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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토야마 유키오

last modified: 2015-03-31 18:21:23 by Contributors

역대 일본 총리
92대 93대 94대
아소 다로 하토야마 유키오 간 나오토



鳩山由紀夫
구산유기부

1947.02.11~

일본의 정치인이자 93대 일본 총리.

재임 2009.09.16~2010.06.02

Contents

1. 정계 입문 이전
2. 정계 입문 이후
3. 총리 취임 이후
4. 독도 발언에 관하여
5. 가계
6. 기타
7. 관련 사이트

1. 정계 입문 이전

1947년 2월 11일, 재무 관료인 부친 하토야마 이이치로(鳩山威一郎)와 모친 야스코의 장남으로 도쿄 도 분쿄 구 오토하의 하토야마 가 저택에서 출생(현, 하토야마 회관). 가쿠슈인(学習院)초등과, 중등과, 도쿄 도립 코이시카와 고등학교를 거쳐 쿄 대학 공학부 응용물리/계수공학과를 졸업, 이후 스탠퍼드 대학 박사과정을 거쳐, 1976년에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해 도쿄 공업 대학 조수, 1981년에 센슈 대학 조교수로 취임하였으나, 1984년에 정계 입문을 이유로 퇴직하였다.

1975년 동반자이자 세살 연상인 하토야마 미유키와 결혼했다. 다카라즈카 가극단 배우이던 미유키는 20대에 미국으로 을 공부하기 위해 건너가, 당시 전 남편과 이혼하고 스탠포드 박사였던 그와 결혼했다고.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근데 사실 그도 재혼이다. 유키오의 어머니가 아들 혼사를 위해서 며느리인 미유키의 전 남편에게 죄송하다고 사죄하며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고 한다. 불효자놈어쨌든 유키오가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유부녀였기 때문에...


결혼 당시 사진. 발랄하다 # 패러디도 당했다

2. 정계 입문 이후

이후 자민당에 입당, 다나카 파의 신인으로서, 1986년의 제 38회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가문의 지반이 있는 홋카이도에서 출마, 지역구 내 득표율 2위의 성적으로 당선되었다. 당시는 중대선거구제였다. 1988년에는 '유토피아 정치 연구회' 라는 초파벌적 정치집단을 결성, 쿠르트 뇌물수수 사건 등의 당내 비리를 폭로하였고, 이 집단은 '신당 사키가케(新党さきがけ)'로 이어졌다.

1993년에는 정계 개혁의 소용돌이 가운데 자민당을 탈당, 당 사키가케의 창당에 관여하였고, 55년 체제의 붕괴와 함께 등장한 호소카와 내각에서는 내각 관방 정무부장관을 담당하였다. 이후 성립된 자사사(自社さ) 연립정권 하에서는 사키가케의 간사장을 맡았다. 1996년에는 사키가케를 일신하여 새로이 창당하고자 하였으나 실패, 그 해 여음에 간 나오토, 동생 쿠니오 등과 함께 구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1999년의 당 대표 선거에서 승리하며 당수가 되었으나, 2002년 총선거에서 자민당에게 참패를 당하며 당 대표를 사직하였다. 그러나 대표 사직 후에도 당내 최대 파벌인 하토야마 그룹의 대표로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2007년의 참의원 선거의 대승 이후에도 사장 직을 유지하였으나, 2009년 5월에 오자와 이치로가 대표직을 사임하면서 열린 대표 선거에서 오카다 카츠야를 꺾고 승리, 7년여만에 당수로 돌아왔다.



2009년 8월 30일의 제45회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단독 정당으로서는 사상 최다 의석인 308석을 기록하면서 대승, 9월 16일에는 중참 양원의 지명으로 제93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였다.

3. 총리 취임 이후

총리 취임 이후에는 선거 전에 내건 공약의 이행을 놓고 자민당 등과 대립, 연립정당인 사민당, 국민신당 등과도 마찰을 빚고 있다. 주요 공약은 아동수당, 고속도로 무료화, 오키나와 현의 미군 후텐마(普天間)기지 이전 등인데, 이 중 미군기지 이전 문제로 인해 미국의 심기를 자극, 대미관계에 먹구름을 드리우는 주범이 되었다. 5월 말까지 이전지를 확정짓지 못하면 총리직을 사임하기로. 이외에도 전 비서의 정치자금 비리 등으로 야당의 공격을 받았고, 스스로도 이것을 취임 때부터 우려하고 있었다고.

기본적으로 큰 정부의 복지수준을 주장하는 데 비해, 선거를 이유로 증세에는 반대하는 성향을 보이고 있었다. 오자와가 쇼군이고 바지사장에 불과하다는 관측도 있었다.

자신의 정치, 외교에 "우애"를 강조하면서 나름대로 동아시아 자유주의 정당에서 새로운 화두를 제시하나 싶었지만... 용두사미.

결국 일본 사회민주당이 후타마 기지 문제로 에서 사퇴하자 7월 참의원 선거의 패배를 막기 위해 2010년 6월 2일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오자와 간사장도 함께 사임했으며, 후임은 간 나오토 부대표. 잠깐 그날 한국은 제5회 지방선거를 치르지 않았나?


키가 꽤 크다. 177cm로 역대 총리 3위. 1위는 오쿠마 시게노부(180cm), 2위는 나카소네 야스히로(178cm), 그 외 아베 신조가 175cm.. 이런 식이다. 특유의 발랄한(?) 패션 센스와 아내로 유명하다. 미유키(幸) 여사는 역대 일본 총리 부인과 달리 적극적인 자기 표현과 대외 활동으로 하토야마 총리 못지 않게 주목 받았다. 퇴임도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했다고. 한류에도 많은 호감을 표시했고, 특유의 멋진 패션으로 남편과 천지차이여서 나름 인기를 끌었지만 안 되었다.

인터넷에서는 낮은 지지도, 자주 사용하는 우애라는 표현의 기묘한 어감, 총리 자체의 전파계이미지와 겹쳐 20세기 소년친구에 자주 비유되곤 한다.

4. 독도 발언에 관하여

소위 하토야마의 독도 망언으로 보도된 일련의 사건은, 2010년 4월 8일의 중의원 외교위원회에서 오카다 카츠야 외무대신이 "불필요한 마찰을 부르지 않고록 하고 싶다. 그 단어(불법 점거)는 사용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교섭하고 있다." 고 발언한 것이 그 발단으로, 하토야마 본인은 그날 저녁의 기자회견에서 "우리의 생각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약간의 답변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본인 또는 정부의 생각을 바꿀 뜻은 결코 없다." 고 답변하였다. 결국은 표기의 문제로, 일본 정부가 일관되게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해온 것을 감안하면, 이를 '망언'이라 보도한 것은 과장이라 할 수 있다.

5. 가계

본래 하토야마 가는 미마사카 국 카츠야마 번 출신으로 고조부인 하토야마 히로후사鳩山博房는 에도의 관료였다.


鳩山和夫 1856.05.06~1911.10.03

증조부인 하토야마 카즈오는 1856년 에도에서 출생, 1875년에 카이세이 학교(후의 도쿄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 미국으로 유학, 컬럼비아 대학에서 법학사 학위를, 예일 대학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오쿠마 시게노부가 총장이었던 와세다 대학의 제3대 교장을 지내기도 했다. 1885년에는 외무성에 입성, 1894년에는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고, 96년에 중의원 의장을 역임하였다. 이후에는 홋카이도 개척에 관여하여 하토야마 가의 지반을 닦았다(정사위 훈삼등).


鳩山春子 1861.05.02~1938.07.12
증조모인 하토야마 하루코는 메이지 시대의 대표적인 기독교인 교육가의 한 사람으로 와타나베 번주의 장녀로 태어난다. 이후 공립여자대학을 세우고 초대 학장이 되며, 이어 며느리인 카오루가 이어받는다.


鳩山一郎 1883.01.01~1959.03.07
조부 하토야마 이치로

타임지 모델에도 선정되었었다!
조부인 하토야마 이치로는 1883년에 카즈오의 장남으로 출생, 1908년에 도쿄 대학 영법과를 졸업한 이후, 1915년에 국회 입성, 이누카이 내각에서 문부대신을 역임하는 등 전전부터 정계의 거물로 활동, 전후에는 일본민주당을 결성하였고, 1954년 총리 대신이 되어 자민당을 결성하고 55년 체제를 이뤄냈다. 총리직 사임 이후에는 자민당 결성에도 관여하였다(15선, 정이위 대훈위). 즉 할아버지가 열은 자민당 일당 독재를 손자가 완전히 끝장냈다...라고 볼 수 있겠다.


鳩山薫 1888.11.21~1982.08.15
조모인 하토야마 카오루는 스즈키 공가의 공녀로 공립여자대학 원장으로 재직한다.

© from

鳩山威一郎 1918.11.11~1993.12.19 (순서대로 유키오, 이치로, 쿠니오)
부친인 하토야마 이이치로는 1918년에 도쿄에서 출생, 1941년에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수석으로 졸업 이후 대장성(大蔵省)에 입성(入省)하였다. 이후 착실하게 승진하여 1971년에는 일본 관료 사회의 정점인 대장성 사무차관에 임명되었다. 1974년에는 중의원 의원으로 처음 당선, 76년의 후쿠다 타케오 내각에서는, 초선 의원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외무대신에 임명되었다(3선, 정삼위 훈일등).


鳩山安子 1922.09.11~2013.02.11
모친인 하토야마 야스코 또한 브리짓 스톤 창업주 이시바시 쇼지로의 장녀. 현재 브리짓 스톤의 주식 1200만주를 보유하고 있으며 현 시가 170억엔에 이른다고 한다.

홋카이도 선거구에 나왔을 때 하토야마는 게이샤와의 스캔들에 휘달려 낙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 때 미유키 여사가 "스캔들이 사실이라면 남편이 얼마나 외로워서 그랬을까. 참 불쌍하다"라면서 공개적으로 남편을 두둔하여(...) 위험에서 벗어났는데, 사실은 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시킨거였다.

또 하나의 일화로는 주택공사 관련 스캔들로 자민당과 정국이 시끄러워지자 당시 둘 다 중의원이었던 유키오 쿠니오 두 형제에게 당장 전화를 걸어 "중의원 를 떼어버려라!"라고 호통쳤다. 결국 이런 조언이 자민당 탈당의 계기가 되었다나.

그래서 당선 당시에는 어머니의 수렴청정까지 거론되었으나 결과는 보시는대로. 1996년 아들 형제가 민주당을 창당했을 때에는 수십억 원의 자금을 용돈에서 준비. 이것은 후에 정당 보조금 에서 전액 회수했다. 강인한 어머니다.

2013년 2월 11일 별세했다.


鳩山邦夫 1948.09.13~
동생인 하토야마 쿠니오는 1948년 9월에 도쿄 도에서 출생, 도쿄 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 후, 형과는 달리 정계 입문을 강하게 희망하였다. 이후 자진해서 다나카 가쿠에이의 비서로 정계 입문, 1976년에 도쿄 8구에서 처음으로 당선된 이래 11선 연속으로 당선되었고, 대신직을 5번 역임하였다(총무, 내각부 특명 담당, 법무, 노동, 문부). 법무대신 적극적인 사형집행 찬성론자로 死神사신 이라는 위명을 떨쳤다.

6. 기타

2012년 4월 이란 방문으로 일본 정계를 발칵 뒤집었다. 미국이 이란의 핵개발 문제로 인해 이란에 강력한 무역제제를 가하고 주변국들에게도 동참할 것을 요구하는 가운데 일본의 전 총리였던 하토야마가 "이대로 전쟁 분위기로 가는 것은 좋지 않다. 내가 직접 아마디네자드 대통령 등을 만나 이야기를 해보겠다."며 이란 방문을 감행한 것. 미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일본의 입장에서 하토야마의 이런 돌출 행동은 외교적으로는 큰 악재일 수밖에 없다. 의원이 가도 외교적으로 말이 많을 정도로 민가한 사안인데 하토야마는 어쨌든 전임 총리이니 무게감이 다르다.

그리고 역시나 모두의 예상대로 이란에서 시원하게 사고를 쳤다. 이란이 하토야마가 "IAEA가 불공정한 잣대를 들이댄다."며 옹호성 발언을 했다는 것. 하토야마 본인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고 곧바로 해명을 했지만 애당초 저렇게 이용당할 가능성이 누가 봐도 뻔한데 간 게 문제다. 자민당은 물론 민주당도 신나게 까고 있는 상황.

오자와 이치로와 마찬가지로 소비세 증세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결국 소비세 증세안이 통과되자 오자와는 자신의 계파를 이끌고 탈당하여 신당을 차린 상황. 이런 가운데 하토야마도 자신의 계파를 이끌고 탈당해 신당을 창당할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하토야마가 주도하고 있는 "소비세 연구회" 소속 중의원이 30명이기 때문에 이들중 16명 이상만 탈당해도 민주당의 중의원 과반이 붕괴되는 상황. 다만 하토야마측은 "나는 당내에서 일하겠다"라면서 탈당 및 신당창당을 강력부인하고 있는 상황.

세간의 소문과는 달리 결국 민주당에 잔류했으나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에 임한 노다 총리가 TPP에 찬성해야 공천을 주겠다는 방침을 천명하자 이를 반대했고 결국 공천을 받지 못했다. 하토야마는 탈당해서 무소속 출마를 강행할수도 있었으나 결국 출마를 포기하는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사실상 정계은퇴를 선언한 셈이다.

2013년 1월 17일 중국 내 학술단체의 초청 형식으로 중국을 방문했는데, 일본이 책임 인정을 꺼려하는 난징대학살 추모 박물관을 방문했다. 여기에 중국과의 영유권 갈등이 강화되고 있는 센카쿠 열도(중국명 다오위댜오)에 문제에 대해 "분쟁지역임을 인정할 필요 있다"고 언급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일본의 전임 총리가 한 발언이라는 점에서 일본 내에서는 대단한 충격으로 받아들이고있다. 한국으로 치자면 전직 대통령이 '독도는 분쟁지역 맞다'고 발언한 것과 다름없는 사건이다. 영유권 분쟁에서는 보통 실효지배 중인 측에서 분쟁의 존재를 부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자칫 영유권의 변경 내지 타협 가능성을 인정하는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 실제로 발언 직후 일본 방위상이 '역적'이라고 강도높게 비판했다.


(괴뢰정권이라 불릴 생각은 없어...)
뒤엔 중국

2015년 3월 10일 크림반도에 직접 가서 문제가 되었다. 일본정부는 러시아의 크림 합병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서방과 함께 러시아 제재를 하고있기때문이다. 거기서 하오야마는 "이번 방문 동안 크림반도의 실제 상태는 제가 일본에서 보고 들어왔던 것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라는 발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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