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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last modified: 2015-04-10 01:03:18 by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역사적 배경
3. 독일 내 주도권 갈등
3.1. 독일 관세 동맹
3.2. 대독일주의 vs 소독일주의
3.3. 덴마크 위기
4. 진행양상
5. 결과

1. 개요

1866년 6월에서 7월, 7주간에 걸쳐 프로이센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및 군소 독일 국가들이 참전한 전쟁. 독일 연방 내에서 오스트리아 위주의 대독일주의이냐 프로이센 위주의 소독일주의이냐의 주도권 다툼의 마지막 과정으로 최종적인 독일 통일을 위한 한 과정이었다. 뒤에 보지만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연장선상에 있다.
인터넷에서 역덕후나 리그베다위키 여타 항목에서 낚시꾼 혹은 천재 먼치킨(?) 비스마르크가 아니었다면 전쟁도 없고 갈등도 없고 독일 통일도 없고 하는 if 떡밥들이 나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흥미상 우연성에만 집착하는 개소리고 어디까지나 독일 통일이라는 시대과정속의 역사적 흐름 선상에서의 사건이다. 인물들이 아니었더라도 벌어질 시기에 벌어질 사건이란것.

2. 역사적 배경


독일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주도권 경쟁은 멀리 16세기 종교개혁으로 북독일 개신교 제후들의 성장과 17세기 30년 전쟁으로 합스부르크 황제가 북독일내 영향력을 대부분 상실하였고 본격적으로 이후 18세기 중반 마리아 테레지아, 프리드리히 대왕시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으로 본격화 된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남계 단절로 일시적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를 잃자 북독일에서 성장한 군국주의 국가 프로이센이 슐레지엔을 점유하며 북독일에서 합스부르크 가문 영토를 완전히 축출했고, 7년전쟁에선 합스부르크-로틀링엔 가문의 프란츠 1세가 1757년 제국의회에서 평화유지 의무를 저버린 프로이센 프리드리히를 상대로 제국전쟁을 선포하나 결과는 처참하게도 프로이센이 승리하며 황제와 합스부르크가문의 영향력은 심각하게 손상 되었다.

이후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며 신성로마제국은 해체되었고, 빈 회의에서 승전국인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나란히 영토확장을 하는데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의 견제에만 치중하고 독일권내 역외 영토[1]를 전부 포기하고 북이탈리아에서 실리를 챙기면서 향후 프로이센의 독일내 지분만 확대되었다. 프로이센은 프랑스령 또는 프랑스 위성국령인 라인란트와 베스트팔렌 지방을 얻었는데 작센에서 얻은 영토와 합쳐 북독일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프랑스령과 인접한 영토는 경제력이 높은데다 산업혁명시 급속도로 발전했기 때문에 농업중심의 도나우강 연안 영토를 지닌 오스트리아 보다 보다 경제력에 우위를 지니게 되었고 이것이 프로이센이 높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일 관세동맹을 주도하며 소독일주의의 발판이 되었다.

3. 독일 내 주도권 갈등

1795년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프랑스와 바젤 조약으로 강화를 하며 프랑스는 일찍 대프랑스 적대를 해소한 대가로 당시 황제국 오스트리아를 무시하고 마인(Main)강[2] 이북의 우위권을 인정해주었는데 이후 1807년 프로이센이 패망하고 다시 1815년 다시 열강으로 복귀하고 나서도 이 마인강을 경계로 하여 오스트리아에게 복수 주도권을 주장하게 된다.

3.1. 독일 관세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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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으로 독일 통일의 여건은 독일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가 주장한 관세동맹에서 시작 되었다. 처음에는 국가의 많은 수입이 관세에서 창출 되기 때문에 그의 의견은 채택되기 어려웠지만 1818년 프로이센 영토내에서 시작하여 1828년 프로이센 영향권의 군소제후국들과 시험적으로 시행하여 호평을 얻고 1834년 본격적으로 프로이센 경제권 주도하에 관세동맹이 결성되는데 초기 부정적인 독일 영방 국가들도 나중에는 늦게 참여한걸 땅을 치고 가입하려고 줄을 선다. 반면 농업중심으로 산업력이 뒤떨어진 오스트리아는 관세 수입을 포기 하기 어려웠고 뒤늦게서야 오스트리아 주도의 관세 협약을 주창하지만 오스트리아에서 수입할 물건도 팔어먹을 상품도 기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프로이센 눈치를 보며 가입하지 않아 거의 실효성이 없었다. 관세동맹은 프로이센에 극히 부정적인 남독일 국가들 조차 정치적으론 프로이센과 대립하며 경제적으론 예속된 처지라 민심과 반대로 프로이센에 주도권에 순응하게 되었으며 많은 학자들이 장기적으로 프로이센의 주도권은 관세동맹으로 이뤄 졌다는데 공감하고 있다. 프로이센은 관세동맹의 효력으로 독일내 영방들을 배제 혹은 가입으로 구스르거나 협박하며 영향력을 끼쳤고 독일 영방 가입국인 네덜란드[3]와도 간접적으로 관세동맹이 체결되고 독일내 산업혁명시기 경제성장 이끄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3.2. 대독일주의 vs 소독일주의


1848년 혁명이 일어나고 나서 민족주의 감정이 들끓었는데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국가적 정책과 별개로 시민사회 내부에서 독일내 단일국가 형성에 있어서 대독일주의냐 소독일주의냐의 극심한 갈등이 터져나왔다.
대독일 주의는 앞서 오스트리아 위주 소독일은 프로이센 위주로 설명하였는데 이안에서도 더 자세히 살펴 보자면


  • 대독일주의 중에서도
    • 오스트리아와 합스부르크영토를 모두 포함하자는 대독일
    • 오스트리아와 합스부르크 영토 중 헝가리등을 제외하고 독일연방내 속하는 지역만 통합하자는 대독일
    • 독일 연방내 오스트리아와 독일어권내 체코 이탈리아등을 제외하자는 대독일

  • 소독일 중에서도
    • 프로이센 위주로 북독일 오스트리아는 남독일에 주도권을 가지는 절충적 소독일주의
    • 독일에서 오스트리아를 제외하고 프로이센에 주도권을 인정하나 나머지 독일영방 국가의 주권과 자치를 인정하는 방안
    • 오스트리아를 제외하고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소독일 단 오스트리아와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자는 의견 등등.

대략 이러한 여러의견들이 나왔으며 여기에 독일연방내 여러국가들의 국가원수를 세습제로 하느니 선출제로 하느니 과격좌파의 공화제 주장까지 터져서 토론과 합의로는 절대로 불가능할 갈등이 터져나왔다.



3.3. 덴마크 위기

1849년 독일 혁명시기 덴마크에서 독일 연방 내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두 공국[4]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연방에 속한 두 공국을 당시 까지의 동군연합 형태가 아닌 덴마크 왕국에 합병하려 했는데 당연히 프랑크푸르트 의회에선 민족감정이 폭발하면서 연방내 두 강대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에게 군사적 대응을 촉구했다. 당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아직 혁명의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고 자국내 민족주의자들이 또한번 폭발할것을 우려 내키지는 않지만 덴마크에 무력 대응을 시도하게 되는데 영국과 러시아에서 크게 반발하며 나섰다. 결국 현상유지를 조건으로 덴마크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는 영국의 중재를 받아 후퇴하는데 민족감정이 일어난 국면이라 외국군주의 치하에서 신음하는 동포들을 저벼렸다고 가루가 되도록 까이게된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현실적인 가장 큰 어려움은 여러 영방내 군대의 통제권을 어떻게 가져오느냐 누구에게 지휘권을 맡기느냐의 퐈이어로 더 여러 의견으로 갈라졌으며 혁명세력내 의견들이 앞서 대독일 소독일 논쟁과 국가원수 선출 연방군대 조직 기존 영방내 군대의 통수권을 어떻게 가져올것이냐의 문제가 중구난방이 되자 추진력을 상실하고 독일 연방내 군대들에 의해 해산되고 만다.

-- 새로 작성중 --

1864년에 있었던 2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에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연합군은 덴마크에 압승을 거두고 두 공국을 획득했다. 이후 1865년 양국은 프로이센이 슐레스비히를, 오스트리아가 홀슈타인을 각각 차지하기로 하는 가슈타인 조약을 체결하고 영토를 분할했다.

그러나 사람 욕심엔 끝이 없는 법. 양국은 나머지 1개 공국마저 차지하기 위해 첨예하게 갈등관계를 빚었고, 결국 유틀란드 반도 남단 지역의 소국에 대한 영유권때문에 유럽의 두 강대국이 전면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라고 오토 폰 비스마르크라는 희대의 낚시꾼이 각본을 썼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이야기고 낚시일 뿐이었다. 후대 사람들이 다 알다시피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은 독일 통일에 있어 오스트리아를 배제하고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새 독일을 만들겠다는 계획에 따라 치밀하게 준비된 것이다.

따라서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제2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서부터 이미 비스마르크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위해 준비한 대규모 떡밥이라는 말도 있다. 다만 이 부분은 아직 논란이 많다. 가슈타인 조약의 핵심이자 보-오 양국 분쟁의 씨가 되었던 땅 나눠먹기 부분에 관해, 훗날 비스마르크 본인은 "그게 다 나의 계획대로였지 ㅋㅋ"라고 자랑한 적이 있다. 하지만 정작 조약의 그런 내용은 오스트리아가 제안한 것이어서, 전부 비스마르크의 계산대로였는지에 관해서는 이견이 있다. 어디까지 비스마르크의 계산이었고 어디까지가 우연하게 진행된 정치적 상황인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다. 비스마르크의 발언이 실제로는 자신의 역할을 일부러 과대평가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비스마르크로서는 독일 통일에 있어 가장 걸림돌은 오스트리아였다. 오스트리아라는 강대국이 독일 연방에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프로이센 주도하의 독일 통일을 막는 최후의 장벽이었다. 비스마르크는 이를 무력으로 허물기로 결심했고, 개전의 명분으로서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영유권을 이용했던 것이다.

결국 비스마르크는 이를 교묘히 이용하여, 독일 연방의회에 오스트리아를 배제하는 연방 개편안을 제출했고, 이에 자극받은 오스트리아가 결국 영유권 분쟁과 맞물려 1866년 6월 17일, 프로이센에 선전포고하고 남독일 연방 국가들이 이에 가담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4. 진행양상

먼저 선전포고했음에도 오스트리아는 고전해야 했다.[5]
선빵의 이점 따위는 없다 대규모 상비군을 갖춘 프로이센군은 철도[6] 이용하여 신속하게 병력을 전선으로 전개, 오스트리아군을 거세게 몰아붙였으나, 오스트리아는 병력 동원에도 시간이 걸리고 철도 총연장길이도 형편없이 부족해 병력 전개에 어려움을 겪었다. 셔틀이 수송을 못하고 있죠! 러시 당하는 거죠! 느려서 거기에다 다민족 국가의 고질병인 내부민족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고, 남쪽에서 느닷없이 이탈리아가 선전포고까지 해오면서 병력마저 분산되었다. 이탈리아의 선전포고는 사실 몇 달 전에 이미 비스마르크와 약속된 것으로, 비스마르크는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비밀리에 공수동맹을 맺고 대신 오스트리아령 롬바르디아베네치아를 이탈리아에 넘겨주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7]

개전 초기 작은 전투에서 연달아 패하고 국경에서 밀려난 오스트리아군은 작센군과 연합하여 20만의 대군으로 보헤미아의 쾨니히그레츠에서 결전을 시도했다. 그러나 7월 3일, 무트 폰 몰트케가 직접 지휘한 프로이센군은 오스트리아-작센 연합군을 맞아 압승을 거두었다. 프로이센의 전사자가 2,000명도 채 안되는데 비해, 오스트리아-작센 연합군은 약 2만명에 달하는 전사 및 실종자에 비슷한 수의 포로까지 발생하며 결전에서 참패, 전황은 순식간에 기울었다.

이 전투는 전장식 소총을 이용한 오스트리아군과 후장식 소총으로[8] 장비를 교체한 프로이센군의 대결로 유명하다. 결국은 우월한 후장식 소총 우왕ㅋ굳ㅋ 후새드 참고로 후장식이 전장식보다 더 좋은 점은 일단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 장점은 뒤에서 장전하므로 누워서 장전 및 사격이 가능, 즉 엄폐하면서 사격이 가능해졌다는 것이고, 두 번째 장점은 전장식에 비해 무려 6배나 빠른 연사력(...)을 가진다는 점이다. 결국 보병간의 사격전에서는 프로이센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는 것이다. [9]

그런데 사실, 이 전투는 오스트리아가 이길 뻔 했다. 당시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인 베네데크 장군은 전략적 능력은 떨어져도 전술적 능력은 훌륭했고 스스로의 능력을 잘 아는 그는 자신의 능력을 살리기 위해 쾨니히그레츠 지역에 우주방어선을 치고 기다렸다. 그리고 전투 초반 프로이센군이 여기에 닥돌했고 초반에 엄청 고전했다. 비스마르크와 몰트케의 담배 야사[10]가 생긴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대로만 진행되었다면 오스트리아가 이기거나, 프로이센이 이기더라도 엄청난 피해를 입고 끝났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지역 방어 임무를 맡은 오스트리아의 귀족출신 지휘관 두 명이 전공도 못세우고 기다리기 짜증난다고 돌격해버렸다! 바로 이 방어선이 뚫려버린 결과로 패배한 것이다. 참고로 소총의 경우 프로이센이 확실히 우월했지만 포병에서는 오히려 오스트리아보다 뒤떨어졌고 이것도 초반 고전의 원인이 됐다. 따라서 종합하자면 이 전투에 한해서는 프로이센군이 우월해서 진 것이라기보다는 오스트리아군이 삽질해서 스스로 자폭한 것이 패배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보면 된다.

물론 오스트리아군은 이탈리아 전선에선 나름대로 선전하며 방어전을 수행했고, 특히 리사 해전에선 열세인 해군력으로 이탈리아 함대를 격파하는 등 선전했으나 역시 이탈리아군 주적인 프로이센군이 파죽지세로 체코를 석권할 기세를 보이자 7월 26일, 황급히 휴전조약을 체결했다. 7주만의 일이었다.

5. 결과

승리에 들뜬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와 군부는 즉시 오스트리아의 수도 으로 진격하고자 하였으나 느닷없는 비스마르크의 휴전 결정에 어이를 상실했다. 정치계, 군부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비스마르크의 느닷없는 휴전 결정에 격분했다.[11]

더군다나 뒤이어 전해진 평화조약 내용은 여론을 들끓게 만들었다.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에 땅 한 치도, 땡전 한 푼도 안주고, 대신 이탈리아만 롬바르디아베네치아를 획득했던 것이었다(이 결과는 이탈리아 왕국 성립운동에 한 획을 그었다). 오스트리아는 대신 독일에서의 영향력을 포기하고[12]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북독일 연방을 승인했다.[13]

국왕과 장군, 병사, 일반 여론까지 똘똘 뭉쳐 비스마르크를 비난했으나 비스마르크는 늘상 그렇듯 국왕을 구워삶은 뒤 다양한 방법으로 여론을 무마시켰다. 비스마르크로서는 오스트리아를 우호적인 동맹국으로 묶어둘 필요성이 있었다. 독일 통일을 방해하는 더 큰 강적을 격파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 때는 이번에 못 턴 수도를 털 수 있었다. 배상금도 왕창 뜯을 수 있었고...

과거 영국동군연합을 이루고 있던 하노버 왕국은 오스트리아를 편들었다가 망했다.[14] [15] 그 외에도 헤센-카셀이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나사우, 프랑크푸르트를 프로이센 왕국으로 합병시키는데 성공했다. 단, 작센은 프랑스의 견제로 북독일 연방에 가입하는 식으로 만족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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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라인강변 합스부르크 가문 월경지 영토들로 13세기 스위스에 집착한 이유도 오스트리아와 경제력이 높은 라인강변 영토들을 연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본토와 너무 멀기 때문에 심심하면 루이 14세에 털렸고 요제프 2세 때부터 라인강변 영토는 포기하고 본토와 가까운곳에서 확장에 치중한다.
  • [2] 라인강의 지류로 프랑크푸르트에서 라인강과 합류한다. 우리나라에서 한때 한반도 대운하의 모델이 되었던 독일은 물론 유럽내 양대 하천인 라인강과 도나오(다뉴브)강을 연결하는 라인-마인-도나우(RMD) 운하가 개통되어 있기도 하고 현재도 남북 독일의 지리적 경계점
  • [3] 룩셈부르크 뿐만 아니라 현 마스트리히트 지방인 림부르크도 포함되었다.
  • [4] 홀슈타인 내 라우엔부르크 공국 포함
  • [5] 뿐 아니라 오스트리아는 크게 3가지 면에서 유리했었다. 보헤미아(오늘날의 체코.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를 타고 북쪽으로 살짝막 움직였어도 바로 프러시아의 수도 베를린에 닿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남독일 주들은 모두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었기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들의 위치선정까지 사실상 완벽했었다. 반면 프러시아는 두 동강 나있는 영토(사이에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은 다른 주들이 껴 있음)가 있을 뿐더러 주변국들을 전쟁에서 발을 못들이게 하는데도 상당히 많은 노고를 겪었다.후에 보면 알겠지만 이러한 이점들을 가진 오스트리아는 끝없이 고통 받는오랜시간 동안 고전하고 비참히 패배한다.
  • [6] 프러시아는 비스마르크의 전쟁 전의 신속한 판단들 덕분에 철도 5개를 완공시켜 엄청난 통신과 수송 효율성을 보여준 반면 오스트리아는 전쟁도중 프러시아군을 상대로 사용 할 수 있었던 철도가 단 하나밖에 없었다.
  • [7] 비스마르크는 이탈리아를 자기 편으로 섭외 했을 뿐 아니라 프랑스와 러시아를 전쟁에 발을 못 들이게끔 얘기를 끝내놓았었다. 당시 폴란드(1차 대전 전까지 러시아, 오스트리아(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러시아(후에 독일 제국)이 나눠서 통치함)에서 활발해지는 독립 활동 문제로(바르샤바에서 유난히 심했음) 골머리를 썩고 있던 러시아에게 '프러시아가 도움을 줄 터이니 프러시아가 오스트리아랑 전쟁을 하면 그냥 아무편도 들어주지 말아라'라는 조건을 내걸었고 크림전쟁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에게 뒷통수를 맞은 러시아는 당연히 흔쾌히 수락했다. 프랑스도 강한 독일을 원하지 않는 이웃 중 하나였는데 나폴레옹 3세는 라인강 동부의 영토를 프랑스가 합병하는 걸 프러시아가 묵인한다는 조건 하에 개입을 하지 않겠다고 동의하였다. 어차피 5년뒤에 다 뺏기는데 뭘...
  • [8] 프러시아군이 이용한 드라이제 니들건이 대표적이다.
  • [9] 하나 덧붙이자면 조준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전장식 소총은 발포 후 장전 문제로 조준점을 다시 세팅해야 하나 총을 많이 움직일 필요가 없던 후장식 소총은 비교적 오래 조준점이 유지가 되었다.
  • [10] 전투가 한창 질행될 당시 몰트케의 지휘부에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1세가 방문했다. 이 때 비스마르크는 몰트케에게 담배갑을 건네며 한 대 피울 것을 권유했다. 그런데 이 담배갑에는 썩어서 맛이 간 담배와 정상적인 담배가 있었다. 몰트케는 이 중 정상인 담배를 골라서 피우며 상황을 설명하였고,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1세에게 "이 전투는 이겼으니 돌아가시죠"라고 말했다. 격렬한 전투로 아군이 피해를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휘관인 몰트케가 맛난 담배를 골라서 피울 정도로 침착하게 지휘하고 있으니 승산이 크다고 비스마르크가 판단했다는 이야기다.
  • [11] 그런데 비스마르크의 결정이 적절했다는 평도 적지 않아 있었고 지금은 오히려 그쪽으로 기울고 있다. 아마도 비스마르크가 빈으로 진격했다면 프랑스나 러시아, 혹은 영국이 개입했을 것이라는 설이다. 아무리 프랑스와 러시아가 프러시아에게 댓가를 받았다지만 빈의 합스부르크왕가가 해체되며 오스트리아 제국이 너무 심각한 꼴이 되버린다면 동방의 오스만 제국(뭐 그럴 힘이 있었을지 의문이지만...)의 세력을 제대로 견제할 제국이 없을 뿐더러 유럽 세력의 균형이 무너져 버리는 것을 방관하기만 하지는 않았을 것을 알았다는 의견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비스마르크는 3수는 앞에 두고 볼 줄 알았던 거물이었다.
  • [12] 기존의 오스트리아 주도로 구성된 독일 연방을 해체했다.
  • [13] 이런 분위기는 러일전쟁과도 비슷하다.
  • [14] 옆나라 작센은 그래도 북독일 연방에 가입하는 형식으로 왕가가 사라지고 멸망하는 건 피했지만 하노버는 프로이센 왕국으로 완전히 합병당했다. 안습
  • [15] 이때 하노버의 왕실 금고는 프로이센 왕국의 후신이 되는 북독일 연방이 고스란히 챙겼고 그 돈은 보불전쟁바이에른같은 남부 국가를 구워삼는데 쓰이는 등, 잘 쓰고 다녔다. 이 돈으로 지은게 바로 노이슈반슈타인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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