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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머큐리

last modified: 2015-04-12 16:32:56 by Contributors


Freddie Mercury

영국 락밴드 의 리드보컬.


I won't be a rock star. I will be a legend. -Freddie Mercury-
(나는 락 스타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전설이 될 것이다)

말 그대로 그는 전설이 되었다.

20세기 후반 전세계 음악계를 휩쓸었던 전설 그 자체
락 역사상 최고의 보컬중 한명
자타가 공인하는 락의 레전드 보컬[1]

Freddie Mercury (본명:Farrokh Bulsara)
생년월일 1946년 9월 5일
사망월일 1991년 11월 24일
출신학교 St. Peter's Boys School - St. Mary's School(뭄바이) - Isleworth Polytechnic College - Ealing Art College(잉글랜드)
고향 잔지바르
포지션 보컬-피아노-리듬기타
종교 조로아스터교
소속팀
별명 BADGUY
디스코그래피 Mr. Bad Guy / BARCELONA

Contents

1. 유년기-대학 시절
2.
3. 솔로 활동
4. 말년, 그리고
5. 재능
5.1. 가수로서
5.2. 작곡가로서
5.3. 연주자로서
6. 잡다한 이야기

1. 유년기-대학 시절


아프리카 잔지바르[2] 출생[3]으로 총독부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8세기에 이슬람교도에 쫓겨 페르시아에서 인도로 피신해 정착한 조로아스터교도의 후손인 파르시이며, 본명은 파로크 불사라(Farrokh Bulsara)이다. 파로크란 이름이 영어로 발음하기 불편해서 프레디란 별명을 많이 썼다. 프레디는 파로크란 이름보다 프레디라는 이름을 마음에 들어했고, 퀸을 결성하면서 프레디란 이름으로 아예 개명하기에 이른다(영국 시민권을 얻으면서 과거 잔지바르 시절의 잔재를 완전히 지울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한다). 머큐리는 그리스신화의 신 도둑과 전령의 신 헤르메스에서 따왔다.음악의 전령사가 되겠다는 뜻이었다고 한다.[4]

정통 파르시 출신 답게 프레디 머큐리는 역시 인도 쪽 혈통이라고 한다. 프레디 머큐리의 아버지 Bomi bulsara는 8형제 중 하나로 태어났는데, 그의 고향은 인도 봄베이 북쪽에 있는 bulsa라는 마을이라고 한다. 불사라라는 성은 프레디의 아버지가 잔지바르로 건너오면서 고향 마을의 이름을 따서 그대로 붙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실제로 프레디의 아버지 뿐만 아니라 삼촌, 백부들도 모두 하나둘씩 잔지바르로 건너와서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그렇다고 해서 정통 인도 혈통은 아니고 엄연히 독실한 파시족 집안에서 태어났고 자랐기 때문에 인도계 파시족 혈통이라고 할 수 있다. 프레디의 부모님들도 생전 자신들을 인도라는 출신 배경보다 파시족이라는 걸 훨씬 강조하며 살았다고 한다.

어린 시절엔 인도 뭄바이에서 기숙학교를 다녔는데 가족과 떨어져서 공부를 해야 했던 게 무척 괴로웠던 모양이다. 때문에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으로 자랐다. 음악에는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보였다. 학창 시절에 합창부에서 활동하기도 하고, 아마추어 밴드에서 건반을 치기도 했다.



<인도 뭄바이 학창시절 프레디.>

인도에 유학까지 갈 정도로 집안 사정이 나쁘지 않았지만, 가족들과 함께 영국으로 이주한 후에는 집안 사정이 많이 안 좋아졌다고 한다. 그래서 프레디 머큐리도 아르바이트를 했어야만 했는데, 비행기 화물칸에서 짐을 옮기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동료들에게 자기는 알아주는 뮤지션이라고 뻥을 쳤다. 단순한 허세였지만, 프레디 머큐리 스스로가 뮤지션이 될 것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말한 첫 번째 발언이었다.


<평범한(?)일링예대 학생 프레디>

영국에서 일링 예술 대학(Ealing Art College)그래픽 디자이너 학사로 대학을 마쳤다. 아무래도 당시에 1970년대 초에 그럴듯한 대학에 다니고 있던 엘리트였고 음악을 하지 않았어도 먹고 살 길이 충분히 많았기 때문에 음악을 직업으로 삼을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퀸에 가입한 이후 직업 뮤지션으로 살아가기로 결단을 내렸고, 친한 친구에게 아무래도 나는 음악을 해야 될까봐.라고 말했었다고. 프레디 머큐리가 워낙 노는 것을 좋아했고, 당시 영국 대학생들도 술파티 같은 것을 빈번하게 했기 때문에 친구들과 모여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숙취에 쩔어 새벽에 집단으로 널브러져 있던 일도 자주 있었는데, 프레디가 기타를 들고 존 레논의 노래를 연주하며 불렀는데 그 목소리가 아주 끝내줬었다고.


<대학 시절 기타를 연주하는 프레디>

대학 친구들은 이때부터 프레디가 뭔가 될 법한 떡잎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고...

2.


대학 재학 중에 아마추어 밴드 활동[5]을 하다가 로저 테일러브라이언 메이가 이끌던 스마일을 유심히 지켜보던 프레디는 보컬 팀 스타펠의 소개로 두사람과 만나게 된다.이후 팀 스타펠이 'Humpy Bong' 이라는 밴드에 가입하기 위해 스마일을 탈퇴하자 바로 그 빈 자리를 꿰찼다.[6] 그리고 팀의 베이스 오디션을 보았고 세번의 오디션끝에 베이시스트 존 디콘을 영입, 이 탄생하게 되었다. 후일 로저는 스마일 시절에 웬 이상한 녀석이 공연마다 와서 공연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잔소리를 했는데 그게 프레디였고 그 잔소리가 밉지 않은 녀석이었다고 밝혔다.

팀 스타펠은 프레디와 여러모로 죽이 맞는 친구였었다고 한다. 대학 강의실에서 프레디와 팀 스타펠이 책상을 두들기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동기들은 '재내 또 노래 부르면서 논다"식으로 웃어넘겼다는듯. 평전에 따르면 프레디는 내성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쾌활한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낯선 사람들이나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는 내성적으로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키는 경우가 많았으나 친한 사람들 앞에서는 그렇게 노래도 부르고 장난도 치고 크게 떠들기도 했었다고.

로저와 브라이언은 프레디와 처음 만났을 때 서로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브라이언 메이는 이미 스마일 이전에도 <1984>라는 밴드를 만들어 근방에서 이름을 날렸던 적이 있었고, 로저 테일러는 대학에 오기 전 고향에서 아마추어 밴드 활동을 하면서 역시 이름을 날렸었다고 한다. 좋은 멤버를 구하지 못해 이리저리 아마추어 밴드를 옮겨다녔던 프레디에게는 실력 좋은 기타리스트와 드러머가 더더욱 눈에 들어왔을 것이라고. 프레디는 스마일의 공연에 매니저처럼 따라다니면서 팬을 자처하고 잔소리도 늘어놓았다.[7] 팀 스타펠이 탈퇴하고 스마일이 기획사에서도 버림받는 밴드가 되자, 로저와 브라이언은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프레디가 생각나서 그에게 연락을 취해 가입을 문의했다. 이런저런 아마추어 밴드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던 프레디는 고민도 없이 바로 OK했다고.

© from

퀸의 로고는 프레디가 디자인했으며, 위의 자켓도 프레디의 작품. 이 로고는 4,5집 이외의 앨범에도 자주 사용되었다. 로고에 들어가는 동물들은 멤버들의 생일 별자리를 나타낸다고.[8]

밴드 이름을 'Queen' 으로 제안한 것도 프레디 머큐리였다. 처음에 다른 멤버들은 퀸이란 밴드명에 반대했다고 한다. 퀸이라는 단어에는 속어로서 '동성애자'와 같은 의미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프레디 머큐리는 자기는 죽어도 밴드명을 퀸으로 하겠다고 고집을 피웠고, 다른 멤버들은 그 고집을 이기지 못해 결국 밴드 이름을 퀸으로 결정하게 된다.

퀸 초기에는 글램락의 영향을 받아[9] 긴 머리, 검은 매니큐어, 검은 눈화장, 나비 날개같은 옷, 몸에 딱 붙는 타이즈(발레복)를 주로 입었는데 손발이 오글거리는 의상이지만 의외로 또 소화를 잘 했다.[10] 강한 인상,큰 얼굴과는 달리 몸매, 특히 하체가 길고 가는 편이라 그럭저럭 소화를 했다. 날개 의상은 곧 자취를 감추지만 타이즈는 퀸 중반기(1976~1978)에도 종종 보인다.[11]

퀸 초기의 프레디는 유난히 무대조명과 의상에 집착했다고 한다. 공연 준비 금액의 절반 가까이를 의상과 조명에 쏟아부을 정도였다고. 게다가 도저히 남들이 이해를 하지 못하는 기괴한 의상을 멤버들에게 입으라고 강요해서 퀸이 공연 준비를 하는 대기실에서는 '으악! 도저히 이런 거 못 입겠어!'라는 소리가 자주 튀어나왔었다고. 특히 퀸에서 나이가 제일 어리고 성격이 수줍었던 멤버 존 디콘이 이상한 의상을 자주 강요받아서 난감했던 적이 많았었다고 한다.


라이브에서 이런 옷입고 무대를 뛰어다니는데 좀 민망하긴 하다.(...) 덕분에 수년 동안 세상에서 가장 옷을 못입는 팝 아티스트의 1등을 차지하는 영광(?)을 누렸다.

3집이 나오기 전까지의 퀸은 여타 무명 밴드가 그렇듯이 금전 사정이 안 좋았다. 이는 프레디도 마찬가지라서 퀸이 처음으로 방송 출연을 했을 때 가전제품가게에 진열된 TV로 방송에 나온 자신의 모습을 길거리에서 봐야만 했다고. 안습

데뷔 앨범인 <Queen>을 시작으로 점점 이름을 알리면서 명곡 <Bohemian Rhapsody>가 수록된 <A Night at the Opera>가 대박을 치면서 인기를 얻었으나 이상하게 평론가들한테는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듣기 좋은 육자배기도 한두 번인데 자기 까는 소리를 줄창 들으니 좋은 감정이 생길 리가 만무. 인터뷰도 잘 안 하고 평론가들에 대한 감정도 무척 좋지 않았다. 특히 사생활 때문에 더 그랬는데 프레디의 게이 의혹과 문란한 사생활을 파헤치는 찌라시 언론의 행태로 그는 언론을 더욱 불신하게 되었다.[12]

그러나 프레디 머큐리는 무대 위에서는 확실한 프로였다. 오늘날 그를 존경하는 많은 후배 뮤지션들은 가창력도 있지만, 그 열정적인 무대 매너 역시 존경의 요인으로 뽑기도 한다. 몸이 아프든 기분이 안 좋든 무대 위에만 올라가면 항상 열정적으로 관객들을 압도하며 최선을 다해서 공연을 펼쳤다. 물론 공연을 중간에 그만두는 일도 없었고, 노래를 부르다가 가사가 틀리거나 연주가 엉켜도 그것에 얽매이는 일도 없었다. 딱 한 번 공연을 하다가 중간에 그만둔 적이 있는데, 너무 열정적으로 무대를 휘젓고 다니다가 발목이 삐어서 그랬었다고...(..) 이 열정적인 뮤지션의 모습은 커트 코베인의 유서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커트 코베인은 자신은 프레디 머큐리처럼 음악과 공연을 즐길 수 없다며 유서 첫머리에 한탄 비슷하게 적어 놓았다.

라이브에서는 특유의 화려한 동작들과 관객 선동스킬을 바탕으로 퀸이 수만의 관객을 아우르는 스태디엄 공연을 해나가는 데에 매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1985년 라이브 에이드 공연의 모습 참고로 첫번째 곡은 'Hammer To Fall'이고 두번째 곡은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다.

이 관중 조련은 그가 죽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2012 런던 올림픽 폐막식에서 그가 라이브(1986년 웸블리 Under Pressure) 중에 관중들과 주고받는 부분프레디 머큐리의 노래 교실이 비춰지고, 그의 영상과 목소리를 따라 관중들이 따라 부르는 장면은 감동적이다. 사족이지만 맨 마지막에 "fuck you!"는 생략되었다

무대를 휘젓고 다니는 거친 락뮤지션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게 클래식 음악이나 오페라, 발레 같은 장르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다. 그의 이런 음악 성향은 어릴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었다. 게다가 판타지 전설 같은 것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이런 관심사 덕분에 퀸 초기 가사에는 '요정'이나 '괴물', '정의의 기사' 같은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프레디 머큐리는 70년대와 80년대 보컬이 차이가 크다. 70년대에는 아름다운 미성과 높은 음역이 특징이었다면 80년대에 들어서서는 파워풀하고 남자다운, 굵고 무거운 목소리를 보여준다. 참고로 콧수염을 처음 기른것도 1980년부터다. 즉, 이때부터 아예 노래 스타일이나 패션 스타일까지 바꿔버린 것. 때문에 콘서트에서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1970년대 공연엔 창법이 목에 무리가 가는 수준은 아니어서 컨디션 분배도 잘 됐는데, 1980년대 공연부턴 목소리가 굵어진 대신 목에 피로가 빨리 축적되어서 공연 후반부로 갈수록 힘이 딸린다. 이런 경향은 마지막 투어인 매직 투어에서 두드러진다.

1980년 이후 갑자기 목소리가 바뀌어 버린 이유에 대해서는 추측이 굉장히 많다. 1970년대에 콘서트에서 너무 질러대서 목이 나가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는 추측도 있고, 1970년대에 무엇보다 목 관리에 철저했던 프레디 머큐리가 1980년대 이후 갑자기 목 관리를 하지 않으면서 목소리가 변해 버렸다는 추측도 있다. 실제로 프레디 머큐리가 콧수염을 기른 이후부터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언론에 공개되어서 그런 추측이 생겨났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허나 이렇게 많은 추측에도 불구하고 결국 프레디 본인은 목소리 변화의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퀸 말기, 1980년대 말에는 담배를 끊으면서 미성이 약간 살아나기도 하는데, 실제로 이때쯤 70년대의 창법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3. 솔로 활동


퀸의 골수팬이 아니면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프레디는 퀸 말고도 솔로 앨범도 두장이나 냈었다.퀸 활동의 휴식기 였던 85년에 본인의 별명인 BADGUY를 앨범명으로 Mr. Bad Guy란 앨범[13]과 유명 소프라노인 스페인의 몽셰리 카바예와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기념해서 만든 '바르셀로나' 활동을 했었다.

Mr.Bad Guy 앨범에서는 기존 퀸에서 보여주었던 다양한 실험적인 락음악보다는 철저히 프레디 머큐리 본인의 취향이 담긴 음악들을 수록했다. 당시 유행했던 디스코,오페라,팝,모던락 등 퀸의 음악과는 확연히 다른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들을수 있다.

'바르셀로나' 앨범은 그가 좋아했던 을 본격적으로 시도한 앨범으로 하나의 클래식 앨범이라고 봐도 무방할정도로 풍부하고 다양한 프레디의 고음역대의 발성을 마음껏 들을수있다. 다만 후에 그가 에이즈환자인 점이 들통나서 바르셀로나 올림픽 공식 응원가에서 탈락된 점은 안타까운 점이라 할 수 있겠다.하지만 BBC에서는 공식주제가 따윈 씹고 그냥 바르셀로나를 틀어줬다

4. 말년, 그리고

말년에 에이즈로 고생하다 죽었는데, 1991년 11월 23일 에이즈 감염을 공식 인정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그 다음 날인 11월 24일에 사망했다. "당시 신문보도" 죽을 무렵엔 눈도 안 보이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멤버들은 이미 1988년부터 그의 에이즈 감염을 알았다고 한다. [14] 그 즈음부터 프레디 머큐리는 급속히 초췌해지며 에이즈 감염설이 퍼지고 있었는데(당시 본인은 강력히 부인), 이 때 프레디는 멤버들에게 '너희들도 내 문제가 뭔지 알고 있겠지만, 그 부분에 대해선 얘기하고 싶지 않아. 난 그냥 죽을 때까지 음악을 했으면 좋겠어'라는 식으로 고백을 했다. 나머지 멤버들도 그의 뜻에 따라 더 이상 그 문제를 논하지 않고 음악작업에만 몰두했다.

병색이 짙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프레디는 음악에 대한 열정 하나로 약을 먹어가며 버티고 몸이 잠깐 좋아지면 그때 다시 작곡하고 노래하기를 반복했다. 프레디의 생전 마지막 퀸 정규앨범인 Innuendo는 프레디가 언제쯤 스튜디오에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멤버들에게 연락하면 나머지 세 멤버들이 데모 버전을 미리 만들어 놓고, 프레디는 컨디션이 좋을 때 스튜디오에 와서 보컬을 녹음하는 방식으로 앨범을 만들었다. 생전 마지막 싱글인 <The Show Must Go On>는 음이 높아서 브라이언 메이는 프레디가 이 곡을 부를 수 있을지 걱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프레디는 "I'll fuckin' do it, darling"[15]이라고 내뱉은 후, 투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독한 보드카를 쭉 들이키더니 삑사리 없이 한 큐에 녹음을 마쳤다고 한다.[16]

얼마나 마르고 초췌해졌는지 1991년 2월에 촬영한 <I'm going slightly mad> 뮤직 비디오를 보면 두꺼운 화장으로도 병색을 감추기 힘들 정도. 콧수염이 없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움푹 패인 두 볼이 안타깝다.


프레디는 건강이 허락할 수 있을 때까지 음악 작업을 했고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했다. 죽기 직전에 찍은 These Are The Days Of Our Lives의 뮤직비디오도 원래 애니메이션으로 대체하려고 했는데 프레디가 고집을 부려서 멤버들과 함께 출연하는 평범한 내용으로 바꿨다. 그래서 퀸의 80년대 후반 뮤직비디오들을 보면 시간이 지날 때마다 프레디가 점점 병색이 완연해지면서 초췌해지는 게 보인다. 프레디는 자신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죽기 전날까지 인정하지 않았지만 되려 뮤직비디오 때문에 에이즈 감염설이 널리 퍼지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당시 프레디 본인은 수박 다이어트 때문에 살이 그렇게 빠졌다고 둘러댔지만 워낙 초췌하게 살이 빠졌던 터라 별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프레디 머큐리는 죽기 전 근 일 년 간 언론에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더 이상 치료가 의미 없음을 알게 되자 스스로 치료를 거부했다. 당시는 에이즈라는 병이 발견된 지 십여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었기 때문에 생명을 연장하게 해줄 수 있는 방법이 전무했다. 프레디가 면역 결핍으로 죽어가고 있을 때 그의 곁에는 그의 애인이자 이발사였던 짐 허튼이 함께 있었고, 그는 프레디의 임종까지 곁에서 지켰다. 당시 짐도 1990년에 받았던 에이즈 검사에서 양성 판정을 받았지만 프레디에게 1년 간 그 사실을 숨겨왔다고(짐 허튼은 2010년에 죽었다). 프레디가 죽어가고 있을 때 그의 절친 엘튼 존이 자주 병문안을 왔었다고 한다.

특이점이라면 프레디는 죽기 직전 그나마 몸이 괜찮을 때 그림을 상당수 그렸다고 한다. 저택에 틀어박혀 에이즈로 고통받고 있을 때 텔레비전에서 무슨무슨 그림이 비싼 가격에 팔렸다는 뉴스가 나오자 프레디는 씨바 저 정도는 나도 그리겠네 라면서 그 자리에서 그림을 몇 점 그렸다고. 그 이후에도 대학 시절 경험을 살려 그림을 몇 점 더 그렸고, 프레디는 자조 섞인 목소리로 애인에게 '이거 내가 죽고 나면 무지 비싸게 팔릴 거야'라고 농담처럼 말했었다고. 프레디의 이름값을 생각하면 결국 비싸게 팔렸을듯

프레디 사후 그를 기리는 추모 콘서트가 열렸으며, 이 콘서트에는 엘튼 존, 메탈리카, 프 레퍼드, 액슬 로즈, 로버트 플랜트, 조지 마이클, 데이빗 보위 등 당대 슈퍼스타들이 총출동했다.

참고로 독실한 조로아스터교 신자였던 프레디의 부모님들은 프레디를 조장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현대 문명에 조장이라는 풍습은 거부감이 많이 들 수밖에 없었고, 또 프레디 또한 종교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삶을 살았기 때문에 지인들이 극심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결국 프레디는 화장되었고, 재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 뿌려졌기 때문에 그의 무덤은 없다.

5. 재능

5.1. 가수로서

음악적 부분, 특히 가창력은 누구나 인정하는 부분.

보컬로서 역량이 드러나기 시작한 건 대학시절부터였다. 단 그때에는 천하의 프레디 머큐리도 실력이 다듬어지기 전이라, 목소리 기복이 심하고 거친 면을 보였다고 한다. 주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무척이나 예쁜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목소리를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다"라고. 그 뒤로 혼자 엄청나게 연습을 했는지 퀸이 결성될 즈음에는 어느정도 안정된 보컬을 보여주게 된다.

프레디 머큐리는 어릴 적 합창부 시절을 제외하고 누군가에게 정식으로 노래를 배운 적이 없다. 그래서 보컬 부분에서 누구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 불분명하다. 가끔씩 성량이 풍부한 오페라적 창법을 보여주기도 한다.

프레디 머큐리는 젊을 적에 엄청난 미성이었다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목소리가 굵어진 케이스다. 즉 70년대와 80년대 목소리가 다르다. 사실 현재 사람들이 프레디 머큐리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나 목소리는 다수가 80년대 스타일이다. 초창기 앨범, 퀸 1집을 들어보면 멜로디가 재미없어도 프레디의 미성 덕분에 들어볼 만한 곡이 몇 곡 있을 정도. 미성이었던 시절에는 그야말로 굉장히 중성적인, 야누스적인 미성이었다. 남성의 목소리와 여성의 목소리가 혼재된 듯한 그 마성의 목소리는 지금도 경탄의 대상.

전문적인 보컬 수업은 받은 적이 없지만 아름답고 매력적인 목소리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나이를 먹고 계속되는 투어로 80년대 중, 후반의 공연에서는 목을 좀 사리는 모습이 종종 보이지만 노래를 잘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디씨 락갤에서는 프레디가 낫냐 xx가 낫냐 떡밥이 심심치 않게 도는데 그런거에 현혹되지 말자.

80년대에 낸 솔로 싱글에는 자신의 음역을 과시하는 Exercises In Free Love란 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노래에서는 그야말로 여성과 남성의 음역을 넘나드는 마성의 음역을 보여준다.

1977년 BBC Session에서 It's Late을 부를때 고음은 무려 4옥타브 라(ㄷㄷㄷ..)까지 엄청난 고음을 자랑한다..


5.2. 작곡가로서

프레디 머큐리의 음악적 재능이 엿보이는 다른 부분이 바로 작곡 능력이다. 퀸 결성 때부터 브라이언 메이와 더불어 많은 곡을 작곡했으며, <Bohemian Rhapsody>나 <Don't Stop Me Now>,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17], <We Are the Champions>, <Somebody to Love>, <Killer Queen> 등 퀸의 수많은 대표곡들이 프레디의 작품이다. 위 노래들은 2011년 한국에서도 아직까지 광고 음악이나 예능 프로그램 배경 음악으로 잘 쓰이고 있다. 노래 제목은 몰라도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은 프레디 머큐리가 작곡한 음악 최소 한두 곡은 알고 있을 정도. 음만 들려주면 "아~ 그거~" 하면서.

다양한 장르의 시도 및 혼합이 송라이터로서의 프레디 머큐리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로, 퀸 초창기(1, 2집)에는 보통 알려진 퀸과 프레디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헤비락 작곡에 치중했고, 그 이후 각종 발라드를 통해 피아노 발라드 스페셜리스트로도 자리매김했다. 그 외에도 프로그레시브 락, 가스펠, 팝, 디스코 등 다양한 음악을 시도했다. 디스코 쪽은 기존의 퀸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었던 <Hot Space>나 본인의 솔로앨범(<Mr. Bad Guy>)에서 두드러진다.

대중적이고 기억하기 쉬운 멜로디를 뽑아내는 솜씨 또한 아주 일품이며, 흔히 들을 수 있는 대중음악에 비해 특이한 전개, 수 차례의 조바꿈 등 복잡한 구성이 두드러지는 곡을 여러 차례 선보였다(대표적으로 Bohemian Rhapsody와 Queen II에 수록된 곡들 등). 반면 그 자신은 악보를 거의 볼 줄 모른다고 말했다. 퀸 멤버 및 관계자들의 말에 의하면 프레디는 자신이 만든 곡을 일반적인 악보 형식이 아닌 그만이 알아볼 수 있을 법한 이상한 기호로 종이 여러 장에 적어 스튜디오에 가져왔다고 한다.

대부분의 노래는 피아노로 작곡했는데, 작곡하는 것도 좀 특이한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피아노 앞에 앉아 머리를 싸매거나 고뇌하는 게 아니라, 멜로디가 떠오르면 녹음하지 않고 머릿속에 넣어둔 후 나중에도 그 선율이 남아있으면 그제야 녹음하고 작곡을 시작한다고. 선율이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는 건 그 선율이 허접해서 기억할 가치가 없어서라고.(...)

5.3. 연주자로서

퀸에서 보컬 포지션 외에 피아니스트로도 활약했는데, 정확한 리듬감이 그의 연주에서 보여지는 차별적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브라이언 메이에 따르면 프레디 머큐리가 작곡 후 녹음을 할 때 피아노 연주를 처음 깔고 시작하는데 메트로놈이 없이 그냥 자기 맘대로 한큐에 녹음하는데 그 박자가 메트로놈을 놓고 친 듯이 한 치도 틀리지 않고 정확해서 마치 드러머가 피아노를 치는 듯했다고 설명하였다.[18]

그랜드 피아노는 건반악기로 신디사이저를 주로 활용하는 락밴드에선 그다지 흔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프레디는 그랜드 피아노의 사운드를 선호해서 스타인웨이앤드선스를 스튜디오나 공연에서 활용했다. 존 디콘이 You're My Best Friend를 작곡했을 때 프레디에게 일렉트릭 피아노의 연주를 부탁했지만 프레디는 그랜드 피아노 놔두고 왜 그런 허접싸구려 악기를 쓰냐고 거절해서 결국 디콘이 직접 연주해 녹음하기도 했다.

하지만 머큐리 본인은 스스로의 연주 실력은 그다지 맘에 들어하지 않았고[19] 때문에 80년대 들어서부턴 본인이 직접 연주하는 대신 프레드 멘델, 마이크 모란과 같은 세션 뮤지션들을 적극 활용하게 되었다. 또한 후기 라이브에서도 피아노에 앉아있는 대신 무대를 돌아다니며 관객을 이끌어가는 방침을 택함에 따라 공연에서의 건반 연주도 거의 세션에게 떠넘겨지다시피 하게 되었다.[20]


악기는 주로 피아노를 다뤘지만 기타도 쳤다.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 때만 연주하는데 코드는 3개 밖에 모른다고 했지만 실제 공연에선 6개를 친다. 참고로 82년 Hot Space 투어까진 통기타로 연주했으나, 84년 The Works 투어부터 펜더 텔레캐스터로 변경했다.

6. 잡다한 이야기

  •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과 친분이 있어서 여러 번 조우했다. 마이클이 프레디의 팬임을 자처해서 80~82년 퀸의 공연에 여러 차례 찾아오기도 했다. 참조 같이 세 곡을 작업하기도 했으나 스케줄 조정에 실패하여 생전에 완성곡이 발매되지는 않았다. [21]이후 두 사람은 소원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프레디는 인터뷰를 통해 마이클잭슨이 'Thriller'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이후 매우바빠졌고 프레디역시 마찬가지였기때문에 조금 소원해졌다고 말했다. 프레디는 그러면서 조금은 서운했다고..

  • 밴드가 성공궤도에 오르면서 멤버들끼리 자잘한 트러블도 잦았는데, 그중에서 프레디는 브라이언 메이와 제일 마찰이 잦았다고 한다. 프레디와 브라이언이 싸우는 방식은 좀 웃겼다고 전해진다. 프레디와 브라이언이 사소한 말다툼으로 시작해서 점점 서로 목소리가 커지다가 브라이언이 냉소적으로 프레디가 상처받을만한 말을 하면 프레디는 빡쳐서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그러다가 몇시간 뒤에 다시 프레디가 돌아와서 어영부영 화해를 하고 다시 하던 일에 집중했다고. 근데 그렇게 싸우고 있으면 주위 대부분의 반응이 '브라이언이 심한 말 할만 했네'였다고. 프레디가 주위 사람들이 납득하지 못하게 감정적으로 화냈던 적이 많았던 걸로 여겨진다.(Lesley-Ann Jones가 쓴 프레디 머큐리 바이오그래피 참조)

  • 시드 비셔스가 프레디에게 시비를 건 적이 있다고 한다. 불후의 펑크 록 밴드 섹스 피스톨즈에서 베이스라고 쓰고 핸드싱크라 읽는다를 담당했던 시드 비셔스에게 좋은 대학교를 나오고 뮤지션으로 대중적인 성공까지 이룬 프레디가 좋게 보일 리는 없었을듯. 어느날 음반작업실에서 프레디와 마주친 시드 비셔스는 "어이. 프레디 형님. 형님이 정말 관객들 앞에서 발레를 한 거유?" 라며 시비를 걸었는데,[22] 프레디는 "그럼. 우리는 최선을 다했지." 라고 말하며 유들유들하게 넘어갔다고.

  • 세간엔 게이라고도 알려져 있으나 정확히는 양성애자다. 대학 다니던 시절에 사귀던 메리 오스틴과 무척 깊은 관계였고 동거까지 하였으나 모종의 이유로 헤어지고 그 이후로 수많은 남자 애인을 사귀기 시작했다.[23] 그렇지만 메리와는 헤어지고 나서도 무척 사이가 좋아 죽을 때까지 함께했고 프레디가 본인의 유일한 '친구'라며 깊이 신뢰했다.[24] 프레디와 사귀던 여자친구, 남자친구 중에 메리를 질투해서 그걸 항의하다가 프레디와 헤어진 사람들도 꽤 있을 정도. 프레디 역시 누구도 메리를 대신할 수 없다고 늘 입버릇처럼 말했고 가족 이상으로 신뢰하는 전 애인이자 친구였기 때문에 프레디가 죽고 나서 런던의 대저택을 상속받았다. A Night at the Opera에 실린 "Love of My Life"라는 유명한 발라드곡 역시 메리 오스틴에게 바치는 노래였다. 한 평전에 따르면[25] 프레디 머큐리는 대학의 명물이었고 그가 양성애 기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친구들 대부분이 알고 있었다고. 잔지바르에서 태어난 특이한 인종의 그가 화려한 옷과 장신구를 걸치고 다니며, 매일같이 깔깔거리며 웃고 '달링' 같은 말들을 남자들에게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다녔으니 눈치 못채는 사람이 이상했을지도. 대학에 다닐 때는 무척 화려하고 밝은 성격이었다고 한다.

  • 강렬한 콧수염과 독특한 무대 매너 때문에 굉장히 호쾌하고 터프했을 것처럼 보이지만 무척 수줍음이 많고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파파라치식으로 달려드는 언론을 피해 많은 연인들에게 의지하곤 했지만 배신도 많이 당하면서[26] 상처를 많이 받았던 모양.

  • 퀸의 드러머인 로저 테일러와 작은 옷, 장신구 가게를 하기도 했다. 어느 정도 생활비를 벌려고 여기저기 손을 써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프레디는 장사를 할 만한 타입은 아니었다고 한다. 이때의 일화가 있는데, 가게를 보던 도중 프레디 머큐리가 입던 재킷을 벽에 걸어놓았는데, 한 손님이 프레디의 재킷을 맘에 들어했다. 마침 프레디는 잠깐 외출 중이어서 로저만 있었는데 손님에 재킷을 맘에 들어하자 푼돈을 받고 그것을 팔아버렸다. 잠시 뒤에 돌아온 프레디는 로저가 자신의 재킷을 팔아버린 걸 알고 펄쩍 뛰면서 화를 냈고 직접 재킷을 되찾아왔다고 한다. 어쨌든 장사는 시원치 않았고, 오래 지나지 않아 가게를 접게 된다.

  • 오페라와 발레등 고전 예술 장르를 좋아했으며, 발레복을 입고 라이브할 정도니 성악에도 관심이 많았다. 파바로티도 좋아했었다. 이런 인연으로 프레디 사후 퀸 멤버들이 파바로티와 공연을 했었다.(노래는 too much love will you.브라이언 이 영어로 부르고 파바로티가 이탈리아어로 부름) 고음역대의 창법이 그냥 나온게 아니다! 이런 프레디의 취향은 그가 작곡한 노래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퀸 노래중 뭔가 요상한 멜로디의 노래들이 들린다면 십중팔구 프레디가 만든 노래라고 봐도 좋다.

  • 워낙 열정적이고 강렬한 이미지 때문에 왠지 덩치가 큰 걸로 기억되지만, 175cm 가량으로 그렇게까지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신 사진을 보면 상체와 다리가 3:7일 정도로 정말 길었으며 비율이 상당히 좋았다. 키가 커보이는 비율.

  • 먼 훗날, 동방의 한 섬나라에서 연재된 막장 만화에 찬조 출연했다.

  • 메가쑈킹이 알타리라는 개인 사이트에서 영화 패러디 만화를 그리다가 기사 윌리엄에서 프레디 머큐리 사진을 입힌 동성애자를 비하하는 내용을 그려 퀸 팬들에게 쌍욕을 들은 적이 있다. 윌리엄을 등 뒤에서 안고 싶어하는 공주가 나오는데 어찌 공주가 쓴 마스크가 벗겨지더니 드러난 얼굴이 바로 프레디 머큐리 얼굴을 덧입힌 것이었고 윌리엄이 분노하면서 창으로 힘껏 두들겨 패주며 끝나는 줄거리였다. 당시에도 프레디의 팬들이 불쾌해하며 이 만화에 악플을 달기도 했다. 사실 영화 기사 윌리엄에 그의 노래가 나온 점 때문에 들어간 우스개이긴 하지만 어쨋든 고인드립이니... 메가쑈킹 항목참조.

  • 한국에서도 영챔프 기획으로 신인만화가들 단편형식의 시리즈물에 단편으로 나온 적이 있다. 요정과 관련해서 퀸의 그룹명이 퀸이 되었던 얘기를 다루고 있다.(퀸의 명곡들이 사실은 그 요정과 프레디와의 조우로 인해서 만들어 졌다는 식이다.) 만화가의 자료조사 부족이었는지 퀸의 명칭은 위에서 언급된 동성애자를 뜻하는 퀸이다. 참고로 등장한 마녀는 프레디와 연인이 되려다 딱지맞고 햇도 돌아서 막장 타는 역, 말년의 프레디가 죽기 직전에 다시 등장해서 그를 보살핀다.

  • 2011년 9월 5일에 탄생 65주년을 기념하는 구글 두들이 만들어졌다. 로고의 재생 버튼을 누르면 'Don't stop me now'의 1절이 영상과 함께 나오며 영문 자막으로 가사도 함께 볼 수 있다.

  • 튀어나온 입과 뻐드렁니에 대한 상당한 컴플렉스가 있어서[27] 웃을 때도 입을 가리고 웃고 수염도 그것을 가리기 위한 일환으로 길렀다고 한다. 80년대 말엔 면도를 했는데 그때의 수염들은 모두 가짜라고.

  • 2012 런던 올림픽 폐막식에서 당당히 한 부분을 차지했다. 그의 생전 영상을 따라 관중들이 가락을 따라하는 장면은 감동적이다. 프레디 머큐리는 성악가 몽세라 카바예와 함께 'Barcelona'라는 곡을 부른 적 있는데, 이 곡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주제가가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올림픽 전에 프레디 머큐리가 에이즈로 사망하자 올림픽 측에서는 에이즈로 죽은 사람의 노래를 주제가로 쓸 수가 없다며 다른 노래로 바꾸는 병크를 저지른다. BBC는 꿋꿋이 'Barcelona'를 틀었다(...) [28] 이 점을 알고 폐막식의 장면을 보면 프레디 머큐리의 20년 묵은 한풀이 같다는 생각도 든다.

  • 대단한 고양이 애호가[29]였다고 한다. 실제로 메리를 제외하고 고양이게만 재산을 상속시키겠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또 메리랑 사귈 때, 메리가 프레디한테 "우리 아기 가질래?" 라고 물어봤는데, 프레디는 "아기 가질 바에는 고양이를 한마리를 더 키우는 게 낫다" 라고 대답했다고....(..)

  • 공연중간에 목을 풀겸 독특한 소리를 내며 관중들과 호흡하는데,(이전 작성자는 관중조련이라고 적어논 그것) 역시 프레디의 성량을 따라오는 관객이 잘 없기 때문에 어찌보면 프레디의 가창력을 더욱 빛내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 퀸 평전에 따르면 진지바르 시절의 과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공연 직후 프레디의 동창들이 찾아왔는데 "죄송하지만 저는 귀하가 누군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한다. 또한 잔지바르 시절이나 인도에서 유학하던 시절 이야기를 절대 스스로 입에 안담았을 뿐더러 본명도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퀸의 홍보담당으로 일했던 직원은 십 년 넘게 퀸의 멤버들과 같이 일했는데 프레디가 죽고 나서야 프레디의 본명이 파로크 불사라였다는 걸 알았다고. 상술했다시피 프레디는 퀸으로 데뷔하고 나서야 본인의 이름을 프레디 머큐리로 개명하는데, 대학시절에는 프레디 불사라라는 이름으로 그냥 썼다고 한다. 근데 동창들의 증언에 의하면 불사라라는 성을 밝히는 걸 매우 꺼려했다고 한다. 풀네임이 뭐냐고 물어보면 그냥 어물쩍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고.. 이쯤되면 본인이 고향에서 지내던 시절이나 인도에서 지내던 그 시절을 그냥 흑역사라고 생각했던듯.

  • 일본의 대전격투액션게임 길티기어 시리즈의 주인공 솔 배드가이의 모티브가 되었다. 캐릭터 이름부터 프레디의 별명이고 이 캐릭터의 보물이 시어 하트 어택앨범. 캐릭터 테마 ost는 퀸 1집의 수록곡 <keep your self alive>에서 제목을 따왔다.사실 락 음악 매니아인 프로듀서 영향탓에 이 게임에 등장하는 전 캐릭터가 락음악,뮤지션과 연관이 있다.

  • © S_Werner (cc-by-sa-3.0) from

스위스 몽트뢰에 있는 프레디 머큐리의 동상. 생전 프레디 머큐리는 몽트뢰를 자주 방문했다고 한다. 흔히 프레디 머큐리하면 생각나는 A Kind of Magic 투어의 모습을 담아냈다. Made in Heaven의 앨범 자켓이기도 하다.

  • 여러 증언에 따르면 일부러 고음을 잘 내지 않았다고[30] 하는데, 자신의 음악은 대중들이 따라부르기 쉬워야하고 이미 충분히 어렵기는 하지만... 본인의 목소리 때문에 멜로디가 묻히는 게 싫어서라고. (수정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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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프레디 머큐리 사후 헌정무대에 등장한 라인업만 봐도 ㅎㄷㄷ
  • [2] 여기가 옆나라였던 탕가니카랑 합쳐지면서 이름이 탄자니아로 바뀌었다.(렝게티로 유명한 그 나라 맞다.) 탄자니아에서는 프레디 머큐리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지 잘 몰랐다. 그러나 하도 외국인들, 팬들이 탄자니아와서 자꾸만 "프레디 머큐리가 태어난 집 어디에요?"라고 묻기에 결국 누군지 몰라도 하여튼 유명한 사람이라는 게 알려졌다. 그리고 서로들 자기 집이 그가 태어난 집이라고 광고하거나 가르쳐줘서 진짜 태어난 집을 찾기 어렵다고 한다. 하도 경쟁이 심해져서 프레디 머큐리 사진을 가득 붙이고 우리가 진짜 프레디가 태어난 집 원조 머큐리 하우스라고 붙이고 걸개를 내걸지 않나, 경쟁이 장난 아니라고 한다.
  • [3] 여담으로 탄자니아에 있어야할 프레디 머큐리 출생신고서는 옛날에 분실되었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누군가가 훔쳐가서 수집가들에게 비싸게 팔았을 거라고.
  • [4] 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를 로마 신화에서 부르는 이름이 머큐리이다. 메르쿠리우스.
  • [5] 일부 매니아들이 보관하고 있는 이 시절 음악을 들어보면 정말로 프레디 머큐리가 몸담았던 밴드가 맞나 싶을 정도로 음악이 아마추어틱하다. 아무래도 아마추어 밴드의 멤버들이 퀸의 멤버들과 갭이 있는데다가 프레디 머큐리도 어릴 적이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을 듯. 프레디는 이 시절에 서너 개의 밴드를 거치지만 모두 일이년을 있지 못하고 밴드가 해체했다. 음악 수준도 모두 고만고만했다.
  • [6] 팀 스타펠은 옴겨간 'Humpy Bong'이란 밴드의 결과가 좋지 못했고, 결국 음악을 그만두고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았다. 자신은 퀸이 잘될 것을 알고 있었고 음악을 그만둔 것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 [7] 공연이 맘에 들지 않는 날이면 "내가 너희들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좀더 너희들의 가능성을 끌어올려봐" 식으로 애정 어린 격려도 자주 했었다고 한다.
  • [8] 프레디 머큐리의 처녀자리를 상징하는 요정, 브라이언 메이를 상징하는 게자리, 존 디콘로저 테일러사자자리
  • [9] 이때문에 글램락의 잔재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 [10] 성악,오페라,클래식,발레등을 즐겨보는것이 취미였던 프레디의 영향이 컸다.
  • [11] 1985년 자신의 솔로 앨범 "Mr.Bad Guy"의 수록곡인 "Living On My Own"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할 때도 타이즈를 입었는데, 촬영장소는 다름아닌 본인의 생일파티(...)
  • [12] 보수적인 마인드가 강한 영국에서는 양성애자인 그의 행동은 더더욱 언론의 가쉽거리였다.컴퓨터 공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동성애자인 앨런 튜링이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만 보아도..
  • [13] 세계 최대 음악 사이트인 allmusic.com에서 별4.5를 받았다!(5개 만점)
  • [14] 정확히는 그 즈음에 밑에 서술한 대로 프레디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말했는데 이미 에이즈 감염 소문이 파다할 때엿기에 맴버들은 그 말을 하는 순간 알아챘을 것이다.
  • [15] '씨x 하지 뭐' 정도의 뉘앙스
  • [16] 시한부 인생의 막바지에서 자신의 삶을 얘기하는 듯한 가사의 이 곡을 프레디 역대 최고의 보컬 퍼포먼스로 뽑는 팬들도 많다.
  • [17] 이 곡은 목욕하다가 악상이 떠올라서 만들었다고 한다
  • [18] Bohemian Rhapsody 메이킹필름 참조
  • [19] 머큐리의 절친이었던 엘튼 존은 자신과 머큐리를 비교하며, 공연에서 자신은 피아노 연주보다 노래 부르는데 집중해야 하지만 프레디는 피아노에만 집중하면 노래는 대충 불러도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즉 자신이 피아노는 더 잘 치고 노래는 프레디가 더 잘 한단 얘기.
  • [20] 가령, 70년대의 공연에선 거의 공연의 절반을 피아노에 앉아 보냈지만 마지막 투어였던 매직 투어의 경우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는 곡은 단 4곡뿐이었다.
  • [21] 2014년 발매된 Queen Forever 앨범에는 프레디 머큐리와 마이클잭슨의 데모곡을 합친 there must be more to life than this를 담아 발매했다.
  • [22] 뜬금없이 발레 이야기를 하는데, 프레디가 초기에 콘서트에서 입었던 민망한(...) 의상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 [23] 프레디가 메리의 잦은 외박과 바람기에 질려서 헤어졌다는 설, 프레디가 본격적으로 남성에 대해 눈을 떠서 헤어졌다는 설, 메리가 프레디에게 자신이 양성애자(또는 레즈비언)이라서 프레디에게 이별을 고했다는 설, 메리가 바람을 펴서 헤어졌다는 설, 메리의 의부증 증세 때문이었다는 설 등 다양하나 아직까지 정설로 확인된 것은 없다. 다만 그 당시 동거 중인 집에서 프레디가 나왔다는 것만 확인된 상태이다.
  • [24] 메리 오스틴 역시 나중에 결혼을 했지만 이혼을 했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프레디가 대부가 되어주었다.
  • [25] 국내에 정식 출판되지는 않았다. 인터넷에 비공식적으로 번역된 평전이 있으니 흥미가 있는 사람은 읽어보는 것도 좋다.
  • [26] 돈을 받고 사생활을 언론에 넘긴다든가 하는 식으로...
  • [27] 아직 수염을 기르지 않았을 때 동료 뮤지션이 프레디의 이를 보고 드라큐라 같다고 농담삼아 말했는데 프레디가 정색하면서 욕을 해서 주변 분위기가 싸해진 적도 있었다고 한다.
  • [28] 뭐 이 노래 대신 선정된 노래도 나쁘진 않았으나(...)
  • [29] 첫 번째 솔로 앨범도 자신의 애완 고양이에게 바쳤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 세계의 애묘인들까지 포함해서.
  • [30] 확실히 라이브에서 곡을 낮춰 부르는게 확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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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2 16:3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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