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D R , A S I H C RSS

필리핀 해 해전

last modified: 2015-04-03 11:24:29 by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전투 발발 전의 상황
2.1. 미군의 사정
2.2. 일본군의 사정
2.3. 맥아더의 어퍼컷과 일본군의 반응
3. 전투 경과
3.1. 서전
3.2. 일본군의 계획
3.3. 미군의 계획
3.4. 양자의 전력
3.4.1. 미군의 방공망
3.4.2. 양자의 항공기
3.4.3. 양자의 파일럿 실력
3.5. 위대한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
3.5.1. 하늘의 칠면조 사냥
3.5.2. 바다의 칠면조 사냥
3.5.3. 바다의 칠면조 사냥 2탄
4. 결과
5. 평가
6. 전후의 이야깃거리


1. 개요

미국측 명칭: Battle of the Philippine Sea (필리핀 해 해전)
일본측 명칭: マリアナ沖海戦 (마리아나 해전)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중인 1944년 6월 19~20일, 마리아나 제도 부근 해상에서 미국일본 해군 사이에 벌어진 해전.
미군의 진공이 일본의 절대국방권[1]인 마리아나 제도에 도달하자, 일본군은 그 동안의 침묵을 깨고 절치부심해서 재건한 함대항공력을 총동원해 미 함대를 공격한다. 하여 1944년 6월 19일에 미국 해군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 휘하의 태평양 함대 소속 제58기동부대와 일본 해군 오자와 지사부로 제독 휘하 제1기동함대가 필리핀과 마리아나 제도 사이의 해상에서 맞붙었다. 라기보다는 이건 미 해군 항공대가 일본군을 상대로 벌인 대학살극에 가깝다.

역사상으로는 사상 5번째로 벌어진 함대항공전이자 역대 최대 규모의 함대항공전이며, 동력선이 해군의 주력 장비가 된 이후에 벌어진 해전들 중에서는 사상 3번째로 큰 규모의 해전이다.[2]

이 전투의 결과 일본 해군은 사실상 몰락해버렸고, 미군은 일본 본토침공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이후의 경과를 따져보면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 해군이 주구장창 생각하던 결전과 다를 바 없는 해전이었다. 문제는 그 승패가...

중요성에 비해 국내에서는 의외로 지명도가 낮은 편이라 미국측이 붙인 별칭인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The Mariana Turkey Shoot)' 또는 일본측 명칭인 '마리아나 해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일본어로 필리핀해 해전이라고 하면 필리핀 탈환전시에 일어난 해전을 말한다. 헷갈리게시리

© historicair (cc-by-sa-3.0) from

<전투 당시 일본 해군과 미 해군 함대의 진로.>

2. 전투 발발 전의 상황


2.1. 미군의 사정

태평양 전쟁의 양상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전환점을 맞이하고 과달카날 전투로 대변되는 솔로몬 전역의 소모전 이후로는 줄곧 미군의 일방적이고도 착실한 공세 일변도였다. 과달카날 전투 이후 쏟아져나온 미국의 물량은 이러한 미군의 공세를 든든하게 뒷받침했다. 신병기가 속속 배치되면서 단순히 물량만 많은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도 일본군을 압도하게 된다.

미군의 진격은 크게 두갈래로 이뤄졌는데, 하나는 미 해군 함대 총사령관 겸 참모총장 어네스트 킹제독이 주장한 중부태평양 돌파이고, 다른 하나는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육군 위주의 뉴기니-민다나오 축선으로의 진격이었다. 전자는 중부 태평양 한가운데의 섬들을 하나하나 점령하여 이를 발판으로 대만과 중국을 거쳐 일본으로 향하는 것이었고, 후자는 태평양 남서쪽에 띠처럼 이어진 섬들을 따라 북상하여 필리핀을 점령하고 여기서 일본으로 진격하는 안이었다. 이 두가지 안은 서로 절충점을 찾지 못했고, 결국 두가지 안 모두 수용하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

그리고, 그 다툼의 와중에 어네스트 킹 제독은 미 육군항공대의 지지를 얻고자 마리아나 제도의 점령을 제시하게 된다. 마리아나 제도는 미 해군 입장에서는 일본 본토 침공을 위한 훌륭한 전진기지가 될 수 있었고, 미 육군항공대 입장에서는 B-29의 안정적인 작전기지[3]가 될 수 있었다.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1944년 6월을 예정으로 마리아나 제도 침공이 결정되었다.

2.2. 일본군의 사정

일본군 입장에서는 양갈래로 다가오는 미군의 진공을 막아야 했고, 이를 위해 일선 부대를 보강하고 국지적으로나마 반격을 꾀하기도 했지만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으며, 그 와중에 손실은 계속 쌓여만 갔다.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전사한 건 덤. 전선의 규모가 자신들의 능력을 초과했음을 깨달은 일본은 1943년에 절대국방권을 정하고 방어를 강화하려 했지만, 결국 1944년 초에 이르면 그동안 누적된 피해를 제대로 보충하지 못하면서 미군과의 전력 격차가 크게 벌어지게 된다. 전력 격차만 벌어진게 아니라 전선도 밀려나서 마셜제도가 미군의 손에 떨어졌고, 일본군의 일선 전진기지였던 라바울은 매일 같이 미군의 공습에 시달리는 신세가 되면서 기능을 잃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중국 동부와 동남아시아 지역을 여전히 차지하고 있었고, 서태평양 지역의 제해권 역시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본토와 남방 자원 지대 사이의 해상 교통로는 미군 잠수함들의 통상 파괴 활동에 의해 크게 위축되었다. 이로 인해 본토의 물자 부족, 특히 식량 부족이 점차 가시화되기 시작했으며, 군수품 제작에 필요한 석유, 고무, 철광석, 구리, 주석의 유입도 급감했다. 본토에서 일선부대로 가는 군수품 보급 역시 타격을 입게 되었고 이는 연합함대를 위시한 일본해군의 움직임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저항의지는 꺽이지 않았다. 격전을 거치면서 와해되어 버린 항모 전대를 재건하려는 움직임은 계속 이어져서 제1기동함대를 편성하였고 그 지휘관으로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이 임명된다. 야마모토의 후임인 고가 미네이치 제독은 이 1기동함대를 주력으로 삼아서 뉴기니 북쪽의 팔라우를 기점으로 미군의 공세에 대비하려했다. 그러나, 미군의 공세는 일본군의 예상을 앞질렀고, 1944년 3월 말에 팔라우가 미군의 공습을 당하면서 고가의 시도는 좌절된데다 그 자신마저 실종되고 만다. 그 와중에 고가의 부관이 연합군의 포로로 잡히면서 일본군의 방어계획이 미군 손에 들어갔다.

고가의 후임인 도요다 소에무 제독 역시 위와 비슷한 계획을 수립했으나 문제는 미군이 어디서 들이닥칠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동년 5월에 연합함대의 주력을 모든 방면에서 대응 가능한 한편, 인근에 질좋은 유전이 있어서 본토로부터의 연료 보급으로부터도 어느 정도 자유로운 타위타위로 옮기게 된다. 이것이 직간접적으로 패착이 되리라고는 생각치도 못한 채...

2.3. 맥아더의 어퍼컷과 일본군의 반응

1944년 4월, 맥아더가 서부 뉴기니를 침공했고, 5월말에는 인근의 비약섬을 침공했다. 그러자, 일본 해군의 시선은 일제히 팔라우와 민다나우로 집중되었다. 미군의 공세가 이쪽으로 올 것이라 예상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일본 해군은 이 해역에 잠수함들을 집중배치시킨 한편, 비약섬에 항공기를 증원하고 연함함대로 하여금 비약섬에 지상병력[4]을 증원하는 '혼작전'을 벌인다. 혼작전에 대한 내용은 아오바 항목 참조.

하지만, 이 모든 시도는 결과적으로 마리아나 제도에 대한 방어를 약화시키는데 일조했다.

이 해역에 일본군 잠수함들이 배치된 것을 알아차린 미군은 적극적인 대잠작전에 나서게 된다. 5월부터 7월간 이뤄진 이 대잠작전에서 일본 잠수함 26척중 총 17척이 손실되었다. 특히 이 작전 도중 구축함 잉글랜드[5]는 12일간 잠수함 6척을 격침시키고 대통령 표창까지 받게 되며 킹 제독은 이 소식에 '잉글랜드라는 이름은 미 해군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라는 말도 남겼다.

항공기 증원 역시 그대로 손실로 이어졌다. 5월에서 6월초에 비약섬으로 증원된 항공기는 합계 220여기에 이르렀으나, 대부분 격전의 와중에 손실되었다. 이 항공기들이 비약섬으로 향하지 않고 마리아나 제도로 배치되었다면 전투 발발 시점에서 지상기지들이 그런대로 대항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봤자 일본군이 탈탈 털렸기는 마찬가지였겠지만.

수상함들을 이용한 지상병력의 증원은 미군 잠수함의 감시가 원인이 되어 실패하고 만다. 이미 미군은 암호해독을 통해 연합함대의 전반적인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배치된 미군 잠수함들은 연함함대가 타위타위 및 그 일대에 들어서자 연합함대의 일거수 일투족을 낱낱히 감시하여 미군 수뇌부에 보고하고 있었다. 이들 미군 잠수함들은 단순한 감시역에 그치지 않았고 여차하면 일본군 수상함정들을 공격하곤 했다. 비약섬으로 향하던 일본 함대 역시 이들에 의해 낱낱이 감시당했고, 이 정보를 바탕으로 반격에 나선 미군에 의해 쫓겨나고 말았다.

이들 미군 잠수함들의 존재는 타위타위로 이동한 제1기동함대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타위타위에는 지상비행장이 없었으므로 모든 비행훈련이 항공모함에서 이뤄져야 했는데 잠수함들 때문에 항공모함들이 출항할래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일본군이 어퍼컷에 정신이 홀린 사이에 스트레이트가 날아들고 있었다.


3. 전투 경과


3.1. 서전

1944년 6월 6일에 마셜제도에서 제 58 기동부대가 출격하여, 마리아나 침공 부대가 출발하던 11일경에 마리아나 제도 인근에 도착했다. 도착과 동시에 마리아나 제도의 일본군 지상비행장들을 쑥대밭으로 만들면서 이 일대 일본군의 항공전력을 일소해 버리고 제공권을 장악했다. 미군의 주장에 따르면 이때 일본군이 입은 항공기 피해는 적어도 150기 정도이다.
이후, 사이판 전투가 개시될 때까지 마리아나 제도의 일본군 지상 시설과 해상세력들을 일소해버렸다. 덤으로 마리아나 제도 북쪽의 보닌 제도에도 일부 함대를 보내 무력화시켰다.

일본군은 9일께 58 기동부대의 출격을 파악하고 계속해서 정찰기를 보내 58 기동부대의 위치를 파악하려고 시도했다. 11일에 마리아나 제도가 본격적으로 공격받자 연합함대는 비약섬으로 보낸 함대를 부랴부랴 불러들였고, 제1기동함대의 출격을 명령했다. 몰론 이들의 행적은 미군 잠수함들에게 계속 감시당하고 있었다.

18일께에 이르면 양측의 정찰기들이 교전을 벌일 수준으로 근접했다. 그리고, 운명의 19일이 밝아왔다.

3.2. 일본군의 계획

일본 해군에서도 몇 안되는 유능하고 합리적인 지휘관 중 한 명이었던 오자와 제독은 일본 함재기의 유일한 장점인 항속 거리(100Km 이상 우위에 있었다)를 이용해 미 함재기의 항속 거리 밖에서 치고 빠지는 아웃레인지 공격을 구상했다. 더불어 신중한 스프루언스 제독이 상륙함대의 보호를 위해 상륙지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는 심중까지 정확하게 꿰뚫었다. 그러나, 미군의 전력 규모에 대해서는 실제보다 낮게 파악하고 있었으며 미군이 미드웨이 해전 당시처럼 복수의 기동함대로 분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응하여 경항모 치토세, 치요다, 즈이호 3척을 중심으로 한 C부대를 전방에 내세우고, 주력인 A, B부대를 통합 운용했다.[6] 이를 통해 전방 C부대의 정찰기 세력으로 미군을 먼저 찾는 한편, 미군이 공격해올 경우 C부대의 상공을 먼저 통과하게하여 미군의 공격력을 분산시킬 속셈이었다. 하지만, 이 진형은 대잠방어에 취약했고 이는 나중에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다.

자신이 공세에 나설 때는 복수로 분산되어 있다고 생각한 미군의 양동작전에 대비해 B부대의 함재기를 예비로 두고 나머지 병력을 모두 공격에 투입하기로 했다. 다만 이때 자신의 함재기를 4파로 분리해 제파식으로 출격시키는 실수를 범했다. 제파 공격자체는 한번에 지나치게 많은 공격기들이 집중될 경우 몇몇 표적에 공격이 지나치게 집중되는걸 막기 위한 지극히 상식적인 조치였다. 하지만, 숫적 열세와 조종사들의 기량 문제를 정확하게 깨닫지 못한 것이 결과적으로는 실수가 되고 말았다.

오자와가 선공에 나섰던 데는 초기 항모전의 상식인 '선빵이 최고다.'라는 사상이 한몫 한 걸로 보인다. 오자와 역시 파일럿들의 기량문제를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선공을 걸면 미군이 방어자가 되므로 기량차이는 극복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일본군은 해전에 돌입하기 전 색적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오자와 기동부대가 미군 항모전단을 발견하고 공격대를 띄운 시점에서 미군은 아직 오자와 기동부대의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먼저 보고 먼저 쏜 상황이라고 판단한 것. 게다가 앞서 언급되었듯이 미군의 실제 규모는 파악하지 못한 채 숫적으로 그리 꿀리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도 선제 공격을 결심하는데 한몫했다. 그래서 초반에 오자와 기동부대 참모진들은 꽤나 낙관적인 전망을 갖고 있었다.

문제는 미군이 일본 함대의 정확한 위치를 찾지는 못했지만, 일본군의 전반적인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3.3. 미군의 계획

미군의 경우 전투 돌입 전까지 일본군과의 교전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에 대해 갈등이 있었다.

함대 사령관 스프루언스 제독은 오자와 제독의 예상대로 상륙지의 엄호를 위해 함대가 처음 자리잡은 위치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으려 했다. 그는 일본함대와의 전투보다 상륙함대의 엄호를 우선시했다.

반면 58기동부대의 지휘관인 미처 제독은 적극적으로 일본군을 찾아서 공격하려고 했다. 실제로 17일께에 무선감청과 잠수함의 감시를 통해 일본함대의 존재가 확인[7]되자 그는 휘하의 고속전함들로 하여금 일본함대와 야간전을 벌이고 동이 트면 함재기로 마무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고속전함부대의 지휘관인 윌리스 리 제독[8]이 극구 반대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9]

스프루언스 제독은 상륙부대의 엄호가 우선임을 명확히하면서 적극적인 공세에 나서려는 휘하 항모부대 지휘관들의 반발을 눌렀다. 여기에는 그가 파악한 일본 함대의 위치가 제작각이었던 터라 일본함대가 전력을 분산하여 양동작전에 나서리라고 본 것도 한 몫했다. 자신의 항모부대가 일본함대를 쫓아 상륙부대에서 멀어진 사이에 다른 일본 함대가 상륙부대를 위협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이것은 레이테 만 해전에서 현실이 되는데...

한편으론 스프루언스는 일본군의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미군이 파악한 오자와 함대의 규모는 '함재기 약 450기에 항모 9척을 중심으로한 약 50척 규모'였는데 실제로도 '함재기 436기에 항모 9척을 포함한 50척'이었다. 후술하다시피 당시 일본군이 투입한 함재기 숫자는 당시 미 함대가 보유한 전투기 숫자보다도 적었다.

따라서 스프루언스는 자신 휘하의 함재기들을 공격에 분산시키지 않고, 오로지 일본 해군 항공대의 공격을 요격하는 데 집중시켰다.

3.4. 양자의 전력

3.4.1. 미군의 방공망

철벽이다.

우선, 각 함대, 함정에 꾸려진 전투정보본부(CIC)는 전쟁 초에 비해 능력이 크게 개선된 대공 레이더를 이용해서 적기를 예전보다도 더 일찍 탐지할 수 있었고, 대량으로 보급된 우수한 통신장비들에 힘입어 아군 기체들을 전장 상황에 맞게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으며, F6F 헬캣이라는 걸출한 함대 방공 전투기우수한 조종사들에 의해 운용되면서 일본 함대의 함재기들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 덕분에, 전투기에 의한 함대 방공의 효율성이 전쟁 초기보다 크게 높아져서, 이 시기에 이르면 당당히 함대 방공의 한 축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전통적인 함대 방공체계인 대공포화 역시 만만치 않아서, 대공레이더와 전투통제실의 통제하에, VT신관을 사용하는 127mm 양용포 → 2~4연장 40mm 대공포 → 20mm 기관포로 이어진 대공망[10]에는 사각이 없었다. 덧붙여 수많은 실전을 겪으며 완성된 미 함대 특유의 함대원형진의 내공은 전혀 만만하지 않았다. 이렇게 완성된 미국 함대의 대공포화는 이미 태평양 전쟁 중반부터 그 흉악함(...)[11]을 과시하고 있어서, 미 함대 공격에 나선 일본기들이 오로지 대공포화에 의해 전멸하는 일도 벌어지곤 했다.

그러니까 우주 방어에 화려한 계획은 필요 없었던 것이지!!

3.4.2. 양자의 항공기

당시 일본 함대의 주력 전투기는 여전히 제로센이었지만, 이에 맞서는 미 함대는 이미 F4F 와일드캣이나 F2A 버팔로와는 급수가 다른 '지옥에서 온 고양이' F6F 헬캣으로 기종전환을 끝낸 상태였다. 거기에 비하여 제로센은 개전 초기 그대로의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전쟁 초기의 모델보다는 개량되긴 했으나 개량된 성능 자체가 적고, 개량의 반대급부로 기존의 성능을 잡아먹은 점도 있어서 F6F 헬캣 앞에서는 도찐개찐.

급강하폭격기과 뇌격기의 경우 양측 모두 저마다 신형기를 위주로 배치했지만, 일본군의 경우 구형기의 비중이 미군보다 상대적으로 높았다. 그나마도 수량이 부족해서 구형 제로센을 전폭기라는 이름하에 폭탄을 장착하여 공격기로 투입했다.

숫자라도 많았다면 모를까 당시 일본함대의 함재기 총 숫자(전투기, 뇌격기, 급강하 폭격기, 기타등등을 모두 합쳐서)는 당시 미 함대의 전투기 숫자(순수하게 전투기 꼽아 본...)보다도 적었다. 게다가 헬캣은 폭장량이 상당한지라 급강하 폭격기 역할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함정.

항모 이외의 수상함정에 실린 수상기들의 경우 일본함대의 보유량이 미군함대보다 조금 더 많았지만 이들이 할수 있는건 오직 정찰뿐이었다.

3.4.3. 양자의 파일럿 실력

미일 양군의 파일럿 기량의 차이는 말 그대로 천지차이.
일본군의 경우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의 초기 전투 등으로 기량을 쌓았던 베테랑 조종사들은 이미 미드웨이 해전과달카날 전투, 바울 항공전 등을 거치면서 거의 모두 쓸려나간 상태였다. 조종사 양성이 제대로 이뤄졌다면 모르겠으나, 양성기관이 배출할 수 있는 능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이 때문에 이 전투에 참가한 일본 해군 항공대의 조종사들 대부분은 실전경험도 없었고, 장거리 항법도 미숙했다. 실제로도 전장까지 항해하던 중 어떻게든 약간이라도 조종사의 실력을 늘리기 위해 비행훈련을 실시했으나, 몇 대 이륙하지도 않았는데 이륙에 실패해서 바닷물에 비행기를 처박는 사고가 계속 발생하니 출격하기도 전에 소중한 비행기와 조종사를 대량으로 상실한다는 항의까지 들어와서 어쩔 수 없이 훈련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던 것만 봐도 그 당시 일본군 함재기 조종사의 실력은 바닥 그 자체였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타위타위에 주둔하던 동안에는 미군 잠수함의 방해로 인해 비행훈련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반대로 미군 조종사들은 넉넉히 갖춰진 양성기관에서 저 미드웨이, 과달카날, 라바울을 거친 베테랑 조종사들이 지도하고 충분한 비행시간을 가진 덕에 임멜만 턴[12]도 가볍게 소화해내는 평균 이상의 기량을 갖고 있었다. 똑같이 싸웠건만 전황이 뒤집혀버렸던 셈.

단적인 예로 이 해전에서 일본의 항공모함 히요가 격침될 때 미국은 4대의 뇌격기가 좌우로 두대씩 갈라져 한대는 항공모함을, 한대는 항공모함의 이동경로를 예측해 쏘는 방식을 사용했는데 이 방식은 전쟁 초기 일본의 베테랑 뇌격대가 사용하던 방법과 거의 동일하다.

3.5. 위대한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

3.5.1. 하늘의 칠면조 사냥

운명의 시각, 일본군 함재기들은 기다리고 있던 미군기와 맞닥뜨리게 된다. 그리고 일본 전투기들은 칠면조 신세가 되어 고양이의 먹잇감이 되었다.

4차례에 걸쳐 투입된 일본 함대의 함재기들은 총 326대. 정찰에 동원한 기체까지 합치면 369대였다.
그러나, 이들은 일찌기 겪어보지 못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미국 함대로부터 크게 떨어진 지점(평균 100km정도)에서부터 비행대대급 단위로 미리 길목을 막고 기다리고 있는 미군 함재 전투기들에게 조직적인 요격을 반복해서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필리핀 해 해전 이전에도 미군 항모를 공격할 때 함재기의 요격을 받긴 했었다. 그러나, 이때는 미군이 보유한 레이더의 성능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데다 이를 운용하는 미군 병력들의 숙련도도 낮았다. 때문에, 일본군 비행기들은 적어도 미 함대가 어렴풋이나마 보이는 지점에서 본격적인 저항에 부딪혔으며 고도와 위치 선점 등의 문제로 인해 미군 함재기들이 일본군 함재기들을 놓쳐버리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그러나, 필리핀 해 해전에서는 일본 함대가 보낸 공격대들 중 겨우 1/8정도만이 미함대 상공에 도달할 수 있었고, 그나마도 미 함대에 확실한 피해는 입히지 못한 채 역으로 대공화망에 털려버렸다. 이들에 의한 미 함대의 피해는 항모 2척, 전함 2척, 중순양함 1척들이 '사소한 피해'를 입은 정도에 불과했다.

여기에다 미 함대는 앞서 두들겨놨던 괌을 다시 두들겼다. 이로 인해 미 함대와 함재기들의 손아귀에서 겨우 벗어나서 괌으로 도망친 소수의 기체들 역시 죄다 고철이 되어 버렸다. 이 와중에 다른 기지에서 증원차 괌에 왔던 일본군 전투기들도 같이 휘말려서 괴멸당한 건 덤.

이 전투에서 보여진 일본군 조종사들의 기량은 그야말로 형편없었다. 당시 참전한 미군 조종사의 보고에 따르면 공격기들은 미군 전투기가 뛰어들었다하면 진형을 흐트러버리고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다니다가 격추당하고, 전투기들은 미군 전투기에 대항하고 아군 공격기를 보호하기는 커녕 미군 전투기들로부터 도망치기 바빴다고 한다.

기량만 문제가 되었다면 모르겠으나, 함재기의 신뢰성도 일본군의 패배에 한 몫했다. 특히, 무전기의 성능 및 신뢰성 부족이 가장 큰 문제였는데, 3차 및 4차 공격대의 전력이 분산되어 버린데는 이 무전기가 한몫했다. 또한, 점차 열악해지기 시작한 본토의 공업능력은 항공기 자체의 신뢰성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미군에 의한 격추가 아닌 사고로 인해 상실된 기체 중 다수가 기체 이상에 의한 손실로 추정되고 있다.

이 전투에서 미 해군은 헬캣 포함 31대의 함재기를 잃는 데에 그쳤지만 일본 해군의 함재기 손실은 그 10배가 넘는 것으로 알려지자 미국 전역이 떠들썩해졌다. 400대라고도 하고, 386대라고도 하는 등 전과는 들쑥날쑥했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다.
훗날 교차검증에 의한 확인된 실제 전과는 239대[13]였지만 그렇다쳐도 당일 일본함대가 투입한 전력의 약 70%가 이 날 하루만에 미군의 손에 의해 사라져버렸다. 지상기지의 일본기들까지 합친 미군의 당일 전과는 257대였다. 덤으로 사고로 인해 일본군이 잃은 기체가 33대이다.

이를 두고 미 해군 조종사들은 이날의 전투를 가리켜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이라 불렀다. 자료에 따라서는 인터뷰를 했더니 '마치 옛날 칠면조 사냥[14] 같았다'라고 한 것에서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게다가 이렇게 항공전에서만 패배했다면 적어도 함대 자체는 적의 공격이 몰려오기 전에 빼내서 미군에게 완벽한 승리를 가져다 주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3.5.2. 바다의 칠면조 사냥

전투 초장부터 몰래 숨어든 미 잠수함의 맹활약에 일본 해군은 항모 두 척을 손실했다.

미 해군 가토급 잠수함의 7번함인 SS-218 알바코어(Albacore)호

19일 오전 8시 16분 미 해군 가토급 잠수함의 7번함인 SS-218 알바코어(Albacore)호[15]가 오자와 제독의 항모 전단을 발견하고, 가장 가까운 다이호를 공격하려고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순간에 알바코어의 사격 통제기가 고장났고 육안으로 확인해서 어뢰를 발사해야만 했다. 총 6발의 어뢰 중 4발은 빗나갔지만, 나머지 2발 중 한 발은 막 이함하던 고마쓰 상사의 살신성인으로 막아냈으나,[16] 최후의 한 발이 명중하여 항공유 저장고 2개를 박살냈다. 피격 당시에는 대단한 피해가 아니라고 판단했으나 피해 통제 장교의 미숙한 대처로 인해 연료 배관에서 폭발성 가스가 샌 것을 모르고 있었다.

대사의 태평양전쟁 이야기 블로그에 따르면 일본군도 나름대로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한 개량을 한 덕분에 항공유 저장탱크와 관련배관은 각종 유출방지 및 파손방지 처리를 해놓아서 누출사고가 없었으나, 함정용 연료배관은 그런 조치가 없어서 손상을 입었다고 한다. 평소에 중유같은 것은 누출되도 엄청난 화재가 아니라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아서 항공유 공급계통같이 촘촘하게 일정 구역을 봉쇄처리할 시스템이 없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당시에 사용했던 함정용 연료가 제대로 정제한 경유나 중유가 아니라, 이렇다할 정제를 거치지 않은 원유에 가까운 것이라서 휘발성 물질을 대거 함유하고 있었다. 이 문제의 연료는 타위타위 인근의 타라칸 유전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여기서 얻은 석유의 품질이 아주 좋아서 이렇다할 정제과정 없이도 보일러에서 잘 연소되었다. 미군 잠수함 때문에 연료의 해상수송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이 타라칸 원유의 특성은 매우 유용한 것이었지만 피격상황에서는 오히려 독이 되고 만 것이었다.

결국 폭발성 가스가 퍼졌고 뒤늦게야 이를 알아채고는 폭발성 가스를 뽑아내기 위해 환풍설비를 가동시켰는데, 담당 장교가 해당 구역 내의 환풍설비만으로 가스를 배 밖으로 뽑아내는 게 힘들자. 격벽을 개방해서 가스를 배 구석구석으로 퍼뜨리는 병크를 저질러버렸다. 가스를 배 전체로 퍼뜨린 후 배 전체의 환풍설비를 사용하면 금방 다 배 밖으로 빼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 역시 일본군 결국 그 날 오후 5시 32분 주 격납고의 발전기에서 불꽃이 튀면서 폭발성 가스가 인화, 폭발하며 격침되었다. 전체 승조원 2150명 중 1,650명이 전사했다. 이쯤되면 자폭에도 어느정도 경지가 있지않을까 싶다

미 해군 가토급 잠수함 카발라 SS-244
또 다른 잠수함 카발라(Cavalla) 호는 정오 무렵에 쇼카쿠를 공격할 위치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고, 6발의 어뢰를 발사해 그 중 3발이 명중했다. 명중한 어뢰 중 1발이 주 격납고 부근의 전방 항공유 저장고에 적중하여, 재급유를 받고 있던 함재기들이 폭발했다. 또한 새어나온 연료가 퍼지면서 대화재를 일으켰고 탄약과 폭탄도 폭발을 일으켜 쇼카쿠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함선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고, 화재를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다고 판단한 함장을 배를 버리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곧 함 내에 쌓여있던 폭발성 가스가 항공기용 폭탄의 폭발에 의해 인화, 폭발하여 쇼카쿠는 얍(Yap) 섬 북쪽 230km 해상에서 쪼개지면서 침몰했다. 1263명의 인원이 쇼카쿠와 운명을 같이했다. 일본군 구축함 우라카제 호가 카발라 호를 공격시도 했으나, 폭뢰가 거의 다 불발이었기 때문에 경미한 피해를 입은 채 탈출했다.

이로 인해 일본해군은 항모 2척과 2913명의 인원, 그리고 24대의 항공기를 추가로 잃어버렸다. 항공기만 따지면 함대 전체가 보유한 501대의 함재기/수상기 중 60%가 넘는 314대가 단 하루만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3.5.3. 바다의 칠면조 사냥 2탄

그 다음날에는 미군의 반격이 개시되었다. 20일 오후 3시 40분까지 미군은 일본군 함대를 발견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날 4시 5분, 자세한 보고가 올라왔고 공격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미군의 공격은 오후 6시 30분이 시작되었는데 미군 함재기들이 처음 발견한 건 유조선 2척이었다. 큰 피해를 입은 이들은 나중에 배에 일부러 구멍을 내어 자침하였다. 항모 히요는 어벤져 뇌격기 4기의 폭탄과 어뢰 공격을 받고 멈춰서 있다가 새어나온 항공유가 인화, 폭발로 침몰했다. 다른 항공모함 즈이카쿠, 준요, 치요다, 전함 하루나는 심한 피해를 입었다.

오자와가 아웃 레인지 전법을 구사한 탓에 일본함대의 위치는 미 함재기의 행동반경에 간신히 걸려 있었다. 거기에다 일몰 직전에 공격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공격을 마치고 귀환하는 미 함재기들은 연료부족과 야간착함이라는 이중고를 겪었다. 미 함대가 야간등화관제를 깨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함대 상공을 비췄음에도 불구하고 함재기 80대가 손실되었다. 일부는 비행 갑판에 충돌하기도 했고, 대다수는 바다에 추락했다. 그렇지만 적극적인 구조 덕분에[17] 많은 조종사들이 그 후 며칠 간 구조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입장에서는 함재기 80대 정도는 금방 보충할 수준이었으므로 조종사만 대량으로 상실하지 않으면 손해를 입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손실 항공기에 비해 미국의 피해는 적었다. 게다가 그 와중에 우리의 불사함님은 1기를 제외한 모든 함재기 성공적으로 귀환에 그 나머지 한기도 파일럿 수색에 성공했다. 오오...[18]

4. 결과

손실 항공기 100여대, 함선 피해가 전무했던 미군에 비해 일본군의 피해는 압도적이었다. 전투 첫 날에는 항모 2척을 손실했고, 그 다음날에 또 항모 1척을 잃었다. 둘째 날까지 일본군은 함재기/수상기 합계 426대, 지상 항공기 50여대를 손실하였다. 조종사를 비롯한 항공승무원은 445명을 잃었다. 단순한 항모 3척이 아니라 정규항모인 쇼카쿠, 다이호가 침몰했고, 정규항모에 버금가는 크기를 자랑하는 개조항모 히요까지 잃었으며, 즈이카쿠준요도 큰 피해를 입었다. 주력항모로 쓸만한 배가 모두 침몰하거나 큰 타격을 입은 것이다.

이 전투를 끝으로 일본 해군의 함대항공력은 완전히 소멸되었다.망했어요 전함 야마토를 위시한 수상함 세력은 여전히 건재했지만, 항공 엄호가 없는 함대가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되는지는 일본 해군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나머지 일본의 수상함 세력은 레이테 만 해전에서 완전히 발리게 된다.

거기에다 이 전투는 그저 일본 함대의 괴멸로만 이어지지 않았다. 일본함대가 사라지자 거칠게 없어진 미군은 사이판 전투를 위시로 하여 마리아나 제도를 장악해 버렸다. 이로 인해 1943년에 일본이 설정한 절대국방권이 박살났고, 그 여파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던 도조 히데키 내각이 무너졌다.

5. 평가



이 문장만큼 본 해전을 간단명료하게 표현할 수는 없다.

이 표현처럼 일본해군에게 '회복불가 판정'을 내린 전투다. 실제로도 미드웨이 해전이나 과달카날 전투 이후와는 다르게 해군항공대를 재건하려는 시도조차 불가능하게 되었다. 항공기 손실은 어떤 식으로든 보충할 수 있었지만, 이를 운용할 인력은 더이상 어찌해볼 방법이 없었다. 당시 작전에 참가한 함재기 조종사 및 승무원들 대다수의 기량이 전쟁 초기에 참전한 인원들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악화되어 있었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나마 일본에 남아있던 항공모함에서의 항공기 운용 경험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그런 존재들이 한번의 결전에 싹 쓸려나간 것이었다. 더군다나 제1기동함대 창설과정에서 그나마 얼마없는 항모 경험이 있는 베테랑들을 긁어모아서 중대장급 이상의 지휘관으로 배치했는데 이들 베테랑들의 손실도 매우 극심했다. 총 35명의 중대장급 이상 지휘관들 중 22명이 전사했고 몇몇은 목숨은 어찌 건졌으나 전선에 복귀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거기에다 위에서 언급되었다시피 절대국방권으로 대변되는 일본의 방어전략이 이 한 번의 해전과 그에 따른 여파로 인해 박살나버렸다. 필리핀 해 해전은 일본해군이 미해군의 격멸을 목표로 한 마지막 해전이었으나 결국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목표를 이루지 못한 것 만으로도 모자라서 태평양에서의 방어전략에 필수적인 요소였던 항공모함 전대를 사실상 완전히 잃어버렸다. 비록 즈이카쿠를 비롯한 다수의 항모가 아직 일본 해군의 수중에 있었지만, 항공기도 그걸 운용할 사람도 없는 항모는 그저 덩치 큰 수송선에 불과했다. 그런 탓에 레이테 만 해전에서는 미해군과 직접 싸울 엄두도 못내고 기껏해야 미해군의 방어선 돌파만을 노릴 정도, 그마저도 전해군의 피해를 감수해야 할 정도로 궁지에 몰리게 된다. 등골브레이커 스프루언스 또한 이 해전의 결과, 절대국방권의 핵심 지상거점 중 하나인 마리아나 제도를 잃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고 말았다.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연함함대 사령관 도요다 소에무 제독은 아래와 같이 훈시했다.
"이 한 번의 전투에 제국의 흥폐가 달렸다."[19]
결국 그의 말대로 이뤄진 셈이었다. 일본 본토가 본격적으로 참화를 입기 시작한 것은 이 마리아나 제도를 잃고나서 부터였기 때문이다.

이미 저 위에서 언급되었지만, 미군 입장에서 마리아나 제도는 일본 본토 침공을 위한 요긴한 전진기지이자 일본 본토를 신형 전략폭격기 B-29의 행동반경에 넣을 수 있는 항공기지로 안성맞춤이었다. 이 마리아나 제도를 차지하는데 있어서 최대의 걸림돌이었던 일본 해군의 주력을 격퇴함으로서 이후의 작전을 매우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일본 해군이 껍데기만 남았기 때문에 앞으로 미 해군의 행동에 제약을 크게 덜었지만, 미 해군이 이걸 깨달은 것은 레이테 만 해전부터였다. 미 해군이 진작에 일본 해군의 사정을 알았다면 레이테 만 해전에서의 삽질이 조금은 덜했을지도 모른다. 진짜 삽질은 일본군이 거하게 한거같지만


손자병법에 이르기를 '이기는 군대는 먼저 이겨놓고 나서 싸운다'고 했는데, 이 점에서 승패는 이미 결정나 있었다.

양자간의 질적, 양적인 전력차는 이미 저 위에서 설명했으니 패스.
이에 못지않은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상대방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그 의도를 미리 읽어내는 것이었다. 이 부분에서도 미군은 일본군을 압도했다.

본 해전의 주역이라할 수 있는 항모기동부대 간의 색적만 놓고 보면 얼핏 일본이 유리하게 시작한 것처럼 보인다. 일본 기동부대는 미국 항모전단이 자신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미국 항모전단을 먼저 발견했고, 미국 항모전단의 손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 먼저 공격을 가할 수 있었으며, 여차하면 괌 섬의 비행장으로부터 지상 주둔 항공병력의 지원을 받음과 동시에 함재기들이 이 비행장을 활용하여 보다 융통성있는 작전도 가능했다(마지막 부분은 실패였지만).

하지만, 단순히 일선 부대들 간의 색적을 떠나서 상대방의 의도를 미리 파악하고 이에 대응하는 것에 있어서는 미군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해당 전투가 벌어지기 전만해도 일본 해군 수뇌부들은 미군의 공격시기와 공격지점을 헛짚고 있었다가 미군들이 예상보다 일찍 마리아나 제도로 몰려오자 부랴부랴 자신들의 전력을 수습하여 전투에 돌입했다. 자신들이 원하는 시기와 지점에서 전투를 준비할 수 없었다는 것에서 부터 이미 에러.
반면 미군의 경우, 일찌감치 일본군의 방어계획을 파악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일본군이 어느정도의 규모로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자신들과 맞붙으려는지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덕분에 미군은 일본함대를 정박지에서부터 집중적으로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었다. 스프루언스가 자신들의 원래 목적인 마리아나 제도 점령에 집중하면서 일본함대에 대해서는 요격전에만 임할 수 있었던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괌을 비롯한 지상 비행장들을 본 전투 발발 이전에 일찌감치 박살내 놓고, 전투 와중에도 수시로 두들겼던 것도 위에서 언급된 일본군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20]

따라서, 단순히 미/일 양자의 기량이나 기술 수준 차이가 승패를 갈랐다고 볼 수는 없다.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도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대응하다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훗날 레이테 만 해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6. 전후의 이야깃거리

위의 평가에서처럼 실제 결과는 일본해군의 함대항공력을 박살낸 대전과였지만, 적어도 본 해전이 끝난 직후 미 해군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일단 전투의 전반적인 흐름이 미군의 일방적인 수세였고, 해전 규모에 비해 대함전과가 미미했던 것이 그 원인이었다. 이 전투가 끝나고 미군높으신 분들은 물론이고 스프루언스의 지휘하에 있던 58기동부대 지휘관 마크 미처 제독까지도 요격전에만 전념하고 일본 함대 격파에 나서지 않은 스프루언스의 작전지도를 마구 씹어댔다.
하지만, 전후 일본 측 자료가 공개되고 이를 바탕으로 연구한 결과 오히려 그 상황에서는 요격전이 최선이었다는 결론이 나와 스프루언스의 작전 지도가 탁월했다는 평가를 받게 됐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버스. 그나마 해군내에서는 비교적 일찍 스프루언스의 공적이 인정되었으나, 일반인들 사이에서 그의 공적이 인정 받은 건 그의 사후에 니미츠 제독의 전기가 출간되고 나서다. 안습.

한편, 이 전투에서 유키카제도 참전했었으나 대잠작전중 기뢰폭발로 손상을 입어 퇴각해야 했다. 물론 그 뒤에 벌어진 일을 보면 정말 이 배가 남의 운을 빨아먹는 것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

이 전투에 참전했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한 일본군 조종사는 훗날 "내 평생에 그렇게 많은 구라망[21]은 처음 봤다."면서 당시의 압도적인 전력차에 혀를 내둘렀었다.

----
  • [1] 태평양 전쟁 중반에 이르자 전선의 규모가 자신들의 역량을 벗어났다고 판단, 전선을 축소하고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설정했다. 태평양 지역의 경우 서부 뉴기니 - 캐롤라인 제도 - 마리아나 제도를 잇는 일련의 선이 여기에 해당된다.
  • [2] 1위는 레이테 만 해전, 2위는 유틀란트 해전
  • [3] 마리아나 제도 점령 이전에는 중국에서 B-29를 출격시켰지만, 보급이 쉽지 않았고 작전기지가 일본군의 공격에 노출되는 등의 문제가 있어서 제대로된 작전을 펼칠 수 없었다.
  • [4] 육군이 아니라 해군육전대 병력이었다. 육군은 일찌감치 증원을 포기했다.
  • [5] 이름이 잉글랜드지만 엄연히 미국 소속의 구축함이다. 해당 항목 참조.
  • [6] A부대는 정규 항공모함인 다이호, 쇼카쿠, 즈이카쿠로 이루어진 핵심전력이며, 오자와 중장이 직접 지휘했다. B부대는 개조항모 히요, 준요, 그리고 경항공모함 류호로 이루어졌으며 조지마 다카지 소장이 지휘했다.
  • [7] 정찰기에 의한 정확한 확인은 이뤄지지 않았다. 무선감청은 기술적인 문제로 정확도가 낮았고, 잠수함들은 행동의 제약 때문에 실시간 보고가 어려웠다.
  • [8] 과달카날 해전에서 승리한 그 사람 맞다.
  • [9] 그 자신이 경험한 미해군의 야간전 능력이 일본군보다 한수 아래였던 것도 있었고, 자신들의 고속전함들은 전쟁기간동안 대공 전투만 줄곧 치뤘지 함정간 교전 경험이 없었던 것도 미처 제독의 구상을 반대한 이유였다.
  • [10] 미군의 38구경 127mm는 2차대전에서 가장 성공적인 해군 양용포라는 평가를 받고 있고, 40mm 보포스와 20mm 오리콘 대공기관포는 아직 현역이다.
  • [11] 산타크루즈 해전 당시, 미국은 항모 1척을 잃었고 한척이 지옥문턱을 오갔긴 했지만 오히려 일본측의 함재기가 너무 많이 손실되어 재공격을 포기했었을 정도다. 약 180명의 파일럿을 소모했었다는 기록도 있다. 히이이이익
  • [12] 임멜만 턴은 두가지가 있는데 우선은 1차대전의 독일 공군 에이스였던 막스 임멜만이 고안해 낸 공중기동으로, 조종간과 러더를 이용해 빠르게 다음 목표로 비행방향을 바꿀 수 있는 기동으로 상당히 고난도의 기동이다. 두번째는 현대의 임멜만 턴으로 이는 위의 임멜만 턴에서 이름만 가져온 것으로 간단히 말해 비행하던 상태에서 루프(기수를 들어 크게 원을 그리며 1회전)후 루프의 정점에서 1/2만큼 롤(공중에서 수평방향으로 기체를 1회전)해 기체를 똑바로 세우는 기동이다. 이는 러더 조작이 필요없이 조정간만으로 간단히 할 수 있으며, 원래 임멜만턴과는 달리 기초적인 수준의 기동이다.
  • [13] 일본군 공격부대 220대 + 정찰기 19대
  • [14] 칠면조는 닭보다 4배는 크고 움직임도 느린 식용(!) 새다. 총으로 사냥하면 거의 정지 타겟과 마찬가지...
  • [15] 어째서 잠수함 이름을 참치 종류의 이름으로 했냐면 미군은 원래 잠수함의 이름으로 수생동물의 이름을 주로 사용하곤 한다. 노틸러스 역시 앵무조개라는 뜻이고 노틸러스가 속한 나왈급 네임쉽 나왈도 일각고래라는 뜻이다. 그외에도 블랙피쉬, 바브 등 수생동물의 이름을 사용한 잠수함은 다양하다. 심지어 21세기 운용되는 끝판왕 시울프급도 바다늑대라는 말은 대서양 울프피쉬(Atlantic wolffish)의 별칭이다.
  • [16] 전투기가 어뢰를 몸으로 막았다. 그랬는데도 다이호는 결국 죽었다
  • [17]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 마크 미처 제독은 역사에 길이 남을 한마디의 명령을 내린다. "전 함은 빛을 밝혀라!" 이 함대의 목숨을 건 선택이 수많은 조종사들을 구했다. 호위기가 없는 텅텅 빈 항공모함이 야간에 자기 위치를 광고하는 행동이다. 말 그대로 함대의 목숨을 건 선택이었다.
  • [18] Battle 360에 소개된 일화를 따르자면 파일럿 수색에 성공한 구축함이 통신을 보냈는데 "이 파일럿은 아이스크림 몇 갤런인가? 이 파일럿은 비행대 리더이므로 아이스크림을 좀 더 많이 줘야 한다." 라고 인신매매 협상시도를 했다. 물론 비행대 단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이었던 만큼 아이스크림 요구량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스크림이 언급된 이유는 당시 엔터프라이즈가 포함된 함대를 지휘하던 마크 미처 제독이 파일럿을 구조하는 배에 아이스크림을 좀더 배급하겠다고 선언했었기 때문이다.
  • [19] 쓰시마 해전에서 도고 제독이 이 같은 훈시를 한 이래 태평양 전쟁에서도 주요 격전때 마다 이 같은 훈시가 있었다.
  • [20] 여담이지만 본 해전 당시 스프루언스가 일부러 정찰 범위를 축소했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 함대의 위치가 정확하게 파악되는 순간, 휘하 항모부대 지휘관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일본함대를 치러 가자고 들고 일어나는 걸 미연에 막고, 자신의 의도대로 전황을 끌고가려던 속셈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사실관계가 명확하지 않으므로 그저 참고만 하자.
  • [21] F6F 헬캣의 제조사인 그루먼사를 일본식으로 발음한 것이지만, 당시 일본군 조종사들이 미군 함재전투기들을 통칭하던 단어이기도 하다.

Valid XHTML 1.0! Valid CSS! powered by MoniWiki
last modified 2015-04-03 11:24:29
Processing time 0.2689 s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