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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그만 침공

last modified: 2015-03-05 14:22:34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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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y of Pigs Invasion(La Batalla de Girón).

Contents

1. 개요
2. 기승전병
3. 망했어요
4. 후폭풍
5. 창작물에서

1. 개요

1961년 4월 15일. 피델 카스트로쿠바 공산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미국 지원 하에 반공 게릴라가 벌인 쿠바 상륙작전이자 미국의 흑역사.
쿠바 망명자들을 훈련시켜 쿠바에 상륙, 게릴라전으로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시킨다는, 그야말로 수년 전 쿠바 혁명군이 벌였던 쿠바 혁명의 재탕을 노린, 나름 야심찬 계획이었다.

2. 기승전병

원래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정권 말인 1960년 3월에 백악관CIA에 의해 브루투스라는 작전명 아래에서 계획되었다. 1,500여 명의 지원자를 모아 친미 군사정권[1]이 있던 과테말라의 비밀 캠프에서 군사 훈련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해 5월에 일어난 U-2기 격추 사건으로 인해 니키타 흐루쇼프에 의해 외교적 궁지에 몰리게 되자 아이젠하워는 실행 의욕을 잃고 말았다. 때문에 당시 부통령이던 리처드 닉슨이 대신하여 진행하였으나 레임덕 정권 말기라 그 이상의 물리적 행동은 어려웠다.

정권이 바뀌면서 훈련 중이던 1,500여 명의 게릴라는 그대로 실미도 꼴이 나는가 싶었으나, 이 작전에는 이미 CIA는 물론, 국무성과 펜타곤까지 개입된 상태였다. 모아놓은 전력이 아까웠던 것이다. 결국 "좋아, 가는 거야!" 하면서 작전은 재추진되게 된다.

신임 대통령인 존 F. 케네디는 외교적으로 리스크가 큰 이 계획을 처음에는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험 많고 노회한 전임자 아이젠하워에 비해 믿음직스럽지 못한 애송이라는 이미지를 떨쳐버리기 위해서는 뭔가 확실한 정치적 업적을 필요로 했다. 결국 그는 쿠바에 침공군이 상륙하면 쿠바 국내의 호응이 있을 것이란 CIA의 호언장담설레발만 믿고 작전을 승인했다. 불과 대통령이 된 지 4개월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작전은 처음부터 한계가 있었다.

침공계획은 처음에는 소규모 게릴라를 야음을 틈타 쥐도 새도 모르게 잠입시킨다는 계획이었으나 이놈 저놈 참견하다 보니 사전폭격까지 포함한 대규모 상륙작전으로 불어났다. 펜타곤은 미 정규군까지 동원하려 했으나(그것도 육, 해, 공군이 죄다 개입했다!) 깜짝 놀란 케네디가 이것만은 막았다.

게다가 계획 진행도 상당히 허술했다. 작전 수개월 전에 뉴욕 타임즈가 쿠바에 대한 군사행동이 있을 것이라는 특종을 내었고, CIA 국장이 "수개월 내에 쿠바의 공산정권은 무너진다."는 말을 공공연히 입에 올릴 정도였다. 이외에도 소규모 게릴라를 끊임없이 쿠바에 침투시켜 사보타지 공작을 벌였다. 아무리 쿠바 혁명정권이 허접하다 하더라도 이 정도 전조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쿠바는 전 병력을 동원해 해안선을 철통같이 감시했다.

베트남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제약도 심했다. 주권국가인 쿠바를 미국이 공격한다는 것은 모양새가 영 좋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가 미국이 뒤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반공 게릴라들은 쿠바 망명자들이 주도하고 익명의 후원자들이 도와주는 듯한 형태를 취했다. 때문에 무기도 쿠바군 흉내를 냈고 부대 역시 쿠바 망명자가 주도[2]하는 형태를 띄게 된다. 덕분에 장비의 제한도 많았고 작전도 어려웠다.

지리적인 제약도 있었다. 피그만은 쿠바의 수도 아바나와는 직선거리 100km 정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가까워서 상륙에는 최적지였으나 그 만큼 경계도 삼엄했다. 또한 상륙지와 재집결 지역 사이에는 광할한 늪지대가 있어 사실상 병력 재집결이 불가능했다. 초기의 소규모 병력이라면 별 문제가 아니었으나 연대 병력에 육박하는 상륙부대에겐 큰 문제였다. 하지만 작전 추진자들은 이를 간과하고 작전을 진행, 결국 상륙부대는 늪지에 갇혀 꼼짝도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작전은 15일 새벽, 은폐를 위해 국적마크를 지운 A-26 공격기[3]들이 쿠바 공군기지들을 공습하면서 시작되었다. 한줌밖에 안되는 쿠바 공군은 이로서 작살났다. 하지만 계획했던 2차 폭격은 이뤄지지 않았는데, 이유는 이미 한번 폭격한 공격기가 바로 보급하고 다시 폭격하면 뒤에 든든한 후원자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된다는 뭣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뒤에 미국이 있는 것은 전세계가 다 알았지만 일단 눈 가리고 아웅한 것이었는데 그 결과는 심각했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이에 전면전을 선포하고서 전군은 물론이고 민간인에게까지 총동원령을 내리는 한편,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 반정부인사로 지목된 10만여 명을 체포하여 구금한다. 미국의 계획대로라면 피그만 침공과 더불어 반정부 인사들의 폭동이 벌어져야 했지만 카스트로의 신속한 행동으로 이는 사전에 차단당했다.

3. 망했어요

17일 동이 트기 전의 새벽, 상륙부대는 피그만에 상륙을 시작했다. 쿠바군은 상륙부대의 10배가 넘는 병력을 동원해 해안을 봉쇄했고 최정예 공수부대전차를 선봉에 세워 반격, 곧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다. 1년 이상 훈련을 반복해 온 정예 상륙부대에게 쿠바군은 예상치 못한 피해를 입었으나[4] 병력의 차는 숨길 수 없었고 미 공군과 해군은 상황 판단을 잘못하는 바람에 명령전달이 늦어지며 오지 않았다.[5]

쿠바 공군은 결국 2차 공습을 면해서 살아남았거나, 망가진 기체들을 긁어모아 수리하여 출격, 중화기를 실은 수송선을 폭격하여 격침시켰고 이로서 전세는 완전히 쿠바쪽으로 기울었다.

결국 피그만에 상륙했던 반군은 100여 명이 사망하고 나머지는 모두 포로로 잡혔다. 카스트로 정부는 곧장 재판을 통해 주동자급 게릴라들을 처형하였고, 미국은 5천3백만 달러 상당의 의료품을 쿠바에 지불하고 나서야 나머지 1,113명의 포로를 석방시킬 수 있었다. 더불어 체포되었던 반정부인사들은 이 침공을 명분삼아 숙청당했다….

4. 후폭풍

침공 이후 네 달이 지난 1961년 8월 우루과이 푼타 데 에스테에서 열린 미주기구(OAS) 경제회의에 참석한 체 게바라는, 회담장에서 만난 케네디 보좌관 리처드 굿윈에게 쪽지 한 장을 건넸다. 케네디에게 전해주라는 그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침공을 당하기 이전에 쿠바 혁명은 약했으나, 지금은 이전보다 더 강해졌다. 고맙다." 그리고 이 사건이 끝나고 나서 카스트로는 라디오 대국민 연설에서 분노+희열에 가득 차서 몇시간이고 연설을 했다. 주 내용은 당연하지만 다시는 쿠바를 얕보지 마라.

케네디는 이 사건으로 집권 초기에 예기치 못한 정치적 타격을 입게 된다. 그리고 설레발을 친 CIA에 격분해 이를 해체시키려고 했으나 암살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때문에 케네디 암살이 CIA에 의한 것이라는 음모론도 있다.

피델 카스트로는 정권에 위협을 느껴 소련SOS를 치는데, 이렇게 해서 일어나는 사건은 쿠바 한 나라의 문제를 벗어나게 되고 만다.

5. 창작물에서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에서도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한 미션이 등장한다(첫 미션인 <Operation 40>). 여기서는 작전이 꽤나 잘 풀려서(?) 카스트로가 있는 내륙의 기지까지 침입해 카스트로까지 암살하는 데 성공한다! 물론 그 카스트로는 이미 침공 계획을 알고 있던 카스트로가 배치한 대역에 불과했고, 암살 후 쿠바군의 폭격으로 인해 부대가 거의 다 작살난다. 게다가 앞서 CIA가 케네디를 암살했다는 음모론까지 겹쳐 생각하면 정말 어마어마한 떡밥인 셈.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심리학 집단사고 중 가장 많이 예시가 되는 사건이기도 하다. 단적으로 미국의 심리학자 어빙 재니스는 피그만 침공 과정의 정책결정의 병크를 두고 집단사고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핵심은 무조건 성공할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이 집단 전체를 사로잡아서 그에 대한 비판 및 비판자를 용납하지 못하고 결국 예정된 실패로 진행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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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 또한 CIA가 꾸민 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이었다.
  • [2] 다만 비행 등의 전문 기술이나 전투능력 등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 미국인 교관들이 함께 참전했고, 이 사람들이 쿠바에 잡혀서 결국 미국은 굴욕적인 입장에 처하게 된다.
  • [3] 이 기체는 당시 쿠바군의 주력기이기도 했다.
  • [4] 공식적인 발표로는 전사자 170여 명이지만 사상자를 포함한 수는 발표되지 않았다.
  • [5] 정확하게 말하면 앞서 언급한 이유로 못 온 것도 있다. 정치적 이유로 후속 지원이 계획상에서 틀어졌고, 상황 판단 미비로 계획의 융통성 있는 변경이 이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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