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D R , A S I H C RSS

하멜 표류기

last modified: 2015-03-31 01:11:13 by Contributors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선박 선원이었던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이 1653년 상선을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도중 난파되어 제주도에 표류하고 조선에서 13년 동안이나 억류되어 있다가 우여곡절 끝에 일본으로 탈출하여 1668년 네덜란드로 귀국하기까지의 개고생여정을 기록한 책. 전문은 여기서 볼 수 있다. 보러가기

17세기 조선의 생활상을 세세하게 기록한 최초의 유럽 서적으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원래는 억류되어 있는 동안 밀려있던 임금을 받아내기 위해 동인도회사에 제출한 일종의 보고서이고, 때문에 자신들이 고생한 부분을 과장했다는 평도 존재한다.

처음에는 한양까지 불러와서 벼슬도 시켜주고 나름대로 잘 대해줬지만 하멜 일행중 두사람이 청나라 사신들에게 달려들어 집으로 보내달라고 난동을 부리는 사건으로 일행 전원의 목숨까지 위태로워졌다가 귀양으로 끝났다.[1] 게다가 하멜이 13년 동안 억류되어 있다가 탈출할 때까지 조선 조정은 그들이 남만인인[2] 줄 알고있었다가 나중에 하멜을 심문했던 일본측의 통보를 받고서야 네덜란드인인 줄 알았다고 한다... 일본 에도 막부는 하멜에게서 조선의 상황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은 다음 이를 무기로 조선을 외교적으로 압박했다.

여담이지만 고향 말조차 거의 잊고 조정에서도 불려다닐 정도로 자리잡은 벨테브레이(박연)와 길거리에서 끌려다니면서 거의 신기한 '생물' 수준의 구경거리가 되는 하멜 일행의 모습이 참 대조적이다. 헌데 박연은 "여기 들어온 이상 나갈 생각 말아라."라는 식으로 말하니... 조선에 들어온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사실 하멜 일행도 몇 번씩 탈출 시도를 하고 몇 번씩 또 실패하면서 탈출에 성공했다. 중국 사신이 오는 것을 알고 길막한 뒤 단체로 호소를 하거나, 아는 어부를 회유해 배를 구입하거나...

그렇다고 섣불리 일본으로 보내줄 수도 없는 것이 효종은 북벌을 추진 중이었는데 당시 청나라는 조선에 대해 빠삭하게 꿰고 있었고 효종은 가뜩이나 약점이 잔뜩 잡힌 판국에 또 조선 사정을 알게 된 외국인이 들어왔으니 유용하게 부려먹을지언정 내보낼 수는 없다고 판단했었고[3] 거기에 더해 당시 일본으로 인도한 청나라 사람, 대만 사람, 유구국 사람들이 기독교도라고 마구 참수되는 일이 적잖았는데 하멜 일행은 자신들이 모두 기리시단이라고 일본말로 진술한 바가 있어 조선에서는 얘들 보냈다간 다 죽는다면서 잡아두자고도 했다. 실제로 하멜이 데지마로 간 이후 그가 기독교도인지 아닌지를 일본은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런데 자신이 기독교에 관심이 없다고 해서 풀려났는지 가톨릭이 아니라 개신교라고 해서 풀려났는지는 가 바람

학계에서는 하멜 표류기가 서구 중심적이며 조선에서 잘해줬는데도 악담을 늘어놓았다고 비판하는 학자들도 있다. 다만 하멜이 서양인이니 당연히 서구 중심적으로 서술할 수밖에 없고, 조선이 하멜에게 대우한 것도 피장파장이라고 생각해야 할듯. 실제로 대우가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다. 첫 탈출 실패 이전의 대접은 융숭했긴했지만 억지로 잡혔으니 벗어나고 싶은건 이상할게 아니다. 그리고 무조건 욕한 것도 아니다. 하멜 표류기를 읽어보면 내용이 상당히 객관적이지 '저 더러운 야만인 이교도들이 우릴 괴롭혔어염.' 하면서 징징대는 구절은 없어서 일부 학자들은 '이 인간은 피도 눈물도 없나? 십수년간 고생한 얘기를 쓰면서 뭐 이리 밋밋해?' 라면서 마치 영수증을 보는 것 같다라고 평하기도 했다사실 밀린임금 타내려는 보고서니 영수증맞다. 오히려 '내가 이 이교도들에게 받은 대접은 어떤 기독교도에게 받은 대접보다 좋았다'라는 구절이라든지 조선인들은 정이 많다는 식으로 긍정적으로 평한 부분도 많고 자신들에게 호의적으로 접근하여 같이 교류한 승려들이나 전라수사 이도빈, 제주목사 이원진 등의 경우에는 매우 긍정적이고 호의적으로 서술했다. 뭐 자신들 좋게 봐준 사람을 나쁘게 써서 뭐하려만은.... 그리고 한가지 재밌는 사실은 하멜이 좋게 서술한 수사들은 대개 조정에서 공이 크다면서 서울로 불러 높은 벼슬을 좋고 하멜이 깐 수사들이나 병사들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무능하고 탐욕한 탐관오리라고 역시 디스를 해서 그의 사람보는 안목도 제법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처음 상륙한 곳이 제주도라서 제주도에는 아예 그 지역에 큰 범선형태의 건물을 만들어 그걸 기념하고 있다.

아래는 실록의 관련 기사.

제주 목사(濟州牧使) 이원진(李元鎭)이 치계(馳啓)하기를,
“배 한 척이 고을 남쪽에서 깨져 해안에 닿았기에 대정 현감(大靜縣監) 권극중(權克中)과 판관(判官) 노정(盧錠)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보게 하였더니,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뒤집혀 살아 남은 자는 38인이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릅니다. 배 안에는 약재(藥材)·녹비(鹿皮) 따위 물건을 많이 실었는데 목향(木香) 94포(包), 용뇌(龍腦) 4항(缸), 녹비 2만 7천이었습니다. 파란 눈에 코가 높고 노란 머리에 수염이 짧았는데, 혹 구레나룻은 깎고 콧수염을 남긴 자도 있었습니다. 그 옷은 길어서 넓적다리까지 내려오고 옷자락이 넷으로 갈라졌으며 옷깃 옆과 소매 밑에 다 이어 묶는 끈이 있었으며 바지는 주름이 잡혀 치마 같았습니다. 왜어(倭語)를 아는 자를 시켜 묻기를 ‘너희는 서양의 크리스챤〔吉利是段〕인가?’하니, 다들 ‘야야(耶耶)’ 하였고[4], 우리 나라를 가리켜 물으니 고려(高麗)라 하고, 본도(本島)를 가리켜 물으니 오질도(吾叱島)라 하고, 중원(中原)을 가리켜 물으니 혹 대명(大明)이라고도 하고 대방(大邦)이라고도 하였으며, 서북(西北)을 가리켜 물으니 달단(韃靼)이라 하고, 정동(正東)을 가리켜 물으니 일본(日本)이라고도 하고 낭가삭기(郞可朔其)라고도 하였는데, 이어서 가려는 곳을 물으니 낭가삭기[5]라 하였습니다.”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서울로 올려보내라고 명하였다. 전에 온 남만인(南蠻人) 박연(朴燕)이라는 자가 보고 ‘과연 만인(蠻人)이다.’하였으므로 드디어 금려(禁旅)에 편입하였는데, 대개 그 사람들은 화포(火砲)를 잘 다루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에는 코로 퉁소를 부는 자도 있었고 발을 흔들며 춤추는 자도 있었다.
- 효종실록(1653년 기록)


이말년씨리즈에서 맛깔나게 패러디했다. 보러가기 믿고 보는 이말년
----
  • [1] 여담으로 전 항목에는 단순히 가뭄이 들어서 귀양보내 부려먹었다고 되어 있었는데 그렇게 됐다면 벨테브레이나 수많은 명나라 귀순 병사들은 왜 남겨두고 얘들만 보냈겠나?
  • [2] 즉 그냥 이런 하얀놈들 사는 어떤 동네. 그들도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이딴 식으로 국가를 세웠다는 사실 자체는 아예 모르고 얘들은 남만인 중에서도 화란인이다 라는 일본의 통보를 받고서야 그런 나라도 있구나 했다.
  • [3] 정작 다른 왕 때 들어온 미국인들의 경우에는 그냥 청나라로 보내버렸다.
  • [4] ja는 네덜란드어로 '그렇다'는 뜻
  • [5] 당시 나가사키에는 일본에서 몇안되게 외국인의 체류가 인정된 데지마가 있었다.
Valid XHTML 1.0! Valid CSS! powered by MoniWiki
last modified 2015-03-31 01:11:13
Processing time 0.0654 s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