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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휘

last modified: 2015-04-08 12:19:22 by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연원
3. 유형
4. 사례
4.1. 중국의 사례
4.2. 한국의 경우
4.3. 일본
4.4. 베트남
4.5. 문자의 옥
4.6. 기록 말살 차원의 피휘
5. 기타
5.1. 연예계
5.2. 북한의 사례
6. 대중 문화에서의 영향
7. 바깥고리

1. 개요

본격 동아시아판 리포그램
避諱. 기휘(忌諱)라고도 한다. 고대 중국에서 시작한 조상[1], 성현(聖賢), 군주[2]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한자문화권의 옛 관습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드물게 부르는 게 혐오스러워서 회피하는 경우도 피휘로 본다.[3]이름을 불러서는 안 되는 그 사람 휘(諱)는 본래 '꺼릴 휘'인데, 옛 관습에서 함부로 부르는 것이 꺼려지는 군주 등의 이름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피휘를 직역하면 이 '휘를 피한다'는 것이다. 이 관습 때문에 일반적으로 군주나 자신의 조상의 이름[4]에 쓰인 글자를 사용하지 않는다. 초기에는 글자만을 피하고 음은 같거나 비슷한 한자를 골랐으나, 후대에 가면서 음이 같은 한자도 기휘에 걸려 사용하지 않았다.

이 관습은 중국 주위의 유교(한자) 문화권에 전파되었고[5] 오랫동안 기본 상식 수준으로 자리잡았다. 그래서 현대 사회에도 한국중국에서는 보통 자식과 부모나 조상과 후손은 이름에 같은 한자를 넣지 않는다.[6] 심하면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이름을 피휘하기도 하며, 심지어 조선시대에는 처가 어르신들 중에 자기 이름에 들어간 한자를 쓰는 분이 있을 경우 사위가 장가를 들자마자 개명을 하는 사례도 있었다. 물론 요즘에는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유교문화권 외에는 이런 관행이 자주 있지 않다.[7] 유교문화권이라 할지라도 일본의 경우에는 통자(通字)라고 해서, 특정한 글자를 한 집안의 이름자에 대대로 넣는 관습이 있다. 예를 들어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름에서 '이에(家)' 자를 대대로 이름자에 사용하곤 했다. 아예 피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정착되지는 못 했다. 피휘를 트집잡기의 일환으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오사카 전투의 계기도 도요토미 히데요리 측에서 만든 호코지 범종의 명문에서 이에야스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했다고 하야시 라잔 등 유학자들이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의 국서가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휘인 미츠(光)를 사용했다고 하여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된 적도 있으나 이는 조선 측에서 먼저 일본의 국서에 중종의 휘인 역(懌)이 들어가있다고 항의하여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일종의 크로스 카운터에 가깝다.

특히 서양에서는 오히려 부모의 이름을 자식이 물려받는 것을 선호한다. 그래서 군주의 이름을 백성이 그대로 쓰거나 군주의 이름 중에 '아무개 몇세' 등이 잘 보인다.[8] 스페인에는 Jesus라는 이름도 흔하며,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이슬람교-유대교의 유명인 이름에서 따온 유수프, 이사, 무함마드 같은 이름도 흔하게 쓴다.[9] 심지어 자신들을 학살했던 정복자의 이름도 인명으로 쓴다. 아틸라나 혹은 티무르 라던지.. 이 점에서 김일성 - 김정일 - 김정은은(...)

2. 연원

이런 관습이 생겨난 것은 사람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이 예에 어긋난다고 여겼던 한자문화권의 인식 때문으로 자나 호와 같이 별명을 붙여 부르던 풍습(실명경피속)이나 부모나 조상의 이름을 언급할 때 "홍길동"이라 하지 않고 "홍 길자 동자"라고 조심하여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풍습은 가톨릭이 한국에 전래되던 초기에 세례명처럼 여겨 가톨릭의 전래를 돕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멀리 갈 것 없이 독립운동가 안중근을 주로 도마 안중근이라 부르는데 도마는 세례명 토마스의 음차어다.

3. 유형

피휘하는 방식도 사실 여러가지로 나뉜다. 참고로 어느한자든 음을 그대로 읽지는 않았다. 대개 피휘한 글자의 경우 다음은 그 방식들.

결자(缺字): 피휘할 자리를 아예 공백으로 남겨버린다. 대표적으로 이것이 정착된 예가 관(세)음보살로 당태종 이세민의 세(世)를 뺀 것이 관습적으로 남은 것이다. 또 <수서>의 경우 왕세충(王世忠)의 이름을 王□忠이라고 쓰고 왕충으로 읽었다. 21세기에는 유니코드 지원 안하는 폰트는 □로 표시했다(...)

결획(缺劃): 피휘할 한자의 획을 뺀다. 주로 마지막을 빼며, 마지막 획을 빼면 다른 글자와 헷갈릴 경우 가장 헷갈리지 않는 획을 뺀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에 旦(아침 단)의 경우 마지막 획을 빼면 日과 헷갈리므로 口+一, 즉 '므'의 형태로 적었다.[10] 태조 이성계가 개명한 이단이라는 이름의 피휘 때문이다.[11]

대자(代字): 해당 글자와 뜻은 같은 별도의 한자를 쓴다. 연(淵)개소문을 천(泉)개소문으로 쓰거나[12] 당나라 시대에 출간된 사기에서 세가(世家)를 계가(係家)로 쓴 예 등이 있다.

마지막으로 성인의 말씀, 선대왕이 쓴 글, 옥편 등 피휘를 하지 못할 경우에는 피휘는 하지 못하더라도 음만이라도 피휘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旦의 경우 피휘하지 못할 경우 조선시대 내내 같은 뜻의 朝의 발음인 로 발음하였다. 또 공자의 이름인 丘를 부득이 유교 경전 등에서 읽게 될 경우[13] 실제로 발음하지 않고 모(某)라고 발음하기도 했다. 물론 당시 공자는 某가 아니라 丘의 발음을 그대로 했을 것이지만 후세 사람들은 감히 읽지 못하고 회피한 것이다. 또 공자 외에도 주요한 성현들이라든지 기타 읽기가 곤란한 제왕이나 부모의 이름 등도 모(某)라고 읽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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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례

4.1. 중국의 사례

대표적인 경우로 연개소문관음보살이 있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연(淵)이 당나라고조 이연(李淵)의 이름과 같기에 당나라 측 사료에는 피휘대자(避諱代字)를 따라 비슷한 뜻의 한자로 바꾸어 천개소문(泉蓋蘇文)으로 기록했다. 그리고 1923년 천남생묘지명이 낙양 북망산에서 발견되기 전까지는 연개소문이라는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오로지 천개소문이라고만 불렀다. 따라서 삼국사기에서도 천개소문전[14]이라 하며 독립운동가 박은식도 천개소문이라 불렀다.

관음보살이라는 표기 역시 원래 관세음보살인 것을 당태종 이세민(李世民)과 겹친다는 이유로 세를 떼버린 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15] 이세민의 경우엔 당나라 시기 대부분을 풍미한 대표적인 민폐 피휘 사례다. 사기의 분류중 하나의 세가(世家)(제후국의 기록)의 경우 당나라시대 판본에 한해서 계가(係家)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세는 대부분 계나 대代로 교정되어 피휘가 사라진 뒤 세대라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

송나라 때 중국에서는 도교의 신 중 하나인 현천상제(玄天上帝)[16]의 玄자가 송나라 황실의 시조 조현랑의 이름 자 중 하나라고 현천상제를 진무대제(眞武大帝)로 개명하고 현무 또한 진무(眞武)라고 불렀다. 웃긴 게, 남의 이름(?)을 멋대로 바꾸어놓았으면서 송나라는 북방 민족들의 위협에 시달린다고 북방의 안정화와 국태민안을 위해 현천상제를 관방도교의 제사대상 중 하나로 놓았다. 참고로 송나라는 중국 역사상 북방 민족들에게 가장 시달린 나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연의 아버지이자 이세민의 할아버지 이병(李昞)[17] 때문에 십간(十干)의 하나인 (丙)을 경(景)으로 바꾸어야 했다. 거기에 이세민의 증조할아버지이자 이병의 아버지 이호(李虎)[18] 때문에 호(虎)를 무(武)로 바꿔야 했는데, 예를 들면 관문의 하나인 로관 메뚜기 여포로 유명한 호뢰관은 무뢰관으로 변경되었다.[19] 왜냐면 국가적 차원의 피휘는 추존 황제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당나라에서 자주 쓰던 한자를 피휘하느라 애먹인 또 다른 케이스로는 당고종 이치(李治)가 있다. 이 때부터 다스릴 치(治)는 다스릴 리(理)로 변경해야 했다.[20] 다른 왕조로 예를 하나 더 들자면 후한 시기에 지역의 명사를 추천하여 관직을 수여하는 제도의 본래 명칭은 수재(秀才)였으나, 공교롭게도 후한의 건국자인 광무제의 이름이 유수(劉秀)였으므로 명칭을 무재(茂才)로 바꾸어 쓰기도 했다.

관직명도 피휘에 걸린 사례가 있다. 주나라의 제후국 나라는 본래 주나라의 관제를 본받아 사공(司空)이란 관직을 두고 있었는데, 송무공의 이름이 사공이라 이 관직을 사성으로 바꾸었다. 또 이세민의 경우 6의 민부(民部)를 호부(戶部)로 고쳐버렸고, 이후로 6조에도 이것이 적용되어 호조라는 단어가 나오게 되었다.

관직명과 조상의 이름이 겹친 사례도 있는데, 당나라 대시인 이하는 아버지의 이름인 이진숙과 진사시의 진자가 한자는 다르지만 발음이 같다고 해서 진사시 응시도 못하고 탈락했다.

도시명이 피휘에 걸린 사례가 있는데, 과거 손오의 수도이기도 했던 건업(建業)은 서진의 마지막 황제 사마업(司馬業)과 이름이 겹친다는 이유로 건강(建康)으로 피휘하게 되었다.

공자의 이름인 구(丘)는 공자가 성인으로 대우 받으면서 점차 피휘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그래서 생겨난 문자가 丘의 대용자로 邱 또는 坵가 생겨나서 쓰이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피휘를 하긴 했다는 시늉을 내는 정도라고 볼 수 있다. 당나라 이연의 아버지 이병(李昞) 때문에 昞 뿐만 아니라 丙까지 피휘해서 경(景)으로 쓰게 했던 원칙을 적용한다면 丘를 邱 또는 坵로 쓰는 것도 불경이고 똑같이 '구'라고 발음하는 것도 불경이었을텐데 거기까지 엄격하게 하진 못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실제로 丘는 황제의 이름만큼은 엄격히 피휘되지는 못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邱나 坵로 써도 발음은 여전히 '구'이고 글자 안에 丘도 구성요소로 들어가 있으니... 뿐만 아니라 성씨 등에서 丘를 그냥 쓰는 경우도 있었다.[21] 대에는 옹정제가 1725년에 칙명을 내려서 丘자는 유가 경전에 있는 것만 남기고 피휘하도록 했다. 그래서 丘씨는 강제로 邱씨로 변경됐고, 지명에 있던 丘는 다른 글자로 바꾸도록 했다. 그리고 邱를 그대로 읽을 경우 공자의 이름 丘를 그대로 발음하게 되는 문제가 생기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해 원래 발음대로 읽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丘/邱의 관화 발음인 치우(qiū)[22]를 그대로 읽지 못하고 대신 운미(韻尾) 부분을 생략한 치(qī: 현대 관화에서는 七과 발음이 같음. 당시에도 그랬는지는 확인바람)로 읽게 바꿨다 아니 그럼 다른 방언 쓰는 사람은 어쩌라고.[23][24]

군주의 이름을 온 나라에서 피휘하는 풍습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군주가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칠 수 있었다. 그래서 왕조에서는 백성들을 위해 군주가 이름을 갈아버리거나, 왕자들의 이름을 지을 때는 외자로, 또한 되도록 흔히 쓰이지 않는 한자로 지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삼국시대손휴 같은 경우 아들들이 혹시라도 즉위할 가능성에 대비해서 그들의 이름을 모두 새로운 한자를 만들어서 썼다. 그런데 모두 제위에 오르지 못했으니 결과적으로 설레발이 되었다. 비슷하게 한국에서도 조선은 피휘의 불편함을 덜기 위해 왕이 될 가능성이 있는 왕족들의 이름은 자주 쓰이지 않는 글자로 외자 이름을 지었고, 만약 그렇게 이름을 짓지 않은 사람이 왕이 될 경우 이름을 고쳤다. 상세한 내용은 본 항목의 '한국의 경우' 단락을 참고.

4.2. 한국의 경우

한국은 국가적 차원에서 군주의 이름을 피휘하는 관례는 고려 때부터 시행되었다. 하지만 신라의 경우 자국 왕에 대해서는 피휘하지 않았더라도 당나라에서 시행하는 피휘는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간지의 하나인 병(丙)은 문무왕릉비에 경(景)으로 적혀 있다.[25]

국왕 이름을 국가적으로 피휘하는 관례를 처음으로 도입한 고려시대엔 자비심이 없었는지 '륭(隆: 고려 세조 왕륭),[26] '건(建: 고려 태조 왕건)', '무(武: 고려 혜종 왕무)', 요(堯: 고려 정종 왕요), 치(治: 고려 성종 왕치) 등 자주 쓰이는 한자가 고려조 멸망까지 봉인당했다. 따라서 륭(隆)은 풍(豊), 건(健)은 립(立), 무(武)는 호(虎), 요(堯)는 고(高), 치(治)는 理(리), 창(昌)은 녕(寧)으로[27] 바꿔써야 했다. 그래서 고려시대의 문헌에는 '무반(武班)'이 '호반(虎班)'으로 표기되었고 '무장(武將)'이 '호장(虎將)'으로 표기되는 등 '무(武)'자는 모두 호랑이 호(虎)자로 표기되어 있다.[28] 사신수 중에 호랑이만 2마리가 됐다 호신정권

태조, 성종의 경우는 같은 뜻을 가진 다른 한자로 대체하고 혜종의 경우는 용맹한 동물이라는 의미에서 연계하여 '호'자를 '무'자의 대체자로 사용했던 것이다. 압권인게 고려 3대 임금인 정종의 휘 요는 '요임금 요(堯)'였기 때문에 삼국유사에 기술된 단군신화 기사에서는 '요임금과 같은 때'라는 의미의 '여요동시(如堯同時)'가 '여고동시(如高同時)'로 표기되어 있다[29]. 또한 신라 30대 왕 문무왕은 혜종의 '무'를 피휘해 '문호왕(文虎王)'이라고 표기되었으며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성종의 휘 '치'를 피해 '자리통감(資理通鑑)'으로 표기되었다.[30] 그리고 수창궁(壽昌宮)은 창왕의 휘 '창'을 피해 수녕궁(壽寧宮)으로 바꿔 부르기도 했다.[31]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어서 굉장히 자주 쓰이는 성(成)자와 계(桂)가 조선 망할 때까지 봉인될 뻔 했지만 본인이 말년에 이름을 단(旦)으로 개명했고 아들 정종도 이름이 방과(芳果)라서 성(成)자 못지 않게 쓰이는 한자라서 경(曔)으로 개명했다.[32] 또 세종대왕의 함자인 도(祹) 자의 경우, 검색해봐도 세종대왕 본인의 이름 밖에 안 나온다. 누군가는 이 글자가 출생신고를 안 받아진다면서 우리나라 법을 까고 있는갑다 대왕님 함자니까 당연히 안되지[33]

그런데 문종의 휘는 '옥이름 향(珦)'이라서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았지만 문제는 고려 말의 유학자 안향과 같았다는 것. 이 때문에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왕이 우선하느냐 유가의 성현을 우선하느냐를 두고 골머리를 앓았고, 결국 왕이 우선한다는 결론이 나자 그후 문헌에서는 안향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안유(安裕)라는 초명이나 안향(安向)이라는 표기로 쓰거나, 그것도 곤란할 경우 호인 '회헌'을 주로 사용했다. 그 외에는 단종의 휘 홍위(弘暐)가 되는데 홍 자가 자주 쓰이는 편인 글자. 하지만 단종의 경우 재위기간이 고작 3년 1개월여인데다 복위되기까지 250년 가량을 노산군으로 왕 취급 못 받았으니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듯 하다.

예외적으로 태종의 경우는 지명에 많이 쓰이는 꽃다울 '방(芳)'과 생활 필수 한자 중 하나인 멀 '원(遠)'인데 죽을때까지 이름이 이방원이었다. 개명? 그런거 없다. 이것이 조선의 철혈군주의 위엄!! 만약 기행문 같은 것 잘못썼다가는 으앙 주금 그래도 실록에 멀 '원'이나 '방'이 그럭저럭 쓰이는걸 보아 많이 통제는 하지 않았나 보다. 하지만 애초에 피휘에 대한 규정이 나와있는 단궁 하(檀弓 下)편에는 공자의 어머니인 징재의 예를 들면서, 이름이 두 글자인 경우에는 그 중 한 글자만 쓰는 것은 휘하지 않는다고 했다. [34]

애초에 조선에서는 왕족의 이름을 지을 때 일부러 백성들의 언어 체계를 흐트리지 않기 위해 잘 안쓰는 글자, 혹은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서 지었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자동적으로 피휘가 되었고 쿠데타를 통해 왕이 되거나 직계가 끊겨서 방계로 왕위를 얻은 왕들도 가장 먼저 한 일은 역시 이름을 바꾸는 것이었다.[35] 하지만 이렇게 조심한다고 하더라도 사람 일이라는게 어디 그리 딱딱 맞아 떨어지는것만은 아니어서, 과거시험 등에서 혹시라도 왕의 이름을 사용해버린다면 당장에 낙방이고 곤장까지 덤으로 안겨주었다.[36] 아예 발음을 바꾼 정조의 이름을 보면 아주 대표적이다. 원래 정조의 이름은 '이산(李祘)'으로, 이 때문에 평안북도의 이산(理山)이란 고을 이름이 초산(楚山)으로 개명당했다. 그러다가 결국엔 '祘'의 발음 자체를 '셩'(현대 한국어 한자음대로 규칙적으로 옮기면 '성')으로 바꾸게 된다. 이후 순조대에 선대의 휘를 범할 수 없다고 하여 함경남도의 이성(利城)이란 고을 이름도 이원(利原)으로 바뀌게 된다.

대구광역시의 한자 표기가 大丘에서 大邱로 고쳐진 이유이기도 하다. 성인인 공자의 본명인 '공구(孔丘)의 이름을 피휘했기 때문이다.[37][38]

대구의 이웃 경산(慶山)도 같은 일을 당했다. 고려시대의 경산(慶山)은 1310년 이전까지는 장산(章山)이었는데 충선왕이 즉위하자 충선왕의 휘 장(璋)과 비슷한 글자를 피하기 위해 장산을 경산으로 고쳤다.[39] 대구의 피휘가 조선 정조 이후부터라 하니 시기를 보자면 경산이 대구보다 앞서는 지명의 피휘 사례라 하겠다.

4.3. 일본

일본에는 조상의 특정 글자를 자손의 이름에 사용하는 통자(通字)라는 관례가 있어서 중국이나 한국 같은 피휘는 도입되지 못했다. 하지만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덴노나 권신의 이름에서 통자가 아닌 글자를 바꾸게 한다든지 하는 예가 일부 있어서 지명이 변경되거나 성씨가 바뀌는 예가 있기는 했다고 한다. 추가바람

다만 유식자 읽기(有職読み)라고 해서, 훈독으로 읽어야 할 인물의 이름을 음독함으로써 경의를 나타내는 습관이 있었는데 (가령 徳川慶喜: 도쿠가와 요시노부 -> 도쿠가와 케이키) 피휘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그러나 太郞처럼 원래부터 음독하는 이름은 할 수 없고, 사이고 다카모리의 隆盛를 류-세이로 읽지 않는 것처럼 유명인이라도 유식자 읽기를 안하는 경우도 많아서, 늘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4.4. 베트남


응우옌 왕조 때의 피휘 사례

베트남 역시 베트남 황제의 이름에 대해 피휘를 했다. 위 그림에서 綿→(白의 가운데 가로선을 삭제한 綿), 宗→(示 맨 위의 가로선을 삭제한 宗)은 획 하나를 삭제한 예이고(결획), 任→壬은 부수를 제외한 나머지를 쓴 예(결획의 일종), 時→辰은 비슷한 뜻을 가진 글자로 대자(代字)한 예[40], 明→朙(冏+月)은 옛글자로 고친 것[41], 昭→(昭에서 日이 들어갈 부분만 삭제한 글자)[42]는 부수 부분을 공백으로 비워놓은 예(결획의 일종)이다.

베트남에서는 또한 피휘를 위해 해당 글자의 발음을 비슷한 다른 것으로 바꾸어 읽도록 조처하기도 했는데, 아예 그게 굳어져서 현재까지 쓰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利는 lợi라고 읽는데 본래 발음대로 읽으면 lì라고 읽어야 한다. 이것은 후 레 왕조(後黎) 태조 黎利의 이름을 그대로 부르지 않기 위해 利의 발음을 바꿔 lợi로 읽게 한 것이다. 그러다가 이제는 利의 발음이 완전히 바뀐 채로 정착돼서 오늘날 黎利의 이름을 부를 때도 바뀐 발음으로 읽는다. 즉 본래 발음에 가까운 '레리'가 아니라 '레로이'로 읽는다는 뜻.

4.5. 문자의 옥

피휘를 정치적으로 이용, 불용문자를 사용한 정적을 제거하는 사례도 빈번하게 있었다. 이런 경우를 필화, 혹은 문자의 옥이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사례가 명나라 태조 주원장청나라옹정제가 일으킨 피바람. 정말 글자 하나 잘못 써서 목이 날아간 예라고 보면 된다.(…)

주원장의 경우는 억지가 좀 심했다. 그가 젊을 때 잠시 이 된 일이 있었는데 주원장은 이것을 수치로 여겨 그 앞에서 일절 옛날 일을 꺼내지 못하게 하고, 승려 생활 때 머리를 깎은 것 때문에 '빛날 광(光)', '대머리 독(禿)'자를 쓰거나 '승려 승(僧)'자와, 그것과 발음이 같은 '생(生)'자를 쓰는 행위, 반란군 출신이란 의미의 '적(賊)'과 발음이 비슷한 '칙(則)'자를 쓰는 행위를 무조건 처벌했다.[43][44] 똑같은 짓을 아Q가 하면 찌질이라고 부르는데 말이지 대머리 애송이

옹정제의 아버지 강희제는 이름에 현(玄)이 들어가서 오랫동안 궁성의 북문의 이름으로 쓴 현무문(玄武門)이 신무문(神武門)이 되었다.

4.6. 기록 말살 차원의 피휘

군주의 휘를 피한다는 의미와는 전혀 다르게 매국노범죄자 등 악인의 이름을 기피하느라 피휘 아닌 피휘가 된 경우도 없지 않다. 가장 대표적인 이름은 역시 한국인이라면 치를 떨 완용. 그런데 진짜로 자식에게 이런 이름을 지어준 부모가 있다. 그것도 "이"씨가.'이완용'이란 이름 때문에 곤욕을 겪은 동명이인들 마지막 할아버지의 긍정적인 인터뷰가 포인트다.부모님 멱살 잡아야 할 기세 중국에서는 인명으로 '회(檜)'자를 쓰는 것을 기피하는데, 희대의 간신 진회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서양으로 가면 희대의 악질 전범의 성인 히틀러가 있다. 실제로 미국에서 자식 이름을 이 따위로 지었다가 자식들의 양육권을 박탈당한 사례가 있다.싸다 싸[45]

안록산의 난을 일으킨 안록산의 경우도 당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안安이라는 글자는 다 대체되었다고 한다.

특이한 경우는 연산군 대의 내시김처선이 있다. 김처선은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까지 6대를 섬기며 오랫동안 담당했다. 원래 연산군의 신임이 매우 두터웠으나 두 팔, 다리가 잘리는 상황에서도 충언을 계속하여 결국 연산군이 로 쏘아 죽인 대단한 의지의 인물이었다. 연산군은 자신이 총애하던 김처선의 배신(?)에 화가 머리 끝까지나 삼족을 멸하고[46] 그의 고향의 등급을 깎아내리며 특히 처(處)'가 들어가는 말은 사용을 금지'''하기까지 한다.. 이쯤 되면 기록말살형과 다를바 없다.

문제는 저 글자는 무척이나 흔하게 쓰이는 자였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연산군도 잘 췄다는 용무. '춤추다 집에 왔더니 다리가 네 개더라' 하는 그 처용가의 처용이 맞는데, 처용무는 이 때 풍두무라는 이름으로 바꿨다. 이 글자를 과거 시험에서 썼다가 낙방을 먹은 건 대단한 것도 아니고, 상소문에 이 글자를 썼다가 죽을 뻔 했지만 명령이 하달되기 전에 작성한 사실이 확인되어 무죄 방면으로 간신히 살아난 사례가 있을 정도. 연산군의 이 금제는 거의 황제에 가까운 절대군주의 포스를 보이나 결국엔 미친 짓이었기에 당연히 그가 폐위된 후 폐지됐다.

5. 기타

서지학적으로 피휘는 큰 의미가 있는데, 한자 문화권 내 고문헌의 출간 연대가 불분명한 경우 이전 시대 판본과 비교했을 때 다른 글자로 대체되었거나 아니면 완전히 칸을 비워둔 글자를 분석하여 출간 연대를 알아내는 근거로 쓰기도 한다. 때문에 저작연대를 올리려고 하는 위서(僞書)를 적발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예를 들어 괴철(蒯徹)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에서 '괴통(蒯通)'이라고 나오는데, 이는 한무제의 이름이 유철(劉徹)이기 때문에 '철'자를 피휘해 괴철의 이름을 바꾼 것이다. 이 덕분에 사기가 실제로 한무제 때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조운의 고향으로 유명한 기주 항산(恒山), 주왕의 서형 미자계(微子啓), 24절기 중 하나인 계칩(啓蟄), 우왕의 아들 계왕(啓王), 춘추시대 말기 의 권신 전항(田恒) 등은 각각 상산(常山)[47], 미자개(微子開), 경칩(驚蟄), 개왕(開王), 전상(田常) 등으로 바꿨는데 모두 한문제의 이름 유항(劉恒), 한경제의 이름 유계(劉啓)를 피휘한 것이다. 그 외에도 사기에는 담(談)을 동(同), 희(喜)[48]를 희(釐)로 바꿔 썼는데 이것은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과 사마천의 할아버지 사마희(司馬喜)의 이름을 피휘한 것이다.

원래 중국에서는 나라 방(邦)을 많이 썼으나, 한고조를 피휘하기 위해서 나라 국(國)를 쓰게 되었고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중국의 최고위 관직이었던 상국(相國)은 원래 상방(相邦)이었는데 바로 이런 이유로 바꾸게 된 것이다.

이것은 단지 왕족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일반 사대부 집안에서도 유행했기 때문에 한자를 새로 만들어서 이름을 지은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는 한자라는 문자 체계가 '열린 집합'이라는 특성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실제로 한자의 글자 수는 수만 자에 달하고 이 중에선 유니코드에 아직 수록되지 못한 글자도 당연히 많다. 그래서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후 가장 먼저 한 조치 중 하나가 한자 새로 만들어서 이름 짓기를 금지한 것이었다.

관우가 황제(관성대제)를 넘어서 신으로 추대된 이후에 중국 후대 왕조의 황제들은 관우와 이름을 겹치지 않게 하기 위해 자기들 스스로 피휘를 했다고 한다(…) 중국인들이 관우를 차라리 운장이라고 부르거나 굳이 굳이 관공이라고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한국 역시 인명용 한자로 등록된 한자만이 호적에 올리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게 시행되기 시작한 것은 1991년으로, 피휘 철폐 목적으로 나온 정책이라기 보다는 행정망 전산화와 맞물려 완성형 코드에 들어있는 한자만 쓰게 만든 것이다. 이 때문에 처음 시행 때는 2700자로 정말 적었고, 그 이후 조금씩 늘어나 2013년 현재 5000여자까지 늘어났다. 지금은 유니코드의 도입으로 이런 문제가 크게 완화되었고, 10만자를 수용할 수 있는 인명용 한자 DB를 구축해서 사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더불어 인명용 한자 사용을 강제하는 조항도 없앨 예정이라고 한다. # 읽을줄도 모르고 쓸줄도 모르는 한자는 글자가 아니라 그림이겠지만(...)

5.1. 연예계

엄밀히 말하면 피휘는 아니지만 연예계에서도 종종 피휘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동명이인의 경우 나중에 데뷔한 연예인이 예명을 만드는 경우다. 탤런트 김수로가 대표적인데 본명은 김상중이다. 남자 탤런트 강하늘과 가수 로티플스카이의 본명은 둘다 김하늘이다. 또한 신민아의 경우 본명은 양민아인데 선배 연기자 미라와 비슷하게 들릴까봐 예명을 저리 지었다고...

5.2. 북한의 사례

전제군주제인 북한에서도 당연히 주민들이 "일성"과 "정일"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없다. 1970년대부터 그런 이름을 쓰는 사람들은 강제로 개명하도록 했고 새로 태어나는 아기에게도 지어줄 수 없다. 게다가 북조선의 3대 세습 바람은 이 풍습에도 예외가 아니라 2010년 초에는 전국적으로 성이 김씨인지 여부를 불문하고 "정은"이라는 이름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개명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다고 한다. 즉, 한자가 다른 동명이인이라도 얄짤없다. # 역시 절대왕정 전제국가 북조선! 부카니스탄의 완성! 이것도 기가 막힌 일인데, 아예 정은과 발음이 비슷한 "정훈" "정운" 같은 유사한 이름에 대해서도 개명을 요구한다고 한다.# 해당 기사에 따르면 "설주"라는 이름도 사용 불가능.

더 흥미로운 사실은 북조선 주민들은 자식이 김일성과 김정일 생일과 사망일 때 태어나거나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면 이를 피하기 위해 출생신고를 할 때 원래보다 더 늦게 태어났다고 하는 경우가 있다. 긴 경우에는 한달가량이다. 이 작자들은 피휘를 넘어서서 생일까지 가리는 동서고금에도 없었던 전대미문의 풍습을 창조했다. 존내 비범하다.

그런데 상기에 나온 거처럼 피휘를 하는 문화권은 부모 자식 간의 이름에도 피휘를 하는데, 김정일은 아들들에게 자신과 같은 正을 넣어 이름을 지어 자신들은 피휘의 관습을 안 지키면서[49] 주민들에게는 지키라고 강요하고 있다. 김일성의 아들들인 김정일과 김평일, 김영일, 김만일 역시 이와 같은 사례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김일성이 日을 쓰는 데에 반해, 그의 아들들은 一을 쓴다. 김정일 역시 본래는 一을 썼지만 '김일성의 정통 후계자'임을 내세우려 日로 개명한 것. #.

재미있는 것은 5공시절에는 TV에서 '순자'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은 비천한 역을 하거나, 악역으로 묘사하는 것이 내부 규칙으로 금지되었다는 것이다. 발상은 거기서 거기니, 이래서 극과 극은 통한다라는 거다.[50] 물론 유사이름까지도 금지하는 김조의 병신력에는 따라갈 수 없지만

6. 대중 문화에서의 영향

참고로, 만화지옥선생 누베》에서 관련 에피소드가 한 번 등장한 적이 있다. 여기서는 등장인물 중 하나인 쿄코의 휘를 친구였던 미키가 알아내서 쿄코를 조종(…)하다가, 결국 누베가 나서서 기억을 지우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에피소드의 말미에 등장하는 나레이션이 "여러분의 부모님도 휘를 통해서 여러분을 컨트롤하고 있을지도…" 사실 버럭 하면서 이름을 부르면 본능적으로 데꿀멍하는 것을 생각하면 그럴듯하다? 혹자는 어스시 연대기가 생각날지도 모르겠다.

여담으로 아Q정신승리법을 시작하게 된 것도, 일상 생활에서 많이 쓰이는 글자가 자기 자신의 신체적 결점에 연관되어 있어서 자기 듣기 쪽팔린다고 피휘를 시킨 것 때문(…) 아Q 항목 참고.

진짜 여담이지만 '대한왕국'이 등장하는 스갤문학라이트 노벨개와 공주》에서는 피휘가 힘들어짐에 따라 아예 이름을 공표하지 않고 가족끼리만 쓰고, 공식석상에는 명칭만 부르는 것으로 해결했다. 왕족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는 방법.

피휘 관습으로 인해 중세 왕정이 끝나고 대한민국이 건국된 후에도 한 동안 시설물이나 단체에 사람 이름을 붙일때 본명을 그대로 붙이는 것을 피했다. 따라서 이병철의 호암미술관처럼 본명 대신 를 사용하거나 육영재단(육영수), 정수장학회(박정희, 육영수)처럼 이름의 일부만 사용했다. 21세기가 되어서야 이런 관습이 깨지고 김대중컨벤션센터, 박정희체육관처럼 서양식으로 본명을 붙인 시설물이 등장했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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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가휘(家諱)라고 한다.
  • [2] 국휘(國諱)라고 한다.
  • [3] 예를 들면 너무나 큰 죄를 지은 대역죄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회피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된다.
  • [4] 집안 조상의 이름을 피하는 것은 가휘(家諱)라 한다.
  • [5] 일본에는 아들이 아버지의 이름자를 이어서 쓰기도 했으니 일본에는 피휘가 정착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6] 항렬자를 정할 때 오행, 천간 등의 법칙에 따라 대표 한자/부수를 순환시키는 이유에 이 피휘도 있다. 가까운 선조의 이름과 글자가 겹치는 것을 자연스럽게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 [7]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유대교 신자들은 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다.
  • [8] 중국도 주나라가 세워지기 이전 시대의 군주는 이름을 그대로 불렀다. 예를 들면 전설로 여겨지는 요(堯)임금, 순(舜)임금, 우(禹)임금이나 상(은)나라의 왕들이 그렇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고려 이전에는 시호가 없이 이름+왕 형태로 기재된 임금이 꽤 많다.
  • [9] 다만 아브라함교 계통의 종교에서도 그들이 믿는 유일신의 이름을 직접 일컫는것은 금기된다. 야훼참조. 예수나 무함마드라는 이름은 유일신의 대리자로서의 이름이여서 허용되는거.
  • [10] 대부분의 경우는 아침 조(朝)로 바꿔썼고(대자·代字), 대자가 곤란한 경우에만 이런 식으로 결획을 했다.
  • [11] 참고로 이성계가 개명하면서 하필 이단이라고 한 것은 旦이 '조선'의 朝와 의미가 통하기 때문이다. 즉 조선을 세운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조선과 관련 있는 글자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 [12] 당고조 이연의 이름을 피휘한 것으로, 이 기록은 신당서와 구당서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한국 사서에서는 당연히 중국 황제 이름을 피휘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연개소문이라고 복구시켜야 되는데, 삼국사기에는 그대로 천개소문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복붙했네'라고 까이는 계기가 되었다.
  • [13] 고전 한문 문법에서 자신의 이름을 자기 자신을 낮추는 1인칭 대명사로 쓰기도 했다. 즉 한문에서 자기 이름을 주어로 사용하는 것은 현대 한국어에서 자기 자신을 낮추는 1인칭 대명사 '저'를 사용하는 것과 비슷한 뉘앙스를 풍기는 것이다. 그래서 유교 경전에서 공자의 이름자인 丘(구)가 등장하는 때는 대개 공자가 신분이 높은 사람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 말한 것을 경전 내에 직접 인용해 놓은 경우이다.
  • [14] 삼국사기가 신라가 편찬한 구 삼국사를 참조했는데도 천개소문이라 칭한 것을 보면 아마도 신라에서도 원 이름을 몰랐던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김부식이 <구당서>, <신당서>를 참조했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다.
  • [15] 여담이지만, 카메라로 유명한 일본의 캐논 사의 이름도 '관음'의 일본식 발음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세민이 캐논을 낳았습니다. 해당 항목 참고.
  • [16] 현무를 더욱 신격화한 것이다.
  • [17] 추존 황제로 세조
  • [18] 추존 황제로 태조
  • [19] 고려에서는 반대로 무(武)를 호(虎)로 바꿔야 했다. 본 항목의 '한국의 경우' 단락 참고.
  • [20] 후대인 고려에서도 똑같이 피휘해야 했다. 성종의 이름이 왕치(王治)였기 때문.
  • [21] 조선에서는 대구(大丘)라는 지명이 오랫동안 그냥 쓰이다가 한참 뒤에 대구(大邱)로 변경됐다. 자세한 건 '한국의 경우' 단락을 참고할 것.
  • [22] 현행 외래어표기법대로는 '추'로 적어야 하나 여기서는 그냥 원음에 더 가깝게 치우로 적었다.
  • [23] 청나라가 망하고 중화민국이 세워진 직후인 1912년에는 추펑자(丘鳳甲)이라는 사람이 邱씨를 丘씨로 되돌리자는 주장을 했는데 그 이유는 공자 시대에는 피휘하는 습관이 없었기 때문에 굳이 丘를 邱로 바꿔쓸 이유가 없다는 것. 그래서 일부는 丘씨로 되돌아갔고 일부는 그냥 邱씨를 유지하게 되면서 구분이 생겨버렸다.
  • [24] 중화인민공화국 시대에 들어서면서 중국 본토에서는 간체가 정식 문자로 됐는데 이때 다시 丘씨와 邱씨는 다시 통합되었다. 간체를 만들 때 원칙 중 하나가 비슷한 글자는 한 글자로 통일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邱와 坵는 丘로 강제 통합된다. 그래서 청나라 때와 반대로 丘씨와 邱씨는 丘씨로 강제 통일된다. 하지만 성을 강제로 갈아버리면 심리적 반발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다. 법적으로는 丘로 바뀌었어도 사적으로는 邱를 쓴다든지 하는 일도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중국은 규정을 완화해 1988년에 邱자를 간체의 일부로 추가하되, 성씨에만 한정해서 쓰도록 했다.# 그래서 지금은 다시 법적으로 丘씨와 邱씨의 구분이 생겨난 상태이다.
  • [25] 이에 대해서는 중국의 사례 단락에 설명돼 있다.
  • [26] 고려 태조 왕건의 아버지이자 추존왕
  • [27] 단, 이것은 창왕의 짧은 재위 기간에 한한다. 창왕과 그 아버지 우왕이성계·정도전·정몽주 등에 의해 신돈의 손자와 아들로 몰려 왕에서 폐위된 뒤(폐가입진·廢假立眞) 왕이었던 사실 자체가 무효화됐기 때문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우왕과 창왕은 하루 아침에 왕족을 참칭하여 왕위를 찬탈한 대역죄인으로 몰렸던 셈이니, 당시 昌을 피휘해서 일일이 寧으로 고치는 건 당연히 중단됐을 것이고, 이미 바꿔 쓴 것도 원상 복구시켰을 것이다.
  • [28] 위에서 언급한 이호의 경우와 반대다.
  • [29] 이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엄청난 행동이다. 자국의 왕명의 피휘를 위해서 유교적인 중국의 성인이자 황제의 이름을 날려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의 김부식이나 이후 조선시대의 유학자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반도의 기상
  • [30] '중국의 사례' 단락에서도 설명했듯이 당나라도 治(당 고종의 이름)를 피휘하여 理로 바꿨었다. 자치통감이 편찬된 북송에서는 이미 왕조가 바뀌어 오래 전에 사라진 治→理 교체를 고려에서는 뒤늦게 시행한 셈. 그래서 본국에서는 문제가 없던 자치통감이 바다 건너 고려에서는 강제로 개명당해야 했다(...).
  • [31] 물론 우왕과 창왕은 이성계 일파에 의해 신돈의 후손으로 몰려 폐위돼 왕이었던 사실 자체가 무효화됐으므로 '창'(昌) 자의 피휘는 오래 가지 않고 금방 취소됐을 것이다. 그래서 조선시대까지 가지 않고 바로 그 뒤를 이은 공양왕 때 수녕궁이 수창궁으로 원상 복구된 것으로 보인다. 이 궁은 조선시대에도 수창궁으로 불렸다.
  • [32] 게다가 정종의 형제들(나아가 정종과 같은 항렬의 대부분의 전주 이씨 남자들)이 모두 이름에 '방(芳)'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정종이 개명하지 않았으면 형제들도 개명해야 하는 거 아닌지 하는 문제가 불거졌을 것이다. 실제로 송나라 태조 조광윤(趙匡胤)이 황제가 되자 동생인 태종 조광의(趙匡義)는 이름을 광의(光義)로 바꾸었다(태종은 즉위 후에 다시 개명하여 경(炅)이라고 함). 참고로 조선 정종의 아우 태종 이방원은 자신이 즉위한 후 개명하지 않았지만 엄격하게 피휘하지 않았는지 형제들이 이름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그리고 어차피 태종의 형제들은 이름 대신 ○○(대)군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아서 실제 본명을 쓰는 일이 자주 있진 않았을 것이니 '왕의 이름자인 芳을 함부로 쓰는' 경우는 공문서(실록이라든가)에 왕이나 대군들의 본명(정종의 경우는 개명 전 이름까지)을 반드시 기록해야 하는 상황 아니면 많지 않았을 듯하다.
  • [33] 이게 안 되는 진짜 이유는 대법원에서 정한 "인명용 한자" 때문인데, 이게 정해진 원인은 행정시스템이 전산화되면서 당시 도입된 완성형코드에 한자가 적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유니코드 도입으로 이런 제한도 사라졌기 때문에 10만자에 달하는 인명용 한자 DB를 구축중이고, 구축이 완료되면 일부 한자를 제외하고는(죽을 사(死) 등) 인명용 한자 사용 제한 조항을 없앤다고 한다.
  • [34] 二名不偏諱, 夫子之母名徵在, 言在不稱徵, 言徵不稱在
  • [35] 예외의 경우는 인조. 닮은꼴 조부 선조가 아껴서 처음부터 외자로 지었다.
  • [36] 참고로 당대의 운서나 자전, 경서의 경우 성인의 말씀이기에, 문장자체를 바꾸지는 못했지만, 이런 한자들에 따로 테두리를 쳐서 주의토록 되어 있았다. 읽을때도 모(某)로 바꿔읽는 경우나(논어에서 나오는 丘를 모조리 某로 발음 하였던 예.) 같은 뜻의 다른 한자의 발음을 사용하거나 하였다.(경서에 단旦(태조의 개명한 휘)이 존재했을 경우, 이를 같은 뜻의 문자인 朝의 발음인 됴(조)로 발음 하였다)
  • [37] 邱나 坵는 중국에서 공자가 국가적으로 떠받들어 모셔지기 시작한 뒤, 공자의 이름을 그대로 쓰는 것을 피하기 위해 만든 글자이다.
  • [38] 중국어 간체 표기에서는 한국의 대구를 大丘로 적는 경우가 자주 보인다. 일단 간체자 규정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위의 '중국의 사례'에서 자세히 설명했는데 다시 일부만 반복하자면, 본래 간체자 도입 당시 邱는 丘로 강제 통합했었다가, 지금은 성씨에 한해 邱로 써도 된다고 바뀌었다. 그래서 어쨌든 지금은 중국어 간체에서 邱가 사용 가능한 글자로 포함됐기 때문에, 성씨에만 허용한다는 규칙을 무시하고 대구를 大邱로 적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 [39] 그래서인지 현재 경산시에는 경산초등학교, 경산중학교 외에도 장산초등학교, 장산중학교가 따로 있다. 다만 경산고등학교는 있지만 장산고등학교는 없다.
  • [40] 辰에 '때'라는 뜻이 있어서 통용하는 것이다. 참고로 요즘에는 잘 안 쓰지만 예전에는 시간이나 시각을 '시진(時辰)'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의미가 비슷한 時와 辰을 유사병렬의 형태로 결합하여 만든 단어이다.
  • [41] 明과 朙은 이체자 관계에 놓여 있는 글자들이라 사실 엄격하게 피휘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 [42] 통상적인 부를 소(召) 자와 다른 점은 왼쪽에 日이 들어갈 만한 공간을 비워놓고 오른쪽에 찌그러진 召를 쓴다는 점이다. 여기서 응용해서 昭가 들어간 照(비출 조) 자도 日 부분만 비워놓은 기묘한 형태로 표기했다.
  • [43] 이 예는 정말 몇개는 든거다. 이 글자를 안써도 온갖 억지해석과 파자놀이로 없는죄를 만들어 죽인 경우가 굉장히 많다.
  • [44] 서유기저팔계(猪八戒)는 원래 주팔계(朱八戒)였다. 하필 팔계의 성씨를 주(朱)로 했던 이유는 돼지를 뜻하는 저(猪)와 발음이 유사하면서 흔하게 쓰는 성씨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즉 일종의 말장난인 셈이다. 그런데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황제의 성씨가 주씨가 되니까 감히 돼지를 주씨라고 하기가 꺼려졌다. 돼지에게 황제와 같은 성씨를 붙이는 것은 명 황제를 능멸하는 불경한 행위로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주' 자 대신에 원래 의미에 맞게 돼지 저 자로 바꿔서 저팔계가 되었다. 성씨는 여러 사람이 쓰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피휘의 대상이 아닌데 이 경우는 사람들이 알아서 기어서 성씨를 피휘한 특이 케이스이다. 그래도 이 경우는 글자만 따졌지 발음까지는 안 따졌다. 만약 당시 주(朱)와 발음이 비슷한 글자도 회피했다면 발음이 유사한 돼지 저(猪)가 아니라 발음이 다른 글자로 썼을텐데(예를 들면 돼지 돈(豚)을 쓴다든가... 돈팔계)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유기에 등장하는 돼지의 성명이 저팔계로 확정되었다.
  • [45] 이 경우에는 인종주의 사상 그 하나만으로 양육권이 박탈된 것은 아니다. 웰페어에 의존하는 가장이 여러 차례 동거와 재혼을 하였는데, 가정 폭력 건이 적발된 경우. 물론 위험분자(?)인 관계로 미리 찍혀져 감시받은 것은 사실.
  • [46] 조선에서는 내시가 부인을 얻을 수 있었는데 당연히 양자를 얻어야 했다. 양자는 주로 본가에서 삼았지만 여의치 않을 경우네는 처가에서 데려왔다. 내시의 양자도 고자가 내시가 돼야 했다.
  • [47] 따라서 후한이 멸망할 때까지 상산으로 불려진 까닭에 조운의 경우는 그 유명한 상산 조자룡이 된 것이다.
  • [48] 또는 희(僖)
  • [49] 김정일의 이런 작명법은 오히려 일본식 통자(通字) 개념에 가까운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는 없다.
  • [50] 다만 TV같은 대중매체는 원래 유명인의 이름을 차용할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당장 2013년도에도 이런 사례가 있었고... 물론 순자라는 이름은 당시에 너무나도 흔했기 때문에 이런 내부규칙이 무리수였던건 사실이다.
  • [51] 생각해보면 세종로, 충무로 같은 경우도 본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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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08 12: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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