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D R , A S I H C RSS

프리드리히 대왕



Friedrich II, 1712.1.24~1786.8.17

프로이센 역대 군주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프리드리히 2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Contents

1. 개요
2. 생애
3. 한계점
4. 기타

1. 개요

Friedrich der Große (영문 표기는 Frederick the Great). 현대 독일에서도 가장 존경받는 위인 중 한 명.

18세기 프로이센 왕국의 제3대 국왕, 프리드리히 2세(재위 1740~1786). 대표적인 계몽주의 군주이며[1] 합리적인 국가 운영을 통해 프로이센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반마키아벨리론을 저술하여 군림하는 군주가 아닌 봉사하는 군주의 역할을 강조했으며[2] 결국 국가와 신민에 대한 그의 '봉사'는 그의 의지대로 그가 통치하는 동안 프로이센은 세계에서 가장 군국화된 국가가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활발한 전쟁을 벌였다.

2. 생애

소년시절에 어머니의 배려로 프랑스인 가정교사의 교육을 받아 그당시 유럽 문화의 중심이었던 프랑스 문화에 심취하여 독일 문화를 경멸하게 되었으며, 아버지의 뜻대로 군사학에도 배웠지만 문학과 플루트 연주에 골몰하였기 때문에 무인기질이 충만한 부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노여움을 샀다.[3] 프리드리히가 커갈수록 부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피해망상과 정신착란으로 아들을 두들겨 패면서 사이가 벌어졌다.] 사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매우 폭력적이고 가부장적인데다 가족들을 학대했기에, 프리드리히 2세가 아버지를 닮아 단순 무식한 돌쇠형이었다고 하더라도 성장 과정은 좋지 못했을 것이다. 프리드리히는 음악, 시, 문학 등에 관심을 보이긴 했지만 결코 집안과 왕국의 군국주의 전통을 거부하진 않았다. 타고난 재능으로 뛰어남을 보였고 어릴적 부터 왕위 계승자임에도 힘든 군사훈련도 묵묵히 받았다. 다만 지적호기심과 감수성이 풍부했기 때문에 부왕과 충돌한것...
해당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프리드리히 2세의 형 둘에게도 사망 원인을 제공했고, 맞으면 맞을수록 강해진다는 생각으로 허구한 날 두들겨 패며 학대했다.[4] 더군다나 사촌이며 약혼자 였던 영국 아멜리아 공주와 혼약이 아버지에 의해 파혼되자[5] 프리드리히 2세가 견디다 못해 18세 때 친구와 함께 어머니의 친정인 영국 궁정으로 탈주하려고 하다가 잡혀 감금당한다.이 당시 친하게 지내던 청년 귀족장교 2명과 같이 실행하는데 발각되어 친구 한명은 영국으로 탈출하고 한명은 붙잡혔다. 법관들이 왕위 계승자인 왕세자는 재판할수 없고 왕세자의 친구 한명에겐 '탈영'을 이유로 2년형을 선고하자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왕의 권한으로 판결을 번복하고 왕세자의 친구는 사형 왕세자는 왕위계승권을 비롯한 신분을 박탈당하고 죽이려 했으나 신하들이 간신히 말려 요새에 감금되었다.[6] 그 친구는 결국 처형되었고, 프리드리히는 갇혀 있던 건물창으로 친구의 처형 장면을 강제로 지켜봐야 했다. 잘린 친구의 목은 프리드리히의 방에서 보이는 장소에 걸리게 되었다. 난생 처음 보는 끔찍한 장면에 프리드리히가 충격을 받고 기절하자 이에 화가난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오히려 자식에게 '바보같은 놈'이라면서 저놈은 더이상 내자식 아니라며 같이 참수하라고 노발대발했다. 이에 곁에 있던 왕비랑 모든 신하들, 왕족,이 막장테크 아버지의 꼰대짓에 충격먹은 외국의 동업자들(타국 왕들)까지 뜯어말려서 살수 있었다. 아버지가 이런 막장이니 가정적으로 불행할수 밖에 없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으로 영국왕실 가문 하노버가문의 방계 집안인 브라운슈바이크-볼텐뷔펜(Braunschweig-Wolfenbüttel)가문의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나와 결혼하였으나[7] [8] 이 왕비를 사랑하지 않아 평생토록 가정적으로는 불행하였다. 7년전쟁때도 전쟁 끝내고 몇 년 만에 만났을때 '살이 좀 찐거 같다'는 말만 했다고 하며, 둘 사이에 자식도 태어나지 않아서 왕위도 조카가 물려받았다.[9]그나마 결혼의 대가로 부왕의 감시에서 벗어나 얻은 자유를 라인스베르크 별궁에서 독서와 음악으로 울분을 달랬다


그러나 이러한 우울했던 인물이 정치철학과 합리적인 사고에 있어서는 놀라울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정치에 관한 저술은 아마추어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은 것이었다. 프랑스의 볼테르와 서신 왕래를 하며 저술한 《반마키아벨리론》에서 그의 사상이 잘 드러난다. 반마키아벨리론의 내용처럼, 프리드리히 2세는 합리적인 사고와 국가에 봉사하는 태도로 국가를 운영해 나갔다. 스스로 검소하며 부지런하게 일하며, 관료조직의 규모를 축소시키되 효율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것은 당시까지도 군림하는 군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오스트리아나 프랑스 등과 같은 주변 유럽국가에 비해 놀라운 것이었다. 또한 과학 뿐만 아니라 당시로써는 놀랍게도 사상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할려고 하였는데, 이러한 것은 그때까지도 신교와 구교의 갈등으로 신음했던 유럽 각지에서 학자들과 여러 재능있는 사람들을 프로이센으로 불러들이게 한다.

게다가 아버지 프리드리히 1세가 아들에게 난폭하게 대하긴 했어도 많은 유산과 8만에 이르는 군사력을 남겨주었고, 이를 바탕으로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을 발전시킬 수 있어다. 수도인 베를린을 화려하게 건설하는 한편, 군사적으로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8만의 군대를 19만에 이르는 유럽 세번째의 군대 규모로 성장시켰다. 인구 규모에 비추어보면 당시 프로이센은 세계에서 가장 군국화된 국가였다. 프리드리히는 이러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유럽의 정복을 꿈꾸는 국가에 대한 방 전쟁, 선제 공격의 정당함을 주장하였다.

이후 오스트리아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즉위에 반대한다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에 참가하여 공업이 발달해 부유한 지역인 슐레지엔을 뜯어냈다.[10] 이 전쟁을 통해 유럽의 다른 국가들은 프로이센의 약진을 주목하게 된다.

이후 포츠담에 일명 수시 궁전을 세우고 학자와 문인과 함께 토론을 즐겼다. 볼테르를 불러들여 상주하게도 해주었다.[11] 상수시는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 같은 거대한 궁전에 비하면 작은 곳으로, 프리드리히는 이 곳에서 시종 몇 명과 검소하게 지냈다. 그러면서 당시 오페라 하우스는 왕과 귀족을 위한 것이었음에도 국민들을 위해서 궁전과 연결되지 않은 오페라 하우스를 베를린 시내에 지었고, 그 자신은 불가지론자이면서도 가톨릭 신자들을 위해 헤드비히 성당을 지어 종교에 대한 관용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프로이센에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다. 프로이센에게 패한 오스트리아에 실망을 느낀 영국은 든든한 동맹을 찾는 프로이센과 서로 이해가 일치하게 되어 동맹을 맺게 된것이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전통적인 유럽의 강대국이며 라이벌이었던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이해가 일치하게 되었다. 특히 프랑스는 해외 식민지를 획득을 노리며 유럽에서 기반을 다지려 했다. 결국 이런 배경에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동맹을 맺는 이른바 동맹의 역전이 벌어진다.[12] 이 동맹에 프리드리히를 무척 싫어한 엘리자베타 여제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선 프로이센의 편을 들었던 스웨덴도 가담한다. (루이 15세의 애첩이었던 퐁파두르 부인,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동맹이라고 하여 이를 삼부인 동맹이라고도 한다.)

결국 1756년, 프랑스와 영국의 전투를 시작으로 7년 전쟁은 발발하고 아메리카와 인도 등지에서는 프랑스 대 영국, 유럽에서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프로이센이 충돌한다. 신속한 결전으로 오스트리아를 초반 굴복시키기 위해 진군한 프로이센군은 로보시츠, 리베레츠, 프라하 등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연파하며 보헤미아로 진군했으나 콜린에서 패배하며 조기종전은 물건너가고 만다. 이 해 여름 동안 프로이센군은 전군의 1/3을 잃으면서 위기에 몰린다. 그리고 다음 해 프리드리히를 누구나 유럽 최강 장군이라 인정케하는 전투가 연이어 벌어진다. 그것은 1757년 로스바흐-로이텐에서 이루어진 연이은 전투였다. 로스바흐에서는 42,000명의 프랑스-오스트리아 연합군을 22,000명의 프로이센군으로 격파해 버렸고, 로이텐에서는 36,000명의 병력으로 8만이 넘는 오스트리아군을 관광보냈다. 피해는 상대의 절반 이하…. 그러나 다구리에는 장사가 없는 법. 동쪽에서는 러시아, 서쪽에서는 프랑스, 북에서는 스웨덴도 가담해 밀고내려오고 남에서는 오스트리아가 몰려오자 남은 건 연전연패…. 동맹국인 영국은 내각교체로 인해 물자 지원을 끊어버리지 않나.[13] 말그대로 무참히 관광당했다. 결국 수도인 베를린도 함락당하고 쫓겨다니며, 독약을 담은 로켓을 목에 걸고 다니며 자살을 고민하는 순간… 갑자기 구원의 빛이 내려온다. 1762년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가 급서하고 즉위한 독일 출신의 표트르 3세가 프리드리히 대왕의 였던 것이다!!!

표트르 3세는 전쟁 이전의 영토를 기준으로 화의를 맺자고 제의했다.[14] 이러면서 다시 역전하여 오스트리아의 군대를 격파하면서 다음해 7년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한다. (여담이지만 이런 분위기가 된 것에는 프랑스가 일찌감치 식민지 전쟁을 위해 러시아의 지원을 중단하고 유럽 전선에서 빠져나간 것도 이유가 컸다. 하지만 그럼에도 패배. 결국 프랑스는 퀘백 지방을 영국에게 내주게 되고 북미 등의 많은 해외 식민지를 상실했다. 하지만 영국의 부담도 만만치 않아, 보스턴 차 사건 등으로 나타나는 북미 식민지인들의 불만이 커지게 된다. 결국 미국 독립전쟁 이 1775년 일어난다.)[15][16]

이후 폴란드 영토 분할에 참여하고[17] 이에른 계승 전쟁에 참가하는 등으로 프로이센이 북부유럽의 최강자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하지만 폴란드는 망했어요 이러한 결과는 단순히 군사적으로만 승리해 얻은 것이 아니라 학술, 교육, 복지 등을 크게 발전시켜 프로이센을 단순한 군사국가가 아닌 진정한 중유럽의 강국으로 끌어올린 명군주이기도 했으며 계몽군주답게 미국 독립전쟁때 자신의 장교들을 보내주기도 해 륙군을 크게 강화하는데도 한 몫 했다. 리드리히 빌헬름 폰 슈토이벤이 대표적. (1776년 크리스마스 기습의 독일 용병과는 상관 없다.) 영국에게 물자 지원 중단의 복수를 했다

1772년에는 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서프로에센을 뜯어내며 그동안 형식적으로 폴란드왕국에 종속되었던 종주권을 청산하고[18] 프로이센왕(King 'in' Prussia)에서 프로이센의 왕(King 'of' Prussia)으로 칭호를 바꾸었다.[19] 대왕이라는 칭호도 자기 자신이 붙인 것이 아닌 국민들이 헌사한 것…. 말그대로 한 시대를 만든 먼치킨.

1786년 그의 나이 74세에 군대를 검열하다가 내린 폭우에 맞아 폐렴에 걸려 사망했다. 그가 사망하자 갓 독립한 미국은 조기를 올리고 예포를 쐈으며,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는 어머니의 적이었음에도 "이제 한 시대가 저물었구나"라는 말로 심정을 대신했다. 이후 유럽에는 프리드리히 대왕 빠들이 무지 양산된다.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 프랑스의 나폴레옹 등... 심지어 먼 훗날의 히틀러도 이 대열에 동참한다.

명언으로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계몽 군주란 개념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문구이기도 하다.

국왕은 국가에서 첫째 가는 심부름꾼(혹은 머슴)

3. 한계점

그러나 그와 프로이센이 완벽한 것만은 아니었다. 당장 위의 명언만 보더라도, 백성의 머슴이 아니라 "국가"의 머슴이라면서 국가주의적 관점의 시초라고 까는 시각도 있다. 사실 프리드리히는 계몽"군주"로서, 계몽주의적인 면에서 많은 진보를 이끌어 내었음에도 결국 군주제라는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던 인물이다. 프로이센에서는 사상적으로는 자유가 보장되었지만, 그렇다고 왕을 거역하거나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까지 용납되지는 않았다. 볼테르가 프랑스에서 건너와 3년 만에 나갈 수 밖에 없었던 일화가 이러한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프리드리히는 끝까지 그와 사상적인 교류는 했지만, 왕으로서 볼테르가 자신을 거역하는 것을 용납할 수는 없었다.

또한 프리드리히는 토론을 통해 사상이 이끌어져 나오는 것보다, 한 사람의 사고와 그것이 충실하게 퍼져나가는 것을 선호했던 인물이다. 즉,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 2세 한 사람의 사상이 전 국가로 퍼져가며 충실히 따르는 구조를 가졌던 국가였다. 이는 당시 프랑스와 같은 구시대적인 체제를 가진 유럽국가보다는 나았지만, 훨씬 수평적인 구조를 가졌던 영국보다는 더 경직된 것이었다.

지나친 프로이센의 군국화도 비판의 소지가 있으며, 전쟁의 결과는 좋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칫 패망할 수도 있었던 위험천만한 일이라는 점도 간과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이 과정은 엄청난 무리수가 동원되었다. 예를 들어서 프리드리히의 증조할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大)선제후는 30년전쟁 후 3분의 1로 쪼그라들었고 이로인해 침체된 국력증가를 위해 일부다처제를 허용하고 권장하기도 한 전력도 있었다. 바람이나 간통 같은 단어를 사전에서 지워 버렸다어차피 지워봤자 독일내 독일어를 쓰는 300여개 다른국가에서 사전 들여오면 소용없음 오히려 품행이나 정절에 대해서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사람이 나오면 그 사람을 처벌하는 규정을 만들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선대부터 이어온 프로이센내 개신교 교회 수장자리를 지키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대놓고 종교에 어긋나는 행동까진 나서서 하지 않았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공표하지 않았지만 불가지론자였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불신이 있었기 때문에 국교인 개신교[20]도 뿐만 아니라 가톨릭교도에게도 차별을 반대했고 심지어 이슬람교를믿는 보스니아 출신 용병을 위해서 베를린에 모스크를 지어주려고 까지 할 정도...

종합해보면 군주제의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백성들을 위해 누구보다 노력한 계몽 군주.


4. 기타

후에 프로이센을 원정한 나폴레옹은 그의 묘를 참배할 때 동행한 원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군들, 모자를 벗게. 이 분이 살아 계셨더라면 우린 여기 있지 못했을걸세." 나폴레옹이 베를린을 점령한 후 제일 먼저 챙긴 물건이 프리드리히 대왕의 시계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가치 있는 전리품이라고 히히덕거리기도….

이런 일화도 전해져 내려온다. 자기가 기르는 벚나무의 체리참새들이 먹어치우자, 화가 나서 자기 벚나무에 참새가 1마리도 오지 못하게 막았다. 그러나 참새들이 오지 않자 나중에 벚나무에 벌레가 꼬이고 병들게 되자 금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참새들을 받아들였다고. 그러나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 너무 명확하기에 창작된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훗날 먼 중국의 독재자 마오쩌둥실제로 이런 짓을 저질렀다. 그것도 자기 집마당 정도가 아니라 대륙 전체를 가지고 말이다! 그리고 그 결과와 교훈은 창작(?)보다 훨씬 명확했다.

또한, 앞에서도 잠깐 지나가듯 언급되었지만 음악에 관심과 조예가 대단히 깊었다. 그 본인부터가 바로크 시대의 플루트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한 요아힘 크반츠에게 플루트를 사사받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그의 곁에는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가 측근으로 있었다.[21] 아무튼 본인의 열정도 열정이지만, 주위에 이처럼 훌륭한 음악가들이 많이 있었던 덕에 그는 인류 역사상 그리 흔치 않은 "군주이자 작곡가" 가 되었다. 세종대왕 돋네 그의 음악을 직접 들어보자. 듣기
300여곡이나 되는 자작곡이 있고 직접 연주도 자주해서 천재(?)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당시 평가로도 플루트 연주자로써도 잘쳐줘봐야 2류정도였고 현재의 평가도 프리드리히 시대 이 트렌드를 감안하면, 그의 취향은 약간 한물 간 스타일이었다.. 이시기엔 이미 바로크 음악 끝물인데 반세기전에나 유행하던 스타일을 고집한다는 평을 듣는다.

당시 막 강선의 개념을 고안한 벤자민 로빈스의 저서 <새로운 포의 원리>를 프리드리히가 직접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에게 번역을 맡길 정도로 새로운 군사 기술에 관심있어 했다.

커피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그가 마시던 커피는 샴페인으로 끓여서 겨자로 맛을 낸(...) 것 이었다고 한다. 강글리오? 너무 많이 마셔서 담당의사가 줄일 것을 말하기도 했다. 줄인게 오전에 7~8잔, 오후에 한 주전자 였다고.[22] 정작 다른사람들이 마실 커피에는 과도한 세금을 물리고 그 유통을 통제하려고 했다(...).

한편으로는 중국의 문화를 동경하기도 했다. 말년의 거처로 지은 상수시 궁의 정원에는 중국식으로 설계한 다방(茶房)이 있는데, 건물 주변을 중국식 복장을 입은 동상으로 둘러 쳐 놓고 천장에도 중국식 화풍을 흉내낸 그림을 그려놓았다고. 다만 중국에 대해 자세히 알고 좋아한 것은 아니고, 당시 유럽에서 중국의 도자기[23]가 유행한 것에 영향을 받은 것. 이건 비단 프리드리히만의 경향이 아니어서, 이 무렵에 지어진 왕궁을 보면 중국산 도자기를 한가득 진열해놓은 방이 적어도 하나씩은 있다.

프로이센에 감자를 보급하기도 했는데,[24] 당시 프로이센의 탄수화물 공급은 전적으로 밀에만 의존했기에 밀값이 요동치기라도 하면 식량사정이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1774년 전국에 대흉작이 발생하자 이 문제를 해결할 구황작물, 식량 증대, 전투식량 확보 등의 목적으로 전국에 감자를 심으라 명했는데 사방에서 '맛없어서 개도 안먹는걸 사람더러 먹으라니 너무하지 않냐'라는 반발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2세는 반발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매일 매일 감자를 먹었다. 이로서 감자를 개도 안먹는다고 하면 왕한테 개만도 못하다고 디스하는게 되버린 셈 (...)

감자를 사람용 식량으로 보급하는데는 몇년 안 걸린건지, 1778 년 ~ 1779 년에 걸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맞붙은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때는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이 하라는 전투는 안하고 전투 식량 확보를 위한 감자약탈질을 더 열심히 해대서 '감자 전쟁' 이라는 별명이 있다. 약탈 대상이 된 바이에른 지방의 농부들만 엄청나게 죽어 나갔다고. 프리드리히 대왕도 감자 보급의 공로로 '감자대왕' 이라는 애칭을 얻었고, 현대에도 그의 무덤을 방문할때 감자를 두고 오는 독일인들이 많다.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며 자라서 그런지 개인적인 인간관계는 폐쇄적이고, 인간 불신도 있었으며, 심지어 개의 충성심을 극찬하며 사람은 개만도 못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어쨋든 매우 고독하게 살았던 사람으로, 말년에 가족이나 가까운 친지들이 세상을 뜨자 기르던 그레이하운드들만을 심적으로 가까이 했다고 하며, 자신이 죽으면 자신의 애견들 곁에 묻어달라는 부탁도 남겼다.

히틀러의 마지막 순간을 다룬 영화 몰락에선 히틀러가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상화를 보며 고뇌에 빠지는 장면이 있다. 히틀러가 루즈벨트의 뒤를 이은 트루먼이 표트르 3세의 활약을 재현해 주기를 기대망상했던걸 표현한 장면.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에서는 독일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
  • [1] 시기적으로도 조선정조와 겹쳐 간간히 비교되기도 한다.
  • [2] 군주론의 내용은 간단히 요약하자면 '착한놈하고 나쁜놈이 싸우면 힘 센 놈이 이긴다(그러니 착한 일을 하려면 힘이 세야 한다)는, 말하자면 윤리적 가치판단의 차원이 아니라 정치의 기술적 문제 차원을 다룬 것인데, 프리드리히의 반마키아벨리론은 군주는 자신이 아닌 신민들의 이익(공익)을 위해 봉사해야되는 존재로 군주의 개인적인 의사는 고려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 [3] 꽃과 음악을 사랑한 유약한 군주란 개드립이 있는데 프리드리히는 어린시절 누나에게 꽃같은건 싫다. 북치고 놀겠다고 해서 부왕을 흐뭇하게 한적도 있다.
  • [4] 아들뿐만 아니라 아내도 허구언날 두들겨 팼고, 가까이 있는 시종,시녀,신하들도 두들겨 팼고, 병사들도 직접 줄빠따를 치고, 시내를 돌아다니다 놀고 있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주민들을 보면 그들도 손수 두들겨 패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거리에 뜨면 그 모습을 본 주민들은 죄다 도망칠 정도였다. 후계자이던 장남,차남과 삼남 프리드리히 외의 자식들은 심하게 학대하지는 않았다고 하는데, 그 이유란게 학대할 정도의 관심조차 없었기 때문이라고. 이 무슨 싱하형 어찌나 심했는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죽었을때 그의 아내와 아이들이 가장 기뻐했다고 한다.
  • [5] 어머니 조피 도르테아가 영국 하노버 왕조의 시조 조지 1세의 딸이다.
  • [6] 이후 프리드리히가 즉위하자마자 첫 포고령은 고문의 폐지와 법관의 독립성이었다.
  • [7] 영국 왕실 하노버가문 방계이다. 훗날 프리드리히의 남동생과 여동생이 이 가문으로 시집 장가를 가서 겹겹사돈이기도 하다
  • [8] 정작 이 당시 장인은 오스트리아군 육군원수로 처남들도 역시 오스트리아에서 군인으로 복무중이었다.(유럽내 군주가문이라도 듣보잡 소국이면 큰 나라 궁정에서 복무하기도 한다.) 훗날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시 처남들이 부하장수로 큰 활약을 하는데 전쟁후 불화로 프로이센을 떠나기도 한다.
  • [9] 그렇다고 프리드리히가 동성애자라느니 고자라느니 썰은 별 근거는 없다. 왕비 말고 어떤 귀족 부인과는 젊은 시절 로맨스(?)가 있었다고 한다.
  • [10] 슐레지엔은 당시 오스트리아의 세금 수입 22% 가량을 차지하던 알짜배기 꿀땅이였다. 또 개신교가 강세이던 지역이라, 개신교 국가인 프로이센이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던 오스트리아를 몰아내고 깃발을 꽂자 호의를 보였다고.
  • [11] 다만 볼테르가 왕의 심기를 건드려서 3년만에 나올 수 밖에 없었다(볼테르가 작품을 읽어봐도 알수 있지만 비꼬기 좋아하고 입이 험하다). 하지만 평생 서신 교환은 계속되었다.
  • [12] 더욱이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 프랑스는 프로이센의 편을 들었었다.
  • [13] 이 자금, 물자지원 중단으로 가용 병력이 15만에서 6만으로 쪼그라들었다고 한다. 당시 프로이센군 병사중 7할이 외국인 용병이었기 때문이라고.
  • [14] 물론 표트르 3세는 러시아 입장에선 최강 병크를 터트린 암군 이 되었다. 결국 이 일 이외엔 한 것도 없이 반 년만에 아내에게 쫓겨난다. 로마노프 왕조 참조.
  • [15] 히틀러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죽은 후 위와 같은 전개를 기대했었다. 영화 몰락에서도 히틀러가 자기 집무실에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상화를 걸어넣고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이 나온다.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는데, 미국에서 소련을 경계하여 독일과 반공동맹을 위한 강화를 맺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었으며, 나치의 만행이 점차 드러나는 와중에 미국이 독일과 강화를 맺는 것은 도의상 불가능했다.
  • [16] 이 일화는 스쿨데이즈의 패러디 형식으로 굽시니스트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도 살짝 언급된다. 퐁파두르 부인키요우라 세츠나 로, 엘리자베타 여제사이온지 세카이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카츠라 코토노하로 묘사했고, 중간에 세카이가 죽어 나자빠진다...
  • [17] 폴란드는 이미 18세기 초반부터 이미 러시아에 위성국이 었기 때문에 예카테리나가 폴란드를 다 쳐묵하기 전에 오스트리아와 합세하여 뜯어낸것이다.
  • [18] 15세기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패하면서 폴란드내 다른 영토를 다 잃었고 동프로이센을 지켜내는대신 폴란드 왕에게 형식적인 종주권을 인정해야했다.
  • [19] in과 of의 차이는 꽤 크다. 동양으로 치면 in은 외왕내제와 비슷한 표현. 프로이센의 왕(King of Prussia)이 되기 전까지는 신성로마제국 내에선는 왕이 아닌 브란덴부르크 공작의 칭호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미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 7년전쟁을 겪으며 당시 외국에서 조차 프로이센 왕국 대왕드립을 들을정도 였다.
  • [20] 이미 선대부터 프로이센 귀족들은 루터파지만 왕실은 칼뱅파라서 왕국 개신교내에서도 관용과 유연성이 필요했다.
  • [21] 대중들에게 유명한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차남이다. 실내악 단원으로 있었다가 훗날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의 뒤를 이어 함부르크의 악장으로 간다. 그러나 후에 프리드리히가 전쟁시에 예산을 감축하고 자신이 궁정광대보다 급료가 낮추자 미련없이 떠난다.
  • [22] 출처-먹거리의 역사 하 마귈론 투생-사마 저
  • [23] 특히 인물 초상화가 그려진 화백자. 네덜란드 같은 나라에서 일부러 주문제작했고, 도자기 열풍이 불다 보니 도자기에 그려진 초상화에까지 관심들을 갖게 된 것.
  • [24] 당시 프로이센에서 감자를 키우기는 했지만 사람이 먹는게 아니고 돼지먹이로 쓰는 작물이었다.
Valid XHTML 1.0! Valid CSS! powered by MoniWiki
last modified 2015-04-10 12:45:10
Processing time 0.0938 s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