 먹이는 등 평생 동안 반골 성향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름과는 다르게좌파 등 특정 계파에 경도되는 성향은 아니었고, 일 안하고 빈둥대는 게으른 실업자라든가 돈을 벌 생각은 않고 물쓰듯 하는 된장녀, 텔레비전에서 시도때도 없이 설교하는 개신교 목사, 약쟁이로 타락한 히피, SM 행위에 탐닉하는 동성애자 커플, 선민사상에 빠진 근본주의 유대인, 이익 창출에 집착해 환경 파괴에 거리낌이 없는 대기업 간부 등 자기 마음에 안드는 인물들은 닭치고 까는 스타일이라 사방팔방에서 어그로를 끌었다. 이 때문에 미국이나 유럽 공연에서는 일부러 작정하고 들어온 안티들이 무대에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소란을 피워 공연이 중단되는 해프닝도 있었다.

이런 사회참여 성향은 말년에 정치계에 입문하려는 시도로까지 이어졌는데, 1991년에는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고 했다가 건강 악화로 포기하기도 했다. 물론 이렇게 깔거 다 까는 사람을 누가 뽑아주려나 싶겠지만 자파의 이러한 행보는 뚜렷한 기준 없이 무턱대고 까는게 능사가 아니라는 반면교사가 되기도 한다. 다만 평생 음악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고심했고, 둘이 완전히 분리될 수 없음을 역설했기 때문에 음악사회학 영역에서는 극단적인 디스 성향에도 불구하고 연구 대상이 되기도 한다.

5. 사생활

자파는 대학 재학 중이던 1960년에 케이 셔먼과 처음 결혼했지만 불과 3년 만인 1963년에 이혼했다. 3년 뒤 초기 마더즈 시절 로스앤젤레스의 나이트클럽 위스키 어 고고에서 공연하다가 클럽에서 비서로 알하던 애들레이드 게일 슬로트먼과 눈이 맞아 바로 사귀기 시작했고, 게일은 1967년 9월에 임신한 상태로 자파와 속도위반 결혼을 했다. 첫 결혼 때와 달리 이 두 번째 결혼은 행복한 편이었다고 한다.

결혼 직후 장녀 문 유닛이 태어났고, 이후 장남 드위질(1969), 차남 아멧(1974), 차녀 디바(1979)까지 네 아이를 두었다. 이 아이들도 훗날 작가, 배우, 비즈니스맨 등으로 성장했고, 특히 장남 드위질은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며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다.

게일은 남편 사후 자파의 유언 집행인 자격으로 녹음과 작품, 앨범 등의 수익을 관리하고 있는데, 남편의 음악과 이미지를 지나치게 독점적으로 이용한다고 까이고 있다. 심지어 'Zappa' 라는 이름을 다른 밴드가 쓰지 못하게 막는다거나, 독일의 바트 도베란이라는 마을에서 열리는 자파 기념 음악회인 자파날레(Zappanale)가 자신의 허락 없이 남편의 이름을 도용했다고 독일 법원에 소송을 걸었다가 상큼하게 패소하는 등 오히려 남편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병크를 저지르고 있다. 자파 성 쓰는 사람들을 모두 절단낼 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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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 때의 경험이 워낙 충격적이었는지 뮤지션들의 마약 사용을 단호하게 반대했고, 자기 밴드 소속 기타리스트가 마약을 했다는 것이 밝혀지자 가차없이 해고하기까지 했다.
  • [2] 자신이 존경하던 재즈 뮤지션이 음반사에 돈을 구걸하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을 해서 해산할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 [3] 비틀즈의 드러머 링고 스타가 자파로 분장하고 나온다.
  • [4] 이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곡이 딥 퍼플의 레전설 넘버인 Smoke on the Water다.
  • [5] 결국 Läther는 자파 사후인 1996년에야 완전한 형태로 발매되었다.
  • [6] 힙합이나 메탈 앨범에 심심하면 붙는 Warning: Parental Advisory 스티커가 바로 이 단체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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