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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제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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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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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Phillip Jaisohn[1]

흔히 개명전 이름인 서재필(徐載弼)로 알려져 있다. 1864.1.7 ~ 1951.1.5

조선 출신 미국인 의사이자 조선 말기 개화 운동가.[2][3]

독립신문을 만들고 독립협회를 만들었다.

조선개화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8.15 광복, 남북분단한국전쟁 시기를 모두 살았던 인물.

* 이 글의 대부분의 소스는 시사저널 1994년 기사에서 발굴되었다.

2. 생애

1864년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4] 가내마을에 있는 외가 성주이씨 집안에서 동복군수[5]광효[6]과 이씨 부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뒤이어 어렸을 때 아버지 서광효의 6촌 형제이자 그의 7촌 아저씨인 충청남도 논산시에 사는 서광하의 양자로 갔다. 서광하의 처가가 유명한 안동 김씨로, 양 외삼촌 김성근의 집에 갔다가 그의 친척 손자뻘 되는 김옥균을 만나면서 인생이 바뀌게 된다.

1879년에 임금이 친히 주관하는 전강에서 1등하고 1882년 별시문과에 합격, 서관 부정자, 련원 부봉사 등을 지내고 일본으로 유학, 1884년 토야마 소년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귀국했다. 이때 양어머니 김씨의 상을 당했지만 특별히, 신식 군대를 창설할 목적으로 설립된 병조예하 신식 군대 훈련소 조련국 사관장이 되어 생도들을 양성하다가 갑신정변에 참여한다.

갑신정변 당시 약관의 나이로 참여하다가 말 그대로 집안이 멸문지화를 겪는다[7] 그는 김옥균 등과 함께 인천으로 도망가 일본 상선에 오른다. 그러나 서재필 등을 인도하라는 고종의 요구에 다케조에 일본 공사가 이들을 내리라고 한다. 그러나 용기있는 일본 상선 선장의 거부로 다행히 목숨을 구하고[8]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서 1년간 생활하다가 미국으로 다시 건너간다.

후에 미국에서 시민권[9]을 취득하고 의사 면허를 얻어서 의사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인종차별의식이 팽배했던 미국에서 동양인 의사가 먹힐 리는 없고, 도서관 사서로 근무하던 도중에 당시 김홍집 4차 내각[10]에 있던 왕년의 동지 박영효가 서재필을 다시 부른다. 때문에 다시 조선을 문명화한다는 의식이 들었는지, 미국인 자격으로 귀국하여 조선 정부와 함께[11] 독립문 건립을 시작으로 하는 일련의 활동을 벌인다. 그리고 이것이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으로 이어졌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순 한글로 된 독립신문을 발행해 서민들도 문물을 접할 기회를 확대했다는 것. 그의 정치적 입장도 있었던 탓에 독립신문은 대부분 서민들이 많이 구독했다. 한글화에 도움을 준 인물이 국어학자 주시경. 당시 부책임자였다. 그의 자서전을 보면 독립신문 발행이 온전히 자신의 공로인 것처럼 되어 있고 국내 대부분의 교과서도 독립신문=서재필 공로, 라는 것이 거의 도식화되다시피 해 소개하고 있으나, 실상은 꽤 달랐다는 게 중론. 무엇보다 필립 제이슨은 신문 발행과 관련된 일을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다. 그가 독립신문에 관여한 것은 영문으로 발행되는 페이지의 논설을 작성한 정도가 아닐까 하고 생각되고 있다. 한편 그가 관직을 역임한 적도 없고 순수하게 나라를 위해 애국심으로 활동했다는 것도 논란의 소지가 있다. 중추원 관리로 추천되었고 귀국할 때는 당초 예정된 정부 관리로서의 봉급을 몽땅 챙겨서 떠났다.

더구나 그의 운동이 독립이라는 구호에도 불구하고 중국러시아를 견제하는 데에만 주력하고 미국일본 등의 이권 침탈에는 소극적이었다는 한계와 함께 그의 친일, 친미적 성향[12]과 맞물려 결점으로 지적받기도 한다.[13] 독립협회 출신에서 친일파가 나온 것이 가장 결정적인 이유로 추정된다.[14] 어떤 사료에는 심지어 일본과는 계속 친하게 지내야한다는 등의 발언도 했던 듯.[15]

하지만 독립협회의 활동이 점점 정치화되었고, 초기에는 나름대로 양호하였던 정부와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필립 제이슨은 미국으로 추방되게 된다. 하지만 독립협회 내부에서는 여전히 입지가 남아 있어서, 독립협회 인사들이 참여한 중추원 최초 의제에서 필립 제이슨을 각료로 추천하는 인물도 있었다[16].

미국으로 추방된 이후에는 조용히 미국인 의사로 지냈다. 2차 대전 연간에 인쇄업을 하다가 망한 이후 궁핍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승만식 편지보내기나 단파 라디오 방송 등의 최소한의 독립운동의 흔적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필립 제이슨을 독립운동가로 부르는 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라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독립운동 활동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였으며 미국에서 꾸준히 활동을 하였다. 다만, 그 방법이란 게... 한마디로 편지보내기 운동이다[17]. 이후 미 언론에도 꾸준히 기고활동을 했었으나 대공황으로 인한 보유주식 폭락으로 인한 실패와 그 이전의 사업의 실패등으로 인해 생활고에 시달렸고 대학 강사와 병원 의사를 하기도 했다.[18] 이와중에도 이상재, 안창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조선에 방문하기도 하였으며 서재필이 미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일제는 그를 구금할수가 없었다. 더불어 의사였기 때문에 진주만 공습 이후 조선의 독립을 예상하며 징병검사관으로 자원봉사했으며 1945년 1월 공로훈장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이승만의 경우는 미국에서 건너온 독립운동가라는 평판이 지배적[19]이며 이런 저런 루트를 통해서 일제 연간에 국내 미국 유학파 세력들에 충분히 어필했고 이것이 해방후 정치입지 구축에 나름대로 기여했다[20]고 보는 반면에 필립 제이슨의 경우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독립운동과 거리가 멀어진 것이다. 물론 가장 큰 원인은 20년대 이후 지속된 생활고로 인해 독립운동 지원이 힘들어 기고 활동에 머무를수 밖에 없었던 거지만.

한때 음모론자들 사이에서는 그가 저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가로 추앙받는 이유는 일명 조중동 언론들이 그를 추앙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돌았다. 흠좀무. [21] 뭐 그래도 확실히 개화운동도 하긴 했던 사람이라서 막 까기엔 좀 그런 사람이다.

8.15광복 이후 미군정에 의해 귀국해서 라디오 방송으로 연설을 영어로 방송했다고 한다. 남한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기도 하였으나 고령으로 거절. 게다가 아무래도 해외에 오래 거주한 터라 당연히 민중의 지지도 그다지 높지 못했다(…). 당시 기록을 보면 반 평생을 미국에서 산 미국인인 본인에게 왜 그런 일을 시키냐며 미군에 항의까지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정반대로 미국으로 쫓겨난 이후에는 그냥저냥 미국인 의사로 잘 먹고 잘 살았으나, 독립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 자리 하려고 귀국했었다는 설도 있다. 이때 미국과 누가 더 가깝고 정치 세력이 있는가의 대결에서 이승만에게 밀려서 다시 미국으로 밀려나갔다는 것이 주 내용. 두 이야기 중 어느 쪽을 취하건간에 좋은 소리 듣기는 어렵다.

그리고 백인여성과 결혼한 다음 미국에서 병원 차린게 잘 안 되니깐 다시 도로 한국으로 돌아와 버리는 만행(?)도 저질렀다.

1950년 9월 14일 병석에서 존 하지에게 보낸 서신이 남아있다. # 요약하자면, '자신이 한국인들로부터 건네받은 한국의 정치 및 경제적 상황에 대한, 치우치지 않은 정보'를 월터 스미스 장군 산하의 육군정보처에 제공하고 싶다는 내용.

네이버에서 필립 제이슨을 13일의 금요일의 살인마 제이슨으로 만든 사건은 두고두고 회자될 일이다. #관련 포스트

흔히 서재필 '박사'라고 많이 언급하지만 필립 제이슨은 박사 학위를 받은 적이 없다. 이는 사람들이 Dr. Jaisohn을 '의사 서재필'이 아닌 '박사 서재필'로 잘못 알아들었기 때문이다.[22]

분명 일제강점기의 전체를 미국인으로 조선의 독립 전선과 먼 곳에서 살아갔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필립 제이슨의 유해는 1994년 서울 국립현충원으로 환국되어 안장되었다. 이때 필립 제이슨의 영정을 운구한 외종증손 이상호 전 지방자치단체 국제화재단 이사장은 "나는 죽은 다음 '나쁜 놈, 더러운 놈' 소리 듣지 않아야겠다 생각했다"며 당시의 소회를 밝혔다. 관련기사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는 필립 제이슨 항목이 거의 전기문 수준으로 충실하게 구성되어 있는데, 리그베다 위키에 기록되지 않은 흑역사와 후빨 내용이 혼재되어 있다. 저쪽에서도 나름대로 수정전쟁이 치열한 모양.

유일한 박사가 1926년에 설립한 제약 회사인 유한양행의 버드나무 마크는 서재필이 만들었다고 한다. 유일한이 회사 설립을 위해 귀국하기 전에 만난 자리에서 서재필이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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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서재필'의 어순을 바꿔서 '필재서'로 만든 다음 영어화시켜서 필립 제이슨이 되었다. 성 표기가 특이해진 데에는 당시 그의 이름을 들은 미국인 기자들이 발음 나는 대로 적은 것이 변형된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덧붙여 남이 서재필이라고 부르면 언짢아했다고... 전 세계에서 이 사람 한 명만 갖고 있던 성씨였다.
  • [2]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개화운동가로 표기된 이유는 그의 행적이 독립운동가로 보기엔 이상한 부분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서재필을 애국자가 아니라, 단지 똑똑한 기회주의자였을 뿐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 [3] 의사학위가 아니라 간호사학위라는 설도 있다. 추가바람
  • [4] 그래서 용암삼거리 인근에 서재필기념공원이 있으며, 독립문 실사모형도 있다.
  • [5] 후일 나주군으로 편입되어 동복면이 된다. 현재는 화순군 동복면.
  • [6] 서광언이라고도 한다.
  • [7] 아내는 자살하고 아들은 굶어죽는다. 애초에 갑신정변이 반역죄로 처리되었기 때문에, 갑오개혁 이전 조선 법률체제로 처벌된다. 아내의 경우도 자살하지 않았다면 공노비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노비가 되는 것 정도만 간신히 면했을 것이다.
  • [8] 이 부분을 취소선 처리하는 것은 일본발 창작물 외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데 진실처럼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갑신정변 항목을 참고하면 알 수 있지만, 애초에 원본에는 일본 공사가 하나부사라고 통용되었는데, 실제로는 당시 공사가 다케조에 였기 때문에 이 공사명만 바뀌어서 기록된 것이다.
  • [9] 영주권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시민권이 정확하다. 이후 조선에 귀국한 이후에도 미국인의 자격으로 움직였고, 때문에 후에 사이가 틀어진 뒤의 조선 정부도 투옥 등을 하지 못하고 추방의 형태를 취한 것이다.
  • [10] 을미사변 이후라 친일내각이 들어선 이후였다.
  • [11] 이름을 피제손으로 활동한 이 시기에는 조선정부에서 월급까지 받았다. 그것도 선불로.
  • [12] 조선으로 돌아올 때도 필립 제이슨이라는 이름을 더 선호해서 한국계 미국인이나 다름없다는 말도 있다. 독립신문에서도 자신을 서재필이 아니라 필립 제이슨의 한역인 피제손이라고 적었다. 사실 본인은 한국에서의 연고가 전부 끊겨버린 탓에 본인은 미국인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한국에 와서도 모국어보다 영어를 즐겨 썼다고 한다. 이 때문에 90년대에 본격적으로 친미 매국노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심지어 한국어 대신에 영어를 쓰고 김치 대신 빵을 먹자는 소리까지 했다고 한다.어륀지 파동이 100년 앞섰습니다.
  • [13] '미국인'인 필립 제이슨이 미국을 비난하지 않은 것은 그렇다쳐도, 일본의 입장까지 두둔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더군다나 헐버트나 언더우드 같은 외국인도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선 출신 미국인으로서 역시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 [14] 갑신정변 이전 조선에게 있어선 일본보다는 청의 위협이 더 급박했다. 일본과 달리 청은 조선과의 조공책봉관계를 근대적인 속국관계로 전환하고자 수차례 시도했고, 원세개의 군대가 흥선 대원군을 포로로 잡아 끌고가는 등 실질적인 내정간섭까지 행해지고 있었다. 결과론적으로 이리를 잡기 위해 호랑이를 끌어들인 격이 되었지만 당시 개화파에게 일본이 청보다 위협적인 대상으로 인식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이는 필립을 비롯하여 급진 개화파가 갑신정변 이전부터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도 크다. 때문에 독립문 건립 자체를 친일화의 이유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이 역시 오해다. 독립협회가 독립문을 만든 것이 아니라, 독립문을 만든 조직이 독립협회로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당시는 아관파천으로 일본의 영향력이 상당히 감소되었던 시점이었다. 따라서 독립문 자체는 일본보다는 초기 구성세력인 고종을 비롯한 당시 정부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독립협회가 보이는 친일, 친미적 성향은 이후의 문제이다.
  • [15] 그러나 이건 당시 운동가들의 일반적인 생각이기도 했다. 이와 관련하여 황준헌(黃遵憲, 황쭌센)이 지은 <조선책략>과의 연관성을 보는 입장도 있는 것 같지만, 이는 오해에 가깝다. 조선책략은 일본의 영향력이 강해지던 시기에 지어졌고, 그 목표는 청의 대조선 영향력 확대, 조미 수교 추천에 있었다. 그리고 조선책략의 주장과 외교적 스탠스가 유사했던 대표적 친청파이자 온건개화파인 김홍집이 이를 고종에게 바치게 되는 것이다. 사실 핵심은 당시 조선의 국력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근대화를 위한 파트너 찾기 과정이었다고 봐야한다. 여기서 청, 러시아, 일본, 미국 등이 연계되는데, 자신이 연고가 있었던 국가와의 관계가 강조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앞서도 언급했지만 황준헌의 조선책략-갑신정변으로 이어지는 초기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의 대결 시기와, 청일전쟁 이후 을미사변 등으로 일본의 마각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삼국간섭아관파천 이후 영일동맹과 러일전쟁까지 동북아 정세가 극단의 대립으로 치닫고 있던 20세기 초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이 시기 정도 되면 친청파는 흔적도 없고, 친러파와 친일파는 한번 세력을 크게 떨치다가 소강상태이고, 친미파가 암약하는 정도의 상황이었다. 그중에서 독립협회는 친일-친미 쪽으로 틀을 잡고 있었다.
  • [16] 중추원에는 관료 추천권이 없었지만, 최초의 의제가 새로운 관료를 추천하는 것이었고 여기서 박영효, 필립 제이슨 등 당시 조선 정부가 학을 떼던 인물들이 여럿 선출된다. 그리고 이는 중추원과 독립협회가 해산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 [17] 외교론의 입장이었던 이런 활동은 이 시기에 굉장히 많다. 물론 아무런 성과도 없었고. 전시기도 아니고, 일정시기 이정도 활동으로 독립운동가로 강조하는 것은 상당한 무리수인 것도 사실이다.
  • [18] 이 과정에서 병리학 전문의에 응시하여 한국인 최초의 미국 병리학자 및 의사가 되었다.
  • [19] 이승만은 독립협회 시절에 최전방 소속 활동가로 움직이다가 결국 반란혐의에 휘말리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 유학 이후 입지를 크게 쌓고,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과의 개인적 인맥도 더해져서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을 지내는 등 거물급 인사들에게서는 인지도가 높았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활약도 업적도 없으니 결국 인지도가 바닥을 기게 된다.
  • [20] 최대 이유야 영어, 친미파, 반공산주의, 미국 유학 경험 등을 배경으로 미국과의 연결고리를 가진 적어도 친일경력은 없는 인물이라는 점 덕분이지만.
  • [21] 사실 조선일보의 기획기사 현대사 인물 재평가 시리즈의 두번째 인물이었다. 첫번째는 이승만이었고.
  • [22] 만약 박사 서재필이었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박사학위자가 되었을것이다. 참고로 최초의 박사학위 취득자는 이승만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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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2-21 22:5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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