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
대한민국의 가수로 원로급 가수이다.
1955년 6월 28일생. 하춘화가 대단한 이유는 데뷔를 6살 때인 1961년에 한 탓에 2015년 기준으로 나이는 60살인데 가수 경력은 54년이라는 점이다. 이는 조르디가 4살때 가수로 데뷔하기까지 최연소 가수기록이기도 하다. 참고로 하춘화가 데뷔한 해는 박정희가 대통령에 오른 그 해이다. 처음 데뷔했을 때 엄청난 인기를 모으고 있었고 엘자 렁히니나 다코타 패닝 저리가라 급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다만 엘자 렁히니와의 차이점은 어른이 되어서 인기가 죽어버린 엘자 렁히니와는 달리 하춘화는 늙어가도록 인기가 변함이 없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가요계에서 남자 가수로서 레전드가 조용필이라면 여자 가수로서 레전드는 하춘화였던 것이다.
2. 생애 ¶
하춘화의 재능을 알아본 하춘화의 아버지는 그녀를 서울 동아예술학원에 다니게 했고 거기서 8개월 동안 노래를 배우게 한 뒤 가수로 데뷔시켰다. 이후 1966년 '아빠는 마도로스'라는 노래를 발표해 크게 성공하면서 하춘화의 인지도가 생기기 시작했다. 음반은 1971년에 처음으로 냈는데 이 음반의 노래인 '물새 한마리'가 히트하면서 꽤 많이 팔렸고 1972년 작곡가 고봉산과 '잘했군 잘했어'를 듀엣으로 불러서 이걸로 TBC에서 4년 연속 여자가수상을 수상해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선배 가수였던 이미자, 패티김, 김상희, 문주란과 함께 대한민국 대표 정상급 여가수로 성장했다.
하춘화는 성격이 굉장히 대인배였는데 보통 어린 나이에 이 정도로 성공하면 안하무인인 경우가 많았지만 하춘화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오히려 너무 못생겼다는 이유로 소외받고 있던 당시 기준으로 무명 코미디언이었던 이주일을 보더니 자신의 공연에 "이 사람이 아니면 내 공연의 사회자를 시킬 수가 없다. 꼭 이주일이어야만 한다."라고 말하며 이주일을 자신과 같이 일하게 했다. 훗날 이주일은 이런 하춘화를 대단히 고마워하며 "길거리에 나앉을 수 밖에 없었던 내가 하춘화 덕분에 우리집을 샀다"고 말하며 하춘화를 평생의 은인으로 여기며 존경했다.
하지만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가 발생하고 하춘화는 하마터면 죽을뻔했는데 이 때 이주일이 하춘화를 업고 뛰어서 하춘화는 무사했다. 이 때의 충격 탓인지 하춘화는 그로부터 2년 후인 1979년에 돌연 학업 및 결혼준비를 이유로 경남대학교에 입학한 뒤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1981년에 다시 가수로 복귀해서 '우리 사랑 가슴으로', '연인의 부르스' 등의 노래를 히트시켰으며 1983년에는 자신이 아끼는 무대의상 150벌을 후배 가수들에게 나눠줬다. 1985년에는 남북 예술인 교환공연으로 대한민국과 북한에서 각각 최고의 가수들을 상대방에게 파견하여 공연을 하기로 했는데 이 때 하춘화가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 자격으로 평양에 가서 3박 4일 동안 공연을 했다.
1989년에는 '날 버린 남자'가 국민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며 다시 각광받기 시작하고 1991년에 총공연 횟수 8,000회를 기록하였고 최다 개인 공연으로 기네스북에 등록되었다. 이후 하춘화는 2002년에 댄스 리듬의 트로트'연하의 남자'를 부르면서 자신만의 댄스 실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로서 하춘화는 댄스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음을 증명했다. 학업을 위해 잠시 은퇴하기도 했으나 2007년에 다시 복귀하여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